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마가복음10:13-16) 2012.5.6.어린이주일
오늘 성경 본문은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을 안아 주시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는 일련의 사건과 관련하여 제자들에게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신 내용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을 축복하셨다는 일과 제자들을 가르치셨다는 일, 이 두가지 내용이 들어 있는 셈이지요. 저는 이중에 어느 것이 설교에서 더 강조되어야 할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그래도 아이들을 축복하셨다는 것보다야 제자들을 가르치셨다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곧 이어서 이러한 생각이 일어나는 겁니다.‘야 이것봐라 나 역시 예수님께 책망받은 제자들과 같지 않은가’라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본문에 보니“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의 의미가, 곧 당시의 제자들이 아이들을 예수님께 인도하여 축복받게 하는 일보다 예수님께서 다른 일을 하시도록 하심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일이란, 그때 당시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가르치고 계셨거나 병자를 고치시고 있었거나 아니면 잠시 휴식을 취하시고 계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제자들 생각에는 그 어떤 일이든 아이들을 만나 주시는 일보다야 더 중요하다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보시고 노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늘 겪는 일이겠습니다만 집안의 일이나 회사의 일 뿐아니라 교회의 일을 할 때도 보면, 우리 딴에는 좋은 동기를 갖고 잘 해보겠다고 하는 일이 다른 이에게 전혀 반대의 반응과 결과를 초래하는 일이 있습니다. 오늘 제자들이 바로 그런 경우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늘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우리 뜻대로 하고 있으면서 마치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착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옛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이유도 저들 딴에는 그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 역시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뵙기 전까지는 예수 믿는 자를 잡아 가두고 죽이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길이라 생각했다는 것 아닙니까? 로마서10:1-3절이 이를 말씀하고 있습니다.“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기도에 힘씀으로 하나님의 뜻을 잘 헤아릴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롬12:2절에도“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천주교의 행위구원론은 잘못된 것이라고 믿습니다만, 선행에 힘쓰는 것 자체는 좋다고 봅니다. 평생을 인도에서 빈민들을 위해 일한 마더 테레사 수녀를 모르는 분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한번은 기자가 물었다고 합니다.‘수녀님은 하루에도 오랜 많은시간을 기도하는 것으로 아는데 언제 시간을 내어 그리도 많은 일을 하십니까?’고요. 테레사 수녀는 이러한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기도를 많이 해야 하나님이 참으로 원하시는 일을 바로 알게 되고 시행착오도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더랍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인의 지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첫째로 오늘 본문을 통해 제자들이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던 예수님의 뜻을 14-15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입니다. 찬찬히 말씀을 보시면 어린 아이같은 이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씀을 하시고 있으시지, 어린이면 무조건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14절에“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 하셨고, 15절에도“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라 하셨으니 말입니다. 즉 15절 말씀은 14절 말씀 재강조이며 반복이기에“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같이 받드는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의 이 대목만 나오면 늘상 헷갈립니다.‘받들다’라는 말 때문이지요. 언젠가 말씀드렸나 싶습니다만, 제 이름의 끝자가 한문으로’받들 봉(奉)‘인데, 초등학교 시절의 내 단짝 친구와 서로 자기 이름이 잘 낫다고 툭하면 입씨름 하였댔습니다. 친구 이름이‘군일(君一)’인데‘임금 군, 한 일’즉 하나밖에 없는 임금님이라고 큰 소리칩니다. 그러면 나는‘수봉(秀奉)’즉‘빼어날 수, 받들 봉’즉 빼어나게 받들어 모셔야 되는 사람이라고 맞받아 우기지요. 다 아이들 때 일입니다만 저의 이같은 추억이 그후 저도 모르는 사이에 ‘받들다’란 말을‘받들어 모신다’라는 말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같은 성경 본문 즉“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읽으면 지체없이‘받든다’때문에 사람을 받들어 모신다는 생각이 앞서다보니 즉각적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요즘 부모들이 자기 자식을 귀하게 받들어 모시듯 천국을 받들어 모셔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는 정확한 이해가 아닙니다.
우선‘받든다’라는 말의 뜻만 해도 무엇을 받드냐에 따라 3가지 설명이 있습니다. 저의 경우처럼‘사람을 공경하여 높이 모신다’는 뜻이 있고요, 또 하나는‘물건을 손바닥으로 밑에서 받아 올려 든다’는 뜻이 있습니다만 세 번째는 사람이나 물건이 아닌 그 무엇을 영접하여 받아들인다는 뜻이 있습니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지를 받든다와 같은 경우입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는 하나님의 나라를 영접하여 받아들인다는 의미의‘받들다’입니다.
그런데‘받든다’하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무조건 사람을 받들어 모신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부모가 자기 자식을 귀하게 받들듯 천국을 받들어 모셔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이해한 것입니다. 뭐 이 해석이 문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전후 문맥상으로나 이와 비슷한 마태복음의 병행구를 참고할때 그렇게 이해해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본문의 바른 해석은 이렇습니다. 즉‘어린 아이가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어린 아이의 속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천진하고 순수하고 단순하고 정직하며 겸손하고 신뢰하는 어린 아이의 귀한 속성 말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해서‘어린이는 어른의 스승’이라고 보통 말하는 것같습니다. 바로 이같은 어린 아이의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예수님께서는 여기 말고도 여러번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11:25-26절에는“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당시의 세상적인 지혜와 분별력이 있다고 자부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숨겨지고 대신에 어린 아이와 같이 순박한 갈릴리 어부들에게는 나타났다는 말씀입니다. 또 마태복음 21:16절에“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고 하심으로써, 어린 아이 자기들도 모르는 겸손과 신뢰심 또 사심없는 마음과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어른들보다 더 한 순수한 경이감이 있음을 말씀하셨으며, 또 마태복음18:1-4절에서는“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하심으로 어린 아이의 겸손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같이 어린 아이들이 부모가 이끄는대로 따르며 주는대로 받아들이듯이, 우리 모든 인간들 역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인 하나님의 나라를 겸손히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바로 믿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인간의 힘으로 성취되는 것도 아니며 얻을 수도 없으며 오직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기에, 비록 인간은 아무리 해도 이것을 받을 자격이 없지만 복음말씀을 듣고 뉘우치고 순종하여 이를 영접하여 받아들이므로써 영생을 얻게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론의 진리이지요.
둘째로 우리 주님의 기뻐하시는 온전한 뜻은 또한 어린 아이들을 축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어린 아이들은 부모를 절대적으로 의존하며 부모의 말을 그대로 믿고 따릅니다. 당시 부모의 손에 이끌려 예수님께 나아오는 어린 아이들을 주님은 만사 제쳐두시고 그 무엇보다도 먼저 어린 아이들을 영접하여 주시는 모습을 대하면서 우리는 두가지 경우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어린 아이를 주님께로 인도하는 부모들의 신앙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무슨 신앙이 있다거나 무슨 지각이 있다거나 하여 자기 아이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한 것은 아닙니다. 비록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며 여러 면에서 미성숙하고 부족하다 하여도 예수님께서 축복하여 주시면 저들 자녀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된다는 믿음이 부모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이들은 부모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을 뿐이며 그런데 우리가 믿기로는 저들 어린 아이들이 주님께로부터 분명코 은혜와 축복을 받은 줄 압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보의 기도와 중보의 신앙을 생각합니다. 세 복음서에 다 나옵니다만 네 사람이 한 중풍병자를 침상채 메워 가지고 그것도 예수님 앞으로 무리들 때문에 접근이 불가능하자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어 병자를 누운 상과 함께 달아 내린 사건 이야기입니다. 바로 그 사건이 기록된 마가복음2:5절을 보시면“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풍병자 당사자의 믿음이 아니라“그들의 믿음”즉 함께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인줄 압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오늘의 우리 역시 우리 가족과 친척 친구들을 위한 믿음의 중보기도는 분명코 효력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부모들이 자기 자녀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데리고 나오는 일이야말로 그 무엇보다도 우선해야 합니다. 요즘은 아이들을 학원에는 열심히 보내면서 교회에는 열심히 보내지 않는데 이것처럼 지혜롭지 못하고 답답한 일이 없습니다. 자녀의 영혼의 귀중함을 너무도 모르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입장은 어린이 쪽입니다. 어린 아이들도 그저 부모들의 신앙만이 아닌 분명 저들의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능력이 있다는 것을 헤아려야 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별별 이론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어린 아이들의 영혼들도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분명히 귀중하며 은혜를 힘입어야 하는 줄 믿습니다. 구약시대에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난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았으며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어린 아이들이 유아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누가복음1:15절에 보시면 세례요한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데“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 역시 어린 아이들의 영혼문제에 대한 답을 주고 있지않나 생각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로 끝맺고 있습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들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실물 현장교육을 하였습니다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영접하여 안아주시며 머리에 안수하여 주시고 일일이 아이를 축복하셨던 것입니다. 모르긴 하나 축복받은 그 어린 아이들은 장래에 예수를 잘 믿고 영육간에 축복을 받았을 것이며 주님께서 귀히 쓰시는 인재들로 성장하였으리라 믿습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아 하나님 앞에 어린 아이들의 영혼의 소중함과 우리 역시 부모를 절대 의지하는 아이들과 같은 절대적인 믿음으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한결같이 믿음으로 영접하여 모시며 사는 축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상속받아 누리는 영광스러운 우리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