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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민들레가 우리나라를 향해 올라오고 있다. 작년 이맘때 우리나라를 쑥밭으로 만든 매미의 악몽이 재현되는 것은 아닌가 우려가 앞선다. 두 태풍의 이름을 작명한 나라가 북한이라는 대목에 가서는 불안한 조짐이 현실로 다가올 것만 같았다.
모처럼 얻은 해외여행의 기회가 태풍에 쓸려 날아가 버리는 것은 아닌지 조바심하는 나를 들여다본다. 가슴 깊숙한 곳에 뭉쳐있던 이기심 덩어리가 껍질을 깨고 고개를 내민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걱정하는 달콤한 포장을 둘러 쓰고 …
우리나라 해상으로 빠르게 접근해 오던 태풍 민들레가 뜻밖의 암초를 만난다. 제주도 남쪽 바다의 수온이 낮아 더 이상의 수증기를 공급받지 못해 세력을 키우지 못하던 차에, 남하하던 대륙성 찬 공기의 영향으로 소멸하고 말았다. 착한 국민을 위한 하늘의 배려였겠지만, 우리 11명 견학반의 앞날을 축원하는 징조로 알고 들뜬 마음으로 일본행 비행기에 오른다.
6,80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열도이지만 한반도의 1.7배에 이르는 큰 땅덩어리를 가지고 있고, 세계 최고의 경제력으로 미국· 중국 등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왠지 모를 긴장감으로 신경이 팽팽해진다.
무엇을 배워야하나, 어떤 관점에서 보아야 그들을 이길 수 있을까,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돌다 간다. 무심결에 내려다본 窓속에 간사이국제공항과 한 무더기 푸른 숲이 바다 위에 떠있다. 화산으로 이루어진 섬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척박한 대지를 연상했는데, 푸른 숲과 시내를 가로지르는 깨끗한 강을 보고 비행기 항로가 잘못되지나 않았나 눈을 비벼본다.
한시간여 만에 내린 간사이공항은 소음과 높은 지가로 인한 보상문제 등 여러 가지 걸림돌을 고려한 끝에, 바다를 메워 공항을 건설하고 다리로 육지와 연결시킨 인공섬이다. 영종도 인천국제공항의 모델이라는 설명을 듣고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는 신기루 같은 나라는 아닌지 경이감마저 들게 한다.
비행기에서 내려 처음 맞이한 공항 직원이 칠순노인과 앳된 소녀였다. 상큼하게 예쁜 여직원이 맞이할 거라는 나의 상상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앳된 소녀의 싱그러움과 노인의 연륜이 조화를 이루어 오히려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일본인의 평균수명이 팔십이 넘는 장수국가이며 근면한 국민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약속시간에 1분의 오차도 없이 도착한 관광버스 운전사 역시 머리가 하얗게 쉰 노인이었다. 그러나 우리 일행이 약속보다 10분 정도 먼저 도착한 탓에 도로변에서 지루하게 기다리면서, 융통성 없이 정확한 일본인의 시간관념이 오히려 불편할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로 다가와 여행기간 내내 불편함으로 따라다녔다.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하면서 가장먼저 방문한곳이 나라 현청이었다. 당초의 계획에는 없었지만 일본의 세무행정과 우리의 세무행정을 비교해보는 것도 뜻 있는 여행이 될 수 있다고 공감하여 다른 한 곳을 생략하고 일정을 바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제대로 된 견학을 할 수 없었다. 점심시간이라는 시간적 제약과 예약이 되어있지 않다는 정형화된 사고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우리 같으면 다른 약속을 미루고라도 만나주는 외국인에 대한 배려가 있을 법도 하지만, 그들의 철저한 예약문화가 오히려 인간미를 상실한 것 같아 씁쓸하였다. 그러나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안내 여직원의 모습에서 일본인의 친절함만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간단한 점심을 먹고 나라현의 동쪽에 위치한 동대사를 방문하였다. 사찰 입구에 들어서자 커다란 금강역사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팔, 다리, 머리, 몸통을 따로 조각하여 끼워 맞춘 불상으로 기계적이고 정형화된 일본문화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았다.
사찰 경내에는 사슴들이 무리 지어 다니며 관광객들이 던져주는 과자를 받아먹고 있다. 일부 배부른 사슴은 잔디밭에 누워 오수를 즐기고, 뿔 위에 내려앉은 비둘기 역시 꾸벅이며 졸고 있는 모습이 평화롭다. 70년대 학생의 까까머리 같이 다듬어진 잔디밭과 하나같이 정형화된 나무, 불상 앞에 머리 조아리는 일본인들, 이 모든 것이 어떤 보이지 않는 틀에 의해 움직이는 조형물 같은 느낌이 강하게 와 닿는 것은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없지만, 여행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나라지역에 창궐한 천연두를 불력으로 이겨내기 위해 행기라는 스님이 전국을 순회하며 모금하여 건립한 절답게 대웅전 입구에 약사여래상이 버티고 서있다. 붉은 옷을 걸치고 무시무시한 인상으로 노려보는 약사여래상에 천연두 균이 스스로 도망갈 것 같다며 일행과 킬킬거리며 대웅전에 들어서다 깜짝 놀란다. 대웅전 내의 기념품 매장에서 영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찰 운영비 조달이 목적이겠지만 종교를 이용한 노골적인 상행위에서 그들의 경제의식을 엿보는 것 같았다.
높이 47.5M의 대웅전 안에는 거대한 나라대불이 앉아있었다. 얼마나 큰지 대웅전을 받치고있는 기둥에 구멍을 뚫어놓고 대불의 콧구멍과 크기가 같다며 들어가 보라고 한다. 무사히 통과하면 무병장수 한다는 소리에 못이기는 체 들어가면서 은근히 사실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인다. 평소 건강이 썩 좋지 않은 탓도 있지만 오래 살고싶은 욕심이 앞서서일 것이다.
동대사(東大寺)를 뒤로하고 다음 행선지 교토로 향하면서 머릿속을 정리해보지만 단순히 크다는 느낌밖에 남는 것이 없다. 불국사의 신비롭고 오묘한 향기, 해인사의 신성하고 경건한 느낌은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다. 시내 곳곳에 있는 납골당과 회색의 침침한 건물에서 풍기는 음습한 기운이 후덥지근한 날씨와 뒤엉켜 왠지 정이 가지 않는 하루였다.
일본에서의 첫날밤을 무의미하게 보낼 수 없다는 우리들의 욕구가 일치하여 교토의 밤거리 기행에 나섰다. 794년 간무천황 때 천도한 후 약1,100년 간 정치와 문화예술의 수도 역할을 해온 도시답게 휘황찬란했다.
유흥가를 어슬렁거리며 지나가지만 호객행위가 없어 섭섭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비싼 물가 탓에 선술집에서 생맥주 한잔으로 만족하고 나오는데 전통 게이샤 하나가 급히 도로를 가로지르고 지나간다. 얼굴에 횟가루 칠을 한 듯 종잇장 같은 얼굴이었다. 손님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어 화장한 것이 아니라 본 모습을 감추려는 여인의 마지막 자존심임을 알았을 때 연민의 정이 느껴졌다. 숙소로 발길을 돌리면서 뭔가 모를 아쉬움에 자꾸 뒤가 돌아 보인다.
일본체류 이틀째다. 조금씩 일본문화에 익숙해지는 것 같다. 음식도 입에 맞아가고 '아리가도 고다이마쓰'가 자연스레 흘러나온다. 점점 여행에 재미가 붙는 것 같다. 가벼운 마음으로 교토시내관광에 나선다.
1,200년 전 건설한 도시의 도로가 마치 바둑판처럼 반듯하다. 천년의 역사가 웅크리고있는 도시답게 시내 곳곳에서 풍기는 역사의 향취는 우리를 취하게 만들고, 나지막하지만 오랜 역사를 안고있는 고가들이 우리를 반긴다. 문화재 보호를 위해 고도를 8층까지 제한하고있다는 가이드의 설명에 함안의 고도제한이 연상됨은 내가 공무원이기 때문이리라.
정토신앙의 본산지인 동본원사(東本願寺)에 들렀다. 이 사찰은 도쿠가와이에야스가 본원사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막부 초기에 건립한 일본에서 가장 큰 목조건물로서 여러 번의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95년에 재건하였다. 신발을 벗고 건물 내부를 둘러볼 수 있도록 되어있으며 건물들이 전체적으로 크고 거무스름하며 사찰로서의 경건함보다는 침침한 분위기가 건물 내에 가라앉아 있었다.
이어서 들 런 청수사(淸水寺)는 교토 동쪽 산언덕에 자리잡고 있었다. 일본 최초의 쇼군인 정의대장군의 딸이 결혼하여 아기를 갖지 못하자 아들 낳기를 기원하며 건립한 사찰로, 계곡 쪽으로 돌출한 본당의 넓은 마루는 139개의 큰 나무기둥으로 지탱하고 있었다. 이 사찰에는 11면 관음보살을 모시고있으나 30여 년을 주기로 공개하는 비밀의 불상으로 유명하다. 특이한 점은 경내에 신사(神社)가 같이 있었다. 불교와 일본 고유의 신도(神道)가 결합된 형태의 사찰로 전형적인 일본냄새를 물씬 풍기고있었다. 여기도 동대사와 마찬가지로 사찰건물 내부에서 기념품을 팔고 있었으며, 500엔 하는 목판에 소원을 적어 걸어 놓고있었다. 우리나라 사찰의 기와불사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소원을 구체적으로 명시한다는 점에서 일본인의 이기적 심성을 엿볼 수 있었다.
피곤한 다리는 버스에서 쉬고 강행군 끝에 당도한 교토 최대의 신사(神社)인 평안신궁은, 1868년 일본의 수도가 교토에서 도쿄로 천도하자 이를 아쉬워한 교토 사람들이, 나라에서 교토로 천도한 광무일왕을 모시는 신사를 세우고 교토의 새로운 영광을 기원한 곳이다. 정문에서 신궁까지 100여 M의 광장에 자갈을 깔아 자객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었다. 칼날 위의 삶을 살아온 일본인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그들의 의심 많은 국민성 탓으로 돌리는 내 비뚤어진 역사의식에 스스로 놀라며, 백제의 피가 흐르는 천망궁으로 발길을 돌린다.
천망궁은 백제사람으로 일본 응신천왕의 초청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가 학문과 인륜의 기초를 세우고, 그들이 자랑으로 삼는 아스카문화와 나라문화의 원조가 된 왕인 박사의 후손을 모신 곳이다. 앞서 관람한 신사들과 다른 점이 없었음에도 친근감이 느껴진다. 같은 핏줄이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남다른 정이 느껴지는 것은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기 때문이리라.
2일차 마지막 방문지인 오사카성에 들렀다. 천하를 통일한 풍신수길이 전쟁을 끝내고 무료해진 병사의 관심을 돌리고, 국민 장악력을 높이기 위해 건설하였다. 오사카성은 의심과 잔꾀가 많은 풍신수길의 품성을 보여주는 듯이 성벽 바깥과 내부에 이중의 호수를 만들어 외부 자객의 침입을 방지한 것이 내가 보아온 성들과는 다른 특이한 점이었다.
성안에 있는 오사카시립박물관은 이틀동안 보아온 건축물의 양식과는 달리 서구 풍의 고색 찬연한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그러나 천수각 내의 전시실에는 전쟁을 즐기는 민족다운 호전적 기상으로 가득했다. 그림도 계절별 전투장면을 걸어놓았고, 최근 도검 협회에서 주관한 대회에서 입상한 도검들을 진열해 놓고 즐기는 그들의 문화감각에서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다음 여행지인 벳부로 가면서 이동시간을 절약하고 여행재미도 높이기 위해 밤새도록 항해하는 관서기선을 탔다. 선실에서 일본 전통 요리로 저녁을 즐기고 선창으로 올라가 흐르는 바람을 뱃속깊이 받아들이니 속까지 후련하다. 거무스름한 구름 속에서 바람마저 붉게 물들이는 낙조를 벗삼아 일행들과 소주잔을 돌린다. 목젖을 타고 내리는 소주의 짜릿함으로 이틀 간의 피로를 씻어 내리고 선미를 스쳐 가는 바람에다 사랑을 실려보낸다. 내 숨결과 체온 가득 싣고 진동 앞 바다에 먼저 도착하거들랑 여항산 자락의 아담한 자택에서 다소곳이 기다리는 아내에게 애틋한 사랑 전해주기를 바래본다.
한 폭의 붉은 비단처럼 펄럭이던 낙조가 거대한 용트림으로 변하고, 수평선 저쪽에서 반짝이는 파란 등대불은 은빛비늘을 뒤집어 헤엄치는 바다를 비춘다.
어느새 떠오른 샛별은 하늘을 밝히고 향수에 빠진 내 마음은 파도를 타고 고향으로 향하는데, 철없는 해풍은 눅눅한 수건으로 목을 감아온다. 점차 어두워지는 선창의 술자리는 선실로 옮겨지고 군대의 내무반처럼 양쪽으로 갈려진 침상은 추억을 더듬게 한다. 얼큰한 술기운으로 잠을 청하지만 엔진소음과 가끔 울어대는 뱃고동소리가 설핏 든 잠을 깨우고, 누웠다 일어서며 꾸불텅 다가오는 파도는 해상에서의 하룻밤을 각인시킨다.
밤새 소음과 흔들림으로 잠을 설치다 벳부의 유황온천에 몸을 담그는 것으로 일본에서의 3일차 일정을 시작한다.
국내 온천에 비하여 작고 소박하지만 꼭 필요한 시설들은 갖추고있어 불편함이 없었다. 한시간 여 동안의 온천욕으로 묵은 피로를 풀고 벳부의 명물 바다지옥으로 향한다. 섭씨98도의 온천수는 용암이 끓듯 부글거리며 끊임없이 수증기를 토하고,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에 흩어지는 수증기 사이로 드러내는 붉고 푸른 음산한 바위들, 근처의 작은 연못에 군데군데 떠있는 연꽃송이가 불가에서 이야기하는 초열지옥과 유황지옥이 이럴까싶은 생각이 든다.
이웃해 있는 피지옥 한곳을 더 돌아보고 내려오는 버스 속에서 벳부시내를 바라보니 온통 수증기로 자욱하다. 끓어오르는 힘을 주체하기 어려운지 바위틈으로, 언덕배기 갈라진 지표를 가르고 곳곳에서 피어오른다. 일부 가정에서는 마당에 파이프를 꽂아 온천수를 뽑아 쓰고 있었다. 벳부시 지하에 용암이 끓고있는 것은 아닐까? 살고있는 주민들은 불안하지 않을까? 괜한 걱정에 머리를 흔들다보니 어느새 버스는 아소지역으로 향하고 있다.
벳부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도로변에는 삼나무가 모를 심어놓은 듯 빽빽하게 서있다. 버스가 굴러 떨어져도 푹신하여 다치지 않겠다는 농담의 이면에는 잘 가꾸어진 삼림에 대한 부러움이 숨어있었다. 이 좋은 목재를 두고도 젓가락이나 건축용 자재는 수입하여 사용한다고 하니 그들의 이기심이 짐작된다. 잘 다듬어진 산길을 따라 오르며 펼쳐지는 목초지대에 한가로이 노니는 소 떼들에서 여태 느끼지 못한 평화가 보이고, 국립공원 꼭대기의 대관봉을 중심으로 펼쳐진 끝이 보이지 않는 평원은 제주도에 온 것은 아닌가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소국립공원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아소활화산을 찾았다. 아직도 살아있는 화산답게 거대한 웅덩이 속에서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어느 순간 불어온 골바람이 연기를 밀어내고 분화구는 바닥을 드러낸다. 붉고 시커먼 바위를 안고 끓고있는 온천수와 앙상한 용암의 흔적들에서 지옥도를 연상한다. 어릴 때 보았던 지옥문이라는 영화의 배경은 아니었는지 생각해본다.
인근에는 군데군데 거대한 웅덩이들이 입을 벌리고 있다. 풀 한 포기 물 한 방울 보이지 않는 죽음의 땅이다. 유일하게 한곳에 이름 모를 풀이 끈질긴 생명력으로 또아리를 틀고있다. 10억 년 전 폭발한 화산에서 이제야 새 생명이 뿌리내리는 것이다. 자연의 무서움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금만 아래로 내려오면 삼나무들이 줄지어 서서 키재기를 하고 있다. 마치 성냥개비 끝에 파란불꽃을 피우고 불꽃놀이를 하고있는 것처럼 일렁인다. 이곳이 바로 극락과 지옥을 구분하는 경계지점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지친 다리를 끌고 도착한 호텔에서 반가운 얼굴들을 만난다. 부산에서 온천을 즐기러온 아줌마들과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정겹다. 며칠동안 일본사람만 보다 한국인을 보니 역시 예쁘다. 같은 핏줄이 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일본인보다는 한국인의 체형과 용모가 우성인 것은 분명하다. 의기투합한 우리들은 호텔지하의 노래방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을 목놓아 부르며 좋은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에 가쁜하게 숙면을 취할 수 있어 좋았다.
오랜만에 깊은 잠을 즐긴 탓인지 모두들 얼굴이 밝다. 관광버스와 함께 나가사키행 배에 오르는 것으로 나흘째 일정을 시작한다. 우리 외에도 십여 대의 승용차와 버스 한 대가 먼저 자리를 잡고 우리를 기다리고있었다.
나가사키항에 배가정박하자 14년 전의 화산폭발로 새로 생긴 평성신산이 보인다. 조림에 힘을 얼마나 쏟았던지 벌써 푸르름을 자랑하고있었다. 인근에는 그때의 폭발로 화산재가 덮쳐 매몰된 가옥을 철거하지 않고 원형대로 보존하고 있다. 자연의 무서움을 일러주는 산 교육장이다.
시내 곳곳에 우리와 같이 쓰레기를 내어놓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속이 보이지 않도록 검은 비닐봉지로 포장을 하였다. 까마귀가 쓰레기 봉지를 쪼아 뒤집어놓기 때문에 까마귀 눈을 속이기 위해서이다. 얼마나 기승을 부리는지 노약자는 혼자서 길을 다닐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처참한 매몰 현장을 뒤로하고 운젠 지옥순례코스로 향했다. 수백 명 억울한 원혼들의 비명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길바닥에 예수를 그려놓고, 밟고 지나가게 하여 천주교 신자를 가려낸 후, 끓는 온천물에 던져서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무심코 불어오는 바람은 그 날의 아픔을 기별하고, 하늘조차 갑자기 눈물을 쏟는다.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원혼을 위로하는 마음으로 순례코스를 밟으니 빗물인지 눈물인지가 구분이 안 된다.
여태까지와는 전혀 이질적인 테마 리조트공원 하우스 텐 보스로 이동했다. 모방의 천재다운 발상과 노력이 그대로 나타난다. 영화에서나 보던 꽃과 풍차와 운하, 네덜란드 식 건축물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운하에서 헤엄치는 오리의 머리위로 은빛 햇살이 내리고 색색으로 웃으며 반기는 꽃들, 깔깔거리며 뒹구는 아이, 행복에 겨운 신혼부부, 마치 동화 속의 궁전이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과학의 경이로움을 완벽하게 구성하여 우리들의 눈을 어지럽힌다. 대항해 체험관에서는 폭풍우를 헤치고 항해하는 선원이 되어보고, 오르골 환타지아에서 18세기 유럽에서 제작된 뮤직박스의 아름다운 선율을 귀에 담고, 세계적 귀중품을 수집하여 관광자원으로 삼는 그들의 상술에 다시 한번 놀란다.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나가사키 짬뽕으로 이른 저녁을 들고 바다와 범선과 운하를 비추는 별을 친구 삼아 소주잔을 돌린다. 하늘을 가르는 폭죽소리에 이어 금빛가루가 하늘 가득히 쏟아진다. 첨단 레이저광선은 눈을 어지럽히고 간간이 피어나는 불꽃들은 환상을 부른다. 수천 수만 개의 별들도 일제히 여행자의 가슴에 쏟아진다. 한쪽에서는 배우들이 춤과 노래로 뮤지컬을 공연하고 있다. 뜻은 몰라도 눈은 즐겁다. 여독에 지친 여행자를 위로하기에 충분한 깜짝 공연이다.
하우스 텐 보스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후쿠오카로 이동한다. 왕인 박사를 기리는 천망궁에는 한국인들이 태반이다. 길가 기념품 상인들이 서투른 한국말로 손님을 부르고 이것저것 선물 고르느라 마음이 바쁘다.
일찌감치 여행을 마무리하고 버스에 앉아 기억을 정리해 본다. 길가를 장식하는 울긋불긋한 깃발들에 느껴지던 거부감, 마을마다 널린 납골당의 음산함, 일본인의 정신적 지주 신사(神社), 두 집 건너 보이는 빠찡고, 개인적으로는 질서정연하면서도 단체로는 빨간 불에 길을 건너는 뻔뻔함이 눈에 거슬린다. 체증이 없는 교통체계, 깨끗한 환경, 잘 가꾸어진 산림, 빈틈없는 장애인 시설, 부지런한 국민들이 부러웠다. 그러나 헌신적이던 아내가 정년이 되면 위자료와 함께 황혼이혼을 요구한다는 철저한 이중성에 놀랄 수밖에 없다. 잘사는 것 외엔 별로 배울 것 없는 정이 가지 않는 나라에서의 5일을 뒤로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인정 많은 이웃들이 어울려 사는 곳으로 돌아가는 기쁨에 가슴이 설렌다.
공항에 첫발을 디디고 크게 숨을 들이킨다. 역시 다르다. 이렇게 달디단 공기가 세상 어디에 또 있겠는가!
첫댓글 일본의 이모저모......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마간산격으로 보고와서 대중없이 늘어놓아 깊이가 없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감정속에 녹아내리면 더 좋은 글로 다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