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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3일 토요일 맑음
출근하는 날도 아닌데 6시 반에 집을 나섰다. 옛 단대 건물이 바라보이는 맞은편에서 엘리트 관광버스에 승차하였다. 예정 보다 10분 늦게 7시 10분에 버스가 출발하여 한강을 어렵잖게 건너섰다. 강남, 양재, 죽전, 신갈 등지에서 몇 명이 더 승차하였다. 총 32명이라고 한다.
단국대학교 산악회를 따라 나선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한번은 작년 속리산에 갈 때로 그때 같이 참석하여 좋은 추억이 된 바 있었다. 김윤우 선생(동양학연구소)이 산악회에 고문으로 있어 그 인연으로 회원이 아니면서도 합류할 수 있었다.
9시 20분쯤 천안논산고속도로로 진입을 하는가 싶더니 잠시 후 멈추어 섰다. 여산휴게소라고 한다. 작은 집(화장실)에 잠시 들러 생리현상을 해결하고 300원짜리 자판기 커피로 목을 달랬다. 지난 번 모임 때 김윤우 선생을 버린 채 버스가 떠나간 게 생각나 늦지 않도록 버스로 들어와 몸을 부린다.
도란도란 주변 좌석에서 들려오는 이야기 소리를 넘겨들으며 준비한 책을 몇 장 넘기다 가끔 창밖으로 눈을 던져 본다. 스쳐가는 차창 가에는 산과 물이 교차되며 모습을 드러내고 밭일하는 아낙의 모습이 정겹게 다가오는가 하면 물 댄 논에는 흰 두루미가 우아한 자태로 느릿느릿 배회하고 있었다.
10시 42분. 광주톨게이트가 시야에 들어온다. 빛고을 광주(光州). 혹 언젠가 지나쳤는지 모르겠지만 왠지 내게 광주는 처음이 아닌가 싶다. 문화의 고장으로 일컬어지지만 내게 있어 광주는 80년 봄의 악몽을 먼저 기억하게 한다. 또 계절이 바로 이 맘 때가 아니던가. 누구의 잘못을 논하기에 앞서 동족상잔의 현장, 과연 28년 전 이곳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처음 지나치게 되는 광주 땅은 이렇듯 설렘과 착잡한 마음이 교차하는 가운데 지나치게 되었다.
광주의 경계를 넘어서니 화순(和順)이라고 한다. 화순이라면 바로 옛 능성(綾城) 땅이 아니던가? 조선시대에 능성구씨가 무인 가계로써 이름을 떨치기도 했지만 역시 내게는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선생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중종(中宗)이 반정 세력에 엎여 왕이 된 후 불과 1주일 만에 조강지처 단경 왕후 신씨와 생이별을 해야 했다. 반정 공신들이 늙거나 죽어 그 세력이 약화될 무렵 조광조 ․, 김식 등 젊고 재기발랄한 신진 사림들을 등용하여 개혁정치를 실시하였고... 그러나 위훈삭제사건을 계기로 결국 조광조 등은 자신들이 그렇게 믿어마지 아니하였던 중종에 의해 실각하고 말았다. 물론 훈구파의 갖은 중상모략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들에게는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너무 개혁이 급진적이라 속도 조절을 해보려고도 했지만 결국 운동 방향은 처음과 달리 갈수록 격화되기에 이르렀고,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한 훈구 세력을 감당하기에 그들은 너무 문약했던 탓이리라.
중종을 요순과 같은 임금으로 만들려다 실패하여 이곳 화순(능성)으로 유배되었다가 결국 독배를 마시고 사사의 운명에 처해진 정암 조광조. 정암 선생과 관련이 있는 용인 심곡서원에 잠시 들렀던 옛날 생각도 하면서 이렇게 화순은 내게 다가왔다. 화순 출신인 연구소의 김재열 선생이 같이 계셨더라면 정암 선생의 유적과 관련하여 몇 가지 이야기라도 들었으련만...
화순에 들어선지 얼마 안 되어 철쭉이 우리를 반갑게 맞았다. 버스가 구부정한 길을 굽이굽이 돌아가는 언덕바지에 식생한 철쭉들이 서로 화려함을 다투며 만개하였다. 개중에는 이미 제 몫을 다하고 시들어가는 모습도 더러 눈에 띄었다. 연신 차창 밖을 내다보며 이를 땀 흘려 가꾸었을 군민들의 정성을 떠올려 보게 된다.
초행길이라 잠시 차를 세워야 할 곳을 헷갈려하기도 했지만 11시 45분 모두 차에서 내려 마침내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는 무등산을 등정하기로 하였지만 철쭉을 감상하기 위하여 일부러 안양산 코스를 포함시켰다. 안양산 휴양림 입구에는 마침 화순군청에서 나와 철쭉제 행사를 하고 있었다. 화장실에 잠깐 들르기도 하고 축제 마당을 지나치며 쑥떡은 물론이요, 토종 된장을 오이에 듬뿍 찍어 입을 오물거려도 본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산행하는 사이 바위에 걸터앉아 다리쉼도 하고, 좀 더운 기가 느껴짐에 아예 위의 겉옷은 벗어 배낭에 둘러맸다. 쉴 때는 누군가의 배낭에서인가 오이며 방울토마토가 튀어나와 손과 손으로 전달되었다. 짐을 줄일 요량이면 그것도 선수를 쳐야 했다. 뒤늦게 내놓았다간 퉁을 맡기 십상이고 다시 배낭에 집어넣자니 뒤통수가 근질거리게 마련이다. 이참에 물병이라도 빼들어 시원하게 한잔 하는 것이 그나마 제격일 것이었다.
산행을 하다 보면 하산하는 사람도 만나게 마련이다. 두엇이 내려오며 주고받는 말이 들려온다. 누군가 땀이 난다고 하자 한 사람이 대꾸한다. 땀 흘리는 게 정상이란다. 으잉, 그러면 지금 벌써 나는 정상에 도착했단 말인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간 이내 제 힘을 못 견디고 주르르 흘러내린다.
오늘 정상에서의 점심 메뉴는 비빔밥이란다. 그래서 남자 분들은 2~3인분 정도의 맨밥을 준비했고, 여성분들은 고추장이며, 기름, 김치, 채소 따위를 장만하였다. 30여 명의 밥을 준비하자면 큰 양푼이 필요한 법. 세숫대야 같은 다라라고 할까 그것이 두 개나 준비 되었다. 김재순 선생(음악대학 교학지원과)이 준비해온 모양인데 차에서 내릴 때 가지고 내리는 사람이 없어 내가 들고 내리다 보니 자연 내 몫이 되었다. 손으로 들고 가기에는 부담스러워 김윤우 선생의 도움을 받아 떨어지지 않을 만큼 배낭에 비끄러맸다. 지나던 아주머니들이 웬 다라를 지고 가느냐고 묻는 눈치다. 어떻게 다라 인줄 알았을까? 아마 배낭에 달아(다라)매고 가고 있어서 알았나? 어쨌든 김재천 선생(관재과)이 비빔밥을 해먹기 위함이라고 그 용도를 친절히 설명해주는 말이 뒷전으로 들려온다.
산길을 치고 올라가다 보니 마침내 능선이 드러난다(12 : 40). 듬성듬성 있던 철쭉이 예선 뭉텅이로 나있다. 형태로 보아 자생적 군락지는 아닌 듯싶었다. 자연스럽기엔 철쭉이 길 좌우편으로만 몰려 피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인공을 가했다고 해서 그것이 무어 대수냐 싶었다. 눈앞에 길고 더부룩이 피어 있는 꽃들의 모습은 밝은 태양 아래 더욱 돋보였다. 서로의 모습을 마음껏 펼쳐 보이는 그들에게 수줍음이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러한 것은 어쩌다 뚝 떨어져 길가에 홀로 피어 있을 꽃들에게나 양보했을 터이다.
능선을 만나는 곳에 자연스레 갈림길이 형성되었다. 우리는 안양산을 버려두고 무등산 쪽으로 길을 잡았다. 소나무 그늘을 찾아들어 태양의 열기를 조금은 식히게 되었다. 익숙한 칼솜씨로 사과를 몇 조각내 건네주는 분은 재직 시 우리의 머리를 마음껏 주무르시던 홍행표 선생이시다(*홍씨 중에 끝에 杓자가 붙었으면 99%는 남양 홍씨로 보아 틀림없다). 우리 머리를 함부로 쓰셨던 분이 사과를 전해오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고마운 마음으로 얼른 받아 한 입을 썩 베어 문다. 주는 정만큼이나 향긋한 맛이 몸을 타고 흐른다.
약간의 암릉도 재미 삼아 올라보며 미처 다 피어오르지 못하고 봉오리가 맺힌 철쭉 사이로 행군은 계속되었다. 잘 찍을 지도 모르는 사진이지만 그럴 싸 해 보이는 경관을 맞닥뜨리면 셔터를 눌러보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일행은 저만치 떨어졌고 홀로 호젓한 산행을 즐기려니 일군의 산군들이 마주 오다 인사를 건넨다. 어느 여자 분이 하나 우스갯소리로 응원을 해온다.
“웅이 아부지, 힘내세요.”
주위를 둘러보아도 딱히 나 아니고는 다른 사람을 보고 한 소리 같지가 않다. 냉큼 한 마디 답변을 하였다.
“고마워요, 웅이 어머니.”
이래서 난 졸지에 여자 하나를 얻었고, 한 번도 본 일 없는 웅이까지 덤으로 받았다. 그들이 킬킬 거리며 저쪽으로 사라져 간다. 이래서 산 인심은 후덕하다고나 할까?
장불재에 이르렀다(1 : 50). 장불재에 이르기 전 어디서 점심을 먹을 것인가를 논의하기에 뒤 미쳐 오는 분들을 기다리느니 그 사이 서석대나 입석대를 다녀오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동조하시는 세 분과 함께 길을 떠나기 전 남아 계신 분들 중 누구인가 다라는 내려놓고 가라고 한다. 그 뿐인가? 싸가지고 온 밥도 모두 놓고 가라는 것이었다. 그 분들은 칼 만 안 들었지, 완전 산적이나 다름없었다. 옜다, 모르겠다 싶어 다라를 끌러놓고 밥통마저 꺼내 고스란히 바쳤다. 이제 밥통은 그분들의 소유이다. 괜히 밥통같이 무거운 것을 걸머지고 갈 뻔 했다.
그런데, 아뿔싸. 장불재에서 입석대로 가려니까 사람들이 막아선다. 무슨 공사 중이라고 출입이 금지되었던 것. 할 수 없이 입석대와 서석대는 눈앞에서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바위들은 서서 보는 돌이라 입석대고 서석대 인가라는 다소 푸념 섞인 아쉬움을 토로하며 그 자리에 머문 채 뒤쪽 일행을 기다리며 주변에 있는 고인돌을 카메라에 담았다. 뒤에 오는 분들을 그냥 기다리기엔 분명 지루할 것이라는 계산은 누가 하더라도 해내기 마련이었다.
급한 대로 복분자가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마시고 난 뒤 뒤집어지는 것은 다음이라, 우선 복분자 병을 기울여본다. 달착지근한 미끈함이 혀를 간질인다. 신용남 선생(명예회원)께서도 뒤질세라 막걸리를 따신다. 김택진 과장님(자재과) 역시 노란 물체가 든 페트병을 더해놓는다. “이게 뭐예요?”라는 윤문식씨 버전의 질문에 금세 정체가 밝혀진다. 이름 하여 아카시아술. 이제 5월이니 조금 있으면 곧 아카시아 내음이 천지에 진동하게 될 것이다. 미리 아카시아 향기를 맡기라도 하듯 우린 먼저 아카시아 맛을 보기로 하였다. 오늘을 위하여 1년 전 아카시아는 그렇게 무참히도 병속에 갇힌 채 오늘을 기다려 왔으리라. 더 이상 기다리게 하기에는 미안한 마음에 단숨에 들이켜 본다. 식사 시간에도 김과장께서는 또 매실주를 꺼내놓음으로써 이래저래 취기가 오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도대체 산에 취하는 것인지 술에 젖어드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여간 산과 술에 쪄들다 보면 남녀노소 아무도 등급을 따지지 않게 된다. 그러면 곧 그게 무등일 터이고 우리가 온 목적은 얼마간 달성되는 셈이다. 그래서 음주산행의 무등산은 등산을 한 것인지 등산을 하지 않은 것인지 모르게 되나보다.
김재순 선생과 최영자 선생(국제어학원)을 중심으로 비빔밥이 완성되었다. 준비된 그릇이 각자의 손에 들리고 그들은 할당량을 가지고 삼삼오오 흩어져 둘러앉는다. 안주거리로 돼지고기도 보이고(김윤우 선생), 박주동 선생(관재과) 등이 끓여 온 계란탕도 먹음직스럽다. 산해진미는 못 될지언정 산의 진미는 되는 셈이다. 식사 후 기념 촬영을 할 때는 김홍렬 과장(자연대 교학지원과)께서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셨는지 뒤늦게 혼자 단독 사진을 찍으셨다.
이제 이를 반환점으로 하산이 시작되었다(3 : 25). 원래 계곡 쪽으로 내려가 중머리재를 거치기로 하였으나 서석재 등을 오르지 못한 아쉬움을 중봉으로 달래기로 하였다. 여기서 두 팀으로 갈려 원래 계획된 코스로 가는 팀과 중봉 팀으로 나뉘었다. 나는 당연히 중봉 팀(해발 915m)으로 합류했다. 왠지 동생 같으니까(한봉, 중봉, 세봉). 공사차량이 먼지를 휘날리며 지나가는 신작로를 따라 조금 걸어야 했다. 길옆으로 ‘탐방로 아님’이라는 표지판이 몇 번이나 나타났다 사라진다. 괜히 장난스런 생각이 든다. 어차피 술도 한 잔 했겠다. ‘탐방로 아님’이 ‘탐방로 안임’이라고 보고 그 길로 좀 가보면 안 될까? 그나마 자제력을 잃을 정도의 술이 아녔기에 바른 길을 이탈하지는 않았다. 가끔 갈림길에서 농으로 말하곤 한다. 옳은 길로 가자고. 우연인가? 오른쪽이 맞을 때도 제법 있었다.
중봉에서 바라보는 경관이 썩 괜찮았다. 내려오는 길에 만난 바위의 기묘한 형상들도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게 하였다. 멀리 산들이 겹겹이 드리워진 모습은 아무리 뛰어난 화가도 차마 그려낼 수 없을 것만 같았고, 미켈란젤로와 같은 조각가도 절대로 빚을 수 없는 그야말로 조물주만의 솜씨로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구태여 천의무봉이라는 말까지 동원할 필요는 없으리라.
일행 중에 섞여 있는 꼬마가 물을 찾는다. 용케도 따라왔다. 이순신 장군은 12척의 남은 배로 왜의 대군을 격파했다더니 이 아이는 12살의 어린 나이로 무등산을 등산도 아니라는 듯 이렇게 훌륭하게 소화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말했다. 물심양면으로 다 도울 수는 없지만 내가 물이야 못 주겠냐고. 수통을 두 개나 준비해 간 것이 이럴 때 제법 긴요하게 써먹을 수 있게 될 줄이야.
일행 중 앞서가는 사람끼리 누가 누군가 보고 ‘잘 가네’라고 하기에 누가 잘 가냐고 물어봤더니 최선미 선생(중앙도서관)이란다. 그러기에 또 한 마디 거들지 않을 수 없었으니, 나의 악취미라면 악취미랄까? “
“제가 성에 대하여 관심이 많은 편인 데 아직 ‘잘가’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그런데 이제 보니 잘가가 있더란 말이죠. 앞으로 최선미 선생은 잘선미 선생이라고 불러야 하겠네요.”
험하지는 않지만 제법 긴 시간을 산행하는 데도 별로 힘들어하지 않는 모습으로 산행을 잘 하시고 계셨다. 이재희 선생(교양교육지원과)도 처음 뵙는 것 같다. 누가 제이라고 하기에 이선희의 제이(J)인줄 알았더니 제이가 아니라 재희였다. 그 분 역시 조용한 가운데 꾸준히 산행을 잘 하시는 편이었다.
중머리재다. 왜 중머리재인지는 모르겠으나 다른 데와 달리 풀이 없고 흙바닥이니, 그래서 그런 명칭이 생겼나보다고 억지 해석을 해본다. 장불재에서 헤어진 일행을 그곳에서 일부 만났다. 하산이 계속 이어진다. 능선에서는 어쩔 수 없이 햇볕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지만 이제 제법 그늘이 몸을 가리어준다. 가끔은 햇살이 파고드는 그늘이 드리운 숲길은 언제나 푸근하다.
가던 길목 어디쯤엔가 약수가 있으면 또 그리 반갑기 그지없다. 분명 수통에 물이 남아 있다고는 하지만 바위틈을 비집고 나오는 옹달샘의 상큼함을 당해낼 재간이 없다. 과연 옹달샘 하나가 앞길을 막아선다(4:40). 아무리 갈 길이 바쁘다 한들 그냥 비켜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한 바가지로는 성이 차지 않아 마구 마시다보니 배가 부를 지경이다. 너무 마신다고 탓하기엔 물맛이 사정없이 좋음에랴. 아예 한 바가지 듬뿍 퍼들고 머리에 퍼부으시는 홍선생님. 전염은 의외로 빨랐다. 나 또한 머리를 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한 바가지 푹 떠내어 머리에 그득 부어본다.
얼마간 남아 있는 수통의 물을 쏟아 붓고 샘물로 교체하였다. 버려지는 물이 혹 이렇게 여기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새 물이 좋아도 이렇게 물 쓰듯 의리를 저버려도 되는 것인가라고? 물아, 네게 무슨 죄가 있겠나? 멀리 서울을 떠나 고생했으니 무등산 경치 좋은 곳에서 지내봄도 좋지 않겠나? 약수터를 떠나 조금 내려오니 갈림길이 다가선다. 천제단 가는 길과 당산나무 가는 길. 잠시 천제단에 들러 보았다. 이름이 지나치게 커서인가, 상대적으로 제단이 초라해보였다. 파리가 달려들건 말건 가볍게 천제단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당산나무가 있는 쪽으로 향하였다. 성남숙 선생 모자를 만나고, 이재희 ․ 최선미 선생과 안규채 과장님(야간교학지원과) 일행과 다시 합류하였다.
당산나무로 보이는 큰 느티나무가 우람한 채 버티고 서있었다. 보기에도 꽤나 나이가 들어 보였다. 정확한 내용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표지판이 전해주는 정보로는 수령이 450년이나 된다고 한다. 둘레는 무려 4.8미터. 거구의 옆에 붙어 서서 초라한 모습으로나마 역시 찰칵 한방. 저 쪽 너머로 옥새처럼 생겼다는 새인봉(?)이 바라다 보였다.
증심사(證心寺)가 긴 여정의 끄트머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수세기를 걸쳐 여러 번 전란을 겪으며 옛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신라 헌안왕 4년(860)에 철감 국사가 창건하였고,고려 때 혜조국사가 중창하였다고 할 만큼 꽤나 유서가 깊고 유명세를 탔던 사찰이었던 모양이다. 며칠 남지 않은 석가탄신일 때문인지 마당에는 하늘을 가릴 만큼 연등이 빼꼭히 들어차 있었다. 잠시나마 주마간산 격으로 둘러보노라니 김윤우 선생은 어느 사이 대웅전에 들러 예배를 드리는 모양이었다.
적당한 곳에서 탁족을 하리라던 꿈은 결국 기회를 잡지 못해 무산되었다. 모든 하산이 완료되어 6시쯤 출발하려는 데는 약 20분 정도가 또 걸려야 했다. 차 안에서 먹고 마실 술과 안주거리들이 동승하려고 몸부림쳤기 때문이다. 총무인 이인환 선생(정보통신원)이 출발부터 돌아올 때까지 여러모로 신경을 많이 썼다. 회장님께서 빠진 자리를 충실히 메워주신 선생님(죄송하지만 성함을 모름)은 가족과의 상봉을 위해 잔류하시고, 나머지 31명은 이제 출발지를 향해 되돌아오는 길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비교적 조용했던 염영철 선생(관재과)의 눈부신 활약이 시작된 것은 아마 그때부터가 아닌가 싶었다. 오가는 술잔 속에 웃음이 안주가 되기에 서울 길은 그리 멀지 못하였다. 김윤우 선생과 고향이 같다는 정동원 선생(명예회원)은 정겹게 술잔을 권해 오셨고, 신종태 선생(명예회원)께서는 약주도 안 드시며 내내 가끔 정겨운 웃음으로 말씀을 대신하신다. 홍성길 선생(이러닝 지원팀)과 이진국 선생(시설관리과)은 끈끈한 부부애를 과시하며 시종일관 조용한 행보를 보였고, 김현숙 선생(장학진흥과)은 어머니를 모시고 효행 산행을 하였는데 김선생의 어머니께서는 높은 연치에도 불구하고 능숙한 산행을 하시며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내심 따님을 맡길 만한 훌륭한 총각이라도 하나 찾으셨으면 하는 것 같았는데 소기의 성과가 있으셨는지 모르겠다.
그 밖의 산악회원의 지인들이 참여하셨지만 성함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죄송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때나마 즐거운 산행을 같이 할 수 있게 된 점에 대해 모든 분께 감사를 드린다.
이후에도 천안 휴게소에서 간단한 저녁 식사가 이어졌고(저녁 식사는 윤효근 전 회장님 제공), 신갈부터는 처음 차를 탈 때와 역순으로 한둘 씩 버스를 이탈하여 어둠속으로 멀어져 갔다. 신갈에 이어, 죽전, 양재, 강남을 거쳐 최종 목적지인 한남동에 이른 것이 10시 반이었다. 단 돈 2만 원을 들여서 갔다 온 원거리 등산치고는 너무나 풍족한 산행이었다. 단국대 산악회 임원진 및 회원 여러분 모두에게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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