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상( 今上 )의 34년 정월에 신( 臣 ) 항복( 恒福 )에게 명하여 남쪽 지방의 군사를 시찰하게 하였는데, 부름을 받고 편전( 便殿 )에 이르니, 전교하기를,
“ 고 통제사 신( 臣 ) 이순신( 李舜臣 )은 왕실( 王室 )에 마음을 다하다가 끝내 왕사( 王事 )에 죽었으므로, 내가 그를 총애하며 가엾게 여긴다. 그러나 아직껏 사당을 세우지 못했으므로, 이 때문에 그대를 명하여 그의 공적을 밝히게 하는 바이다. ”
하였다.
그리하여 신 항복은 명을 받들고 감격스럽고도 두려운 마음으로 역마( 驛馬 )를 타고 바닷가에 이르러 여러 장수들과 함께 그의 충( 忠 )을 표하고 덕( 德 )을 기록하여 무궁한 후세에 길이 보일 것을 모의했더니, 모두가 승낙을 하였다. 그리하여 이에 통제사 신 이시언( 李時言 )이 실로 그 일을 주관하였고, 충청 수군절도사 신 오응태( 吳應台 )와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신 김억추( 金億秋 )가 서로 동의하여 이 일을 도왔으며, 목포 만호( 木浦萬戶 ) 신 전희광( 田希光 ), 금갑도 만호( 金甲島萬戶 ) 신 송희립( 宋希立 ), 발포 만호( 鉢浦萬戶 ) 신 소계남( 蘇季男 ), 가리포 첨사( 加里浦僉使 ) 신 변홍달( 卞弘達 )이 분주히 일을 계획하였고, 그로부터 수개월 뒤에는 전라도 병마절도사 신 안위( 安衛 )가 사람을 시켜 약간의 전폐( 錢幣 )를 가지고 가서 공사( 工事 )를 돕게 하였으며, 그리고 평소 공의 밑에서 종사했던 군교( 軍校 ), 장리( 將吏 ), 사졸( 士卒 )들이 정력을 다하여 환호 속에 일을 추진하니, 뭇사람들이 있는 기교를 다하고 수많은 연장이 일제히 작동함으로써 바로 이해 모월( 某月 )에 공사를 마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 항복( 恒福 )이 드디어 일을 마치고는 조정에 그 사실을 고하고 인하여 묘액( 廟額 )을 청해서 그 일을 영광되게 하였다. 그리고 인하여 공의 세계( 世系 ), 이력( 履歷 )과 일의 시종( 始終 )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삼가 상고하건대, 고 (故 ) 증 (贈 ) 대광보국숭록대부( 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 議政府右議政 ) 행( 行 ) 정헌대부( 正憲大夫 )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제사( 全羅左道水軍節度使兼三道統制使 ) 이공( 李公 )의 휘는 순신( 舜臣 )이고, 선대( 先代 )는 덕수인( 德水人 )으로 고려( 高麗 )를 섬겨서 합문지후( 閤門祗侯 )를 거쳐 문림랑( 文林郞 )으로 자금어대( 紫金魚袋 )를 하사받고 지삼사사( 知三司事 )를 역임한 휘 소( 邵 )이다. 그로부터 오세( 五世 )를 지나 정정공( 貞靖公 ) 휘 변( 邊 )에 이르러서는 벼슬이 영중추부사( 領中樞府事 )에 이르렀다. 이분이 병조 참의( 兵曹參議 ) 휘 거( 琚 )를 낳았고, 참의가 평시서 봉사( 平市署奉事 ) 휘 백록( 百祿 )을 낳았으며, 봉사가 휘 정( 貞 )을 낳았는데, 이분이 실로 공을 낳았다. 구세( 九世 ) 동안 관직이 끊이지 않았고 대마다 훌륭한 인재가 있었는데, 공에 이르러 비로소 크게 드러났다. 모친은 초계 변씨( 草溪卞氏 )로 장임랑( 將任郞 ) 수림( 守琳 )의 딸이다.
공은 을사년 3월 8일에 태어났는데, 점쟁이가 말하기를,
“ 나이 50이 되면 부월( 斧鉞 )을 가지고 북방에 출정( 出征 )할 것이다. ”
고 하였다. 자라서는 유업( 儒業 )을 하였는데 글씨 쓰는 데에 더욱 뛰어났다. 그러다가 약관( 弱冠 )에 이르러서는 그 학문을 모두 그만두고 오로지 무사( 武事 )만을 배웠다. 병자년에는 무과에 합격하여 발포 만호( 鉢浦萬戶 )가 되었다가 파직되어 집에 있었다. 갑신년에는 모친상을 당하였고, 병술년에는 복( 服 )을 마치고 사복시 주부를 거쳐 조산 만호( 造山萬戶 )가 되었다.
정해년에는 조정에서 녹둔도( 鹿屯島 )에 둔전( 屯田 )을 설치하려면서 공에게 그 일을 관장하게 하니, 공이 지역이 멀고 군사가 적다 하여 누차 군사를 늘려 주기를 요청하였다. 그런데 그해 8월에 적( 賊 )이 전채( 田寨 )를 기습 포위해 왔는바, 홍전( 紅氈 )을 입은 적 수인( 數人 )이 가장 드러나게 앞에 있었으므로 공이 활을 연달아 쏘아 죽여서 물리친 다음, 전채를 열고 나가 추격하여 포로가 된 남녀 60여 명을 탈환하였다. 이때 한창 싸우다가 공이 유시( 流矢 )를 맞았는데, 남몰래 스스로 화살을 뽑아 버리고 낯빛도 동요하지 않았으므로 온 군중에서 그 사실을 아는 자가 없었다. 당시 주장( 主將 )이 공을 체포하여 영문( 營門 )으로 송치시켰는데, 장차 들어가 조사를 받게 되자, 친구 선거이( 宣居怡 )가 공이 죄를 면치 못할까 두려워하여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술을 권하여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려 하니, 공이 정색하여 말하기를,
“ 죽고 사는 것은 명( 命 )에 달린 것인데, 술은 무엇하러 마신단 말인가. ”
하였다. 그리고 조사를 받음에 미쳐서는 공이 복죄( 服罪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 내가 군사가 적다는 것으로써 누차 보고하여 늘려 주기를 청했었다. ”
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상이 이르기를,
“ 모( 某 )는 패군( 敗軍 )의 무리가 아니니, 백의( 白衣 )로 종군( 從軍 )하게 하라. ”
하였다. 그런데 그해 겨울에 시전( 時錢 )의 싸움에 종군하여 공을 세우고 방환( 放還 )되었다.
기축년에는 정읍 현감( 井邑縣監 )이 되었고, 신묘년에는 진도 군수( 珍島郡守 )로 이내 가리포 첨사( 加里浦僉使 )로 승진되었다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全羅左道水軍節度使 )에 발탁되었다.
그 다음해인 임진년에는 일본의 관백( 關白 )평수길( 平秀吉 )이 온 나라 군대를 총동원하여 쳐들어와서 부산( 釜山 ), 동래( 東萊 ) 등의 성( 城 )을 연달아 함락시키고 길을 나누어 서쪽으로 올라오면서 곧바로 중원( 中原 )을 범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래서 공이 여러 장수들을 모아 놓고 일을 계획하였는데, 이때 녹도 만호( 鹿島萬戶 ) 정운( 鄭運 ) 및 공의 군관( 軍官 )송희립( 宋希立 )이 분발하여 죽기로써 스스로 진력하기를 원했던바, 그 말이 비분강개하였으므로 공이 크게 기뻐하였다.
마침내 5월 4일에 수군( 水軍 )을 거느리고 바다로 내려가니, 경상 우수사( 慶尙右水使 ) 원균( 元均 )이 편지를 급히 보내 와서 공과 한산도( 閑山島 )에서 서로 만나자고 약속하였다. 이때 공에게 전선( 戰船 ) 80여 척이 있었으므로 원균과 합세하여 옥포( 玉浦 ) 앞바다에 이르니, 적선( 賊船 ) 30여 척이 사면( 四面 )에 휘장을 두르고 홍기( 紅旗 )와 백기( 白旗 )를 세우고 바다 한가운데에 정박해 있으면서 남은 군사들을 나누어 언덕으로 올려보내서 여사( 閭舍 )를 불태우니, 연기와 불꽃이 온 산에 그득하였다. 그러다가 적이 우리 군사가 갑자기 이르는 것을 보고는 일시에 배에 올라 노를 재촉하여 나가서 진을 쳤다. 공은 이날 바다 가운데서 적을 만나 제군( 諸軍 )을 독책하여 적선 26척을 불태우고 그 다음날에 결전( 決戰 )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런데 서쪽에서 온 사람이 전언( 傳言 )하기를,
“ 주상( 主上 )은 서쪽으로 몽진하고 경성( 京城 )은 적에게 함락되었다.”
고 하니, 여러 장수들이 각각 본진( 本鎭 )으로 돌아갔다.
이때 상이 의주( 義州 )에 있었으므로, 남쪽길이 막히어 소식을 서로 통하지 못했다가, 첩보( 捷報 )가 행재소( 行在所 )에 올라가자 백관( 百官 )들이 목을 길게 빼어 서로 하례하고, 마침내 공의 작질을 가선대부( 嘉善大夫 )로 승진시켰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공의 꿈에 백발 노인이 나타나서 공을 발로 차서 일으키며 말하기를,
“ 적이 쳐들어왔다. ”
고 하므로, 공이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서 재촉하여 전함 23척을 거느리고 노량( 露梁 )에서 원균과 만나고 보니, 적이 과연 쳐들어왔다. 그래서 처음에 한 번 교전하여 적선 한 척을 불태워 부수고 적을 추격하여 사천( 泗川 )의 바다 가운데 이르러서 멀리 바닷가의 한 산( 山 )을 바라보니, 적군 백여 명이 장사진을 치고 있고 그 밑에는 적선 11척이 언덕을 따라 열지어 정박해 있었다. 그런데 이때 조수( 潮水 )가 이미 밀려나갔으므로 항구( 港口 )의 물이 얕아서 배가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러자 공이 말하기를,
“ 우리가 만일 거짓 후퇴하는 척하면 적이 반드시 배를 타고 우리를 추격해 올 것이니, 지금 계책을 써서 그들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한 다음 우리가 거함( 巨艦 )으로 그들을 요격한다면 이기지 못할 리가 없을 것이다. ”
하고, 마침내 뱃고동을 울리며 배를 돌려 후퇴하니, 1리( 里 )도 채 못 가서 적이 과연 배를 타고 추격해 왔다.
공이 일찍이 본영( 本營 )에 있을 적에 날로 왜구를 걱정거리로 여기어, 지혜를 창출하여 종래의 것과 달리 새로운 방식의 군함을 제조했는데, 위에 판개( 板蓋 )를 설치하여 형상이 마치 엎드린 거북과 같았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공이 그 귀선( 龜船 )을 돌진시켜서 먼저 적진( 敵陣 )에 시험하여 적선 12척을 불태우니, 남은 적들은 멀리 바라보면서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만 외치고 있었다. 한창 싸울 적에 적의 탄환이 공의 왼쪽 어깨를 적중하여 등쪽까지 관통하였는데, 공은 그래도 활을 잡고 화살을 쏘면서 싸움을 독책하여 마지않았다. 그러다가 싸움이 끝난 뒤에 공이 사람을 시켜 칼 끝으로 탄환을 후벼 빼내게 하자, 온 군중이 그제야 비로소 공이 탄환을 맞은 사실을 알고 모두 깜짝 놀랐다.
다시 진군하여 당포( 唐浦 )에 이르니, 또 적선 12척이 강가에 나누어 정박해 있었는데, 한중앙에 대선( 大船 ) 한 척이 있어 위에는 층루( 層樓 )를 설치하고 밖으로는 홍라장( 紅羅帳 )을 드리웠는바, 여기에는 적추( 賊酋 ) 한 사람이 금관( 金冠 )에 금의( 錦衣 )를 착용하고서 여러 적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이 여러 장수로 하여금 노를 재촉하여 곧장 돌격하게 하자, 순천 부사( 順天府使 )권준( 權俊 )이 아래에서 쳐다보고 활을 쏘아 그 적추를 적중시키어 화살을 맞자마자 곧바로 거꾸러지니, 온 군중이 서로 경하 하였다. 이날 저물녘에는 사량( 蛇梁 )의 앞바다로 돌아가서 진을 쳤는데, 군중이 밤중에 놀라서 요란하여 마지않았으나 공은 가만히 누워서 일어나지 않다가 한참 뒤에 사람을 시켜 방울을 흔들게 하니, 온 군중이 그제야 진정되었다.
그 후 6월 4일에는 당항( 唐項 )의 앞바다로 진군하여 나갔는데, 전라 우수사( 全羅右水使 ) 이억기( 李億祺 )가 전선 25척을 거느리고 와서 함께 모였다. 이에 앞서 여러 장수들이 항상 고군( 孤軍 )으로 깊이 들어온 것을 걱정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억기가 온 것을 보고는 모두 사기가 증가되었다. 그 이튿날에 제군( 諸軍 )이 외양( 外洋 )으로 나가니, 여러 적들이 당항의 앞 포구에 진을 치고 있었다. 공이 먼저 초선( 哨船 )을 보내어 가서 형세를 탐지하게 했는데, 초선이 겨우 해구( 海口 )에 나가자마자 즉시 포( 砲 )를 쏘아 변( 變 )을 알리었다. 그러자 제군이 일시에 노를 재촉하여 배의 수미( 首尾 )를 마치 고기를 꿰듯이 서로 연결시켜 나아가 소소강( 召所江 )에 이르니, 적선 26척이 항중(港中)에 나열해 있었는데, 중앙에 있는 한 대선( 大船 )은 위로는 3층의 판각( 版閣 )을 설치하였고 밖으로는 흑초장( 黑綃帳 )을 드리웠으며 앞에는 푸른 일산을 세웠는바, 멀리서 바라보니 장내( 帳內 )에 시립( 侍立 )하고 있는 모양이 희미하게 보이었다. 그래서 그가 두추( 頭酋 )임을 알고는 수합( 數合 )도 싸우기 전에 공이 거짓 패하여 후퇴하니, 층각( 層閣 )의 대선이 공이 패하여 후퇴하는 것을 보고는 돛을 들고 곧바로 나오자, 제군이 협격( 挾擊 )하여 예기( 銳氣 )를 타서 그를 붕궤시킴으로써, 적추( 賊酋 )는 화살에 맞아 죽었고 적선 100여 척을 불태웠으며 적군의 목 210여 급( 級 )을 베었고 물에 빠져 죽은 적군도 매우 많았다. 이 일이 알려지자 품계가 자헌대부( 資憲大夫 )에 승진되었다.
그 후 7월 6일에는 공이 원균, 이억기 등과 함께 노량에서 만나 적선 70여 척이 견내량( 見乃梁 )으로 옮겨 정박했다는 말을 듣고 우리 군사가 바다 중앙에 이르자, 적들이 우리 군사의 성대함을 보고는 배를 돌려 항구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데 그 항구 안에는 원래부터 노영( 老營 )의 적선 70여 척을 한데 나열하여 진을 쳐 놓았는데, 항구가 물이 얕고 좁은데다 암초까지 많아서 배를 운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공이 군사를 조금 내보내어 그들을 유인하니, 적이 과연 군중을 총동원하여 추격해 오므로 공이 싸우다 후퇴하다 하면서 적을 유인하여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러서는 배를 돌려 반대로 쫓으면서 깃대를 휘둘러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화살과 대포를 일제히 발사하니, 적의 기세가 꺾이어 조금 퇴각하였다. 그러자 여러 장수와 군리( 軍吏 )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팔짝팔짝 뛰면서 적선 63척을 불태우니, 남은 적 400여 인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나 버렸다.
제군( 諸軍 )이 다시 진군하여 안골포( 安骨浦 ) 앞바다에 이르니 또 적선 40여 척이 있었는데, 중앙에 있는 3척의 배에는 위에 층루( 層樓 )를 설치하였고, 기타 여러 배들은 차례로 열지어 정박해 있었다. 그런데 적들이 이미 누차 패한 나머지, 아군이 곧바로 돌격해 올까 두려워하여, 앞으로는 얕은 항구를 점거하고 뒤로는 험고함을 의지해 있으면서 감히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공이 제군을 독책하여 번( 番 )을 쉬어 가면서 교대로 진격하게 했는데, 날이 저물어 바다 안개가 사방에 가득 끼자, 남은 적 20여 척은 밤을 틈타서 닻줄을 끊고 도망쳐 버렸다. 이 싸움에서는 적의 목 250여 급을 베었고, 물에 빠져 죽은 적은 또 그 숫자를 헤아릴 수도 없었으므로, 군성( 軍聲 )이 크게 떨치었다. 이때 공의 품계는 정헌대부( 正憲大夫 )에 승진되었다. 공은 매양 싸워서 이길 적마다 여러 장수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 이기는 데에 익숙해지면 반드시 교만해지는 것이니, 여러 장수들 그것을 조심해야 한다.”
고 하였다.
이때 적들이 누차 호남( 湖南 )을 엿보면서 으르렁거리어 마지않았으므로, 공은 국가의 군량을 모두 호남에 의지하고 있으니 만일 호남이 없어진다면 이는 국가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여기었다. 그리하여 계사년 7월 15일에 한산도로 나아가 진을 쳐서 적의 해로( 海路 )를 차단하였다.
이해 8월에는 조정에서 공에게 삼도 수군 통제사( 三道水軍統制使 )를 겸임시키고 본직( 本職 )은 처음대로 가지어 수군을 총제( 總制 )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공은 6년 동안 군중에 있으면서 본도( 本道 )의 군량 저축이 부족하여 공급해 낼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어염장( 魚鹽場 )을 크게 열고 둔전( 屯田 )을 넓게 설치하였으며, 모든 국가에 이롭고 군( 軍 )에 보탬이 되는 일에 대해서는 마치 기욕( 嗜欲 )을 따르듯이 아무것도 돌보지 않고 용감하게 달려들어서 털끝만한 것도 빠뜨리지 않았으므로, 군량이 여유가 있어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정유년 정월에는 적추 청정( 淸正 )이 재차 바다를 건너왔는데, 조정에서 공이 그를 맞아 공격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조사를 받게 하고 원균을 대신 상장( 上將 )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공이 서울로 압송되는 길에 남녀 노유( 男女老幼 )가 모두 길을 가로막고 부르짖어 통곡하였다. 공이 조사를 받음에 미쳐서는 상이 공을 용서하고 백의( 白衣 )로 강등시켜 원수( 元帥 )의 진중( 陣中 )으로 보내서 공으로 하여금 죄를 반성하고 스스로 진력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그해 7월에 원균이 과연 패하자, 도원수( 都元帥 )권율( 權慄 )이 공으로 하여금 진주( 晉州 )에 가서 흩어진 군졸들을 수습하게 하였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조정에서 다시 공을 통제사로 삼았다.
그런데 이때는 군이 막 패한 뒤라서 주선( 舟船 )과 기계( 器械 )가 남아 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공이 명을 들은 즉시 단기( 單騎 )로 달려 회령포( 會寧浦 )에 이르러 경상 우수사( 慶尙右水使 ) 배설( 裵楔 )을 길에서 만났는데, 이때 배설이 거느린 전선은 겨우 8척이 있었고 또 녹도( 鹿島 )의 전함 1척을 얻었다. 공이 배설에게 진취( 進取 )의 계책을 물으니, 배설이 말하기를,
“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서 스스로 호남( 湖南 )의 진영 밑에 의탁하여 싸움을 도와서 스스로 진력하는 것이 좋겠다. ”
고 하였으나, 공이 듣지 않았는데 배설은 과연 배를 버리고 가 버렸다. 그러자 공이 전라 우수사( 全羅右水使 ) 김억추( 金億秋 )를 불러 그로 하여금 관할 하의 장수 5인을 소집하여 병선을 수습하게 하고, 장수들에게 분부하여 전함을 치장해서 군세( 軍勢 )를 돕게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약속하기를,
“ 우리들이 함께 왕명을 받았으니, 의리상 생사를 같이해야 한다. 국사( 國事 )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 한 번 죽음을 아끼겠는가. 오직 충의에 죽는다면 죽어도 영화가 있을 것이다. ”
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감격하며 두려워하였다.
이때 공은 몹시 어지러워진 상황에서 기용되어 재차 번진( 藩鎭 )에 임명되었는데, 양남( 兩南 )의 제군( 諸郡 )이 모두 적의 소굴이 되어, 행장( 行長 )은 육로에서, 의지( 義智 )는 수로에서 서로 계책을 통하고 예기( 銳氣 )를 기르면서 우리의 틈을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공은 다만 창잔( 瘡殘 )의 남은 군졸로 13척의 전선을 거느리고 의지할 곳이 없어 벽파정( 碧波亭 ) 앞바다에 머뭇거리고 있었으므로, 보는 이들이 위태롭게 여기었다. 공이 하루는 갑자기 군중( 軍中 )에 명령을 내려 이르기를,
“ 오늘 밤에 적이 반드시 우리를 습격할 것이니, 여러 장수들은 각각 군대를 정돈하고 경계를 엄중히 해야 한다. ”
하였다. 그런데 이날 밤에 적이 과연 군대를 비밀리에 출동하여 쳐들어왔다. 그러자 공이 스스로 일어나 큰 소리로 호통을 쳐서 제군( 諸軍 )들로 하여금 동요하지 말고 각각 닻을 내리고 기다리게 하여 더욱 강력히 싸움을 독책하니, 적이 포위망을 풀고 가므로 공은 회군( 回軍 )하여 우수영( 右水營 )의 명량( 鳴梁 ) 앞바다로 와서 있었다.
그 다음날 아침에 바라보니, 적선 5, 6백 척이 바다를 온통 뒤덮어 올라오고 있었다. 이에 앞서 배를 타고 피란 나온 호남의 사서인( 士庶人 )들이 모두 진영 아래 모여서 공을 의지하여 생명줄로 삼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공이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상황으로 인하여 먼저 피란선( 避亂船 )들로 하여금 차례로 물러가 배열하여 진을 치게 해서 이들을 의병( 疑兵 )으로 삼고, 스스로 전함을 거느리고 맨 앞에 나가 있었다. 이때 적들은 공이 전함을 정돈하여 나온 것을 보고 각각 노를 재촉하여 곧바로 진격해 오는데, 정기( 旌旗 )와 누로( 樓櫓 )가 바다 가운데 그득하였다. 이때 아침 조수가 막 밀려나가서 항구의 여울물이 매우 급하였는데, 거제 현령( 巨濟縣令 ) 안위( 安衛 )가 조수를 따라 내려가다가 빠른 바람세를 타고 배가 쏜살같이 달려 곧장 적진 앞에 돌진하니, 적이 사면에서 안위를 포위하므로 안위는 죽음을 무릅쓰고 돌전( 突戰 )하였고, 공은 제군을 독책하여 그를 후원하게 해서 먼저 적선 31척을 격파하니 적이 약간 퇴각하였다. 그러자 공이 노를 치면서 군사들에게 맹세하고 승승장구하여 진격하니, 적들이 죽기로써 소리만 외칠 뿐 감히 대적하지 못하고 군대를 죄다 거느리고 도망치므로, 공 또한 보화도( 寶花島 )로 옮겨서 진을 쳤다.
이때 한산도의 여러 장수들은 각자 도망쳐서 본도( 本道 )의 피란민 등과 함께 여러 섬으로 들어갔으므로, 공이 날마다 편비( 褊裨 )를 보내어 여러 섬에 통유( 通諭 )하여 흩어진 군졸들을 불러모으게 해서, 전함을 수리하고 기계를 준비하며 소금을 구워 판매하게 하니, 2개월 이내에 수만여 석의 곡식을 얻게 되었다. 그러자 장사( 將士 )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서 군성( 軍聲 )이 크게 떨치었다.
무술년 2월 17일에는 고금도( 古今島 )로 나가서 진을 쳤다. 이때 행장( 行長 )은 군대를 거두어들이고 험고한 곳을 점거하여 순천( 順天 )의 왜교( 倭橋 )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공은 왜교와의 거리가 백 리쯤 떨어진 곳에 진을 쳤던 것이다. 그해 7월에는 천장( 天將 )도독( 都督 )진린( 陳璘 )이 수병( 水兵 ) 5000을 거느리고 와서 공과 합진( 合陣 )하였고, 도독 유정( 劉綎 )은 묘병( 苗兵 ) 1만 5000을 거느리고 순천의 동쪽에 진을 치고서 장차 수륙( 水陸 )으로 일제히 적을 공격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천병( 天兵 )이 우리 군사를 침범하여 소요를 일으키자, 공이 군중에 명령을 내려 그 여사( 閭舍 )들을 철거하게 하였다. 그것을 보고 유 도독이 괴이하게 여겨 그 사실을 묻자, 공이 대답하기를,
“ 천병이 수시로 우리 군사를 침범하여 소요를 일으키므로, 소방( 小邦 )의 새로 소집된 백성들이 장차 모두 먼 곳으로 옮겨가려 한 것이다. ”
고 하니, 도독이 크게 놀라면서 공으로 하여금 편의에 따라 임의대로 처리하게 하여, 후일에 재차 침범하여 소요를 일으키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공이 임의로 죄를 주도록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그 후로는 천병이 추호도 범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온 진영이 이를 힘입어 서로 편안하였다.
이때 행장은 공의 위명( 威名 )을 두려워하여 자기 아장( 亞將 )을 보내어 조총( 鳥銃 )과 장검( 長劍 )을 공에게 바치자, 공이 그것을 물리치며 말하기를,
“ 내가 임진년으로부터 적을 죽인 것이 셀 수도 없이 많으므로, 그들에게서 노획한 총검( 銃劍 )만으로도 스스로 사용하기에 넉넉하다. ”
하였다. 적은 또 도독을 통하여 은량( 銀兩 )과 주육( 酒肉 )을 보내고자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 이 적은 천조( 天朝 )에도 용서받기 어려운 죄가 있는데, 노야( 老爺 )가 도리어 그의 뇌물을 받으려고 합니까. ”
하였더니, 그 후 적의 사자( 使者 )가 재차 왔을 적에는 도독이 그를 거절하여 말하기를,
“ 내가 통제공에게 이미 부끄러운 일을 당했는데, 어찌 재차 할 수 있겠는가. ”
고 하였다.
이해 11월 18일에는 남해( 南海 ), 부산( 釜山 )의 여러 적들이 구원을 나왔는데, 선봉( 先鋒 )은 이미 노량( 露梁 )에 도착하였다. 그러자 공이 도독에게 말하기를,
“ 우리 군사가 앞뒤로 적을 맞게 되었으니, 차라리 묘도( 猫島 )로 물러가 진을 치고 있다가, 다시 여러 장수들과 약속하여 결사전을 벌이는 것이 낫겠소. ”
라고 하니, 도독이 그대로 따랐다. 이날 밤 삼경( 三更 )에는 공이 배 위에서 꿇어앉아 하늘에 축원하기를,
“ 오늘은 진실로 결사전을 벌일 터이니, 원컨대 하느님께서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해 주소서. ”
라고 하였다. 축원을 마치고는 스스로 정예한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노량으로 진군하였다.
19일 사경( 四更)에는 적이 도독을 매우 급하게 포위하자, 공이 곧바로 전진하여 그를 구하였다. 그리고 친히 시석( 矢石 )을 무릅쓰고 손수 스스로 북을 치다가 갑자기 탄환을 맞아 쓰러졌는데, 운명하기 직전에 휘하( 麾下 )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숨겨서 군중을 놀라게 하지 말라. ”
고 하였다. 도독은 공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세 번씩이나 배에 엎어져 넘어지면서 말하기를,
“ 함께 일을 할 만한 사람이 없게 되었다. ”
하였다. 그리고 남민( 南民 )들은 공이 작고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주히 길거리에서 통곡하였고, 시장을 보는 사람들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 후 가인( 家人 )이 고향으로 반장( 返葬 )할 적에는 남중( 南中 )의 사자( 士子 )들이 제문( 祭文 )을 지어 와서 제사하였고, 노약자들은 길을 가로막고 통곡하여 계상( 界上 )에까지 통곡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공은 군수( 郡守 )방진( 方震 )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회( 薈 )는 누차 공을 세워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이 되었고, 다음은 예( 䓲 )이며, 딸은 사인( 士人 )홍비( 洪棐 )에게 시집갔다.
공이 일찍이 과거에 응시하여 강( 講 )을 할 적에 장량전( 張良傳 )에 이르러 고관( 考官 )이 묻기를,
“장 량이 적송자( 赤松子 )를 따라 노닐어서 참으로 죽지 않았는가? ”
하자, 공이 대답하기를,
“ 《강목( 綱目 )》에서 유후( 留侯 )장량( 張良 )이 졸( 卒 )했다고 썼고 보면 장량의 뜻이 어찌 참으로 신선이 되려고 했겠습니까. ”
하니, 온 좌중이 공을 대단히 기이하게 여겼다.
공이 발포 만호( 鉢浦萬戶 )가 됨에 미쳐서는 강직하여 윗사람에게 아부하지 않았다. 한번은 주장( 主將 )이 사람을 보내어 보정( 堡庭 )에 있는 오동나무를 취해다가 거문고를 만들려고 하므로, 공이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 이것은 관가( 官家 )의 나무이다. 심은 이는 이미 뜻이 있어 심었을 터인데, 베는 자는 또 무슨 뜻으로 벤단 말인가. ”
하였다. 그러자 주장이 기가 막혀 한숨을 쉬고는, 공을 중상할 거리를 만들려고 마음먹고 공의 재직( 在職 )이 끝나는 날까지 꼬투리를 잡으려고 노력했으나 털끝만한 죄도 잡아내지 못하였다. 공이 북변( 北邊 )에 있을 적에는 어떤 사람이 상( 喪 )을 당하고도 가난하여 분상( 奔喪 )을 하지 못하자, 공이 그 말을 듣고 불쌍히 여겨 즉시 자신이 타는 말을 풀어서 그에게 주었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 장부( 丈夫 )가 세상에 태어나서, 나라에 쓰이면 몸을 바쳐 보답할 것이요, 쓰이지 못할 경우에는 초야에서 농사나 지으면 만족할 것이다. 그러니 권귀( 權貴 )에게 아첨하여 일시의 영화를 훔치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
하였다. 그런데 대장이 됨에 미쳐서도 이 도리를 변함없이 굳게 가지었다. 그리하여 사람을 접대함에 있어서는 온화하고 소탈하며 곡진하여 간격이 없었고, 일을 당해서는 과감하게 처리하여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며, 사람들에게 형벌을 주고 상을 주는 데 있어서는 일체 귀세( 貴勢 )나 친소( 親疎 )를 가지고 자신의 뜻에 경중( 輕重 )을 두지 않았다. 그 때문에 뭇 아랫사람들이 공을 두려워하며 사랑하였고, 가는 곳마다 치적( 治績 )을 올리었다.
일찍이 왜교( 倭橋 )의 싸움에서 공의 처형( 妻兄 ) 황세득( 黃世得 )이 전사하여 여러 장수들이 조문을 하자, 공이 말하기를,
“ 세득은 왕사( 王事 )에 죽었으니, 슬픔이 아니라 바로 영광인 것이다. ”
고 하였다.
공은 7년 동안 군중( 軍中 )에 있으면서 심신( 心身 )을 곤고( 困苦 )히 하여 일찍이 여색( 女色 )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승전( 勝戰 )하여 상을 받았을 경우에는 반드시 여러 장수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조금도 남겨 둔 것이 없었다.
일찍이 원균( 元均 )과 군사( 軍事 )로 인하여 둘이 말다툼한 일이 있어 감정이 쌓여서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공은 항상 자제들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 만일 누가 그 일에 대해서 묻는 사람이 있거든, 너희들은 의당 저 사람에게 공이 있음을 말하고 단점은 말하지 말라. ”
하였다. 한 군졸이 형( 刑 )을 당하게 되었을 적에 자제가 곁에서 말하기를,
“ 죄가 무거워서 용서할 수 없습니다. ”
고 하자, 공이 천천히 말하기를,
“ 자제의 도리로서는 의당 살리는 방도로써 사람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
고 하였다.
공의 두 형이 공보다 먼저 작고했으므로, 공이 그 유고( 遺孤 )들을 마치 자기 자식처럼 돌보아 은애( 恩愛 )를 베풀어서, 모든 집안의 물건을 사용하는 데 반드시 조카를 우선으로 하고 자식을 뒤로 미루었다. 군자( 君子 )는 여기에서 공의 행실이 집안에서도 돈독하였음을 알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