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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겹(dvaya)’에 대한 설명입니다.
쌍요자나(saṁyojana, 결박)에서는 ‘쌍요자나를 이루는 한 쪽의 피동적 대상’이 반듯이 ‘법(dhamma, 담마)’인데 반하여, 쌍요자나(saṁyojana)와 비슷한 상응(相應, saṃyutta, 쌍윳따, 서로 호응함)에서는 관계를 구성하는 둘이 ‘상호 대등한 입장’이어서 어느 한 쪽을 수동적이라거나 피동적이라고 이야기하기 어렵습니다.
상응(相應, saṃyutta)의 대표적인 예가 ‘식과 명색의 호연연기’인데, 거기서는 <식→명색→(육)식→명색→식(온)→명색(=오온)>의 악순환에서 보듯이 끝없는 순환이 이루어집니다.[☞이는 마치 ‘두 개의 거울’을 마주한 것과 같음. 쌍윳따 니까야는 이러한 악순환적 윤회를 지적하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있음을 설하는 경임.]
‘쌍요자나나 상응’과 비슷한 용어에 ‘dvaya(드와야, 두 겹)’라는 것이 있고, 경전에 언급되는 빈도는 ‘쌍요자나나 상응’에 비하여 월등하게 높습니다. 마치 약방의 감초처럼 <연기가 설해지는 곳이나 앎과 봄(=智見)이 설해지는 장면>에서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용어가 ‘dvaya(드와야, 두 겹)’라는 용어입니다. 앎과 봄(=智見)이 있어야만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이치를 생각하면 이 ‘dvaya(드와야, 두 겹)’라는 용어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dvaya(드와야, 두 겹)’는 ‘쌍요자나나 상응’을 단순히 ‘구조적 측면’에서 지적하는 말입니다. 용어의 사전적 의미는 <이중의, 두 배의, 한 쌍, 이원성, 두 종류>이며, ‘부사나 명사’로 쓰입니다. 추상명사인 ‘dvayatā(드와야따, 두 겹)’는 아누빠사나(anupassanā)와 결합하여 ‘二重隨觀(dvayatāanupassanā, 더블아누빠사나)’이라는 삼아누빠사나(sam-anupassanā)의 한 종류를 의미하는 용어가 됩니다.
그런데, 제가 ‘두 겹’이라는 번역어를 고집하는 이유는 ‘dvaya(드와야)’가 현실적으로는 ‘첩첩산중’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중첩적인 것이 ‘까보면 또 중첩적으로 되어 있어서’ 양파를 벗기듯이 알맹이는 없고 첩첩이 껍질만 있는 것을 의미할 때도 ‘dvaya(드와야)’라는 용어를 사용하기에 ‘dvaya(드와야)’의 사전적 의미에도 <가짜의, 속이는>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식과 명색의 호연연기’에서 ‘식과 명색’이 ‘dvaya(드와야, 두 겹)’입니다만 거기에서 ‘명색 자체가 또 dvaya(드와야, 두 겹)’입니다. ‘명신과 색신에서 명색’이기 때문이며[☞이는 ‘身(kāya)’도 또 dvaya(드와야, 두 겹)라는 말임.] ‘名과 色’이라는 것 자체가 dvaya(드와야, 두 겹)입니다.
혹자는 ‘識은 dvaya(드와야, 두 겹)가 아니다’라고 여기실지 모르나, dvaya(드와야, 두 겹) 중의 dvaya(드와야, 두 겹)가 識입니다. 識은 그 연기가 두 방향에서로 설해지는데, 하나는 ‘행을 조건으로 한 識’[=12연기에서]이고 다른 하나는 ‘명색을 조건으로 한 (육)識’[=육육법에서]입니다. 이는 dvaya(드와야, 두 겹)에서 ‘dvaya(드와야, 두 겹)인 것’이 연기되는 것입니다. 이는 ‘행을 조건으로 한 識’이 유위(有爲)인 이유입니다.[☞‘행’도 두 방향에서 연기됨, 즉 ‘무명을 조건으로 한 행’과 ‘촉을 조건으로 한 행’] 나아가 ‘(육)識’의 하나인 眼識이란 것도 그 자체가 ‘dvaya(드와야, 두 겹)인 것’입니다.
결국 일체유위는 ‘아지랑이 같고, 파초와 같으며, 번개 불 같고, 꿈과 같으며, 그림자 같고, 파도의 포말과 같고, 실체가 없는 것이며, 꼭두각시와 같고, 공인 것이며, 가짜의, 속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와 같이 중첩적인 것이 ‘까보면 또 중첩적으로 되어 있어서’ 양파를 벗기듯이 알맹이는 없고 첩첩이 껍질만 있는 것을 지적하는 말이 ‘dvaya(드와야)’이기에 번역할 때, 저는 ‘두 겹’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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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야에서 경문을 살펴봅니다.
Avijjānīvaraṇassa bhikkhave paṇḍitassa taṇhāya sampayuttassa evam ayaṃ kāyo samudāgato. Iti ayaṃ ceva kāyo bahiddhā ca nāmarūpaṃ, itthetaṃ dvayaṃ dvayaṃ paṭicca phasso saḷevāyatanāni, yehi phuṭṭho paṇdito sukhadukkhaṃ paṭisaṃvediyati, etesaṃ vā aññatarena.[SN. vol.2. p.24]
비구들이여, 無明에 덮이고 愛에 묶여서 현명한 사람에게도 이러한 身(kāya)이 集起한다. 이 같은 이 身[=‘名身과 色身’을 의미함]과 外로(bahiddhā)는 名色이 있다. 이렇게 이것은 ‘두 겹(dvaya)’으로 되어 있다. ‘두 겹(dvaya)’을 緣한 ‘여섯 가지 處들에 있어서의 觸’[=이것이 無明觸임, 이 촉은 육촉이 아님.]이며, 현명한 사람도 그것들이나 그것들 중 어느 하나에 접촉됨으로써 樂과 苦를 경험한다.
위 인용경문에서 언급되는 ‘두 겹(dvaya)’이란 ‘六入(saḷevāyatana)’[=12연기의 다섯 번째 지분]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saḷevāyatana(육입)’는 본래 단수형인데 위 경문에서는 ‘두 겹(dvaya)’을 드러내기 위해 ‘saḷevāyatanā(육입들)’이라는 복수형을 쓴 것에 유의하셔야 합니다.[☞참으로 5부 니까야는 빈틈이 없음] 나아가 ‘육내외입처’도 그자체가 ‘dvaya(드와야)’입니다. 관련 경문을 인용하겠습니다.
Dvayam bhikkhave paṭicca viññāṇaṃ sambhoti. Kathañca bhikkhave dvayam paṭicca viññāṇaṃ sambhoti. Cakkhuñca paṭ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āṇaṃ. Cakkhu aniccam vipariṇāmi aññathābhāvi, rūpā anicca vipariṇāmino aññathābhāvino.
비구들이여, ‘두 겹(dvaya, 二, 二元性, 둘, 중첩성)’을 緣하여 識이 생겨난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두 겹(dvaya)’을 緣하여 識이 생겨나는가? 眼(~意)과 色(~法)을 緣하여 眼識이 生起한다. 안은 무상하고 변역하는 것이고 다른 상태로 되는 것이며, 색도 무상하고 변역하는 것이며 다른 상태로 되는 것이다.[SN. vol.4. pp.67~68]
‘身受, 心法’도 복합중첩적인 ‘dvaya(드와야)’구조이고, 그러한 ‘dvaya(드와야)’이기에 그 각각에 관련된 <samudaya-dhammānupassī(集法隨觀), vaya-dhammānupassī(사라지는 법을 隨觀, 滅法隨觀), samudaya-vaya-dhammānupassī(集滅法隨觀)>[DN. vol.2. p.292]이 언급되는 것이고, 그러한 아누빠사나들을 통칭하여 ‘두 겹으로 정수관(正隨觀, =sammā-dvayatānupasasnā)’[Sutta-Nipāta, p.141]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상황이 이러하기에 ‘dvaya(드와야)’에서 ‘청정(suddhi)’이라는 알맹이를 찾거나 추구하는 것이 비판 받는 것입니다.
사람이 볼 때 名色(nāma-rūpa)을 보는 것이다. 보고 나서는 바로 그것들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많든 적든 (얼마만큼이든) 원하는 대로 보십시오. 그러나 (청정에) 익숙한(뛰어난) 사람들은 그것(명색)에 의해 청정을 말하지 않습니다.
Passaṃ naro dakkhiti nāmarūpaṃ, / disvāna vā-ñasasti tāni-m-eva, / kāmaṃ bahuṃ passatu appakaṃ vā, / na hi tena suddhiṃ kusalā vadanti.[Sutta Nipāta p.177.(909)]
위 경문에서 ‘그것들만(tāni-m-eva)’이라는 복수형의 표현은 ‘名(수, 상, 사, 촉, 작의)과 色’만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걸레는 빨아도 걸레인데, 걸레를 빨아놓고서 거룩한 체하는 행태’를 비꼬는 경문입니다. 진짜 청정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dvaya(드와야)’에서 ‘청정(suddhi)’을 말하는 어리석음은 답이 없는 것입니다.
‘六內外入處들(cha-ajjhattikabāhirāni āyatanāni)’을 心의 입장에서 보면 ‘명색’인데, 그 상황에서 <心의 고짜라(gocara, 고유영역)인 담마(법)>을 아누빠사나하여 ‘법을 드러내는 것’이 진짜 청정을 향하는 길입니다. 니까야에서 ‘법을 드러내는 것’은 ‘결박(saṁyojana, 쌍요자나)을 드러내는 방법’이 가장 많이 설해지는데, 그러한 이유는 ‘결박(saṁyojana, 쌍요자나)의 대상은 항상 담마(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경문이 설해지는 것입니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는 六內外入處들(cha-ajjhattikabāhirāni āyatanāni)에서 ‘法을 대경(위사야)으로 法隨觀’하는가? 비구들이여, 이 세상에서 비구는 眼을 분명히 알고 色을 분명히 알며, 그 양자(ubho)를 조건으로(paticca) 생겨나는(uppajjati) 결박(saṁyojana, 쌍요자나)을 분명히 알고, 아직 생기지 않았던 결박(saṁyojana, 쌍요자나)이 생겨나면 그대로 분명히 알고, 이미 생겨난 결박(saṁyojana)을 버리게 되면 그대로 분명히 알고, 이미 버려진 결박(saṁyojana, 쌍요자나)이 미래에 생겨나지 않는다면 그대로 그것을 분명히 안다. ….[MN. vol.1. p.61]
말하자면 ‘dvaya(드와야)’에서 ‘법을 드러내는 것’이 ‘탈출구이며, 해탈로 가는 길이며, 열반으로 향하는 방도’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원시불교가 ‘중(中, majjhe)이라고 부르는 관점’이며 ‘중도(majjhimā paṭipadā)사상’의 근간입니다. 말하자면 ‘아비담마가 중도(=팔정도)’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매우 난해한 이야기이지만 언젠가는 본 카페에서 설명될 것임.]
중도에서는 ‘팔정도가 대표적’인 것이고, 칠각지도 중도입니다. 그러한 칠각지(=중도)에서 ‘dvaya(드와야)’가 언급되는 양상[=빨간 칠을 한 것들]을 살펴보기 위하여 관련 경문을 인용합니다. 대상이 ‘두 겹(dvaya)’이기에 깨달음도 ‘두 겹(dvaya)’이 되어야 하는 이치입니다.
Yad api bhikkhave ajjhattaṃ dhammesu sati tad api satisambojjhaṅgo, yad api bahiddhā dhammesu sati tad api satisambojjhaṅgo. Satisambojjhago ti iti hidaṃ uddesaṃ āgacchati, tad aminā petaṃ pariyāyena dvayaṃ hoti.
비구들이여, 內로(ajjhattaṃ) 法들에 관한 사띠(sati)도 念覺支이고, 外로(bahiddhā) 法들에 관한 사띠도 念覺支이다. 念覺支는 이러한 설명에 이르러, 이 방법에 의해 두 겹(dvaya)이 된다.
Yad api bhikkhave ajjhattaṃ dhammesu paññāya pavicinati pavicarati parivīmaṃsam āpajjati tad api dhammavicayasambojjhaṅgo. Yad api bahiddhā dhammesu paññāya pavicanati pavicarati parivīmaṃsam āpajjati tad api dhammavicayasambojjhaṅgo. Dhammavicayasambojjhago ti iti hidaṃ uddesaṃ āgacchati, tad aminā petaṃ pariyāyena dvayaṃ hoti.
비구들이여, 內로(ajjhattaṃ) 法들에 대해 반야(paññā)로써 ‘조사하고 ․ 고찰하고 ․ 두루 성찰함에 도달하는 것’ 그것도 擇法覺支이고, 外로(bahiddhā) 法들에 대해 반야(paññā)로써 ‘조사하고 ․ 고찰하고 ․ 두루 성찰함에 도달하는 것’ 그것도 擇法覺支이다. 擇法覺支는 이러한 설명에 이르러, 이 방법에 의해 두 겹(dvaya)이 된다.
Yad api bhikkhave kāyikaṃ viriyaṃ tad api viriyasambojjhaṅgo, yad api cetasikaṃ viriyaṃ tad api viriyasambojjhaṅgā. Viriyasambojjhaṅgo ti iti hidaṃ uddesaṃ āgacchati, tad aminā petaṃ pariyāyena dvayaṃ hoti.
비구들이여, 身所(kāyika)에 대한 정진(viriya)도 精進覺支이고, 心所(cetasika)에 대한 정진도 精進覺支이다. 精進覺支는 이러한 설명에 이르러, 이 방법에 의해 두 겹(dvaya)이 된다.
Yad api bhikkhave savitakkasavicārā pīti tad api pītisambojjhaṅgo. yad api avitakka avicārā pīti tad api pītisambojjhaṅgo. Pītisambojjhaṅgo ti iti hidaṃ uddesaṃ āgacchati. tad aminā petaṃ pariyāyena dvayaṃ hoti.
비구들이여, 위딱카(vitakka)와 위짜라(vicārā)를 갖춘 기쁨(pīti)도 喜覺支이고, 위딱카(vitakka)와 위짜라(vicārā)가 없는 기쁨(pīti)도 喜覺支이다. 喜覺支는 이러한 설명에 이르러, 이 방법에 의해 두 겹(dvaya)이 된다.
Yad api bhikkhave kāyapassaddhi tad api passaddhisambojjhaṅgo, yad api cittapassaddhi tad api passaddhisambojjhaṅgo. Passaddhisambojjhaṅgo ti iti hidaṃ uddesaṃ āgacchati, tad aminā petaṃ pariyāyena dvayaṃ hoti.
비구들이여, 身의 輕安(kāya-passaddhi)도 輕安覺支이고, 心의 輕安(citta-passaddhi)도 輕安覺支이다. 輕安覺支는 이러한 설명에 이르러, 이 방법에 의해 두 겹(dvaya)이 된다.
Yad api bhikkhave savitakko savicāro samādhi tad api samādhisambojjhaṅgo. yad api avitakko avicāro samādhi tad api samādhisambojjhaṅgo. Samādhisambojjhaṅgo ti iti hidaṃ uddesaṃ āgacchati. Tad aminā petaṃ pariyāyena dvayaṃ hoti.
비구들이여, 위딱카(vitakka)와 위짜라(vicārā)를 갖춘 三昧(samādhi)도 定覺支이고, 위딱카(vitakka)와 위짜라(vicārā)가 없는 三昧(samādhi)도 定覺支이다. 定覺支는 이러한 설명에 이르러, 이 방법에 의해 두 겹(dvaya)이 된다.
Yad api bhikkhave ajjhattaṃ dhammesu upekhā tad api upekhāsambojjhaṅgo, yad api bahiddhā dhammesu upekhā tad api upekhāsambojjhaṅgo. Upekhāsambojjhago ti iti hidaṃ uddesaṃ āgacchati, tad aminā petaṃ pariyāyena dvayaṃ hoti.
비구들이여, 內로(ajjhattaṃ) 法들에 관한 평정도 捨覺支이고, 外로(bahiddhā) 法들에 관한 평정도 捨覺支이다. 捨覺支는 이러한 설명에 이르러, 이 방법에 의해 두 겹(dvaya)이 된다.[SN. vol.5. pp.1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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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겹(dvaya)’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요즈음의 현대철학에서는 <접면이론(接面理論)>이란 것이 ‘최신의 인식론’으로 떠오르고 있는데요. 이 <접면이론(接面理論)>이라는 것이 원시불교의 ‘두 겹(dvaya)’에 대한 이야기와 엄청 닮았습니다.
동국대학교 고창택교수가 『哲學硏究』 제93집(대구: 大韓哲學會, 2005. 2)에 발표한 논문인 「사이버세계의 존재론-가상 ․ 현실 ․ 실재의 존재론적 관계 분석 및 다른 세계들과의 비교를 중심으로」에서 언급한 ‘접면 존재론’에 의하면, 접면의 존재론적 구조가 ‘안↔[안↔밖]↔밖’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현대철학이론인 접면이론(接面理論)에서는 뫼비우스 띠(Mobius strip)라는 ‘안과 밖을 구별할 수 없는 하나의 면을 가진 곡면’을 들어 ‘[안↔밖]’ 부분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부분이 접면(interface)으로서 ‘안과 밖이라는 둘 사이에 동시적인 상호번역이 일어나는 곳’이라 합니다. 그와 같은 현대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접면이론과 흡사한 구조’를 의미하는 니까야의 용어가 <dvaya(두 겹, 이중) ․ saṃyutta(相應) ․ ubhaya(둘 다, 양자의) ․ yamaka(쌍, 셋트, 둘씩) 등>의 용어입니다.
불교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하여 좀더 깊이 연구해 볼 가치가 있는 용어가 ‘두 겹(dvaya)’이라는 용어이고, ‘봉행’님께서 혼란스럽고 <뭔 말하는거니...?>라고 스스로 물으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일체는 ‘허공에 아물거리는 꽃과 같은 것들’이지만 현실적으로 그것들이 우리를 괴롭게 하고 있습니다. 그 문제를 불교는 다루고 있는 것이기에 ‘봉행’님의 말씀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라, 해결책을 동시에 제시하는 것이 본인 자신에게도 현명한 설명이라는 지적입니다. 무조건 <일체는 ‘없다’. 거짓이다. 가짜다>라고 설득해 보아도 자신 깊은 곳에서 스스로 납득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기에 ‘정밀하고 논리적인 설명’이 자기 자신에게도 필요한 것이고, 그러하기에 골치 아파도 ‘원시불교’입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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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차근 차근이 걸어가야만 하는 길이기에 공부하고 있는 중임. '봉행'님 덕에 제가 부지런해져서 ㅋㅋㅋ 공부는 제가 하는 것 같고, 봉행님께서는 이해가 되시지 않는 모양입니다.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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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봉행'님도 성취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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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거의 다 온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인터넷이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는 것이라서 ........... <서로간에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인지?>를 확인해 가면서 이야기를 진행하기 힘든 것이 인터넷이니. 핵심은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설명하려 하셨는가?>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분이 '화살을 맞고 괴로워서 의사를' 찾았습니다. 그 의사가 해야 할 일은?
"화살을 맞으면 괴롭습니다."라는 것을 자세히 설명하고, '화살이란 이러한 것입니다'를 설명하는데 그치면서 치료비를 내라고 할 수 있을까요? ......... 다른 종교나 가르침들은 그렇게 합니다. 네가 잘못해서 괴로운 것이니 '네 죄(=원죄)를 네가 알렸다'고 합니다. 자신들이 창조주 대신 참회를 받아 줄테니 십일조를 꼬박꼬박 바치는 것으로 창조주 대신 용서를 해주겠노라 합니다. <========도대체 이게 치료라는 겁니까? 뭘 치료한 거에요? 뭘?
의사도 아닌 것들이(지들이 더 큰 환자인 주제에), 겨우 마약이나 주사할 줄 아는 것들이 의사행세를 하면서, 진짜 의사들을 '미신을 가르치는 자들'이라고 비난 하는 잠꼬대와 소위 '믿음'이라는 것을 강요(안 믿으면 어쩐다고 하데요, ㅋㅋㅋ)하는 수준............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셨나요?>
불교가 어떤 점에서 차별을 가지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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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 12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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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핵심은 '답'이 아니라, <왜? '12연기'인가?> 하는 점입니다. 왜?
또한 <어떻게?>입니다. '12연기'란 부처님께서 제법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신 것이거든요. 그렇다는 거에요. 생로병사의 비밀이라는 것이 그렇다는 설명이십니다. 여기에서............ 그 답이 도출되는 동기가 있습니다.
또한 <어떠한 상황에서 도출된 '답'인가?>가 핵심입니다.
나아가 '그 답'을 해결하는 방법은?[<==========이것이 치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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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불교를 오해하게 되면 어떻게 오해하게 되는가?>에 대한 '모법사례'로 삼고 싶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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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의지하지 말고) 자신을 의지처로 하고, 자신을 등불삼고 / 법을 의지처로 하고, 법을 등불 삼으라>는 말씀을 하는 불교에 <왠? 난데없는 '자아에 대한 지독한 혐오'가 나오는지>?
'지갑에 돈이 없다'는 말이 '이 세상에 돈이 없다'는 말임?
'오온에 아뜨만이라는 것이 없다'는 말에서, <오온은 고집멸도, 아뜨만은 사견, 있다거나 없다는 생각은 극단론.> 인데, 이 말이 '자아에 대한 혐오'로 해석됨? 부처가 되거나 아라한이 된분들은 <개인적인 개성이 없는 분들임?> 오호~~~~~~~~ 놀랄만한 깜짝 놀랄만한 견해이십니다.
어떤 면에서는 차라리 <더 독특하셨던 분들> 아닙니까? 부처님을 위시한 여러 아라한들을 보면요, 한 분도 같은 분들이 없습니다. 전부들 개성들이 대단 하셨던 분들입니다. 그 분들은 '현실을 피하거나, 정면대결를 회피하셨던 분들'이 아니고, 어찌보면 중생들보다 더 '욕심의 스케일이 컸던 분들'이라고 저는 봅니다. 보통의 욕심장이들이 아니셨다고 보는 겁니다. 배짱도 대단하셔서 '조폭도 그런 조폭들'이 없었던 것 같아요.[참으로 오해의 소지가 많은 표현임.] 또한 참으로 현명하시고 똑똑하기가 아인슈타인급들이셨습니다. 우리는 그 분들에 비하면 '진짜 헛 똑똑이들'이지요. 세속의 일에 영악한 것을 부러워 하는 시각으로 보면,
답이 없지만, 단지 '한 생을 통하여' 성취하신 것들을 보십시오. 그 점을 부러워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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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 '내로(아자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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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로(아자땅) 먼저 해결하여야만 외로(바히다) 앎과 봄이 생겨남.
ㅎㅎㅎㅎㅎㅎㅎㅎㅎ. 본 게시판에 설명되어 있음.(약 5군데의 본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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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리지요. <오온을 떠나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님>이지요.
꼭 '자아'이어야 되나요? '부처'가 있음 안되나요?
오온을 '있는 그대로 보니까' 엉터리더라는 말씀. 그래서 부처가 되셨다는 말씀. 그 말은 <오온에서 자아를 보는대신>으로 <오온이 엉터리임을 보고 '부처'가 되었다>는 말이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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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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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로와 외로'는 게시판에 공개했고, 또 하고 있고(더 할 것이 남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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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님 같은 분이 '나중에 깨닫는다'고 알고 생각합니다.
간사하고, 자신의 견해를 감추고, 웃는 얼굴만 하는 사람은 '나중에도 못 깨닫는다'고 저는 알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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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설명이 되어 있다니까요. 다른 글들은 전혀 읽지 않으면 곤란. 자신의 이야기에 대한 답변만 읽으시면 섭섭. 짧은 실력에 죽어라고 고생해서 쓴 글들인데.
그 설명이 하도 길어서(본 글에 보시면 '문법'까지 동원해서 설명하고 있음) 그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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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 ~~~~~~~~~~~~~~
제가 불교를 왜곡하는 면이 있다면, 지적 받고 싶은 생각에서 연 것인데. ㅋ.
같이 시작하자고 했던 분들이 '성이 나서'인지 안 들어오시고 저만 남아서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데 님이 들어 오셨던 겁니다. ㅋ. 본인들은 '먹고사니즘에 바빠서'라고들 합니다. 실제로 또 그렇기도 하고요. 불교전문가들은 한국에서 '직업으로 불교를 할 환경'이 안됩니다. 자리가 다 합해도 100개도 안됩니다. 일본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지요. ㅎㅎㅎㅎㅎ. 그 양반들 엉뚱한 직업을 가지고, 그래도 열심히 살아가시는데 '뭐라고 말할 입장'도 아니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음'입니다. 보테주지는 못해도 쪽박을 깰수는 없는 이치니.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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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겠지요. 추가로 더 자세하게 설명하겠음.(지적을 받아야 하는데, 혼자서만 지껄이고 있으니............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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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요.
k?yo bahiddh? 에 대한 해석이 외부의 까야 아닌가요?
외부의 그리고 명색이 직역이라고 보네요..
이게 명색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거죠...
명색은 분리 상태를 말하지 외부의 대상만을 말하지 않죠..
고정관념 때문에 어렵긴 하겠지만,
한번 고심해보시길...
아자땅(=안으로, 內로)과 바히다(=밖으로, 外로) ............는 형용사가 아니고 부사라니까요........ 부사.....
@아위자 그리고 문법상 .... 위 경문에서 ...... 바히다(bahiddha)는 kayo와는 아무런 관련 없는 단어이고요, namarupam과 관련되는 단어 입니다.
@아위자 결국 <외부의 명색>이라고 번역하면 '직역'이 아니라........ <내부의 '명색'>이 있을 수 있다는 의미를 은연 중에 내포하게 되어 '또라이 번역'이 됩니다. <'밖으로 명색'이나, 외부에 명색>이 되어야 함.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_()_ _()_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