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년을 경영하여 초려삼간(草廬三間) 지어내어
나 한 칸 달 한 칸 청풍(淸風) 한 칸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다"
가사문학의 대가인 송순(1493~1582)의 시 한 수이다.
그는 만년에 고향땅 담양에 은거하며 세 칸의 작은 정자, 면앙정를 지었다.
한 칸에는 자신이, 다른 두 칸에는 각각 달과 청풍을 들이고 보니
강과 산은 (집 안에) 들여놓을 곳이 없으니 주변에 둘러 두고 보겠노라고
그 시인은 노래한 것이다. 자연에 심취한 장락(長樂)의 진수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옛 조상들은 장락을 그저 단순하게 '길게 즐긴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물 먹고 물마시고 팔 베고 누워있으니 즐거움이 그 속에 있다."
그 즐거움 속에 있는 락(樂)을 장락이라고 그들은 여겼다고 한다. 장락은 단순한 희희락락(喜喜樂樂)은 아니다.
그런 즐거움보다는 인간 본성의 마음자리를 발견했을 때 느끼는 희열을 바로 장락이라고 했다.
옛 선조들의 장락문화 본고장이 전남 담양 창평이다.
그 창평이 슬로시티(slow city)라는 이름의 새로운 ‘장락마을‘ 로 조성되어가고 있었다.
'느리게 살자'가 슬로시티 운동이다. 유럽의 장락문화가 그렇게 표현된 것이다.
이 운동은 1999년 이탈리아의 4개 도시가 '고속사회의 피난처'를 자처하면서 시작됐다.
이 운동이 처음 시작된 이탈리아 브라시는 인구 3만 명이 채 안 되는 소도시로 상점들은 오후 3시가 넘어야 문을 연다.
마을에는 자동차도, 편의점도, 네온사인도 없다. 시민들은 하루 3시간의 낮잠과 해질 무렵의 산책을 즐긴다.
모든 일은 걸어서 해결하고 1주일에 이틀은 반드시 쉰다.
슬로시티는 슬로비(Slobbie) 운동에서 비롯되었다.
슬로비는 ‘천천히, 그러나 더 훌륭하게 일하는 사람(Slow But Better Working People)’을 뜻하는 말로
서양에서 일어난 장락운동인 셈이다. 미국에서 이 운동을 이끌고 있는 단체의 이름이 흥미롭다.
롱나우(long Now)재단이다. 이 재단에서는 1998년부터 미국 사막지대에 만년시계를 만들고 있다.
한번 똑딱하는데 1년이 걸리고 괘종을 한번 치는 데 100년,
한바퀴가 돌아 뻐꾸기가 튀어나오는데 1000년이 걸린다.
웹상의 가상의 시계에서는 지난 2000년을 맞이하여 두번 종을 울렸다.
식문화에서도 슬로우푸드(slow food)가 슬로우프드 단체의 상징물인 달팽이처럼
‘천천히’ 늘어나고 있다. 슬로우푸드운동은 맥도날드 햄버거로 대표되는 패스트푸드에
대한 반대에서 비롯되었다. 세계 슬로우푸드운동은 1986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미국의 패스트푸드의 대명사인 맥도날드가 이탈리아 로마로 진출하자
맛을 표준화하고 전통음식을 소멸시키는 패스트푸드에 대항하여 창설되었으며
식사, 미각의 즐거움, 전통음식의 보존, 식물과 작물의 보존, 전통적인 영농 등
세계적으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유기농업이나 환경운동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유럽에서 시작한 슬로비운동이 장락문화의 본고장 창평에서 자연복귀운동에 불을
지피고 있는 것이다. 창평면 삼천리는 한옥과 돌담이 잘 보존되어있다.
황토와 작은 돌들이 층층이 쌓여 키 높이를 넘기는 담장 안에 잘 지어진 한옥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담장을 이어진 골목은 시멘트와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마사토를 깔고 주위의 시멘트 벽채는 흙과 나무로 보완해 자연미를 살려낼 것이라고 한다.
창평 고씨 집성촌이던 이곳엔 아직도 후손들이 살고 있다.
사이사이 낡은 한옥을 헐고 새로 지은 집들도 있다. 그러면서도 대문을 바꿨으나
담장만은 그대로 남겨두어 창평파출소 안쪽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은
돌담길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천연 먹거리도 슬로시티 창평의 또 다른 경쟁력이다.
창평꽃주는 영조의 외향(外鄕)에 장려하게 한 명주이다.
향토사학자 이병해씨는 “꽃주 한 잔에 무등산이 한 눈에 들고 그 두 잔에 세상이 다 보이며
석 잔에는 뱃속 세계까지 보이게 한다고 할 만큼 꽃주는 최고의 명주다“라고 전한다.
한과 쌀엿 강정 패랭이 삿갓 죽렴 장류 등 창평이 자랑하는 명산물은 아주 많다.
쌀엿은 창평의 먹거리의 백미로 꼽힌다.
“고을로 들어오니 사부향의 체취도 좋구나. 한 뿌리 입안에 넣으니 곰삭은 초가지붕에
서릿발 부서지는 가득한 향은 나그네 한기를 녹이는 구나,,,,,,,,,,,,”
양녕대군은 창평 쌀엿을 극찬했다. 창평 쌀엿은 양녕대군이 이곳에 내려와 지낼 때 따라온 궁녀들이
그 비법을 전수해준 것이라고 한다. 이 지역의 현감들이 궁중에 상납할 선물을 마련하면서
제일 먼저 찾았다 할 만큼 그 유래가 깊고 명성이 높다.
이렇듯 슬로시티에는 천연의 먹거리가 많다.
정자문학의 본고장으로 널리 알려진 담양 창평, 우리의 장락문화의 유산은 아주 넉넉하다.
한옥도 많다. 자연은 풍광을 한껏 뽐내고 있다. 그 곳을 살다 간 인물도 참으로 대단하다.
롱나우(Long Now)로 상징되는 서양의 장락운동이 정자와 대나무 가사문학으로 상징되는
창평에서 어떻게 꽃피우게 될 관심이 쏠린다.
창평의 슬로시티를 세계에 알릴 예비해설가들이 연수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창평의 한옥과 자연관을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었다. 참으로 많을 것을 느꼈다.
그 창평은 우리에게 오늘의 장락의 의미를 이렇게 호소하고 있는 듯했다.
"아무튼 천천히 가십시오. 아무리 천천히 가더라도 인생은 속절없이 빠르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