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다음카페 <함안조가 감찰공파 하림유사>입니다. 이 글을 주변의 함안조가들과 관계자들에게 널리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관정 합장
현존하는 함안조씨의 묘 중 가장 윗대의 묘는 전서공 조열(趙悅, 고려 공조전서, 지금의 국토개발부장관, 정2품, 1419년, 세종1년졸)의 묘이다. 이 묘는 경남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 뒷산에 있다. 조열의 묘역에는 약 10여 개의 집안 묘가 있다. 그 묘역의 가장 위에 있는 묘가 조금호(1445-1533, 89세졸, 첨지중추부사, 정2품)의 묘이다. 조금호는 어계 조려(1420-1489, 70세졸, 증 이조판서, 정2품) 선생의 세 명의 아들 중 둘째다. 어계 선생의 세 아들은 동호(銅虎), 금호(金虎), 야호(野虎)이다. 조금호도 수만(壽萬, 남계공, 1468-1491, 24세졸, 장사랑, 종9품), 수천(壽千), 수억(壽億) 등 세 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남 수만은 24세에 별세하여, 부친보다 43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차남인 수천이 부친 묘소의 망주석 글을 작성했다. 조금호는 감찰공파, 판서공파, 충의공대소헌파, 절도공파 등의 파의 직계선조이고, 조수천은 절도공파의 파조이다.
아래 글은 생육신 어계 조려 선생의 아들인 좌윤공(종3품) 조금호의 묘 앞의 망주석(望柱石)에 새겨진 글을 번역한 것이다. 이 글은 기원문으로서 조금호의 차남인 절도사(종2품) 조수천(趙壽千)이 지었다. 이 글이 잘 해독되지 않아서 2023. 3. 6일에 관정 조성래와 석금 조성래와 하촌 조웅래가 그 글씨의 판독이 제대로 된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묘소를 찾았다. 그러나 글씨가 거의 보이지 않아서 판독 불가능했다. 보이지 않는 글씨를 발견하고, 판독한 분들께 경의를 표한다. 아마 이 글은 족보의 조수천 언행록에 수록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짧은 글이지만, 번역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애먹었다. 예전에 글자를 판독한 분들이 판독하는 과정이나 족보를 발간할 때나 종회보를 발행할 때, 오자가 3개, 탈자로 보이는 것이 1개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탈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부분에 "怠(태)" 자를 한 자 집어 넣어 번역했다. 관정 조성래와 석금 조성래와 하촌 조웅래, 이 1959년생 세 사람이 꼬박 3일간 매달려서 완역했다.
두 손 모아 빕니다.
어진 사람, 즉 군자는 마음의 방향을 돌려서
모든 잘못된 것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습니다.
(부모님을 보다 더 오래 사시도록 못 한 것은 자신의 탓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산과 바다에 맹세하오니
경작하고, 소 먹이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음으로써
돌아가신 부모님을 온전히 그리워하는 망주석을 세우겠나이다.
산신과 토지신께 비옵나니
부디 저희 선산을 어여삐 여기시어
천만 년 동안 풍우의 폐해가 없도록 해주심으로써
길이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석물(石物)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이 기원문을 좌우의 망주석에 나누어 새겨 넣음으로써
돌아가신 부모님을 애틋하게 그리워하는 효도를 다하고자 합니다.
아래의 글자 판독에서 잘못된 것들을 바로 잡으면 다음과 같다.
1. 2행, 母(모) → 毋(무)→ 毋怠(무태). 收(수) → 牧(목)
2. 4행, 祗(지) → 祇(기), 토지신
(한문해석 도움말) 攢 모일 찬. 모이다. 모으다. 攢手(찬수) 두 손 모아 빎. 祈 빌 기. 기원하다. 反求諸己(반구저기 之+於→ 諸, 반구제기) : 마음의 방향을 돌려서 모든 잘못된 것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다. 毋 말 무(=無, 不, 勿, don't). 毋(怠)耕牧之道(무태경목지도) : 작물을 경작하고, 소를 먹이는 데 게으르지 않다. 表(표) : 죽은 이의 덕을 기리기 위해 묘 앞에 세운 돌기둥. 선행을 표상하여, 그 집의 대문이나 마을 입구에 세운 돌기둥. 禱 빌 도. 빌다. 기원하다. 山靈(산령)= 산신(山神), 祇 땅귀신 기. 地祇(지기)= 토지신(土地神). 俾 하여금 비, 시키다. 하게 하다. 遂 드디어 수. 마침내. 이루다. 성취하다. 명예와 지위가 이루어지다. 孺 젖먹이 유. 孺慕(유모) : (아이가 부모를 그리워하듯이) 죽은 부모를 애틋하게 그리워함.
망주석(望柱石)은 무덤을 꾸미기 위해 무덤 좌우에 하나씩 세우는 돌기둥이다. 이것은 무덤을 지켜주는 벽사의 의미로 해석된다.
위의 망주석은 조금호의 묘 양쪽에 세워진 것 중에 하나다. 이것은 매우 높고, "최상급의 품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이 묘를 받쳐주는 웅대한 기단석과 상석, 향로석 등과 함께 함안조씨가 어떠한 품격의 성씨인지를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함안조씨의 묘 중 이 묘가 가장 품격이 높은 묘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조금호의 망주석 처럼 망주석에 기원문을 새겨 넣은 경우는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다.
망주석은 주로 돌받침 위에 8각기둥을 세우고, 맨 위에 둥근 머리를 얹었다. 중국의 〈진서 陳書〉 예의에 "507년 양나라의 묘제를 바로 잡았는데 석인(石人)·석수(石獸)·석비(石碑)의 건립을 금하고 석주만 세워서 그 위에 이름·지위를 적는 것을 허락했다"고 한 기록을 통해 망주석의 기원이 오래됐음을 알 수 있다.
망주석, 세중돌박물관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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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전해진 망주석은 통일신라시대에 발전하기 시작하여, 8세기경에 왕릉의 석물배치가 정비됨에 따라 능묘조각의 하나로 자리를 굳혀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장 오래된 예는 괘릉과 흥덕왕릉의 것이며,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일반화되었고 다양한 모습으로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