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키우기
지진과 피폭국의 체험, 그리고 원전의 등장
일본은 세계적으로 지진의 위험성이 가장 높은 곳이다. 일본열도는 태평양 플레이트, 유라시아 플레이트, 필리핀 플레이트, 북아메리카 플레이트라는 4개의 거대한 플레이트의 경계 위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지각이 매우 불안정하다. 따라서 일본열도가 지각변동에서 생겨난 만큼 일본의 어디에서 산다고 해도 지진에서 안전한 곳은 없다.
대지진이 일본의 어디에서나 언제나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은 일본의 정치와 사회를 이해하는 데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자연조건은 일본인들에게 ‘위기의식'을 일상화시켜 줌으로써, 더욱 안전한 일본의 구축이라는 소명의식과 꼼꼼한 대비태세, 아울러 암묵적으로 단결과 조화의 일본문화를 형성하게 만드는 토대이자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1년 3월 11일에 발생한 대재앙 사태를 보면서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이러한 일본열도의 자연조건, 즉 언제든지 강력한 지진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일본 열도의 '구조'적 특성을 무시한 채 일본에 54기에 이르는 원자력발전소(핵발전소)가 건설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일본의 원자력발전 전력량은 놀랍게도 미국, 프랑스에 이어 세 번째로 많다.
이러한 원자력발전 수치를 보면서 곰곰이 생각할 때 더욱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일본이 지구상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맞은 아픈 상처와 경험을 갖고 있는 유일한 국가라는 '역사'적 사실 때문이다. 히로시마에서 14만 명, 나가사키에서 7만 명으로 추정되는 사망자가 단기간에 나왔으며, 살아남은 이들은 피폭자라는 멍에를 짊어지고 평생을 살아야 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질학적 구조와 역사적 특수성을 갖고 있는 일본이 그동안 어떻게 원자력 발 전국가로서의 입지를 다질 수 있었던 것일까?
야마모토 요시타카(山本義隆)는 일본이 원전을 개발하게 된 전후 상황을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지적한다.
20세기 후반에 시작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은 미합중국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세운 원자폭탄 제조계획인 ‘맨해튼 계획’의 연장선상에 있다. 전후 미국과 영국은 ‘맨해튼 계획’에서 개발하고 입수한 핵기술을 은닉하고, 그것을 통해 핵무기의 독점적 소유를 유지하려고 획책하였다. 하지만 소비에트 연방이 예상보다 빨리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자, 이에 당황한 미국은 미국, 영국, 소련 3개국으로 핵독점을 한정하면서 그 이후의 핵개발 경쟁에 대처하려 했다. 그러려면 오히려 기술 일부는 공개하고 원자력 발전을 민생용으로 개방함으로써, 전문적인 핵기술 유지와 부단한 갱신 그리고 핵기술자 양성을 민간회사와 전력회사에 맡기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와 함께 원자력 발전 시설과 그 연료용 농축우라늄을 외국에 팔아서 새롭게 형성된 미국 핵산업의 글로벌 시장을 개척하려는 미국정부와 미국금융자본의 노림수도 있었다. 이것이 1953년 말에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UN총회에서 제안한 'Atoms for Peace’ 즉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의 숨은 의도였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를 비롯한 일본의 정치가들이 1954년에 일본에 원자력예산을 제출하여 「원자력기본법」을 성립시키게 되는데, 이는 산업정책의 관점에서는 원자력을 미래 에너지 정책의 일환으로 자리매김시켰기 때문일지 모르지만, 보다 중요한 이유는 권력정치의 관점에서 핵을 둘러싼 전후 국제정치의 정황을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전후 일본정치가들의 의식을 사로잡은 것은 한편으로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이라는 명목으로 핵기술을 산업 차원에서 수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핵무장 이라는 미래의 선택지도 가능하게 해 두겠다는 고민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요컨대 잠재적 핵무기의 보유야말로 원전 추진의 숨겨진 진실이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전후 일본의 원자력 발전이 유력정치가와 엘리트 관료들의 주도 하에 추진되고 있을 무렵, 다카기 진자부로(高木仁三郞)에 의하면, 여러 갈등이 존재하기는 했으나 많은 일본의 과학자들은 일본이 미국에 패배한 것이 일본과학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과학적 사고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자각’과 ‘반성’에 젖어 있었다. 이러한 의식 속에서 발아한 과학적 합리성과 과학만능적 지향의지가 미래의 에너지로서 원자력을 수용하게 만들었고, 원자력 에너지를 실용화하는 것이야말로 인류의 위업이자 과학기술의 위대한 성과라고 여기고 이것은 역사의 필연적인 ‘발전’방향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지적이다.
그래서 “원폭을 맞고 채 10년도 되지 않은 1954년, 그것도 마침 비키니의 (핵실험)사고가 나서 그 방사능 피폭으로 많은 일본인이 히로시마 이상의 피해를 깨닫게 된 바로 그 '비키니의 해’ 에 이른바 원자력의 도입은 강행되었던 것” 이다. 이는 환언하면 결국 핵분열 에너지에 대한 경악할 만한 '공포’ 의 경험과 동시에 가공할 만한 힘에 대한 '선망’ 이 역설적으로 전후 일본인들의 의식 속에 원자력의 도입을 받아들이게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이러한 원자력 추진의지에 순풍을 달아준 것이 자원고갈에 대한 위기의식이었다. 즉, '원자력은 석유위기를 극복한다 는 신화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고이데 히로아키(小出裕章)의 견해에 따르면, “화석 연료는 언젠가 고갈되기 때문에 원자력이야말로 미래의 에너지원이 된다.”라는 전망이 일본사회에 회자되면서, '자원고갈의 공포'가 원자력발전을 추진하게 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일본이 지진이나 재해가 빈발하고 피폭의 역사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후에 원자력발전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안보의 측면에서는 핵무기 제조능력을 잠재적으로 확보하려는 정치가들의 숨겨진 의지가 강력히 존재하고 있었고, 발전과 성장, 경제대국에의 욕망, 진보의 신념 등으로 집약되는 세계관 과 가치관, 그리고 이윤추구를 지향하는 강고한 원자력 카르텔이 존재했기 때문 이었다. - 강상규, <'절대반지'로서 원자력의 유혹>(그린비,2012)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