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전화를 받은 것은 어제 정오 경이었다. 점심에 비빔국수나 하려고 물을 올려놓으려던 참이었다. 수화기를 통해 흘러가는 어머니 음성은 낮았지만 흔들렸다. 나는 그저 또 지인이 세상을 버렸겠거니 하고 무심히 가스 밸브를 돌렸다. 언제부턴가 어머니에게 있어 죽음은 또 하나의 일상이 됐다. 남겨진 자에게 떠나는 자는 경계를 달리하는 그 순간부터 몇 장의 사진 속에서나 떠오르는 추억 같은 것. 추억이 잦아지면 어느새 그것은 일상으로 변주된다. 부음을 알리는 전화를 받을 때마다 어머니는 베란다에 서서 한동안 화단에 있는 목련나무를 바라보는 버릇이 있었다. 생의 그림자가 길어질수록 베란다에 서는 일은 늘어났다. 고희를 넘긴 노인네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어머니의 침묵은 주위사람들을 견디기 힘들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갓 시집왔을 때야 못마땅함을 표현하는 윗사람의 침묵에 머리카락까지 정전기가 날만큼 곤두서지만, 세월이 켜켜이 들어찰수록 느슨해지는 것이 고부간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당신은 어찌된 영문인지 해가 갈수록 더욱 힘이 부쳤다. 나이를 먹은 탓일까. 20여 년을 부대끼다보니 뒷모습으로도 비루한 심사를 읽어내는 요령이 생겼지만, 그 덕에 언성 높일 일없이 서로 늙어 가는 모습을 지켜주지만, 갈수록 곤혹스러웠다. 그저 당신이 베란다에 서있는 시간 정도로 고인의 친분 정도를 미루어 짐작해 볼뿐이다. 그런 당신께서 휘청거리는 것을 보면 또 누군가가 생의 끈을 놓은 게 틀림없는 것이다. 딸각. 나는 마치 국숫발 끓듯 부옇게 불어나는 상상을 들킨 듯 미간이 떨려 왔다.
- 어멈아, 내 옥색 한복이 어딨더라?
나는 멸치국물을 다시다 말고 돌아보았다. 옥색 저고리는 칠순잔치 기념으로 형제간에 얼마씩 거둬 해드렸던 한복이다. 나이보다 젊어 보이려 애쓰는 것은 점잖지 못하다 하여 문인의 밤 행사 때나 입은 게 고작이었다. 눈빛이 마주치자 어머니는 민망한 듯 다시 목련가지로 시선을 황망히 옮긴다.
- 이를 어쩌나. 지난 번 외삼촌 생신때 다녀와서 세탁소 맡겼는데... - 그런 건 제때 찾아놓지 않고선.
화장대 거울 앞으로 건너가 앉은 어머니 목소리만 방문을 타고 넘어왔다. 누굴까. 전화를 한 사람은 누구며 또 누구를 만나러 가는 것일까. 몇 번이고 권해야 못 이긴 척 한복을 꺼내시던 어머니가 손수 물어온 것도, 옷차림이 야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곱게 펴 바른다고 애쓴 티가 역력한 분 화장과 늙은이 냄새가 싫다고 사온 카보틴향이 호기심을 부추겼다.
- 오래 전에 이민간 친군데 이번에 들어왔다지 뭐니. 운 좋게도 연락이 닿았고. 어멈아, 나 좀 늦을지도 모르겠다. - 많이 늦으시면 아범이랑 모시러 갈 테니 전화주세요. - 마음쓰지 말고 있거라. 어련히 알아서 오려고...
완강히 손을 내젓고 부산스레 나서는 어머니 뒷모습이 사라지고 난 후에야 나는 국수가 넘쳐 가스레인지 바닥에 가락가락 눌어붙은 것을 보았다. 입맛이 영 없다고 철지난 비빔국수를 들먹이던 어머니가 사라지자 그만 내 허기도 수그러들었다. 그렇다고 양념장에 넣으려던 무김치를 그냥 두자니 아까워 찬밥 몇 술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말았다. 늦햇살에 바짝 마른 빨랫감을 걷고 저녁 찬거리를 고심하면서도 어머니가 만나러 간 사람에 대한 궁금증은 부풀어만 갔다. 내심 짐작 가는 데가 있긴 했지만, 오늘처럼 황급한 당신의 뒷모습을 본 적 없기에 자신할 수만은 없는 일이다. 해는 조금씩 길어졌다. 남편은 부서단합차 회식이 있다는 전갈을 해왔다. 된장찌개에 넣으려고 달래꼭지를 따다 전화를 받았고 남은 달래뭉치를 그대로 밀쳐놓았다. 저녁마저도 천덕꾸러기 마냥 생뚱맞게 식탁을 혼자 지켰다. 오늘 같은 날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만큼 마음을 허전하게 만드는 것도 없는 법이다. 어머니는 빼놓지 않던 일일드라마 ‘날마다 행복해’가 끝나고 뉴스 프로그램이 시작된 뒤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뉴스가 끝나갈 무렵 눈자위가 발그레진 남편이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들어섰다. 여느 때 같으면 눈흘김이라도 흘렸을 테지만 나는 무작정 늦어지는 어머니의 귀가에 애가 닳아 있었다.
- 어머니 아직 안 들어오셨어요. 친구 만나신다고 아까 오전께 나서셨는데... - 오랜만에 만나 회포라도 푸시는 모양인 게지 뭐.
남편의 넥타이는 바닥으로 치닿아 흐느적거린다. 나는 습관처럼 허리를 숙였다. 남편은 남들이 말하는 외아들치고는 참으로 무던한 셈이다. 어머니께서 잔병치레를 해도 변변한 약봉지 한 번 사들고 들어서질 않았다. 그것은 어머니가 키운 버릇인 셈이다. 아마도 그이가 자상하게 굴어도 바깥일 하는 사람이 사사로운 일에 마음쓴다고 핀잔이나 듣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전화를 받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오래된 친구와의 통화 치곤 조금 많이 떨렸노라고 말을 할까 망설였다. 나는 소파에 묻혀 남편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깊이 닫힌 남편의 눈꼬리는 어머니를 쏙 뺐다. 저것도 세월이 지날 수록 침묵도 짙어질 것이다. 이미 그것에 익숙해지는 연습을 한다.
- 들어가서 누워요. - ...
- 근데 여보, 아까 낮에 어머니가... - ...
남편의 숨결은 어느새 낮아진다. 하려던 말을 멈추었다. 그는 이미 내 말을 듣고 있지 않다. 당신 어머니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당신은 들으려 하지 않는다. 남편은 언제나 그랬다. 옷을 사러 가도, 하다 못해 앞길 건너 편의점에 가도 늘 제 입을 것과 먹을 것에만 관심을 보였다. 그저 곱게 자란 습관이겠거니 여기기엔 너무나 완벽하고도 불편한 에고이스트였다. 이렇게 자면 불편하잖아요. 들어가서 자. 나는 허공에다 가만히 속삭였다. 경직된 표정으로 지껄이던 앵커 어깨 옆으로 엔딩 자막이 올라갔다. 뉴스가 끝났다. 아마도 10시가 조금 못되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그만 영국씨 깨우는 것을 포기한 채 멍하니 시계만 쳐다보았다. 조금씩 불온한 상상이 일었다. 이대로 내일이 올 것 같은 예감. 그것은 달갑지 않은 일이다.
어머니는 미니시리즈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서야 집으로 돌아오셨다. 놀랍게도 문을 연 것은 영국씨였다. 내가 그만 깜박 잠이 든 찰나였다. 어머니가 11시가 다 되어서야 들어오신 일보다 영국씨가 인기척에 일어났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그는 연우가 손가락에 뜨거운 물이 튀어 자지러지게 울어댈 때도 일어나지 않았던 사람이지 않았나. 그 덕에 연우는 오른쪽 손등에 점점이 바래진 흉터가 생겼고. 그러나 분명 현관문을 연 것은 영국씨였다. 어쩌면 그는 애당초 잠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무심한 아들이었지만, 그의 심연 어딘가 에도 홀어머니 콤플렉스 비슷한 것이 꿈틀대고 있을 테니까.
- 어딜 그렇게 다녀오는 거요? - 응...그게 -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 생각해서 전화라도 주던가 하지. 또 누가 초상이라도 치릅디까?
영국씨 목소리에는 가시가 돋아 있다. 짐짓 내 앞이 여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잠을 청했던 것일까. 햇수로 꼬박 이십 년 살을 맞대고 살아왔건만, 이럴 때면 그는 건너편 아파트에 사는 그 누군가보다도 낯설다.
- 저녁은 먹고 다니는 거요? - 아 그럼 굶고 다닐까봐... 그만 들어가 자. 내일 출근 늦을라.
어머니는 제 아들의 설친 잠을 어쩔 줄 몰라했다. 정작 애를 태운 것은 나였는데. 그렇다고 야속할 것도 없었지만, 야박한 며느리가 된 것 같아 약간 서운한 마음이 솟았다. 어머니께서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난 연후에야 나도 안방에 들어왔고, 그는 이미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 빨리 불 좀 꺼주라 - 나 좀 깨우지 그랬어요. 무슨 남자가 그렇게 의리가 없냐.
마음에 있는 옹아리는 어떤 식으로든 풀고 넘어가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끔 그의 고지식함과 부딪혀 파열음을 낸다. 그는 갑자기 덮고 있던 이불을 거칠게 밀어 내친다.
- 어머니 늦게 들어오시는데 당신은 잠이 오니? 그걸 내가 꼭 깨워야 해? - 당신만 효자인 척 굴지말라구요. 어머님 늦으신다고 저녁나절 내내 동동거렸던 게 누군데...
- 알았어. 그만하고 잡시다. - 당신이랑 어머님이랑 가끔씩 나 따돌리는데 뭐 있어. 나는 이 집 식구 아닌가 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알았어야 했다. 내가 이십 년을 넘게 살림살이를 꾸려가지만, 문득 치미고 드는 까닭 없는 이질감. 마치 거죽만 살아 움직인다는 착각. 그것이 꾸물거리기만 해도 내가 억지로 버티고 있던 삶의 비밀이 한 줌의 재로 타버릴 것 같다는 것. 그러나 여느 때처럼 내가 시집살이 고충을 내비치기라도 하려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돌아누워 버리는 비겁함, 그것이 마흔 여덟에 대기업 부장 대우 자리를 억지로 붙들고 있는 최영국이란 사람이다. 나는 이쯤에서 대거리를 그만두기로 했다. 부부싸움은 어디쯤에서 흐지부지해져야 한다. 공공기업이 인터넷 통신 사업에 뛰어들면서 벌써 3개월째 영국씨는 전쟁을 치르고 있지 않는가. 저만치 멀어지고 있는 세상의 속도감에 그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을 지도 모른다.
오전 11시, 시시콜콜한 아침 정보 프로그램이 끝나고, 빨래를 널고 햇빛이 거실로 잦아들 시간. 나는 늘어지고 있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새벽밥을 해 먹이고 영국씨를 출근시키고 난 후 이었고, 연우를 학교까지 태워다주는 일도 빼먹지 않았다. 어머니는 제법 오랫동안 거실 베란다 쪽에 둔 난 화분을 닦고 있었다. 다소 느렸지만 기계적인 손놀림, 어머니의 습관에 변화가 온 것일까. 다소 긴 외출을 한 이후로 어머니의 난 손질은 횟수가 잦아졌고 목련 나무를 바라보던 버릇은 사라져 갔다.
어머니가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 사건이 있고 일주일이 지나서였다. 유난히 심란해하던 안개가 진 것도, 지우의 죽음을 치른 것도 아닌데 어머니는 눈에 띠게 수척해갔다. 나는 노인네의 흔치 않은 잔병치레가 자꾸만 마음이 쓰였다. 막내 도련님네 사돈어른이 한다는 한의원에 다녀오시라고 몇 번 성화도 내보았다. 그럴 때마다 약으로 낳을 병이 아니란 단호한 거절만 돌아왔다. 어머님 남들이 저 욕해요. 못이긴 척 한 번 가보기나 해요 하고 성화를 부려도 묵묵부답이었다. 영국씨가 퇴근해 돌아올 때까지 어머니와 나의 실랑이는 계속되곤 했고, 마치 보이지 않는 나일론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듯 했다. 사실 나는 어머니가 무엇에 그토록 허덕이는지 속시원히 터놓지 않는다는 사실에 지난 이십 년간 쌓아올린 연대의 허무함을 맛보고 있던 참이었다.
오전 마감 뉴스는 주말에 첫눈이 내릴 확률이 70%란 소식을 전해주고 끝났다. 나는 리모콘으로 케이블 채널을 돌리던 어머니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빨랫감을 널고 있었다. 어멈아. 네. 나는 하던 일을 계속하며 심상히 대답했다.
- 네가 나랑 몇 년 살았지? - 올해 지나면 햇수로 스물 셋이네요.
- 벌써 그렇게 되었나? - 그르게요.
- 겨울 지나면 영국이랑 연우 데리고 분가해서 살거라. 그 동안 고약한 시애미 수발한다고 애썼다. - ...
나는 피식하고 웃었다. 나이가 무의미해지면, 마음에 없는 말이 는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 죽음이 잦아져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늙은이의 투정은 가장 인간다운 것이 아니겠냐고. 그러나 며느리를 무안하게나 해볼 심사로 말을 하는 분은 아니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친구들은 요즘 들어 부쩍 는 흰머리가 어머니 탓이라고 거들었지만, 괘념치 않았다. 조바심 내며 사는 게 전혀 아니라고는 못할 지라도 당신의 존재는 시큼거리는 다리만큼 나를 지탱하는 버팀목이라는 것을 안다. 심장이 스르르 목구멍 위까지 밀려왔다. 뭐 단단히 노여운 일이 있으리라 짐작해봐도 짚이는 바가 없었다.
- 놀랠 것 없다. 이제 너도 늙는데, 편한 밥 먹어야지. - 그런 말씀 마세요, 기력이 예전 같지도 않으시면서 - 살아보니 다 허무하더라. 그저 내 좋은 것만 고집하면서 살 걸 그랬어...
그제야 나는 빨랫감을 널다 말고 돌아보았다. 어머니의 초점 없는 눈동자는 허공을 응시한다. 일흔 셋을 넘기는 어머니 손등에는 부쩍 검버섯이 늘었다. 처음 검버섯이 생긴 적에는 죽음의 인두라도 찍힌 것처럼 자꾸 손을 씻어대고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그토록 늙어 가는 것을 밀쳐내던 어머니가 나를 분가시키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이유가 늙기 전에 편히 살아보란 것임을 놓고 나는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9시 뉴스를 진행하는 여자 아나운서와 국내 굴지 재벌의 2세가 벌인 애정행각이나, 영화배우 L씨가 이혼을 했다는 독점기사를 빼다시로 박은 11월호 ‘주부생활’을 넘기면서 나는 킥킥대지도, 게네들이 그렇지 하며 위안 삼지도 못했다. 무엇일까. 고고하고 정갈한 당신이 갑자기 삶의 예찬을 들먹인 연원은. 나는 연우가 돌아올 때까지 저녁식사 준비도 잊어버릴 만큼 생숭거렸다.
다음 날 아침 어머니는 지난번에 입고 가지 못한 옥색 한복을 손수 찾아왔다. 동인들 모임이 있으시냐고 묻자 아니라고 말끝을 흐렸다. 늦으시냐고 되묻자 늦으면 전화를 넣겠노라고 하시곤 허둥지둥 나섰다. 베란다에 빨래를 널다 코피가 터졌다. 나는 얼굴을 위쪽으로 젖히다 햇살에 눈살을 찌푸렸다. 하늘은 그야말로 투명에 가까운 블루 톤이었다. 쌀쌀한 기운은 완연했지만, 제법 얼굴에 따갑게 와 닿는 햇살에 나는 코피가 난 것도 잊은 채 한동안 서 있었다. 화장대 거울 앞에 앉아 검붉게 응고된 자국이 덕지덕지 남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흔 넷이란 나이는 자잘한 나이테만큼 꽉 들어찼다. 나는 핏자국을 지우다 말고 두 뺨을 문질렀다. 어머니의 변화와 그 속내를 헤아리느라 연우 아버지에게 말못한 채 끙끙대던 며칠은 까칠한 촉감들 사이로 지워졌다. 그만 못이긴 척 분가할까하는 당치도 않은 욕심이 솟았다. 전주사는 시누이가 달려와 타박을 하리란 것은 어렵지 않은 예상이지 않은가. 그것은 당치도 않은 욕심이다. 슈퍼에 들러 저녁거리로 갈치 두 마리를 사서 들어오다 외출에서 돌아오는 어머니를 보았다. 잔잔한 걸음은 시름에 겨웠다. 어머니, 나는 다가가면서 한없이 어두워진 눈가를 살폈다. 또 지인이 세상을 뜬 것일까. 어쩌면 제법 가까웠던 동기이거나, 한참 아래 후배일지도 모른다. 조금씩 세상의 그림자가 짧아진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큼 두려운 일도 없을 테니. 그것이 동기이거나 한참 아래 후배라면 웃어른 문상과는 다른 보폭으로 다가올 것이다. 아침나절에 손바닥 사이로 무겁게 다가오던 피부의 나이테, 그 대상 없는 원망과도 비슷한 맥락이지 않을까. 갈치 샀어요. 연우가 시험이 며칠 안 남아서인지 통 입맛이 없나봐요. 대답이 없었다. 더는 터질 듯한 팽창감. 어머니는 무언가에 힘들어하고 있다. 나는 곁눈질을 그만 두고 말없이 걸었다. 격정은 어느새 내게로 전이된다. 연우는 반 친구들과 피자를 시켜 먹겠다는 전화를 해왔다. 나는 갈치를 냉동실에 넣을까 하다 그냥 구워내기로 했다. 제자식 입만 생각한다는 서운함이 들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내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사실을 노여워하실 분이지만. 어머니는 외출 때문에 걸렀던 춘난을 닦고 있었다. 염색할 때를 알려주는 솟아난 흰머리와 등성이를 이룬 손주름이 슬퍼 보인다. 처음부터 어머니 염색은 내가 했다. 눈이 시큼거리고 손목 마디마디 검붉게 물들어 볼상사나운 게 안되었는지 어머니도 그것만은 자신의 몸을 내맡겼다. 그러면서도 못내 자신의 환부를 드러낸 것처럼 민망해하곤 했지만.
- 연우 할머니 염색도 하시우? 웬만하면 뽑아요. - 뽑는 것도 옛말이지. 감당할 수 있어야지 원. 어멈아 빗질하지 말고 그냥 문질러라. 그래야 염색이 잘 되지.
- 피부가 상할까봐요. - 피부는 무슨.. 이제 거죽이지...
길 건너 세탁소를 하는 양씨 아저씨네 할머니는 유달리 흰머리가 적었다. 그래서인지 아 글쎄 나는 코팅파마만 해도 흰머리가 안보이더라구 하면서 목욕탕에서만은 부쩍 목소리가 높아졌다. 속내야 어찌됐던 대기업 부장인 아들과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는 손주 녀석으로 인해 동네에서도 복많은 노인네란 소리를 들으며 고고한 행색을 차렸던 어머니가 세탁소네 할머니보다 못한 유일한 것. 그것은 나이의 흔적이었고, 그래서 어머니는 어떻게든 세탁소 할머니와 엇갈려 목욕탕을 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제법 쌀쌀해지면 늘상 다니는 목욕탕에서 한 두 번은 인사를 나누어야 했고, 그 날이 하필 염색약을 머리에 들이 붙는 날과 겹쳐지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 어머니, 염색하셔야겠어요. - 다음에는 검은 색으로 해볼까?
나는 갈치의 비늘자위가 까맣게 타 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당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춘란을 닦던 손길은 안단테 리듬을 타고 있다.
- 아니 뭐... 갈색이 지겨워지려고 하는구나.
묻지도 않았는데 시선을 느끼기라도 했는지 어머니는 얼버무렸다. 나이 먹은 만큼 인정하고 사는 게 도리라며, 검은색 염색은 싫어하시던 분이 아닌가. 그것은 주책을 넘어 천박함의 발로라고 늘상 지론을 펴신 분이다. 갈치 몸통은 보기 싫게 그을렸다. 접시에 담아낼까 하다 내일 점심때 혼자 해결하기로 하고 그냥 있던 찬만 내놓았다. 어머니는 갈치를 상에 올리지 않은 며느리를 책하지 않았다. 그것이 결국엔 제 아들이거나 그 아들의 아들 입에 들어가리라 여겼을 것이고, 그런 서운함 정도에는 대범할 줄 알았다.
- 저번에 담근 동치미는 아직 맛이 덜 들었던? - 아직 안 꺼내봤어요. - 어멈 요새 잊어버리는 것이 늘었다.
늘 경고는 예고 없이 찾아왔다. 며느리 노릇 제법 후한 점수를 주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한 마디는 누구네 어머니가 퍼부어 대는 욕지거리보다 더 크게, 그리고 깊숙이 가슴을 질러왔다. 당신이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다는 것은 그 예고 없음에서 시작된다. 20년을 넘게, 여자 나이 마흔을 넘도록 잔잔하게 밀려 올 물살을 긴장하며 산다는 것은 남편의 도벽이나 오입을 참아내는 것보다 더 주름진 일이다. 저녁상을 물리고 나는 베란다에 앉아 울었다. 물론 당신은 드문 외출 탓에 일찍 침상에 들었고, 아이의 아버지와 아이가 들어오기까지는 더 혼자여야 한다. 아이가 반에서 2등으로 떨어지거나, 남편이 집에 있는 여편네가 뭘 안다고 참견이냐며 윽박지르기라도 하는 날이면, 그렇게 장독대 옆에 앉아 곧잘 울곤 했다. 남편은 연애시절 내 여린 심성에 반했었지만, 세월 따라 취향도 변했는지 나이 값을 못한다고 혀를 찼다. 사실 동치미 한 번 들여다보지 못한 부주의를 일러준 것뿐이고, 그 방식이 그다지 서운할 것까지도 없었는데 나는 마냥 서러워졌다. 목덜미를 타고 체온을 낮추는 밤바람이 슬프듯, 나는 추적거렸다. 베란다 아래로 보이는 상가건물 1층 버거킹 앞에서 사람들은 제각각의 기다림을 하고 있다. 내 그것보다는 조금 더 절실해 보인다. 적어도 그들은 반포동 개나리아파트 앞 버거킹을 들락거리는 젊은이들일 것이고, 퇴근이 늦어지는 연인을 기다리는 게라는 추측이 그다지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현관문을 나서면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는 아내의 무기력함보다는 덜 추울 것이다. 세상과 괴리된 채 공중에 떠 있던 나는 벨소리가 세 번이나 울려서야 현실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다음 날 타자기를 내놓았다. 등단하기 전에는 책을 내지 않겠다던 어머니의 고집과 이십 년을 버텨 온, 어찌 보면 가장 오래된 지우를 버리겠다고 하자 더는 놀랄 것도 없었다. 어머니는 쉽게 말을 던져두고도 못내 아쉬웠는지 몇 번이고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 마음 불편하시면 그냥 두세요. 뭐 어머님 방에 세간살림이 많이 차지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 구질구질한 물건들에 집착하면 곰팡내 나는 노인네 같아 싫다.
- 타자기가 다른 물건과 비견될 건가요. - 뭐든 마음먹을 때 해야 된다더라. 그깟 타자기에 마음 주다 다른 것들을 너무 잃었어...
뜻모를 어머니의 탄식은 아마도 어제 자신을 두고 떠난 누군가에 대한 슬픔이리라. 그리고 자신의 부주의를 책하느라 애꿎은 타자기만 내침을 당한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가 고약하다거나 까탈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내가 그저 마음 편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머니는 얼마를 주고 쓰레기 수거차에 실려 보내라고 했지만, 내 생각엔 골동품상에 갖다 주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어머니는 방안의 물건을 하나씩 치우기 시작했다. 마치 죽음을 앞둔 환자가 주변을 정돈하듯, 안 입는 옷가지며 꽤 값이 나가는 그림들까지 내놓았다. 자연히 나의 골동품가게 발걸음은 잦아졌다. 그런 모양을 보고도 남편은 무신경했고, 처음엔 신경이 날카롭던 나도 연우의 시험날짜가 다가오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오히려 골동품 가게 주인이 후하게 쳐주는 가격 덕에 저녁상은 반찬 가짓수가 늘어났다. 아무도 저녁 식단의 풍요가 어머니의 세간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대체한 것이리라고 짐작하지 못했지만.
11월은 유달리 집안 행사가 많았다. 그 중에도 아버님 제사는 갈수록 손이 드는 행사였다. 시누이들은 언제부터 다 차려진 제사상을 받을 때 맞춰 왔고, 하나있는 아랫동서는 돈번다는 핑계로 봉투인사를 한 지 여러 해였다. 올 아버님 제사때 어머니는 평소와는 달리 약주 한 잔을 받고는 눈을 훔쳤다. 금슬이 좋기로 소문났던 부부였다는데, 나는 시집올 때부터 혼자였던 어머니가 아버님 기일을 치르는 걸 볼 때마다 정말 그랬을까하고 의문이 갔다. 누구나 다 그렇게 여겼고, 그것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기에 내가 그러한 의심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온한 것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그러나 분명 세월이 흘러 무심해졌다고 말하기엔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어머니의 삶에서 아버님은 초라했다. 다른 동인들의 묘에 들르는 것을 잊지 않을 만큼 세심하던 어머니 방안에 흔한 아버님 사진 하나 없다는 것은 그것을 설명하고도 남았다. 그런 연유로 나는 아버님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한다. 그저 남편의 습관과 얼굴, 손동작에서 아버님을 추측할 뿐이다. 어머니의 울음은 정종 한 잔에 희석되었는지 소리가 없었다. 다만 참아온 20여 년의 서러움, 그 켜켜이 묵은 덩어리가 목을 내리누르는 것처럼 한동안 어깨를 들썩였다. 시누이들의 호들갑에 어머니는 금새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나는 알았다. 부부 연이 얼마나 당신을 옥죄어왔는가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녀석이 데려온 며늘아이를 맞아 남부럽지 않은 대접을 받으며 살아왔지만 드러나지 않아야 하는 불편함, 혼자 짊어지기엔 참으로 길고도 지난한 시간이다. 언젠가 춘란을 닦던 어머니와의 대화가 생각났다. 아범이랑 연애할 때 뭐가 제일 좋았누? 아유 하도 옛날이어서 기억도 안 나네요. 사실 난 말야. 내 아들 이어서인지 어멈이 별로 맘에 차지 않았어. 예쁘장하겐 생겼는데 비쩍 마른 게 맏며느리로는 영 그렇더라구. 그런데 연우애비가 뭐랬는지 알아? ... 사랑한대...그게 그렇게 대견해 보였어. 내 젖먹던 코흘리개가 그런 말을 할 줄 알만큼 컸다는 사실과 그렇게 말할 자신이 붙을 정도면 뭐 더 볼게 있을까 했지. 아범이 그런 말 안 했지? 어멈에게 묘한 질투심이 생기더군. 난 그런 사랑이 있었나. 내 인생에 그런 게 있었던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자꾸 자신이 없는 게야. 나도 소싯적엔 꽤나 인기가 있었는데... 남들은 남편 잘 만나 사랑 받는다고 부러워했지만 사람 속을 누가 아누. 나도 어멈처럼 그렇게 따라가고 싶은 사람이 있었더랬다. 그런데 우리 아들처럼 안해주더라구... 그리곤 함께 웃었던 것 같다. 그래도 어머님은 세상에서 제일 위해주는 남편을 만나지 않았었냐고. 모르긴 몰라도 술먹고 늦는다는 전화 한 통 하기가 죽기보다 어려운 남편이랑 사는 나보다 살맛 나는 시간이었으리라고 덧붙인 것도 같다. 어머니가 나지막이 사랑하고 싶었는데... 하고 읖조렸지만,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고 줄곧 의심해왔던 것이 영 잘못짚은 것은 아니라고 설핏 생각했을 따름이다. 어깨가 울고있는 당신의 뒷모습이 그날 춘란을 닦던 뒷모습과 오버랩 된다. 시누이들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 뻔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제법 집안 맏며느리로서의 의무보다는 권리가 더 많은 위치고, 어머니가 편을 들어줄게 뻔하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셈한 탓인지도 모른다. 사실 시누이들의 등살이 신경 쓰이기보다는 연우가 수능이 코앞에 닥쳐서 삼촌네 식구나 시누이들이 빨리 가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앞섰다. 남들이야 공부 잘하는 아들을 더 좋은 대학에 보내려고 욕심 내는 것쯤으로 여기고 배부른 고민이라며 입을 거들었지만, 시험이란 것은 모르고도 모를 일이었다. 1년을 더하는 셈인데도 점수가 고만고만하게 올라 어디 용하다는 점집 부적이라도 쓸까 했다. 몇 달 전 만해도 연우 친구인 창인이네 엄마가 전화를 걸어왔지만, 자존심이 허락질 않아서 말도 못 꺼내게 했다. 그래도 며칠 안 남으니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사가 내 콧등을 문질러대는 참이었다. 요며 칠간 느닷없는 전보처럼 밀려드는 당신 행동에 면역이 생겼는지, 언니는 도대체 뭐하고 있는 사람이유 하는 손아래 시누인 영희의 원성도 걸리지 않았다. 제들끼리 물 만난 고기처럼 내 험담에 열을 올려도 좋으니 오늘밤 안으로 돌아가 주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이런 저런 집안 대소사 쫓아다니느라 하나 있는 아들녀석 고생시킨 것 생각하면 이번엔 냉정하단 말도 아무렴 어떠하겠느냔 절박함 비슷한 것이리라. 이런 바튼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머니는 시누이더러 자고 가라고 붙잡았다. 시누는 어쩌면 좋누 하고 남편의 눈치를 살폈다. 미간의 떨림을 감지한 어머니는 뭐 다음에 자고 가든지...하곤 말았다. 울컥 서운한 마음이 솟아오른다. 며칠 간 이어졌던 당신의 행동 하나에도 사래가 들만큼 예민해졌던 나에게는 정작 어떤 표시도 해주질 않았던가. 이것이 친구녀석들이 방정맞게 입을 모으던 핏줄이 당기는 인력 같은 것일까. 상실감과 서운함은 이스트를 넣은 밀가루 반죽처럼 부풀어올랐다. 곪는 것보단 터뜨려주면 그것으로 다행이지 않느냐고 다독거리기에는 내 안이 너무 비좁았다. 틈새로 찬바람이 스며 냉기가 돌았다. 동맥에서 펌프질한 핏방울들이 굳어버린 듯 숨쉬기가 힘겨워졌다. 새벽 두시를 넘겨서야 제사상을 물렸고 남편은 고단한 호주자리를 벗어 던진 채 침대 속으로 녹아들었다. 이미 내 감정은 그의 관심대상이 못되었다. 그가 신규 가입자가 몇 명이고, 해지신청 건수가 얼마인지에만 매몰된 후로 나의 조울증은 투정을 너머 경멸의 대상이 됐다. 몸을 돌리면 부딪치는 거리가 낯설다. 언제나 이만큼의 거리로 저울질하다, 세월을 더할수록 그는 나를 밀어낸다. 그것도 어쩌면 내림일까. 의처증이 심했다던 아버님의 시린 가슴도 이것과 비슷했을까. 나는 어디쯤에서 외로운 곡예를 멈출 수 있을까. 기억하긴 싫지만 남편에게 나는 두 번째 여자였다. 도서관 사서였다고 했다. 그녀 덕에 이광수 전집을 독파했었노라고 속없는 말을 가끔 했다. 새초롬해지는 내 눈을 보곤 맹세코 손 한 번 안 잡았노라고 달랬지만, 나는 그 말이 꼭 정말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으로 들렸다. 그렇지만 이것도 이십 년이나 케케묵은 이야기다. 해묵은 첫사랑으로 지금 거칠게 찾아드는 낯설음을 설명하기란 내가 생각해도 유치했다. 내 심란함이 춤추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편은 코를 골기 시작했다. 외아들 대입 시험이 며칠 남았는지, 내달 초에 곗돈을 타는 지도 모른 채 돈 몇 백만 원에 인생을 탕감하는 월급쟁이의 고단한 세레나데였다. 그런 사람 옆에서 때늦은 의심이나 하고 있으니 나도 한가한 우울증 환자에 지나지 않는다.
득도 없는 생각들에 눌린 채 나는 그만 잠을 설쳤다. 아침부터 멍하니 빈둥대다 남편은 콘플레이크만 먹인 채 출근을 시켰다. 연우는 새벽같이 학원을 간 모양이다. 남편이 출근인사를 하자 어머니는 생뚱맞게 아범에게 미안한 게 많네하고 읖조렸다. 딸린 세식구 건사하느라 아침밥도 못 먹고 나간다는 게 못마땅한 말인가 하여 나는 목덜미가 달아올랐다. 된장국에 넣을 무를 썰면서 칼소리를 죽이느라 손목에 힘을 한껏 밀었다. 압력솥의 김을 빼고 어머니 방문을 두드리자 목소리만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집에 있는 노인네 한끼 굶으면 어떻누. 유리덮게가 푸득거리는 것을 보다말고 나는 그냥 가스레인지 불을 껐다. 괜시리 애꿎은 식탁만 문대다 현관 앞에 내놓은 앉은뱅이 책상을 들고 나섰다. 어머니가 책상마저 버릴 결심을 한 걸 보면, 뭔가 단단히 마음먹은 게 있을 것이다. 골동품 가게 아저씨는 손수 문을 열어주며 맞았다. 지난번에 가져온 타자기 말이유. 어찌나 탐내던 사람이 많던지 좋은 값에 팔았다우. 말끝마다 우유 하는 소리를 듣다보니, 아저씨 고향이 제천이라고 했는지 담양이라고 했는지 헷갈렸다. 아무렴 어떠랴. 그저 한껏 들떠서 책상을 후한 값에 쳐주기만 바랬다. 그런 속셈을 알아채기라도 했는지 가게 주인은 금새 멀뚱히 놓여 있는 책상을 유심히 보았다. 이건 어디서나 흔한 물건이구먼. 하며 놓고 가면 짐만 된다고 했다. 나는 다시 들고 갈까도 했지만, 그냥 맡겨두기로 했다. 주인은 타자기 팔아서 남은 이익을 돌려주는 셈이라며 책상 값으로 만 오천원을 쳐주었다. 어제보다 바람이 찼다. 해물탕을 할 양으로 홍합 한 접시를 샀다. 아침도 굶은 노인네는 게으른 며느리라고 혀를 차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마음이 바빠 달음질을 쳤다. 눈인사만 하고 지나치자 경비원 아저씨가 뒤따라 나오며 나를 부른다. 돌아보다 그만 발이 접질려 넘어졌다. 부끄러움에 일어서자마자 엘리베이터로 뛰었다. 아저씨는 계속 502호 502호 하며 따라왔다. 현관에 다다라서야 한 숨 돌리고 문을 땄다. 집 안 공기가 허전했다. 어머니 방은 빼꼼이 열려 있다. 뒷산에나 가신 게지 여기고 홍합을 소금물에 담궜다. 해물탕을 끓여 놓고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이 그렇게 두시간 흘렀다. 전화가 울린 것은 점심상을 물리고 저녁거리로 데워야 겠다 싶어 해물탕을 가스레인지에 올린 참이었다. 어멈아, 여기 공항이다. 내가 말했던 거 기억하쟈? 그 사람이 와서 40년 늦게 말을 하더라. 같이 들어가자 그러대. 내 팔자에 사랑도 있었나 싶은지 늙어서 주책 맞게 용기 낸다. 아범에게도 말 잘 전해주고, 그럼 끊으마. 도착하면 다시 전화할게.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어머니 음성은 낮았지만 떨렸다. 나는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어떤 인연이길래 70여 년의 삶을 일주일만에 버릴 수 있게 만들었을까 하고 가슴이 다 울렁거렸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베란다로 나가 목련가지를 바라보며 나는 울었다. 어머니가 무엇 때문에 늘 이곳에 서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목련 너머로 선명하게 보이는 버거킹 간판 아래에는 늦어지는 누군가를 마냥 기다리는 젊은이들로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