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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卷第四十一 열전 제 1 김 유신 상
三國史記卷第四十二 열전 제 2 김 유신 중
三國史記卷第四十三 열전 제 3 김 유신 하
三國史記卷第四十四 열전 제 4 을지문덕. 거칠부. 거도. 이사부. 김 인문.
김 양. 흑치상지. 장보고. 사다함.
三國史記卷第四十五 열전 제 5 을파소. 김후직. 녹진. 밀우와 유유.
명림답부. 석우로. 박 제상. 귀산. 온달.
三國史記卷第四十六 열전 제 6 강수. 최 치원. 설 총.
三國史記卷第四十七 열전 제 7 해론. 소나. 취도. 눌최. 설 계두. 김 영윤.
관창. 김 흠운. 열기. 비녕자. 죽죽. 필부. 계백.
三國史記卷第四十八 열전 제 8 상덕. 성각. 실혜. 물계자. 백결선생. 검군.
김 생. 솔거. 효녀 지은. 설씨. 도미.
三國史記卷第四十九 열전 제 9 창 조리. 연개소문.
三國史記卷第五十 열전 제10 궁예. 견 훤.
三國史記卷第四十一.
삼국사기 권 제 41
열전 제 1 김유신 (상)
○<金庾信>, 王京人也. 十二世祖<首露>, 不知何許人也. 以<後漢><建武>十八年壬寅, 登<龜峯>, 望<駕洛>九村, 遂至其地開國, 號曰<加耶>, 後改爲<金官國>. 其子孫相承, 至九世孫<仇亥{仇充}> , 或云<仇次休>, 於<庾信>爲曾祖. <羅>人自謂<少昊金天氏>之後, 故姓<金>. <庾信>碑亦云: "<軒轅>之裔, <少昊>之胤." 則<南加耶>始祖<首露>與<新羅>, 同姓也.
李丙燾.
김 유신은 경주 사람이다. 12대조 수로는 어느 곳 사람인지 모른다. 그는 후한 건무 18년 임인에 귀봉에 올라가 가락의 구촌을 바라보고 마침내 그곳으로 가서 국가를 건설하고, 국호를 가야라 하였다가 후에 금관국으로 고쳤다. 그 자손이 대대로 이어져 9대 자손인 구해에 이르렀다. 구차휴라고도 하는 구해는 유신에게는 증조부가 된다. 신라인들은 스스로 소호 금천씨의 후예라고 생각하여 성을 김이라 한다고 하였고, 유신의 비문에도 "헌원의 후예이며, 소호의 종손"이라 하였으니, 남가야 시조 수로도 신라와 동성이다.
○祖<武力>, 爲<新州>道行軍摠管, 嘗領兵獲<百濟>王及其將四人, 斬首一萬餘級. 父<舒玄>, 官至蘇判<大梁州>都督安撫<大梁州>諸軍事. 按<庾信>碑云: "考蘇判<金逍衍>." 不知<舒玄>或更名耶, 或<逍衍>是字耶, 疑故兩存之.
조부 무력은 신주도 행군총관이 되어 일찌기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왕과 그 장수 네 명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을 참수한 일이 있었다. 부친 서현은 벼슬이 소판 대량주도독 안무대량주제군사에 이르렀다. 유신의 비문에 "아버지는 소판 김소연이다"라고 하였으니, 서현이 고친 이름인지 혹은 소연이 그의 자인지를 알 수 없다. 이에는 의심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두 가지를 모두 기록해둔다.
○初, <舒玄>路見葛文王<立宗>之子<肅訖宗>之女<萬明>, 心悅而目挑之, 不待媒 而合. <舒玄>爲<萬弩郡>太守, 將與俱行, <肅訖宗>始知女子與<玄>野合, 疾之囚於別第, 使人守之. 忽雷震屋門, 守者驚亂, <萬明>從竇而出, 遂與<舒玄>赴<萬弩郡>.
처음 서현이 길에서 갈문왕 입종의 아들인 숙흘종의 딸 만명을 보았을 때, 내심으로 기뻐하여 그녀에게 눈짓을 하여 중매도 없이 야합하였다. 서현이 만노군 태수가 되었을 때, 만명과 함께 가려 하니 숙흘종이 비로소 딸이 서현과 야합한 사실을 알고, 그녀를 미워하여 별채에 가두고 사람을 두어 지키도록 하였다. 그러던 중 갑자기 대문에 벼락이 쳐서 지키던 사람이 놀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때, 만명이 창문으로 나와 마침내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갔다.
○<舒玄>庚辰之夜, 夢熒或{熒惑} 鎭二星降於己, <萬明>亦以辛丑之夜, 夢見童子衣金甲, 乘雲入堂中, 尋而有娠, 二十月而生<庾信>, 是<眞平王><建福>十二{七} 年, <隋><文帝><開皇>十五年乙卯也. 及欲定名, 謂夫人曰: "吾以庚辰夜吉夢, 得此兒, 宜以爲名, 然禮不以日月爲名. 今庚與庾字相似, 辰與信聲相近, 古之賢人有名<庾信>, 以命之." 遂名<庾信>焉.[<萬弩郡>, 今之<鎭州>, 初以<庾信>胎, 藏之高山, 至今謂之<胎靈山>.]
趙炳舜. 『顯宗實錄字本』.『북한본』.
서현은 경진일 밤에 화성과 토성 두 별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꿈을 꾸었고, 만명도 역시 신축일 밤에 동자가 금으로 만든 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집안으로 들어 오는 꿈을 꾸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를 잉태하여 스무달 만에 유신을 낳았다. 이 때가 진평왕 건복 17년, 수 문제 개황 15년 을묘였다. 아이의 이름을 지으려 할 때 부인에게 말하기를 "내가 경진일 밤에 좋은 꿈을 꾸어 이 아이를 얻었오. 그러므로 마땅히 이 날짜로 이름을 지어야 할 것이오. 그러나 예법에는 날자로 이름을 짓지 않게 되어 있다하오. 그런즉 경(庚)은 유(庾)와 글자가 서로 비슷하고, 진(辰)은 신(信)과 발음이 서로 비슷하며, 더구나 옛날의 현인 중에도 유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으니 어찌 이를 이름으로 삼지 않으리오?"라 하고 마침내 이름을 유신이라 하였다.[만노군은 지금의 진주인데 애초에 유신의 태를 높은 산에 묻었으므로 지금도 그 산을 태영산이라고 한다.]
○公年十五歲爲花郞, 時人洽然服從, 號<龍華香徒>. <眞平王><建福>二十八{三十三} 年辛未, 公年十七歲, 見<高句麗>·<百濟>·<靺鞨>侵 國疆, 慷慨有平寇賊之志, 獨行入<中嶽>石 , 齊{齋} 戒告天誓盟曰: "敵國無道, 爲豺虎, 以擾我封 , 略無寧歲. 催{僕} 是一介微臣, 不量材力, 志淸禍亂. 惟天降監, 假手於我." 居四日, 忽有一老人, 被褐而來曰: "此處, 多毒蟲猛獸, 可畏之地, 貴少年爰來獨處, 何也." 答曰: "長者從何許來, 尊名可得聞乎?" 老人曰: "吾無所住, 行止隨緣, 名則<難勝>也." 公聞之, 知非常人, 再拜進曰: "僕<新羅>人也, 見國之讐, 痛心疾首, 故來此, 冀有所遇耳. 伏乞長者憫我精誠, 受{授} 之方術." 老人默然無言. 公涕淚懇請不倦, 至于六七. 老人乃言曰: "子幼而有幷三國之心, 不亦壯乎." 万{乃} 授以秘法曰: "愼勿妄傳, 若用之不義, 反受其殃." 言訖而辭, 行二里許, 追而望之, 不見, 唯山上有光, 爛然若五色焉.
『북한본』.李丙燾.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三國史節要』.
공은 15세 때 화랑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기꺼이 따르며 용화향도라고 불렀다. 진평왕 건복 33년 신미, 공의 나이 17세 때 고구려, 백제, 말갈 등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외적을 평정하려는 뜻을 품고 혼자 중악 석굴에 들어갔다. 그는 목욕 재계하고 하늘에 고하여 다음과 같이 맹세하였다. "적국이 무도하여 짐승같이 우리의 영역을 소란케 하니, 편안한 해가 거의 없습니다. 제가 일개 미약한 신하로서 능력을 생각치 않고 나라의 환란을 없애기로 뜻을 세웠습니다. 하늘은 굽어 살펴 저를 도와 주소서!" 4일이 지나자 갑자기 한 노인이 갈옷을 입고 와서 말했다. "여기는 독충과 맹수가 많아서 무서운 곳인데, 귀소년이 여기에서 혼자 거처하니 무슨 일인가?" 공이 대답하였다. "어르신께서는 어디서 오셨는지 존함을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노인은 "나는 일정한 주거가 없고 인연 닿는 대로 가고 머무나니, 이름은 난승이다."라고 말하였다. 공이 이 말을 듣고 범상한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재배하고 말하기를 "저는 신라인으로서 나라의 원수를 보니 가슴이 아파 여기에 와서 누군가를 만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엎드려 비옵건대 어르신께서는 저의 정성을 불쌍히 여기시어 방술을 가르쳐 주소서."라고 하였다. 노인은 묵묵히 있었다. 공은 눈물을 흘리면서 예닐곱 번이나 거듭 열심히 간청하였다. 노인은 그 때서야 말했다. "그대가 어린 나이로 삼국을 병합하려는 뜻을 품고 있으니, 이 또한 장하지 않은가!" 노인은 말을 마치고 곧 비법을 가르쳐 주면서 "부디 함부로 전하지 말라! 만약 이를 의롭게 사용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재앙을 받으리라."라고 말하였다. 말이 끝나자 작별을 했다. 노인이 2리쯤 갔을 때 뒤쫓아가 그를 찾아보았으나 그는 흔적이 없고 오직 산 위에 오색 찬란한 빛이 서려 있었다.
○<建福>二十九{三十四} 年, 隣賊轉迫, 公愈激壯心, 獨携寶劒, 入<咽薄山>深壑之中, 燒香告天, 祈祝若在<中嶽>, 誓辭仍禱. 天官垂光, 降靈於寶劒. 三日夜, 虛角二星, 光芒赫然下垂, 劒若動搖然.
『북한본』.
건복 34년에 인접한 적국의 침략이 점점 긴박하여지자, 공은 더욱 더 장한 뜻을 품고 보검을 차고 홀로 인박산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향을 피워 놓고 하늘에 고하며 중악에서와 같이 축원하고 맹세하면서 기도하였다. 그 때 천관신이 빛을 비추며 보검에 영기를 쬐어 주었다. 3일째 되는 날 밤에 허수와 각수 두 별자리의 빛이 환하게 내려오자, 칼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建福>四十六{五十一} 年, 己丑秋八月, 王遣伊 <任永里{任末里}> , 波珍 <龍春>·<白龍>, 蘇判<大因>·<舒玄>等, 率兵攻<高句麗><娘臂城>. <麗>人出兵逆擊之, 吾人失利, 死者衆多, 衆心折 , 無復鬪心. <庾信>時爲中幢幢主, 進於父前, 脫胄而告曰: "我兵敗北, 吾平生以忠孝自期, 臨戰不可不勇. 盖聞: '振領而 正, 提綱而網張', 吾其爲綱領乎." 跨馬拔劒跳坑, 出入賊陣, 斬將軍, 提其首而來. 我軍見之, 乘勝奮擊, 斬殺五千餘級, 生擒一千人. 城中兇懼無敢抗, 皆出降.
『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
건복 51년 기축년 가을 8월에 왕이 이찬 임 영리·파진찬 용춘·백룡, 소판 대인과 서현 등에게 군사를 주어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략하게 했다. 그 때 고구려인들이 군사를 출동시켜 역으로 공격해오자, 우리 측이 불리하여 죽은 자가 많고 여러 사람들의 사기가 꺾여 더 이상 싸울 생각을 못하게 되었다. 유신은 당시 중당 당주였다. 그는 부친 앞으로 나아가 투구를 벗고 말했다. "우리 군사가 패하였습니다. 제가 평생 충효를 다하기로 기약하였으니 전쟁에 임하여 용감히 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옷깃을 들면 갖옷이 바르게 되고, 벼리를 당기면 그물이 펴진다.'고 들었으니, 제가 옷깃과 벼리가 되겠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 말에 올라 칼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참호를 뛰어넘어 적진을 드나들며 적장의 머리를 베어들고 돌아왔다. 아군이 이를 보고 승세를 타고 분연히 공격하여 5천여 명의 목을 베고 1천 명을 사로잡았다. 성 안 사람들은 공포에 떨어 감히 대항하는 자가 없이 모두 나와서 항복하였다.
○<善德大王>十一年壬寅, <百濟>敗<大梁州>, <春秋>公女子<古 炤>娘, 從夫<品釋>死焉. <春秋>恨之, 欲請<高句麗>兵, 以報<百濟>之怨, 王許之. 將行, 謂<庾信>曰: "吾與公同體, 爲國股肱. 今我若入彼見害, 則公其無心乎." <庾信>曰: "公若往而不還, 則僕之馬跡, 必踐於<麗>·<濟>兩王之庭. 苟不如此, 將何面目以見國人乎." <春秋>感悅, 與公互 手指, 血以盟曰: "吾計日六旬乃還, 若過此不來, 則無再見之期矣." 遂相別. 後<庾信>爲<押梁州>軍主. <春秋>與<訓信>沙于{沙干} , 聘<高句麗>, 行至<代買縣>, 縣人<豆斯支>沙干, 贈靑布三百步. 旣入彼境, <麗>王遣太大對盧<盖金>館之, 燕饗有加. 或告<麗>王曰: "<新羅>使者, 非庸人也. 今來, 殆欲觀我形勢也, 王其圖之, 無後患." 王欲橫問, 因其難對而辱之. 謂曰: "<麻木峴>與<竹嶺>, 本我國地, 若不我還, 則不得歸." <春秋> {對} 曰: "國家土地, 非臣子所專, 臣不敢聞命." 王怒囚之, 欲戮未果. <春秋>以靑布三百步, 密贈王之寵臣<先道解>. <道解>以饌具來, 相飮酒 , 戱語曰: "子亦嘗聞龜兎之說乎. 昔, 東海龍女病心, 醫言: '得兎肝合藥, 則可療也.' 然海中無兎, 不奈之何. 有一龜白龍王言: '吾能得之.' 遂登陸見免{兎} 言: '海中有一島, 淸泉白石, 茂林佳菓, 寒暑不能到, 鷹 不能侵. 爾若得至, 可以安居無患.' 因負兎背上, 游行二三里許. 龜顧謂兎曰: '今龍女被病, 須兎肝爲藥, 故不憚勞, 負爾來耳.' 兎曰: '噫, 吾神明之後, 能出五藏, 洗而納之. 曰{日} 者小覺心煩, 遂出肝心洗之, 暫置巖石之底, 聞爾甘言徑來, 肝尙在彼, 何不廻歸取肝, 則汝得所求, 吾雖無肝尙活, 豈不兩相宜哉.' 龜信之而還, 上岸, 兎脫入草中, 請{謂} 龜曰: '愚哉, 汝也, 豈有無肝而生者乎.' 龜憫默而退." <春秋>聞其言, 喩其意. 移書於王曰: "二嶺, 本大國地. 分{令} 臣歸國, 請吾王還之. 謂予不信, 有如 日." 王 悅焉. <春秋>入<高句麗>, 過六旬未還. <庾信>揀得國內勇士三千人, 相語曰: "吾聞見危致命, 臨難忘身者, 烈士之志也. 夫一人致死當百人, 百人致死當千人, 千人致死當萬人, 則可以橫行天下. 今國之賢相, 被他國之拘執, 其可畏不犯難乎." 於是衆人日{曰} : "雖出萬死一生之中, 敢不從將軍之令乎." 遂請王以定行期. 時, <高句麗>諜者浮屠<德昌>, 使告於王. 王前聞<春秋>盟辭, 又聞諜者之言, 不敢復留, 厚禮而歸之. 及出境, 謂送者曰: "吾欲釋憾於<百濟>, 故來請師. 大王不許之, 而反求土地, 此非臣所得專. 嚮, 與大王書者, {圖} 死耳."[此與本言{書 /記 }<眞平王>十二{<善德王>十一} 年所書, 一事而小異, 以皆古記所傳, 故兩存之.]
今西龍.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今西龍.趙炳舜. 『三國史節要』.今西龍.李丙燾.[북한본].李丙燾. 本紀.
[북한본].
선덕대왕 11년 임인에 백제가 대량주를 격파하였다. 그 때, 춘추공의 딸 고타소낭이 남편 품석을 따라 죽었다. 춘추는 이를 한탄하며 고구려에 청병하여 백제에 대한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길을 떠나기 전에 춘추가 유신에게 말했다. "나와 공은 일심동체로서 나라의 기둥이오. 이번에 내가 만약 고구려에 들어가 불행한 일을 당한다면 공이 무심할 수 있겠오?" 유신이 대답하였다. "공이 만일 돌아오지 못한다면 저의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백제 두 왕의 궁정을 짓밟을 것이오. 만약 이렇게 하지 못한다면 무슨 면목으로 백성들을 대하겠오?" 춘추가 감격하고 기뻐하여 공과 함께 서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마시며 맹세하였다. "내가 60일이면 돌아올 것이오. 만일 이 기한이 지나도록 오지 않는다면 다시 만날 기약이 없을 것이오." 그들은 드디어 작별하였다. 그 뒤에 유신은 압량주 군주가 되었다. 춘추가 훈신 사간과 함께 고구려에 사절로 가는 도중 대매현에 도착하였다. 그 때 고을 사람 두사지 사간이 푸른 베 3백 보를 그에게 주었다.
고구려 경내에 들어가니 고구려 왕이 태대대로 개금을 보내 객관을 정해주고 또한 연회를 열어 우대해 주었다. 어떤 사람이 고구려 왕에게 말했다. "신라 사자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이번에 그가 온 것은 아마도 우리의 형세를 정탐하려는 것 같으니 왕께서는 잘 처리하시어 후환이 없게 하소서." 왕은 춘추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하여 그를 곤혹스럽게 하고자 하여 그에게 물었다. "마목현과 죽령은 본래 우리 나라 땅이니 만약 이를 우리에게 돌려 주지 않는다면 돌아가지 못하리라." 춘추가 대답하였다. "국가의 영토는 신하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신은 감히 명령을 따를 수 없습니다." 왕이 분노하여 그를 가두고 죽이려 하다가 미처 죽이지 않고 있었다. 춘추는 푸른 베 3백 보를 왕의 총신 선도해에게 몰래 주었다. 도해가 음식을 준비해와서 함께 술을 마시고 취하자 농담으로 말했다. "그대도 일찌기 거북이와 토끼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오. 옛날 동해 용왕의 딸이 심장에 병이 났는데, 의사가 '토끼의 간을 얻어 약에 섞어 먹으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하였오. 그러나 바다에는 토끼가 없으니 어찌할 수 없었오. 그 때 마침 거북 한 마리가 용왕에게 아뢰었다오. '제가 그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북이는 마침내 육지로 나와서 토끼를 보고 말했소. '바다에 섬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맑은 샘과 흰 돌이 있고 무성한 숲과 맛있는 과실이 있다. 추위와 더위도 없고, 맹금도 침범할 수 없다. 네가 갈 수만 있다면 근심걱정 없이 편안히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북이는 토끼를 등에 업고 2∼3리쯤 헤엄쳐 갔다오. 그제서야 거북이가 토끼를 돌아보며 '지금 용왕의 딸이 병에 걸렸는데 토끼 간으로 약을 지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수고를 마다않고 너를 업고 오는 것이다.'라고 말했소. 이를 듣고 토끼가 말했다오. '아! 나는 천지신명의 후예인지라 오장을 꺼내어 씻어서 다시 넣을 수 있다. 일전에 속이 약간 불편한 듯하여 잠시 간과 심장을 꺼내어 씻은 후에 바위 밑에 두었다. 그런데 너의 달콤한 말을 듣고 곧 바로 오는 바람에 간이 아직도 거기에 있으니, 어찌 돌아가서 간을 가지고 오지 않으리? 그렇게 하면 너는 구하려는 약을 얻게 되고, 나는 간이 없더라도 살 수 있으니 어찌 둘이 서로 좋은 일이 아니랴?' 거북이 그 말을 곧이 듣고 돌아갔는데, 언덕에 오르자 마자 토끼가 풀 속으로 뛰어들어가면서 거북에게 말했다오. '어리석기도 하구나. 네놈은! 어찌 간이 없이 사는 놈이 있겠느냐?' 거북은 이 말을 듣고 멍청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물러갔다는 말이 있다오." 춘추는 이 말을 듣고 그의 뜻을 알아 차렸다. 그는 왕에게 글을 보내 말했다. "두 영은 본래 대국의 땅입니다. 신이 귀국하여 우리 왕에게 이를 돌려 보내도록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미덥지 않다면 저 태양을 두고 맹세하겠습니다." 왕은 그 때서야 기뻐하였다. 춘추가 고구려에 간 지 60일이 지나도록 안돌아오자 유신은 국내의 용사 3천 명을 선발하여 놓고 말했다. "위기를 당하면 목숨을 내놓고, 어려움을 당하면 한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이 열사의 뜻이라고 나는 들었다. 한 명이 목숨을 바쳐서 백 명을 대적하고, 백 명이 목숨을 바쳐서 천 명을 대적하고, 천 명이 목숨을 바쳐서 만 명을 대적한다면 천하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지금 이 나라의 어진 재상이 타국에 구금되어 있는데 어찌 두렵다 하여 일을 도모하지 않겠느냐?" 이에 모든 사람들이 "비록 만 번 죽고 한 번 사는 일에 나아갈지라도, 어찌 감히 장군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유신은 마침내 왕에게 떠날 날짜를 정해주기를 요청하였다. 이 때 고구려의 간첩인 중 덕창이 고구려에 사람을 보내 이 사실을 고구려의 왕에게 알리도록 하였다. 고구려 왕은 전날 춘추의 맹세를 들었고, 또한 첩자의 말을 들은지라 그 이상 만류하지 못하고 후한 예로 대우하여 춘추를 귀국케 하였다. 고구려 국경을 벗어나자 춘추가 전송하러 나온 자에게 말했다. "내가 백제에 원수를 갚기 위하여 고구려에 와서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대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땅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신하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전에 대왕에게 보낸 글은 죽음을 모면하려는 것이었을 뿐이다."[이는 본기 선덕왕 11년 기록과 같은 사건인데 내용이 약간 다르다. 그러나 모두 고기에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두 가지를 그대로 기록하기로 한다.]
○<庾信>爲<押梁州>軍主, 十三年爲蘇判. 秋九月, 王命爲上將軍, 使領兵伐<百濟><加兮城>·<省熱城>·<同大城{同火城}> 等七城, 大克之, 因開<加兮>之津. 乙丑{乙巳} 正月, 歸未見王, 封人急報: <百濟>大軍來, 攻我<買利浦>城. 王又拜<庾信>爲<上州>將軍, 令拒之. <庾信>聞命卽駕, 不見妻子, 逆擊<百濟>軍走之, 斬首二千級. 三月, 還命王宮, 未歸家, 又急告: <百濟>兵出, 屯于其國界, 將大擧兵侵我. 王復告<庾信>曰: "請公不憚勞 行, 及其未至備之." <庾信>又不入家, 練軍繕兵, 向西行.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북한본].
유신은 압량주 군주로 있다가 13년에 소판이 되었다. 가을 9월에 왕은 그를 상장군으로 임명하고 군사를 주어 백제의 가혜성·성열성·동화성 등의 일곱 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유신은 크게 승리하였다. 이 승리로 인하여 가혜에 나루를 개설하였다. 유신은 을사 정월에 돌아왔다. 그러나 미처 왕을 만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 때 백제의 대군이 와서 우리의 매리포성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봉인이 급히 알려왔다. 왕은 다시 유신에게 상주장군을 제수하고 이를 방어하게 하였다. 유신은 왕명을 받자 처자도 만나지 않고 즉시 말을 몰아 백제군을 역습하여 패주시키고 2천 명의 머리를 베었다. 유신이 3월에 돌아와 왕궁에 복명하고 아직 집으로 돌아가기도 전이었다. 백제병이 다시 출동하여 국경에 주둔하며, 장차 군사를 크게 동원하여 신라를 침략하려 한다는 급보가 왔다. 왕은 다시 유신에게 말했다. "공은 수고를 마다하지 말고, 빨리 가서 적들이 도착하기 전에 대비하기 바란다." 유신은 또 다시 집에 들르지도 않고 군사를 훈련하고 병기를 수선하여 서쪽으로 떠났다.
○于時, 其家人皆出門外待來. <庾信>過門, 不顧而行, 至五十步許, 駐馬, 令取漿水於宅, 之曰: "吾家之水, 尙有舊味." 於是, 軍衆皆云: "大將軍猶如此, 我輩豈以離別骨肉爲恨乎." 及至疆 , <百濟>人望我兵衛, 不敢迫, 乃退. 大王聞之甚喜, 加爵賞.
그 때 유신의 가족들은 모두 문 밖에서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유신은 문을 지나면서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집에서 50보 가량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 말을 멈추고 자기 집의 물을 떠오게 하였다. 그는 그 물을 마시면서 말했다. "우리 집의 물맛이 아직도 옛 맛 그대로구나." 그 때 군사들이 모두 "대장군도 이러한데 우리가 어찌 가족과 헤어지는 것을 유감스럽게 여길 것인가"라고 하였다. 국경에 이르르자 백제인들이 우리 군사의 진영을 보고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왕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그에게 상과 벼슬을 주었다.
○十六年丁未, 是<善德王>末年, <眞德王>元年也. 大臣<毗曇>·<廉宗>, 謂女主不能善理, 擧兵欲廢之, 王自內禦之. <毗曇>等屯於<明活城>, 王師營於<月城>, 攻守十日不解. 丙夜, 大星落於<月城>. <毗曇>等謂士卒曰: "吾聞落星之下, 必有流血, 此殆女主敗績{ } 之兆也." 士卒呼吼聲振(+天) 地.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16년 정미는 선덕왕 말년이며, 진덕왕 원년이었다. 대신 비담과 염종 등은 여왕이 정치를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군사를 동원하여 폐위시키려 하였다. 왕은 궁안에서 이들을 방어하였다. 비담 등은 명활성에 주둔하고 왕의 군사는 월성에 진을 친 채 10일 동안 공방전이 계속되었으나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 한밤중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졌다. 비담 등은 사졸들에게 "별이 떨어진 자리에는 반드시 피가 흐른다는 말이 있으니, 이는 여왕이 패전할 징조이리라."라고 말했다. 이를 들은 병졸들의 함성이 천지를 흔들었다.
○大王聞之, 恐懼失次. <庾信>見王曰: "吉凶無常, 惟人所召. 故<紂>以赤雀亡, <魯>以獲麟衰, <高宗>以雉 興, <鄭公>以龍鬪昌. 故知德勝於妖, 則星辰變異, 不足畏也, 請王勿憂." 乃造偶人抱大{火} , 載於風鳶而 之, 若上天然. 翌日, 使人傳言於路曰: "昨夜, 落星還上." 使賊軍疑焉. 又刑白馬, 祭於落星之地, 祝{呪} 曰: "天道則陽剛, 而陰柔; 人道, 則君尊而臣果{卑} . 苟或易之, 卽爲大亂. 今, <毗曇>等以臣而謀君, 自下而犯上. 此所謂亂臣賊子, 人神所同疾, 天地所不容. 今, 天若無意於此, 而反見星怪於王城, 此臣之所疑惑而不喩者也. 惟天之威, 從人之欲, 善善惡惡, 無作神羞." 於是, 督諸將卒奮擊之, <毗曇>等敗走. 追斬之, &夷九族{連坐者三十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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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은 이 말을 듣고 몹시 두려워 하였다. 유신이 왕을 뵙고 말했다. "길흉에는 일정한 법칙이 없으니 오직 사람이 하기에 달렸습니다. 그러므로 붉은 새가 모여 들어 주가 멸망하였고, 기린을 잡았기 때문에 노 나라가 쇠퇴했으며, 꿩의 울음으로 인하여 고종이 흥기했고, 용의 싸움으로 인하여 정공이 창성해졌습니다. 이로써 덕은 요사한 것을 이긴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별의 변괴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왕께서는 근심하지 마소서." 유신은 말을 마치고 허수아비를 만들었다. 그리고 거기에 불을 붙여서 연에 실어서 띄워 보냈다. 이는 마치 별이 하늘로 올라 가는 것 같았다. 다음날 그는 "어제 밤에 별이 떨어졌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 갔다"는 소문을 내게 하여, 적들로 하여금 이것이 사실이라고 믿게 하였다. 유신은 또한 백마를 잡아 별이 떨어진 자리에 제사를 지내면서 다음과 같이 기원하였다. "천도에는 양이 강하고 음이 부드러우며, 인도에는 임금이 높고 신하가 낮습니다. 만일 이 순서를 바꾸면 큰 변란이 일어납니다. 지금 비담의 도당이 신하로서 임금을 모해하며, 아랫사람으로서 웃사람을 범하니, 이는 이른바 난신적자로서 사람과 신령이 함께 미워할 일이요,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못할 일입니다. 지금 하늘이 이에 무심하여 도리어 별의 변괴를 왕성에 보인 것이라면, 이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일이니 사실을 알 수 없습니다. 하늘의 위엄으로서 인간이 소망하는대로, 선을 선으로 여기고 악을 악으로 여기게 하여, 신령을 탓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리고 나서 그는 장졸들을 독려하여 분연 돌격하였다. 비담 등은 패하여 도망하였다. 유신은 그들을 추격하여 목을 베고 구족을 멸하였다.
○冬十月, <百濟>兵來, 圍<茂山>·<甘勿>·<桐岑>等三城, 王遣<庾信>, 率步騎一萬拒之. 苦戰氣竭, <庾信>謂<丕寧子>曰: "今日之事急矣, 非子, 誰能激衆心乎." <丕寧子>拜曰: "敢不惟命之從." 遂赴敵. 子<擧眞>及家奴<合節>隨之, 突劒戟, 力戰死之. 軍士望之, 感勵爭進, 大敗賊兵, 斬首三千餘級.
겨울 10월에 백제 군사가 침입하여 무산·감물·동잠 등의 세 성을 포위하였다. 왕은 유신에게 보병과 기병 1만을 주어 이를 방어하게 하였다. 그러나 유신은 고전을 면치 못하였고 마침내 기력이 없어지자 비녕자에게 말했다. "오늘의 사태가 위급하다. 그대가 아니면 누가 군사들의 마음을 격려할 수 있으랴!" 비녕자가 절을 하고 말했다. "어찌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비녕자는 드디어 적진으로 달려갔다. 그의 아들 거진과 종 합절이 그를 따라 적의 칼과 창 속으로 돌진하여 전력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다. 군사들이 이를 보고 감격하여 서로 앞을 다투어 진격하여 적병을 대파하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眞德王><大和>元年戊申, <春秋>以不得請於<高句麗>, 遂入<唐>乞師. <太宗>皇帝曰: "聞爾國<庾信>之名, 其爲人也如何?" 對曰: "<庾信>雖少有才智, 若不籍天威, 豈易除隣患." 帝曰: "誠君子之國也." 乃詔許, 將軍<蘇定方>, 以師二十萬, 征<百濟>. 時, <庾信>爲<押梁州>軍主, 若無意於軍事, 飮酒作樂, 屢經旬月. 州人以<庾信>爲庸將, 譏謗之曰: "衆人安居日久, 力有餘, 可以一戰, 而將軍 惰, 如之何?"
진덕왕 대화 원년 무신에 춘추는 고구려에 원조를 요청하였다가 실패하였다. 이에 따라 마침내 당에 가서 군사를 요청하였다. 태종 황제가 "나는 너희 나라의 유신에 대한 명성을 들었다. 그의 위인이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춘추가 대답하기를 "유신이 비록 재능과 지혜가 조금 있다고 하나 황제의 위력을 빌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쉽사리 주변국의 우환을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황제는 "참으로 군자의 나라로다"하며 조서를 내려 춘추의 요청을 허락하고, 장군 소정방에게 군사 20만을 주어 백제를 치도록 하였다. 이 때 유신은 압량주 군주로 있었다. 그는 군무에는 아무런 뜻도 없는 것처럼 술을 마시고 풍악을 울리며 수개월을 지냈다. 고을 사람들은 유신을 용렬한 장수라고 여기면서 "백성들이 편하게 생활한 지가 오래 되었으므로 힘의 여유가 있어 한바탕 싸울 만한데 장군이 저렇게 나태하니 이 일을 어찌할까?"라고 비방하였다.
○<庾信>聞之, 知民可用, 告大王曰: "今觀民心, 可以有事. 請伐<百濟>, 以報<大梁州>之役." 王曰: "以小觸大, 危將奈何?" 對曰: "兵之勝否, 不在大小, 顧其人心何如耳. 故<紂>有億兆人, 離心離德, 不如<周>家十亂同心同德. 今, 吾人一意, 可與同死生, 彼<百濟>者不足畏也." 王乃許之. 遂簡練州兵赴敵. 至<大梁城>外, <百濟>逆拒之. 佯北不勝, 至<玉門谷>. <百濟>輕之, 大率衆來, 伏發擊其前後, 大敗之, 獲<百濟>將軍八人, 斬獲一千級, 於是, 使告<百濟>將軍曰: "我軍主<品釋>及其妻金氏之骨, 埋於爾國獄中. 今, 爾裨將八人, 見捉於我匍匐, 請命. 我以狐豹首丘山之意, 未忍殺之. 今, 爾送死二人之骨, 易生八人, 可乎." <百濟><仲常>[一作<忠常>.]佐平言於王曰: "<羅>人骸骨, 留之無益, 可以送之. 若<羅>人失信, 不還我八人, 則曲在彼, 直在我, 何患之有?" 乃掘<品釋>夫妻之骨, 而送之. <庾信>曰: "一葉落, 茂林無所損, 一塵集, 大山無所增." 許八人生還. 遂乘勝入<百濟>之境, 攻拔<嶽城>等十二城, 斬首二萬餘級, 生獲九千人. 論功, 增秩伊 , 爲<上州>行軍大摠管. 又入賊境, 屠<進禮>等九城, 斬首九千餘級, 虜得六百人. <春秋>入<唐>, 請得兵二十萬來, 見<庾信>曰: "死生有命, 故得生還, 復與公相見, 何幸如焉." <庾信>對曰: "下臣仗國威靈, 再與<百濟>大戰, 拔城二十, 斬獲三萬餘人, 又使<品釋>公及夫人之骨, 得反鄕里. 此皆天幸所致也, 吾何力焉."
三國史記卷第四十一.
유신은 이 말을 듣고 백성들의 자질이 훌륭함을 알았다. 그는 대왕에게 말했다. "민심을 살펴보니 이제 일을 할 만 합니다. 청컨대 백제를 쳐서 대량주 싸움의 원수를 갚으십시오." 왕이 말했다. "작은 힘으로 큰 세력을 건드리면 그 위태로움을 어찌 할 것인가?" 유신이 대답하였다. "전쟁의 승부는 세력의 대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민심에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紂)에게는 억조의 백성이 있었으나, 인심이 떠나고 덕이 떠나버려 주(周)의 열 명의 신하가 한 마음 한 뜻을 가진 것만 못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한 뜻이 되어 생사를 같이할 수 있으니 저 백제쯤은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왕이 이에 허락하였다. 유신은 드디어 각 주의 병사를 선발 훈련하여 적진으로 갔다. 대량성 밖에 이르니 백제가 역습으로 대항하였다. 그는 일부러 이기지 못하는 척하고 일부러 패주하여 옥문곡에 이르렀다. 백제는 그를 얕잡아 보고 군사를 크게 동원하여 왔다. 그 때 복병이 일어나 백제군의 앞뒤를 공격하여 대파하고, 백제 장수 8명을 사로잡았으며 1천 명의 목을 베었다. 유신은 사람을 시켜 백제의 장군에게 말했다. "우리 군주 품석과 그 아내 김씨의 뼈가 너희 나라 옥중에 묻혀 있다. 이제 너희들의 비장 8명이 우리에게 잡혀서 꿇어 엎드려 살려주기를 간청하고 있다. 나는 여우와 표범이 죽을 때 머리를 제 고향으로 두는 뜻을 생각하여 그들을 차마 죽이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너희는 죽은 두 사람의 유골을 여덟 명의 산 사람과 바꾸는 것이 어떠한가?" 백제의 중상[충상이라고도 한다.] 좌평이 왕에게 "신라인의 해골을 남겨 두어 유익할 것이 없으니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일 신라인이 신의를 버리고 우리 여덟 사람을 돌려 보내지 않는다면, 저들이 잘못한 것이요, 우리가 옳은 것이니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라고 말하고, 곧 품석 부처의 유골을 파서 관에 넣어 보냈다. 유신은 "잎사귀 하나가 떨어진다고 하여 무성한 숲이 상하지 않으며, 티끌 하나가 더 쌓인다고 하여 큰 산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여덟 사람의 귀환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승세를 타고 백제 경내에 들어가 악성 등 12성을 함락시키고, 2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9천 명을 사로잡았다.
왕은 공을 논하여 유신에게 이찬의 작위를 주고 상주 행군 대총관으로 삼았다. 유신은 다시 적의 경내에 들어가서 진례 등의 아홉 성을 공격하여 9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6백 명을 사로 잡았다. 춘추가 당으로 들어가 병력 20만을 얻기로 하고 돌아와 유신을 만나 말했다. "죽고 사는 것이 천 명이 달려서인지 내가 살아와 다시 공과 만나게 되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유신이 대답하기를 "제가 나라의 힘에 의지하고 영령의 위세를 빌어, 다시 백제와 크게 싸워서 20개의 성을 빼앗고 3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또한 품석공과 부인의 유골을 향리로 돌아올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천행으로 이루어진 것이지 내가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41 끝
三國史記卷第四十二.
삼국사기 권 제 42
趙炳舜.
열전 제 2 김 유신 (중)
○(+太和) 二年秋八月, <百濟>將軍<殷相>, 來攻<石吐>等七城. 王命<庾信>及<竹旨>·<陳春>·<天存>等將軍, 出禦之. 分三軍爲五道, 擊之, 互相勝負, 經旬不解, 至於 屍滿野, 流血浮杵. 於是, 屯於<道薩城>下, 歇馬餉士, 以圖再擧. 時, 有水鳥東飛, 過<庾信>之幕, 將士見之, 以爲不祥. <庾信>曰: "此不足怪也." 謂衆曰: "今日, 必有<百濟>人來諜. 汝等佯不知, 勿敢誰何." 又使徇于軍中曰: "堅壁不動, 待明日援軍至, 然後, 決戰."
趙炳舜. 『三國史記』 列傳41卷.
2년 가을 8월에 백제 장군 은상이 쳐들어와서 석토 등의 일곱 성을 공격하였다. 왕은 유신과 죽지·진춘·천존 등의 장군들에게 명령하여 이를 방어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삼군을 오도로 나누어 공격하였다. 그러나 승패를 서로 주고받아 10일이 지나도록 전투가 끝나지 않았다. 쓰러진 시체는 들에 가득 하고, 절굿공이가 뜰 정도로 피가 흐르는 상황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들은 도살성 아래 주둔하면서 말을 쉬게 하고 군사들을 배불리 먹여서 다시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 때 물새 한 마리가 동쪽으로 날아가다가 유신의 군막을 지나치자 장병들은 이를 보고 흉조라고 여겼다. 유신이 말하기를 "이것을 괴이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라 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오늘 반드시 정탐을 하려는 백제의 첩자가 올 것이다. 너희들은 모르는 체하며 누구냐고 묻지도 말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큰소리로 각 진영에 명령을 내렸다. "성벽을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말라. 내일 원군이 도착한 다음 결전을 하리라."
○諜者聞之, 歸報<殷相>. <殷相>等謂有加兵, 不能不疑懼. 於是, <庾信>等一時奮擊, 大克之, 生獲將軍達率<正仲>·士卒一百人, 斬佐平<殷相>·達率<自堅>等十人及卒八千九百八十人, 獲馬一萬匹·鎧一千八百領, 其他器械稱是. 及歸還, 路見<百濟>佐平<正福>與卒一千人來降, 皆放之, 任其所往. 至京城, 大王迎門, 勞慰優厚.
첩자는 이 말을 듣고 돌아가 은상에게 보고하였다. 은상 등은 신라의 병력이 증가된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유신 등이 일시에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그들은 장군 달솔 정중과 군사 1백 명을 사로잡았으며, 좌평 은상과 달솔 자견 등 10명과 군사 8천9백8십 명의 목을 베었고, 말 1만 필과 갑옷 1천8백 벌을 노획하였다. 이 이외에 노획한 각종 기구도 이와 비슷하였다. 그들이 돌아올 때 길에서 백제의 좌평 정복이 군사 1천 명을 데리고 항복하여 왔다. 유신은 이들을 모두 풀어 주어 마음대로 돌아가게 하였다. 경성에 이르니 대왕이 문까지 나와서 그들을 맞이하여 위로하고 후대하였다.
○<永徽>五年, <眞德大王>薨, 無嗣. <庾信>與宰相閼川伊 謀, 迎<春秋>伊 , 卽位, 是爲<太宗大王>.
영휘 5년에 진덕대왕이 사망하였으나 후사가 없었다. 유신은 재상인 이찬 알천과 상의하여 이찬 춘추를 즉위하게 하였다. 이가 곧 태종대왕이다.
○<永徽>六年乙卯秋九月, <庾信>入<百濟>, 攻<刀比川城>克之. 是時, <百濟>君臣, 奢泰淫逸, 不恤國事. 民怨神怒, 災怪屢見. <庾信>告於王曰: "<百濟>無道, 其罪過於<桀>·<紂>, 此誠順天弔民伐罪之秋也." 先是, <租未押>級 爲<夫山>縣令, 被虜於<百濟>, 爲佐平<任子>之家奴. 從事勤恪, 曾無懈慢, <任子>憐之不疑, 縱其出入, 乃逃歸, 以<百濟>之事, 告<庾信>. <庾信>知<租未押>忠正而可用, 乃語曰: "吾聞<任子>專<百濟>之事, 思有以與謀而未{末} 由. 子其爲我, 再歸言之." 答曰: "公不以僕爲不肖, 而指使之, 雖死無悔."
今西龍.
영휘 6년 을묘 가을 9월에 유신은 백제에 진공하여 도비천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이 때 백제는 임금과 신하가 사치하고 음란하여 국사를 돌보지 않았다. 백성들은 이를 원망하고, 신령이 노하여 재앙과 괴변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유신이 왕에게 "백제가 무도하여 죄악이 걸, 주보다 심하니, 이제는 실로 하늘의 뜻에 따라 백성을 불쌍히 여기어 그 죄를 다스릴 때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앞서 급찬 조미압이 부산 현령으로 있다가 백제로 잡혀가서 좌평 임자의 종이 되었었다. 그는 정성을 다하여 부지런히 일하고 태만한 적이 없었다. 임자는 그를 불쌍히 여겨 의심하지 않았고, 마음대로 외부 출입을 하게 하였다. 그러자 그는 백제를 탈출하여 신라로 돌아와 백제의 사정을 유신에게 보고하였다. 유신은 조미압이 충직하여 쓸만한 인물임을 알고 그에게 말했다. "나는 임자가 백제의 국사를 전담한다고 듣고 있다. 내가 그와 의논을 하려 하였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 그대가 나를 위하여 다시 돌아가서 이것을 이야기하라." 그는 "공이 저를 불초하다고 여기지 않고 일을 맡기시니, 비록 죽더라도 후회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遂復入於<百濟>, 告<任子>曰: "奴自以謂旣爲國民, 宜知國俗, 是以, 出遊累旬不返, 不勝犬馬戀主之誠, 故此來耳." <任子>信之不責. <租未押>伺間報曰: "前者, 畏罪不敢直言, 其實, 往<新羅>還來. <庾信>諭我來告於君曰: '邦國興亡, 不可先知, 若君國亡, 則君依於我國, 我國亡, 則吾依於君國.'" <任子>聞之, 然無言. <租未押>惶懼而退, 待罪數月. <任子>喚而問之曰: "汝前說<庾信>之言, 若何?" <租未押>驚恐而對, 如前所言. <任子>曰: "爾所傳, 我已悉知, 可歸告之." 遂來說兼及中外之事, 丁寧詳悉. 於是, 愈急幷呑之謀.
그는 마침내 다시 백제로 가서 임자에게 말했다. "제가 기왕 백제의 백성이 되었으니 이 나라의 풍습을 알아야겠기에 수십 일 동안 다니면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개와 말이 주인을 그리는 마음처럼 제 마음을 억제할 수 없어서 이렇게 돌아 왔습니다." 임자는 그 말을 믿고 책망하지 않았다. 조미압이 기회를 타서 임자에게 말했다. "전번에는 죄를 받을까 두려워서 감히 바른 말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저는 신라에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유신이 전하라고 하면서 저에게 '나라의 흥망은 예측할 수 없으니, 만일 백제가 망하면 그대는 신라에 의탁하고, 신라가 망하면 내가 백제에 의탁하기로 하자'고 말하였습니다." 임자는 이 말을 듣고 묵묵히 말이 없었다. 조미압은 황송스러워하며 물러나와 여러 달 동안 내내 처벌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에 임자가 불러서 물었다. "네가 지난 번에 이야기한 유신의 말이 어떤 것인가?" 조미압은 놀라고 두려워하며 지난 번에 말한 것과 똑같이 대답하였다. 임자가 말했다. "네가 전한 말을 내가 이미 잘 알았으니 돌아가서 알려라." 조미압이 드디어 신라로 돌아와 임자의 말을 전하고, 동시에 백제의 내외 사정을 상세하게 이야기하니, 유신은 서둘러 백제를 병합할 계획을 세웠다.
○<太宗大王>七年庚申夏六月, 大王與太子<法敏>, 將伐<百濟>, 大發兵, 至<南川>而營. 時, 入<唐>請師波珍 <金仁問>, 與<唐>大將軍<蘇定方>·<劉伯英>, 領兵十三萬, 過海到<德物島>, 先遣從者<文泉>來告. 王命太子與將軍<庾信>·<眞珠>·<天存>等, 以大船一百 , 載兵士會之. 太子見將軍<蘇定方>, <定方>謂太子曰: "吾由海路, 太子登陸行, 以七月十日, 會于<百濟>王都<泗 >之城." 太子來告大王, 率將士, 行至<沙羅>之停.
태종대왕 7년 경신 여름 6월, 대왕은 태자 법민을 데리고 백제를 공격하기 위하여 군사를 크게 동원하여 남천에 이르러 진을 쳤다. 이 때 당 나라에 원군을 청하러 갔던 파진찬 김 인문이 당 나라 대장군 소정방, 유백영과 함께 군사 13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덕물도까지 와서 먼저 종자 문천을 보내 보고하게 하였다. 왕이 태자와 장군 유신·진주·천존 등에게 명하여 큰 배 1백 척에 병사들을 함께 태우고 가서 회합케 하였다. 태자가 장군 소정방을 만나자 정방이 태자에게 "나는 해로로 가고 태자는 육로로 가서 7월 10일에 백제의 왕도 사비성에서 만나자"고 말하였다. 태자가 돌아와서 왕에게 이 말을 전한 다음 장병들을 거느리고 사라의 군영에 이르렀다.
○將軍<蘇定方>·<金仁問>等, 沿海入<依伐浦{技伐浦 /伎伐浦 }>. 海岸泥 , 陷不可行. 乃布柳席, 以出師. <唐>·<羅>合擊<百濟>滅之. 此役也, <庾信>之功爲多. 於是, <唐>皇帝聞之, 遣使 {褒} 嘉之. 將軍<定方>謂<庾信>·<仁問>·<良圖>三人曰: "吾受命以便宜從事, 今以所得<百濟>之地, 分錫公等爲食邑, 以酬厥功, 如何?" <庾信>對曰: "大將軍以天兵來, 副寡君之望, 雪小國之讐, 寡君及一國臣民, 喜 之不暇, 而吾等獨受賜以自利, 其如義何." 遂不受.
李丙燾.『북한본』.今西龍.
장군 소정방·김 인문 등은 해안을 따라 의벌포에 이르렀으나 해안이 갯벌이어서 걸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버들을 자리로 만들어 깔아놓고 군사들을 하선케 하였다. 당군과 신라군은 연합 공격하여 백제를 멸하였다. 이 싸움에서 유신의 공로가 컸다. 당 나라 황제가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그를 표창하였다. 장군 정방이 유신·인문·양도 등 세 사람에게 말했다. "내가 황제의 명을 받아 일을 처리하게 되었다. 이제 빼앗은 백제 땅을 공들의 식읍으로 나누어 줌으로써 여러분의 공에 보답코자 하는데 어떤가?" 유신이 "대장군이 귀국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우리 임금의 소망에 부응하고 우리 나라의 원수를 갚았으니, 우리 임금과 온 나라 신민들이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유독 우리만이 땅을 받아 자신을 이롭게 한다면 이것이 어찌 의로운 일이겠는가?"라고 말하고는 받지 않았다.
○<唐>人旣滅<百濟>, 營於<泗 >之丘, 陰謀侵<新羅>. 我王知之, 召群臣問策. <多美公>進曰: "令我民, 詐爲<百濟>之人, 服其服, 若欲爲賊者, <唐>人必擊之. 因與之戰, 可以得志矣." <庾信>曰: "斯言可取, 請從之." 王曰: "<唐>軍爲我滅敵, 而反與之戰, 天其祐我耶." <庾信>曰: "犬畏其主, 而主踏其脚, 則咬之, 豈可遇難, 而不自救乎. 請大王許之." <唐>人諜知我有備, 虜<百濟>王及臣寮九十三人·卒二萬人, 以九月三日, 自<泗 >泛船而歸, 留郞將<劉仁願>等, 鎭守之. <定方>旣獻 , 天子慰藉之曰: "何不因而伐<新羅>." <定方>曰: "<新羅>其君仁而愛民, 其臣忠以事國, 下之人事其上, 如父兄, 雖小, 不可謀也."
당 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키자 사비 지역에 진영을 치고 신라에 대한 침공을 음모하였다. 우리 왕이 이를 알고 여러 신하들을 불러 대책을 물었다. 다미공이 나서서 말했다. "우리 나라 사람을 백제인으로 가장하여, 백제의 의복을 입혀서 역적행위를 하게 하면 당군이 반드시 이를 공격할 것입니다. 이 때 그들을 공격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신이 말했다. "이 의견이 취할 만하니 시행하기 바라나이다." 왕이 말했다. "당군이 우리를 위하여 적을 격멸하였는데 도리어 그들과 싸운다면 하늘이 우리를 도와 주겠는가?" 유신이 말했다. "개가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자기의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국난을 당하여 어찌 자위책을 취하지 않겠습니까? 대왕께서 이를 허락하소서." 당 나라가 우리의 대비책을 정탐하여 알고, 백제 왕과 신하 93명, 군사 2만 명을 사로잡아 9월 3일에 사비로부터 배를 타고 돌아가면서 낭장 유 인원 등을 남겨두어 수비하게 하였다. 정방이 귀국하여 천자에게 포로를 바쳤다. 천자가 위로하며 말했다. "어찌하여 뒤이어 신라를 치지 않았는가?" 정방이 말했다. "신라 왕은 인자한 마음으로 백성을 사랑하며, 신하들은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고, 아랫 사람들은 웃 사람을 부형과 같이 섬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라는 비록 작지만 일을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龍朔>元年春, 王謂<百濟>餘燼尙在, 不可不滅, 以伊 <品日>·蘇判<文王>·大阿 <良圖>等, 爲將軍, 往伐之, 不克. 又遣伊 <欽純>[一作<欽春>]·<眞欽>·<天存>·蘇判<竹旨>等, 濟師. <高句麗>·<靺鞨>, 謂<新羅>銳兵皆在<百濟>, 內虛可 , 發兵, 水陸 進, 圍<北漢山城>. <高句麗>營其西, <靺鞨>屯其東, 攻擊浹旬, 城中危懼, 忽有大星落於賊營, 又雷雨震擊, 賊等疑駭, 解圍而遁. 初, <庾信>聞賊圍城曰: "人力旣竭, 陰助可資." 詣佛寺, 設壇祈禱. 會有天變, 皆謂至誠所感也.
용삭 원년 봄에 왕은 백제의 잔적이 아직 남아있으니 그대로 둘 수 없다고 하여 이찬 품일·소판 문왕·대아찬 양도 등을 장군으로 삼아 백제로 가서 그들을 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이찬 흠순[흠춘으로도 쓴다]·진흠·천존과 소판 죽지 등을 보내 우리 군사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와 말갈은 신라의 정예병이 모두 백제에 출병하여 국내가 비었으므로 신라를 공략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들은 군사를 출동시켜 수로와 육로로 동시에 진격하여 북한산성을 포위하였다. 고구려는 성의 서쪽에 진을 치고 말갈은 성의 동쪽에 주둔하여 10일 동안 공격을 계속하자 성 안은 공포와 두려움에 싸였다. 그 때 갑자기 큰 별이 적의 진지에 떨어지고 또한 뇌우와 함께 벼락이 쳤다. 그러자 적들은 당혹하고 놀라며 포위를 풀고 도주하였다. 처음에 유신은 적이 성을 포위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말했다. "사람의 힘은 이미 다하였으나 하늘의 도움은 얻을 수 있다." 그는 사찰로 가서 제단을 쌓고 기도를 하였는데, 마침 천변이 일어나자 모든 사람이 유신의 지성에 감동된 결과라고 말하였다.
○<庾信>嘗以中秋夜, 領子弟, 立大門外, 忽有人從西來. <庾信>知<高句麗>諜者, 呼使之前曰: "而國有底事乎." 其人俯而不敢對. <庾信>曰: "無畏也, 但以實告." 又不言. <庾信>告之曰: "吾國王, 上不違天意, 下不失人心, 百姓欣然, 皆樂其業, 今爾見之, 往告而國人." 遂慰送之. <麗>人聞之曰: "<新羅>雖小國, <庾信>爲相, 不可輕也."
유신이 일찌기 추석 날 밤에 자제들을 데리고 대문 밖에 서있었다. 그 때 갑자기 어떤 사람이 서쪽에서 왔다. 유신은 그가 고구려 첩자인 것을 알고 불러 앞으로 오게 하였다. 유신이 말했다. "너희 나라에 무슨 일이 있느냐?" 그는 고개를 숙이고 감히 대답을 못하였다. 유신이 "두려워하지 말고 사실대로 말하라"고 하였으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 유신이 "우리 나라 임금은, 위로는 하늘의 뜻을 어기지 않고 아래로는 인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흔쾌히 각자의 생업을 즐기고 있다. 이제 네가 이것을 보았으니 가서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이를 전하라!"하고는 곧 그를 위로하여 돌려 보냈다. 고구려인들이 이 말을 듣고 말했다. "신라가 비록 작은 나라지만 유신이 재상이 되었으니 경시할 수 없다."
○六月, <唐><高宗皇帝>遣將軍<蘇定方>等, 征<高句麗>. 入<唐>宿衛<金仁問>, 受命來告兵期, 兼諭出兵會伐. 於是, <文武大王>率<庾信>·<仁問>·<文訓>等, 發大兵向<高句麗>, 行次<南川州>. 鎭守<劉仁願>, 以所領兵, 自<泗 >泛船, 至<鞋浦>下陸, 亦營於<南川州>. 時, 有司報: "前路有<百濟>殘賊, 屯聚<瓮山城>遮路, 不可直前." 於是, <庾信>以兵進而圍城. 使人近城下, 與賊將語曰: "而國不 , 致大國之討. 順命者賞, 不順命者戮. 今汝等, 獨守孤城, 欲何爲乎. 終必塗地, 不如出降. 非獨存命, 富貴可期也."
6월, 당의 고종 황제가 장군 소정방 등을 보내 고구려를 정벌케 하였다. 당 나라에 가서 숙위하던 김 인문이 명을 받고 와서 출병 기일을 보고하는 동시에 신라에서도 군사를 출동시켜 함께 고구려를 치라는 황제의 뜻을 전했다. 이에 따라 문무대왕이 유신·인문·문훈 등을 대동하고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로 가는 도중 남천주에 이르렀다. 진수하던 당장 유 인원도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사비에서 배를 띄워 혜포에 내려 역시 남천주에 진을 쳤다. 이 때 유사가 와서 보고하였다. "앞에 백제의 잔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옹산성에 주둔하면서 길을 차단하고 있으니 앞으로 전진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에 유신이 군사를 동원하여 성을 포위하였다. 사신이 성 아래로 가까이 접근하여 적장에게 말했다. "네 나라가 공손치 않았기 때문에 대국의 토벌을 받게 된 것이다. 명령에 따르는 자는 상을 받을 것이며,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제 너희들이 홀로 고립된 성을 지켜서 무엇을 하겠느냐? 결국 비참하게 궤멸될 것이니 나와서 항복하는 것만 못하다. 이리하면 목숨을 보존할 뿐 아니라 부귀도 기대할 수 있으리라."
○賊高聲唱曰: "雖 爾小城, 兵食俱足, 士卒義勇, 寧爲死戰, 誓不生降." <庾信>笑曰: "窮鳥困獸, 猶知自救, 此之謂也." 乃揮旗鳴鼓攻之. 大王登高見戰士, 淚語激勵之, 士皆奮突, 鋒刃不顧. 九月二十七日, 城陷, 捉賊將戮之, 放其民. 論功賞 將士, <劉仁願>亦分絹有差. 於是, 饗士 馬, 欲往會<唐>兵. 大王前遣太監{大監} <文泉>, 移書<蘇>將軍, 至是復命, 遂傳<定方>之言曰: "我受命萬里, 涉滄海而討賊, 艤舟海岸, 旣踰月矣. 大王軍士不至, 糧道不繼, 其危殆甚矣. 王其圖之." 大王問群臣如之何而可. 皆言深入敵境輸糧, 勢不得達矣. 大王患之, 咨嗟. <庾信>前對曰: "臣過 恩遇, 辱重寄. 國家之事, 雖死不避, 今日是老臣盡節之日也. 當向敵國, 以副<蘇>將軍之意." 大王前席執其手下淚曰: "得公賢弼, 可以無憂. 若今玆之役, 罔愆于素, 則公之功德, 曷日可忘." <庾信>旣受命, 至<懸鼓岑>之岫寺, 齊戒卽靈室, 閉戶獨坐, 焚香累日夜而後出. 私自喜曰: "吾今之行, 得不死矣." 將行, 王以手書告<庾信>: "出疆之後, 賞罰專之, 可也."
趙炳舜.
적이 큰 소리로 외쳤다. "비록 하찮은 작은 성이지만 병기와 식량이 충족하며, 병사들이 의롭고 용감하니 차라리 목숨을 걸고 싸울지언정 맹세코 살아서 항복하지는 않겠다." 유신이 웃으며 말했다. "궁지에 몰린 새나 곤경에 처한 짐승은 자신을 위하여 싸운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 그는 곧 깃발을 휘두르고 북을 울리며 공격하였다. 대왕이 높은 곳에 올라 전사들을 보며 눈물어린 말로 격려하니, 군사들이 모두 분격 돌진하여 창과 칼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9월 27일, 성이 함락되자 적장을 처형하고 백성들은 놓아 주었다. 공에 따라 장병들에게 상을 주었으며, 유 인원도 역시 차등을 두어 비단을 나누어 주었다. 이리하여 군사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말을 배불리 먹인 다음 당군과 합세하고자 하였다. 대왕은 이보다 앞서 태감 문천을 소장군에게 파견하여 편지를 보냈었다. 그 문천이 이 때 돌아와 복명하고 소정방의 말을 전했다. "내가 황제의 명을 받아 만리 밖에서 창해를 건너 적을 토벌하러 와서 해안에 배를 정박한 지 이미 한 달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대왕의 군사가 오지 않고 군량의 수송이 계속되지 않아 심히 위태로우니 왕께서는 대책을 세워주소서."
왕이 군신들에게 어찌하면 좋은가를 물었다. 그들은 모두 말했다. "적의 경내에 깊이 들어가 군량을 운반하는 것은 대세로 보아 불가능합니다." 대왕이 이를 걱정하며 한탄하자 유신이 앞으로 나아가 대답하였다. "제가 과분한 은총을 받아 외람스럽게 중책을 지니고 있으니, 나라의 일이라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사양할 수 없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늙은 몸이 충성을 다할 때이오니, 제가 적국으로 들어가 소장군의 뜻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왕은 자리를 앞으로 당겨 유신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공 같은 어진 신하를 얻었으니 걱정할 일이 없오. 만약 이번 일을 성공시킨다면 그대의 공덕을 잊을 날이 없을 것이오." 유신은 명령을 받은 후 현고잠의 수사에 갔다. 그는 목욕재계하고 영실로 들어가 문을 닫고 홀로 앉아 향을 피운 지 며칠이 지나서야 나왔다. 그는 혼자 기뻐하며 말했다. "이번 전투에서는 죽지 않는다." 그가 떠나려 할 때 왕이 직접 유신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써주었다. "국경을 나선 뒤에는 상벌권을 행사할 수 있다."
○十二月十日, 與副將軍<仁問>·<眞服>·<良圖>等九將軍, 率兵載糧, 入<高句麗>之界. 壬戌正月二十三日, 至<七重河>, 人皆恐懼, 不敢先登. <庾信>曰: "諸君若 死, 豈合來此." 遂先自上船而濟, 諸將卒, 相隨渡河. 入<高句麗>之境, 慮<麗>人要於大路, 遂自險隘以行, 至於< 壤>.
12월 10일, 부장군 인문, 진복, 양도 등 아홉 장군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양곡을 싣고 고구려 경계로 들어 갔다. 임술 정월 23일에 칠중하에 이르렀다. 군사들은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먼저 승선하려는 자가 없었다. 유신이 말했다. "그대들이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왜 여기에 왔는가?" 유신이 마침내 스스로 먼저 배를 타고 건너가니, 모든 장졸이 그 뒤를 따라 강을 건넜다. 고구려 경내에 들어가서는, 큰 길에서 고구려군에게 요격 당할 것을 염려한 나머지 험하고 좁은 길로 행군하여 산양에 도착하였다.
○<庾信>與諸將士曰: "<麗>·<濟>二國, 侵凌我疆 , 賊害我人民, 或虜丁壯, 以斬戮之, 或 幼少, 以奴使之者, 久矣, 其可不痛乎. 吾今所以不畏死赴難者, 欲藉大國之力, 滅二城, 以雪國讐. 誓心告天, 以期陰助, 而未知衆心如何, 故言及之. 若輕敵者, 必成功而歸, 若畏敵, 則豈免其禽獲乎. 宜同心協力, 無不以一當百, 是所望於諸公者也." 諸將卒皆曰: "願奉將軍之命, 不敢有偸生之心." 乃鼓行向<平壤>.
유신이 여러 장병들에게 말했다. "고구려, 백제 두 나라가 우리 강토를 침노하여 우리 백성을 해쳤도다. 더러는 장정들을 포로로 데려가 죽이기도 하였으며, 더러는 어린이들을 사로잡아 노비로 부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이 오래 계속되었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지금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어려운 일을 하려는 것은, 대국의 힘을 빌어 두 나라를 멸망시켜 나라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다. 마음에 맹세하고 하늘에 고하며 조국 영령의 가호를 기대하는데, 여러분의 심정이 어떠한가를 알 수 없기에 말하는 것이다. 만약 적을 가벼이 여긴다면 필히 공을 이루고 돌아 갈 수 있을 것이나, 적을 두려워하면 어찌 사로잡힘을 면할 수 있으랴? 마땅히 한 마음으로 협력하여 누구나 일당백의 용기를 갖기를 여러분에게 기대하는 바이다." 모든 장졸들이 말했다. "장군의 명령을 받들어 구차하게 살아갈 마음을 감히 갖지 않겠습니다." 그들은 곧 북을 치고 행진하여 평양으로 향했다.
○路逢賊兵, 逆擊克之, 所得甲兵, 甚多. 至<障塞>之險, 會天寒烈, 人馬疲憊, 往往 . <庾信>露肩執鞭, 策馬以前驅. 衆人見之, 努力奔走出汗, 不敢言寒. 遂過險, 距<平壤>不遠, <庾信>曰: "<唐>軍乏食窘迫, 宜先報之." 乃喚步騎監<裂起>曰: "吾少與爾遊, 知爾志節, 今欲致意於<蘇>將軍, 而難其人, 汝可行否." <裂起>曰: "吾雖不肖, 濫中軍職, 況辱將軍便{使} 令. 雖死之日, 猶生之年." 遂與壯士<仇近>等十五人, 詣<平壤>, 見<蘇>將軍曰: "<庾信>等領兵致資糧, 已達近境." <定方>喜以書謝之. <庾信>等行抵<楊 >, 見一老人, 問之, 具悉敵國消息, 賜之布帛, 辭不受而去. <庾信>營<楊 >, 遣解漢語者<仁問>·<良圖>及子<軍勝>等, 達<唐>營, 以王旨 軍糧. <定方>以食盡兵疲, 不能力戰, 及得糧, 便廻<唐>. <良圖>以兵八百人, 泛海還國. 時, <麗>人伏兵, 欲要擊我軍於歸路. <庾信>以鼓及 , 繫群牛腰尾, 使揮擊有聲, 又積柴草燃之, 使煙火不絶, 夜半, 潛行至< 河>, 急渡岸休兵. <麗>人知之來追, <庾信>使萬弩俱發. <麗>軍且退, 率勵諸幢將士分發, 拒擊敗之, 生禽將軍一人, 斬首一萬餘級. 王聞之, 遣使勞之. 及至, 賞賜封邑爵位有差.
趙炳舜. 『顯宗實錄字本』.
도중에 적병을 만나 역습하여 이기고, 많은 갑옷과 무기를 노획하였다. 험준한 장새에 이르자 때마침 날씨가 몹시 춥고 사람과 말이 지쳐서 더러는 쓰러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신은 어깨를 벗어 붙이고 말에 채찍을 가하여 앞으로 달려갔다. 여러 사람들이 이를 보고 힘껏 달리며 땀을 흘리면서 감히 춥다는 말을 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험한 곳을 지나 평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도착하였다. 유신이 말했다. "당군이 식량 부족으로 궁색하여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으니 먼저 소식을 알려야겠다." 그는 보기감 열기를 불러 말했다. "나는 젊어서부터 그대와 교유하여 그대의 지조와 절개를 알고 있다. 이제 소장군에게 우리의 뜻을 전달하려 하나 사람을 구하기 어렵다. 그대가 갈 수 있겠는가?" 열기가 말했다. "내가 비록 불초한데도 중군직에 있는 것이 외람된 일인데, 황차 장군의 명령을 욕되게 하겠습니까? 내가 죽는 날이 바로 새롭게 태어나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는 드디어 장사 구근 등 15명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소 장군을 만나 말했다. "유신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군량을 운반하여 이미 가까운 곳에 도달하였소." 소정방이 기뻐하여 편지를 주어 사례하였다. 유신 등이 양오에 이르렀을 때 한 노인을 만나 여러 가지 상황을 물었는데, 노인은 적국의 소식을 자세히 말해주었다. 유신은 노인에게 포백을 주었는데 사양하여 받지 않고 가버렸다. 유신이 양오에 진을 치고 중국어를 아는 인문, 양도와 아들 군승 등을 당영으로 파견하여 왕의 뜻으로 군량을 주게 하였다. 소정방은 식량이 떨어지고 군사들이 피곤하여 힘껏 싸우지 못하다가 식량을 얻게되자 곧 당으로 돌아갔다. 양도도 병력 8백 명을 거느리고 해로를 통하여 본국으로 돌아왔다. 이 때 고구려인들이 병사를 매복시켜 우리 군사를 귀로에서 요격하려 하였다. 유신은 북과 북채를 여러 마리의 소의 허리와 꼬리에 매달아서 후려치면 소리가 나게 하고, 또한 섶과 나무를 쌓아놓고 불을 질러서 연기와 불이 끊이지 않게 한 다음, 밤에 몰래 행군하여 포하에 이르자 급히 강을 건너 군사들에게 휴식을 취하도록 하였다. 고구려인들이 이것을 알고 추격하자 유신은 만노를 일시에 쏘도록 하였다. 고구려군이 퇴각하자 여러 당(幢)의 장병들을 지휘하여 여러 길로 출동하여 그들과 대항해 싸워 승리하고, 장군 한 명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위로하였다. 그들이 돌아오자 왕은 공로를 세운 정도에 따라 봉읍과 작위를 상으로 주었다.
○<龍朔>三年癸亥, <百濟>諸城, 潛圖興復, 其渠帥據<豆率城>, 乞師於<倭>爲援助. 大王親率<庾信>·<仁問>·<天存>·<竹旨>等將軍, 以七月十七日, 征討, 次<熊津州>, 與鎭守<劉仁願>合兵, 八月十三日, 至于<豆率城>. <百濟>人與<倭>人出陣, 我軍力戰大敗之, <百濟>與<倭>人皆降. 大王謂<倭>人曰: "惟我與爾國, 隔海分疆, 未嘗交構, 但結好講和, 聘問交通, 何故今日與<百濟>同惡, 以謀我國? 今爾軍卒在我掌握之中, 不忍殺之, 爾其歸告爾王." 任其所之. 分兵擊諸城降之, 唯<任存城>, 地險城固, 而又粮多, 是以攻之三旬, 不能下, 士卒疲困 {厭} 兵. 大王曰: "今雖一城未下, 而諸餘城保皆降, 不可謂無功." 乃振旅而還. 冬十一月二十日, 至京, 賜<庾信>田五百結, 其餘將卒賞賜有差.
三國史記卷第四十二.
『북한본』.
용삭 3년 계해에 백제의 여러 성에서 비밀리에 나라를 다시 세우고자 하였다. 그 두목은 두솔성에 웅거하면서 왜에게 병력의 원조를 요청하였다. 대왕이 직접 유신, 인문, 천존, 죽지 등 장군들을 거느리고 7월 17일에 토벌 길에 올랐다. 그들은 웅진주에 가서 진수관 유 인원의 군사와 합세하여 8월 13일 두솔성에 이르렀다. 백제인들은 왜인과 함께 진을 쳤는데 우리 군사들이 힘껏 싸워 대파시키니 그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대왕이 왜인들에게 말했다. "우리와 너희 나라가 바다를 경계로 하여 일찌기 싸운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우호 관계를 맺고 화친을 맺는 등 서로 예방하고 교유하여 왔는데, 무슨 이유로 오늘날 백제와 악행을 함께 하여 우리 나라를 치려 하는가? 이제 너희 군졸들의 생명이 나의 손 안에 있으나 차마 죽이지 않는 것이니, 너희들은 돌아가서 너의 국왕에게 이 말을 고하라!" 그리고 왕은 그들 마음대로 돌아가게 한 후, 군사를 나누어 여러 성을 공격하여 항복시켰다. 다만 임존성만은 지리가 험준하고 성이 견고하며 더우기 양식이 풍부했기 때문에 공격한 지 30일이 되어도 항복을 받지 못했다. 이리하여 군사들이 피로해지자 싸우고자 하지 않았다. 대왕은 "지금 성 하나가 함락되지 않았으나 다른 여러 성과 보루가 모두 항복하였으니 공이 없다고 할 수 없다"고 말하고 군사를 정비하여 돌아왔다. 겨울 11월 20일, 서울에 도착하여 유신에게 밭 5백 결을 하사하고 기타 장졸들에게는 공의 정도에 따라 상을 주었다.
삼국사기 권 42 끝
三國史記卷第四十三.
삼국사기 권 제 43
열전제 3 김유신(하)
○<麟德>元年□□□{甲子三} 月, <百濟>餘衆, 又聚<泗 城>反叛, <熊州>都督, 發所管兵士攻之, 累日霧塞, 不辨人物, 是故, 不能戰, 使<伯山>來告之, <庾信>授之陰謀, 以克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인덕 원년 갑자 3월, 백제의 잔적이 다시 사비성에 모여 반란을 일으켰다. 웅주 도독이 자기 소관의 병력으로 공격했으나, 여러 날 안개가 끼어서 사람과 물건을 분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싸움을 할 수 없었다. 백산으로 하여금 그 사정을 보고하게 하니 유신이 비밀 계책을 알려 주어 이들을 격파하게 하였다.
○<麟德>二年, <高宗>遣使<梁冬碧>·<任智高>等來聘. 兼冊<庾信>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 食邑二千戶.
인덕 2년, 당 나라 고종이 사신 양동벽과 임지고 등을 보내와 빙문하고, 동시에 유신을 봉상정경 평양군 개국공에 책봉하고 식읍 2천 호를 주었다.
○<乾封>元年, 皇帝 召<庾信>長子大阿 <三光>, 爲左武衛翊府中郞將, 仍令宿衛.
건봉 원년, 황제가 칙명으로 유신의 장자 대아찬 삼광을 불러 좌무위익부 중랑장으로 삼고 궁전에서 숙위하게 하였다.
○<摠章>元年戊辰, <唐><高宗>皇帝, 遣英國公<李勣>, 興師伐<高句麗>, 遂徵兵於我. <文武大王>, 欲出兵應之, 遂命<欽純>·<仁問>爲將軍. <欽純>告王曰: "若不與<庾信>同行, 恐有後悔."王曰: "公等三臣, 國之寶也. 若摠向敵場, 有不虞之事, 而不得歸, 則其如國何. 故欲留<庾信>守國, 則隱然若長城, 終無憂矣." <欽純>, <庾信>之弟, <仁問>, <庾信>之外甥, 故尊事之, 不敢抗. 至是, 告<庾信>曰: "吾等不材, 今從大王, 就不測之地, 爲之奈何, 願有所指誨." 答曰: "夫爲將者, 作國之干城, 君之爪牙. 決勝否於矢石之間, 必上得天道, 下得地理, 中得人心, 然後可得成功. 今我國以忠信而存, <百濟>以 慢而亡, <高句麗>以驕滿而殆, 今若以我之直, 擊彼之曲, 可以得志. 況憑大國, 明天子之威稜哉. 往矣勉焉, 無墮乃事!" 二公拜曰: "奉以周旋, 不敢失墮." <文武大王>旣與英公, 破<平壤>, 還到<南漢州>, 謂群臣曰: "昔者, <百濟><明 王>在<古利山>, 謀侵我國, <庾信>之祖<武力>角干, 爲將逆擊之, 乘勝 其王及宰相四人與士卒, 以折其衝. 又其父<舒玄>, 爲<良州>摠管, 屢與<百濟>戰, 挫其銳, 使不得犯境. 故邊民安農桑之業, 君臣無宵 之憂. 今, <庾信>承祖考之業, 爲社稷之臣, 出將入相, 功績茂焉. 若不倚賴公之一門, 國之興亡, 未可知也, 其於職賞, 宜如何也." 群臣曰: "誠如王旨." 於是, 授太大舒發翰之職, 食邑五百戶. 仍賜輿杖, 上殿不趨, 其諸察{寮} 佐, 各賜位一級.
今西龍.
총장 원년 무진에 당 나라 고종 황제가 영국공 이 적에게 군사를 주어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고 마침내 우리에게도 군사를 징발케 하였다. 문무대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이에 호응하고자 흠순과 인문을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흠순이 왕에게 말했다. "만일 유신과 함께 가지 않는다면 아마도 후회할 일이 생길 것입니다." 왕이 말했다. "공들 세 신하는 국가의 보배이니, 만약 한꺼번에 적지로 갔다가 불의의 일이 있어 돌아오지 못한다면 나라 일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하니 유신을 이곳에 남아있게 하면 은연중 나라의 장성과 같아 종내 근심이 없으리라." 흠순은 유신의 동생이었으며, 인문은 유신의 생질이었다. 그들은 유신을 높이 섬기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감히 왕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고 유신에게 말했다. "자질이 부족한 우리가 지금 대왕의 뜻에 따라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땅으로 갑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가르쳐 주기 바랍니다." 유신이 대답했다. "무릇 장수란 나라의 간성과 임금의 손발이 되어 전쟁터에서 승부를 결정내는 것이다. 반드시 위로는 천도를 얻고 아래로는 지리를 얻으며 중간으로는 민심을 얻은 뒤에야 성공할 수 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충신으로 인하여 존재하게 되었고, 백제는 오만으로 인하여 멸망했으며, 고구려는 교만으로 인하여 위태롭게 되었다. 이제 우리의 올바름으로 저 편의 그릇됨을 친다면 뜻대로 될 것이다. 하물며 큰 나라의 현명하신 천자의 위엄에 힘입고 있으니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가서 노력하여 너희들의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하라!" 이에 두 사람이 절을 하면서 말했다. "공의 뜻을 두루 받들어 감히 실패가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문무대왕이 영공과 함께 평양을 격파하고 남한주에 돌아와서 여러 신하들에게 말했다. "옛날 백제의 명농왕이 고리산에서 우리 나라를 침략하려 했을 때, 유신의 조부 무력 각간이 장수가 되어 그들을 맞아 싸워 이겼으며, 승세를 타고 그 왕과 재상 네 명과 사졸들을 사로잡아 그들의 세력을 꺾었다. 또한 유신의 부친 서현은 양주 총관이 되어 여러 차례 백제와 싸워서 예봉을 꺾음으로써 그들이 우리 변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써 변경의 백성들은 편안히 농상에 종사하였고, 임금과 신하는 나라에 대한 근심이 없게 되었다. 지금은 유신이 조부와 부친의 유업을 계승하여 사직을 맡는 신하가 되었다. 그는 나가면 장수의 일을 하였고, 들어오면 정승의 일을 하였으니 그 공적이 매우 크다. 만일 공의 한 가문에 의지하지 않았더라면 나라의 흥망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직위와 상을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여러 신하들이 말했다. "저희들의 생각이 실로 대왕의 뜻과 같습니다." 이에 유신에게 태대 서발한의 직위를 제수하고, 식읍을 5백 호로 하였다. 또한 수레와 지팡이를 하사하고, 전상에 오를 때도 빨리 오르지 않게 하였으며, 그의 속관들에게도 각각 위계를 한 급씩 올려 주었다.
○<摠章>元年, <唐>皇帝, 旣策英公之功, 遂遣使宣慰, 濟師助戰, 兼賜金帛. 亦授詔書於<庾信>, 以褒奬之, 且諭入朝, 而不果行. 其詔書傳於家, 至五世孫失焉.
총장 원년에 당 나라 황제가 영공의 전공을 책명하고 바로 사자를 보내 그를 위로하는 동시에 군사를 보내 싸움을 돕게 하였다. 그리고 황금과 비단을 상으로 주었다. 황제는 유신에게도 조서를 내려 그의 전공을 표창하고 또한 입조를 하라고 유시하였다. 그러나 이를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이 조서는 그의 집안에 전하여 오다가 5세 손 때 잃어버렸다.
○<咸寧{咸亨}> 四年癸酉, 是<文武大王>十三年. 春, 妖星見地震, 大王憂之. <庾信>進曰: "今之變異, 厄在老臣, 非國家之災也, 王請勿憂." 大王曰: "若此則寡人所深憂也." 命有司祈禳之. 夏六月, 人或見戎服持兵器數十人, 自<庾信>宅泣而去, 俄而不見. <庾信>聞之曰: "此必陰兵護我者, 見我福盡, 是以去, 吾其死矣." 後, 旬有餘日, 寢疾, 大王親臨慰問, <庾信>曰: "臣願竭股肱之力, 以奉元首, 而犬馬之疾至此, 今日之後, 不復再見龍顔矣." 大王泣曰: "寡人之有卿, 如魚有水, 若有不可諱, 其如人民何, 其如社稷何." <庾信>對曰: "臣愚不肖, 豈能有益於國家, 所幸者, 明上, 用之不疑, 任之勿貳, 故得攀附王明, 成尺寸功, 三韓爲一家, 百姓無二心, 雖未至太平, 亦可謂小康. 臣觀自古繼體之君, 靡不有初, 鮮克有終, 累世功績, 一朝 廢, 甚可痛也. 伏願: 殿下, 知成功之不易, 念守成之亦難, 疏遠小人, 親近君子, 使朝廷和於上, 民物安於下, 禍亂不作, 基業無窮, 則臣死且無憾." 王泣而受之. 至秋七月一日, 薨于私第之正寢, 享年七十有九. 大王聞訃震慟, 贈賻彩帛一千匹·租二千石, 以供喪事, 給軍樂鼓吹一百人, 出葬于<金山>原, 命有司立碑, 以紀功名, 又定入民戶, 以守墓焉.
李丙燾.
함녕 4년 계유는 곧 문무대왕 13년이다. 그 해 봄에 요성이 나타나고 지진이 발생하자 대왕이 이를 걱정하였다. 유신이 나아가 말했다. "오늘의 변괴는 그 죄가 노신에게 있는 것이지 국가의 재앙이 아닙니다. 왕께서는 걱정 마시기 바랍니다." 대왕이 말했다. "그렇다면 이는 과인에게 큰 걱정거리요." 왕은 기도를 하여 재액을 물리치도록 유사에게 명령하였다. 여름 6월에 난데없이 융복을 입고 병기를 든 수십 명이 유신의 집으로부터 나와 울며 가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본 사람이 간혹 있었다. 유신은 이 말을 듣고 말했다. "이는 필시 나를 보호하던 음병이 나의 복이 다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가는 것이니, 나는 곧 죽을 것이다." 그 후 십여 일 지나서 유신이 병들어 눕게되자 왕이 직접 행차하여 그를 위문하였다. 유신이 말했다. "신이 모든 힘을 다하여 원수를 모시려 하였으나 소신의 몸에 병이 들어 이렇게 되었으니 오늘 이후로 다시는 용안을 뵈옵지 못하겠습니다." 대왕은 울면서 말했다. "과인에게 경이 있음은 마치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았오. 만일 피치 못할 일이 생긴다면 백성들을 어떻게 하며 사직을 어떻게 하리오?" 유신이 대답하였다. "신은 우둔하고 못났으니 어찌 국가에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오직 다행스럽게도 현명하신 임금께서 의심없이 등용하였고, 의심없이 임무를 맡겼기에, 대왕의 밝은 덕에 힘입어 약간의 공로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지금 삼한이 한 집안이 되고 백성들이 두 마음을 가지지 아니하니 비록 태평무사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저 편안하게 되었다고는 할 수 있습니다. 신이 보건대 예로부터 대통을 잇는 임금들이 처음에는 잘못하는 일이 없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대의 공적이 하루 아침에 무너져 없어지니 심히 통탄할 일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공을 이루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아시며, 수성하는 것 또한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소인배를 멀리하며 군자를 가까이 하시어, 위로는 조정이 화목하고 아래로는 백성과 만물이 편안하여 화란이 일어나지 않고 나라의 기틀이 무궁하게 된다면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왕이 울면서 그 말을 받아 들였다.
가을 7월 1일, 유신이 자기 집의 침실에서 죽으니 향년 79세였다. 대왕이 부음을 듣고 매우 애통하게 생각하여 채색 비단 1천 필과 벼 2천 석을 부의로 보내 상사에 쓰게 하고 군악의 고취수 1백 명을 보내 주었다. 금산원에 장사하고 유사에게 명하여 비를 세워서 그의 공명을 기록하게 하였으며 또한 민호를 지정하여 무덤을 지키게 하였다.
○妻<智炤>夫人, <太宗大王>第三女也. 生子五人, 長曰<三光>伊 , 次<元述>蘇判, 次<元貞>海干, 次<長耳>大阿 , 次<元望>大阿 . 女子四人, 又庶子<軍勝>阿 , 失其母姓氏. 後, <智炤>夫人, 落髮衣褐, 爲比丘尼, 時, 大王謂夫人曰: "今, 中外平安, 君臣高枕而無憂者, 是太大角干之賜也, 惟夫人宜其室家, 儆誡相成, 陰功茂焉, 寡人欲報之德, 未嘗一日忘于心. 其 <南城>租每年一千石." 後, <興德大王>封公爲<興武大王>.
아내 지소부인은 태종대왕의 셋째 딸이다. 아들 다섯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삼광 이찬이요, 다음은 원술 소판이요, 다음은 원정 해간이요, 다음은 장이 대아찬이요, 다음은 원망 대아찬이다. 딸이 넷이었으며 또한 서자로서 아찬 군승이 있는데 그 어머니의 성씨는 전해지지 않는다. 후일, 소지부인은 머리를 깎고 베옷을 입고 비구니가 되었다. 이 때 대왕이 부인에게 이르기를 "지금 나라 안팎이 편안하고 임금과 신하가 베개를 높이 베고 근심이 없는 것은 바로 태대 각간이 우리에게 내려준 것이오. 이는 부인이 집안을 잘 다스려 태대 각간을 성심으로 도와 준 숨은 공로가 컸던 결과였소. 과인은 이러한 덕에 보답하려는 생각을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다오. 그런즉 남성에서 받는 조를 매년 1천 석씩을 줄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 뒤에 흥덕대왕이 공을 흥무대왕에 봉했다.
○初, <法敏王>, 納<高句麗>叛衆, 又據<百濟>故地有之. <唐><高宗>大怒, 遣師來討, <唐>軍與<靺鞨>, 營於<石門>之野. 王遣將軍<義福>·<春長>等禦之, 營於<帶方>之野. 時, 長槍幢獨別營, 遇<唐>兵三千餘人, 捉送大將軍之營. 於是, 諸幢共言: "長槍營獨處成功, 必得厚賞, 吾等不宜屯聚, 徒自勞耳." 遂各別兵分散. <唐>兵與<靺鞨>, 乘其未陣擊之, 吾人大敗, 將軍<曉川>·<義文>等死之. <庾信>子<元述>, 爲裨將, 亦欲戰死, 其佐<淡凌>, 止之曰: "大丈夫, 非死之難, 處死之爲難也. 若死而無成, 不若生而圖後效." 答田{曰} : "男兒不苟生, 將何面目以見吾父乎." 便欲策馬而走, <淡凌>攬 不放, 遂不能死, 隨上將軍出<蕪荑嶺>, <唐>兵追及之. <居烈州>大監<阿珍含>一吉干, 謂上將軍曰: "公等努力速去. 吾年已七十, 能得幾時活也! 此時是吾死日也." 便橫戟突陣而死, 其子亦隨而死. 大將軍等, 微行入京. 大王聞之, 問<庾信>曰: "軍敗如此, 奈何." 對曰: "唐人之謀, 不可測也. 宜使將卒各守要害. 但<元述>不惟辱王命, 而亦負家訓, 可斬也." 大王曰: "<元述>裨將, 不可獨施重刑." 乃赦之. <元述>慙懼, 不敢見父, 隱遁於田園, 至父薨後, 求見母氏. 母氏曰: "婦人有三從之義, 今旣寡矣, 宜從於子. 若<元述>者, 旣不得爲子於先君, 吾焉得爲其母乎." 遂不見之. <元述>慟哭 而不能去, 夫人終不見焉. <元述>嘆曰: "爲<淡凌>所誤, 至於此極." 乃入<大伯山{太伯山}> . 至乙亥年, <唐>兵來, 攻<買蘇川城>, <元述>聞之, 欲死之, 以雪前恥, 遂力戰有功賞, 以不容於父母, 憤恨不仕, 以終其身.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처음에 법민왕이 고구려 반군의 무리를 받아 들이고 또한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여 소유하였다. 당 고종은 크게 노하여 군사를 파견하여 그들을 치게 하였다. 당군이 말갈과 함께 석문 들판에 진을 치자 왕은 장군 의복, 장춘 등을 보내 이를 방어하게 하여 대방 들판에 진을 쳤다. 이 때 장창당만은 별도로 진을 치고 있다가 당병 3천여 명과 싸워 그들을 잡아서 대장군의 진영으로 보냈다. 이에 여러 당들이 함께 말하기를 "장창영은 홀로 있다가 공을 세웠으니 반드시 큰 상을 받을 것이다. 우리도 한데 모여서 헛되이 수고만 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면서 마침내 각자 군대를 나누어 분산하였다. 당병이 말갈과 함께 우리 군사가 아직 진을 치지 못한 틈을 타서 공격해오자 우리 군사가 대패하여 장군 효천, 의문 등이 여기서 죽었다.
유신의 아들 원술이 비장으로서 역시 나아가 전사하려고 하니, 그의 보좌관 담릉이 만류하여 말하기를 "대장부는 죽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을 경우를 택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죽어서 성과를 얻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살아서 뒷날의 공적을 도모하느니 만 못하다" 하니 원술이 대답하였다. "남아는 구차하게 살지 않는 법이거늘 장차 무슨 면목으로 우리 아버지를 뵙겠는가?" 그는 곧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가려 하였으나, 담릉이 말고삐를 붙잡고 놓지 않는 바람에 마침내 죽지 못하고 상장군을 따라 무이령으로 나왔다. 그러자 당병이 뒤를 추격하여 왔다. 거열주 대감 아진함 일길간이 상장군에게 말했다. "공들은 힘을 다하여 빨리 가라! 내 나이 벌써 70이니 앞으로 얼마나 더 살겠는가? 오늘이 내가 죽을 날이다." 그가 창을 비껴들고 진중으로 달려들어 전사하자 그의 아들도 따라서 죽었다. 대장군 등이 다른 사람들 모르게 서울로 들어 왔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유신에게 물었다. "군사가 이렇게 패하였으니 어찌하랴?" 유신이 대답하였다. "당인들의 모략을 예측할 수 없사오니 장졸들로 하여금 제각기 요충지대를 지키게 해야합니다. 다만 원술은 왕명을 욕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훈까지도 저버렸으니 목을 베어야 합니다." 대왕이 말했다. "원술 비장에게만 유독 중형을 줄 수 없다." 그리고 원술의 죄를 용서하였다. 원술이 부끄럽고 두려워서 감히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고 전원에 은둔하다가 아버지가 죽은 뒤에야 어머니를 만나려 하였다. 어머니는 "부인에게는 삼종의 의리가 있다. 이제 내가 과부가 되었으니 응당 아들을 좇아야 하겠으나 원술과 같은 자는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아들 노릇을 못하였으니 내가 어찌 그의 어미가 될 수 있겠느냐?"라 말하고 만나보지 않았다. 원술이 통곡하며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떠나지 못하였으나 부인은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원술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담릉 때문에 그르친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하고 곧 태백산으로 들어갔다. 을해년에 당병이 와서 매소천성을 치니 원술이 이 소문을 듣고 이 기회에 죽음으로써 전일의 치욕을 씻고자 드디어 힘껏 싸워서 공을 세우고 상을 받았으나, 부모에게 용납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벼슬을 하지 않고 일생을 마쳤다.
○嫡孫<允中>, 仕<聖德大王>, 爲大阿 , 屢承恩顧, 王之親屬, 頗嫉妬之. 時, 屬仲秋之望, 王登<月城>岑頭眺望, 乃與侍從官, 置酒以娛, 命喚<允中>, 有諫者曰: "今, 宗室戚里, 豈無好人, 而獨召疎遠之臣, 豈所謂親親者乎." 王曰: "今, 寡人與卿等, 安平無事者, <允中>祖之德也, 若如公言, 忘棄之, 則非善善及子孫之義也." 遂賜<允中>密坐, 言及其祖平生, 日晩告退, 賜<絶影山>馬一匹, 群臣 望而已.
유신의 적손 윤중은 성덕대왕 때 벼슬이 대아찬에 이르고, 여러 차례 왕의 은총을 입게되자 왕의 친족들이 그를 몹시 시기하였다. 때는 8월 보름날이었는데 왕이 월성 꼭대기에 올라 경치를 바라보며 시종관들과 함께 주연을 베풀고 즐기면서 윤중을 불러오라 하니 어떤 자가 간언하였다. "지금 종실과 척리들 중에 좋은 사람이 없지 않은데 어찌하여 유독 먼 신하를 부르십니까. 이것이 어찌 소위 가까운 사람을 친하게 여겨야 한다는 도리에 맞는 것이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지금 과인이 경들과 함께 평안무사하게 지내는 것은 윤중의 조부의 덕이다. 만일 공의 말대로 그를 잊어 버린다면 선한 이를 선하게 대우하여 그의 자손에게도 덕이 미쳐야 한다는 도리에 어긋난다." 왕은 마침내 윤중에게 가까운 자리를 주어 앉게 하고 그 조부의 평생에 대하여 담론하였다. 날이 저물어 윤중이 물러가기를 고하니 절영산마 한 필을 하사하였다. 이 때 여러 신하들은 서운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開元>二十一年, 大<唐>遣使敎翰{諭} 曰: "<靺鞨>·<渤海>, 外稱蕃翰, 內懷狡猾, 今欲出兵問罪, 卿亦發兵, 相爲 角, 聞有舊將<金庾信>孫<允中>在, 須差此人爲將." 仍賜<允中>金帛若干. 於是, 大王命<允中>·弟<允文>等四將軍, 率兵會<唐>兵, 伐<渤海>. <允中>庶孫<巖>, 性聰敏, 好習方術, 少壯爲伊 , 入<唐>宿衛, 間就師, 學陰陽家法, 聞一隅, 則反之以三隅, 自述遁甲立成之法, 呈於其師, 師撫{憮} 然曰: "不圖吾子之明達, 至於此也." 從是而後, 不敢以弟子待之. <大曆>中還國, 爲司天大博士, 歷<良>·<康>·<漢>三州大守{太守} , 復爲執事侍郞·<浿江鎭>頭上. 所至盡心撫字, 三務之餘, 敎之以六陣兵法, 人皆便之. 嘗有蝗蟲, 自西入<浿江>之界, 蠢然蔽野, 百姓憂懼. <巖>登山頂, 焚香析{祈} 天, 忽風雨大作, 蝗蟲盡死. <大曆>十四年己未, 受命聘<日本國>. 其國王, 知其賢, 欲勒留之. 會, 大<唐>使臣<高鶴林>來, 相見甚 . <倭>人認<巖>爲大國所知, 故不敢留乃還. 夏四月, 旋風 起, 自<庾信>墓, 至始祖大王之陵, 塵霧暗冥, 不辨人物, 守陵人聞其中若有哭泣悲嘆之聲. <惠恭大王>, 聞之恐懼, 遣大臣(+<金敬信>) , 致祭謝過, 仍於<鷲仙寺>, 納田三十結, 以資冥福. 是寺, <庾信>平<麗>·<濟>二國, 所營立也.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日本書陵部本』.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개원 21년에 대당에서 사신을 보내 권유하기를 "말갈과 발해가 겉으로는 번신이라 일컬으면서도 속으로는 교활한 음모를 품고 있으므로, 이제 군사를 출동시켜 문죄하려 하니 경도 군사를 출동시켜 앞뒤에서 서로 견제하도록 하라! 듣건대 옛 장수 김 유신의 손자 윤중이 있다고 하니 반드시 이 사람을 차출하여 장수로 삼으라!"하고, 동시에 윤중에게 약간의 황금과 비단을 주었다. 이에 대왕이 윤중과 그의 아우 윤문 등 네 장군에게 군사를 주어 당병과 합세하여 발해를 공격하게 하였다.
윤중의 서손인 암은 천성이 총민하고 방술 익히기를 좋아하였다. 젊었을 때 이찬이 되어 당에 들어가 숙위하면서 이따금 스승을 찾아 가서 음양가의 술법을 배웠는데, 한 가지를 배우면 세 가지를 이해하였다. 스스로 둔갑입성법을 지어 스승에게 바치니 스승이 깜짝 놀라서 말하기를 "그대의 명석하고 통달함이 여기에까지 이른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이로부터는 감히 제자로 대하지 못하였다. 대력 연간에 본국으로 돌아와 사천대박사가 되었고, 양주, 강주, 한주 세 주의 태수를 역임하고 다시 집사 시랑, 패강진 두상이 되었다. 그는 이르는 곳마다 진심으로 백성을 사랑하고 돌봐주며, 봄, 여름, 가을 세 계절의 농사 때는 여가를 이용하여 육진병법을 가르치니 사람마다 이를 편하게 배웠다. 일찌기 메뚜기 떼가 발생하여 서쪽으로부터 패강 지역으로 만연되어 모든 평야를 뒤덮자 백성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이 때, 암이 산정에 올라가 향을 피우고 하늘에 기도하니 갑자기 풍우가 크게 일어 메뚜기 떼가 모두 죽었다. 대력 14년 기미에 그는 왕명을 받고 일본국에 사신으로 갔는데 그 국왕이 그의 현명함을 알고 억류하려 하였다. 그 때 마침 대당 사신 고 학림이 와서 서로 만나 매우 기뻐하니 왜인들이 이를 보고 암이 대국에까지 알려진 인물임을 알았다. 그리고는 감히 억류하지 못하고 돌려 보냈다.
여름 4월에 회오리바람이 뭉쳐 일어나 유신의 무덤에서 시조 대왕의 능에 이르렀는데, 먼지와 안개가 자욱하여 사람과 물건을 분간할 수 없었다. 능지기가 들으니 그 속에서 울면서 슬피 탄식하는 소리가 나는 듯하였다. 혜공대왕이 이 말을 듣고 두려워서 대신을 보내 제사를 드려 사과하고, 이어서 추선사에 밭 30결을 주어 명복을 비는 자산으로 삼게 하였다. 추선사는 유신이 고구려, 백제 두 나라를 평정한 뒤에 세운 절이다.
○<庾信>玄孫<新羅>執事郞<長淸>, 作行錄十卷, 行於世. 頗多釀辭, 故刪落之, 取其可書者, 爲之傳.
유신의 현손으로서 신라의 집사랑인 장청이 행록 10권을 지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는 날조해 넣은 말이 아주 많기 때문에 이를 간추려 쓸 만한 것만을 취하여 전으로 삼는다.
○論曰: <唐><李絳>對<憲宗>曰: "遠邪 , 進忠直, 與大臣言, 敬而信, 無使小人參焉, 與賢者遊, 親而禮, 無使不肖預焉." 誠哉, 斯言也, 實爲君之要道也. 故『書』曰: "任賢勿貳, 去邪勿疑." 觀夫<新羅>之待<庾信>也, 親近而無間, 委任而不貳, 謀行言聽, 不使怨乎不以, 可謂得六五童蒙之吉. 故<庾信>得以行其志, 與上國協謀, 合三土爲一家, 能以功名終焉. 雖有<乙支文德>之智略·<張保 >之義勇, 微<中國>之書, 則泯滅而無聞, 若<庾信>, 則鄕人稱頌之, 至今不亡. 士大夫知之, 可也, 至於 童牧竪, 亦能知之, 則其爲人也, 必有以異於人矣.
三國史記卷第四十三.
저자의 견해 : 당의 이 강이 헌종에게 말했다.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를 멀리하고, 충성스럽고 정직한 자를 등용하며, 대신과 대화할 때는 공경스럽고 믿음직하게 하여 소인이 끼어들지 못하게 하며, 어진 사람과 어울리는 경우에는 친하게 지내되 예절을 갖추어 불초한 자가 끼어들지 못하게 하소서." 성실하도다, 이 말이여! 이는 실로 임금이 갖추어야 할 요긴한 도리이다. 그러므로 [상서]에서 말했다. "어진 이에게 일을 맡길 때는 의심하지 말며, 간사한 자를 버릴 때도 의심하지 말라."
신라가 유신을 대우한 것을 보면 친근히 하여 간격을 두지 않았고, 임무를 맡길 때도 의심하지 않았으니, 그의 계책은 실행되고 그의 말은 채용되어, 그로 하여금 자신의 계책이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원망을 품지 않게 하였다. 그러므로 가히 육오동몽의 길함[六五童蒙之吉]을 얻었다고 할 만하다. 그러므로 유신은 자신의 뜻한 바를 행할 수 있어 중국과 협력하여 삼국을 합쳐서 한 나라로 만들었고, 능히 공명으로써 일생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 보고의 의용이 있었어도 중국의 서적이 없었다면 그들에 대한 사적이 없어져서 후세에 알려지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유신 같은 사람은 온 나라 사람들의 칭송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사대부가 그를 아는 것은 그럴 수 있는 일이거니와 꼴 베는 아이나 소 먹이는 아이에 이르기까지도 능히 그를 알고 있으니, 그 위인이 틀림없이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있었을 것이다.
삼국사기 권 제 43 끝
三國史記卷第四十四.
삼국사기 권 제 44
列傳第四.
<乙支文德>·<居柒夫>·<居道>·<異斯夫>·<金仁問>·<金陽>
<黑齒常之>·<張保皐>·(+<鄭年>) ·<斯多含>.
趙炳舜.
열전 제 4
을지문덕. 거칠부. 거도. 이사부. 김 인문. 김 양.
흑치상지. 장 보고. 사다함.
<乙支文德 을지문덕>
未詳其世系. 資沈 有智數, 兼解屬文. <隋><開皇{大業} >中, <煬帝>下詔征<高句麗>. 於是, 左翊衛大將軍<宇文述>, 出<扶餘>道, 右翊衛大將軍<于仲文>, 出<樂浪>道, 與九軍至<鴨 水>. <文德>受王命, 詣其營詐降, 實欲觀其虛實. <述>與<仲文>, 先奉密旨, 若遇王及<文德>來, 則執之, <仲文>等, 將留之, 尙書右丞<劉士龍>, 爲慰撫使, 固止之, 遂聽<文德>歸, 深悔之, 遣人 <文德>曰: "更欲有議{言} , 可復來." <文德>不顧, 遂濟<鴨 >而歸. <述>與<仲文>, 旣失<文德>, 內自不安. <述>以粮盡欲還, <仲文>謂{議} 以精銳追<文德>, 可以有功, <述>止之. <仲文>怒曰: "將軍仗十萬兵, 不能破小賊, 何顔以見帝." <述>等不得已而從之, 度<鴨 水>追之. <文德>見<隋>軍士有饑色, 欲疲之, 每戰輒北{走} , <述>等一日之中, 七戰皆捷. 旣恃驟勝, 又逼群議, 遂進東, 濟<薩水>, 去<平壤城>三十里, 因山爲營.
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 『三國史記』 高句麗本紀.趙炳舜. 『三國史節要』. 『三國史記』 高句麗本紀.趙炳舜. 『三國史節要』. 『三國史記』 高句麗本紀.
을지문덕은 가문의 내력이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자질이 침착하고 용맹스러우며 지모가 있었고 동시에 글도 지을 줄 알았다.
수 나라 개황 연간에 양제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공격하자, 좌익위 대장군 우문술은 부여도로 나오고 우익위 대장군 우 중문은 낙랑도로 나와서 9군과 함께 압록강에 이르렀다. 문덕이 왕의 명을 받들고 적진으로 가서 항복하는 체하였으나, 이는 사실 그들의 허실을 보려는 것이었다. 술과 중문은 이 보다 앞서 황제의 비밀 교지를 받았었다. 이에는 고구려의 왕이나 문덕을 만나거든 체포하라고 쓰여 있었다. 이에 따라 중문 등은 문덕을 억류하려 하였는데, 위무사로 있던 상서 우승 유 사룡이 굳이 말리는 바람에 결국 문덕이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 뒤에 이를 깊이 후회하여 사람을 보내 문덕을 속여서 말하기를 "재차 의논할 일이 있으니 다시 오라"고 하였으나, 문덕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압록강을 건너왔다. 술과 중문은 문덕을 놓친 뒤에 마음 속으로 불안하게 생각하였다. 술은 군량이 떨어졌다 하여 돌아가려 하는데, 중문은 정예부대로 문덕을 추격하면 공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술이 이를 말렸다. 중문이 화를 내어 말했다. "장군이 10만의 병력을 가지고 와서 조그마한 적을 격파하지 못하고 무슨 낯으로 황제를 뵈옵겠는가?" 술 등은 마지못하여 그 말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서 문덕을 추격하였다. 문덕은 수군에게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 보고, 그들을 피로하게 하기 위하여 싸울 때마다 매번 패배한 척하며 도주하였다. 이렇게 하여 술은 하룻 동안에 일곱 번을 싸워 모두 승리하였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승리에 뱃심이 생기기도 하고, 또한 중의에 몰리기도 하여, 마침내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를 건너 평양성 30리 밖에서 산을 등지고 진을 쳤다.
○<文德>遺<仲文>詩曰: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仲文>答書諭之. <文德>又遣使詐降, 請於<述>曰: "若旋師者, 當奉王朝行在所." <述>見士卒疲弊, 不可復戰, 又<平壤城>險固, 難以猝拔, 遂因其詐而還, 爲方陣而行. <文德>出軍, 四面 擊之, <述>等且戰且行, (+秋七月) 至<薩水>, 軍半濟, <文德>進軍, 擊其後軍, 殺右屯衛將軍<辛世雄>. 於是, 諸君俱潰, 不可禁止, 九軍將士奔還, 一日一夜, 至<鴨 水>, 行四百五十里. 初, 度<遼>, 九{凡} 軍三十萬五千人, 及還至<遼東城>, 唯二千七百人.
趙炳舜. 『三國史節要』. 『三國史記』 高句麗本紀.趙炳舜. 『三國史節要』.
문덕이 중문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보냈다.
"신기한 계책은 천문에 통달했고,
묘한 계략은 땅의 이치를 알았도다.
전투마다 이겨 공이 이미 높았으니,
만족한 줄 알았으면 돌아가는 것이 어떠하리."
중문이 답서를 보내 효유하였다. 문덕이 또한 사자를 보내 항복을 가장하고 술에게 요청하였다. "만일 군사를 철수한다면 틀림없이 왕을 모시고 행재소로 가서 조견하겠다." 술은 군사들이 피곤하고 기운이 쇠진하여 더 이상 싸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평양성은 험하고 견고하여 갑자기 함락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하여, 거짓 항복이라도 받은 상태에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방어진을 만들며 행군하였다. 문덕이 군사를 출동시켜 사면으로 공격하니 술 등이 한편으로 싸우며 한편으로는 쫓겨 갔다. 그들이 살수에 이르러 군사가 절반쯤 강을 건너 갔을 때, 문덕이 군사를 몰아 그들의 후군을 맹공하여 우둔위장군 신 세웅을 죽였다. 이렇게 되자 모든 적군이 한꺼번에 허물어져 걷잡을 수가 없었다. 9군 장졸이 달려서 패주하였는데, 하루낮 하루밤 사이에 압록강에 이르니 그들은 4백 50리를 간 셈이다. 처음 요수를 건너 올 때 그들은 9군 30만 5천 명이었는데, 요동성에 돌아갔을 때는 다만 2천7백 명뿐이었다.
○論曰: <煬帝><遼東>之役, 出師之盛, 前古未之有也, <高句麗>一偏方小國, 而能拒之, 不唯自保而已, 滅其軍幾盡者, <文德>一人之力也. 『傳』曰: "不有君子, 其能國乎." 信哉.
저자의 견해 : 양제의 요동 전역은, 출동 병력이 전례가 없을 만큼 거대하였다. 고구려가 한 모퉁이에 있는 조그마한 나라로서 능히 이를 방어하고 스스로를 보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군사를 거의 섬멸해버릴 수 있었던 것은 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 전에 이르기를 "군자가 없으면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리오?"[[춘추좌전]]라고 하였는데 참으로 옳은 말이다.
[或云<荒宗>.]姓金氏, <奈勿王>五世孫, 祖<仍宿>角干, 父<勿力>伊 , <居柒夫>少 弛有遠志. 祝髮爲僧, 遊觀四方, 便欲 <高句麗>, 入其境, 聞法師<惠亮>開堂說經, 遂詣聽講經. 一日, <惠亮>問曰: "沙{汝} 彌從何來?" 對曰: "某<新羅>人也." 其夕, 法師招來相見, 握手密言曰: "吾閱人多矣, 見汝容貌, 定非常流, 其殆有異心乎?" 答曰: "某生於偏方, 未聞道理, 聞師之德譽, 來伏{趨} 下風, 願師不拒, 以卒發蒙." 師曰: "老僧不敏, 亦能識子, 此國雖小, 不可謂無知人者, 恐子見執, 故密告之, 宜疾其歸." <居柒夫>欲還, 師又語曰: "相汝 鷹視, 將來必爲將師{將帥} . 若以兵行, 無貽我害." <居柒夫>曰: "若如師言, 所不與師同{相} 好者, 有如 日." 遂還國返本從仕, 職至大阿 .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
거칠부[혹은 황종이라고도 한다.]의 성은 김씨이고, 나물왕의 5세손이며, 조부는 잉숙 각간이요, 아버지는 물력 이찬이었다. 거칠부는 젊었을 때 사소한 일에 마음을 쓰지 않고 원대한 뜻을 품었다. 그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사방을 유람하였는데, 문득 고구려를 정탐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그 나라 경내로 들어 갔다가 법사 혜량이 강당을 열고 불경을 강설한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그곳으로 가서 불경 강의를 들었다.
하루는 혜량이 물었다. "사미는 어디서 왔는가?" 거칠부가 대답하였다. "저는 신라인입니다." 그 날 밤에 법사가 그를 불러 놓고 손을 잡으며 은밀히 말했다. "내가 사람을 많이 보았는데 너의 용모를 보니 분명 보통 사람이 아니다. 아마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을테지?" 거칠부가 대답하였다. "제가 외딴 지방에서 성장하여 참된 도리를 듣지 못하였는데, 스님의 높으신 덕망과 명성을 듣고 와서 말석에 참여하였습니다. 스님께서는 거절하지 마시고 끝까지 어리석음을 깨우치게 하여 주소서." 법사가 말했다. "노승이 불민하지만 그대가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다네. 이 나라가 비록 작지만 그대가 하려는 일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야. 그대가 잡힐까 염려되어 일부러 은밀히 일러 주는 것이니, 그대는 빨리 돌아가는 것이 좋으리라." 거칠부가 돌아가려 하니 법사가 다시 말했다. "그대의 상을 보니 제비턱에 매눈이로다. 앞으로 반드시 장수가 될 것이다. 만일 군사를 거느리고 오거든 나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 거칠부가 말했다. "만일 스님의 말씀과 같은 일이 생긴다면, 이는 스님과 제가 모두 바라지 않는 일이니, 밝은 해를 두고 그런 일이 없도록 맹세하겠습니다." 그는 마침내 귀국하여 본심대로 벼슬길에 나아가 직위가 대아찬에 이르렀다.
○<眞興大王>六年乙丑, 承朝旨, 集諸文士, 修撰國史, 加官波珍 . 十二年辛未, 王命<居柒夫>及<仇珍>大角 ·<比台>角 ·<耽知> ·<非西> ·<奴夫>波珍 ·<西力夫>波珍 ·<比次夫>大阿 ·<未珍夫>阿 等八將軍, 與<百濟>侵<高句麗>. <百濟>人先攻破<平壤>, <居柒夫>等, 乘勝取<竹嶺>以外, <高峴>以內十郡. 至是, <惠亮>法師, 領其徒, 出路上, <居柒夫>下馬, 以軍禮揖拜, 進曰: "昔, 遊學之日, 蒙法師之恩, 得保性命, 今, 邂逅相遇, 不知何以爲報." 對曰: "今, 我國政亂, 滅亡無日, 願致之貴域." 於是, <居柒夫>同載以歸, 見之於王, 王以爲僧統, 始置百座講會及八關之法. <眞智王>元年丙申, <居柒夫>爲上大等, 以軍國事務自任, 至老終於家, 享年七十八.
진흥대왕 6년 을축에 그는 왕명을 받들어 여러 문사들을 소집하여 신라의 국사를 편찬하였고, 파진찬 벼슬을 더 받았다.
진흥왕 12년 신미에 왕이 거칠부와 구진 대각찬, 비태 각찬, 탐지 잡찬, 비서 잡찬, 노부 파진찬, 서력부 파진찬, 비차부 대아찬, 미진부 아찬 등 여덟 장군으로 하여금 백제와 협력하여 고구려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백제인들이 먼저 평양을 격파하고, 거칠부 등은 승세를 몰아 죽령 이북 고현 이내의 10개 군을 빼앗았다. 이 때 혜량 법사가 무리를 이끌고 길가에 나와 있었다. 거칠부가 말에서 내려 군례로써 읍배하고 앞으로 나아가 말하였다. "옛날 유학할 때 법사님의 은혜를 입어 성명을 보전하였는데, 오늘 우연히 만나게 되니 무엇으로 은혜를 갚아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법사가 대답하였다. "지금 우리 나라는 정사가 어지러워 멸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너의 나라로 데려가 주기를 바란다." 이에 거칠부가 그를 말에 태워 함께 돌아 와서 왕에게 배알시키니, 왕이 그를 승통으로 삼고 처음으로 백좌강회를 열고 팔관법을 실시하였다.
진지왕 원년 병신에 거칠부가 상대등이 되어 스스로 군국사무를 담당하다가 늙은 뒤에 자기 집에서 죽으니 향년 78세였다.
失其族姓, 不知何所人也, 仕<脫解>尼師今, 爲干. 時, <于尸山國>·<居柒山國>, 介居隣境, 頗爲國患. <居道>爲邊官, 潛懷幷呑之志, 每年一度, 集群馬於<張吐>之野, 使兵士騎之, 馳走以爲戱樂, 時人稱爲馬叔{技} . 兩國人, 習見之, 以爲<新羅>常事, 不以爲怪. 於是, 起兵馬, 擊其不意, 以滅二國.
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거도는 성이 전해지지 않고 어느 곳 사람인지도 알 수 없다. 탈해 이사금 때 벼슬을 하여 간이 되었는데, 이 때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이 이웃 국경에 끼어 있으면서 자못 나라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거도가 변경 관장으로서 은근히 그 나라들을 병합하려는 뜻을 품고 매년 한 차례씩 장토 들에 말 떼를 모아 놓고 군사들로 하여금 말을 타고 달리면서 즐기게 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마숙이라고 불렀다. 두 나라 사람들은 이를 항상 보아 왔으므로 신라인들의 일반적인 행사라고 여기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에 거도가 병마를 출동시켜 그들을 불의에 공격하여 멸하였다.
[或云<苔宗>.]姓金氏, <奈勿王>四世孫. <智度路王>時, 爲沿邊官, 襲<居道>權謀, 以馬戱, 誤<加耶[或云<加羅>.]國>取之. 至十三年壬辰, 爲<阿瑟羅州{何瑟羅州}> 軍主, 謀幷<于山國>. 謂其國人愚悍, 難以威降, 可以計服, 乃多造木偶師子{獅子} , 分載戰舡, 抵其國海岸, 詐告曰: "汝若不服, 則{卽} 放此猛獸, 踏殺之." 其人恐懼則{乃} 降. <眞興王>在位十一年, <太寶>元年, <百濟>拔<高句麗><道薩城>, <高句麗>陷<百濟><金峴城>. 主{王} 乘兩國兵疲, 命<異斯夫>, 出兵擊之, 取二城增築, 留申{甲} 士(+一千) 戍之. 時, <高句麗>遣兵來攻<金峴城>, 不克而還. <異斯夫>追擊之大勝.
『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이사부[혹은 태종이라고도 한다.]의 성은 김씨이고, 나물왕의 4세 손이다. 지도로왕 때 변경 관장이 되어 거도의 권모를 모방하여 마희로써 가야[혹은 가라라고도 한다.]국을 속여서 빼앗았다.
지증왕 13년 임진에 그는 하슬라주의 군주가 되어 우산국을 병합하려고 계획하였다. 그는 그 나라 사람들이 미련하고 사나워서 힘으로 항복받기는 어려우나 전략으로 항복시킬 수는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나무로 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으로 가서 거짓으로 말했다. "너희들이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들을 풀어 놓아서 밟아 죽이겠다." 우산국 사람들이 두려워 하여 즉시 항복하였다.
진흥왕 재위 11년인 태보 원년에 백제는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고, 고구려는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두 나라 군사가 피로한 틈을 이용하여 이사부에게 명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쳐서 두 개의 성을 빼앗은 다음 성을 증축하고 군사들을 남겨 두어 수비하게 하였다. 이 때 고구려가 군사를 보내 금현성을 치다가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가자 이사부가 이들을 추격하여 대승하였다.
字<仁壽>, <大宗大王{太宗大王}> 第二子也. 幼而就學, 多讀儒家之書, 兼涉<莊>·<老>·浮屠之說. 又善隸書射御鄕樂, 行藝純熟, 識量宏弘, 時人推許. <永徽>二年, <仁問>年二十三歲, 受主{王} 命, □{入} 大<唐>宿衛, <高宗>謂涉海來朝, 忠誠可尙, 特授左領軍衛將軍. 四年, 詔許歸國覲省, <太宗大王>授以<押督州>援管{摠管} . 於是, 築<獐山城>, 以設險, <太宗>錄其功, 授食邑三百戶. <新羅>屢爲<百濟>所侵, 願得<唐>兵爲援助, 以雪着{羞} 恥, 擬諭宿衛<仁問>乞師. 會, <高宗>, 以<蘇定方>爲<神丘>道大摠管, 率師討<百濟>. 帝徵<仁問>, 問道路險易, 去就便宜. <仁問>應對尤詳, 帝悅制授<神丘>道副大摠管, 赴軍中. 遂與<定方>濟海, 到<德物島>. 主{王} 命太子, 與將軍<庾信>·<眞珠>·<天存>等, 以巨艦一百 , 載兵迎延之. 至<熊津>口, 賊瀕江屯兵, 戰破之, 乘勝入其都城滅之. <定方> 王<義慈>及太子<孝>·王子<泰>等, 廻<唐>.
趙炳舜.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三國史節要』.
김 인문의 자는 인수이고, 태종대왕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하여 유가의 서적을 많이 읽었으며, 동시에 [장자], [노자] 및 불교 서적을 널리 섭렵하였다. 또한 예서를 잘 쓰고, 활쏘기, 말타기, 향악을 잘 하였는데, 이처럼 기예에 익숙하고 식견과 도량이 넓어 당시 사람들이 그를 추앙하였다.
영휘 2년 인문의 나이 23세 때, 왕명을 받들고 당 나라에 가서 숙위하였다. 고종은 그가 바다를 건너와 내조하자 충성이 가상하다 하여 특별히 좌령군위장군을 제수하였고, 4년에 조칙을 내려 본국으로 돌아가 부모를 만나게 하였다. 태종대왕이 그에게 압독주 총관을 제수하였다. 이에 그가 장산성을 쌓아 요새를 설치하였으므로 태종이 그의 공로를 기록하고 식읍 3백 호를 주었다. 신라가 여러 번 백제의 침공을 받게 되자, 태종은 당 나라 군대의 원조를 얻어 원수를 갚고자 하여, 숙위하러 가는 인문으로 하여금 당의 원군을 청하려 하였다. 때마침 고종이 소정방을 신구도 대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치도록 하였다.
황제가 인문을 불러 도로의 험난한 사정과 행군의 편의에 대하여 물었는데, 인문이 일일이 소상하게 대답하니 황제가 기뻐하여 인문에게 신구도 부대총관의 관직을 주어 정방의 병영으로 가라고 명령하였다. 인문은 마침내 정방과 함께 바다를 건너 덕물도에 이르렀다. 왕은 태자에게 명령하여 장군 유신, 진주, 천존 등을 데리고 큰 전함 1백 척에 군사를 싣고 당군을 맞이 하게 하였다. 웅진 어귀에 이르니 적이 강가에 집결하여 있었으므로 그들과 싸워서 격파하고, 승세를 몰아 백제의 서울에 들어가 그들을 격파하였다. 정방은 백제의 왕 의자와 태자 효, 왕자 태 등을 사로잡아 당 나라로 돌아갔다.
○大王嘉尙<仁問>功業, 授波珍 , 又加角千{角干} . 尋, 入<唐>宿衛如前. <龍朔>元年, <高宗>召謂曰: "朕旣滅<百濟>, 除爾國患, 今, <高句麗>負固, 與<穢貊>同惡, 違事大之禮, 棄善隣之義, 朕欲遣兵致討, 爾歸告國王, 出師同伐, 以殲垂亡之虜." <仁問>便歸國, 以致帝命, 國王使<仁問>與<庾信>等, 練兵以待. 皇帝命邢國公<蘇定方>, 爲<遼東>道行軍大摠管, 以六軍, 長驅萬里, <麗>人於<須江{浿江}> , 擊破之, 遂圍<平壤>, <麗>人固守, 故不能克. 士馬多死傷, 糧道不繼. <仁問>與留鎭<劉仁願>, 率兵兼輸米四千石·租二萬餘斛, 赴之, <唐>人得食, 以大雪, 解圍還.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대왕이 인문의 공적을 가상히 여겨 파진찬을 제수하고 또한 각간 벼슬을 더 주었다. 그는 얼마 후 당에 들어 가서 전과 같이 숙위하였다.
용삭 원년에 고종이 불러 말했다. "내가 이미 백제를 격멸하여 너희 나라의 근심을 제거하였으나, 지금 고구려가 견고한 요새를 믿고 예맥과 더불어 악한 짓을 하여 사대의 예를 어기고 선린의 의리를 저버리고 있다. 내가 군사를 파견하여 토벌코자 하니 너도 돌아가서 국왕에게 이 말을 고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우리와 함께 거의 망하게 된 적을 섬멸케 하라."
인문은 즉시 본국으로 돌아와 황제의 명령을 전달하였다. 왕은 인문으로 하여금 유신 등과 함께 군사를 정비하여 기다리게 하였다. 황제는 형국공 소정방을 요동도 행군 대총관으로 삼았다. 소정방은 6군을 거느리고 만리길을 달려 패강에서 고구려 군사와 조우하여 이를 격파하고, 그 길로 평양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군사가 굳게 수비하자 승리하지 못하고, 도리어 많은 병마가 부상당하거나 사망하였다. 그 뿐 아니라 군량미의 운송로도 확보하지 못하였다. 인문은 유진장 유 인원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쌀 4천 석과 벼 2만여 곡을 싣고 평양으로 갔다. 이에 따라 당군은 식량을 얻었으나 눈이 크게 내렸으므로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羅>人將歸, <高句麗>謀要擊於半塗, <仁問>與<庾信>, 詭謀夜遁. <麗>人翌日覺而追之, <仁問>等, 廻擊大敗之, 斬首一萬餘級, 獲人五千餘口而歸. <仁問>又入<唐>, 以<乾封>元年, 扈駕登封<泰山>, 加授右驍衛大將軍, 食邑四百戶. <摠章>元年戊辰, <高宗>皇帝遣英國公<李勣>, 帥師伐<高句麗>, 又遣<仁問>徵兵於我. <文武大王>與<仁問>, 出兵二十萬, 行至<北漢山城>, 王住此, 先遣<仁問>等, 領兵會<唐>兵, 擊<平壤>月餘, 執王<臧>, <仁問>使主{王} 於英公前, 數其罪, 王再拜, 英公禮答之, 卽以王及<男産>·<男律{男建}> ·<男生>等還. <文武大王>, 以<仁問>英略勇功, 特異常倫, 賜故大琢角干<朴紐>食邑五百戶. <高宗>亦聞<仁問>屢有戰功, 制曰: "爪牙良將, 文武英材, 制爵疏封, 尤宜嘉命." 仍加爵秩, 食邑二千戶. 自後, 侍衛宮禁, 多歷年所.
李丙燾.
今西龍.趙炳舜. 『三國史節要』.
신라군이 돌아가려 했을 때, 고구려군이 돌아오는 길목을 막고 공격하려 하자 인문은 유신과 함께 꾀를 내어 야음을 기하여 도망하였다. 고구려인이 다음날에야 이를 알고 추격해오자 인문 등이 반격하여 대파하고, 1만여 명의 목을 베고 5천여 명을 생포하여 돌아왔다. 인문은 다시 당에 갔다. 그가 건봉 원년에 거가를 따라 태산에 올라가 봉선의 의식을 행하였다 하여, 추가로 우효위 대장군을 제수하고 식읍 4백 호를 더 주었다.
총장 원년 무진에 고종 황제가 영국공 이 적에게 군사를 주어 고구려를 치게 하고, 또한 인문을 보내 우리에게도 군사의 징발을 요구하였다. 문무대왕은 군사 20만을 출동시켜 인문과 함께 북한산성으로 갔다. 왕은 그곳에 머무르며 먼저 인문 등에게 군사를 주어 당군과 회합하여 평양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한달 남짓 만에 보장왕을 생포하였다. 인문이 고구려왕을 영공 앞에 꿇어 앉히고 그의 죄를 따지니, 고구려왕이 재배하고 영공이 그에 답례를 하였다. 영공은 곧 왕과 남산, 남건, 남생 등을 데리고 돌아갔다. 문무대왕은 인문의 지략이 훌륭하고 공로가 뛰어나다 하여 대탁 각간 박유의 식읍 5백 호를 주었다. 고종도 인문이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는 말을 듣고 제서를 내려 "조아의 양장이요, 문무의 영재이다. 작위를 제정하여 새로운 봉읍을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 하고, 작위를 더하고 식읍 2천 호를 더 주었다. 그 뒤로 그는 궁궐에서 황제를 시위하며 많은 세월을 보냈다.
○<上元>元年, <文武王>納<高句麗>叛衆, 又據<百濟>故地. <唐>皇帝大怒, 以<劉仁軌>爲< 林>道大摠管, 發兵來討, 詔削王官爵. 時, <仁問>爲右驍衛員外大將軍<臨海郡>公, 在京師, 立以爲王, 令歸國, 以代其兄, 仍策爲< 林州>大都督開府儀同三司, <仁問>懇辭不得命, 遂上道. 會, 王遣使, 入貢且謝罪, 皇帝赦之, 復王官爵, <仁問>中路而還, 亦復前銜. <調露>元年, 轉鎭軍大將軍行右武威衛大將軍, <載初>元年, 授輔國大將軍上柱國<臨海郡>開國公左羽林[軍]將軍. <延載>元年四月二十九日, 寢疾薨於帝都, 享年六十六. 訃聞, 上震悼, 贈 加等, 命朝散大夫行司禮寺大醫署令<陸元景>·判官朝散郞直司禮寺某等, 押送靈柩{樞} . <孝昭大王{孝照大王}> 追贈太大角干, 命有司, 以<延載>二年十月二十七日, 于京<西原>. <仁問>七入大<唐>, 在朝宿衛, 計月日, 九{凡} 二十二年. 時, 亦有<良圖>海 , 六入唐, 死千{于} <西京>, 失其行事始末.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新羅皇福寺石塔金銅舍利函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상원 원년에 문무왕은 고구려의 반군을 받아 들이고, 또한 백제의 고토를 차지하였다. 당 나라 황제는 크게 노하여 유 인궤를 계림도 대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를 공격케 하고, 조서로써 왕의 관작을 박탈하였다. 이 때 인문은 우효위 원외 대장군, 임해군공이 되어 당 나라 서울에 있었다. 황제는 그를 임금으로 삼아 본국으로 돌아가서 그의 형을 대신하게 하고, 계림주대도독개부의동삼사로 책봉하였다. 인문은 이를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황제의 허락을 얻지 못하여 길을 떠났다. 그 때 마침 왕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며 사죄하였므로 황제는 죄를 용서하고 왕의 관작을 회복시켰으며 인문은 중도에서 돌아가 역시 이전의 관직을 다시 맡게 되었다. 조로 원년에 진군 대장군 행우무위위 대장군에 전임되었고, 재초 원년에는 보국 대장군 상주국 임해군 개국공 좌우림 장군에 제수되었다.
연재 원년 4월 29일, 당 나라 서울에서 병으로 죽었다. 향년 66세였다.
부음을 듣고 황제가 놀라고 슬퍼하며 수의를 주고 관등을 더 높여 주었다. 그리고 조산대부행사례시대의서령 육 원경과 판관 조산랑, 직사례시 모 등에게 명하여 영구를 호송하게 하였다. 효소대왕은 그에게 태대 각간을 추증하고, 유사에게 명령하여 연재 2년 10월 27일 서울 서원에 장사지내게 하였다. 인문은 일곱 번이나 당에 들어갔으니, 당의 조정에서 숙위한 월일을 계산하면 22년이나 된다. 그 당시 양도 해찬도 역시 여섯 번 당에 들어갔다가 서경에서 죽었는데 그 행적의 시말은 전해지는 것이 없다.
<金陽 김양>
○<金陽>字<魏昕>, <太宗大王>九世孫也. 曾祖<周元>伊 , 祖<宗基>蘇判, 考<貞茹>波珍 , 皆以世家爲將相. <陽>生而英傑. <大和{太和}> 二年, <興德王>三年, 爲<固城郡>大武{太守} , 尋, 拜<中原>大尹, 俄, 轉<武州>都督, 所臨有政譽. <開成>元年丙辰, <興德王>薨, 無嫡嗣, 王之堂弟<均貞>, 堂弟之子<悌隆>, 爭嗣位. <陽>與<均貞>之子阿 <祐徵>·<均貞>妹 <禮徵>, 奉<均貞>爲王, 入<積板宮>, 以族兵宿衛. <悌隆>之黨<金明>·<利弘>等來圍, <陽>陳兵宮門, 以拒之曰: "新君在此, 爾等何敢兇逆如此." 遂引弓射殺十數人. <悌隆>下<裴萱伯>, 射<陽>中股. <均貞>曰: "彼衆我寡, 勢不可 , 公其佯退, 以爲後圖." <陽>, 於是, 突圍而出, 至<韓 >[一作<潢祇>.]市, <均眞{均貞}> 沒於亂兵, <陽>號泣旻天, 誓心白日, 潛藏山野, 以俟時來.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김 양의 자는 위흔이니, 태종대왕의 9세 손이다. 증조는 주원 이찬이오, 조부는 종기 소판이오, 부친은 정여 파진찬이니 대대로 모두가 장상이었다. 양은 태어날 때부터 영특하였다. 태화 2년, 흥덕왕 3년에 고성군 태수가 되었으며, 얼마 뒤에 중원 대윤으로 임명되었다가 곧 무주 도독으로 전직되었는데, 가는 곳마다 정치를 잘한다는 칭송을 들었다.
개성 원년 병진에 흥덕왕이 죽고 그를 계승할 적장자가 없자 왕의 당제 균정과 당제의 아들 제륭 간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다. 이 때 양은 균정의 아들인 아찬 우징과 균정의 매부인 예징과 함께 균정을 왕으로 세워 적판궁에 들어가 사병으로 숙위케 하였다. 그 때 제륭의 도당인 김 명, 이 홍 등이 적판궁을 포위하였다. 양은 군사들을 궁문에 배치하여 그들을 막으면서 말했다. "새 임금이 여기 계시는데 너희들이 어찌 이토록 흉악하게 거역할 수 있느냐?" 그는 드디어 활을 당겨 10여 명을 쏘아 죽였는데, 제륭의 부하 배 훤백이 양을 쏘아 다리를 적중시켰다. 균정이 말했다. "저 쪽은 군사가 많고 우리는 군사가 적으므로 그 세력을 막을 수 없다. 공은 물러나는 체하여 후일을 도모하라!" 이에 양이 포위를 뚫고 나와서 한기(韓岐)[한기(漢祈)라고도 한다.]시에 이르렀고, 균정은 반란군에게 살해되었다. 양은 하늘을 향하여 통곡하면서 해를 두고 결심을 다진 다음, 아무도 모르게 산야에 숨어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至<開成>二年八月, 前侍中<祐徵>, 收殘兵, 入<淸海鎭>, 結大使<弓福>, 謀報不同天之讐. <陽>聞之, 募集謀士兵卒, 以三年二月, 入海, 見<枯徵{祐徵}> , 與謀擧事. 三月, 以勁卒五千人, 襲<武州>, 至城下, 州人悉降, 進次<南原>, <新羅>兵, 與戰克之. <祐徵>以士卒久勞, 且歸<海鎭>, 養兵 馬. 冬, 彗 見西方, 芒角指東, 衆賀曰: "此除舊布新, 報寃雪恥之祥也." <陽>號爲乎東將軍{平東將軍} , 十二月再出, <金亮詢>以<鵡洲>軍來, <祐徵>又遣驍勇<閻長>·<張弁>·<鄭年>·<駱金>·<張律榮{張建榮}> ·<李順行>六將統兵, 軍容甚盛, 鼓行至<武州><鐵冶縣>北州{川} . <新羅>大監<金敏周>, 以兵逆之, 將軍<駱金>·<李順行>, 以馬兵三千, 突入彼軍, 殺傷殆盡.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개성 2년 8월이 되자 전 시중 우징이 남은 군사를 수습하여 청해진으로 가서 대사 궁복(장 보고)과 손을 잡고 불공대천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양은 이 말을 듣고 참모와 병졸들을 모집하여 3년 2월에 해중으로 들어가 우징을 만나 그와 함께 거사할 것을 모의하였다. 3월에 정예군 5천 명을 거느리고 무주를 습격하여 성 밑에 다다르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그들은 계속 진군하여 남원에 이르러 신라군과 싸워 승리했다. 우징은 군사들이 오랫 동안 싸워서 피로해졌다 하여 다시 해진으로 돌아가서 병마를 휴양시켰다. 겨울에 혜성이 서쪽에 나타났는데 광채나는 꼬리가 동쪽을 가리키니 여러 사람들이 서로 축하하며 말했다. "이는 낡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펴며,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을 좋은 징조이다." 양을 평동장군이라 하였다. 12월에 재차 출동하자 김 양순이 무주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며, 우징이 또한 용사들인 염 장, 장 변, 정 년, 낙 금, 장 건영, 이 순행 등 여섯 장수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오자 군사의 위풍이 막강하였다. 북을 치며 행군하여 무주 철야현 북쪽에 도착하니, 신라 대감 김 민주가 군사를 출동시켜 대항하였다. 장군 낙 금과 이 순행이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상대 군중으로 뛰어들어 그들을 모두 살상하였다.
○四年正月十九日, 軍至<太丘{大丘}> , 王以兵迎拒, 逆擊之, 王軍敗北, 生擒斬獲, 莫之能計. 時, 王顚沛逃人{入} 離宮, 兵士尋害之. <陽>於是命左右將軍領騎土{士} , 徇曰: "本爲報讐, 今, 渠魁就戮, 衣冠士女百姓, 宜各安居, 勿妄動." 遂牧{收} 復王城, 人民案堵. <陽>召<萱伯>曰: "犬各吠非其主, 爾以其主射我, 義士也, 我勿校, 爾安無恐." 衆聞之曰: "<萱伯>如此, 其他何憂." 無不感悅. 四月淸宮, 奉迎侍中<祐徵>卽位, 是爲<神武王>. 至七月二十三日, 大王薨, 太子嗣位, 是爲<文聖王>. 迫{追} 錄功, 授蘇判兼倉部令, 轉侍中兼兵部令, <唐>聘問, 兼授公檢校衛尉卿.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4년 정월 19일, 양의 군사가 대구에 도착하자 왕이 군사를 보내 항거하였다. 양의 군사가 이들을 역습하니 왕의 군사가 패배하여, 양에게 생포되거나 죽고 노획 당한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 때 왕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이궁으로 도망쳐 갔으나 군사들이 곧 찾아서 살해하였다. 양이 이에 좌우 장군에게 명하여 기사를 인솔하게 하고 널리 알렸다. "이 싸움은 본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 그 괴수가 죽었으니 의관, 사녀, 백성 모두는 각자 안심하고 살 것이며 망동하지 말라!"
그가 드디어 서울을 수습 정돈하니, 백성들이 마음을 놓고 살게 되었다. 양이 훤백을 불러 말했다. "개는 저마다 제 주인이 아니면 짖는 법이다. 네가 네 주인을 위하여 나를 쏘았으니 의사로다. 내가 탓하지 않을 것이니 너는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여러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말했다. "훤백에게도 저렇게 하니 다른 사람이야 무엇을 근심하랴?" 그들은 감복하며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4월에 왕궁을 깨끗이 정리하고 시중 우징을 맞아 들여 왕위에 오르게 하니, 이가 신무왕인데, 신무왕이 7월 23일에 죽고 태자가 뒤를 이으니 이가 문성왕이다. 양의 공로를 추가로 기록하여 소판 겸 창부령을 제수하고, 다시 시중 겸 병부령으로 전임시켰다. 당에서 빙문하고 동시에 공에게 검교 위위경을 제수하였다.
○<大中>十一年八月十三日, 薨于私第, 享年五十. 訃聞, 大王哀慟, 追贈舒發翰, 其贈賻殮葬, 一依<金庾信>舊例. 以其年十二月八日, 陪葬于<太宗大王>之陵. 從父兄<昕>, 字<泰>, 父<璋如>, 仕至侍中波珍 . <昕>幼而聰悟, 好學問. <長慶>二年, <憲德王>將遣人入<唐>, 難其人, 或薦<昕><太宗>之裔, 精神朗秀, 器宇深沈, 可以當選. 遂令入朝宿衛. 歲餘請還, 皇帝詔授金紫光祿大夫試大常卿{太常卿} . 及歸, 國王以不辱命, {擢} 授<南原>大守{太守} , 累遷至<康州>大都督, 尋加伊 兼相國.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顯宗實錄字本』.
대중 11년 8월 13일에 양이 자기 집에서 죽으니 향년 50세였다. 부음이 알려지니 왕이 슬퍼하며 서발한을 추중하고, 부의와 염장을 모두 김 유신의 장례 때와 같게 하여, 그해 12월 8일에 태종대왕의 능에 배장하였다.
양의 종부형 흔은 자가 태이며 부친 장여는 벼슬이 시중 파진찬에 이르렀다. 흔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장경 2년에 헌덕왕이 당에 사신을 보내려 했으나 적당한 사람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김 흔을 추천하면서 말하기를 "이는 태종의 후예요, 두뇌가 총명하며, 도량이 깊고 침착하니 뽑아 보낼 만하다"고 하므로 드디어 그를 당에 보내 숙위하게 하였다. 그가 한 해 남짓 당에 있다가 귀국하기를 청하니 황제가 조서로써 금자 광록 대부 시태상경을 제수하였다.
그가 귀국하자 국왕이 그가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 하여 특별히 남원 태수를 제수하였고, 그 후 여러 번 자리를 옮겨 강주 대도독에 이르렀으며, 얼마 안 되어 이찬 겸 상국 벼슬을 더 주었다.
○<開成>已未{己未} 閏正月, 爲大將軍, 領軍十萬, 禦<淸海>兵於<大丘>, 敗績. 自以敗軍, 又不能死綏, 不復仕官. 入<小白山>, 葛衣蔬食, 與浮圖遊. 至<大中>三年八月二十七日, 感疾終於山齋, 享年四十七歲, 以其年九月十日, 葬於<奈靈郡>之南原. 無嗣子, 夫人主喪事, 後爲比丘尼.
趙炳舜.
그는 개성 기미 윤 정월에 대장군이 되어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대구에서 청해진의 군사를 방어하다가 패전하였다.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전쟁에서 패하였고 또한 전사하지도 못하였다 하여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소백산에 들어가 칡옷을 입고 나물밥을 먹으며 중들과 함께 지내다가 대중 3년 8월 27일에 병으로 인하여 산재에서 죽었다. 향년 47세였다. 그 해 9월 10일에 나령군 남쪽 언덕에 장사하였다. 아들이 없어서 그의 부인이 상사를 주관하였는데 그녀는 후에 비구니가 되었다.
<百濟>西部人, 長七尺餘, 驍毅有謀略, 爲<百濟>達率兼<風達郡>將, 猶<唐>刺史云. <蘇定方>平<百濟>, <常之>以所部降. 而<定方>囚老王, 縱兵大掠. <常之>懼, 與左右酋長十餘人遯去, 嘯合逋亡, 依<任存山>自固, 不旬日, 歸者三萬. <定方>勒兵攻之, 不克. 遂復二百餘城. <龍朔>中, <高宗>遣使招諭, 乃詣<劉仁軌>降, 入<唐>爲左領軍員外將軍< 州{洋州}> 刺史. 累從征伐積功, 授爵賞殊等. 久之, 爲<燕然道>大摠管, 與<李多祚>等, 擊<突厥>破之. 左監門衛中郞將<寶璧>, 欲窮追邀功, 詔與<常之>共討, <寶璧>獨進, 爲虜所覆, 擧軍沒. <寶璧>下吏誅, <常之>坐無功. 會, <周興>等誣其與鷹揚將軍<趙懷節>叛, 捕繫詔獄, 投 死. <常之>御下有恩, 所乘馬爲士所 , 或請罪之. 答曰: "何遽以私馬, 鞭官兵乎?" 前後賞賜分麾下, 無留 . 及死, 人皆哀其枉.
李丙燾. [唐書].
흑치상지는 백제의 서부 사람인데 신장이 7척여가 되었으며, 동작이 빠르고 힘이 강하였으며 지략이 훌륭하였다. 그는 백제의 달솔로서 풍달군의 장수를 겸하였는데, 이 직위는 당의 자사와 동일하다.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하였을 때, 그는 자기 부하와 함께 항복하였다. 정방은 늙은 왕을 가두고 군사를 풀어놓아 크게 노략질을 하였다. 상지가 겁을 내어 좌우 관장 10여 명과 함께 도주하여, 흩어져 도망한 사람들을 불러모아 임존성에 웅거하며 굳게 수비하니 열흘이 못되어 그에게 귀순한 자가 3만이나 되었다. 정방이 군사를 독려하여 그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상지는 마침내 2백여 성을 회복하였다. 용삭 연간에 고종이 사신을 파견하여 그를 불러 타이르자 그는 유 인궤에게 가서 항복하였다. 그는 당에 들어가서 좌령군 원외 장군 양주 자사가 되었으며, 수차례의 정벌에 종사하여 많은 공을 세우고 특별한 작위와 상을 받았다. 오랜 뒤에는 연연도 대총관이 되어 이 다조 등과 함께 돌궐을 격파하였다. 이 때 좌감문위 중랑장 보벽이 돌궐을 끝까지 추격하여 공을 세우려 하자 황제가 상지와 함께 공격하라고 명령하였으나, 보벽이 혼자 진공하다가 오랑캐에게 패하여 전군이 패배하였다. 보벽은 옥리에게 보내져 처형되고, 상지도 공을 세우지 못한 죄를 짓게 되었다. 그 때 마침 주 흥 등이 그가 응양 장군 조 회절과 함께 반란을 음모한다고 무고하였으므로, 상지는 조옥에 갇혔다가 교형을 당하였다. 상지는 아랫 사람들을 은덕으로 다스렸다. 병졸들이 그의 말을 때린 적이 있었다. 어떤 자가 그 병졸을 처벌하자고 하자 상지가 대답하였다. "어찌 사사로운 개인의 말에 대한 일로, 관병을 매로 때릴 수 있는가?" 그는 자기가 받은 상을 휘하의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어 남겨두는 것이 없었다. 그가 죽게 되자 사람들은 모두 그의 억울함을 슬퍼하였다.
[<羅紀>作<弓福>.]·<鄭年>[<年>或作<連>.], 皆<新羅>人, 但不知鄕邑父祖. 皆善鬪戰, <年>復能沒海底, 行五十里不 , 角其勇壯, <保 >差不及也, <年>以兄呼<保 >. <保 >以齒, <年>以藝, 常齟齬不相下. 二人如<唐>, 爲武寧軍小將, 騎而用槍, 無能敵者. 後, <保 >還國, 謁大王曰: "遍<中國>, 以吾人爲奴婢, 願得鎭<淸海>, 使賊不得掠人西去." <淸海>, <新羅>海路之要, 今謂之<莞島>. 大王與<保 >萬人, 此後, 海上無 鄕人者. <保 >旣貴, <年>去職饑寒, 在<泗>之<漣氷縣{漣水縣}> . 一日, 言於戍將<馮元規>曰: "我欲東歸, 乞食於<張保 >." <元規>曰: "若與<保 >所負如何, 奈何去取死其手?" <年>曰: "饑寒死, 不如兵死快, 況死故鄕耶." 遂去謁, <保 >飮之極歡. 飮未卒, 聞王弑國亂無主, <保 >分兵五千人與<年>, 持<年>手泣曰: "非子不能平禍難." <年>入國, 誅叛者立王, 王召<保 >爲相, 以<年>代守<淸海>.[此與<新羅>傳記頗異, 以<杜牧>言傳, 故兩存之.]
李丙燾.
[북한본].
장 보고[[신라 본기]에는 궁복으로 되어 있다]와 정 년[년(年)은 연(連)으로도 쓴다.]은 모두 신라인이다. 그들의 고향과 조상은 알 수 없다. 두 사람은 모두 전투를 잘하였으며, 정 년은 또한 바닷물 밑으로 들어가 50리를 잠수하여 다녀도 숨이 차지 않았다. 그 용맹과 씩씩함을 비교하면 보고가 연에게 약간 모자랐으나 연은 보고를 형으로 불렀다. 그러나 보고는 나이로, 연은 기예로 항상 맞수가 되어 서로 지려고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당 나라에 가서 무녕군 소장으로 있을 때, 말을 달리며 창을 쓰는 데 있어서 대적할 자가 없었다.
그 뒤에 보고가 귀국하여 대왕에게 말했다. "중국을 두루 돌아다녀 보니, 우리 나라 사람들을 노비로 삼고 있었습니다. 청해에 진영을 설치하여 해적들이 사람들을 약취하여 서쪽으로 데려가지 못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청해는 신라 해로의 요충지로서 지금은 완도라고 부른다. 대왕이 보고에게 군사 1만 명을 주어 청해에 진영을 설치케 하니, 이 뒤로는 바다에서 우리 나라 사람들을 노비로 파는 자가 없어졌다. 보고는 이미 귀한 자리에 올랐으나, 년은 직업을 잃고 굶주림 속에서 사수의 연수현에서 살았다. 하루는 수비하는 장수 풍 원규에게 말하기를 "내가 동쪽으로 돌아가서 장 보고에게 걸식하려 한다" 하니 원규가 말하기를 "그대와 장 보고의 사이가 어떠한가? 어찌하여 그곳에 가서 그의 손에 죽으려 하는가?"라고 하였다. 년이 말하기를 "배고픔으로 죽는 것은 싸우다가 죽는 것 만큼 통쾌하지 못하다. 더구나 고향에서 죽으니 좋은 일이 아닌가?"라 하고 드디어 그곳을 떠나 장 보고를 만났다.
그가 보고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마음껏 즐기는데 술자리가 끝나기 전에 왕이 시해되고 나라가 어지러워져서 임금이 없다는 소문이 들렸다. 보고가 군사 5천 명을 나누어 연에게 주면서 그의 손을 잡고 울면서 말했다. "그대가 아니면 나라의 화란을 평정할 수 없다." 연이 국도에 들어가 배반한 자를 죽이고 왕을 세웠다. 왕은 장 보고를 불러 재상으로 삼고, 연으로 하여금 보고를 대신하여 청해를 지키게 하였다.[이것은 신라의 전기와는 매우 다르지만, 두 목이 말하여 전해오는 것이므로 두 가지를 그대로 기록해둔다.]
○論曰: <杜牧>言: "<天寶><安祿山>亂, <朔方>節度使<安思順>, 以<祿山>從弟賜死, 詔<郭汾陽>代之. 後旬日, 復詔<李臨淮>, 持節分<朔方>半兵, 東出<趙>·<魏>. 當<思順>時, <汾陽>·<臨淮>俱爲牙門都將, 二人不相能, 雖同盤飮食, 常 相視, 不交一言. 及<汾陽>代<思順>, <臨淮>欲亡去, 計未決, 詔<臨淮>, 分<汾陽>半兵東討. <臨淮>入請曰: '一死固甘, 乞免妻子.' <汾陽> 下, 持手上堂, 偶坐曰: '今國亂主遷, 非公不能東伐, 豈懷私忿時耶.' 及別, 執手泣涕, 相勉以忠義, 訖平巨盜, 實二公之力. 知其心不叛, 知其材可任, 然後, 心不疑, 兵可分. 平生積憤, 知其心, 難也. 忿必見短, 知其材, 益難也. 此<保 >與<汾陽>之賢等耳. <年>投<保 >, 必曰: '彼貴我賤, 我降下之, 不宜以舊忿殺我.' <保 >果不殺, 人之常情也; <臨淮>請死於<汾陽>, 亦人之常情也. <保 >任<年>事, 出於己. <年>且饑寒, 易爲感動. <汾陽>·<臨淮>平生抗立, <臨淮>之命, 出於天子, 於<保 >, <汾陽>爲優, 此乃聖賢遲疑成敗之際也. 彼無他也, 仁義之心, 與雜情 植, 雜情勝則仁義滅, 仁義勝則雜情消. 彼二人, 仁義之心旣勝, 復資之以明, 故卒成功. 世稱<周>·<召>爲百代之師, <周公>擁孺子, 而<召公>疑之. 以<周公>之聖·<召公>之賢, 少事<文王>, 老佐<武王>, 能平天下, <周公>之心, <召公>亦且不知之. 苟有仁義之心, 不資以明, 雖<召公>尙爾, 況其下哉. 語曰: '國有一人, 其國不亡.' 夫亡國, 非無人也, 丁其亡時, 賢人不用. 苟能用之, 一人足矣." <宋祈> 曰: "嗟乎, 不以怨毒相甚{ } , 而先國家之憂, <晉>有<祁奚>, <唐>有<汾陽>, <保 >, 孰謂<夷>無人哉."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저자의 견해 : 두 목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보 연간의 안 녹산의 난 때, 삭방 절도사 안사순은 녹산의 종제라는 이유로 처형당하였다. 그리고 곽 분양에게 조서를 주어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열흘 후에는 다시 이 임회에게 조서를 내려 부절을 가지고 가서 삭방 군사의 절반을 나누어 동으로 조, 위 지방에 나가게 하였다. 사순 때는 분양과 임회가 모두 아문 도장으로 있었는데, 두 사람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한 자리에서 음식을 먹으면서도 항상 서로 눈을 흘기고 한 마디 말도 주고 받지 않았었다. 분양이 사순의 직무를 대신하게 되자, 임회는 도망하려 하였으나 미처 결행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분양은 임회에게 병력의 절반을 나누어 주고 동쪽을 정벌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임회가 들어가 분양에게 청하였다. '이 한 몸이 죽는 것은 실로 달게 받겠으나 처자만은 죽음을 면하게 해 주시오.' 분양은 내려가서 임회의 손을 잡고 당상으로 올라와 마주 앉아 말했다. '지금 나라가 어지러워 임금이 파천하였는데, 그대가 아니면 동쪽의 적을 평정할 수 없네. 어찌 사사로운 원한을 생각할 때란 말인가?' 그들은 작별할 때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충성과 의리로써 서로 격려하였으니, 나라의 큰 도적을 평정하게 된 것은 실로 두 사람의 힘이었다. 배반할 마음이 없음을 알고, 재능이 일을 맡길 만한 인물임을 안 뒤에야 비로소 의심하지 않고 군사를 나누어 줄 수 있는 법이다. 평생토록 상대에 대하여 분한 심정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상대의 마음을 알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분노를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상대의 단점이 먼저 보이게 되므로 상대의 재능을 알아보기가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으로 보면 장보고와 분양의 현명한 정도는 비슷하다. 정 년이 보고에게 갈 때 틀림없이 "저 사람은 귀하게 되었고 나는 천하니, 내가 자신을 낮춘다면 응당 옛날의 분노로 말미암아 나를 죽이지는 않으리라"라고 하였을 것이다. 보고는 과연 그를 죽이지 않았으니 이는 인지상정이오, 임회가 분양에게 죽기를 청한 것도 역시 인지상정이었다. 장 보고가 정 년에게 임무를 맡긴 것은 자기 자신에게서 우러나온 것이다. 정 년은 또한 굶주린 상황에 있었으므로 감동되기도 쉬운 일이었다. 분양과 임회는 평생 대립하였지만, 임회에게 내린 명령은 천자에게서 전권을 받은 분양에게서 나왔으니, 장 보고와 비교하자면 곽 분양이 더욱 훌륭한 편이다. 이것이 바로 성현들이 성패를 속단하지 못하는 대목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인의의 마음이 잡스런 감정과 함께 존재하여, 잡스런 감정이 이기면 인의가 사라지고, 인의가 이기면 잡스런 감정이 사라지는 이치이다. 장 보고와 곽 분양, 두 사람은 인의의 마음이 이긴 데다가 총명함이 바탕을 이루었기 때문에 마침내 성공하였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주공과 소공을 백 대의 스승으로 칭송하지만, 주공이 어린 임금을 보좌할 때 소공이 그를 의심했었다. 주공의 성스러움과 소공의 현명함으로 젊어서는 문왕을 섬겼고, 늙어서는 무왕을 보좌하여 천하를 평정할 수 있었지만, 주공의 마음을 소공도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만약 인의의 마음이 있다할지라도 바탕에 총명함이 없으면, 비록 소공일지라도 의심할 수 밖에 없었으니, 하물며 그보다 못한 사람들이야 어떠하겠는가? '나라에 군자 한 사람만 있으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대개 나라가 망하는 것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망할 때를 당하여 어진 사람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로 어진 사람을 쓸 줄 안다면 한 사람으로도 족한 것이다."
송 기는 말했다.
"아아! 개인적인 원망으로 상호 해치지 않고, 나라 일을 먼저 걱정한 사람으로는 진에 기 해가 있었고, 당에 분양과 장 보고가 있었으니, 누가 이족에 사람이 없다고 할 것인가?"
, 系出眞骨, <奈密王>七世孫也, 父<仇梨知>級 . 本高門華胄, 風標淸秀, 志氣方正, 時人請奉爲花郞, 不得已爲之. 其徒無慮一千人, 盡得其歡心. <眞興王>命伊 <異斯夫>, 襲<加羅[一作<加耶>.]國>. 時, <斯多含>年十五六, 請從軍, 王以幼少不許, 其請勤而志 {確} , 遂命爲貴幢裨將, 其徒從之者亦衆. 及抵其國界, 請於元帥, 領麾下兵, 先入< 檀梁>[< 檀梁>, 城門名. <加羅>語謂門爲梁云.]. 其國人, 不意兵猝至, 驚動不能禦, 大兵乘之, 遂滅其國. 師還, 王策功, 賜<加羅>人口三百, 受已皆放, 無一留者. 又賜田, 固辭, 王强之, 請賜<閼川>不毛之地而已. <含>始與<武官郞>, 約爲死友. 及<武官>病卒, 哭之慟甚, 七日亦卒, 時年十七歲.
三國史記卷第四十四.
今西龍.
사다함은 그 계통이 진골 출신으로 나밀왕의 7세 손이요, 부친은 구리지 급찬이다. 본래 높은 가문의 귀한 자손으로서 풍채가 청수하고 지기가 방정하여 당시 사람들이 그를 화랑으로 받들기를 청하므로 마지 못하여 화랑이 되었다. 그를 따르는 무리가 무려 1천 명이나 되었는데 사다함은 그들 모두의 환심을 얻었다.
진흥왕이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가라[가야라고도 한다.]국을 습격하게 하였는데, 이 때 사다함은 나이가 십 오륙 세로서 종군하기를 청하였다. 왕은 나이가 어리다 하여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요청이 간절하고 의지가 확고하므로 마침내 그를 귀당비장으로 임명하니 그의 낭도로서 그를 따라 나서는 자가 많았다. 국경에 이르자 원수에게 청하여 그 휘하의 병사를 거느리고 먼저 전단량[전단량은 성문 이름이다. 가라의 말로 문을 양(돌)이라 하였다.]으로 들어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뜻밖에도 군사들이 갑자기 들어닥치자 놀란 나머지 방어를 하지 못했으므로, 대군이 이 틈을 이용하여 마침내 그 나라를 멸하였다. 군사가 돌아오자 왕은 그의 전공을 책정하여 가라 인구 3백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받는 즉시로 전부 석방하여 한 명도 남겨두지 않았다. 그에게 또한 토지를 주었으나 굳이 사양하므로 왕이 받을 것을 강권하니 알천에 있는 불모지만을 요청하였다. 사다함은 애초에 무관랑과 목숨을 같이하는 벗이 되기를 약속하였는데, 무관이 병들어 죽자 너무나 슬프게 울다가 7일 만에 자기도 죽으니 당시 나이가 17세였다.
삼국사기 권 제 44 끝
三國史記卷第四十五.
삼국사기 권 제 45
列傳第五.
<乙巴素>·<金后稷>·<祿眞>·<密友>·<紐由>·<明臨答夫>
<昔于者{昔于老}> ·<朴堤上>·<貴山>·<溫達>.
趙炳舜. 『顯宗實錄字本』.
열전 제 5
을파소. 김 후직. 녹진. 밀우. 유유. 명림답부. 석우로. 박 제상. 귀산. 온달.
<高句麗>人也. <國川王>時, 沛者<於 留{於卑留}> ·評者<左可慮>等, 皆以外戚擅權, 多行不義, 國人怨憤. 王怒欲誅之, <左可慮>等謀反, 王誅竄之. 遂下令曰: "近者, 官以寵授, 位非德進, 毒流百姓, 動我王家, 此寡人不明所致也. 今, 汝四部, 各擧賢良在下者." 於是, 四部共擧<東部><晏留>, 王徵之, 委以國政.
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을파소는 고구려인이다.
국천왕 때의 패자 어비류와 평자 좌가려 등이 모두 왕의 외척으로서 권세를 부리고 그릇된 행동을 많이 하자 백성들이 원망하고 분개하였다. 왕이 노하여 그들을 죽이려 하자 좌가려 등이 모반하므로 일부는 죽이고 일부는 귀양을 보냈다. 그리고 명을 내려 말했다. "근자에 벼슬이 측근에게 주어지고, 지위가 덕행에 따라 올라 가지 못하는 일이 많아 그 해독이 백성에게 미치고 왕실을 동요시켰다. 이는 과인이 총명치 못한 탓이었다. 이제 너희들 4부에서는 각기 재야에 있는 현량을 천거토록 하라!" 이에 4부에서 모두 동부의 안류를 천거하자 왕이 그를 불러서 국정을 맡기려 하였다.
○<晏留>言於王曰: "微臣庸愚, 固不足以參大政. 西<鴨 谷><左勿村><乙巴素>者, <琉璃王>大臣<乙素>之孫也. 性質剛毅, 智慮淵深, 不見用於世, 力田自給. 大王若欲理國, 非此人則不可." 王遣使以卑辭重禮聘之, 拜中畏大夫, 加爵爲于台. 謂曰: "孤 承先業, 處臣民之上, 德薄材短, 未濟於理. 先生藏用晦明, 窮處草澤者久矣, 今不我棄, 幡然而來, 非獨孤之喜幸, 社稷生民之福也. 請安承敎, 公其盡心."
안류가 왕에게 말했다. "미천한 저는 용렬하고 어리석어 실로 중대한 정사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서쪽 압록곡 좌물촌에 사는 을파소라는 사람은 유리왕의 대신이었던 을소의 후손입니다. 그는 의지가 강하고 지혜가 깊은데 세상에 쓰이지 못하여 농사를 지어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만일 나라를 다스리려면 이 사람이 아니면 안될 것입니다." 왕이 사신을 보내 겸손한 말과 정중한 예로 그를 초빙하여 중외 대부로 임명하고, 작위를 더하여 우태로 삼으며 말했다. "내가 외람되이 선대의 왕업을 계승하여 신민의 위에 처하게 되었으나, 덕과 자질이 부족하여 정치를 잘하지 못하고 있소. 선생이 자질을 감추고 현명함을 드러내지 않은 채 초야에 묻힌 지 오래였으나, 지금 나를 버리지 않고 마음을 고쳐 잡고 이렇게 와주었으니, 이는 비단 나에게 다행한 일일 뿐만 아니라 나라의 사직과 백성의 복이라오. 가르침을 받기를 청하는 바이니 공은 마음을 다하여 주기 바라오."
○<巴素>意雖許國, 謂所受職, 不足以濟事. 乃對曰: "臣之駑蹇, 不敢當嚴命, 願大王選賢良, 授高官, 以成大業." 王知其意, 乃除爲國相, 令知政事. 於是, 朝臣國戚, 謂<巴素>以新間舊, 疾之. 王有敎曰: "無貴賤, 苟不從國相者, 族之." <巴素>退而告人曰: "不逢時則隱, 逢時則仕, 士之常也. 今, 上待我以厚意, 其可復念舊隱乎." 乃以至誠奉國, 明政敎, 愼賞罰, 人民以安, 內外無事. 王謂<晏留>曰: "若無子之一言, 孤不能得<巴素>以共理. 今, 庶績之凝, 子之功也." 拜爲大使者. 至<山上王>七年秋八月, <巴素>卒, 國人哭之慟.
파소는 생각은 비록 몸을 나라에 바치고 싶었으나 맡은 바 직위가 일을 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말했다. "신의 노둔함으로 감히 존엄하신 명령을 감당할 수 없사오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현량한 사람을 선발하여 높은 관직을 줌으로써 위업을 달성케 하소서!" 왕이 그의 뜻을 알고 곧 국상을 제수하여 정사를 맡겼다. 이 때 조정의 신하들과 외척들은 파소가 새로 등용되어 이전의 대신들을 이간한다 하여 그를 미워하였다. 왕은 교서를 내려 말했다. "귀천을 막론하고 만약 국상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면 일족을 멸하리라." 파소가 물러 나와서 사람들에게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어살고, 때를 만나면 벼슬을 하는 것은 선비로서의 떳떳한 행동이다. 이제 임금께서 나를 후의로 대우하시니 어찌 다시 예전의 은거를 생각하랴?"라고 말하며, 곧 지성으로 나라에 봉사하여 정교를 밝히고 상벌을 신중하게 처리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고 내외가 무사하였다. 왕이 안류에게 "만일 그대의 한 마디 말이 없었다면 내가 을파소를 얻어서 그와 함께 다스리지 못하였을 것이다. 지금 모든 치적이 이루어진 것은 그대의 공로이다"라 말하고, 그를 대사자로 임명하였다. 산상왕 7년 가을 8월에 파소가 죽자 백성들이 통곡하였다.
<智證王>之曾孫. 事<眞平大王>, 爲伊 , 轉兵部令. 大王頗好日{田} 獵, <后稷>諫曰: "古之王者, 必一日萬機, 深思遠慮, 左右正士, 容受直諫, , 不敢逸豫, 然後, 德政醇美, 國家可保. 今, 殿下日與狂夫獵士, 放鷹犬, 逐雉兎, 奔馳山野, 不能自止. <老子>曰: '馳聘田獵, 令人心狂.' 『書』曰: '內作色荒, 外作禽荒, 有一于此, 未或不亡.' 由是觀之, 內則蕩心, 外則亡國, 不可不省也, 殿下其念之." 王不從, 又切諫, 不見聽.
趙炳舜. 『三國史節要』.
김 후직은 지증왕의 증손이다. 그는 진평대왕을 섬겨 이찬이 되었다가 병부령으로 전직하였다. 대왕이 사냥을 몹시 좋아하자 후직이 간하였다. "옛날 임금들은 하루에도 만 가지 정사를 보살피되 반드시 심사원려하여, 좌우에 바른 선비를 두고 그들의 바른 말을 받아 들였으며, 부지런하고 꾸준히 노력하여 감히 안일하고 편안할 생각을 품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뒤에야 덕정이 순미하여 국가를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매일 광부와 포수을 데리고 매와 사냥개를 놓아 꿩과 토끼를 잡기 위하여 산과 들로 뛰어 다니기를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자]는 '말달리며 사냥하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한다'고 하였으며, [서경]에는 '안으로 여색에 빠지거나 밖으로 사냥을 일삼는 것 가운데 한 가지만 저질러도 망하지 않는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보면 사냥은 안으로 마음을 방탕하게 하고, 밖으로 나라를 망치는 것이니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를 유념하소서." 그러나 왕이 말을 듣지 않아 다시 간절하게 충언하였으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後, 后稷疾病, 將死, 謂其三子曰: "吾爲人臣, 不能匡救君惡, 恐大王遊娛不已, 以至於亡敗, 是吾所憂也. 雖死, 必思有以悟君, 須 吾骨於大王遊 之路側." 子等皆從之. 他日, 王出行, 半路有遠聲, 若曰莫去. 王顧問: "聲何從來." 從者告云: "彼<后稷>伊 之墓也." 遂陳<后稷>臨死之言, 大王 然流涕曰: "夫子忠諫, 死而不忘, 其愛我也深矣. 若終不改, 其何顔於幽明之間耶." 遂終身不復獵.
그 후, 후직이 병들어 죽음을 앞두게 되었을 때 자기의 세 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신하로서 임금의 단점을 바로잡아 주지 못하였다. 아마 대왕은 놀고 즐기는 일을 그만 두지 않아 패망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근심하는 것이다. 죽어서라도 꼭 임금을 깨우쳐 주려 하니, 나의 시체를 대왕이 사냥다니는 길 옆에 묻어라." 세 아들은 그의 유언대로 실행하였다.
후일 왕이 사냥을 가다가 도중에 어렴풋한 소리가 들렸는데 마치 "가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았다. 왕이 돌아보며 "소리가 어디서 나느냐?"고 물었다. 종자가 말하기를 "저것은 후직 이찬의 무덤입니다" 하고는 이어서 후직이 죽을 때 남긴 말을 전해 주었다. 대왕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그대는 충성으로 간언하고 죽어서도 잊지 않으니, 나에 대한 사랑이 깊도다. 끝내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살아서나 죽어서나 무슨 낯으로 대하겠는가!" 왕은 마침내 다시는 사냥을 하지 않았다.
姓與字, 未詳. 父<秀奉>一吉 . <祿眞>二十三歲始仕, 屢經內外官, 至<憲德大王>十年戊戌, 爲執事侍郞. 十四年, 國王無嗣子, 以母弟<秀宗>, 爲儲貳, 入<月池宮>. 時, <忠恭>角干爲上大等, 坐政事堂, 注擬內外官, 退公感疾, 召國醫診脈, 曰: "病在心臟, 須服龍齒湯." 遂告暇三七日, 杜門不見賓客.
녹진의 성과 자는 자세하지 않다. 아버지는 수봉 일길찬이다. 녹진은 23세에 비로소 관직에 올라 여러 차례 내외의 직책을 역임하다가 헌덕대왕 10년 무술에 집사 시랑이 되었다. 14년에 국왕이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므로 왕의 아우 수종을 태자로 삼아 월지궁에 들게 하였다. 이 때 충공 각간이 상대등이 되어 정사당에 앉아서 내외의 관원을 전형했는데, 하루는 퇴근하여 집에 있다가 병이 들었다. 국의를 불러 진맥하니 그가 말했다. "병이 심장에 있으니 용치탕을 복용해야 합니다." 그는 곧 21일 간의 휴가를 얻어 문을 닫고 손님을 만나지 않았다.
○於是, <祿眞>造而請見, 門者拒焉. <祿眞>日{曰} : "下官非不知相公移疾謝客, 須獻一言於左右, 以開鬱 之慮, 故此來耳, 若不見, 則不敢退也." 門者再三復之, 於是, 引見. <祿眞>進曰: "伏聞寶體不調, 得非早朝晩罷, 蒙犯風露, 傷榮衛之和, 失支體之安乎?" 曰: "未至是也, 但昏昏默默, 精神不快耳." <祿眞>曰: "然則公之病, 不須藥石, 不須針 , 可以至言高論, 一攻而破之也, 公將聞之乎?" 曰: "吾子不我遐遺, 惠然光臨, 願聽玉音, 洗我胸臆."
『북한본』.
이 때 녹진이 가서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문지기가 이를 거절하였다. 녹진이 말했다. "나는 상공께서 병 때문에 빈객을 사절하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나, 꼭 한 마디 말씀을 좌우에 드려서 답답한 근심을 풀어드려야겠기에 이렇게 온 것이다. 만나지 않고는 물러갈 수 없다." 문지기가 두 세 번 이 뜻을 전하자 충공은 그를 불러들여 만나 주었다.
녹진이 들어가 말했다. "제가 듣건대 귀중한 몸이 편치 못하시다고 하니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 늦게 퇴근하느라 바람과 이슬을 맞아 혈기의 조화를 손상시켜 지체의 편안함을 잃은 것이 아닙니까?" 충공이 말했다.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았고 다만 머리가 멍하고 정신이 상쾌하지 못할 뿐이다." 녹진이 말했다. "그렇다면 공의 병은 약이나 침으로 고쳐지는 것이 아니라 지극한 말과 고상한 담론으로 단번에 고칠 수 있을 것이니 공께서 이를 들어주시겠습니까?" 충공이 말했다. "그대가 나를 멀리 여기지 않고 고맙게도 와주었으니 옥음을 들려주어 내 가슴 속을 씻어 주기 바란다."
○<祿眞>曰: "彼梓人之爲室也, 材大者爲梁柱, 小者爲椽 , 偃者植者各安所施, 然後, 大廈成焉. 古者, 賢宰相之爲政也, 又何異焉? 才巨者, 置之高位, 小者授之薄任. 內則六官·百執事, 外則方伯·連率·郡守·縣令, 朝無闕位, 位無非人, 上下定矣, 賢不肖分矣, 然後, 王政成焉. 今則不然, 徇私而滅公, 爲人而擇官, 愛之則雖不材, 擬送於雲 , 憎之則雖有能, 圖陷於溝壑. 取捨混其心, 是非亂其志, 則不獨國事 濁, 而爲之者, 亦勞且病矣. 若其當官淸白, 事恪恭, 杜貨賂之門, 遠請託之累, 黜陟只以幽明, 予奪不以愛憎, 如衡焉, 不可枉以輕重, 如繩焉, 不可欺以曲直. 如是, 則刑政允穆, 國家和平, 雖曰開<孫弘>之閤, 置<曹參>之酒, 與朋友故舊, 談笑自樂可也. 又何必區區於服餌之間, 徒自費日廢事爲哉?"
녹진이 말했다. "목수가 집을 지을 때, 큰 재목으로는 들보와 기둥을 만들고, 작은 재목으로는 서까래를 만들어 굽은 것과 바른 것이 각각 알맞게 자리잡은 뒤에야 큰 집이 지어집니다. 옛날에 어진 재상이 정치를 하는 법도도 무엇이 이와 달랐겠습니까? 재능이 많은 자는 높은 자리에 앉히고, 재능이 적은 자는 가벼운 소임을 맡기어, 안으로 6관 백집사와 밖으로 방백, 연솔, 군수, 현령에 이르기까지 조정에 빈 직위가 없고, 직위마다 부당한 자가 없어서 위아래가 정연하고, 현명함과 불초함이 구별되었습니다. 그렇게 한 뒤에야 왕정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고, 사사로운 감정에 이끌려 공적인 일을 그르치고, 사람을 위하여 관직을 고르기 때문에 그 사람이 마음에 들면 재능이 없어도 아주 높은 직을 주려하고, 그 사람을 미워하면 유능하더라도 구렁텅이에 빠뜨리려 합니다. 취하고 버림이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옳고 그름이 뜻을 어지럽게 하니, 나라 일이 혼탁해질 뿐 아니라, 그 일을 담당하는 사람도 괴롭고 병이 날 것입니다. 만일 관직에 있으면서 청렴결백하고, 일에 근신하며, 뇌물이 오가는 문을 막고, 청탁의 폐단을 멀리하며, 승진과 강등을 오직 그 사람의 총명에 따르고, 관직을 주고 빼앗는 것을 애증에 의하여 하지 않는다면, 마치 저울처럼 경중을 잘못 가릴리 없으며, 먹줄처럼 곡직을 속이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형정이 믿음직스럽고 국가가 화평하여, 비록 손 홍과 같이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조 참과 같이 잔치를 베풀어 친구들과 한담 오락을 하고 있어도 좋을 것입니다. 어찌 꼭 약을 먹기에 몰두하고 부질없이 시일을 소비하여 공사를 폐지하겠습니까?"
○角干, 於是, 謝遣醫官, 命駕朝王室. 王曰: "謂卿剋日服藥, 何以來朝?" 答曰: "臣聞<祿眞>之言, 同於藥石, 豈止飮龍齒湯而已哉?" 因爲王一一陳之. 王曰: "寡人爲君, 卿爲相, 而有人直言如此, 何喜如焉? 不可使儲君不知, 宜往<月池宮>." 儲君聞之. 入賀曰: "嘗聞君明則臣直, 此亦國家之美事也." 後, <熊川州>都督<憲昌>反叛, 王擧兵討之, <祿眞>從事有功, 王授位大阿 , 辭不受.
각간이 이 말을 듣자 의원을 사절하여 보내고 수레를 타고 왕궁으로 입조하였다. 왕이 말했다. "경은 날을 정해 놓고 복약한다더니 어찌하여 내조하는가?" 충공이 대답하였다. "신이 녹진의 말을 들으니 약석과 같았습니다. 어찌 용치탕을 마시는 것에 비교하겠습니까!" 그는 그 자리에서 왕에게 녹진의 말을 낱낱이 고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과인은 임금이 되고, 경은 재상이 되었는데, 이와 같이 바른 말 하는 사람이 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태자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으니 월지궁으로 가야 되겠다"고 하였다. 태자가 이 말을 듣고 들어와서 치하하기를 "일찌기 듣건대 임금이 명철하면 신하가 바르다고 하였습니다. 이 역시 나라의 아름다운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뒤에 웅천주 도독 헌창이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군사를 발동하여 이를 치는데, 녹진이 종군하여 공로가 있었으므로 왕이 대아찬 벼슬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사양하고 이를 받지 않았다.
<紐由>者, <高句麗>人也. <東川王>二十年, <魏><幽州>刺史< 丘儉>, 將兵來侵, 陷<丸都城>. 王出奔, 將軍<王 >追之. 王欲奔<南沃沮>, 至于<竹嶺>, 軍士奔散殆盡. 唯<東部><密友>, 獨在側, 謂王曰: "今追兵甚迫, 勢不可脫. 臣請決死而禦之, 王可遁矣." 遂募死士, 與之赴敵力戰, 王僅得脫而去, 依山谷, 聚散卒自衛. 謂曰: "若有能取<密友>者, 厚賞之." 下部<劉屋句>前對曰: "臣試往焉." 遂於戰地, 見<密友>伏地, 乃負而至, 王枕之以股, 久而乃蘇.
밀우와 유유는 모두 고구려인이다. 동천왕 20년에 위 나라 유주 자사 관 구검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환도성을 함락시키니 왕이 성에서 나와 도주하였다. 장군 왕 흔이 왕을 추격하였다. 왕이 남옥저로 달아나기 위하여 죽령에 이르렀을 때 군사들은 거의 모두 흩어지고 다만 동부의 밀우가 혼자 왕 옆에 있다가 왕에게 말했다. "이제 추격해 오는 군사가 매우 가까이 있으니 형세가 급박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결사적으로 막겠사오니 왕께서는 도망하소서." 밀 우는 드디어 결사대를 모집하여 함께 적진으로 달려가 힘껏 싸웠다. 왕은 이 틈을 타서 겨우 탈출하였다. 왕은 가다가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흩어진 군사를 모아 방어하면서 말했다. "만일 밀우를 찾아올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후한 상을 주겠다." 하부의 유 옥구가 앞으로 나서면서 대답하였다. "신이 가보겠습니다." 그는 곧 싸움터로 가서 땅에 쓰러져 있는 밀우를 발견하고 즉시 업어 왔다. 그는 왕이 무릎을 베어주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소생했다.
○王間行轉輾, 至<南沃沮>, <魏>軍追不止. 王計窮勢屈, 不知所爲. <東部>人<紐由>進曰: "勢甚危迫, 不可徒死. 臣有愚計, 請以飮食, 往 <魏>軍, 因伺隙, 刺殺彼將, 若臣計得成, 則王可奮擊決勝." 王曰: "諾." <紐由>入<魏>軍, 詐降曰: "寡君獲罪於大國, 逃至海濱, 措躬無地矣. 將以請降於陣前, 歸死司寇, 先遣小臣, 致不 之物, 爲從者羞." <魏>將聞之, 將受其降, <紐由>隱刀食器, 進前拔刀, 刺<魏>將胸, 與之俱死, <魏>軍遂亂.
왕은 사잇길을 헤매다가 남옥저에 이르렀다. 그러나 위 나라 군사는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왕은 마땅한 방법도 없고 형세도 궁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 때, 동부 사람 유유가 말했다. "형세가 매우 위급하니 그냥 죽을 수는 없습니다. 신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있사온 바, 음식을 차려 가지고 위 나라 군사를 한턱 먹이는 체하다가 틈을 타서 저들의 장수를 찔러 죽이겠습니다. 만일 신의 계책이 이루어진다면 이 때 왕께서 공격하여 승부를 결판 내소서." 왕이 "좋다"고 말하였다. 유유가 위의 군중에 들어가서 거짓 항복하는 체하며 말했다. "우리 임금이 대국에 죄를 짓고 도망하여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몸 둘 곳이 없다. 장차 진 앞에 나아가 항복을 청하고 형리의 처벌을 받으려 하는데, 먼저 소신을 보내 변변치 않은 음식으로 종자들에게 먹이려 한다." 위의 장수가 이 말을 듣고 항복을 받으려 하였다. 유유가 칼을 음식 그릇에 숨겼다가 앞으로 달려 들어 칼을 뽑아 위장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으니 위나라 군중이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 不能陳, 遂自<樂浪>而退. 王復國論功, 以<密友>·<紐由>, 爲第一. 賜<密友><巨谷>·<靑木谷>, 賜<屋句><鴨綠>·<豆訥河原>, 以爲食邑, 追贈<紐由>爲九使者. 又以其子<多優>爲大使者.
왕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갑자기 그들을 공격하였다. 위군이 혼란해져 진을 정비하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으로부터 물러 갔다.
왕이 서울로 돌아와서 전공을 평정하면서 밀우와 유유의 공로를 첫째로 삼아 밀우에게 거곡과 청목곡을 하사하고, 옥구에게 압록강의 두눌하원을 하사하여 그들의 식읍으로 하였으며, 유유에게는 벼슬을 추증하여 구사자로 하고, 또한 그의 아들 다우를 대사자로 삼았다.
<高句麗>人也. <新大王>時, 爲國相. <漢><玄 郡>大守{太守} <耿臨>, 發大兵欲攻我, 王問群臣戰守執{孰} 便. 衆議曰: "<漢>兵, 恃衆輕我, 若不出戰, 彼以我爲怯, 數來, 且我國山險而路隘, 此所謂一夫當關, 萬夫莫當者也. <漢>兵雖衆, 無如我何, 請出師禦之." < 夫>曰: "不然, <漢>國大民衆, 今以强兵遠鬪, 其鋒不可當也. 而又兵衆者宜戰, 兵小{少} 者宜守, 兵家之常也. 今, <漢>人千里轉糧, 不能持久, 若我深溝高壘, 淸野以待之, 彼必不過旬月, 饑困而歸. 我以勁卒迫之, 可以得志." 王然之, 城固守.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
명림답부는 고구려인이다. 신대왕 때 국상이 되었다. 한 나라 현토 태수 경림이 대군을 발동하여 우리를 침공하려 하자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공격과 방어에서 어느 것이 유리할 것인가를 물었다.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여 말했다. "한 나라 군사는 병사의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업신여기는데 만약 나아가 싸우지 않는다면 저들은 우리를 비겁하다 하여 자주 올 것이요, 반면에 우리 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으니 이야말로 한 명이 관문을 지켜도 만 명이 당하지 못하는 격입니다. 따라서 한군이 비록 많다고 하지만 우리를 어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청컨대 군사를 출동시켜 방어하소서." 답부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은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으며, 지금 정예병이 멀리 와서 싸우니 그 예봉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또한 군사가 많은 자는 마땅히 싸워야 하고, 군사가 적은 자는 지켜야 한다는 것이 병가의 상법입니다. 지금 한 나라 사람들은 천 리 길에 군량을 운반해 왔으므로 오랫 동안 버티지는 못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구덩이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으며, 들판을 비워 놓고 기다린다면, 저들은 틀림없이 한 달이 넘지 않아서 굶주리고 피곤하여 돌아갈 것입니다. 그 때 우리가 강병을 앞세워 추격한다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그렇게 여겨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漢>人攻之不克, 士卒饑餓引還. < 夫>帥師數千騎, 追之, 戰於<坐原>, <漢>軍大敗, 匹馬不反. 王大悅, 賜<答夫><坐原>及<質山>, 爲食邑. 十五年秋九月卒, 年百十三歲. 王自臨慟, 罷朝七日, 以禮葬於<質山>, 置守墓二十家.
한 나라 사람들이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장수와 졸병들이 굶주렸으므로 돌아갔다. 답부가 수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좌원에서 교전하였는데, 한 나라 군사가 대패하여 단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을 하사하여 그의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그가 15년 가을 9월에 죽으니 나이가 113세였다. 왕이 직접 가서 애통해 하며 7일 간 조회를 금하였으며, 예를 갖추어 질산에 장사하고 묘지기 20가를 두었다.
<奈解>尼師今之子.[或云, 角干<水老>之子也.] <助賁王>二年七月, 以伊 爲大將軍, 出討<甘文國>, 破之, 以其地爲郡縣. 四年七月, <倭>人來侵, <于老>逆戰於<沙道>, 乘風縱水{火} , 焚賊戰艦, 賊溺死且盡. 十五年正月, 進爲舒弗耶{舒弗邯} 兼知兵馬事. 十六年, (+冬十月) <高句麗>侵北邊, 出擊之, 不克, 退保<馬頭柵>. 至夜, 士卒寒苦, <于老>躬行勞問, 手燒薪 { } , 暖熱之, 群心感喜, 如夾 . <沽解王{沾解王}> 在位, <沙梁伐國>舊屬我, 忽背而歸<百濟>, <于老>將兵往討滅之.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
석 우로는 나해 이사금의 아들이다.[혹은 각간 수로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조분왕 2년 7월에 이찬으로서 대장군이 되어 감문국을 토벌하여 이를 격파하고 그 지역을 군현으로 만들었다. 4년 7월에 왜인이 침략해오자 우로가 사도에서 역습하였다. 그가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질러 적의 전함을 불태우자 적들은 물로 뛰어들어 모두 죽었다. 그는 15년 정월에 서불한으로 승급되고 동시에 병마사도 겸하였다. 16년,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므로 우로가 이를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퇴각하여 마두책을 지켰다. 밤에 군사들이 몹시 추워하므로 우로가 직접 다니면서 위로하고, 직접 불을 피워 따뜻하게 해주니 여러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 기쁘게 느껴 마치 솜을 두르고 있는 것 같이 여겼다. 첨해왕이 왕위에 있을 때, 이전부터 우리에게 속해있던 사량벌국이 갑자기 배반하여 백제로 투항하므로, 우로가 군사를 거느리고 그를 토벌하여 멸해버렸다.
○七年癸酉, <倭國>使臣<葛那古{葛耶古}> 在館. <于老>主之, 與客戱言: "早晩, 以汝王爲鹽奴, 王妃爲 婦." <倭>王聞之怒, 遣將軍<于道朱君>, 討我, 大王出居于<柚村>. <于老>曰: "今玆之患, 由吾言之不愼, 我其當之." 遂抵<倭>軍, 謂曰: "前日之言, 戱之耳, 豈意興師至於此耶." <倭>人不答, 執之, 積柴置其上, 燒殺之乃去. <于老>子, 幼弱不能步, 人抱以騎而歸, 後爲<訖解>尼師今. <未鄒王{味鄒王}> 時, <倭>國大臣來聘, <于老>妻請於國王, 私饗<倭>使臣. 及其泥醉, 使壯士曳下庭焚之, 以報前怨. <倭>人忿, 來攻<金城>, 不克引歸.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記』 目錄, 新羅本紀.
7년 계유에 왜국 사신 갈나고가 사관에 와 있었다. 우로가 주인처럼 행세하며 손님에게 다음과 같은 농담을 건넸다. "조만간에 너의 국왕을 염전의 노비로 만들고, 너의 왕비는 취사부로 만들겠다." 왜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장군 우도주군을 보내 우리를 공격하자 대왕이 유촌에 나가 있었다. 우로가 말했다. "지금의 환란은 제가 말을 조심하지 않은 데에서 비롯된 것이니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우로는 마침내 왜군에게 가서 말하기를 "전일에 한 말은 농담일 뿐이었는데, 이렇게 군사를 일으킬 줄이야 어찌 뜻하였으랴?"라 하니 왜인이 대답을 하지 않고 그를 붙잡아 장작을 쌓아 그 위에 얹어 놓고 불태워 죽인 다음 가버렸다.
우로의 아들은 어려서 몸이 약한 탓에 걸음을 걷지 못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항상 그를 안아다가 말에 태워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는 후에 흘해 이사금이 되었다. 미추왕 때 왜국 대신이 예방하여 왔었는데 우로의 처는 국왕에게 청하여 왜국 사신을 개인적으로 대접할 기회를 얻었다. 왜국의 사신이 흠뻑 술에 취하였을 때, 그녀는 장사로 하여금 그를 뜰에 내려놓고 불에 태워 전날의 원수를 갚았다. 왜인들이 분개하여 금성에 침공하여 왔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論曰: <于老>爲當時大臣, 掌軍國事, 戰必克, 雖不克, 亦不敗, 則其謀策必有過人者. 然以一言之悖, 以自取死, 又令兩國交兵, 其妻能報怨, 亦變而非正也. 若不爾者, 其功業, 亦可錄也.
저자의 견해 : 우로가 당시의 대신으로서, 군국의 사무를 맡아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또한 이기지 못하더라도 패하지는 않았으니, 그의 모책이 틀림없이 남보다 뛰어난 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말 한 마디를 잘못함으로써 스스로 죽음의 길로 들어섰고, 또한 두 나라 사이에 싸움까지 일으켰다. 그의 아내가 원수를 갚을 수 있었으나 이것도 역시 변칙이요 올바른 길은 아니었다. 만약 이러하지 않았다면 그의 공적도 기록에 남길 만하였다.
[或云<毛末>.], 始祖<赫居世>之後, <婆娑>尼師今五世孫. 祖, <阿道>葛文王; 父, <勿品>波珍 . <堤上>仕爲< 良州>干. 先是, <實聖王>元年壬寅, 與<倭國>講和, <倭>王請以<奈勿王>之子<未斯欣>爲質. 王嘗恨<奈勿王>使己質於<高句麗>, 思有以釋憾於其子, 故不拒而遣之. 又十一年王子{壬子} , <高句麗>, 亦欲得<未斯欣>之兄<卜好>爲質, 大王又遣之. 及<訥祗王>卽位, 思得辯士, 往迎之. 聞<水酒村>千{干} <伐寶靺>·<一利村>干<仇里 >·<利伊村>干<波老>三人有賢智, 召問曰: "吾弟二人, 質於<倭>·<麗>二國, 多年不還. 兄弟之故, 思念不能自止, 願使生還, 若之何而可?" 三人同對曰: "臣等聞< 良州>千{干} <堤上>, 剛勇而有謀, 可得以解殿下之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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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제상[혹은 모말이라고도 한다.]은 시조 혁거세의 후손이요, 파사 이사금의 5세 손이고, 조부는 아도 갈문왕이었으며, 아버지는 물품 파진찬이었다. 제상은 벼슬길에 나아가 삽량주 간이 되었다.
이 보다 앞서 실성왕 원년 임인에 왜국과 화친을 맺을 때, 왜왕이 나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인질로 요구하였다. 실성왕은 일찌기 나물왕이 자기를 고구려에 인질로 가게 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여 그 아들에게 분풀이를 하고자 했기 때문에, 왜왕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고 그를 인질로 보내게 하였다. 또한 11년 임자에 고구려에서도 미사흔의 형 복호를 인질로 요구하여 대왕이 또한 그를 보냈다. 눌지왕이 즉위하자 변사를 구하여 그들을 데려 오기로 하였다. 대왕은 수주촌 간 벌보말과 일리촌 간 구리내와 이이촌 간 파로 등 세 사람이 어질고 지혜롭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불러 물었다. "나의 아우 두 사람이 왜국과 고구려 두 나라에 인질로 가서 수 년 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형제인 까닭에 보고 싶은 생각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는지라 그들이 살아서 돌아오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세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하였다. "신들이 듣건대 삽량주 간 제상은 사람이 굳세고 용감하며 지모가 있다 하니, 그가 족히 전하의 근심을 풀어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於是, 徵<堤上>使前, 告三臣之言, 而請行. <堤上>對曰: "臣雖愚不肖, 敢不唯命 {祗} 承." 遂以聘禮入<高句麗>, 語王曰: "臣聞交隣國之道, 誠信而已. 若交質子, 則不及五覇, 誠未{末} 世之事也. 今, 寡君之愛第{弟} 在此, 殆將十年. 寡君以 在原之意, 永懷不已. 若大王惠然歸之, 則若九牛之落一毛, 無所損也. 而寡君之德大王也, 不可量也, 王其念之." 王曰: "諾." 許與同歸. 及歸國, 大王喜慰曰: "我念二弟, 如左右臂, 今只得一臂, 奈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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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제상을 불러 앞으로 오게 하고 세 신하의 말을 전하며 고구려로 가주기를 요청하니 제상이 대답하였다. "신이 비록 어리석고 불초하나 어찌 감히 명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제상은 드디어 빙례를 갖추고 고구려로 들어가서 왕에게 말했다. "제가 듣건대 이웃 나라와 교제하는 도는 성실과 신의뿐이라고 합니다. 만일 인질을 서로 주고 받는다면 이는 오패만도 못한 것이니 실로 말세의 행위가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임금의 사랑하는 아우가 여기에 있은 지 거의 10년이 됩니다. 우리 임금은 척령이 들판에 있는 듯이 영영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대왕이 고맙게도 그를 돌려 보내 주신다면, 이는 마치 구우일모 격으로서 대왕에게는 손해될 것이 없으나, 우리 임금은 한없이 대왕의 유덕함을 칭송하게 될 것입니다. 왕께서는 이 점을 유념하여 주소서!" 왕은 "좋다"고 하면서 그들이 함께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들이 귀국하자 대왕은 기뻐하고 위로하면서 말했다. "나는 두 아우 생각하기를 좌우의 두 팔과 같이 하는데, 이제 다만 한 팔만 찾았으니 어찌 해야 하는가?"
○<堤上>報曰: "臣雖奴才, 旣以身許國, 終不辱命. 然, <高句麗>大國, 王亦賢君, 是故, 臣得以一言悟之. 若<倭>人, 不可以口舌諭, 當以詐謀, 可使王子歸來. 臣適彼, 則請以背國論使彼聞之." 乃以死自誓, 不見妻子, {祗} <粟浦>, 汎舟向<倭>. 其妻聞之, 奔至浦口, 望舟大哭曰: "好歸來." <堤上>回顧曰: "我將命入敵國, 爾莫作再見期." 遂徑入<倭國>, 若叛來者, <倭>王疑之. <百濟>人, 前入<倭>, 讒言: <新羅>與<高句麗>謀侵王國, <倭>遂遣兵, 邏戍<新羅>境外. 會<高句麗>來侵, 幷擒殺<倭>邏人, <倭>王乃以<百濟>人言爲實. 又聞<羅>王囚<未斯欣>·<堤上>之家人, 謂<堤上>實叛者.
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제상이 대답하였다. "신이 비록 재주가 노둔하오나 이미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끝까지 명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대국이고 왕도 역시 어진 임금이었기 때문에 신이 한 마디 말로써 그를 깨우칠 수 있었지만, 왜인들은 말로써 달랠 수 없으니 속임수로써 왕자를 돌아오게 해야합니다. 신이 저 곳에 가거든, 신이 반역하였다는 죄를 씌우고, 이 소식이 저들의 귀에 들어가게 하소서." 제상은 이에 죽기를 맹세하고 처자도 만나지 않은 채 율포로 가서 배를 타고 왜로 향하였다. 그의 아내가 이 소문을 듣고 포구로 달려가 배를 바라보면서 대성통곡하며 말했다. "잘 다녀 오시오!" 제상이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내가 명을 받들고 적국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그대는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지 마시오." 라 하고, 드디어 그 길로 곧장 왜국에 들어갔다. 그는 마치 모반하다가 그곳에 온 것처럼 행동하였으나 왜왕이 그를 의심하였다. 그런데 그보다 얼마 전에 백제인이 왜국에 가서 '신라와 고구려가 모의하여 왕의 나라를 침공하려 한다'고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왜국에서는 군사를 보내 신라 국경 밖에서 염탐하게 하였다. 그 때 마침 고구려가 침입하여 왜의 염탐꾼을 모두 잡아 죽였다.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왜왕은 백제인의 말을 사실로 여겼으며, 또한 신라왕이 미사흔과 제상의 가족을 가두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자, 제상이 정말 배반자라고 믿게 되었다.
○於是, 出師將, 襲<新羅>, 兼差<堤上>與<未斯欣>爲將, 兼使之鄕導. 行至海中山島, <倭>諸將密議, 滅<新羅>後, 執<堤上>·<未斯欣>妻 以還. <堤上>知之, 與<未斯欣>乘舟遊, 若捉魚鴨者, <倭>人見之, 以謂無心喜焉. 於是, <堤上>勸<未斯欣>潛歸本國. <未斯欣>曰: "僕奉將軍如父, 豈可獨歸." <堤上>曰: "若二人俱發, 則恐謀不成." <未斯欣>抱<堤上>項, 泣辭而歸. <堤上>獨眠室內, 晏起, 欲使<未斯欣>遠行. 諸人問: "將軍何起之晩?" 答曰: "前日, 行舟勞困, 不得夙興." 及出, 知<未斯欣>之逃, 遂縛<堤上>, 行舡追之. 適, 煙霧晦冥, 望不及焉.
이에 왜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를 습격하기로 하고, 제상과 미사흔을 장수 겸 향도로 삼았다. 행렬이 바다에 있는 산으로 된 섬에 이르자 왜의 여러 장수들이, 신라를 멸한 뒤에는 제상과 미사흔의 처자를 잡아 오자고 은밀히 의논하였다. 제상이 이를 알고 미사흔과 함께 배를 타고 놀면서 마치 물고기와 오리를 잡는 것 같이 행동하니, 왜인들은 이것을 보고 그들에게 다른 마음이 없다고 좋아하였다. 이 때 제상이 미사흔에게 슬며시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미사흔은 "내가 장군을 아버지처럼 받들고 있는데 어찌 나 혼자 돌아가겠는가?"라고 대답했다. 제상이 말했다. "만약 두 사람이 함께 떠난다면 일이 성사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미사흔은 제상의 목을 안고 울면서 하직하고 돌아왔다. 제상은 방안에서 혼자 자다가 늦게야 일어났다. 이는 미사흔으로 하여금 멀리 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장군은 왜 늦게 일어나느냐"고 물으니, 제상은 "전 날 배를 탔더니 피곤하여 일찍 일어날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그가 밖으로 나오자 왜인들은 마침내 미사흔이 도망간 것을 알고 제상을 결박해 놓은 채 배를 풀어 추격하였다. 때마침 안개가 대단히 짙게 끼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歸<堤上>於王所, 則流於<木島>, 未幾, 使人以薪火燒爛支體, 然後, 斬之. 大王聞之哀慟, 追贈大阿 , 厚賜其家, 使<未斯欣>, 娶其<堤上>之第二女爲妻, 以報之. 初, <未斯欣>之來也, 命六部遠迎之, 及見, 握手相泣. 會兄弟置酒極娛, 王自作歌舞, 以宣其意. 今, 鄕樂<憂息曲>, 是也.
왜인은 제상을 왕의 처소로 돌려보내고, 곧바로 목도로 유배시켰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장작불로 온 몸을 태운 뒤에 목을 베었다. 대왕은 이 소문을 듣고 애통해 하며 대아찬을 추층하고, 그의 가족들에게 후하게 물건을 하사하고, 미사흔으로 하여금 제상의 둘째 딸을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함으로써 은혜에 보답케 하였다. 처음 미사흔이 돌아올 때 대왕은 6부에 명령하여 멀리 나가서 그를 맞게 하였으며, 그를 만나게 되자 손을 잡고 서로 울었다. 형제들이 모여 술자리를 마련하고 마음껏 즐겼으며, 왕이 가무를 스스로 지어 자신의 뜻을 나타냈는데, 지금 향악 가운데의 우식곡이 그것이다.
<沙梁部>人也. 父, <武殷>阿干. <貴山>少與部人< 項>爲友. 二人相謂曰: "我等期與士君子遊, 而不先正心修身, 則恐不免於招辱, 聞道於賢者之側乎." 時, <圓光>法師, 入<隋>遊學, 還居<加悉寺>, 爲時人所尊禮.
귀산은 사량부 사람으로서 아버지는 무은 아간이다. 귀산은 젊어서 같은 부에 있는 사람 추항을 벗으로 삼았다. 두 사람은 서로 말했다. "우리가 선비나 군자와 함께 교유하기를 기대하면서도,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지 않는다면 아마도 욕을 당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어찌 어진 사람 옆에서 도를 배우지 않겠는가?" 당시에 원광 법사가 수 나라에 유학을 다녀와서 가실사에 있었는데 그 때 사람들이 그를 높이 예우하였다.
○<貴山>等詣門, 衣進告曰: "俗士 蒙, 無所知識, 願賜一言, 以爲終身之誡." 法師曰: "佛戒有菩薩戒, 其別有十, 若等爲人臣子, 恐不能堪. 今有世俗五戒, 一曰事君以忠, 二曰事親以孝, 三曰交友以信, 四曰臨戰無退, 五曰殺生有擇, 若等, 行之無忽!"
귀산 등이 그 거처에 가서 옷자락을 여미고 "속세의 선비가 어리석고 몽매하여 아는 것이 없사오니, 한 말씀 해주시어 평생의 계명으로 삼게 해주소서"라고 공손히 말하였다. 법사가 말했다. "불가의 계율에 보살계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열 가지로 구별되어 있으나 그대들이 남의 신하로서는 아마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세속오계가 있으니, 첫째는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는 것이요, 둘째는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는 것이요, 셋째는 벗을 신의로 사귀는 것이요, 넷째는 전쟁에 임하여 물러서지 않는 것이요, 다섯째는 살아있는 것을 죽일 때는 가려서 죽여야 한다는 것이니, 그대들은 이를 실행함에 소홀치 말라!"
○<貴山>等曰: "他則旣受命矣, 所謂殺生有擇, 獨未曉也." 師曰: "六齋日·春夏月不殺, 是擇時也. 不殺使畜, 謂馬牛 犬. 不殺細物, 謂肉不足一 , 是擇物也. 如此, 唯其所用, 不求多殺, 此可謂世俗之善戒也." <貴山>等曰: "自今已後, 奉以周旋, 不敢失墜."
귀산 등이 말했다. "다른 것은 말씀대로 하겠습니다만, 소위 살아있는 것을 죽일 때는 가려서 죽여야 한다는 말씀만은 잘 모르겠습니다." 법사가 대답했다. "육재일과 봄 여름에는 살생치 아니한다는 뜻이니, 이는 죽이는 시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가축은 죽이지 않는 법이니, 이는 말, 소, 닭, 개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말이며, 하찮은 것을 죽여서는 안되나니, 고기 한 점도 되지 못하는 것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죽이는 대상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오직 소용되는 경우에만 죽이고 그 이상은 죽이지 말 것이니, 이는 세속의 좋은 계율이라고 할 만하다." 귀산 등이 말했다. "지금부터는 이 가르침을 받들어 두루 실행하고, 감히 어기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眞平王>< 福{建福}> &十九{二十四} 年壬戌秋八月, <百濟>大發兵, 來圍<阿莫[一作莫{暮} .](+山) 城>. 王使將軍波珍干<乾品>·<武梨屈>·<伊梨伐>·級干<武殷>·<比梨耶>等, 領兵拒之, <貴山>·< 項>, 幷以少監赴焉. <百濟>敗, 退於<泉山>之澤, 伏兵以待之. 我軍進擊, 力困引還. 時, <武殷>爲殿, 立於軍尾, 伏猝出, 鉤而下之. <貴山>大言曰: "吾嘗聞之師曰: '士當軍無退', 豈敢奔北乎." 擊殺賊數十人, 以己馬出父, 與< 項>揮戈力鬪. 諸軍見之奮擊, 橫尸滿野, 匹馬隻輪, 無反者. <貴山>等金瘡滿身, 半路而卒. 王與群臣, 迎於<阿那>之野, 臨尸痛哭, 以禮殯葬, 追賜位<貴山>奈麻, < 項>大舍.
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三國史節要』.
진평왕 건복 24년 임술 가을 8월에 백제가 대대적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아막[막(莫)을 영(英)으로도 쓴다.]성을 포위했다. 왕은 장군 파진간 건품, 무리굴, 이리벌, 급간 무은, 비리야 등에게 군사를 주어 이를 방어하게 하였다. 이 때 귀산과 추항은 소감의 관직으로 함께 전선으로 나갔다. 그 때 백제가 패하여 천산의 연못으로 물러가 군사를 매복시킨 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군사는 진격하다가 힘이 다하여 돌아오고 있었다. 이 때 무은은 후군이 되어 군대의 맨 뒤에 오고 있었는데, 복병이 갑자기 튀어나와 갈고리로 그를 잡아당겨 떨어뜨렸다. 귀산이 "내 일찌기 스승에게 들으니 군사는 적군을 만나 물러서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찌 감히 패하여 달아날 수 있으랴?"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적을 쳐서 수십 명을 죽인 다음 자기 말에 아버지를 태워 보내고, 추항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힘껏 싸웠다. 여러 군사들이 이를 보고 분발하여 진격하니,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메우고 말 한 필, 수레 한 채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귀산 등은 온 몸이 창칼에 찔려 돌아오는 도중에 죽었다. 왕은 여러 신하들과 함께 아나의 들판에서 그들을 맞이하였다. 왕은 그들의 시체 앞으로 나아가 통곡하고,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으며, 귀산에게는 나마를, 추항에게는 대사를 각각 추증하였다.
<溫達 온달>
○<溫達>, <高句麗><平岡王>時人也. 容貌龍鐘可笑, 中心則 {曉 / /曄 } {然} . 蒙{家} 甚貧, 常乞食以養母, 破衫弊履, 往來於市井間, 時人目之爲<愚溫達>. <平岡王>少女兒好啼, 王戱曰: "汝常啼 我耳, 長必不得爲士大夫妻, 當歸之<愚溫達>." 王每言之.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북한본』.李丙燾.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今西龍.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 때 사람이다. 얼굴이 험악하고 우스꽝스럽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밝았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하였으며, 떨어진 옷과 신발을 걸치고 시정간을 왕래하여 당시 사람들이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다. 평강왕의 어린 딸이 곧잘 울었으므로 왕이 농담으로 "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 틀림없이 사대부의 아내가 못되고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가야 되겠다"라고 하였다. 왕은 그녀가 울 때마다 이런 말을 하였다.
○及女年二八, 欲下嫁於<上部>高氏, 公主對曰: "大王常語, 汝必爲<溫達>之婦, 今何故改前言乎? 匹夫猶不欲食言, 況至尊乎. 故曰: '王者無戱言' 今大王之命, 謬矣, 妾不敢祗承." 王怒曰: "汝不從我敎, 則固不得爲吾女也, 安用同居? 宜從汝所適矣."
딸의 나이 16세가 되어 왕이 딸을 상부 고씨에게 시집보내려 하니 공주가 대답하기를 "대왕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되리라고 하셨는데, 오늘 무슨 까닭으로 전일의 말씀을 바꾸십니까? 필부도 거짓말을 하려 하지 않는데 하물며 지존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임금은 농담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대왕의 명령이 잘못되었으므로 소녀는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화를 내어 말했다. "네가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정말로 내 딸이 될 수 없다. 어찌 함께 살 수 있겠느냐? 너는 너 갈대로 가는 것이 좋겠다."
○於是, 公主以實{寶} 釧數十枚繫 後, 出宮獨行. 路遇一人, 問<溫達>之家, 乃行至其家, 見盲老母, 近前拜, 問其子所在. 老母對曰: "吾子貧具{且} 陋, 非貴人之所可近. 今聞子之臭, 芬馥異常, 接子之手, 柔滑如綿, 必天下之貴人也. 因誰之 , 以至於此乎? 惟我息, 不忍饑, 取楡皮於山林." 久而未還, 公主出行, 至山下, 見<溫達>負楡皮而來. 公主與之言懷, <溫達>悖然曰: "此非幼女子所宜行, 必非人也, 狐鬼也, 勿迫我也!" 遂行不顧. 公主獨歸, 宿柴門下, 明朝, 更入, 與母子備言之. <溫達>依違未決, 其母曰: "吾息至陋, 不足爲貴人匹, 吾家至 , 固不宜貴人居." 公主對曰: "古人言: '一斗粟猶可 , 一尺布猶可縫', 則苟爲同心, 何必富貴然後, 可共乎?" 乃賣金釗{釧} , 買得田宅·奴婢·牛馬·器物, 資用完具.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이에 공주는 보물 팔찌 수십 개를 팔꿈치에 걸고 궁궐을 나와 혼자 길을 떠났다.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나 온달의 집을 물어 그의 집까지 찾아갔다. 그리고 눈먼 노모를 보고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절을 하며 아들이 있는 곳을 물었다. 늙은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내 아들은 가난하고 보잘 것이 없으니, 귀인이 가까이 할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보통이 아니고, 그대의 손을 만지니 부드럽기가 솜과 같으니, 필시 천하의 귀인인 듯합니다. 누구의 속임수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다 못하여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려고 산 속으로 간 지 오래인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공주가 그 집을 나와 산 밑에 이르렀을 때,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것을 보았다. 공주가 그에게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하니 온달이 불끈 화를 내며 말했다. "이는 어린 여자가 취할 행동이 아니니 필시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귀신일 것이다.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 온달은 그만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공주는 혼자 돌아와 사립문 밖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에 다시 들어가서 모자에게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온달이 우물쭈물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그의 어머니가 말했다. "내 자식은 비루하여 귀인의 짝이 될 수 없고, 내 집은 몹시 가난하여 정말로 귀인이 거처할 수 없습니다." 공주가 대답하였다. "옛 사람의 말에 '한 말의 곡식도 방아를 찧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도 꿰맬 수 있다.'고 하였으니 만일 마음만 맞는다면 어찌 꼭 부귀해야만 같이 살겠습니까?" 말을 마치고 공주가 금팔찌를 팔아서 전지, 주택, 노비, 우마, 기물 등을 사들이니 살림 용품이 모두 구비되었다.
○初, 買馬, 公主語<溫達>曰: "愼勿買市人馬, 須擇國馬病瘦而見放者, 而後換之." <溫達>如其言. 公主養飼甚勤, 馬日肥且壯. <高句麗>常以春三月三日, 會獵<樂浪>之丘, 以所獲猪鹿, 祭天及山川神. 至其日, 王出獵, 群臣及五部兵士皆從. 於是, <溫達>以所養之馬隨行, 其馳騁, 常在前, 所獲亦多, 他無若者. 王召來, 問姓名, 驚且異之.
처음 말을 살 때 공주가 온달에게 말하기를 "부디 시장의 말을 사지 말고, 나라에서 쓸모가 없다고 판단하여 백성에게 파는 말을 선택하되, 병들고 수척한 말을 골라 사오세요." 라고 하니 온달이 그대로 말을 사왔다. 공주는 부지런히 말을 길렀다. 말은 날로 살찌고 건장해졌다. 고구려에서는 언제나 봄 3월 3일을 기하여 낙랑 언덕에 모여서 사냥하여 잡은 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의 신령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 날이 되어 왕이 사냥을 나가는데 여러 신하와 5부의 군사들이 모두 수행하였다. 이 때 온달도 자기가 기르던 말을 타고 수행하였는데, 그는 항상 앞장 서서 달리고, 또한 포획한 짐승도 많아서 다른 사람이 그를 따를 수 없었다. 왕이 불러서 성명을 듣고 놀라며 기이하게 여겼다.
○時, <後周><武帝>出師伐<遼東>, 王領軍逆戰於<拜山{肄山}> 之野. <溫達>爲先鋒, 疾鬪斬數十餘級, 諸軍乘勝奮擊大克. 及論功, 無不以<溫達>爲策{第} 一. 王嘉歎之曰: "是吾女壻也." 備禮迎之, 賜爵爲大兄. 由此, 寵榮尤渥, 威權日盛. 及<陽岡王{ 陽王}> 卽位, <溫達>奏曰: "惟<新羅>, 割我<漢北>之地, 爲郡縣, 百姓痛恨, 未嘗忘父母之國. 願大王不以愚不肖, 授之以兵, 一往必還吾地." 王許焉. 臨行誓曰: "<鷄立峴>·<竹嶺>已西, 不歸於我, 則不返也." 遂行, 與<羅>軍戰於<阿旦城>之下, 爲流矢所中, 路{ } 而死. 欲葬, 柩不肯動, 公主來撫棺曰: "死生決矣, 於乎, 歸矣." 遂擧而 . 大王聞之悲慟.
三國史記卷第四十五.
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이 때, 후주의 무제가 군사를 출동시켜 요동을 공격하자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 들에서 맞아 싸웠다. 그 때 온달이 선봉장이 되어 용감하게 싸워 수십여 명의 목을 베니, 여러 군사들이 이 기세를 타고 공격하여 대승하였다.
공을 논의할 때 온달을 제일이라고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왕이 그를 가상히 여기어 감탄하기를 "이 사람은 나의 사위다"라 하고, 예를 갖추어 그를 영접하고 그에게 작위를 주어 대형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그에 대한 왕의 은총이 더욱 두터워졌으며, 위풍과 권세가 날로 성하여졌다. 양강왕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기를 "지금 신라가 우리의 한북 지역을 차지하여 자기들의 군현으로 만들었으므로, 그곳의 백성들이 통탄하며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 저를 어리석고 불초하다고 여기지 마시고 군사를 주신다면 단번에 우리 땅을 도로 찾겠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그가 길을 떠날 때 맹세하였다. "계립현과 죽령 서쪽의 땅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그는 드디어 진격하여 아단성 밑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그를 장사지내려 하였으나 영구가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면서 "사생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아! 돌아가소서!"라 말하고, 마침내 영구를 들어 하관하였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비통해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45 끝
三國史記卷第四十六 삼국사기 권 제 46
列傳第六 <强首>·<崔致遠>·<薛聰>.
열전제 6 강수. 최 치원. 설 총.
○<强首>, <中原京><沙梁>人也. 父<昔諦>奈麻. 其母, 夢見人有角, 而妊身反{及} 生, 頭後有高骨. <昔諦>以兒就當時所謂賢者, 問曰: "此兒頭骨如此, 何也?" 答曰: "吾聞之, <伏羲>虎形, <女 >蛇身, <神農>牛頭, <皇陶{皐陶}> 馬口, 則聖賢同類, 而其相亦有不凡者. 又觀兒首有 子, 於相法, 面 無好, 頭 無惡, 則此必奇物乎!"
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강수는 중원경 사량 사람으로 아버지는 석 체 나마이다. 그 어머니가 꿈에 뿔 달린 사람을 보고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머리 뒷부분에 불거진 뼈가 있었다. 석 체가 이 아이를 안고 당시의 현자라고 알려진 사람에게 가서 "아이의 두골이 이렇게 생겼으니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그가 대답하기를 "내가 들으니 복희씨는 범의 형상이요, 여와씨는 뱀의 몸이요, 신농씨는 소의 머리요, 고요는 말의 입이라 하였으니, 성현은 동류지만 그 상이 역시 범상치 않은 바가 있다. 또한 이 아이를 보니 머리에 검은 사마귀가 있는데 상법에 얼굴의 사마귀는 좋지 않지만 머리의 사마귀는 나쁘지 않다고 하였으니, 이는 기이한 아이임에 틀림없도다."라고 하였다.
○父還謂其 {妻} 曰: "爾子非常兒也, 好養育之, 當作將來之國士也." 及壯, 自知讀書, 通曉義理. 父欲觀其志, 問曰: "爾學佛乎? 學儒乎?" 對曰: "愚聞之, 佛世外敎也. 愚人間人, 安用學佛爲? 願學儒者之道." 父曰: "從爾所好." 遂就師讀<孝經>·<曲禮>·<爾雅>·<文選>. 所間{聞} 雖淺近, 而所得愈高遠, 魁然爲一時之傑. 遂入仕歷官, 爲時聞人.
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顯宗實錄字本』.
아버지가 돌아와 그 아내에게 이르기를 "당신 아들이 보통 아이가 아니니 잘 길러서 장차 국사가 되게 해야겠소"라고 하였다. 아이가 장성하자 스스로 글을 읽을 줄 알고 문장의 뜻에 통달하였다. 아버지가 그의 뜻을 시험해 보기 위하여 "너는 불도를 배우겠느냐 유도를 배우겠느냐?"라고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불교는 세상 밖의 종교라 합니다. 저는 세속에 사는 사람인데 불도는 배워서 무엇 하겠습니까? 저는 유가의 도를 배우고 싶습니다." 이를 듣고 아버지가 "너 좋을 대로 하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스승에게 나아가 [효경], [곡례], [이아], [문선]을 읽었다. 배운 것은 비록 적었으나 깨달은 바는 고원하여, 당대의 걸출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마침내 벼슬길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역임하여 당시에 소문난 사람이 되었다.
○<强首>常{嘗} 與<釜谷>冶家之女野合, 情好頗篤. 及年二十歲, 父母媒邑中之女有容行者, 將妻之, <强首>辭不可以再娶. 父怒曰: "爾有時名, 國人無不知, 而以微者爲偶, 不亦可恥乎." <强首>再拜曰: "貧且賤非所羞也, 學道而不行之, 誠所羞也. 嘗聞古人之言曰: '糟糠之妻, 不下堂; 貧賤之交不可忘.' 則賤妾所不忍棄者也."
趙炳舜. 『三國史節要』.
강수가 일찌기 부곡의 대장장이 딸과 야합하여 정이 매우 돈독하였다. 나이 20세가 되자 부모가 고을의 처녀들 가운데 용모와 행실이 좋은 자를 중매하여 아내로 삼게 하려 했다. 그러나 강수는 두 번 장가들 수 없다고 하여 이를 사양하였다. 아버지가 노하여 말했다. "너는 세상에 이름이 나서 나라 사람들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미천한 자를 배필로 삼는다면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강수가 재배하고 말했다. "가난하고 천한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도를 배우고도 실행하지 않는 것이 정말 부끄러운 것입니다. 일찌기 듣건대 옛 사람의 말에 이르기를 '조강지처는 쫓아내지 아니하고, 빈천할 때의 친구는 잊어서는 안된다'고 하였으니, 천한 아내라고 해서 차마 버릴 수는 없습니다."
○及<太宗大王>卽位, 唐使者至, 傳詔書. 其中有難讀處, 王召問之. 在王前一見說釋無疑滯. 王驚喜, 恨相見之晩, 問其姓名. 對曰: "臣本<任那><加良>人, 名<字頭{牛頭}> ." 王曰: "見卿頭骨, 可稱<强首>先生." 使製廻謝<唐>皇帝詔書表. 文工而意盡, 王益奇之, 不稱名, 言<任生>而已. <强首>未嘗謀生, 家貧怡如也. 王命有司, 歲賜新城租一百石. <文武王>曰: "<强首>文章自任, 能以書翰致意於<中國>及<麗>·<濟>二邦, 故能結好成功. 我先王請兵於<唐>, 以平<麗>·<濟>者, 雖曰武功, 亦由文章之助焉. 則<强首>之功, 豈可忽也?" 授位沙 , 增俸歲租二百石.
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태종대왕이 즉위하자 당의 사자가 와서 조서를 전하였다. 그 가운데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왕이 그를 불러 물었다. 그가 왕 앞에서 그 부분을 한 번 보고는 의심스럽거나 막히는 데 없이 설명하고 해석하였다.
왕이 놀라고 기뻐하며 서로 만남이 늦은 것을 한탄하고 그의 성명을 물었다. 그가 대답하기를 "신은 본래 임나 가량 사람이며 이름은 자두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경의 두골을 보니 강수 선생이라고 부를 만하다"라 하고, 당 나라 황제의 조서에 감사하는 회답의 표를 짓게 하였다. 그의 문장이 세련되고 뜻이 깊었으므로 왕이 더욱 그를 기특히 여겨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임생이라고만 하였다. 강수가 일찌기 생계를 도모하지 않아 집안이 가난하여도 태연하므로 왕이 유사에게 명하여 해마다 신성에서 거두는 곡식 일백 섬을 주게 하였다. 문무왕이 말하기를 "강수가 문장짓는 일을 스스로 맡아서, 편지로써 중국 및 고구려, 백제 두 나라에 의사를 잘 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우호를 맺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우리 선왕이 당에 청병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것이 비록 무공이기는 하지만 문장의 도움도 있었으니 강수의 공을 어찌 소홀히 하겠는가?"라 하고, 그에게 사찬의 작위를 주고 봉록을 매년 곡식 이백 석으로 올려 주었다.
○至<神文大王>時卒, 葬事官供其賻. 贈衣物匹段尤多, 家人無所私, 皆歸之佛事. 其妻之{乏} 於食, 欲還鄕里. 大臣聞之, 請王賜租百石. 妻辭曰: "妾, 賤者也, 衣食從夫, 受國恩多矣. 今旣獨矣, 豈敢再辱厚賜乎?" 遂不受而歸. <新羅>古記曰: "文章則<强首>·<帝文>·<守眞>·<良圖>·<風訓>·<骨 {骨番}> ." <帝文>已下事逸, 不得立傳.
今西龍.『북한본』.
신문대왕 때에 그가 죽어 장사를 지낼 때 관청에서 부의를 주었는데, 옷과 피륙이 아주 많았으나 집안 사람들이 사사로이 가지지 않고 모두 불사에 쓰도록 보내주었다. 그의 아내가 먹을 것이 없어서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므로 대신들이 이 소식을 듣고 왕에게 청하여 조 1백 석을 하사케 하였다. 그의 아내는 사양하며 말했다. "첩은 천한 몸으로 의식을 남편에게 의지하여 나라의 은혜를 많이 입었습니다. 지금은 이미 홀 몸이 되었는데 어찌 감히 더 이상 나라의 후한 하사를 받겠습니까?" 그녀는 끝내 이를 받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신라 고기에 "문장은 강수, 제문, 수진, 양도, 풍훈, 골번이다"라고 하였는데, 제문 이하의 사람들은 사적이 유실되어 전을 만들 수 없다.
○<崔致遠>, 字<孤雲>[或云<海雲>.], 王京<沙梁部>人也. 史傳泯滅, 不知其世系. <致遠>少, 精敏好學. 至年十二, 將隨海舶入<唐>求學, 其父謂曰: "十年不第, 卽非吾子也, 行矣勉之!" <致遠>至<唐>追師, 學問無怠.
최 치원은 자가 고운[혹은 해운이라고도 한다.]이며 경주 사량부 사람이다. 사서가 인멸되어 그의 집안 계통은 알 수가 없다. 치원은 소년시절부터 성격이 세밀하고 민첩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나이 12세에 배를 타고 당에 들어가 유학을 하려할 때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10년이 되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가서 힘써 노력하라!" 치원은 당에 도착하여 스승을 따라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乾符>元年甲午, 禮部侍郞<裴瓚>下, 一擧及第, 調授<宣州>< 水>縣尉. 考績爲承務郞侍御史內供奉, 賜紫金魚袋. 時<黃巢>叛, <高騈>爲諸道行營兵馬都統以討之. <致遠>爲從事, 以姿{委} 書記之任, 其表狀書啓傳之至今. 及年二十八歲, 有歸寧之志, <僖宗>知之, <光啓>元年, 使將詔書來聘. 留爲侍讀, 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 . <致遠>自以西學多所得, 及來將行己志, 而衰季多疑忌, 不能容, 出爲<大山郡>大守{太守} .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顯宗實錄字本』.
건부 원년 갑오에 예부시랑 배 찬의 고시에서 단번에 급제하여 선주 율수 현위에 임명되었고, 치적의 고과를 통하여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이 되었으며, 자금어대를 받았다. 이 때 황 소가 반란을 일으켜, 고 병이 제도 행영 병마도통이 되어 이를 토벌하게 되었다. 그 때, 치원을 불러 종사로 삼아 서기의 임무를 맡겼는데, 그 표장과 서계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28세가 되자 귀국할 생각을 하고 있는데, 희종이 그의 뜻을 알고 광계 원년에 그로 하여금 조서를 가지고 내빙케 하였다. 그는 본국에 머물며 시독 겸 한림학사병부시랑지서서감이 되었다. 치원은 스스로 서쪽으로 유학하여 얻은 바가 많다고 생각하여, 돌아온 뒤에 자기의 뜻을 실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말세를 당하여 의심과 시기가 많아 이러한 생각이 용납되지 못하고 외직으로 나가 대산군 태수가 되었다.
○<唐><昭宗><景福>二年, 納旌節使兵部侍郞<金處誨>, 沒於海, 卽差< 城郡>大守{太守} <金峻>爲告奏使. 時<致遠>爲<富城郡>大守{太守} , {王} 召爲賀正使, 以比歲饑荒, 因之, 盜賊交午, 道梗不果行. 其後<致遠>亦嘗奉使如<唐>, 但不知其歲月耳. 故其文集有上大師{太師} 侍中狀云: "伏聞: 東海之外有三國, 其名<馬韓>·<卞韓>·<辰韓>. <馬韓>則<高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高麗>·<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 . <隋>皇失馭, 由於征<遼>. <貞觀>中, 我<唐><大宗{太宗}> 皇帝, 親統六軍渡海, 恭行天罰, <高麗>畏威請和, 文皇受降廻 . 此際我<武烈大王>, 請以犬馬之誠, 助定一方之難, 入<唐>朝謁, 自此而始. 後以<高麗>·<百濟>, 踵前造惡, <武烈七{武烈入 /武烈王 }>朝請爲鄕導. 至<高宗>皇帝<顯慶>五年, 勅<蘇定方>, 統十道强兵·樓舡萬隻, 大破<百濟>, 乃於其地, 置<扶餘>都督府, 招緝遺氓, { } 以<漢>官, 以臭味不同, 屢聞離叛, 遂徙其人於<河南>. <摠章>元年, 命英公<徐勣{李勣} >, 破<高句麗>, 置<安東>都督府. 至<儀鳳>三年, 徙其人於<河南>·< 右>. <高句麗>殘蘖類聚, 北依<大白山{太白山}> 下, 國號爲<渤海>. <開元>二十年, 怨恨天朝, 將兵掩襲<登州>, 殺刺史<韋俊>. 於是, <明>皇帝大怒, 命內史<高品>·<何行成>·大 卿{太僕卿} <金思蘭>, 發兵過海攻討, 仍就加我王<金>某, 爲正大尉{太尉} 持節充寧海軍事< 林州>大都督. 以冬深雪厚, <蕃>·<漢>苦寒, 勅命廻軍. 至今三百餘年, 一方無事, 滄海晏然, 此乃我<武烈大王>之功也. 今某儒門未{末} 學, 海外凡村{材} , 謬奉表章, 來朝樂土, 凡有誠懇, 禮合披陳. 伏見: <元和>十二年, 本國王子, <金張廉>風飄, 至<明州>下岸, 浙東某官, 發送入京. <中和>二年, 入朝使<金直諒>, 爲叛臣作亂, 道路不通, 遂於<楚州>下岸, 至<楊州>, 得知聖駕幸<蜀>. <高>大尉{太尉} 差都頭<張儉>, 監押送至<西川>. 已前事例分明. 伏乞: 大師{太師} 侍中, 俯降台恩, 特賜水陸券牒, 令所在供給舟舡, 熟食及長行驢馬草料, 幷差軍將, 監送至駕前." 此所謂太師侍中, 姓名亦不可知也.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今西龍.『북한본』.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당 소종 경복 2년에 납정절사 병부시랑 김 처회가 바다에 빠져 죽었으므로 곧 추성군 태수 김 준을 고주사로 임명하였다. 이 때 치원은 부성군 태수로 있다가 부름을 받아 하정사가 되었는데, 당 나라에 해마다 흉년이 들고, 이로 인하여 도적이 횡행하여 길이 막혔기 때문에 목적지에 도착하지는 못하였다. 그 뒤에도 치원은 당에 사신으로 간 일이 있었으나 그 시기는 알 수가 없다. 그가 당에 여러 번 갔기 때문에 그의 문집에는 태사 시중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는데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듣건대 동해 밖에 삼국이 있었으니 그 명칭이 마한, 진한, 변한입니다. 마한은 고구려요, 변한은 백제요, 진한은 신라입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에는 강한 군사가 1백 만 명이나 되어 남으로 오, 월을 침범하고, 북으로 유, 연과 제, 노를 뒤흔들어 중국의 커다란 고민거리가 되었으며, 수 황제가 세력을 잃은 것도 요동 정벌에 기인한 것입니다. 정관 연간에 우리 당 태종 황제가 직접 6군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천벌을 집행하니, 고구려가 그 위엄을 두려워하여 화친을 청하므로 문황이 항복을 받고 수레를 돌려 돌아갔습니다. 이 무렵 우리 무열대왕이 견마의 정성으로 한 쪽의 혼란을 당의 협조를 얻어 평정하고자 하였으니, 당 나라 조정에 들어가 배알하는 일이 이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뒤에 고구려와 백제가 이전과 같이 흉악한 행위를 계속하므로, 무열왕이 당의 조정으로 들어가 향도가 될 것을 청하였습니다. 고종 황제 현경 5년에 이르러 소정방에게 칙령을 내려 10도의 강병과 누선 일만척을 이끌고 백제를 대파하고, 그 땅에 부여 도독부를 설치하여 유민을 모으고 한인 관리를 배치했는데, 생활양식이 서로 달라 자주 반란을 일으킨다는 소식이 들리자 마침내 그 사람들을 하남으로 옮겼습니다. 총장 원년에 영공 서 적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격파케 하고 안동 도독부를 설치하였으며, 의봉 3년에 이르러 그 사람들을 하남과 농우로 옮겼습니다. 고구려의 잔민들이 서로 모여 북으로 태백산 아래 의지하여 국호를 발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개원 20년에 당 나라 조정에 원한을 품어 군사를 거느리고 등주를 습격하여 자사 위 준을 죽였습니다. 이에 명 황제가 대노하여 내사 고 품, 하 행성과 태복경 김 사란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공격케 하고, 우리 임금 김 아무개에게 벼슬을 더하여 정대위 지절 충녕해 군사 계림주 대도독으로 삼았는데, 겨울이 깊어 눈이 많이 쌓인 바람에 번, 한 양군의 추위가 심했기 때문에 칙명을 내려 회군케 했습니다.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3백여 년 동안 이 지역이 무사하고 창해가 편안하니, 이는 곧 우리 무열대왕의 공로입니다. 지금 저는 유림의 말단 학자요, 해외의 평범한 사람으로서 외람되게 표장을 받들고 낙토에 내조하였으니, 모든 정성을 토로하는 것이 예에 맞을 것입니다. 제가 보건대 원화 12년에 본국의 왕자 김 장렴이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명주에 상륙하였을 때, 절동의 어떤 관리가 서울까지 보내 주었고, 중화 2년에는 입조사 김 직량이 반란군이 일어나 길이 막혔기에 마침내 초주에 상륙하여 헤매다가 양주에 이르러 황제의 행차가 촉으로 가신 것을 알았습니다. 고 태위가 도두 장 검을 보내 그를 감시압송하여 서천에 이르렀습니다. 이전의 사례가 이처럼 분명하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태사 시중께서는 큰 은혜를 베푸시어 특별히 수륙의 권첩을 주시고, 저희들의 소재지에 선박, 식사 및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있는 나귀와 말 그리고 사료를 공급하게 해주시고, 아울러 군장을 보내 어가 앞까지 호송하여 주소서."
여기서 말한 태사 시중도 그 성명을 알 수 없다.
○<致遠>自西事大<唐>, 東歸故國, 皆遭亂世, 屯 蹇連, 動輒得咎, 自傷不偶{遇} , 無復仕進意, 逍遙自放, 山林之下·江海之濱, 營臺 植松竹, 枕藉書史, 嘯詠風月. 若<慶州><南山>·<剛州><氷山>·<陜州><淸凉寺>·<智異山><雙溪寺>·<合浦縣>別墅, 此皆遊焉之所. 最後, 帶家隱<伽耶山><海印寺>, 與母兄浮圖<賢俊>及<定玄>師, 結爲道友, 棲遲偃仰, 以終老焉. 始西遊時, 與<江東>詩人<羅隱>相知. <隱>負才自高, 不輕許可人, 示<致遠>所製歌詩五軸.
『북한본』.
치원은 서쪽에서 대당을 섬길 때부터 동으로 고국에 돌아올 때까지, 항상 난세를 만나 처신하기가 어려웠고 곧잘 비난을 받기도 했기 때문에, 스스로 불우함을 한탄하고 다시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기로 하였다. 그는 산림과 강해를 소요하며 누대와 정자를 지어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어놓고 책 속에 묻혀서 풍월을 읊었다. 경주의 남산과 강주의 빙산과 협주의 청양사와 지리산의 쌍계사와 합포현의 별장이 모두 그가 놀았던 곳이다. 그는 최후에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하면서, 형인 승려 현준 및 정현스님과 도우를 맺고 한가로이 은거생활을 하다가 노년을 마쳤다.
그가 처음 서쪽으로 가서 유학할 때 강동 시인 나 은과 알게 되었다. 은이라는 사람은 자기의 재주를 믿고 스스로 잘난 체하여 쉽사리 다른 사람을 인정해 주지 않았는데, 치원에게는 자기가 지은 시가 다섯 축을 보여 주었다.
○又與同年<顧雲>友善, 將歸, <顧雲>以詩送別, 略曰: "我聞海上三金鼈, 金鼈頭戴山高高. 山之上兮, 珠宮, 貝闕, 黃金殿, 山之下兮, 千里萬里之洪濤. 傍邊一點< 林>碧, 鼈山孕秀生奇特. 十二乘船渡海來, 文章感動<中華國>. 十八橫行戰詞苑, 一箭射破金門策." 『新唐書藝文志』云: "<崔致遠>『四六集』一卷·『桂苑筆耕』二十卷" 注云: "<崔致遠><高麗>人, 賓貢及第爲<高騈>從事." 其名聞上國如此. 又有『文集』三十卷, 行於世. 初我<太祖>作興, <致遠>知非常人, 必受命開國, 因致書問有"< 林>黃葉, <鵠嶺>靑松"之句. 其門人等, 至國初來朝, 仕至達官者非一. <顯宗>在位, 爲<致遠>密贊祖業, 功不可忘, 下敎, 贈內史令, 至十四歲<大平{太平}> 二{三} 年壬戌{癸亥} 五{二} 月, 贈諡<文昌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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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동년인 당 나라 사람 고 운과도 잘 사귀었는데, 치원이 돌아오려 할 때 고 운은 시를 지어 송별하였으니 이 시는 대략 다음과 같다.
나는 들었네, 바다 위에 세 마리 금자라 있어
머리 위에 높은 산을 이고 있다네.
산 위에 주궁, 패궐, 황금전이 있고
산 아래 천리 만리 넓은 파도 있다네.
그 곁에 점 하나 푸르른 계림 땅
자라산의 정기 어려 기특한 인재 났네.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그 문장이 중화국을 감동시켰네.
열 여덟 되던 해 전사원에 횡행하여
화살 한대 날려보내 금문책을 깨뜨렸네.
[신당서 예문지]에는 "최 치원의 [사륙집] 1권과 [계원필경] 20권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 주에는 "최 치원은 고려인으로서 빈공과에 급제하여 고 병의 종사관이 되었다"고 하였으니, 그의 이름이 이와 같이 중국에 알려져 있었다. 또한 문집 30권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처음 우리 태조가 흥기하였을 때, 치원은 태조가 비상한 인물이므로 그가 반드시 천명을 받아 개국할 것임을 알았다. 이로 인하여 그는 태조에게 편지를 보내 문안을 하였는데, 그 가운데에 "계림은 누른 잎이오, 곡령은 푸른 솔이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의 문인들 중에는 국초에 내조하여 높은 관직에 이른 자가 한 둘이 아니었다. 현종이 왕위에 있을 때 치원이 태조의 왕업을 은연히 협찬하였으니, 그의 공을 잊을 수 없다 하여 교시를 내려 내사령을 추증했고, 14년 태평 2년 임술 5월에는 문창후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薛聰>, 字<聰智>, 祖<談捺>奈麻, 父<元曉>. 初爲桑門, 掩{淹} 該佛書, 旣而返本, 自號<小性居士>. <聰>性明銳, 生知道待{道術} . 以方言讀九經, 訓導後生, 至今學者宗之. 又能屬文, 而世無傳者. 但今南地, 或有<聰>所製碑銘, 文字 {缺} 落不可讀, 竟不知其何如也. <神文大王>以仲夏之月, 處高明之室, 顧謂<聰>曰: "今日, 宿雨初歇, 薰風微凉, 雖有珍饌哀音, 不如高談善謔, 以舒伊鬱. 吾子必有異聞, 爲我陳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설 총은 자가 총지이고, 조부는 담날 나마이며 부친은 원효이다. 원효는 처음에 중이 되어 불서에 통달하였으나 얼마 후에 속인으로 되돌아와 스스로 소성 거사라고 불렀다. 총은 성질이 총명하고 예리하며, 나면서부터 도술을 알았다. 그는 우리말로 9경을 해독하여 후생을 훈도하였으므로, 지금까지 학자들이 그를 종주로 삼고 있다. 그는 또한 글을 잘 지었으나 세상에 전해 온 것이 없고, 다만 지금 남쪽 지방에 총이 지은 비명이 간혹 있으나 글자가 망가져서 읽을 수 없으므로 끝내 그것이 어떠한 내용인지 알 수 없다. 신문대왕이 중하월에 높고 밝은 방에 거처하면서 총을 돌아 보면서 말하기를 "오늘은 오래 내리던 비가 처음으로 개고, 훈풍이 시원하니 비록 맛있는 음식과 애절한 음악이 있다할지라도, 그것은 고상한 담론과 재미있는 이야기로 울적한 마음을 푸는 것만 못하구나. 그대는 필시 색다른 이야기도 알고 있을 터인데 어찌 나를 위하여 이야기해 주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聰>曰: "唯, 臣聞昔花王之始來也, 植之以香園, 護之翠幕, 當三春而發艶, 凌百花而獨出. 於是, 自邇及遐, 艶艶之靈, 夭夭之英, 無不奔走上謁, 唯恐不及. 忽有一佳人, 朱顔玉齒, 鮮粧 服, 伶 而來, 綽約而前曰: '妾履雪白之沙汀, 對鏡淸之海而{面} 沐春雨以去 {垢} , 快{袂} 淸風而自適, 其名曰薔薇. 聞王之令德, 期薦枕於香 , 王其容我乎!' 又有一丈夫, 布衣韋帶, 戴白持杖, 龍鍾而步, 而來曰: '僕在京城之外, 居大道之旁, 下臨蒼茫之野景, 上倚嵯峨之山色, 其名曰白頭翁. 竊謂左右供給雖足, 膏梁以充腸, 茶酒以淸神, 巾衍儲藏, 須有良藥以補氣, 惡石以 毒. 故曰雖有絲麻, 無棄管 , 凡百君子, 無不代 . 不識, 王亦有意乎?' 或曰: '二者之來, 何取何捨?' 花王曰: '丈夫之言, 亦有道理, 而佳人難得, 將如之何?' 丈夫進而言曰: '吾謂王聰明識理義, 故來焉耳, 今則非也. 凡爲君者, 鮮不親近邪 { } , 疎遠正直, 是以, <孟軻>不遇以終身, <馮唐>郞潛而皓首, 自古如此, 吾其奈何?' 花王曰: '吾過矣, 吾過矣!'" 於是, 王 然作色曰: "子之寓言, 誠有深志, 請書之, 以謂{爲} 王者之戒." 遂擢<聰>以高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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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신이 들으니 예전에 화왕이 처음 들어 왔을 때, 향기로운 꽃동산에 심고 푸른 장막으로 보호하였는데, 봄이 되어 곱게 피어나 온갖 꽃들을 능가하여 홀로 뛰어났습니다. 이에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에 이르기까지 곱고 어여쁜 꽃들이 빠짐없이 달려와서 혹시 시간이 늦지나 않을까 그것만 걱정하며 배알하려고 하였습니다. 홀연히 한 가인이 붉은 얼굴, 옥 같은 이에 곱게 화장하고, 멋진 옷을 차려 입고 간들간들 걸어 와서 얌전하게 앞으로 나와서 말했습니다. '첩은 눈 같이 흰 모래밭을 밟고, 거울 같이 맑은 바다를 마주 보며, 봄비로 목욕하여 때를 씻고, 맑은 바람을 상쾌하게 쐬면서 유유자적하는데, 이름은 장미라고 합니다. 왕의 훌륭하신 덕망을 듣고 향기로운 휘장 속에서 잠자리를 모시고자 하는데 왕께서는 저를 받아주시겠습니까?' 또한 한 장부가 베옷에 가죽 띠를 매고 허연 머리에 지팡이를 짚고, 힘없는 걸음으로 구부정하게 걸어와서 말했습니다. '저는 경성 밖의 한길 가에 살고 있습니다. 아래로는 푸르고 넓은 들판의 경치를 내려다 보고, 위로는 우뚝 솟은 산색에 의지하고 있는데, 이름은 할미꽃이라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컨대, 비록 좌우의 공급이 풍족하여 기름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차와 술로 정신을 맑게 할지라도, 상자 속의 준비물에는 반드시 양약이 있어서 기운을 돋우고, 극약이 있어서 병독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옛 말에 생사와 삼베 같은 좋은 물건이 있다해도, 왕골과 띠풀 같은 천한 물건을 버리지 않아서, 모든 군자들은 결핍에 대비하지 않는 일이 없다 하오니, 왕께서도 혹시 이런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이가 말했습니다. '두 명이 왔는데 어느 쪽을 취하고 어느 쪽을 버리시겠습니까?' 화왕이 '장부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어여쁜 여자는 얻기가 어려운 것이니 이 일을 어떻게 할까?'라고 말했습니다. 장부가 다가서서 말하기를 '저는 대왕이 총명하여 사리를 잘 알 줄 알고 왔더니, 지금 보니 그렇지 않군요. 무릇 임금된 사람치고 간사한 자를 가까이 하지 않고 정직한 자를 멀리하지 않는 이가 적습니다. 이 때문에 맹가는 불우하게 일생을 마쳤으며, 풍 당은 낭서에 잠기어 흰 머리가 되었습니다. 옛 날부터 도리가 이러하였거늘 저인들 어찌 하겠습니까?'라고 말하니, 화왕이 '내가 잘못했노라, 내가 잘못했노라'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왕이 안색을 바로 하며 말하기를 "그대의 우화는 진실로 깊은 뜻이 담겨 있도다. 기록해두어 왕자의 경계로 삼게하기 바란다" 하고 마침내 총을 높은 관직에 발탁하였다.
○世傳<日本>國眞人, 贈<新羅>使<薛>判官詩序云: "嘗覽<元曉>居士所著, 『金剛三時論{金剛三昧論}』 , 深恨不見其人, 聞<新羅>國使<薛>, 卽是居士之抱孫, 雖不見其祖, 而喜遇其孫, 乃作詩贈之." 其詩至今存焉, 但不知其子孫名字耳. 至我<顯宗>在位十三歲, <天禧{乾興}> 五{元} 年辛酉{壬戌} , 追贈爲弘儒侯. 或云, <薛聰>嘗入唐學, 未知然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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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일본국의 진인이 신라 사신 설 판관에게 준 시의 서문에 이르기를 "일찌기 원효거사가 지은 [금강삼매론]을 본 적이 있으나, 그 사람을 보지 못했음을 심히 한스럽게 여겼는데, 듣자하니 신라국 사신 설이 바로 거사의 손자라고 하니, 비록 그의 조부는 보지 못하였으나 그의 손자를 만난 것을 기뻐하여 이에 시를 지어 그에게 준다"라고 하였다. 그 시는 지금도 남아 있으나 그 자손의 이름은 모른다. 우리 현종이 왕위에 있은 지 13년인 건흥 원년 임술에 설 총에게 홍유후를 추증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설 총이 일찌기 당에 들어가서 유학하였다고 하나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崔承祐>, 以<唐><昭宗><龍紀>二年入<唐>, 至<景福>二年, 侍郞<楊涉>下及第. 有四六五卷, 自序爲< 本集>. 後爲<甄萱>作檄書, 移我<太祖>.
최 승우는 당 소종 용기 2년에 당에 가서 경복 2년에 시랑 양 섭의 문하에 있다가 과거에 급제하였다. 사륙집 5권이 있는데 자신이 쓴 서문에서 [호본집]이라 하였다. 그 뒤에 견 훤을 위하여 격문을 지어 우리 태조에게 보냈다.
○<崔彦 >年十八, 入<唐>遊學, 禮部侍郞<薛廷珪>下及第. 四十二還國爲執事侍郞瑞書院學士, 及<太祖>開國, 入朝, 仕至翰林院大學士{太學士} 平章事. 卒諡<文英>.
趙炳舜. 『高麗史』.
최 언위는 나이 18세에 당에 유학하다가 예부 시랑 설정규의 문하에 있다가 과거에 급제하였다. 42세에 귀국하여 집사시랑 서서원학사가 되었고, 태조가 개국하자 조정에 들어와서 벼슬이 한림원태학사 평장사에 이르렀다. 죽은 뒤에 시호를 문영이라 하였다.
○<金大問>本<新羅>貴門子弟. <聖德王>三年, 爲<漢山州>都督, 作傳記若干卷. 其『高僧傳』·『花郞世記』·『樂本』·『漢山記』猶存.
김 대문은 원래 신라 귀족의 자제로서 성덕왕 3년에 한산주 도독이 되었으며, 전기 몇 권을 지었는데 그 중에서 [고승전], [화랑 세기], [악본], [한산기]는 아직도 남아 있다.
○<朴仁範>·<元傑>·<巨仁>·<金雲卿>·<金垂訓>輩, 雖僅有文字傳者, 而史失行事, 不得立傳.
三國史記卷第四十六.
박 인범, 원 걸, 거인, 김 운경, 김 수훈 등은 글이 전하는 것은 조금 있으나 역사기록에 그들의 행적이 없으므로 열전을 만들 수 없다.
삼국사기 권 제 46 끝
三國史記卷第四十七 삼국사기 권 제 47
列傳第七.
<奚論>·<素那>·<驟徒>·<訥催>·<薛계頭>·<金令胤>·<官昌>
<金部軍{金歆運}> ·<裂起>·<丕寧子>·<竹竹>·<匹夫>·<階伯>.
趙炳舜. 『顯宗實錄字本』.
열전 제 7
해론. 소나. 취도. 눌최. 설계두. 김영윤. 관창.
김흠운.열기. 비녕자. 죽죽. 필부. 계백.
○<奚論>, <牟梁>人也. 其父<讚德>, 有勇志英節, 名高一時. <建福>二十七年庚午{乙丑} , <眞平大王>選爲< 岑城>縣令. 明年辛未{丙寅} 冬十月, <百濟>大發兵, 來攻< 岑城>一百餘日. <眞平>王命將, 以<上州>·<下州>·<新州>之兵救之, 遂往與<百濟>人戰不克, 引還. <讚德>憤恨之, 謂士卒曰: "三州軍帥見敵强不進, 城危不救, 是無義也. 與其無義而生, 不若有義而死." 乃激昻奮勵, 且戰且守, 以至粮盡水竭, 而猶食屍飮尿, 力戰不怠. 至春正月, 人旣疲, 城將破, 勢不可復完, 乃仰天大呼曰: "吾王委我以一城, 而不能全, 爲敵所敗, 願死爲大 , 喫盡<百濟>人, 以復此城." 遂攘臂瞋目, 走觸槐樹而死. 於是, 城陷, 軍士皆降
『북한본』.『북한본』.
해론은 모량 사람이다. 그의 부친 찬덕은 용감한 뜻과 영특한 절개가 있어 한 때 명망이 높았다. 건복 27년 을축에 진평대왕이 그를 선발하여 가잠성 현령으로 삼았다. 이듬해인 병인년 겨울 10월에 백제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백여 일 동안 가잠성을 공격하자 진평왕이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상주, 하주, 신주의 군사로 하여금 그를 구원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이 가서 백제인과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한 채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찬덕이 그것을 분하게 여겨 사졸들에게 말했다. "세 주의 장수들이 적의 강함을 보고는 진격하지 않아 성이 위급한데도 구원하지 않았다. 이는 의리가 없는 행위이다. 의리없이 사는 것보다는 의리있게 죽는 것이 나으리라." 그는 곧 격앙되고 분발하여 한편으로 싸우고 한편으로 방어하면서 양식과 물이 떨어졌는데도 오히려 시체를 뜯어먹고 오줌을 마시며 힘써 싸우고 나태하지 않았다. 봄 정월에 이르자 사람들은 이미 지치고, 성은 곧 함락되려 하니 대세는 회복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는 하늘을 우러러 크게 외쳤다. "우리 왕이 나에게 이 성을 맡겼는데, 온전하게 지키지 못하고 적에게 패하니, 원컨대 죽어서도 커다란 악귀가 되어 백제인들을 모조리 잡아 먹고 이 성을 회복하리라." 그는 마침내 팔을 걷고 눈을 부릅뜨고 달려나가 홰나무에 부딪쳐 죽었다. 이에 성은 함락되고 군사들은 모두 항복하였다.
○<奚論>年二十餘歲, 以父功, 爲大奈麻. 至<建福>&三十五{四十} 年戊寅, 王命<奚論>, 爲<金山>幢主, 與<漢山州>都督<邊品>, 興師襲< 岑城>, 取之. <百濟>聞之, 擧兵來, <奚論>等逆之. 兵旣相交, <奚論>謂諸將曰: "昔吾父殞身於此, 我今亦與<百濟>人戰於此, 是我死日也." 遂以短兵赴敵, 殺數人而死. 王聞之, 爲流涕, 贈 其家甚厚. 時人無不哀悼, 爲作長歌弔之.
『북한본』.
해론이 나이 20여 세 되었을 때 부친의 공으로 대나마가 되었다. 건복 40년 무인에 왕이 해론을 금산 당주로 임명하여 한산주 도독 변품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가잠성을 습격하여 이를 빼앗도록 하였다. 백제가 이 말을 듣고 군사를 일으켜 공격해오자 해론 등이 이들과 싸웠다. 교전이 시작되었을 때 해론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옛날 우리 부친이 여기에서 전사하셨는데, 나도 지금 여기서 백제인과 싸우니 오늘이 내가 죽을 날이다." 그는 드디어 칼을 들고 적진으로 달려가 여러 사람을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그의 가족을 보살펴 주었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장가를 지어 그를 조문하였다.
○<素那>[或云<金川>.], <白城郡><蛇山>人也. 其父<沈那>[或云<煌川>.], 旅{ } 力過人, 身輕且捷. <蛇山>境與<百濟>相錯, 故互相寇擊無虛月. <沈那>每出戰, 所向無堅陣. <仁平>中, <白城郡>出兵, 往抄<百濟>邊邑, <百濟>出精兵急擊之, 我士卒亂退. <沈那>獨立拔劒, 怒目大叱, 斬殺數十餘人, 賊懼不敢當, 遂引兵而走.
趙炳舜. 『三國史節要』.
소나[혹은 금천이라고 한다.]는 백성군 사산 사람이다. 그의 부친 심나[혹은 황천이라고 한다.]는 힘이 세고 몸이 가볍고 날래었다. 사산은 경계가 백제와 연이어 있있었기 때문에 상호 간에 노략질과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심나는 그 때마다 나가서 싸웠는데, 그가 가는 곳마다 견고한 적의 진지가 무너졌었다. 인평 연간에 백성군에서 군사를 내어 백제의 변경을 치자, 백제도 정예병을 보내 갑자기 공격해왔으므로 우리 사졸들이 혼란스럽게 퇴각하였다. 그러나 심나는 홀로 서서 칼을 뽑아 들고 성난 눈으로 크게 꾸짖으며 수십여 명을 베어 죽이니, 적이 두려워서 감히 덤벼들지 못하고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도주하였다.
○<百濟>人, 指<沈那>曰: "<新羅>飛將." 因相謂曰: "<沈那>尙生, 莫近白城." <素那>雄豪有父風. <百濟>滅後, <漢州>都督都儒&公請大王遷{白王遣} <素那>於<阿達城>, 禦北鄙. <上元>二年乙亥春, <阿達城>大守{太守} 級 <漢宣>, 敎民以某日齊出種麻, 不得違令. <靺鞨>諜者認之, 歸告其酋長. 至其日, 百姓皆出城在田, <靺鞨>潛師猝入城, 剽掠一城, 老幼狼狽, 不知所爲. <素那>奮刃向賊, 大呼曰: "爾等知<新羅>有<沈那>之子<素那>乎? 固不畏死以圖生, 欲鬪者曷不來耶?" 遂憤怒突賊, 賊不敢迫, 但向射之. <素那>亦射, 飛矢如蜂, 自辰至酉, <素那>身矢如 , 遂倒而死.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백제인들이 심나를 가리켜 '신라의 비장'이라 하고, 서로 말하기를 "심나가 아직 살았으니 백성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하였다. 소나는 영웅스럽고 호걸스러움이 아버지의 풍모를 지녔다. 백제가 멸망한 뒤에 한주 도독 유공이 대왕에게 청하여 소나를 아달성으로 보내 북쪽 변방을 방어하게 하였다. 상원 2년 을해년 봄에 아달성 태수 급찬 한선이 백성들로 하여금 아무 날 모두 나가 삼을 심게 하고는 이 명령을 어기지 못하도록 하였다. 말갈의 첩자가 이를 탐지하고 돌아가 자기 추장에게 보고하였다. 그 날이 되어 백성들이 모두 성에서 나와 밭에 있는데, 말갈이 몰래 군사를 거느리고 갑자기 성으로 들어가서 성 전체를 노략질하니 늙은이 어린이 할 것없이 모두 낭패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이 때 소나가 칼을 휘두르며 적진을 향하여 크게 외쳤다. "너희들은 신라에 심나의 아들 소나가 있는 줄을 아느냐? 나는 실로 죽기가 두려워 살기를 도모하지는 않는다. 싸우려는 자가 있으면 왜 나오지 않느냐?" 그가 곧 분격하여 적진으로 돌진하니, 적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다만 그를 향하여 활을 쏠 뿐이었다. 소나도 활을 쏘았는데 날아 오는 화살이 마치 벌떼와 같이 많았다. 진시로부터 유시에 이르자 소나의 몸에는 화살이 고슴도치의 털처럼 박혀 마침내 쓰러져 죽었다.
○<素那>妻, <加林郡>良家女子. 初<素那>以<阿達城>隣敵國, 獨行, 留其妻而在家. 郡人聞<素那>死, 弔之, 其妻哭而對曰: "吾夫常曰: '丈夫固當兵死, 豈可臥牀席, 死家人之手乎!' 其平昔之言如此, 今死如其志也." 大王聞之, 涕泣沾襟曰: "父子勇於國事, 可謂世濟忠義矣." 贈官 .
소나의 아내는 가림군의 양가 여자였다. 처음에 소나는 아달성이 적국에 인접하여 있기 때문에 혼자 가고 자기 아내는 집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 그 고을 사람들이 소나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조문하니 그의 아내가 울면서 대답하였다. "나의 남편이 항상 말하기를 '장부는 마땅히 싸우다가 죽어야 한다. 어찌 침상에 누워서 집안 사람의 손에 죽을 수 있으랴!'하였습니다. 그의 평소의 말이 이러하였으니 지금의 죽음은 자기의 뜻대로 된 것입니다." 대왕이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면서 말했다. "부자가 모두 국사에 용감하였으니, 가히 대대로 충의를 이루었다고 하겠다." 대왕은 그에게 잡찬을 추증하였다.
○<驟徒>, <沙梁>人, 奈麻<聚福>之子, 史失其姓. 兄弟三人, 長<夫果>, 仲<驟徒>, 季<逼實>. <驟徒>嘗出家, 名<道玉>, 居<實際寺>. <大宗大王{太宗大王}> 時, <百濟>來伐<助川城>, 大王興師出戰, 未決. 於是, <道玉>語其徒曰: "吾聞: 爲僧者, 上則精術業, 以復性. 次則起道用, 以益他.' 我形似桑門而已, 無一善可取, 不如從軍殺身, 以報國." 脫法衣, 著戎服, 改名曰<驟徒>, 意謂馳驟而爲徒也. 乃詣兵部, 請屬三千幢, 遂隨軍赴敵場. 及旗鼓相當, 持槍劒, 突陣力鬪, 殺賊數人而死.
趙炳舜. 『三國史節要』.
취도는 사량 사람으로서 나마 취복의 아들이다. 그의 성씨는 역사기록에 전하지 않는다. 형제가 셋인데 맏이는 부과요, 가운데는 취도요, 막내는 핍실이다. 취도가 일찌기 출가하여 이름을 도옥이라 하고 실제사에 거주했다.
태종대왕 때 백제가 와서 조천성을 공격하자 왕은 군사를 일으켜 나가 싸웠으나 싸움이 결판나지 않았다. 이 때 도옥이 자기 무리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상등의 중은 술업에 정진하여 그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도의 효용을 일으켜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준다'고 하였는데, 나는 외형만 중과 같을 뿐이며, 한 가지도 취할 만한 선행이 없으니, 군대에 들어가 몸을 바쳐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만 못하다"라 하고, 법의를 벗고 군복을 입은 다음 이름을 취도로 고쳤다. 이 이름은 빨리 군대로 간다는 뜻이다. 그는 곧 병부로 가서 삼천당에 속하기를 청하고, 마침내 군대를 따라 적지로 갔다. 깃발과 북이 서로 어울리자 창과 칼을 잡고 적진으로 돌진하여 힘껏 싸우다가 적군 여러 명을 죽인 다음 자신도 죽었다.
○後<咸享>二年辛未, <文武大王>發兵, 使踐<百濟>邊地之禾. 遂與<百濟>人, 戰於<熊津>之南. 時<夫果>以幢主戰死, 論功第一. <文明>元年甲申, <高句麗>殘賊, 據<報德城>而叛, <神文大王>命將討之, 以<逼實>爲貴幢弟監{第監} . 臨行, 謂其婦曰: "吾二兄, 旣死於王事, 名垂不朽, 吾雖不肖, 何得畏死而苟存乎? 今日與爾生離, 終是死別也, 好住無傷." 及對陣, 獨出奮擊, 斬殺數十人而死. 大王聞之, 流涕嘆曰: "<驟徒>知死所, 而激昆弟之心. <未果>·<逼實>亦能勇於義, 不顧其身, 不其壯歟!" 皆追贈官沙 .
『북한본』.
그 후 함형 2년 신미에 문무대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백제 변경의 벼를 짓밟게 하자, 마침내 백제인들과 웅진 남쪽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 때 부과가 당주로서 전사하여 논공이 제일이었다. 문명 원년 갑신에 고구려의 잔적이 보덕성을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신문대왕이 장수에게 토벌을 명하였다. 그 때 핍실을 귀당 제감으로 삼았다. 그는 떠날 때 아내에게 말했다. "나의 두 형이 이미 나라 일로 죽어서 이름이 영원히 남아 있거늘, 내 비록 불초하나 어찌 죽기를 두려워하여 구차하게 살겠는가? 오늘 그대와의 생이별은 결국 사별이 될 것이니 상심하지 말고 잘사시오!" 그가 적과 대진하게 되자 단신으로 나가 공격하여 수십 명을 참살하고 자기도 죽었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탄식하였다. "취도가 죽을 자리를 알아서 형제의 마음을 격동시켰으며, 부과와 핍실도 정의 앞에 용감하여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았으니 장한 일이 아닌가?" 대왕은 모두에게 사찬 벼슬을 추증하였다.
○<訥催>, <沙梁>人, 大奈麻<都非>之子也. <眞平王><建福>四十一年甲申{己卯} 冬十月, <百濟>大擧來侵, 分兵圍攻<速含>·<櫻岑>·<岐岑>·<烽岑>·<旗懸>·<冗柵{穴柵}> 等六城, 王命<上州>·<下州>·<貴幢>·<法幢>·<誓幢>五軍, 往救之. 旣到, 見<百濟>兵陣堂堂, 鋒不可當, 盤桓不進. 或立議曰: "大王以五軍委之諸將, 國之存亡, 在此一役. 兵家之言曰: '見可而進, 知難而退.' 今强敵在前, 不以好謀而直進, 萬一有不如意, 則悔不可追." 將佐皆以爲然, 而業已受命出師, 不得徒還. 先是, 國家欲築<奴珍>等六城而未遑, 遂於其地, 築畢而歸.
『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
눌최는 사량 사람인데 대나마 도비의 아들이다. 진평왕 건복 41년 기묘 겨울 10월에 백제가 대거 침입하면서 군사를 나누어 속함, 앵잠, 기잠, 봉잠, 기현, 용책 등 여섯 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왕은 상주·하주·귀당·법당·서당 등 5군에 명하여 이들을 구원하게 하였다. 그들은 전장에 이르러 백제의 군진이 당당하여 예봉을 당할 수가 없음을 보고는 머뭇거리며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어떤 자가 건의하여 말했다. "대왕이 5군을 여러 장수에게 맡겼으니, 국가의 존망이 이 한 번의 싸움에 달려 있다. 병가에 이르기를 '가능성을 보면 나아가고, 어려움을 알면 물러선다'고 하였는데, 지금 강력한 적이 눈 앞에 있는데 좋은 계책을 쓰지 않고 곧장 나아갔다가는, 만에 하나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 후회해도 때가 늦을 것이다." 장수와 보좌관들이 모두 그 생각이 옳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미 명령을 받고 군사를 출동시킨 이상 그냥 돌아갈 수가 없었다. 이에 앞서 나라에서는 노진 등의 여섯 성을 쌓으려다가 미처 겨를이 없었는데, 그들은 드디어 그곳에서 성쌓기를 마치고 돌아왔다.
○於是, <百濟>侵攻愈急, <速含>·<岐岑>·<冗柵{穴柵}> 三城, 或滅或降, <訥催>以三城固守, 及聞五軍不救而還, 慷慨流涕, 謂士卒曰: "陽春和氣, 草木皆華, 至於歲寒, 獨松栢後彫. 今孤城無援, 日益 危, 此誠志士義夫, 盡節揚名之秋, 汝等將若之何?" 士卒揮淚曰: "不敢惜死, 唯命是從." 及城將 , 軍士死亡無幾, 人皆殊死戰, 無苟免之心. <訥催>有一奴, 强力善射. 或嘗語曰: "小人而有異才, 鮮不爲害, 此奴宜遠之." <訥催>不聽. 至是城陷賊入, 奴張弓挾矢, 在<訥催>前, 射不虛發, 賊懼不能前. 有一賊出後, 以斧擊<訥催>, 乃 , 奴反與鬪俱死. 王聞之, 悲慟, 追贈<訥催>職級 .
趙炳舜. 『三國史節要』.
이 때 백제가 더욱 급공하여 속함, 기잠, 용책 등 세 성이 함락되거나 항복하였다. 눌최는 나머지 세 성을 고수하고 있었는데, 5군이 구원하지 않고 돌아갔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군사들에게 말했다. "봄철의 온화한 기운에는 초목이 모두 번성하지만, 겨울이 되면 유독 송백만이 남는다. 이제 우리의 외로운 성이 구원하는 군사는 없고 날로 위급하여지니, 이제는 실로 지조있는 사나이와 의리있는 사나이가 절개를 다하고 이름을 날릴 때이다. 너희들은 장차 어떻게 하려는가?" 사졸들은 모두 눈물을 뿌리면서 말했다. "감히 죽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지 않고, 오직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성이 함락될 무렵, 군사들이 거의 모두 죽어 몇 명 남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모두 결사적으로 싸웠으며 구차하게 죽음을 모면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눌최에게는 종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다. 어떤 자가 전에 "소인배가 특이한 재주를 가지고 있으면 해를 끼치지 않는 경우가 드문 법이니, 이 사람을 멀리해야 한다"고 말하였으나, 눌최는 이를 듣지 않았다. 그 때 성이 함락되고 적이 들어오자 그 종이 활을 당겨 화살을 끼운 채 눌최의 앞에 버티고 서서 활을 쏘았다. 그 화살은 하나도 빗나가는 것이 없었다. 적들이 이를 무서워 하여 앞으로 접근하지 못하였다. 한 적병이 뒤로 돌아가 눌최를 도끼로 쳐서 쓰러뜨리자 그 종은 돌아서서 그와 싸우다가 함께 죽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비통해 하며 눌최에게 급찬 벼슬을 추증하였다.
○<薛[一本作薛{ } ] 頭>, 亦<新羅>衣冠子孫也. 嘗與親友四人, 同會燕飮, 各言其志. < 頭>曰: "<新羅>用人論骨品, 苟非其族, 雖有鴻才傑功, 不能踰越. 我願西遊<中華國>, 奮不世之略, 立非常之功, 自致榮路, 備簪紳劒佩, 出入天子之側, 足矣." <武德>四年辛巳, 潛隨海舶入唐. 會<大宗{太宗}> <文皇帝>親征<高句麗>, 自薦爲左武衛果毅. 至<遼東>, 與麗人戰<駐 山>下, 深入疾鬪而死, 功一等. 皇帝問: "是何許人?" 左右奏<新羅>人<薛 頭>也. 皇帝泫然曰: "吾人尙畏死, 顧望不前, 而外國人, 爲吾死事, 何以報其功乎?" 問從者聞其平生之願, 脫御衣覆之, 授職爲大將軍, 以禮葬之.
李丙燾.趙炳舜.
설 계두도 역시 신라의 사대부집 자손이다. 그는 일찌기 친구 네 사람과 술을 마신 적이 있는데, 그 자리에서 그들은 각각 자신의 뜻을 말하였다. 계두가 말했다. "신라에서는 사람을 등용하는데에도 골품을 따지니, 만일 그 해당하는 골품이 아니면 큰 재능과 훌륭한 공로가 있다고 해도 일정한 계급 이상 진급할 수가 없다. 나는 서쪽으로 중화국에 유학하여 불세출의 지략을 발휘하고 비상한 공을 세워서 스스로 영화의 길을 열고, 고관의 복장에다 검패를 차고 천자의 곁을 드나들어야 만족하겠다." 그는 무덕 4년 신사에 남몰래 배를 타고 당에 갔다. 그 때 마침 태종 문황제가 직접 고구려를 정벌하였므로, 그는 자천하여 좌무위과의가 되었다. 그가 요동에 이르러 주필산 밑에서 고구려인과 싸우는데, 적진 깊이 들어가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으니 공이 1등이었다. 황제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니, 측근자들이 신라인 설 계두라고 대답하였다. 황제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우리 나라 사람도 죽음이 두려워 이리저리 돌아보며 전진하지 않는데, 외국인이 우리를 위하여 국사에 죽었으니 무엇으로 그의 공을 갚으랴?" 황제는 종자에게 그의 평생 소원을 듣고, 어의를 벗어 덮어 주었으며, 대장군의 관직을 제수하고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
○<金令胤>, <沙梁>人, 級 <盤屈>之子. 相{祖} <欽春>[或云<欽純>.]角干, <眞平王>時爲花郞, 仁深信厚, 能得衆心. 及壯, <文武大王>陟爲 宰, 事上以忠, 臨民以恕, 國人翕然稱爲賢相. <大宗大王{太宗大王}> 七年庚申, <唐><高宗>命大將軍<蘇定方>, 伐<百濟>, <欽春>受王命, 與將軍<庾信>等, 率精兵五萬以應之. 秋七月, 至<黃山>之原, 値<百濟>將軍<階伯>戰, 不利. <欽春>召子<盤屈>曰: "爲臣莫若忠, 爲子莫若孝, 見危致命, 忠孝兩全." <盤屈>曰: "唯." 乃入賊陣, 力戰死. <令胤>生長世家, 以名節自許.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日本書陵部本』.趙炳舜. 『顯宗實錄字本』.
김 영윤은 사량 사람으로서 급찬 반굴의 아들이다. 조부는 흠춘[혹은 흠순이라고도 한다.] 각간이니 진평왕 때 화랑이 되었다. 그 때, 그는 인덕이 많고 신의가 두터워 인심을 크게 얻을 수 있었다. 그가 장성하자 문무대왕이 재상으로 올려주었는데, 임금을 충심으로 섬기고, 인자한 자세로 백성을 대하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어진 재상이라고 일컬었다. 태종대왕 7년 경신에 당 고종이 대장군 소정방에게 명하여 백제를 공격하게 했을 때, 흠춘은 왕명을 받들어 장군 유신 등과 함께 정예병 5만을 거느리고 이에 호응하였다. 가을 7월에 황산벌에 이르러 백제 장군 계백과 마주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흠춘은 아들 반굴을 불러 말했다.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이 으뜸이요, 아들이 되어서는 효성이 으뜸이니, 위급함을 보면 목숨을 바쳐야만 충성과 효성이 모두 온전해진다." 반굴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적진으로 돌입하여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영윤은 명문세가 출신답게 명예와 절개를 지켰다.
○<神文大王>時, <高句麗>殘賊<悉伏>, 以<報德城>叛. 王命討之, 以<令胤>爲黃衿誓幢步騎監. 將行, 謂人曰: "吾此行也, 不使宗族朋友, 聞其惡聲." 及見<悉伏>, 出< 岑城>南七里, 結陣以待之. 或告曰: "今此凶黨, 譬如 巢幕上, 魚戱鼎中. 出萬死以爭一日之命耳. 語曰: '窮寇勿迫.' 宜左次以待疲極而擊之, 可不血刃而擒也." 諸將然其言, 暫退, 獨<令胤>不肯之而欲戰. 從者告曰: "今諸將豈盡偸生之人, 惜死之輩哉? 而以向者之言爲然者, 將俟其隙而得其便者也. 而子獨直前, 其不可乎!" <令胤>曰: "臨陣無勇, 禮經之所識{誡} , 有進無退, 士卒之常分也. 丈夫臨事自決, 何必從衆?" 遂赴敵陣, 格鬪而死. 王聞之, 悽慟流涕曰: "無是父, 無是子, 其義烈可嘉者也." 追贈爵賞尤厚.
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日本書陵部本』.
신문대왕 때, 고구려의 잔적 실복이 보덕성에서 모반하자 왕이 그의 토벌을 명령하고, 영윤을 황금서당 보기감으로 삼았다. 그가 떠날 때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이번에 가면 가족이나 친구들로 하여금 악명을 듣지 않도록 하겠다." 그가 출정하여 실복을 보니, 그는 가잠성 남쪽 7리 지점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이제 이 흉악한 무리들은 제비가 장막 위에 집을 짓고, 물고기가 솥 안에서 노는 것 같은 형세로서, 만 번 죽을 힘을 다하여 싸워야 하루 사는 목숨 밖에 안된다. 옛 말에 이르기를 '궁지에 몰린 도둑은 쫓지 말라'고 하였으니, 약간 후퇴하여 적이 극도로 피로해진 틈을 타서 공격하면 칼날에 피도 묻히지 않고 사로잡을 수 있다." 모든 장수들이 그 말을 옳게 여겨 잠시 후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유독 영윤만은 이를 수긍하지 않고 싸우려 하였다. 그의 종자가 말했다. "지금 모든 장수들이 구차하게 살 길을 찾는 것이 아니며, 죽기를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전의 의견이 옳다고 여긴 것은, 기회를 보아 이익을 얻고자 함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만이 혼자 앞으로 나가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영윤이 말했다. "적진에 임하여 용기가 없는 것은 예경에서 경계한 것이니, 전진이 있을 뿐 후퇴가 없는 것이 사졸로서 지켜야 할 당당한 본분이다. 대장부가 일을 당하면 스스로 결정할 것이지, 어찌 꼭 여러 사람의 의견만을 따르겠는가?" 그는 말을 마치고 드디어 적진으로 달려가서 싸우다가 죽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몹시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로다. 그의 의롭고 장렬함은 가상히 여길 만하다." 왕은 후하게 상을 주고, 작위를 추증하였다.
○<官昌>[一云<官狀>.], <新羅>將軍<品日>之子. 儀表都雅, 少而爲花郞, 善與人交. 年十六, 能騎馬彎弓. 大監某薦之<大宗大王{太宗大王}>. 至<唐><顯慶>五年庚申, 王出師, 與<唐>將軍侵<百濟>, 以<官昌>爲副將. 至<黃山>之野, 兩兵相對. 父<品日>謂曰: "爾雖幼年, 有志氣, 今日是立功名取富貴之時, 其可無勇乎?" <官昌>曰: "唯." 卽上馬橫槍, 直 敵陣, 馳殺數人. 而彼衆我寡, 爲賊所虜, 生致<百濟>元帥<階伯>前. <階伯> 脫胄, 愛其少且勇, 不忍加害. 乃嘆曰: "<新羅>多奇士, 少年尙如此, 況壯士乎?" 乃許生還. <官昌>曰: "向吾入賊中, 不能斬將 旗, 深所恨也. 再入必能成功." 以手 井水, 飮訖, 再突賊陣疾鬪. <階伯>擒斬首, 繫馬鞍送之. <品日>執其首, 袖拭血曰: "吾兒面目如生, 能死於王事, 無所悔矣." 三軍見之, 慷慨有立志, 鼓 進擊, <百濟>大敗. 大王贈位級 , 以禮葬之, 賻其家唐絹三十匹·二十升布三十匹·穀一百石.
관창[관장이라고도 한다.]은 신라 장군 품일의 아들이다. 그는 용모가 우아하여 젊어서 화랑이 되었는데 다른 사람과 곧잘 사귀었다. 16세에 기마와 활쏘기에 능숙하여 어느 대감이 그를 태종대왕에게 천거하였다. 당 나라 현경 5년 경신에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당 나라 장군과 함께 백제를 침공하는데 관창을 부장으로 삼았다. 황산벌에 이르러 양쪽 군사가 대치하게 되었는데 그의 부친 품일이 관창에게 말했다. "네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의기가 있다. 오늘이야말로 공을 세워 부귀를 얻을 때이니 어찌 용기를 내지 않겠느냐?" 관창은 "그렇습니다"라 하고, 곧 말에 올라 창을 비껴 들고 바로 적진으로 달려들어가 말을 달리면서 여러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었기 때문에 적에게 사로잡혀 산 채로 백제 원수 계백의 앞으로 보내졌다. 계백이 그의 투구를 벗게하니, 그가 어리고 용감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계백은 이를 아깝게 여겨 차마 해치지 못하고 탄식하여 말했다. "신라에는 기특한 사람이 많구나. 소년도 이렇거늘 하물며 장사들이야 어떻겠는가?" 계백은 곧 그를 살려 보낼 것을 허락하였다. 관창이 돌아와서 말했다. "아까 내가 적진에 들어가서 장수를 베고 깃발을 빼앗지 못한 것이 심히 한스럽다. 다시 들어가면 반드시 성공하리라." 관창은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마시고는 다시 적진에 돌입하여 용감히 싸웠다. 계백이 그를 사로잡아 머리를 베고는 그의 말 안장에 매어 돌려 보냈다. 품일은 아들의 머리를 잡고 소매로 피를 씻으며 말했다. "내 아들의 면목이 살아있는 것 같구나. 능히 나라를 위하여 죽을 줄을 알았으니 후회할 것이 없다." 3군이 그것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의지를 다진 다음, 북을 울리고 고함을 치면서 공격하니 백제가 크게 패하였다. 대왕이 급찬의 직위를 추증하고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으며, 그 가족들에게 당견 30필과 이십승포 30필과 곡식 1백 섬을 부의로 주었다.
○<金歆運>, <奈密王>八世孫也. 父<達福> . <歆運>少遊花郞<文努>之門時, 徒衆言及某戰死留名至今, <歆運>慨然流涕, 有激勵思齊之貌. 同門僧<轉密>曰: "此人若赴敵, 必不還也." <永徽>六年, <大宗大王{太宗大王}> 憤<百濟>與<高句麗>梗邊, 謀伐之. 及出師, 以<歆運>爲郞幢大監. 於是, 不宿於家, 風梳雨沐, 與士卒同甘苦. 抵<百濟>之地, 營<陽山>下, 欲進攻<助川城>. <百濟>人乘夜疾驅, 黎明緣壘而入, 我軍驚 {駿} 顚沛, 不能定. 賊因亂急擊, 飛矢雨集. <歆運>橫馬握 待敵, 大舍<詮知>說曰: "今賊起暗中, 咫尺不相辨, 公雖死, 人無識者. 況公<新羅>之貴骨, 大王之半子, 若死賊人手, 則<百濟>所誇 , 而吾人之所深羞者矣." <歆運>曰: "大丈夫旣以身許國, 人知之與不知一也, 豈敢求名乎?" 强立不動. 從者, 握 勸還, <歆運>拔劒揮之, 與賊鬪殺數人而死. 於是, 大監<穢破>·少監<狄得>相與戰死. 步騎幢主<寶用那>聞<歆運>死曰: "彼骨貴而勢榮, 人所愛惜, 而猶守節以死, 況<寶用那>生而無益, 死而無損乎?" 遂赴敵, 殺三數人而死. 大王聞之傷慟, 贈<歆運>·<穢破>位一吉 , <寶用那>·<狄得>位大奈麻. 時人聞之, 作<陽山歌>, 以傷之.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김 흠운은 나밀왕의 8세 손으로 아버지는 달복 잡찬이다. 흠운이 소년 시절에 화랑 문노의 문하에 있을 때, 낭도들이 아무개가 전사하여 지금까지 이름을 남기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 흠운은 개연히 눈물을 흘리고 감동되어 자기도 그와 같이 되려는 의지를 보였다.
같은 문하에 있던 중 전밀이 말했다. "이 사람이 만일 전쟁에 나가면 틀림없이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영휘 6년에 태종대왕이 백제와 고구려가 변경을 막고 있음을 분하게 여겨 정벌할 것을 계획하고 군사를 동원할 때, 흠운을 낭당 대감으로 삼았다. 이리하여 흠운은 집에서 자지 않고 비바람을 맞으며 사졸들과 함께 동고동락하였다. 그가 백제 지역에 도달하여 양산 밑에 진을 치고 조천성을 진공하려 하였는데, 백제인들이 야음을 기하여 급히 달려와 이른 새벽에 성루로 올라왔다. 우리 군사가 이를 보고 크게 놀라 엎어지고 자빠져서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적군이 이러한 혼란을 이용하여 급히 공격해오니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왔다. 흠운이 말을 비껴 탄 채 창을 잡고 적을 기다리고 있는데, 대사 전지가 달래며 말했다. "지금 적이 어둠 속에서 움직이니 지척에서도 분간할 수 없고, 따라서 공이 비록 죽더라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공은 신라의 진골이며 대왕의 사위이므로, 만약 적의 손에 죽는다면 백제의 자랑거리요, 우리의 대단한 수치가 될 것입니다." 흠운이 말했다. "대장부가 이미 몸을 나라에 바친 이상 남이 알든 모르든 마찬가지다. 어찌 감히 명예를 추구하겠느냐?" 그는 꼿꼿이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종자가 말 고삐를 잡고 돌아가기를 권하였다. 흠운은 칼을 뽑아 휘두르며 적과 싸워 여러 명을 죽이고 자기도 죽었다. 이 때 대감 예파와 소감 적득도 함께 전사하였다. 보기당주 보용나는 흠운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말했다. "그는 골품이 고귀하고 권세가 영화로와 사람들이 사랑하고 아끼는데도 오히려 절개를 지켜 죽었다. 황차 나 보용나는 살아도 이익될 것이 없고 죽어도 손실될 것 없다." 그는 곧 적진으로 달려가 적병 몇 명을 죽이고 자기도 죽었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흠운과 예파에게 일길찬의 직위를 주고, 보용나와 적득에게 대나마의 직위를 주었다. 당시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슬퍼하며 양산가를 지었다.
○論曰: <羅>人患無以知人, 欲使類聚群遊, 以觀其行義, 然後, 擧用之. 遂取美貌男子, 飾之, 名花郞以奉之. 徒衆雲集, 或相磨以道義, 或相悅以歌樂, 遊娛山水, 無遠不至. 因此知其邪正, 擇而薦之於朝. 故<大問>曰: "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者." 此也. 三代花郞, 無慮二百餘人, 而芳名美事, 具如傳記. 若<歆運>者, 亦郞徒也. 能致命於王事, 可謂不辱其名者也.
저자의 견해 : 신라인은 사람을 알아 볼 방법이 없음을 걱정하여, 같은 부류의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무리를 지어서 놀게 해놓고, 그 행실과 의리를 살펴서 등용하였다. 그리고 용모가 뛰어난 남자를 뽑아 단장시켜서 화랑이라 부르며 받들었다. 이에 낭도의 무리가 운집하여 혹은 도의로 서로 절차탁마하고, 혹은 음악으로 서로 즐기며 산수를 찾아 노니는데, 멀다고 하여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그들의 사악함과 정직함을 살폈으며, 이에 따라 사람을 선발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 김 대문이 "어진 보좌와 충신이 여기에서 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군사가 여기에서 생긴다"고 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3대의 화랑이 무려 2백여 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의 꽃다운 이름과 아름다운 사적은 전기에 기재된 바와 같다. 흠운과 같은 사람도 역시 낭도였는데, 나라 일에 목숨을 바칠 수 있었으니 그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고 할 만하다.
○<裂起>, 史失族姓. <文武王>元年, <唐>皇帝遣<蘇定方>, 討<高句麗>, 圍<平壤城>. <含資道>摠管<劉德敏>傳宣國王, 送軍資<平壤>. 王命大角干<金庾信>, 輸米四千石·租二萬二千二百五十石, 到<獐塞>, 風雪 { } 寒, 人馬多凍死. <麗>人知兵疲, 欲要擊之. 距<唐>營三萬餘步而不能前, 欲移書而難其人. 時<裂起>以步騎監輔行, 進而言曰: "某雖駑蹇, 願備行人之數." 遂與軍師<仇近>等十五人, 持弓劒走馬, <麗>人望之, 不能遮閼. 凡兩日致命於<蘇>將軍, <唐>人聞之, 喜慰廻書. <裂起>又兩日廻, <庾信>嘉其勇, 與級 位. 及軍還, <庾信>告王曰: "<裂起>·<仇近>, 天下之勇士也. 臣以便宜許位級 , 而未副功勞, 願加位沙 ." 王曰: "沙 之秩, 不亦過乎?" <庾信>再拜曰: "爵祿公器, 所以酬功, 何謂過乎?" 王允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열기는 역사기록에 집안 내력과 성씨가 전하여지지 않는다. 문무왕 원년에 당 황제가 소정방을 보내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평양을 포위하였다. 그 때, 함자도 총관 유 덕민이 국왕에게 국서를 전하여 군수물자를 평양으로 보내게 하였다. 왕이 대각간 김 유신에게 명하여 쌀 4천 석과 벼 2만 2천2백5십 석을 수송하게 하였는데, 유신이 장새에 이르렀을 때 풍설이 몹시 사나워서 사람과 말이 많이 얼어 죽었다. 고구려인들은 우리 군사가 지쳐있음을 알고 요격하려 하였다. 당 진영까지의 거리가 3만여 보였는데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편지를 보내려 해도 적당한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이 때 열기가 보기감보행으로서 나아가 말하기를 "제가 비록 노둔하나 가는 사람의 수를 채우고 싶습니다"라 하고, 마침내 군사 구근 등 15명과 함께 활과 칼을 가지고 말을 달려 나가니, 고구려인들이 바라만 보고 막지 못하였다. 이틀 만에 그들이 소장군에게 사명을 전하니 당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위로하고 회신를 보냈다. 열기가 다시 이틀이 지나서 돌아오니, 유신이 그의 용맹을 가상히 여겨 급찬의 벼슬을 주었다. 군사가 돌아오자 유신이 왕에게 말하기를 "열기와 구근은 천하의 용사입니다. 신이 편의에 따라 급찬의 벼슬을 허락하였으나 공로에 맞지 않사오니 사찬의 벼슬을 더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사찬의 벼슬은 너무 과분하지 않은가?"라고 대답하였다. 유신이 재배하고 말했다. "작록은 공기로서 공로에 대한 보수로 주는 것이온데 어찌 과분하다 하겠습니까?"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後<庾信>之子<三光>執政, <裂起>就求郡守, 不許. <裂起>與<祗園寺>僧<順憬>曰: "我之功大, 請郡不得, <三光>殆以父死而忘我乎?" <順憬>說<三光>, <三光>授以<三年山>郡大守{太守} . <仇近>從<元貞公>, 築<西原述城>, <元貞公>聞人言, 謂怠於事, 杖之. <仇近>曰: "僕嘗與<裂起>入不測之地, 不辱大角干之命, 大角干不以僕爲無能, 待以國士, 今以浮言罪之, 平生之辱, 無大此焉." <元貞>聞之, 終身羞悔.
趙炳舜. 『三國史節要』.
뒤에 유신의 아들 삼광이 정권을 잡았을 때, 열기가 찾아가서 군수 자리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열기가 지원사의 중 순경에게 말했다. "나의 공로가 큰 데도 군수의 자리를 청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삼광은 아버지가 죽었다 하여 아마도 나를 잊어버린 것이리라." 순경이 삼광에게 이를 말하였더니 삼광이 삼년산군 태수직을 주었다.
구근이 원정공을 따라가 서원술성을 쌓았다. 그 때 원정공이, 구근이 일을 태만히 하였다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그에게 곤장을 쳤다. 구근이 말하기를 "내가 일찌기 열기와 함께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지역에 들어가 대각간의 명을 욕되지 않게 하였으며, 대각간도 나를 무능하다고 여기지 않고 국사로 대우하였는데, 지금 허황된 말을 믿고 나에게 죄를 주니 평생의 치욕 중에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원정공이 이 말을 듣고 죽는 날까지 부끄러워하며 회개하였다.
○<丕寧子>, 不知鄕邑族姓. <眞德王>元年丁未, <百濟>以大兵, 來攻<茂山>·<甘勿>·<桐岑>等(+三) 城, <庾信>率步騎一萬, 拒之. <百濟>兵甚銳, 苦戰不能克, 士氣索而力憊. <庾信>知<丕寧子>有力戰深入之志, 召謂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彫. 今日之事, 急矣, 非子誰能奮勵出奇, 以激衆心乎?" 因與之飮酒, 以示殷勤. <丕寧子>再拜云: "今於稠人廣衆之中, 獨以事屬我, 可謂知己矣, 固當以死報之." 出謂奴<合節>曰: "吾今日上爲國家, 下爲知己, 死之. 吾子<擧眞>, 雖幼年, 有壯志, 必欲與之俱死, 若父子倂命, 則家人其將疇依? 汝其與<擧眞>好收吾骸骨, 歸以慰母心."
趙炳舜. 『三國史節要』.
비녕자는 고향과 집안의 성씨를 알 수 없다. 진덕왕 원년 정미에 백제가 대군을 거느리고 무산, 감물, 동잠 등의 성을 공격하므로 유신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대항하였다. 그러나 백제군은 정예군이었기 때문에 유신이 고전하고 승리하지 못하여 사기는 꺾이고 힘이 빠졌다. 유신은 비녕자가 힘껏 싸워 적진 깊이 들어갈 뜻이 있음을 알고 그를 불러 말했다. "추운 겨울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는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법이다. 오늘의 사태가 위급하게 되었으니 그대가 아니면 누가 용감히 싸우며 기묘한 계책을 내어 여러 사람의 마음을 격려하겠는가?" 유신이 이어서 그와 함께 술을 마시면서 은근한 마음을 표시하니 비녕자가 재배하고 말했다. "지금 많은 사람 가운데 유독 저에게 일을 부탁하시니 가히 지기라 할 만합니다. 진실로 죽음으로써 보답하여야 마땅하겠습니다." 그가 나와서 종 합절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 위로는 나라를 위하고 아래로는 지기를 위하여 죽을 것이다. 나의 아들 거진이 나이 비록 어리나 장한 뜻이 있어서 틀림없이 나를 따라 함께 죽으려 할 것인데, 만일 부자가 함께 죽는다면 집안 사람이 장차 누구에게 의지하랴? 너는 거진과 함께 나의 해골을 잘 수습하여 돌아가 그 어미의 마음을 위로하라" 하였다.
○言畢, 卽鞭馬橫 , {突} 賊陣, 格殺數人而死. <擧眞>望之欲去, <合節>請曰: "大人有言, 令<合節>與阿郞還家, 安慰夫人. 今子負父命棄母慈, 可謂孝乎?" 執馬 不放. <擧眞>曰: "見父死而苟存, 豈所謂孝子乎?" 卽以劒擊折<合節>臂, 奔入敵中戰死. <合節>曰: "私天崩矣, 不死何爲?" 亦交鋒而死. 軍士見三人之死, 感激爭進, 所向挫鋒陷陣, 大敗賊兵, 斬首三千餘級. <庾信>收三屍, 脫衣覆之, 哭甚哀. 大王聞之涕淚, 以禮合葬於<反知山>, 恩賞妻子·九族尤渥.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말이 끝나자 그는 곧 말에 채찍질을 하며 창을 비껴 들고 적진으로 돌입하여 여러 사람을 죽이고 자기도 전사하였다. 거진이 바라보다가 나가려고 하니 합절이 말했다. "대인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도련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서 부인마님을 위로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아들이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고 어머님의 자애를 저버린다면 효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합절은 말 고삐를 잡고 놓치 않았다. 거진이 말하기를 "아버지가 죽는 것을 보고도 구차하게 산다면 이것이 어찌 이른바 효자이겠느냐?" 하고 곧 칼로 합절의 팔을 치고 말을 달려 적진으로 달려들어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합절이 "상전이 모두 죽었는데 내가 죽지 않으면 무엇을 하겠는가?"라고 말하고 그도 역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군사들이 이 세 사람의 죽음을 보고 감격하여 서로 앞을 다투어 진격하니 향하는 곳마다 적의 예봉을 꺾고 진지를 함락시켰으며 적군을 대파하여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유신이 세 사람의 시체를 거두어서 자기의 옷을 벗어 덮어 주고 슬프게 울었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예로써 반지산에 합장하고, 그들의 처자와 9족에게 은혜로운 상을 특별히 후하게 주었다.
○<竹竹>, <大耶州>人也, 父< 熱{ 勢}> 爲撰干. <善德王>時爲舍知, 佐<大耶城>都督<金品釋>幢下. <王>十一年壬寅秋八月, <百濟>將軍<允忠>領兵, 來攻其城. 先是, 都督<品釋>, 見幕客舍知<黔日>之妻有色, 奪之, <黔日>恨之. 至是爲內應, 燒其倉庫, 故城中兇懼, 恐不能固守. <品釋>之佐阿 <西川>[一云 {沙 } <祗之那{祗 那}> .], 登城謂<允忠>曰: "若將軍不殺我, 願以城降." <允忠>曰: "若如是, 所不與公同好者, 有如白日." <西川>勸<品釋>及諸將士欲出城, <竹竹>止之曰: "<百濟>反覆之國, 不可信也. 而<允忠>之言甘, 必誘我也. 若出城, 必爲賊之所虜. 與其竄伏而求生, 不若虎鬪而至死." <品釋>不聽開門. 士卒先出, <百濟>發伏兵, 盡殺之. <品釋>將出, 聞將士死, 先殺妻子而自刎. <竹竹>收殘卒, 閉城門自拒, 舍知<龍石>謂<竹竹>曰: "今兵勢如此, 必不得全, 不若生降以圖後效." 答曰: "君言當矣, 而吾父名我以<竹竹>者, 使我歲寒不凋, 可折而不可屈, 豈可畏死而生降乎?" 遂力戰, 至城陷, 與<龍石>同死. 王聞之, 哀傷, 贈<<竹竹>以級 , <龍石>以大奈麻{太奈麻} , 賞其妻子, 遷之王都.
趙炳舜. 『三國史節要』에는 '勢'로 되어 있고,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에는 '熱'로 되어 있다.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
죽죽은 대야주 사람이고, 부친 학열은 찬간이었다. 선덕왕 때 죽죽이 사지가 되어 대야성 도독 김 품석 당하에서 그를 보좌하고 있었다. 선덕왕 11년 임인 가을 8월에 백제 장군 윤충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그 성을 공격하였다. 이에 앞서 도독 품석이 자기의 막객인 사지 검일의 아내가 아름다와 그녀를 빼앗은 일이 있었다. 검일은 이를 한스럽게 여기고 있던 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가 이 때 적과 내응하여 창고에 불을 지르니, 성 안의 민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여 성을 고수하지 못할 것 같았다. 품석의 보좌관인 아찬 서천[혹은 사찬 지지나라고도 한다.]이 성에 올라 윤충에게 말했다. "만약 장군이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면 성을 바치고 항복하겠습니다." 윤충이 대답했다. "만약 그렇게 하고도 공과 내가 함께 만족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면, 그 때는 밝은 태양이 있으니 태양을 두고 맹세합시다." 서천이 품석과 여러 장병들에게 권고하여 성 밖으로 나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죽죽이 이들을 제지하면서 말했다. "백제는 말을 번복하는 나라이므로 믿을 수 없다. 윤충의 말이 달콤한 것은 필시 우리를 유인하려는 것이다. 만약 성 밖으로 나간다면 틀림없이 적의 포로가 될 것이다. 쥐새끼처럼 숨어서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호랑이처럼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는 편이 더 낫다." 그러나 품석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성문을 열었다. 사졸들이 먼저 나가자 백제가 복병을 출동시켜 모조리 죽여 버렸다. 품석이 나가려다가 장병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자기의 처자를 죽인 다음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하였다. 죽죽이 남은 군사를 수습하여 성문을 닫은 채 방위하고 있는데 사지 용석이 죽죽에게 말했다. "지금 전세가 이러하니 틀림없이 성을 보전할 수 없을 것이다. 차라리 항복하고 살아서 후일의 공적을 도모하는 것이 낫겠다." 죽죽이 대답하기를 "그대의 말도 당연하지만, 나의 아버지가 나를 죽죽이라고 이름지은 것은 나로 하여금 날씨가 추워도 시들지 말며, 꺾일지언정 굽히지 말라는 것이니, 어찌 죽기가 두렵다 하여 항복하여 살겠는가?"라 하고, 드디어 힘껏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자 용석과 함께 전사하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죽죽에게는 급찬을 추증하고, 용석에게는 대나마를 추증하였으며, 그들의 처자에게 상을 주어 왕도로 옮겨 살게 했다.
○<匹夫>, <沙梁>人也, 父<尊臺>阿 . <大宗大王{太宗大王}> 以<百濟>·<高句麗>·<靺鞨>轉相親比, 爲脣齒, 同謀侵奪, 求忠勇材堪綏禦者, 以<匹夫>爲<七重城>下縣令. 其明年庚申秋七月, 王與<唐>師滅<百濟>. 於是, <高句麗>疾我, 以冬十月, 發兵來圍<七重城>, <匹夫>守且戰二十餘日. 賊將見我士卒盡誠, 鬪不內顧, 謂不可猝拔, 便欲引還. 逆臣大奈麻<比 >密遣人告賊, 以城內食盡力窮, 若攻之必降, 賊遂復戰. <匹夫>知之, 拔劒斬<比 >首, 投之城外. 乃告軍士曰: "忠臣義士, 死且不屈, 勉哉努力! 城之存亡, 在此一戰." 乃奮拳一呼, 病者皆起, 爭先登, 而士氣疲乏, 死傷過半. 賊乘風縱火, 攻城突入. <匹夫>與上干<本宿>·<謀支>·<美齊>等, 向賊對射. 飛矢如雨, 支體穿破, 血流至踵, 乃 而死. 大王聞之, 哭甚痛, 追贈級 .
趙炳舜. 『三國史節要』.
필부는 사량 사람이며 아버지는 존대 아찬이다. 백제, 고구려, 말갈 등이 점점 친해지다가 아주 밀접한 사이가 되어 그들이 함께 신라 침탈을 도모하자, 태종대왕이 충성스럽고 용감한 인재로서 능히 적을 방어할 만한 사람을 구하여 필부를 칠중성 하의 현령으로 삼았다. 그 이듬해인 경신 가을 7월에 왕이 당 나라 군사와 함께 백제를 격멸하였다. 이에 고구려가 우리를 미워하여 겨울 10월에 군사를 동원하여 칠중성을 포위하였므로, 필부가 이를 수비하면서 20여 일 동안 계속하여 싸웠다. 적장은 우리 사졸이 성의를 다하여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싸우는 것을 보고, 이들을 쉽게 함락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여 곧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려 하였다. 이 때 역신 대나마 비삽이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적에게 고하기를, 성 안에는 양식이 떨어지고 힘이 다하였으니 만약 이를 친다면 반드시 항복할 것이라고 알리는 바람에 적은 다시 공격해왔다. 필부가 이 사실을 알고 칼을 뽑아 비삽의 머리를 베어 성밖으로 던지고 군사들에게 말했다. "충신과 의사는 죽을지언정 굽히지 않는 것이니 힘써 노력하라! 이 성의 존망이 이번 싸움에 달려 있다." 그가 주먹을 휘두르며 한바탕 호통을 치니 병 든 자들도 모두 일어나 앞을 다투어 성에 올랐으나, 곧 사기가 사라져 사상자가 반이 넘었다. 그 때 적이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지르고 성안으로 공격해왔다. 필부는 상간 본숙, 모지, 미제 등과 함께 적을 향하여 활을 쏘았다. 그러나 빗발같이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온 몸에 상처를 입어, 피가 발꿈치까지 흘러 내리자 땅에 쓰러져 전사하였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슬프게 울며 그에게 급찬을 추증하였다.
○<階伯>, <百濟>人, 仕爲達率. <唐><顯慶>五年庚申, <高宗>以<蘇定方>爲<神丘道>大摠管, 率師濟海, 與<新羅>伐<百濟>. <階伯>爲將軍, 簡死士五千人拒之, 曰: "以一國之人, 當<唐>·<羅>之大兵, 國之存亡, 未可知也. 恐吾妻 , 沒爲奴婢, 與其生辱, 不如死快." 遂盡殺之. 至<黃山>之野, 設三營, 遇<新羅>兵將戰, 誓衆曰: "昔<句踐>以五千人, 破兵七十萬衆, 今之日, 宜各奮勵決勝, 以報國恩." 遂 戰, 無不以一當千, <羅>兵乃却. 如是進退, 至四合, 力屈以死.
三國史記卷第四十七.
계백은 백제인으로 관직이 달솔이었다. 당 현경 5년 경신에 고종이 소정방을 신구도 대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신라와 함께 백제를 치게 했다. 계백은 장군이 되어 결사대 5천 명을 선발하여 이를 방어하며 말했다. "한 나라의 인력으로 당과 신라의 대군을 당하자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도다. 나의 처자가 붙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통쾌하게 죽는 것이 낫겠다." 그는 말을 마치고 마침내 자기의 처자를 모두 죽였다. 그가 황산벌에 이르러 세 개의 진영을 치고 있다가 신라 군사를 만나 곧 전투를 시작하려 할 때 여러 사람에게 맹세하였다. "옛날 월왕 구천은 5천 명의 군사로 오 나라의 70만 대군을 격파하였으니, 오늘 우리는 마땅히 각자 분발하여 싸우고, 반드시 승리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그들이 드디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사람마다 일당천의 전과를 올리자 신라 군사가 퇴각하였다. 이렇게 그는 진퇴를 네 번이나 거듭하다가 마침내 힘이 부족하여 전사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47 끝
三國史記卷第四十八 삼국사기 권 제 48
列傳第八.<向德>·<聖覺>·<實兮>·<勿稽子>·<百結先生>·<劒君>
<金生>·<率居>·孝女<知恩>·<薛氏>·<都彌>.
열전 제 8. 상덕. 성각. 실혜. 물계자. 백결선생. 검군.
김 생. 솔거. 효녀 지은. 설씨. 도미.
○<向德>, <熊川州><板積鄕>人也. 父名<善>, 字<潘吉>, 天資溫良, 鄕里推其行. 母則失其名. <向德>亦以孝順, 爲時所稱. <天寶>十四年乙未, 年荒民饑, 加之以疫 , 父母飢且病, 母又發癰, 皆濱於死. <向德>日夜不解衣, 盡誠安慰, 而無以爲養, 乃 肉以食之. 又 母癰, 皆致之平安. 鄕司報之州, 州報於王. 王下敎, 賜租三百斛·宅一區·口分田若干, 命有司立石紀事, 以標之. 至今, 人號其地云孝家(+里) .
今西龍.
상덕은 웅천주 판적향 사람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선이고 자는 반길인데, 품성이 온순하고 선량하여 향리에서 그의 품행을 높이 칭송하였다. 어머니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상덕도 효성스럽고 공손하여 당시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천보 14년 을미에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굶주렸고 더욱이 전염병까지 겹치는 바람에 부모가 굶주리고 병들었으며, 어머니는 또한 종기가 나서 거의 죽어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상덕은 밤낮으로 옷을 벗을 틈도 없이 정성을 다하여 부모를 간호하였으나, 특별히 봉양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자 그는 자기의 넙적다리 살을 베어 먹였다. 그리고 어머니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내어 병을 치료하였다. 향사에서는 이 일을 주에 보고하고, 주에서는 왕에게 보고하니, 왕이 하교하여 벼 3백 섬과 집 한 채와 구분전 약간을 주었다. 그리고 유사에게 명하여 비석을 세우고 사적을 기록하여 이 일을 다른 사람들이 알도록 하였으니, 오늘날에 이르도록 사람들이 그 곳을 효가라고 부른다.
○<聖覺>, <菁州>人. 史失其氏族. 不樂世間名官, 自號爲居士, 依止<一利縣><法定寺>. 後歸家養母, 以老病難於蔬食, 割股肉以食之. 及死, 至誠爲佛事資薦. 大臣角干<敬信>·伊 <周元>等, 聞之國王以<熊川州><向德>故事, 賞近縣 {租} 三百石.
趙炳舜. 『三國史節要』.
성각은 청주 사람인데 기록에 그의 가계가 전해지지 않는다. 세상의 이름난 벼슬을 좋아하지 않아, 거사라고 자칭하며 일리현 법정사에 머물렀다. 나중에 본가로 돌아가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어머니가 늙고 병들어서 채식만으로는 부족하였으므로 다리 살을 베어서 먹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지성으로 불공을 드려 복을 빌었다. 대신 각간 경신과 이찬 주 원 등이 국왕에게 웅천주 상덕의 이야기를 하니, 국왕이 가까운 고을의 조 3백 석을 상으로 주었다.
○論曰: <宋祁>『唐書』云: "善乎, <韓愈>之論也! 曰: '父母疾, 烹藥餌, 以是爲孝, 未聞毁支體者也. 苟不傷義, 則聖賢先衆而爲之. 是不幸因而且死, 則毁傷滅絶之罪, 有歸矣, 安可旌其門, 以表異之?' 雖然, 委巷之陋, 非有學術禮義之資, 能忘身以及其親, 出於誠心, 亦足稱者, 故列焉." 則若<向德>者, 亦可書者乎!
저자의 견해 : 송 기의 [당서]에 이르기를 "한 유의 논지는 훌륭하도다! 그가 말하기를 '부모의 병환에 약을 달여서 드리는 것을 효도라고 하는데, 아직 자신의 몸을 훼손하여 봉양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진실로 이 일이 의리를 손상시키지 않는다면 성현들이 다른 사람보다 먼저 이렇게 했을 것이다. 이렇게 하다가 불행하게도 잘못되어 목숨을 잃게 된다면, 도리어 부모가 주신 몸을 상하게 하고 대를 잇지 못하는 죄가 돌아갈 것이니, 어찌 그 집에 정문을 세워 표창할 수 있으랴?'라고 하였다. 비록 그렇다고는 하나 누추한 마을에 살아 학술과 예의의 자질을 갖추지도 못했으면서도 능히 자기의 몸을 잊고 부모를 생각한 것은 성심에서 나온 것이니, 이 또한 칭찬할 만하기 때문에 기록해 둔다"고 하였다. 그런즉 상덕과 같은 이도 기록해 둘 만한 인물일 것이다.
○<實兮>, 大舍<純德>之子也. 性剛直, 不可屈以非義. <眞平王>&時{五十三年} , 爲上舍人. 時下舍人<珍堤>, 其爲人便 { } , 爲王所嬖. 雖與<實兮>同寮, 臨事互相是非, <實兮>守正不苟且. <珍堤>嫉恨, 屢讒於王曰: "<實兮>無智慧, 多膽氣, 急於喜怒, 雖大王之言, 非其意則憤不能已. 若不懲艾, 其將爲亂, 黜退之? 待其屈服, 而後用之, 非晩也." 王然之, 謫官< 林>. 或謂<實兮>曰: "君自祖考, 以忠誠公材, 聞於時. 今爲 { } 臣之讒毁, 遠宦於<竹嶺>之外·荒僻之地, 不亦痛乎? 何不直言自辨?" <實兮>答曰: "昔, <屈原>孤直, 爲<楚> 黜, <李斯>盡忠, 爲<秦>極刑. 故知 臣或{惑} 主, 忠士被斥, 古亦然也, 何足悲乎?" 遂不言而往, 作長歌見意.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실혜는 대사 순덕의 아들인데 성품이 강직하여 불의로써는 그를 굴복시킬 수 없었다. 진평왕 때 그가 상사인이 되었는데, 당시 하사인이었던 진제는 아첨을 잘하여 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가 비록 실혜와 동료로 있었지만 일을 처리할 때는 서로 시비를 다툴 때가 있었는데 실혜는 정도를 지키고 구차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진제가 이를 시기하고 원망하여 누차 왕에게 참소하기를 "실혜는 지혜가 없고 담기가 많아서 곧잘 기뻐하거나 화를 내어, 비록 대왕의 말이라도 자기의 뜻에 맞지 않으면 분을 참지 못합니다. 만약 이를 징계하지 않는다면 장차 난을 일으킬 것인데 왜 그를 내쫓지 않습니까? 그가 굴복하기를 기다렸다가 그 때 등용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 말을 옳게 여겨 그를 영림으로 귀양보냈다. 어떤 사람이 실혜에게 말했다. "그대는 조부 때부터 충성과 나라의 재목감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었는데, 이제 아첨 잘하는 신하의 참소와 훼방을 입어 멀리 죽령 밖의 황폐하고 궁벽한 곳에서 벼슬살이를 하게 되니 통탄스럽지 않은가? 왜 바른 대로 말하여 사실을 밝히지 않는가?" 실혜가 대답하였다. "옛날 굴 원은 고고하고 충직하여 초왕에게서 쫓겨났고, 이 사는 충성을 다하다가 진의 극형을 받았다. 그러므로 아첨 잘하는 신하가 임금을 미혹케 하여 충신이 배척 당하는 것은 옛날에도 있었던 일이니 무엇을 슬퍼하겠는가?" 그는 마침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서 긴 시를 지어 자신의 뜻을 노래하였다.
○<勿稽子>, <奈解>尼師今時人也. 家世平微, 爲人倜 , 少有壯志. 時八浦上國同謀伐<阿羅國>, <阿羅>使來, 請救. 尼師今使王孫< 音>, 率近郡及六部軍往救, 遂敗八國兵. 是役也, <勿稽子>有大功, 以見憎於王孫, 故不記其功. 或謂<勿稽子>曰: "子之功莫大, 而不見錄, 怨乎?" 曰: "何怨之有?" 或曰: " 聞之於王?" <勿稽子>曰: "矜功求名, 志士所不爲也. 但當勵志, 以待後時而已." 後三年, <骨浦>·<柒浦>·<古史浦>三國人, 來攻<竭火城>, 王率兵出救, 大敗三國之師, <勿稽子>斬獲數十餘級, 及其論功, 又無所得. 乃語其婦曰: "嘗聞爲臣之道, 見危則致命, 臨難則志{忘} 身, 前日<浦上竭火>之役, 可謂危且難矣, 而不能以致命忘身, 聞於人, 將何面目以出市朝乎?" 遂被髮携琴, 入<師 山>, 不反{返} .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물계자는 나해 이사금 때 사람으로서 집안은 미천하였으나 사람됨이 활달하였으며 젊어서는 장대한 뜻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 포상의 여덟 나라가 공모하여 아라국을 치니 아라의 사신이 와서 구원을 청하였다. 이사금이 왕손 나음에게 근군 및 6부의 군사를 주어 그들을 돕게하여 마침내 여덟 나라의 병사를 격파하였다. 이 전쟁에서 물계자는 큰 공을 세웠으나 왕손에게 미움을 샀기 때문에 그 공이 기록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물계자에게 말했다. "그대의 공이 컸는데도 기록이 되지않아 원망스러운가?" 물계자가 말했다. "무슨 원망이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또 말하기를 "왜 임금님께 아뢰지 않는가?" 하니, 물계자가 말하기를 "공을 자랑하고 이름을 구하는 것은 지사가 할 일이 아니다. 다만 마음을 갈고 닦아 후일을 기다릴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그 뒤 3년이 지나 골포, 칠포, 고사포 등 세 나라 사람들이 와서 갈화성을 침공하자,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구원하여 세 나라의 군사를 대파하였는데, 물계자가 수십여 명을 잡아 목베었으나 공을 논할 때 또한 소득이 없었다. 그러자 그는 그의 부인에게 말했다. "일찌기 듣건대 신하된 도리는 위급한 것을 보면 목숨을 내놓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자기 몸을 잊는다고 하였소. 전 날의 포상갈화에서의 싸움은 위급하고도 어려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었건만 목숨을 내놓거나 몸을 버리며 싸울 수 없었고. 이것이 세상에 알려졌으니, 장차 무슨 면목으로 거리에 나가겠소?" 그는 마침내 머리를 풀고 거문고를 지닌 채 사체산으로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百結先生>, 不知何許人. 居<狼山>下, 家極貧, 衣百結若懸 , 時人號爲東里<百結先生>. 嘗慕<榮啓期>之爲人, 以琴自隨, 凡喜怒悲歡不平之事, 皆以琴宣之. 歲將暮, 隣里 粟, 其妻聞杵聲曰: "人皆有粟 之, 我獨無焉, 何以卒歲?" 先生仰天嘆曰: "夫死生有命, 富貴在天. 其來也不可拒, 其往也不可追. 汝何傷乎? 吾爲汝, 作杵聲以慰之." 乃鼓琴作杵聲, 世傳之, 名爲 樂.
백결 선생은 어느 곳 사람인지 알 수 없다. 그는 낭산 밑에 살았는데 아주 가난하였다. 그는 백 군데나 기워 마치 메추라기를 달아맨 것 같은 옷을 입고 다녔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동리 백결 선생이라고 불렀다.
그는 일찌기 영 계기의 사람됨을 흠모하여 거문고를 가지고 다니면서 기쁘고 성나고 슬프고 즐거운 일과 불평스러운 일을 모두 거문고로써 풀었다. 한 해가 저물어 갈 무렵 이웃에서 곡식을 찧으면 그의 아내가 방아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남들은 모두 찧을 곡식이 있는데 우리만 곡식이 없으니 무엇으로 설을 쇠리오?" 하니 백결 선생이 하늘을 우러러 한탄하기를 "무릇 죽고 사는 것에는 운명이 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있어, 그것이 와도 막을 수 없고 그것이 가도 좇을 수 없는 법이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마음 아파하는가? 내가 그대를 위하여 방아소리를 내어 위로하겠소"라 하고, 곧 거문고를 타서 방아소리를 내었다. 세상에 이것이 전하는데 대악이라고 부른다.
○<劒君>, <仇文>大舍之子, 爲<沙梁宮>舍人. <建福>四十四{九} 年丁亥秋八月, 隕霜殺諸穀, 明年春夏大飢, 民賣子而食. 於時, 宮中諸舍人同謀, 盜<唱 倉>穀分之, <劒君>獨不受. 諸舍人曰: "衆人皆受, 君獨却之, 何也? 若嫌小, 請更加之." <劒君>笑曰: "僕編名於<近郞>之徒, 修行於風月之庭, 苟非其義, 雖千金之利, 不動心焉." 時<大日>伊 之子, 爲花郞, 號<近郞>, 故云爾. <劒君>出至<近郞>之門, 舍人等密議不殺此人, 必有漏言, 遂召之. <劒君>知其謀殺, 辭<近郞>曰: "今日之後, 不復相見." <郞>問之, <劒君>不言, 再三問之, 乃略言其由. <郞>曰: "胡不言於有司?" <劒君>曰: "畏己死, 使衆人入罪, 情所不忍也." "然則 逃乎?" 曰: "彼曲我直, 而反自逃, 非丈夫也." 遂往. 諸舍人置酒謝之, 密以藥置食, <劒君>知而强食, 乃死. 君子曰: "<劒君>死非其所, 可謂輕泰山於鴻毛者也."
『북한본』.
검군은 구문 대사의 아들로 사량궁 사인이 되었다. 건복 49년 정해 가을 8월에 서리가 내려 모든 곡식을 죽이는 바람에 이듬해 봄과 여름에 큰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자식을 팔아 먹고 사는 형편이 되었다.
이 때 궁중의 여러 사인들이 공모하여 창예창의 곡식을 훔쳐서 나누어 가졌는데, 검군만은 홀로 받지 않았다. 모든 사인들이 말했다. "여러 사람이 모두 받았는데 그대만이 거절하니 무슨 일인가? 만일 적어서 그렇다면 더 주겠다." 검군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근랑의 문도에 이름을 두었고, 풍월도의 마당에서 수행을 하였으니, 실로 의로운 것이 아니면 천금의 이익이라도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이 때 대일 이찬의 아들이 화랑이 되어 근랑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검군은 그곳을 나와 근랑의 집에 이르렀다. 사인들이 은밀히 의논하기를, 이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틀림없이 말이 누설될 것이라 하여 드디어 그를 불렀다. 검군은 그들이 자기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는 줄 알고 근랑에게 하직하며 말했다. "오늘 이후로는 다시 뵙지 못하겠습니다." 근랑이 이유를 물었으나 검군이 말하지 않다가, 재삼 묻자 그 이유를 대략 이야기하였다. 근랑이 말했다. "왜 유사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는가?" 검군이 말했다. "자기가 죽는 것을 두려워하여 여러 사람이 죄에 걸리게 하는 것은 인정상 차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자 근랑이 말했다. "그러면 왜 도망하지 않느냐?" 검군이 대답하였다. "저들이 잘못되고 내가 바른데 도리어 내가 도망한다면 이는 장부의 행동이 아닙니다." 검군은 말을 마치고 마침내 사인들에게 갔다. 여러 사인들이 술을 대접하며 사죄하면서 검군 몰래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 검군은 이를 눈치채고도 억지로 그것을 먹고 죽었다. 군자가 말했다. "검군은 죽을 자리가 아닌데 죽었으니, 이는 태산같이 소중한 목숨을 홍모보다 가벼이 여긴 것이라 하겠다."
○<金生>, 父母微, 不知其世系. 生於<景雲>二年, 自幼能書, 平生不攻他藝, 年踰八十, 猶操筆不休. 隸書行草皆入神, 至今, 往往有眞蹟, 學者傳寶之. <崇寧>中, 學士<洪灌>隨進奉使入<宋>, 館於<卞京>. 時翰林待詔<楊球>·<李革>, 奉帝勅至館, 書圖簇. <洪灌>以<金生>行草一卷, 示之, 二人大駭曰: "不圖今日得見<王右軍>手書." <洪灌>曰: "非是, 此乃<新羅>人<金生>所書也." 二人笑曰: "天下除<右軍>, 焉有妙筆如此哉?" <洪灌>屢言之, 終不信. 又有<姚克一>者, 仕至侍中兼侍書學士, 筆力 勁, 得<歐陽>率更法. 雖不及<生>, 亦奇品也.
김 생은 부모가 미천하여 가문의 내력을 알 수 없다. 경운 2년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다. 그는 평생동안 다른 기예는 닦지 않았으며 나이 80세가 넘어서도 붓을 놓지 않았다. 예서와 행서 초서가 모두 입신의 경지여서 지금까지도 더러 그의 진필이 남아 있는데 학자들이 보배로 여겨 전하고 있다. 숭녕 연간에 학사 홍 관이 진봉사를 따라 송에 들어가서 변경에 묵고 있었는데, 이 때 한림 대조 양 구, 이 혁 등이 황제의 칙서를 받들고 사관에 와서 그림 족자에 글씨를 썼다. 홍 관이 그들에게 김 생이 쓴 행초 한 권을 보이니 두 사람이 크게 놀라 말하기를 "오늘날 왕 우군의 친필을 보게 될 줄 몰랐다"고 하였다. 홍 관이 말하기를 "아니오. 이것은 신라인 김 생이 쓴 것이오" 하니 두 사람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천하에 왕 우군말고 어찌 이런 묘필이 있겠오?"라고 하였다. 홍 관이 여러 번 말하였지만 그들이 끝내 믿지 않았다. 또한 요 극일이라는 사람이, 벼슬이 시중 겸 시서 학사에 이르렀는데 필력이 좋아 구양 순의 솔경의 필법을 터득하였다. 비록 김 생에게는 못 미쳤지만 역시 특이한 기품을 가지고 있었다.
○<率居>, <新羅>人, 所出微, 故不記其族系. 生而善畵, 嘗於<皇龍寺>壁畵老松, 體幹鱗 , 枝葉盤屈, 烏鳶燕雀, 往往望之飛入. 及到, 而落. 歲久色暗, 寺僧以丹靑補之, 烏雀不復至. 又<慶州><芬皇寺>觀音菩薩·<晉州><斷俗寺><維摩>像, 皆其筆蹟, 世傳爲神畵.
솔거는 신라인인데 출신이 미천하여 가문의 내력을 기록해 놓지 않았다. 그는 선천적으로 그림을 잘 그렸다. 그가 일찌기 황룡사 벽에 노송을 그린 적이 있었는데, 줄기가 비늘 같았으며, 가지와 잎이 구불구불하여 까마귀, 솔개, 제비, 참새 등이 가끔 멀리서 바라보고 날아들다가 벽화에 이르러서는 벽에 부딪혀 떨어지곤 하였다. 세월이 오래 되어 색깔이 변하자 절의 승려들이 단청으로 덧칠을 하였다. 그 후로 까마귀와 참새가 다시는 오지 않았다. 또한 경주 분황사의 관음보살과 진주 단속사의 유마 화상이 모두 그가 그린 것인데 세상 사람들이 대대로 신화라고 말한다.
○孝女<知恩>, <韓 部>百姓<連權>女子也. 性至孝, 少喪父, 獨養其母. 年三十二, 猶不從人, 定省不離左右, 而無以爲養, 或傭作或行乞, 得食以飼之. 日久不勝困憊, 就富家請賣身爲婢, 得米十餘石. 窮日行役於其家, 暮則作食歸養之. 如是三四日, 其母謂女子曰: "向, 食 而甘, 今則食雖好, 味不如昔, 而肝心若以刀刃刺之者, 是何意耶?" 女子以實告之. 母曰: "以我故使爾爲婢, 不如死之速也." 乃放聲大哭, 女子亦哭, 哀感行路. 時<孝宗>郞出遊, 見之, 歸請父母, 輸家粟百石及衣物予之, 又償買主以從良. 郞徒幾千人, 各出粟一石爲贈. 大王聞之, 亦賜租五百石, 家一區, 復除征役. 以粟多恐有剽竊者, 命所司差兵番守. 標榜其里曰<孝養坊>, 仍奉表, 歸美於<唐>室. <孝宗>, 時第三宰相舒發翰<仁慶>子, 少名<化達>, 王謂雖當幼齒, 便見老成, 卽以其兄<憲康王>之女, 妻之.
효녀 지은은 한기부 백성 연권의 딸이다. 그녀는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그리하여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어머니를 모셨다. 그녀는 나이 32세가 되어도 시집을 가지 않고 어머니를 보살피기 위하여 곁을 떠나지 않았다. 봉양할 거리가 없으면 어떤 때는 품팔이도 하고 어떤 때는 구걸도 하여 밥을 구해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그러한 생활이 오래 되자,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여 부잣집에 가서 자청하여 몸을 팔아 종이 되고 쌀 10여 석을 얻었다. 그녀는 하루 종일 그 집에서 일을 해주고 날이 저물면 밥을 지어 가지고 돌아와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이렇게 3, 4일 지나자 그의 어머니가 딸에게 이르기를 "전에는 밥이 나빠도 맛이 좋았는데 지금은 밥이 좋은데도 맛이 옛날만 못하고, 마치 살 속을 칼로 찌르는 듯하니 이것이 웬일이냐?"라고 하였다. 딸이 사실대로 고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나 때문에 너를 종이 되게 하였으니 차라리 빨리 죽는 편이 낫겠다"고 하면서 소리를 내어 크게 우니 딸도 따라 울어서 그 슬픔이 길 가는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이 때 효종랑이 지나가다가 그것을 보고 돌아와서 부모에게 청하여 자기집 곡식 1백 석과 옷가지를 실어다 주었다. 그리고 또한 그녀가 몸을 판 사람에게 몸 값을 보상해 주고 양민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낭도 몇 천 명이 각각 곡식 1섬 씩을 주었다. 대왕이 이를 듣고 또한 벼 5백 석과 집 한 채를 하사하고, 부역을 면제하여 주었으며, 곡식이 많아서 도둑이 들까 염려하여 관계자에게 명하여 군사를 보내 교대로 지켜주게 하였다. 그리고 그 마을을 효양방이라 하고 표문을 올려 당 나라 왕실에도 그녀의 아름다운 행실을 알렸다.
효종(랑)은 당시 제삼 재상인 서발한 인경의 아들로서 아명은 화달이었다. 왕이 생각하기를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어른스러운 면이 있다고 여겨 즉시 형 헌강왕의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다.
○<薛>氏女, <栗里>民家女子也. 雖寒門單族, 而顔色端正, 志行脩整, 見者無不歆艶, 而不敢犯. <眞平王>時, 其父年老, 番當防秋於<正谷>. 女以父衰病, 不忍遠別, 又恨女身不得待{代} 行, 徒自愁悶. <沙梁部>少年<嘉實>, 雖貧且 , 而其養志貞男子也, 嘗悅美<薛>氏, 而不敢言. 聞<薛>氏憂父老而從軍, 遂請<薛>氏曰: " {僕} 雖一懦夫, 而嘗以志氣自許, 願以不肖之身, 代嚴君之役." <薛>氏甚喜, 入告於父. 父引見曰: "聞公欲代老人之行, 不勝喜懼, 思所以報之, 若公不以愚陋見棄, 願薦幼女子, 以奉箕 ." <嘉實>再拜曰: "非敢望也, 是所願焉." 於是, <嘉實>退而請期. <薛>氏曰: "婚姻人之大倫, 不可以倉猝. 妾旣以心許, 有死無易, 願君赴防. 交代而歸, 然後卜日成禮, 未晩也." 乃取鏡分半, 各執一片云: "此所以爲信, 後日當合之." <嘉實>有一馬, 謂<薛>氏曰: "此, 天下良馬, 後必有用. 今我徒行, 無人爲養, 請留之, 以爲用耳." 遂辭而行.
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설씨 여자는 율리에 사는 백성 집안의 딸이었다. 비록 빈한하고 외로운 집안이었으나 용모가 단정하고 품행이 얌전하여 보는 이들이 모두 그 아름다움에 반하였지만 감히 범접하지 못하였다. 진평왕 때 그의 아버지가 연로함에도 불구하고 정곡에서 곡식을 지키는 당번을 서게 되었다. 딸은 아버지가 노쇠하고 병들어 차마 멀리 보낼 수 없고 또한 여자의 몸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갈 수도 없어서 고민만 하고 있었다. 사량부 소년 가실은 비록 가난하고도 궁핍하나 의지를 곧게 기른 남자로서, 일찌기 설씨의 아름다움을 좋아하면서도 감히 말을 못하고 있었다. 그는 설씨가, 아버지가 늙어서 종군하게 되었음을 걱정한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설씨에게 말했다. "내 비록 일개 나약한 사나이지만 일찌기 의지와 기개로 자부하던 터이니, 원컨대 불초의 몸이 엄친의 일을 대신코자 하오." 설씨가 매우 기뻐하며 아버지에게 들어가 이 말을 고하였다. 아버지가 그를 불러서 보고 말하기를 "공이 이 늙은이의 행역을 대신하고자 한다는 말을 들으니 기쁘고도 송구스러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네. 보답을 하고 싶은데 만약 공이 어리석고 누추하다 하여 버리지 않는다면 어린 딸을 주어 받들게 하고 싶네"라고 하니, 가실이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감히 바랄 수는 없으나 원하는 바였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가실이 물러 나와 혼인할 기일을 청하였다. 설씨가 말했다. "혼인은 인간의 대사이니, 함부로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이미 마음을 허락하였으니 죽는 한이 있더라도 변함이 없을 것이니, 그대가 방위에 나갔다가 교대하여 돌아온 뒤에 날을 받아 혼례를 치루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고, 거울을 절반으로 나누어 각각 한 쪽씩 지니며 말했다. "이것을 신표로 삼아 뒷날 맞추어 봅시다."
가실에게는 말이 한 필 있었다. 그는 설씨에게 말했다. "이것은 천하의 양마라오. 훗날 반드시 쓸 데가 있을 것이오. 지금 내가 가고 나면 기를 사람이 없으니 여기에 두었다가 쓰기 바라오." 그는 드디어 설씨와 작별하였다.
○會, 國有故, 不使人交代, 淹六年未還. 父謂女曰: "始以三年爲期, 今旣踰矣. 可歸于他族矣." <薛>氏曰: "向以安親, 故强與<嘉實>約. <嘉實>信之, 故從軍累年, 飢寒辛若{苦} . 況迫賊境, 手不釋兵, 如近虎口, 恒恐見 , 而棄信食言, 豈人情乎? 終不敢從父之命, 請無復言." 其父老且 , 以其女壯而無伉儷, 欲强嫁之, 潛約婚於里人, 旣定日引其人. <薛>氏固拒, 密圖遁去而未果. 至廐, 見<嘉實>所留馬, 大{太} 息流淚. 於是<嘉實>代來, 形骸枯槁, 衣裳藍縷, 室人不知, 謂爲別人. <嘉實>直前, 以破鏡投之, <薛>氏得之呼泣, 父反{及} 室人失喜. 遂約異日相會, 與之偕老.
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趙炳舜.
공교롭게도 나라에 일이 있어서, 기한 내에 교대를 시켜주지 않는 바람에 가실은 6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하였다. 아버지가 딸에게 이르기를 "처음에 3년을 기한으로 하였는데 지금 이미 기한이 지났으니 다른 집으로 시집을 가야겠다" 하니, 설씨가 말하기를 "전일에 아버지를 편안하게 하기 위하여 억지로 가실과 약속을 하였고, 가실이 그것을 믿었기 때문에 여러 해 동안 군무에 종사하여 춥고 배고픔에 고생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적의 국경에 접근하여 손에 병기를 놓지 않고 있으니, 이는 호랑이 입에 가까이 있는 것과 같은지라 항상 물릴까봐 염려되는데, 신의를 버리고 약속을 어기는 것이 어찌 사람의 정리이겠습니까? 아무래도 아버지의 명령을 따를 수가 없으니 다시는 말씀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그 아버지는 늙고 정신이 맑지 않아 딸이 장성하도록 짝이 없다 하여 억지로 시집을 보내려고 몰래 마을 사람과 혼인을 약속하여 날을 정해 놓고 그 사람을 맞아 들였다. 설씨가 굳이 거절하고 몰래 도망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마굿간에 가서 가실이 두고 간 말을 보고 한숨을 쉬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 때 가실이 교대되어 돌아 왔는데 그의 형상이 초췌하고 의복이 남루하여 집안 사람들도 알아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에 가실이 앞으로 나아가 깨어진 거울을 던지니 설씨가 이것을 받아들고 소리내어 울고 아버지와 집안 사람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마침내 다른 날로 약정하여 서로 만나 해로하였다.
○<都彌>, <百濟>人也. 雖編戶小民, 而頗知義理. 其妻美麗, 亦有節行, 爲時人所稱. <蓋婁王>聞之, 召<都彌>與語曰: "凡婦人之德, 雖以貞潔爲先, 若在幽昏無人之處, 誘之以巧言, 則能不動心者, 鮮矣乎!" 對曰: "人之情, 不可測也, 而若臣之妻者, 雖死無貳者也." 王欲試之, 留<都彌>以事, 使一近臣, 假王衣服馬從, 夜抵其家, 使人先報王來. 謂其婦曰: "我久聞爾好, 與<都彌>博得之. 來日入爾爲宮人, 自此後, 爾身吾所有也."
도미는 백제인이다. 비록 소민에 편입되어 있었으나 의리에 아주 밝았다. 그의 아내는 예쁘기도 하고 행실에 절조가 있어 당시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개루왕이 이를 듣고 도미를 불러 말했다. "대체로 부인의 덕은 정결을 으뜸으로 치지만 만일 어둡고 사람이 없는 곳에서 달콤한 말로 유혹하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도미가 대답하였다. "사람의 정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지만 저의 아내와 같은 여자는 죽어도 변함이 없을 사람입니다."
왕이 이를 시험해 보기 위하여 일을 핑계로 도미를 붙잡아 두고 가까운 신하 한 사람으로 하여금 왕의 의복과 말과 종자를 가장하여 밤에 도미의 집으로 가게 하고, 사람을 보내 미리 왕이 온다고 알리게 하였다. 가짜 왕이 부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래전부터 네가 예쁘다는 말을 듣고 도미와 내기를 하여 이겼다. 내일 너를 데려다가 궁인으로 삼을 것이니 지금부터 너의 몸은 내 것이다"라고 하였다.
○遂將亂之. 婦曰: "國王無妄語, 吾敢不順? 請大王先人{入} 室! 吾更衣乃進." 退而雜 一婢子薦之. 王後知見欺, 大怒, 誣<都彌>以罪, 其兩眸子, 使人牽出之, 置小船泛之河上. 遂引其婦, 强欲淫之. 婦曰: "今良人已失, 單獨一身, 不能自持. 況爲王御, 豈敢相違? 今以月經, 渾身汚穢, 請俟他日, 薰浴而後來." 王信而許之. 婦便逃至江口, 不能渡, 呼天慟哭, 忽見孤舟, 隨波而至, 乘至<泉城島>, 遇其夫未死掘草根以喫, 遂與同舟, 至<高句麗>< 山>之下. <麗>人哀之, 以衣食. 遂苟活, 終於羈旅.
三國史記卷第四十八.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그가 마침내 덤벼들려 하니 부인이 말하기를 "국왕은 망언을 하지 않을 것이니 제가 어찌 감히 순종하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대왕께서는 먼저 방으로 들어가소서! 제가 옷을 갈아 입고 들어가겠습니다" 하고 물러나와 어여쁜 여종 하나를 단장시켜 모시게 하였다. 왕이 나중에 속은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도미에게 죄를 씌워서 그의 두 눈을 뽑아 버리고 사람을 시켜 끌어내어 조그마한 배에 싣고 강 위에 띄워 보냈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 부인을 끌어 들여 억지로 간음하려 하니 부인이 말했다. "이제 이미 남편을 잃어 혼자 몸으로는 스스로를 부지할 수 없사온데 더구나 왕을 모시게 되었으니 어찌 감히 어기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제가 월경으로 온 몸이 더러우니 다른 날 목욕을 깨끗이 한 뒤에 오겠습니다." 왕이 이를 믿고 허락하였다. 그녀는 곧 도망하여 강 어구에 이르렀다. 그러나 건널 수가 없어서 하늘을 바라보며 통곡하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배 한 척이 물결을 따라 다가오자, 그녀는 그 배를 타고 천성도에 이르러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아직 죽지 않고 풀뿌리를 캐어 먹으며 살고 있었다. 그들은 마침내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의 산산 밑에 이르렀다. 고구려인들이 그들을 불쌍히 여겨 옷과 밥을 주었다. 그리하여 구차스럽게 살다가 객지에서 일생을 마쳤다.
삼국사기 권 제 48 끝
三國史記卷第四十九 삼국사기 권 제 49
列傳 第 9 <倉助利>·<淵蓋蘇文>.
열전 제 9 창 조리. 연개소문.
○<倉助利>, <高句麗>人也, <烽上王>時, 爲國相. 時<慕容 >爲邊患. 王謂群臣曰: "<慕容>氏兵强, 屢犯我疆 , 爲之奈何?" <倉助利>對曰: "北部大兄<高奴子>, 賢且勇, 大王若欲禦寇安民, 非<高奴子>, 無可用者." 王以爲新城太守, <慕容 >不復來. 九年秋八月, 王發國內丁男年十五已上, 修理宮室. 民乏於食, 困於役, 因之以流亡. <倉助利>諫曰: "天災 至, 年穀不登, 黎民失所, 壯者流離四方, 老幼轉乎溝壑. 此誠畏天憂民, 恐懼修省之時也.
창 조리는 고구려인인데 봉상왕 때 국상이 되었다. 당시에는 모용 외가 변경의 걱정거리가 되어 있었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모용씨는 병력이 강력하여 누차 우리의 강역을 침범하니 이를 어찌 할 것인가?" 하니, 창 조리가 대답하기를 "북부 대형 고노자가 현명하고도 용감하니, 대왕께서 외적을 막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시려면 고노자가 아니고는 쓸 만한 자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고노자를 신성 태수로 삼으니, 모용 외가 다시는 오지 못했다. 9년 가을 8월에 왕이 15세 이상 되는 전국의 장정을 징발하여 궁실을 수리하자, 백성들이 식량이 부족하고 노역에 시달리게 되어 고향을 떠나 유랑 생활을 하였다. 창 조리가 간하여 말하기를 "천재가 거듭되고 곡식이 잘 익지 않아서, 백성들은 살 곳을 잃고, 장정들은 사방으로 유랑하고, 노인과 아이들은 구렁텅이에서 뒹굴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참으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걱정하며 두려움을 가지고 자신을 반성할 때입니다.
○大王曾是不思, 驅飢餓之人, 困木石之役, 甚乖爲民父母之意, 而況比隣有强梗之敵, 若乘吾弊以來, 其如社稷生民何? 願大王熟計之." 王 曰: "君者, 百姓之所瞻望也. 宮室不壯麗, 無以示威重. 今相國, 蓋欲謗寡人, 以干百姓之譽也." <助利>曰: "君不恤民, 非仁也, 臣不諫君, 非忠也. 臣旣承乏國相, 不敢不言, 豈敢干譽乎?" 王笑曰: "國相欲爲百姓死耶? 冀無後{復} 言." <助利>知王之不悛, 退與群臣謀廢之. 王知不免, 自縊.
李丙燾.
대왕께서는 이것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부려 토목공사에 시달리게 하시니, 이것은 백성의 부모된 사람이 할 일과는 크게 어긋나는 것입니다. 더구나 가까운 이웃에 강한 적이 있는데, 만약 우리가 피폐해진 틈을 타서 그들이 쳐들어 온다면 사직과 생민을 어떻게 하시렵니까?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생각하소서."
왕이 노하여 말했다. "임금이란 백성들이 우러러 보는 존재이다. 궁실이 장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보일 수 없다. 이제 상국은 과인을 비방함으로써 아마도 백성들의 칭송을 얻으려는 모양이구나." 조리가 말했다. "임금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면 인한 것이 아니며, 신하가 임금에게 간언을 하지 않으면 충성이 아닙니다. 신은 이미 국상의 빈 자리를 이어받고 있으므로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 어찌 감히 백성의 칭송을 바라겠습니까?" 왕이 웃으며 말했다. "국상은 백성을 위하여 죽으려는가? 다시 말하지 말기를 바란다." 조리는 왕에게 개전의 정이 없음을 알고 물러나와 여러 신하들과 함께 폐위시킬 것을 모의했다. 왕은 사태를 모면할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蓋蘇文>[或云<蓋金>.], 姓<泉>氏. 自云生氷{水} 中, 以惑衆. 儀表雄偉, 意氣豪逸. 其父東部[或云西部.]大人大對盧死, <蓋蘇文>當嗣, 而國人以性忍暴, 惡之不得立. <蘇文>頓首謝衆, 請攝職, 如有不可, 雖廢無悔. 衆哀之, 遂許. 嗣位而凶殘不道, 諸大人與王, 密議欲誅, 事洩. <蘇文>悉集部兵, 若將校閱者, 幷盛陳酒饌於城南, 召諸大臣共臨視. 賓至, 盡殺之, 凡百餘人. 馳入宮弑王, 斷爲數段, 棄之溝中. 立王弟之子<臧>爲王, 自爲莫離支, 其官如<唐>兵部尙書兼中書令職也.
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개소문[혹은 개금이라고 한다.]은 성이 천씨이다. 스스로 물 속에서 났다고 하여 사람들을 미혹시켰다. 그는 외양이 웅장하고 의기가 호방하였다. 그의 부친 동부[혹은 서부라고 한다.] 대인 대대로가 사망하자, 개소문이 마땅히 그 뒤를 이어야 할 것이지만, 나라 사람들이 그의 성품이 잔인하고 포악하다 하여 미워하였기 때문에 뒤를 잇지 못하게 되었다. 소문이 머리를 조아리며 여러 사람들에게 사죄하고 그 직위를 서리할 것을 간청하면서, 만약 옳지 않은 행위를 하면 폐하여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마침내 이를 허락하였다.
그가 직위를 계승하더니 흉포하고 잔인하여 무도한 행동을 하였다. 이에 따라 여러 대인들이 왕과 은밀하게 모의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이것이 그만 누설되고 말았다. 소문은 자기 부의 군사를 전부 모아 마치 사열하는 것 처럼 하고, 동시에 성 남쪽에 술과 음식을 성대히 차려 놓고 여러 대신들을 불러서 함께 사열하기를 권하였다. 손님들이 오자 그는 그들을 모조리 죽였으니, 사망자가 모두 백여 명에 이르렀다. 그는 궁중으로 달려 들어가 왕을 시해하여 몇 토막으로 잘라서 구덩이에 버렸다. 그리고는 왕의 동생의 아들 장을 왕으로 세우고 스스로 막리지가 되었다. 이 관직은 당 나라의 병부 상서 겸 중서령의 직위에 해당한다.
○於是, 號令遠近, 專制國事, 甚有威嚴. 身佩五刀, 左右莫敢仰視. 每上下馬, 常令貴人·武將伏地, 而履之. 出行, 必布隊伍, 前導者長呼, 則人皆奔 , 不避坑谷, 國人甚苦之. <唐><穆宗{太宗}> 聞<蓋蘇文>弑君而專國, 欲伐之. <長孫無忌>曰: "<蘇文>自知罪大, 畏大國之討, 設其守備. 陛下姑爲之隱忍, 彼得以自安, 愈肆其惡, 然後取之, 未晩也." 帝從之. <蘇文>告王曰: "聞中國三敎 行, 而國家道敎尙缺, 請遣使於<唐>求之." 王遂表請. <唐>遣道士<叔達>等八人, 兼賜『道德經』. 於是, 取浮屠寺館之. 會<新羅>入<唐>, 告<百濟>攻取我四十餘城, 復與<高句麗>連兵, 謀絶入朝之路. 小國不得已出師, 伏乞天兵救援.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이렇게 되자 그는 원근을 호령하고 국사를 전횡하여 위세가 대단하였다. 그는 몸에 칼을 다섯 자루나 차고 다녔으니,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도 그를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말에 오르내릴 때마다 항상 귀인과 무장을 땅에 엎드리게 하여 발판으로 삼았으며, 외출할 때는 반드시 대오를 벌려 세우고 갔는데, 앞에서 대오를 인도하는 사람이 길게 외치면 사람들이 모두 도망치면서 구덩이나 골짜기도 피하지 않았으니, 국인들이 이를 몹시 고통스럽게 여겼다.
당 태종은 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하고 국사를 전횡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치려 하였다. 이 때 장손 무기가 말했다. "소문은 자신의 죄가 큰 줄을 스스로 알고, 또한 대국의 정벌을 두려워하여 수비 대책을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조금 참고 계시다가 그가 스스로 안심하여 나쁜 일을 더욱 마음대로 하고 난 뒤에 그를 공격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황제가 그의 말을 따랐다.
소문이 왕에게 말하기를 "듣건대 중국에는 삼교가 병행한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에는 도교가 아직 없으니, 당에 사신을 보내 구해 오기를 바랍니다" 하니, 왕이 마침내 표문을 보내 이를 청하였다. 당에서는 도사 숙달 등 8명을 보내며 동시에 [도덕경]을 보내주었다. 이에 고구려에서는 그들을 사찰에 묵게 하였다. 그 때 마침 신라가 당에 가서 말하기를, 백제가 신라의 40여 성을 빼앗고, 또한 고구려와 군사를 연합하여, 신라가 당 나라로 들어오는 길을 차단하려하므로, 신라가 부득이 군사를 출동시킬 것이니, 이에 당병의 구원을 엎드려 빈다고 하였다.
○於是, <太宗>命司農丞<相里玄奬>賚璽書, 勅王曰: "<新羅>委眞{質} 國家, 朝貢不闕, 爾與<百濟>, 宜各 兵. 若更攻之, 明年, 發兵討爾國矣." 初<玄奬>入境, <蘇文>已將兵擊<新羅>, 王使召之乃還. <玄奬>宣勅, <蘇文>曰: "往者, 隋人侵我, <新羅>乘 , 奪我城邑五百里. 自此怨隙已久, 若非還我侵地, 兵不能已." <玄奬>曰: "旣往之事, 焉可追論? 今<遼東>, 本皆<中國>郡縣, <中國>尙不言, <句麗>豈得必求故地?" <蘇文>不從. <玄奬>還具言之, <太宗>曰: "<蓋蘇文>弑其君, 賊其大臣, 殘 {虐} 其民, 今又違我詔命, 不可以不討." 又遣使<蔣儼>諭旨, <蘇文>竟不奉詔, 乃以兵脅, 使者不屈, 遂囚之窟室中. 於是, <太宗>大擧兵, 親征之, 事具『句麗本紀』.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이에 태종이 사농승 상리 현장으로 하여금 새서를 가지고 고구려에 와서 왕에게 칙명을 내리기를 "신라는 우리의 맹방으로서 조공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그대와 백제는 각각 군사를 거두어야 하리라. 만일 다시 공격한다면 명년에는 군사를 출동시켜 그대의 나라를 토벌하겠노라" 하였다. 처음 현장이 국경에 들어왔을 때, 소문은 이미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쳤었는데 왕이 그를 소환하였다. 현장이 칙서를 선포하니 소문이 말하기를 "옛날 수 나라가 우리를 침략하였을 때, 신라가 이 틈을 타서 우리의 성읍 5백 리를 빼앗아 갔다. 이로부터 원한과 간극이 이미 오래되었으니, 만일 잃어버린 우리 땅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전쟁을 그만 둘 수가 없다"고 하였다. 현장이 말하기를 "기왕의 일을 어찌 추론하겠는가? 지금의 요동은 본래 모두 중국의 군현이었으나, 중국에서는 이를 오히려 따지지 않는데, 어찌 고구려가 반드시 옛 땅을 찾으려 하는가?" 하였으나 소문이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현장이 돌아가서 사실대로 모두 고하니 태종이 말했다. "개소문이 그의 임금을 시해하고 그의 대신들을 살해했으며, 백성들을 못 살게 하고 지금은 또한 나의 명령을 어기니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태종은 다시 사신 장 엄을 보내 타일렀으나 소문은 끝내 조서를 받들지 않고 군사로써 위협하였다. 사자가 이에 굴하지 않자 소문은 마침내 그를 굴 속에 가두었다. 이에 태종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직접 정벌하였으니, 이 사실이 모두 [고구려본기]에 기재되어 있다.
○<蘇文>至<乾封>元年死. 子<男生>, 字<元德>. 九歲以父任爲先人, 遷中裏小兄, 猶<唐>謁者也. 又爲中裏大兄, 知國政, 凡辭令皆<男生>主之, 進中裏位頭大兄. 久之, 爲莫離支兼三軍大將軍, 加大莫離支. 出按諸部, 而弟<男建>·<男産>, 知國事. 或曰: "<男生>惡君等逼己, 將除之." <建>·<産>未之信. 又有謂<男生>: "將不納君." <男生>遣諜往, <男建>捕得. 卽矯王命召之, <男生>懼不敢入. <男建>殺其子<獻忠>, <男生>走保<國內城>, 率其衆, 與<契丹><靺鞨>兵附<唐>, 遣子<獻誠>訴之. <高宗>拜<獻誠>右武衛將軍, 賜乘輿馬·瑞錦寶刀, 使還報.
소문은 건봉 원년에 죽었다. 그의 아들 남생은 자가 원덕인데 9세에 아버지의 임명으로 선인이 되었다가 중리 소형으로 영전되었으니, 이는 당의 알자에 해당하는 벼슬이었다. 남생은 또한 중리 대형이 되어 국정을 보살피게 되었으니, 모든 사령을 그가 주관하게 되었고, 중리 위두 대형으로 승진되었다. 오랜 뒤에 그는 막리지 겸 3군 대장군이 되었고, 결국 대막리지가 되었다. 그가 여러 부에 나가서 안찰하게 됨에 따라 그의 아우 남건과 남산이 국사를 보살피게 되었다. 누군가 남건과 남산에게 말하기를 "남생은 그대들이 자신을 핍박해 오는 것을 싫어하여 없애버리려 한다"고 하였으나, 남건과 남산이 이를 믿지 않았다. 또한 어떤 자가 남생에게 남건과 남산이 그대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남생이 첩자를 보내 두 동생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남건이 그 첩자를 잡아 두었다. 그리고 즉시 왕명을 가장하여 남생을 소환하니, 남생이 두려워 하여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다. 남건이 남생의 아들 헌충을 죽였다. 남생은 도주하여 국내성을 지키며 무리를 거느리고 거란, 말갈병과 함께 당 나라에 투항하였다. 그는 아들 헌성을 보내 하소연하였다. 고종이 헌성에게 우무위 장군을 제수하고, 수레, 말,비단, 보검을 주어 돌아가 보고하게 하였다.
○詔<契苾何力>率兵援之, <男生>乃免. 授<平壤>道行軍大摠管, 兼持節安撫大使, 擧<哥勿>·<南蘇>·<倉巖>等城以降. 帝又命西臺舍人<李虔繹>, 就軍慰勞, 賜 {袍} 帶金 七事. 明年, 召入朝, 遷<遼東>大都督<玄 郡>公, 賜第京師. 因詔還軍, 與<李勣>攻<平壤>, 入禽王. 帝詔遣子, 卽<遼水>勞賜. 還, 進右衛大將軍<卞國公>. 年四十六卒. <男生>純厚有禮, 奏對敏辯, 善射藝. 其初至, 伏斧 待罪, 世以此稱焉.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고종이 설필하력에게 조서를 내려 군사를 거느리고 남생을 구원하게 하니 남생이 이에 화를 면하였다. 고종이 남생에게 평양도 행군 대총관 겸 지절 안무 대사를 제수하니, 그는 가물, 남소, 창암 등의 성을 가지고 항복하였다. 황제가 또한 서대 사인 이 건역에게 명하여 남생의 군중에 가서 위로하게 하고 포대 금구 일곱 가지를 하사하였다. 이듬해에 그를 불러 입조케 하여, 요동대도독현토군공의 직함으로 바꾸고 서울에 거처를 하사하였다. 그리고 조서를 내려 군중으로 돌아가 이 적과 함께 평양을 공격하고, 성 안으로 들어가 왕을 사로잡게 하였다. 황제는 자기의 아들에게 조서를 주어 요수로 가서 그들을 위로하고 상을 주게 하였다. 남생은 군중에서 돌아와 우위 대장군 변국공으로 승진하였다. 그는 46세에 죽었다. 남생은 순후하고 예의가 있었으며, 이치에 합당하게 상주를 올렸으며, 말을 잘 하였고, 또한 활을 잘 쏘았다. 그가 처음 당에 갔을 때 도끼에 엎드려 대죄하니 세상에서 이것으로 그를 칭찬하였다.
○<獻誠>, <天授>中以右衛大將軍兼羽林衛. <武后>嘗出金幣, 於文武官內, 擇善射者五人, 中者以賜之. 內史<張光輔>先讓<獻誠>, 爲第一, <獻誠>後讓右王鈐衛大將軍<薛吐摩支>, <摩支>又讓<獻誠>. 旣而, <獻誠>奏曰: "陛下擇善射者, 然多非華人, 臣恐<唐>官以射爲恥, 不如罷之." <后>嘉納. <來俊臣>嘗求貨, <獻誠>不答. 乃誣其謀叛, 縊殺之. <后>後知其寃, 贈右羽林衛大將軍, 以禮改葬.
헌성은 천수 연간에 우위 대장군으로 우림위를 겸하였다. 무후가 일찌기 금폐를 내놓고, 문무관 중에서 활 잘 쏘는 사람 다섯 명을 골라 이것을 상으로 주기로 하였다. 내사 장 광보가 먼저 헌성에게 양보하여 그가 제일이 되었고, 헌성은 다시 우왕 검위 대장군 설토마지에게 양보하니, 마지는 또한 헌성에게 양보하였다. 얼마 후에 헌성이 아뢰기를 "폐하께서 활 잘 쏘는 사람을 뽑으셨지만 대부분 중국 사람이 아닙니다. 신은 당의 관리들이 활 쏘는 일을 수치스럽게 여길까 두렵사오니 그만 두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니, 무후가 옳다고 여겨 받아들였다.
내 준신이 일찌기 헌성에게 재물을 요구했는데, 헌성이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내 준신이 헌성이 모반한다고 무고하여 목매어 죽였다. 무후가 나중에 헌성이 억울하게 죽은 것을 알고 우우림위 대장군을 추증하고 예를 갖추어 다시 장사지냈다.
○論曰: <宋><神宗>與<王介甫>論事曰: "<太宗>伐<高句麗>, 何以不克?" <介甫>曰: "<蓋蘇文>, 非常人也." 然則<蘇文>, 亦才士也, 而不能以直道奉國, 殘暴自肆, 以至大逆. <春秋>"君弑賊不討, 謂之國無人", 而<蘇文>保腰領, 以死於家, 可謂幸而免者. <男生>·<獻誠>, 雖有聞於唐室, 而以本國言之, 未免爲叛人者矣.
三國史記卷第四十九.
저자의 견해 : 송 신종이 왕 개보와 사적을 논하여 말했다. "태종이 고구려를 쳤을 때, 왜 승리하지 못하였는가?" 개보가 대답하였다. "개소문은 비상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즉 소문도 역시 재사였는데, 정도로써 나라를 받들지 못하고, 잔인 포악하여 제멋대로 행동하다가 대역에 이른 것이다. [춘추]에는 "임금이 시해되었는데도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면 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한다"라고 하였는데, 소문이 몸을 보전하여 집에서 죽은 것은 가히 요행으로 토벌을 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남생과 헌성은 비록 당 나라의 황실에 이름이 알려졌지만, 본국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반역자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삼국사기 권 제 49 끝
三國史記卷第五十 삼국사기 권 제 50
列傳第十 <弓裔>·<甄萱>.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열전 제 10 궁예. 견 훤.
○<弓裔>, <新羅>人. 姓<金>氏, 考第四十七<憲安王>誼靖, 母<憲安王>嬪御, 失其姓名. 或云: "四十八<景文王><膺廉>之子." 以五月五日, 生於外家. 其時, 屋上有素光, 若長虹, 上屬天. 日官奏曰: "此兒, 以重午日生, 生而有齒, 且光焰異常, 恐將來不利於國家, 宜勿養之." 王勅中使, 抵其家殺之. 使者取於襁褓中, 投之樓下, 乳婢竊捧之, 誤以手觸, 其一目. 抱而逃竄, 勞養育. 年十餘歲, 遊戱不止. 其婢告之曰: "子之生也, 見棄於國, 子{予} 不忍竊養, 以至今日, 而子之狂如此, 必爲人所知, 則予與子俱不免, 爲之奈何?" <弓裔>泣曰: "若然則吾逝矣, 無爲母憂." 便去<世達寺>, 今之<興敎寺>, 是也. 祝髮爲僧, 自號<善宗>.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궁예는 신라인이니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제 47대 헌안왕이요,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혹자는 궁예가 48대 경문왕 응렴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그는 5월 5일 외가에서 태어 났는데, 그 때 지붕에 긴 무지개와 같은 흰빛이 있어서 위로는 하늘에 닿았었다. 일관이 아뢰기를 "이 아이가 오(午)자가 거듭 들어있는 날[重午]에 났고, 나면서 이가 있으며 또한 광염이 이상하였으니, 장래 나라에 이롭지 못할 듯합니다. 기르지 마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중사로 하여금 그 집에 가서 그를 죽이도록 하였다. 사자는 아이를 포대기 속에서 꺼내어 다락 밑으로 던졌는데, 젖 먹이던 종이 그 아이를 몰래 받아 들다가 잘못하여 손으로 눈을 찔렀다. 이리하여 그는 한 쪽 눈이 멀었다. 종은 아이를 안고 도망하여 숨어서 고생스럽게 양육하였다. 그의 나이 10여 세가 되어도 장난을 그만두지 않자 종이 그에게 말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나라의 버림을 받았다. 나는 이를 차마 보지 못하여 오늘까지 몰래 너를 길러 왔다. 그러나 너의 미친 행동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남들에게 알려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와 너는 함께 화를 면치 못 할 것이니 이를 어찌 하랴?" 궁예가 울면서 말했다. "만일 그렇다면 내가 이곳을 떠나 어머니의 근심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 곧 세달사로 갔다. 지금의 흥교사가 바로 그 절이다. 그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스스로 선종이라고 불렀다.
○及壯不拘檢僧律軒 有膽氣. 嘗赴齋行次有烏鳥銜物落所持鉢中. 視之牙籤書王字. 則 而不言頗自負. 見<新羅>衰季政荒民散. 王畿外州縣叛附相半遠近群盜蜂起蟻聚. <善宗>謂乘亂聚衆可以得志. 以<眞聖王>卽位五年<大順>二年辛亥投<竹州>賊魁<箕萱>. <箕萱>侮慢不禮<善宗>鬱 不自安. 潛結<箕萱>麾下<元會>·<申煊>等爲友. <景福>元年壬子投<北原>賊<梁吉><吉>善遇之委任以事. 遂分兵使東略地. 於是出宿<雉岳山><石南寺>行襲<酒泉>·<奈城>·<鬱烏>·<御珍>等縣皆降之.
그가 장성하자 중의 계율에 구애받지 않고 방종하였으며 뱃심이 있었다. 어느 때 재를 올리러 가는 길에 까마귀가 무엇을 물고 와서 궁예의 바리대에 떨어뜨렸다. 궁예가 그것을 보니 점을 치는 산가지였는데 거기에는 왕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궁예는 그것을 비밀에 부쳐 소문을 내지 않고 스스로 자만심을 가졌다.
신라 말기에 정치가 거칠어지고 백성들이 분산되어 왕기의 밖에 있는 주현 중에서 신라 조정을 반대하고 지지하는 수가 반반씩이었다. 그리고 도처에서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던가 개미같이 모여 들었다. 선종은 이를 보고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무리를 끌어 모으면 자기의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진성왕 재위 5년, 대순 2년 신해에 그는 죽주에 있는 반란군의 괴수 기훤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러나 기훤이 오만무례하므로 선종의 마음이 침울하여 스스로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기훤의 휘하인 원회, 신헌 등과 비밀리에 결탁하여 벗을 삼았다. 그는 경복 원년 임자에 북원의 반란군 양 길의 휘하로 들어갔다. 양 길은 그를 우대하고 일을 맡겼으며, 군사를 주어 동쪽으로 신라의 영토를 공략하게 하였다. 이에 선종은 치악산 석남사에 묵으면서 주천, 나성, 울오, 어진 등의 고을을 습격하여 모두 항복시켰다.
○<乾寧>元年, 入<溟州>, 有衆三千五百人, 分爲十四隊, <金大黔>·<毛 >·<長貴平>·<張一>等爲舍上[舍上謂部長也.], 與士卒同甘苦勞逸. 至於予奪, 公而不私. 是以, 衆心畏愛, 推爲將軍. 於是, 擊破<猪足>·< 川>·<夫若>·<金城>·<鐵圓>等城, 軍聲甚盛, 現{浿} 西賊寇, 來降者衆多. <善宗>自以爲衆大, 可以開國稱君, 始設內外官職.
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선종은 건녕 원년에 명주로 들어가 3천5백 명을 모집하여, 이를 14개 대오로 편성하였다. 그는 김 대검, 모 흔, 장 귀평, 장 일 등을 사상[사상은 부장을 말한다.]으로 삼고, 사졸과 고락을 같이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무사하였다. 이에 따라 여러 사람들이 그를 마음 속으로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저족, 생천, 부약, 금성, 철원 등의 성을 쳐부수니 군사의 성세가 대단하였으며, 패서에 있는 적들이 선종에게 와서 항복하는 자가 많았다. 선종은 내심 무리들이 많으니 나라를 창건하고 스스로 임금이라고 일컬을 만하다고 생각하여 내외의 관직을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我<太祖>自<松岳郡>來投, 便授<鐵圓>郡太守. 三年丙辰, 攻取<僧嶺>·<臨江>兩縣. 四年丁巳, <仁物縣>降. <善宗>謂<松岳郡><漢>北名郡, 山水奇秀, 遂定以爲都. 擊破<孔巖>·<黔浦>·<穴口>等城. 時<梁吉>猶在<北原>, 取<國原>等三十餘城有之. 聞<善宗>地廣民衆, 大怒, 欲以三十餘城勁兵襲之. <善宗>潛認, 先擊大敗之. <光化>元年戊午春二月, 葺<松岳城>, 以我<太祖>爲精騎大監, 伐<楊州>·<見州>. 冬十一月, 始作八關會. 三年庚申, 又命<太祖>伐<廣州>·<忠州>·<唐城>·<靑州>[或云<靑川>.]·<槐壤>等, 皆平之. 以功授<太祖>阿 之職.
우리 태조가 송악군으로부터 선종에게 가서 의탁하니, 단번에 철원군 태수를 제수하였다. 태조는 3년 병진에 승령, 임강의 두 고을을 쳐서 빼앗았으며, 4년 정사에는 인물현이 항복하였다. 선종은 송악군이야말로 한강 북쪽의 이름난 고을이며 산수가 아름답다고 생각하여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공암, 검포, 혈구 등의 성을 쳐부수었다. 당시에 양 길은 그 때까지 북원에 있으면서 국원 등 30여 성을 빼앗아 소유하고 있었는데, 선종의 지역이 넓고 백성들이 많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30여 성의 강병으로 선종을 습격하려 하였다. 선종이 이 기미를 알아 차리고 먼저 양 길을 쳐서 대파하였다. 선종은 광화 원년 무오 봄 2월에 송악성을 수축하고, 우리 태조를 정기 대감으로 삼고, 양주와 견주를 쳤다. 겨울 11월에 팔관회를 시작하였다. 3년 경신에 다시 태조로 하여금 광주, 충주, 당성, 청주[혹은 청천이라고 한다.], 괴양 등의 고을을 공격하여 평정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전공으로 말미암아 선종은 태조에게 아찬의 위품을 주었다.
○<天復>元年辛酉, <善宗>自稱王, 謂人曰: "往者<新羅>, 請兵於<唐>, 以破<高句麗>. 故<平壤>舊都, 鞠爲茂草, 吾必報其讐." 蓋怨生時見棄, 故有此言. 嘗南巡, 至<興州><浮石寺>, 見壁畵<新羅>王像, 發{拔} 劒擊之, 其刃 {迹} 猶在.<天祐>元年甲子, 立國號爲<摩震>, 年號爲<武泰>. 始置廣評省, 備員匡治{沇} 奈[今侍中], 徐事[今侍郞], 外書[今員外郞], 又置兵部·大龍部[謂倉部]·壽春部[今禮部]·奉賓部[今禮賓省]·義刑臺[今刑部]·納貨府[今大府寺]·調位府[今三司]·內奉省[今都省]·禁書省[今秘書省]·南廂壇[今將作監]·水壇[今水部]·元鳳省[今翰林院]·飛龍省[今天僕寺{太僕寺} ]·物藏省[今少府監], 又置史臺[掌習諸譯語.]·植貨府{殖貨府} [掌栽植菓樹.]·障繕府[掌修理城隍.]·珠淘省[掌造成器物.]. 又設正匡·元輔·大相·元尹·佐尹·正朝·甫尹·軍尹{單尹} ·中尹等品職. 秋七月, 移<靑州>人戶一千, 入<鐵圓城>爲京, 伐取<尙州>等三十餘州縣, 公州將軍<弘奇>來降.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북한본].『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
천복 원년 신유에 선종이 왕을 자칭하고 사람들에게 "이전에 신라가 당 나라에 청병하여 고구려를 격파하였기 때문에, 평양의 옛 서울이 황폐하여 풀만 성하게 되었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고 말하였다. 아마도 자기가 태어났을 때 신라에서 버림받은 일이 원망스러웠기 때문에 이러한 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언젠가 남쪽 지방을 다니다가 흥주 부석사에 이르러 벽화에 있는 신라왕의 화상을 보고 칼을 뽑아 그것을 쳤는데 그 칼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 천우 원년 갑자에 나라를 창건하여 국호를 마진이라 하고 연호를 무태라 하였다. 이 때 처음으로 광평성을 설치하여 광치나[지금의 시중], 서사[지금의 시랑], 외서[지금의 원외랑] 등의 관원을 두었으며, 또한 병부, 대룡부[창부를 이른 것], 수춘부[지금의 예부], 봉빈부[지금의 예빈성], 의형대[지금의 형부], 납화부[지금의 대부시], 조위부[지금의 삼사], 내봉성[지금의 도성], 금서성[지금의 비서성], 남상단[지금의 장작감], 수단[지금의 수부], 원봉성[지금의 한림원], 비룡성[지금의 태복시], 물장성[지금의 소부감] 등을 설치하였다. 또한 사대[모든 외국어의 학습을 맡은 기관], 식화부[과수 재배를 맡은 기관], 장선부[성황 수리를 맡은 기관], 주도성[기물 제조를 맡은 기관] 등을 설치하고 또한 정광, 원보, 대상, 원윤, 좌윤, 정조, 보윤, 군윤, 중윤 등의 직품을 설치하였다. 가을 7월에 청주의 민가 1천 호를 철원성에 옮겨 살게하고, 이를 서울로 정하였다. 상주 등 30여 주를 쳐서 빼앗았다. 공주 장군 홍기가 항복해왔다.
○<天祐>二年乙丑, 入新京, 修葺觀闕·樓臺, 窮奢極侈. 改<武泰>爲<聖冊>元年. 分定<浿西>十三鎭, <平壤城>主將軍<黔用>降. <甄城><赤衣>·<黃衣>賊<明貴>等歸服. <善宗>以强盛自矜, 意慾倂呑, 令國人呼<新羅>爲滅都. 凡自<新羅>來者, 盡誅殺之. <朱梁><乾化>元年辛未, 改聖冊爲<水德萬歲>元年, 改國號爲<泰封>. 遣<太祖>率兵, 伐<錦城>等, 以<錦城>爲<羅州>. 論功, 以<太祖>爲大阿 將軍.
천우 2년 을축에 궁예는 새로운 서울로 가서 궁궐과 누대를 대단히 사치스럽게 수축하였다. 연호였던 무태를 고쳐 성책 원년이라 하였고, 패서 13진을 나누어 정하였다. 평양 성주인 장군 검 용이 항복하였고, 증성의 적의적과 황의적 명귀 등이 항복하여 왔다. 선종은 자기의 강대한 기세를 믿고 신라를 병탄하려 하였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신라를 멸도라고 부르게 하였으며, 신라에서 오는 사람은 모조리 죽여 버렸다. 주량 건화 원년 신미에 연호였던 성책을 고쳐 수덕만세 원년이라 하고, 국호를 태봉이라 하였다. 태조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금성 등지를 치게 하여, 금성을 나주로 고치고, 전공을 논하여 태조를 대아찬 장군으로 삼았다.
○<善宗>自稱彌勒佛, 頭戴金 , 身被方袍. 以長子爲<靑光>菩薩, 季子爲<神光>菩薩. 出則常騎白馬, 以綵飾其 尾, 使童男童女奉幡蓋·香花前導, 又命比丘二百餘人, 梵唄隨後. 又自述經二十餘卷, 其言妖妄, 皆不經之事, 時或正坐講說. 僧<釋聰>謂曰: "皆邪說怪談, 不可以訓." <善宗>聞之怒, (+以) 鐵椎打殺之. 三年癸酉, 以<太祖>爲波珍 侍中. 四年甲戌改<水德萬歲>, 爲<政開>元年. 以<太祖>爲百舡將軍.
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선종은 미륵불이라고 자칭하여, 머리에 금고깔을 쓰고 몸에 방포를 입었으며 맏아들을 청광 보살이라 하고 막내 아들을 신광 보살이라 하였다. 외출할 때는 항상 백마를 탔는데, 채색 비단으로 말갈기와 꼬리를 장식하고, 동남동녀들로 하여금 일산과 향과 꽃을 받쳐들고 앞을 인도하게 하였으며, 또한 비구 2백여 명으로 하여금 범패를 부르면서 뒤따르게 하였다. 그는 또한 스스로 불경 20여 권을 저술하였는데, 그 내용이 요망하여 모두 바르지 않았다. 선종은 때로는 단정하게 앉아서 강설을 하였다. 중 석총이 "전부 요사스러운 말이오, 괴이한 이야기로서 남을 가르칠 수 없다"고 말하였는데, 선종이 이 말을 듣고 화를 내어 그를 철퇴로 쳐 죽였다. 3년 계유에 태조를 파진찬 시중으로 삼았다. 4년 갑술에 연호였던 수덕만세를 고쳐서 정개 원년이라고 하였으며, 태조를 백선 장군으로 삼았다.
○<貞明>元年, 夫人<康>氏, 以王多行非法, 正色諫之. 王惡之曰: "汝與他人姦, 何耶?" <康>氏曰: "安有此事." 王曰: "我以神迪{通} 觀之." 以烈火熱鐵杵, 撞其陰殺之, 及其兩兒. 爾後, 多疑急怒, 諸寮佐將吏, 下至平民, 無辜受戮者, 頻頻有之. <斧壤>·<鐵圓>之人, 不勝其毒焉. 先是, 有 {商} 客<王昌瑾>, 自<唐>來寓<鐵圓>市廛. 至<貞明>四年戊寅, 於市中見一人, 狀貌魁偉, 髮盡白. 着古衣冠, 左手持瓷椀, 右手持古鏡. 謂<昌瑾>曰: "能買我鏡乎?" <昌瑾>卽以米換之. 其人以米俵街巷乞兒而後, 不知去處. <昌瑾>懸其鏡於壁上, 日映鏡面, 有細字書. 讀之若古詩. 其略曰: "上帝降子於辰馬, 先操鷄後搏鴨. 於巳年中二龍見, 一則藏身靑木中, 一則顯形黑金東."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정명 원년에 그의 부인 강씨가 왕이 옳지 못한 일을 많이 한다하여 정색을 하고 간하였다. 왕이 그녀를 미워하여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하니 웬일이냐?"고 하였다. 강씨가 말하기를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나는 신통력으로 보고 있다"고 하면서, 뜨거운 불로 쇠공이를 달구어 음부를 쑤셔 죽이고 그의 두 아이까지 죽였다. 그 뒤로 그가 의심이 많고 곧잘 갑자기 성을 내므로, 여러 보좌관과 장수 관리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죄없이 죽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부양과 철원 사람들이 그 해독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에 앞서 상인 왕 창근이란 자가 당 나라에서 와서 철원 저자에 살았다. 정명 4년 무인에 그가 저자 거리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생김새가 매우 크고 모발이 모두 희었으며, 옛날 의관을 입고 왼 손에는 자기 사발을 들었으며, 오른 손에는 오래된 거울을 들고 있었다. 그가 창근에게 말하기를 "내 거울을 사겠는가?" 하므로, 창근이 곧 쌀을 주고 그것과 바꾸었다. 그 사람이 쌀을 거리에 있는 거지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난 후에는 간 곳이 없었다. 창근이 그 거울을 벽에 걸어 두었는데, 해가 거울에 비치자 가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그것을 읽어 보니 옛 시와 같은 것으로서, 내용이 대략 다음과 같았다.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려 보내니
먼저 닭을 잡고, 뒤에는 오리를 잡을 것이며,
사(巳)년 중에는 두 마리 용이 나타나는데,
한 마리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고,
한 마리는 검은 쇠 동쪽에 몸을 나타낸다."
○<昌瑾> {初} 不知有文, 及見之, 謂非常, 遂告于王. 王命有司, 與<昌瑾>物色求其鏡主, 不見. 唯於< 颯寺>佛堂, 有鎭星塑像, 如其人焉. 王嘆異久之, 命文人<宋含弘>·<白卓>·<許原>等, 解之. <含弘>等謂曰: "上帝降子於辰馬者, 謂<辰韓>·<馬韓>也. 二龍見, 一藏身靑木, 一顯形黑金者, 靑木, 松也, <松岳郡>人, 以龍爲名者之孫, 今波珍 侍中之謂歟. 黑金, 鐵也, 今所都<鐵圓>之謂也. 今主上初興於此, 終滅於此之驗也. 先操鷄後搏鴨者, 波珍 侍中先得<鷄林>, 後收<鴨綠>之意也."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창근이 처음에는 글이 있는 줄을 몰랐으나, 이를 발견한 뒤에는 심상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마침내 왕에게 고하였다. 왕이 관리에게 명하여 창근과 함께 그 거울의 주인을 물색해 찾게 하였으나 찾을 수가 없었고, 다만 발삽사 불당에 진성 소상이 있었는데 모습이 그 사람과 같았다. 왕이 한참 한탄하고 이상히 여기다가 문인 송 함홍, 백 탁, 허 원 등으로 하여금 그 뜻을 해석하게 하였다. 함홍 등이 서로 말했다.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려 보냈다는 것은 진한과 마한을 말한 것이다. 두 마리 용이 나타났는데 한 마리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고, 한 마리는 검은 쇠에 몸을 나타낸다는 것은, 푸른 나무는 소나무를 말함이니, 송악군 사람으로서 용으로 이름을 지은 사람의 자손을 뜻하나니, 이는 지금의 파진찬 시중을 이른 것이다. 검은 쇠는 철이니 지금의 도읍지 철원을 뜻하는 바, 이제 왕이 처음으로 여기에서 일어났다가 마침내 여기에서 멸망할 징조이다.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잡는다는 것은 파진찬 시중이 먼저 계림을 빼앗고, 뒤에 압록강을 차지한다는 뜻이다."
○<宋含(+弘)> 等相謂曰: "今主上, 虐亂如此, 吾輩若以實言, 不獨吾輩爲 , 波珍 亦必遭害." 飾辭告之. 王凶虐自肆, 臣寮震懼, 不知所措. 夏六月, 將軍<弘述>·<白玉>·<三能山>·<卜沙貴>, 此, <洪儒>·<裴玄慶>·<申崇謙>·<卜知謙>之少名也. 四人密謀, 夜詣<太祖>私第, 言曰: "今主上, 淫刑以逞, 殺妻戮子, 誅夷臣寮. 蒼生塗炭, 不自聊生. 自古廢昏立明, 天下之大義也. 請公行<湯>·<武>之事." <太祖>作色拒之曰: "吾以忠純自許, 今雖暴辭{亂} , 不敢有二心. 夫以臣替君, 斯謂革命. 予實否德, 敢效<殷>·<周>之事乎?"
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
송 함홍 등이 서로 말했다. "지금 주상이 이렇게 포학하고 난잡하니 우리들이 만일 사실대로 말한다면 우리가 젓갈이 될 뿐 아니라 파진찬도 반드시 해를 당할 것이다." 그들은 이 때문에 거짓말을 지어 보고하였다. 왕이 흉포한 일을 제멋대로 하니 신하들이 두려워 떨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해 여름 6월에 장군 홍술, 백옥, 삼능산, 복사귀는 바로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의 젊은 시절의 이름이었는데, 이 네 사람이 은밀히 모의하고 밤에 태조의 집에 가서 말하기를 "지금 임금이 마음대로 형벌을 남용하여, 아내와 아들을 죽이고, 신하들을 살육하며,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서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로부터 혼매한 임금을 폐하고 명철한 임금을 세우는 것이 천하의 큰 의리이니, 공이 탕왕과 무왕의 일을 실행할 것을 바란다"고 하였다. 태조가 얼굴빛을 바꾸며 거절하여 말하기를 "나는 자신이 충성스럽고 순직한 것으로 자처하여 왔으므로 임금이 비록 포악하다고 하지만 감히 두 마음을 가질 수 없다. 대저 신하로서 임금의 자리에 바꾸어 앉는 것을 혁명이라 한다. 나는 실로 덕이 적은 데 감히 은탕과 주 무왕의 일을 본받겠는가?"라고 하였다.
○諸將曰: "時乎不再來, 難遭而易失. 天與不取, 反受其咎. 今政亂國危, 民皆疾視其上如仇讐. 今之德望, 未有居公之右者. 況<王昌瑾>所得鏡文如彼, 豈可雌伏, 取死獨夫之手乎?" 夫人<柳>氏聞諸將之議, 謂<太祖>曰: "以仁伐不仁, 自古而然. 今聞衆議, 妾猶發憤, 況大丈夫乎? 今群心忽變, 天命有歸矣." 手提甲領進<太祖>, 諸將扶衛<太祖>出門, 令前唱曰: "王公已擧義旗." 於是, 前後奔走, 來隨者不知其幾人. 又有先至宮城門, 鼓 以待者, 亦一萬餘人. 王聞之, 不知所圖, 微服逃入山林, 尋爲<斧壤>民所(+害) . <弓裔>起自<唐><大順>二年, 至<朱梁><貞明>四年, 凡二十八年而滅.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때는 두 번 오지 않는 것으로서, 만나기는 어렵지만 놓치기는 쉽습니다. 하늘이 주어도 받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입니다. 지금 정치가 어지럽고 나라가 위태로워 백성들이 모두 자기 임금을 원수와 같이 싫어하는데, 오늘날 덕망이 공 보다 훌륭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물며 왕 창근이 얻은 거울의 글이 저와 같은데 어찌 가만히 엎드려 있다가 한 필부의 손에 죽음을 당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 때 부인 유씨가 여러 장수들이 의논하는 말을 듣고 태조에게 말했다. "어진 자가 어질지 못한 자를 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였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의논을 듣고 첩도 오히려 분노하게 되는데 하물며 대장부로서야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갑자기 변하였으니 천 명이 돌아온 것입니다." 그녀는 자기 손으로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바쳤다.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호위하고 대문으로 나가면서 "왕공이 이미 정의의 깃발을 들었다"고 앞에서 외치게 하였다. 이에 앞뒤로 달려와서 따르는 자의 수가 얼마인지 알 수 없었으며, 또한 먼저 궁성 문에 다달아 북을 치고 떠들면서 기다리는 자도 1만여 명나 되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어찌할 줄 모르다가 미천한 차림으로 산의 숲 속으로 들어 갔다. 그는 얼마 안가서 부양 주민들에게 살해되었다. 궁예는 당 나라 대순 2년에 일어나 주량 정명 4년까지 활동하였으니, 전후 28년 만에 망한 것이다.
○<甄萱>, <尙州><加恩縣>人也. 本姓<李>, 後以<甄>爲氏. 父<阿慈介>, 以農自活, 後起家爲將軍. 初<萱>生孺褓時, 父耕于野, 母餉之, 以兒置于林下, 虎來乳之, 鄕黨聞者異焉. 及壯, 體貌雄奇, 志氣倜 不凡. 從軍入王京, 赴西南海防戍, 枕戈待敵, 其勇氣恒爲士卒先, 以勞爲裨將. <唐><昭宗><景福>元年, 是<新羅><眞聖王>在位六年. 嬖竪在側, 竊弄政柄, 綱紀紊弛, 加之以饑饉, 百姓流移, 群盜蜂起.
견 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으로서 본 성은 이씨였는데 나중에 '견'으로 성씨를 삼았다. 부친 아자개는 농사를 지며 생활하다가 뒤에 출세하여 장군이 되었다. 처음에 견 훤이 어려 강보에 있을 때, 아버지가 들에서 밭을 갈고 어머니가 점심을 대접하면서 아이를 숲 속에 두었었는데 호랑이가 와서 아이에게 젖을 먹였다. 이 말을 들은 그 고장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자라서는 체격과 용모가 웅장하고 기이하며, 생각과 기풍이 활달하고 비범하였다. 그가 종군하여 서울에 들어갔다가 서남쪽 해변으로 가서 수자리를 하게 되었는데, 잘 때에도 창을 베고 적을 기다렸다. 그는 용기가 있어 항상 다른 군사들 보다 앞장 섰으며, 이러한 공로로 인하여 비장이 되었다. 당 나라 소종 경복 원년은 바로 신라 진성왕 6년인데, 총신들이 임금 가까이 있으면서 정권을 농락하자, 나라의 기강이 문란하고 해이해졌다. 더욱 기근이 곁들어 백성들은 이리저리 흩어지고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於是, <萱>竊有 心, 嘯聚徒侶, 行擊京西南州縣. 所至響應, 旬月之間, 衆至五千人. 遂襲<武珍州>自王, 猶不敢公然稱王. 自署爲<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 是時, <北原>賊<良吉{梁吉}> 雄强, <弓裔>自投爲麾下. <萱>聞之, 遙授<良吉{梁吉}> 職爲裨將.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이에 견 훤은 은근히 반심을 품고 무리를 모아 서울 서쪽과 남쪽 주현을 다니며 치니, 가는 곳마다 모두 호응하여 달포 동안에 무리가 5천 명에 달하였다. 그는 마침내 무진주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감히 드러내 놓고 왕이라고는 일컫지 못하고 스스로 서명하기를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식읍2천호"라고 하였다. 이 때 북원의 도적인 양 길이 강성하자 궁예는 자진하여 그의 휘하로 들어갔다. 견 훤은 이 말을 듣고 멀리서 양 길에게 벼슬을 주어 비장을 삼았다.
○<萱>西巡至<完山州>, 州民迎勞. <萱>喜得人心, 謂左右曰: "吾原三國之始, <馬韓>先起, 後<赫世>勃興, 故<辰>·<卞>從之而興. 於是, <百濟>開國<金馬山>六百餘年. <摠章>中, <唐><高宗>以<新羅>之請, 遣將軍<蘇定方>, 以船兵十三萬越海. <新羅><金庾信>卷土, 歷<黃山>至<泗 {泗 }> , 與<唐>兵合攻<百濟>滅之. 今子{予} 敢不立都於<完山>, 以雪<義慈>宿憤乎?" 遂自稱<後百濟>王. 設官分職, 是<唐><光化>三年, <新羅><孝恭王>四年也. 遣使朝<吳越>, <吳越>王報聘, 仍加檢校大保{太保} , 餘如故.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
견 훤이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에 이르니, 주내 백성들이 견 훤을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견 훤은 인심을 얻은 것을 기뻐하며 좌우 사람들에게 말했다. "내가 삼국의 기원을 상고하여 보건대, 마한이 먼저 일어 났고, 뒤에 혁거세가 일어 났으며, 진한과 변한이 뒤따라 일어 났다. 이 때 백제는 금마산에서 개국하여 6백여 년이 지났는데, 총장 연간에 당 나라 고종이 신라의 요청에 의하여 장군 소정방을 보내 수군 13만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오고, 신라의 김 유신도 땅을 휩쓸고 와서 황산을 지나 사비에 이르러 당 나라 군사와 협력하여 백제를 격멸하였으니, 이제 내가 어찌 서울을 완산에 정하여 의자왕의 오랜 분노를 갚지 않겠는가?" 그는 곧 후백제왕이라 자칭하였으며, 관제를 설정하고 직책을 분담시켰으니, 이때가 당 나라 광화 3년이오, 신라 효공왕 4년이었다. 오월국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니 오월왕이 답례로 사신을 보내고, 동시에 견 훤에게 검교 태보의 벼슬을 주고 나머지 직위는 전과 같게 하였다.
○<天復>元年, <萱>攻<大耶城>不下. <開平>四年, <萱>怒<錦城>投干{于} <弓裔>, 以步騎三千圍攻之, 經旬不解. <乾化>二年, <萱>與<弓裔>戰于<德津浦>. <貞明>四年戊寅, <鐵圓京>衆, 心忽變, 推戴我<太祖>卽位. <萱>聞之, 秋八月, 遣一吉 <閔 {閔 }> 稱賀, 遂獻孔雀扇及<地理山>竹箭. 又遣使入<吳越>進馬, <吳越>王報聘, 加授中大夫, 餘如故.
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三國史節要』.
천복 원년에 견 훤이 대야성을 쳤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개평 4년에 금성이 궁예에게 귀순한 것을 분하게 여겨 견 훤이 보병과 기병 3천 명으로 금성을 포위 공격하여 열흘이 지나도록 풀지 않았다. 건화 2년에 견 훤이 덕진포에서 궁예와 싸웠다. 정명 4년 무인에 철원경의 인심이 갑자기 변하여 우리 태조를 추대하여 즉위케 하였다. 견 훤이 이 말을 듣고 가을 8월에 일길찬 민 각을 보내 축하를 표하고, 이어 공작선과 지리산의 대화살을 바쳤다. 또한 오월국에 사신을 보내 말을 진상하니, 오월왕이 답례로 사신을 보내고, 견 훤에게 중대부 벼슬을 첨가하여 주고 나머지 직위는 전과 같게 하였다.
○六年, <萱>率步騎一萬, 攻陷<大耶城>, 移軍於<進禮城>. <新羅>王遣阿 <金律>, 求援於<太祖>, <太祖>出師, <萱>聞之, 引退. <萱>與我<太祖>陽和而陰剋. <同光>二年秋七月, 遣子<須彌强{須彌康}> , 發<大耶>·<聞韶>二城卒, 攻<曹物城>. 城人爲<太祖>固守且戰, <須彌强{須彌康}> 失利而歸. 八月, 遣使獻 馬於<太祖>. 三年冬十月, <萱>率三千騎, 至<曹物城>, <太祖>亦以精兵來, 與之 . 時<萱>兵銳甚, 未決勝否. <太祖>欲權和以勞其師, 移書乞和, 以堂弟<王信>爲質, <萱>亦以外甥<眞虎>交質. 十二月, 攻取<居昌>等二十餘城. 遣使入<後唐>稱藩, <唐>策授檢校大尉{太尉} 兼侍中判<百濟>軍事, 依前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吏海東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等事<百濟>王, 食邑二千五百戶. 四年<眞虎>暴卒, <萱>聞之, 疑故殺, 卽囚<王信>獄中, 又使人請還前年所送 馬, <太祖>笑還之.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6년에 훤이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다음 군사를 진례성으로 옮겼다. 신라왕이 아찬 김 률을 보내 태조에게 원조를 청하였으므로 태조가 군사를 출동시켰다. 견 훤은 이 소식을 듣고 물러갔다. 견 훤은 우리 태조와 겉으로는 화친하는 것 같았지만 속으로는 상극이었다. 동광 2년 가을 7월에 견 훤이 아들 수미강을 보내 대야, 문소 두 성의 군사를 동원하여 조물성을 공격하였으나, 성안 사람들이 태조를 위하여 굳게 수비하면서 싸웠으므로 수미강이 실패하고 돌아갔다. 8월에 견 훤이 사신을 보내 태조에게 얼룩말을 바쳤다. 3년 겨울 10월에 견 훤이 기병 3천을 거느리고 조물성에 이르렀으므로 태조도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서로 겨루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견 훤의 군사가 매우 강성하여 승부를 내지 못하였다. 태조가 임시로 평화를 유지하는 술책으로써 견 훤의 군사를 피곤케 하고자 글을 보내 화친을 청하고 당제 왕 신을 인질로 보냈다. 견 훤도 그의 사위 진호를 보내 인질을 교환하였다. 12월에 견 훤이 거창 등 20여 성을 쳐서 빼앗고 후당에 사신을 보내 속국이라 일컬으니, 당 나라에서 그를 검교태위겸시중판백제군사로 책봉하고, 종전의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해동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등사백제왕과 식읍 2천5백 호를 그대로 유지하게 하였다. 4년에 진호가 갑자기 죽었다. 견 훤은 이 소식을 듣고 그들이 일부러 죽인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그는 곧 왕신을 옥에 가두고 사람을 태조에게 보내 전년에 주었던 얼룩말을 돌려 보내기를 요청하였다. 태조가 웃으면서 그 말을 돌려 주었다.
○<天成>二年秋九月, <萱>攻取<近品城{近 城} >, 燒之. 進襲<新羅><高鬱府>, 逼<新羅>郊圻. <新羅>王求救於<太祖>. 冬十{九} 月, <太祖>, 出師援助. <萱>猝入<新羅>王都. 時王與夫人嬪御出遊<鮑石亭>, 置酒娛樂. 賊至狼狽不知所爲, 與夫人歸城南離宮. 諸侍從臣寮及宮女伶官, 皆陷沒於亂兵, <萱>縱兵大掠, 使人捉王, 至前 之, 便入居宮中, 强引夫人亂之, 以王族弟<金傅>嗣立, 然後虜王弟<孝廉>·宰相<英景>, 又取國帑·珍寶·兵仗. 子女百工之巧者, 自隨以歸. <太祖>以精騎五千, 要<萱>於<公山>下大戰, <太祖>將<金樂>·<崇謙>死之, 諸軍敗北<太祖>, 僅以身免. <萱>乘勝取<大木郡>. <契丹>使<裟姑>·<麻 >等三十五人來聘. <萱>差將軍<崔堅>, 伴送<麻 >等, 航海北行, 遇風至<唐><登州>, 悉被戮死.
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史節要』.
천성 2년 가을 9월에 견 훤이 근품성을 쳐서 빼앗아 불태워 버렸다. 그는 이어서 신라의 고울부를 습격하였으며, 신라의 서울 근처까지 접근하였으므로, 신라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겨울 10월에 태조가 군사를 보내 구원하였지만, 견 훤이 갑자기 신라 서울에 들어가니, 이 때 왕이 부인과 궁녀들을 데리고 포석정에 나가 술상을 차려놓고 즐겁게 놀다가 적이 쳐들어오자 낭패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은 부인과 함께 성의 남쪽 이궁으로 돌아갔으며, 시종하던 관원들과 궁녀, 악공들은 모두 반란군에게 잡혔다. 견 훤은 군사를 풀어 놓아 크게 약탈하고, 사람을 시켜 왕을 잡아다가 자기 앞에서 죽였다. 그는 곧 내궁으로 들어가 억지로 왕비를 끌어다가 강간하고, 왕의 친족 동생인 김 부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한 뒤에, 왕의 아우 효렴과 재상 영경을 포로로 잡고, 또한 국고에 있는 재물과 귀중한 보배와 군기, 자녀와 백공 가운데 솜씨있는 자를 빼앗아 자신이 데리고 돌아갔다. 태조가 정예 기병 5천을 데리고 공산 밑에서 견 훤을 기다리다가 크게 싸웠는데, 태조의 장수 김 락과 숭겸이 전사하고 모든 군사가 패배하여 태조는 겨우 몸만 빠져 나왔다. 견 훤은 승세를 몰아 대목군을 빼앗았다. 거란의 사절 사고, 마돌 등 35명이 와서 예방하니 견 훤이 장군 최 견으로 하여금 마돌 등을 동반하여 전송하게 하였는데, 그들은 바다를 거쳐 북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서 당 나라 등주에 도착하여 모두 학살되었다.
時<新羅>臣以衰季, 難以復興, 謀引我<太祖>結好爲援. <甄萱>自有盜國心, 恐<太祖>先之. 是故, 引兵入王都作惡. 故十二月日寄書<太祖>曰: "昨者國相<金雄廉>等, 將召足下入京, 有同鼈應 聲. 是欲 披 翼, 必使生靈塗炭, 宗社丘墟. {僕} 是用先着祖鞭, 獨揮韓鉞, 誓百寮如 日, 諭六部以義風. 不意姦臣遁逃, 邦君薨變. 遂奉<景明王>之表弟<獻康王{憲康王}> 之外孫, 勸郞尊位. 再造危邦, 喪君有君, 於是乎在. 足下勿詳忠告, 徒聽流言, 百計窺 , 灸{多} 方侵擾, 尙不能見僕馬首, 拔僕牛毛. 冬初, 都頭<索湘>, 束手於<星山>陣下; 月內, 左將<金樂>, 曝骸於<美理寺>前. 殺獲居多, 追擒不少. 强羸若此, 勝敗可知. 所期者, 掛弓於<平壤>之樓, 飮馬於<浿江>之水. 然以前月七日, <吳>·<越>國使<班>尙書主{至} , 傳王詔旨: 知卿與<高麗>, 久通歡好, 共契隣盟, 比因質子之兩亡, 遂失和親之舊好, 互侵疆境, 不 干戈, 今專發使臣, 赴卿本道, 又移文<高麗>, 宜各相親比, 永孚于休. 僕義篤尊王, 情深事大. 及聞詔諭, 卽欲祗承, 恒{但} 慮足下, 欲罷不能, 困而猶鬪. 今錄詔書寄呈, 請留心詳悉! 且 { } 迭憊, 終必貽譏, 蚌鷸相持, 亦爲所笑. 宜迷復之爲戒, 無後悔之自貽."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이 때 신라에서는 임금과 신하들이 쇠퇴하기 시작한 시대를 다시 회복시키기는 어렵다고 판단하여 우리 태조와 우호 관계를 맺어 서로 도울 것을 상의하고 있었다. 견 훤은 내심으로 나라를 빼앗을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 태조가 먼저 이에 성공하지 않을까 두려워 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서울에 들어가서 횡포한 행위를 하였던 것이다. 그는 12월 모일에 태조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전번에 (신라의) 국상 김 응렴 등이 그대를 서울로 불러 들이려 한 것은, 마치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응하고, 참새가 새매의 날개를 헤치려고 하는 행위로서 이는 반드시 생령을 도탄에 빠뜨리고 종사를 폐허로 만들게 할 것이다. 이 때문에 내가 먼저 조씨의 채찍을 잡고, 홀로 한씨의 도끼를 휘둘렀으며, 모든 관리들에게 태양을 두고 맹세하고, 6부에 올바른 취지로 타일렀다. 그러나 뜻밖에 간신들이 도망하고 나라 임금이 변을 당해 죽었으므로, 경명왕의 외종제인 헌강왕의 외손을 받들어 왕위에 오르도록 권하여 위태한 나라를 재건하였으니, 임금을 잃고 새 임금을 세우는 일이 그 때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대는 충고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헛되이 떠도는 말을 들어 온갖 술책으로 기회를 노리고 여러 방면으로 침노하였다. 그러나 그대는 아직 나의 말머리마저 보지 못하였고 내 소의 터럭 하나도 뽑지 못하였다. 겨울 초에는 도두 색상이 성산진 밑에서 손이 묶였으며, 이 달에는 좌상 김 락이 미리사 앞에서 해골을 드러내었으며, 죽고 잡힌 자가 많았고, 추격하여 사로잡힌 자가 적지 않았다. 강약이 이와 같으니 누가 이기고 누가 질 것은 알 수 있는 일이다. 내가 기약하는 바는, 평양성의 다락에 활을 걸고 패강 물을 말에게 먹이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달 7일에 오월국 사신 반 상서가 와서 왕의 조서를 전하였는데, 거기에는 '경이 고려와 더불어 오랫 동안 좋게 지내면서 서로 이웃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요사이 두 명의 인질이 모두 죽음으로 인하여 마침내 화친하던 옛날의 우호 관계를 끊고 서로 영역을 침략하여 전쟁을 그치지 않고 있음을 알고 있다. 지금 특별히 사신을 파견하여 그대의 본도로 보내고, 또한 고려에도 보내니 각자가 마땅히 서로 친하게 지내어, 길이 복을 누리도록 하라'고 하였다. 나는 왕실을 높이는 의리를 두터이 하고, 대국을 극진히 섬기고 있다. 따라서 이 조칙을 보고 곧 공손히 따르려 한다. 그러나 그대는 항상 싸움을 그치려 하다가도 다시 시작하고, 어려운 지경에서도 오히려 싸우려 한다. 내가 이를 염려하여 이제 조서를 복사하여 부치노니 주의 깊게 자세히 보기를 바란다. 토끼와 날센 개가 싸우다가 서로 피곤해지면 결국 모두 남에게 잡히는 조롱을 받을 것이오, 황새와 조개가 서로 물고 있다가 또한 모두 남에게 잡히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마땅히 지난 날의 잘못을 교훈으로 삼아 후회할 일을 스스로 남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三年正月, <太祖>答曰: "伏奉<吳>·<越>國通和使, <班>尙書所傳詔書一道, 兼蒙足下辱示長書敍事者. 伏以華 膚使, 爰致制書, 尺素好音, 兼承敎誨. 捧芝檢而雖增感激, 鬪{闢 /開 }華 而難遣嫌疑. 今託廻軒, 輒敷危枉{ } . 僕承天假, 俯迫人推. 過 將帥之權, 獲赴經綸之會. 頃以三韓厄會, 九土凶荒. 黔黎多屬於黃巾, 田野無非於赤土. 庶幾 風塵之警, 有以救邦國之災. 爰自善隣, 於焉結好. 果見數千里農桑樂業, 七八年士卒閑眠. 及至酉年, 維時陽月, 忽焉生事, 至於交兵. 足下始輕敵, 以直前, 若螳 { 螂} 之拒轍, 終知難而勇退, 如蚊子之負山, 拱手陳辭, 指天作誓, 今日之後, 永世歡和, 苟或 盟, 神其 矣. 僕亦尙止戈之武, 期不殺之仁, 遂解重圍, 以休疲卒, 不辭質子, 但欲安民. 此則我有大德於南人也, 豈謂 血未乾, 凶威復作, 蜂 之毒, 侵害於生民, 狼虎之狂, 爲梗於畿甸, <金城>窘忽, 黃屋震驚. 仗義尊周, 誰似<桓>·<文>之覇. 乘間謀漢, 唯看<莽>·<卓>之姦. 致使王之至尊, 枉稱子於足下, 尊卑失序, 上下同憂, 以爲非有元輔之忠純, 豈得再安於社稷? 以僕心無匿惡, 志切尊王, 將援置於朝廷, 使扶危於邦國. 足下見毫釐之小利, 忘天地之厚恩, 斬戮君王, 焚燒宮闕, 卿七{士} , 虔劉士民, 姬姜則取以同車, 珍寶則奪之, 載. 元惡浮於<桀>·<紂>, 不仁甚於鏡{ } 梟. 僕怨極崩天, 誠深却日. 誓效鷹 之逐, 以申犬馬之勤. 再擧干戈, 兩更槐柳. 陸擊則雷馳電擊, 水攻則虎搏龍騰. 動必成功, 擧無虛發. 逐<尹 {尹卿} >於海岸, 積甲如山. 擒<鄒造>於城邊, 伏尸蔽野. <燕山郡>畔, 斬<吉奐>於軍前. <馬利城>邊, 戮<隨 >於纛下. 拔<任存>之日, <邢積>等數百人捐軀. 破<淸川{淸州}> 之時, <直心>等四五輩授首. <桐藪>望旗而潰散, <京山>銜璧以投降. <康州>則自南而來(+歸) <羅>府則自西移屬. 侵攻若此, 收復寧遙? 必期< 水>營中, 雪<張耳>千般之恨, <烏江>岸上, 成<漢王>一捷之功. 竟息風波, 求淸 海. 天之所助, 命欲何歸? 況承<吳越>王殿下, 德洽包荒, 仁深字小, 特出綸於丹禁, 諭 難於靑丘, 旣奉訓謀, 敢不尊奉? 若足下 {祗} 承睿旨, 悉 凶機, 不惟副上國之仁恩, 抑可紹海東之絶緖. 若不過而能改, 其如悔不可追."
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三國遺事].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3년 정월에 태조가 다음과 같이 회답하였다.
"오월국 통화사 반 상서가 전해준 한 장의 조서를 받들고, 동시에 그대가 보내준 장문의 사연을 받아보았다. 화려한 수레를 타고 온 대사가 제서를 보내주니, 편지의 좋은 소식과 함께 가르침을 받았다. 그대의 좋은 편지를 받게되어 비록 감격하기는 하였으나, 편지 글을 펴보니 의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돌아가는 사절 편에 부탁하여 나의 마음을 알리고자 한다. 나는 위로 하늘의 도움을 받들고 아래로 다른 사람의 추대에 못이겨 외람되게 장수의 권한을 가지고 경륜을 펴는 자리에 나서게 되었다. 얼마 전에는 삼한에 액운이 닥치고 전국에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 가운데 반란에 가담하는 자가 많았고, 전답은 황폐해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나는 요행히 전쟁의 참화를 종식시키고, 나라의 재난을 구원할 수 있을까 하여, 선린 정책으로 우호 관계를 맺었다. 그 이후로 과연 수천리 영역의 백성들이 농업에 힘을 쓰고, 7∼8년 동안 군사들이 편히 쉬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유년 10월에 와서 갑자기 사단이 발생하여 서로 싸우게 된 것이다. 그대는 처음에 나를 업신여겨 마치 당랑이 수레바퀴를 막듯이 덤벼들다가, 마침내는 모기새끼가 산을 진 것처럼 어려움을 알고 용퇴하였다. 그리고 공손히 사죄하였으며, 하늘을 두고 맹세하기를 '오늘부터 영원히 평화롭게 지낼 것이다. 만일 맹약을 위반한다면 신명의 벌을 받겠다'고 하였다. 나도 역시 전쟁을 끝내는 무력을 인정하고, 사람들을 죽이지 않는 인을 약속하여 마침내 겹겹으로 에워쌓던 포위를 풀었으며, 지친 군사를 쉬게 하고, 인질의 교환도 마다하지 않으며, 다만 백성을 편안케 하고자 하였다. 이리하여 남방 사람들에게도 나의 덕이 크게 베풀어졌다. 그런데 맹세한 피가 마르기도 전에 그대가 흉악한 위세를 다시 부려서, 벌과 독충 같은 해독이 백성들에게 미치고, 호랑이와 승냥이 같은 행패가 전국을 몰아쳐서, 금성이 위험에 빠지고 왕궁에 혼란이 일어날 줄을 어찌 알았으랴? 정의에 입각하여 주나라 왕실을 높이는 일에 제환, 진문의 패업과 같은 자가 누구이겠는가? 기회를 엿보아 한 나라를 전복하려 한 것은 오직 왕 망, 동 탁의 간악함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이다. 지존의 왕으로 하여금 그대 앞에서 자식이라고 칭하게 하여 군신의 질서가 없어지자 상하가 모두 근심에 잠겼으니, 임금을 보좌할 진정한 충신이 아니면 어찌 다시 사직을 편안히 하겠는가라고 생각하였다. 사람들은 내가 야심이 없고 존왕의 정신이 간절하다 하여, 나를 조정에 두어 국가의 위급한 처지를 구하도록 하였다. 그대는 털끝 만한 작은 이익을 위하여 천지와 같이 두터운 은혜를 잊고 있다. 임금을 죽이고 궁궐을 불살랐으며, 재상과 관리들을 모조리 살륙하고, 양반과 상민을 학살하였으며, 귀부인을 잡아 수레에 같이 태우고, 진귀한 보물을 빼앗아 짐으로 실어 갔다. 그대는 걸, 주보다 더 포악하며, 맹수 보다 더욱 잔인하다. 나는 임금의 죽음에 원한이 사무치고, 백성의 원수를 물리칠 마음에 충만되어 있다. 역적의 처단에 진력하여 미미한 충성을 표하기로 하고, 다시 무기를 든 후 두 해가 지났다. 육전에서는 우뢰와 같이 내닫고 번개와 같이 빨랐으며, 수전에서는 호랑이나 용처럼 뛰어 올라, 움직이면 반드시 성공하고 손을 들면 반드시 헛된 적이 없었다. 윤빈을 해안에서 쫓을 때 그가 버리고 간 갑옷이 산 같이 쌓였고, 추 조를 성 옆에서 사로잡을 때는 쓰러진 시체가 들을 덮었다. 연산군 부근에서는 길 환을 군문에서 베었고, 마리성 부근에서는 수 오를 대장기 밑에서 죽였다. 임존성을 함락시키던 날, 형 적 등 수백 명의 몸이 사라졌고, 청천을 쳐부수던 때는 직심 등 너댓 명이 머리를 바쳤었다. 동수의 군사는 깃발만 보고도 도망하였고, 경산의 군사는 구슬을 물고 와서 항복하였으며, 강주 고을은 남쪽으로부터 항복해왔고, 나주 고을은 서쪽으로부터 귀순하였다. 공격하는 솜씨가 이러하니 국토를 회복할 날이 어찌 멀겠는가? 저수의 병영에서 장 이의 깊은 원한을 씻고, 오강 가에서 한왕이 최후의 일전에 성공한 것과 같은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이제 전란을 평정
하여 전국을 안정시키려 하니, 하늘이 나를 돕고 있다. 그런즉 천 명이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더구나 오월왕 전하의 덕화가 넘쳐 외방에 이르고, 인자함은 지극하여 어린 백성을 사랑하니, 특별히 궁궐에서 지시를 내려 동방에서 전란을 끝내라고 타일렀으니, 이미 이 가르침을 받은 이상 어찌 존중하지 않으랴? 만일 그대가 공손히 이 지시를 받들어 싸움을 그친다면, 이는 대국의 어진 은덕에 보답하는 것일 뿐 아니라 이 땅의 끊어진 왕통을 다시 이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허물이 있는데도 고치지 않는다면, 이를 후회하더라도 수습할 길이 없을 것이다."
○夏五月<萱>潛師襲<康州>, 殺三百餘人, 將軍<有文>生降. 秋八月, <萱>命將軍<官昕>, 領衆築<陽山>. <太祖>命<命旨城>將軍<王忠>, 擊之, 退保<大耶城>. 冬十一月, <萱>選勁卒, 攻拔<缶谷城>, 殺守卒一千餘人, 將軍<楊志>·<明式>等生降. 四年秋七月, <萱>以甲兵五千人, 攻<義城府>, 城主將軍<洪術>戰死. <太祖>哭之慟曰: "吾失左右手矣." <萱>大擧兵, 次<古昌郡><甁山>之下, 與<太祖>戰, 不克, 死者八千餘人. 翌日, <萱>聚殘兵, 襲破<順州城>. 將軍<元逢>不能禦, 棄城夜遁, <萱>虜百姓, 移入<全州>. <太祖>以<元逢>前有功宥之. 改<順州>, 號<下枝縣>.
여름 5월, 견 훤이 비밀리에 군사를 보내 강주를 습격하여 3백여 명을 살해하자, 장군 유문이 견 훤에게 항복하였다. 가을 8월, 견 훤이 장군 관흔으로 하여금 양산성을 쌓게 하였는데 태조가 명지성 장군 왕 충으로 하여금 이를 공격하게 하니 관흔은 물러가 대야성을 수비하였다. 겨울 11월, 견 훤이 강병을 선발하여 부곡성을 함락시키고, 수비군 1천여 명을 죽이자, 장군 양 지, 명 식 등이 항복하였다. 4년 가을 7월, 견 훤이 갑병 5천 명을 거느리고 의성부를 공격하였는데 성주였던 장군 홍 술이 이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태조가 슬프게 울면서 "내가 두 팔을 잃었다"고 말하였다. 견 훤이 대병을 동원하여 고창군의 증산 밑에 주둔하여 태조와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전사자가 8천여 명에 달하였다. 다음날 견 훤이 패잔병을 모아 순주성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장군 원 봉이 이를 방어하지 못한 채 성을 버리고 밤에 도주하였다. 견 훤은 백성들을 사로잡아 전주로 이주시켰다. 태조가 예전의 공로를 참작하여 원 봉을 용서하고, 순주의 이름을 하지현으로 고쳤다.
○<長興>三年, <甄萱>臣< 直>, 勇而有智略, 來降<太祖>. <萱>收< 直>二子一女, 烙斷股筋. 秋九月, <萱>遣一吉 <相貴>, 以舡兵入<高麗><禮城江{禮成江}> , 留三日, 取<鹽>·<白>·<貞>三州船一百 焚之, 捉<猪山島>牧馬三百匹而歸. <淸泰>元年春正月, <萱>聞<太祖>屯<渾州{運州}> , 遂簡甲士五千至. 將軍<黔弼>, 及其未陣, 以勁騎數千突擊之, 斬獲三千餘級. <熊津>以北三十餘城, 聞風自降. <萱>麾下術士<宗訓>·醫者<訓謙>·勇將<尙達>·<崔弼>等降於<太祖>.
趙炳舜. 『三國史節要』. 『日本書陵部本』.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장흥 3년, 용감하고 지략이 있는 견 훤의 부하 공 직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견 훤은 공 직의 아들 두 명과 딸 한 명을 잡아다가 다리 힘줄을 불로 지져 끊었다. 가을 9월, 견 훤이 일길찬 상귀를 보내 수군을 거느리고 고려의 예성강에 들어와 3일 간 머물면서 염주, 백주, 정주 세 주의 배 1백 척을 빼앗아 불사르고 저산도에 있는 목마 3백 필을 빼앗아 돌아갔다. 청태 원년 정월, 견 훤이 태조가 운주에 주둔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갑병 5천 명을 선발하여 왔다. 그가 미처 포진하지 못한 틈을 타서 장군 검 필이 정예 기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돌격하여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웅진 이북의 30여 성이 이 소문을 듣고 자진하여 항복하였다. 견 훤의 부하인 술사 종훈과 의원 훈겸, 용감한 장수 상달, 최 필 등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甄萱>多娶妻, 有子十餘人. 第四子<金剛>, 身長而多智, <萱>特愛之, 意欲傳其位. 其兄<神劒>·<良劒>·<龍劒>等知之, 憂悶. 時<良劒>爲<康州>都督, <龍劒>爲<武州>都督, 獨<神劒>在側. 伊 <能奐>, 使人往<康>·<武>二州, 與<良劒>等陰謀. 至<淸泰>二年春三月, 與波珍 <新德>·<英順>等, 勸<神劒>, 幽<萱>於<金山>佛宇, 遣人殺<金剛>. <神劒>自稱大王, 大赦境內.
견 훤은 아내를 많이 취하여 아들이 10여 명이었다. 그 가운데 넷째 아들 금강이 키가 크고 지혜가 많았으므로 견 훤은 특히 아껴서 그에게 왕위를 전하려 하였다. 그의 형 신검, 양검, 용검 등이 이를 알고 번민하였다. 이 때 양검은 강주 도독, 용검은 무주 도독이 되었으며, 다만 신검만이 견 훤의 측근에 있었다. 이찬 능환이 사람을 시켜 강주와 무주에 가서 양검 등과 함께 음모를 꾸미고, 청태 2년 3월에 파진찬 신덕, 영순 등과 함께 신
검에게 권고하여 견 훤을 금산 불당에 가두고 사람을 보내 금강을 죽였다. 신검이 자칭 대왕이라 하고 국내의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其敎書曰: "<如意>特蒙寵愛, <惠帝>得以爲君, <律成{建成}> 濫處元良, <太宗>作而卽位, 天命不易, 神器有歸. 恭惟: 大王神武超倫, 英謀冠古. 生丁衰季, 自任經綸, 徇地三韓, 復邦<百濟>, 廓淸塗炭, 而黎元安集, 鼓舞風雷, 而邇遐駿奔, 功業幾於重興. 智慮忽其一失, 幼子鍾愛, 姦臣弄權, 導大君於<晉><惠>之昏, 陷慈父於<獻公>之惑, 擬以大寶授之頑童. 所幸者上帝降衷, 君子改過, 命我元子, 尹玆一邦. 顧非震長之才, 豈有臨君之智? 兢兢慄慄, 若蹈 淵, 宜推不次之恩, 以示惟新{維新} 之政, 可大赦境內, 限<淸泰>二年十月十七日昧爽以前, 已發覺未發覺, 已結正未結正, 大 已下, 罪咸赦除之, 主者施行!"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今西龍.
그 교서는 다음과 같았다.
"(한 나라) 여의가 특별히 총애를 받았지만 혜제가 임금이 되었고, (당 나라) 건성이 외람되게 태자의 자리에 있었으나 태종이 일어나 제위에 올랐으니, 천 명은 바뀌는 법이 없고, 왕위는 정해진 데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생각컨대 대왕의 신통한 무위는 출중하였고, 영명한 지혜는 만고에 으뜸이었다. 말세에 태어나서 세상을 구하려는 책임을 스스로 떠맡고, 삼한을 다니며 백제를 회복하였으며, 도탄의 괴로움을 깨끗이 씻어주어, 백성들이 편안히 살게 되었다. 그가 바람과 우뢰처럼 떠다니니, 다니는 곳마다 원근에서 그에게 달려왔으며, 이로 말미암아 왕업의 중흥을 눈 앞에 두게 되었다. 그러나 갑자기 지혜가 한 번 잘못되어, 어린 아들이 사랑을 독차지하고, 간신이 권세를 농락하였다. 그들은 임금을 진 나라의 혜공처럼 우매하게 하였으며, 어진 아버지를 헌공처럼 미혹한 길로 빠지게 하여, 철모르는 아이에게 왕위를 잇게 하였으나, 다행히 하늘이 내린 충정으로 군자(견 훤)께서 허물을 바로 잡고, 장자인 나에게 이 나라를 맡기셨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나는 태자의 자질도 갖추지 못했으니, 어찌 임금이 될 지혜가 있겠는가? 따라서 조심하고 두려워 하며 연못의 얼음을 밟는 것 같이 행동하고 있다. 맏아들로서 왕위에 오른 특별한 은혜를 마땅히 백성들에게도 베풀어 혁신된 정치를 해야할 것이므로, 국내의 죄수들에게 대사면령을 내린다. 청태 2년 10월 17일 동트기 전을 기준으로 이미 발각되었거나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결정되었거나 혹은 결정되지 않은 사안을 막론하고 사형 이하의 죄는 모두 사하여 면제한다. 주관자가 이를 시행하라."
○<萱>在<金山>三朔, 六月, 與季男<能乂>·女子<衰福{哀福}> ·嬖妾<姑比>等逃奔<錦城>, 遣人請見於<太祖>.
<太祖>喜, 遣將軍<黔弼>·<萬歲>等, 由水路勞來之. 及至, 待以厚禮, 以<萱>十年之長, 尊爲尙父, 授館以南宮, 位在百官之上. 賜<楊州>, 爲食邑, 兼賜金帛蕃縟·奴婢各四十口·內廐馬十匹.
李丙燾. [高麗史]. [通鑑].
趙炳舜. [三國史節要].
견 훤은 금산에서 석 달 동안 있었다. 6월에 이르러 그는 막내아들 능예, 딸 쇠복, 첩 고비 등과 함게 금성으로 도망하여 사람을 태조에게 보내 만나 주기를 요청하였다. 태조가 기뻐하며 장군 검 필, 만세 등을 파견하여 뱃길로 가서 그를 위로하고 데려오게 하였다. 견 훤이 오자 태조는 후한 예로 그를 대접하고, 견 훤의 나이가 태조보다 10년 위라 하여 그를 높여 상보라고 불렀으며, 남궁을 숙소로 주었으니 직위가 백관 보다 상위에 있었다. 또한 양주를 식읍으로 주고, 동시에 금, 비단, 병풍, 금침과 남녀 종 각 40여 명씩과 궁중의 말 10필을 주었다.
○<甄萱>壻將軍<英規>, 密語其妻曰: "大王勤勞四十餘年, 功業垂成. 一旦, 以家人之禍, 失地, 投於<高麗>. 夫貞女不事二夫, 忠臣不事二主. 若捨己君以事逆子, 則何顔以見天下之義士乎? 況聞<高麗>王公, 仁厚勤儉, 以得民心, 殆天啓也, 必爲<三韓>之主, 致書以安慰我王, 兼殷勤{懃} 於王公, 以圖將來之福乎?" 其妻曰: "子之言是吾意也."
趙炳舜. 『三國史節要』.
견 훤의 사위인 장군 영규가 남모르게 그의 처에게 말했다. "대왕이 40여 년 동안 노력하여 사업이 거의 성취되려다가 하루 아침에 집안 사람의 재화를 입어 땅을 잃고 고려에 투신하였다. 대저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 것이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니 만일 제 임금을 버리고 역적인 자식을 섬긴다면 무슨 낯으로 천하의 의사들을 볼 것인가? 하물며 고려의 왕공은 인후하고 근검함으로써 민심을 얻었다는 말을 들었으니, 이는 하늘이 인도하여 주는 것이다. 그는 반드시 삼한의 임금이 될 것이니, 어찌 편지를 보내 우리 임금을 위로하고 동시에 왕공에게 성의를 보여 장래의 행복을 도모하지 않겠는가?" 하니 그의 아내가 말하기를 "당신의 말씀이 바로 나의 뜻입니다"라고 하였다.
○於是, <天福>元年二月, 遣人致意, 遂告<太祖>曰: "若擧義旗, 請爲內應, 以迎王師." <太祖>大喜, 厚賜其使者而遣之, 兼謝<英規>曰: "若蒙恩一合, 無道路之梗, 則先致謁於將軍, 然後升堂拜夫人. 兄事而姉尊之, 必終有以厚報之. 天地鬼神, 皆聞此言." 夏六月, <萱>告曰: "老臣所以投身於殿下者, 願仗殿下威稜, 以誅逆子耳. 伏望大王借以神兵, 殲其賊亂, 則臣雖死無憾." <太祖>從之, 先遣太子<武>·將軍<述希>, 領步騎一萬, 趣<天安府>. 秋九月, <太祖>率三軍, 至<天安>, 合兵進次<一善(+郡) >, <神劒>以兵逆之. 甲午, 隔<一利川>, 相對布陣.
趙炳舜. 『高麗史』.
천복 원년 2월에 영규가 태조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의 뜻을 전하며 말했다. "만일 정의의 깃발을 드신다면, 안에서 호응하여 왕의 군사를 맞이하겠습니다." 태조가 기뻐하며 그 사자에게 후하게 상을 주어 보내고, 동시에 영규에게 감사를 표하며 "만일 은혜를 입어 하나로 힘을 합치게 된다면, 길이 막히지 않는 한 내가 먼저 장군을 뵈온 뒤에 마루에 올라가 부인에게 절하고, 장군을 형으로 섬기고 부인을 누님으로 높여, 필히 종신토록 후하게 보답하리니, 이 말은 모두 천지신명이 들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여름 6월에 견 훤이 태조에게 말했다. "노신이 전하에게 투항한 것은 전하의 위엄을 빌어 역적인 자식을 벌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왕은 신병을 빌려 주어 난신 적자를 섬멸케 한다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 태조가 그 말에 따라, 먼저 태자 무와 장군 술회에게 보병과 기병 1만을 주어 천안부로 가게 하였다. 그리고 가을 9월에 태조가 직접 3군을 거느리고 천안에 도착하여 군사를 합치고 일선에 진주하였다. 신검은 군사를 거느리고 마주 대치하여, 갑오일에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며 진을 쳤다.
○<太祖>與尙父<萱>觀兵. 以大相<堅權>·<述希>·<金山>·將軍<龍吉>·<奇彦>等, 領步騎三萬爲左翼; 大相<金鐵>·<洪儒>·<守鄕{守卿}> ·將軍<王順{三順}> ·<俊良>等, 領步騎三萬爲右翼. 大匡<順式>·大相<兢俊>·<王謙>·<王乂>·<黔弼>·將軍<貞順>·<宗熙>等, 以鐵騎二萬, 步卒三千及<黑水><鐵利>諸道勁騎九千五百爲中軍; 大將軍<公萱>, 將軍<王含允>, 以兵一萬五千爲先鋒, 鼓行而進. <百濟>將軍<孝奉>·<德述>·<明吉>等, 望兵勢大而整, 棄甲降於陣前. <太祖>勞慰之, 問<百濟>將帥所在. <孝奉>等曰: "元帥<神劒>, 在中軍." <太祖>命將軍<公萱>, 直 中軍, 一軍{三軍} 齊進挾擊, <百濟>軍潰北. <神劒>與二弟及將軍<富達>·<小達>·<能奐>等四十餘人生降.
李丙燾. [高麗史].李丙燾. [高麗史].李丙燾. [高麗史].
태조가 상보 견 훤과 함께 열병하고, 대상 견권·술희·금 산과 장군 용 길·기 언 등에게 보병과 기병 3만을 주어 좌익을 삼고, 대상 김 철·홍 유·수향과 장군 왕 순·준량 등에게 보병과 기병 3만을 주어 우익을 삼고, 대광 순식과 대상 긍준·왕 겸·왕 예·검필과 장군 정순·종희 등에게 정예 기병 2만과 보병 3천, 그리고 흑수·철리 등 여러 도의 정예 기병 9천5백 명을 주어 중군을 삼고, 대장군 공 훤과 장군 왕 함윤에게 군사 1만 5천 명을 주어 선봉을 삼아서 북을 울리며 진군하였다. 백제 장군 효봉·덕술·명길 등이 고려 군사의 기세가 웅장하며 잘 정비된 것을 보고, 무기를 버린 채 진 앞에 와서 항복하였다. 태조가 그들을 위로하고 백제의 장수가 있는 곳을 물었다. 효봉 등이 "원수 신검이 중군에 있다"고 말하였다. 태조가 장군 공 훤으로 하여금 곧바로 중군을 공격케 하고, 전군이 함께 나가 협공하자 백제 군사가 무너져 패배하였다. 신검은 그의 두 아우와 장군 부달·소달·능환 등 40여 명과 함께 항복하였다.
○<太祖>受降, 除<能奐>, 餘皆慰勞之, 許令與妻 上京. 問<能奐>曰: "始與<良劒>等密謀, 囚大王立其子者, 汝之謀也. 爲臣之義當如是乎?" <能奐> 首不能言, 遂命誅之. 以<神劒>僭位爲人所脅, 非其本心, 又且歸命乞罪, 特原其死.[一云三兄弟, 皆伏誅.] <甄萱>憂 發疽, 數日卒於<黃山>佛舍.
태조는 그들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능환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을 모두 위로하여 주었으며, 처자와 함께 서울로 올라 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태조가 능환에게 물었다. "처음에 양검 등과 음모를 꾸며 대왕을 가두고 그 아들을 왕으로 세운 것이 너의 소행이니, 신하된 도리로 이럴 수 있는가?" 능환은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하지 못하였다. 태조는 마침내 그를 주살하라고 명령하였다. 신검은, 왕위의 찬탈이 타인의 협박에 의한 것으로서 자기 본심이 아니었으며, 또한 나라를 바치고 자기의 죄과를 사죄했다 하여 특별히 사형을 면하였다.[혹은 삼형제가 모두 처형당하였다고도 한다.] 견 훤은 근심과 고뇌로 말미암아 등창이 나서 수일 만에 황산의 불사에서 생애를 마쳤다.
○<太祖>軍令嚴明, 士卒不犯秋毫. 故州縣案堵, 老幼皆呼萬歲. 於是, 存問將士, 量材任用, 小民各安其所業. 謂<神劒>之罪, 如前所言, 乃賜官位. 其二弟與<能奐>罪同, 遂流於<眞州>, 尋殺之. 謂<英規>: "前王失國後, 其臣子無一人慰藉者. 獨卿夫妻, 千里嗣音, 以致誠意, 兼歸美於寡人, 其義不可忘." 仍許職左丞, 賜田一千頃. 許借驛馬三{二} 十五匹, 以迎家人, 賜其二子以官. <甄萱>起<唐><景福>元年, 至<晉><天福>元年, 共四十五年而滅.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 『日本書陵部本』.
태조의 군령이 엄격하고 공정하였으므로, 군졸들이 조금도 백성을 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와 현의 백성들은 모두 안도하였으며, 늙은이, 어린이가 모두 만세를 불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수와 병졸을 위로하고, 그들의 재능을 살펴서 임용하니, 백성들은 각각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였다. 신검의 죄는 앞에 말한 바와 같다 하여 벼슬을 주고, 그의 두 아우는 능환과 죄가 같다 하여 진주로 유배시켰다가 얼마 후에 처형하였다.
태조가 영규에게 말했다. "전 임금이 나라를 잃은 뒤에, 그의 신하로서 한 사람도 자기 임금을 위로하는 자가 없었다. 오직 장군 부부만이 천리 밖에서 소식을 전하여 성의를 다하였으며 또한 나에게 귀순하였으니, 그 의리를 잊을 수 없다." 태조는 곧 그에게 좌승의 직위를 주고, 밭 일천 경을 주었으며, 또한 역마 35필을 빌려주어 집안 사람들을 데려오게 하였다. 그의 두 아들에게도 벼슬을 주었다.
견 훤은 당 나라 경복 원년에 일어나 진 나라 천복 원년까지 활동하였으니, 도합 45년 만에 멸망하였다.
○論曰: <新羅>數窮道喪, 天無所助, 民無所歸. 於是, 群盜投隙而作, 若 毛然. 其劇者, <弓裔>·<甄萱>二人而已. <弓裔>, 本<新羅>王子, 而反以宗國爲讐, 圖夷滅之, 至斬先祖之畵像, 其爲不仁, 甚矣. <甄萱>, 起自<新羅>之民, 食<新羅>之祿, 而包藏禍心. 幸國之危, 侵 都邑, 虔劉君臣, 若禽 而草 之, 實天下之元惡大 . 故<弓裔>見棄於其臣, <甄萱>産禍於其子, 皆自取之也, 又誰咎也? 雖<項羽>·<李密>之雄才, 不能敵<漢><唐>之興, 而況<裔>·<萱>之凶人, 豈可與我<太祖>相抗歟? 但爲之歐民者也.
三國史記卷第五十.
저자의 견해 : 신라는 운세가 기울고 도가 사라졌기 때문에 하늘이 돕지 않고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었다. 이 틈을 이용하여 도적들이 무수하게 일어나 마치 고슴도치 털처럼 되었으나, 그 중에서 가장 극렬한 자는 궁예와 견 훤 두 사람 뿐이었다. 궁예는 본래 신라의 왕자로서 도리어 조국을 원수로 여기고 신라의 전복을 기도하였으며, 심지어 선조의 초상화까지 참수하였으니, 그의 어질지 못함이 극심하였다. 견 훤은 신라 백성으로 일어나 신라의 녹을 먹으면서도 불칙한 마음을 품었으며, 나라의 위기를 다행으로 여겨 도성과 고을을 침략하였다. 그는 새를 죽이고 풀을 베듯 임금과 신하를 살육하였으니 천하의 원흉이었다. 그러므로 궁예는 자기 부하로부터 버림을 당하였고, 견 훤은 제 자식으로부터 화를 입었다. 이는 모두 자업자득이었으니, 누구를 다시 원망하겠는가? 항 우와 같이 뛰어난 재주로도 한 나라의 흥기를 막지 못하였고, 이 밀과 같이 뛰어난 재주로도 당 나라의 흥기를 막지 못하였거늘, 황차 궁예나 견 훤과 같은 흉한이 어찌 우리 태조에게 대항할 수 있었으랴? 그들은 다만 태조에게 백성들을 모아주는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삼국사기 권 제 50 끝
考寶文閣修校文林郞禮賓丞同正 臣 <金 永溫>
考西林{材} 場判官儒林郞尙衣直長同正
臣 <崔 祐甫>
考文林郞國學學諭禮賓丞同正 臣 <李 黃中>
考儒林郞前國學學正 臣 <朴 東桂{朴 東柱}>
考儒林郞金吾衛錄事 軍事 臣 <徐 安貞>
考文林郞守宮署令兼直史館 臣 <許 洪材>
考將仕郞分司司宰注簿 臣 <李 溫文>
考文林郞試掌治{冶} 署令兼寶文閣校勘
臣 <崔 山甫>
編修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同德贊化} 功臣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守大保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集賢殿太學士監修國史上柱國致仕
臣 <金 富軾>
同管句內侍寶文閣校勘將仕郞尙食直長同正 臣 <金 忠孝>
管句右丞{承} 宣尙書工部侍郞翰林侍講學士知制誥
臣 <鄭 襲明>
府使嘉善大夫兼管內勸農防禦使 臣 <金 居斗>
權知經歷前奉正大夫三司左咨議 臣 <崔 得 >
嘉靖大夫慶尙道都觀察陟黜使兼監倉安集轉輸勸農管學事提調刑獄兵馬公事同知中樞院事
臣 <閔 開>
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朝刊殘本三國史記』.趙炳舜. 『高麗史』.趙炳舜. 『高麗史』.
참고보문각수교문림랑예빈승동정 신 김 영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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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민 개
○三國史印本之在< 林>者, 歲久而泯, 世以寫本行. 按廉使<沈>公<孝生>得一本, 與前府使<陳>公<義貴>圖所以刊行, 於癸酉七月, 下牒于府. 八月, 始 諸梓, 未幾, 二公見代. 余以其年冬十月至府, 承觀察使<閔>相公之命, 因繼其志, 乃助之施令, 工不斷手, 至甲戌夏四月告成. 嗚呼! 指揮能事, 以至於成, 惟三公是賴, 余何力之有焉? 但具事之終始, 書于卷末耳. 府使嘉善大夫<金居斗>跋.
[삼국사기] 영인본으로서 경주에 보관되어 있던 것은 세월이 흘러 없어지고, 세상에는 사본이 전해지고 있었다. 안렴사 심공 효생이 영인본 한 권을 구하여 이전의 부사 진공 의귀와 이의 간행 문제를 의논하고, 계유년 7월에 경주부에 통첩을 내렸다. 8월에 각판을 시작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분이 관직을 옮기게 되었다. 나는 그 해 겨울 10월 경주부에 부임하였다. 나는 관찰사 민 상공의 지시를 받고, 두 분의 뜻을 계승하기 위하여 이 일의 실행을 명령하였고 중단없이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 일은 갑술년 여름 4월에 완성되었다. 아아! 이 사업을 지휘하여 진행하도록 하고 완성에 이르게 한 것은, 오직 위 세 분에게서 힘입은 것이니, 나에게 무슨 능력이 있으랴? 다만 일의 전말을 모아 이 책의 말미에 기록이나 할 뿐이다.
부사가선대부 김 거두가 발문을 쓰다.
○吾東方三國本史·遺事兩本, 他無所刊, 而只在本府. 歲久 缺, 一行可解僅四五字. 余惟士生斯世, 歷觀諸史, 其於天下治亂興亡, 與諸異跡, 尙欲博識, 況居是邦, 不知其國事, 可乎! 因欲改刊, 廣求完本, 閱數載不得焉. 其曾罕行于世, 人未易得見, 可知若今不改則將爲失傳. 東方往事, 後學竟莫聞知, 可歎也已. 幸吾斯文<星州>牧使<權>公<輳>, 聞余之求, 求得完本送余, 余喜受, 具告監司<安>相國< >·都事<朴>候<佺>, 僉曰善. 於是, 分刊列邑, 令還藏于本府. 噫! 物久則必有廢, 廢則必有興, 興而廢, 廢而興, 是理之常. 知理之常, 而有時興, 以永其傳, 亦有望於後來之惠學者云.
皇明<正德>壬申季冬, 府尹推誠定難功臣嘉善大夫<慶州>鎭兵馬節制使全平君<李繼福>謹跋.
生員 <李 山甫>
校正生員 <崔 起潼>
中訓大夫慶州府判官慶州鎭兵馬節制都尉 <李 瑠>
奉直郞守慶尙道都事 <朴 佺>
推誠定難功臣嘉靖大夫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 <安 >
우리 동방의 삼국 본사와 유사 두 책은 다른 곳에서는 간행되지 않았고 오직 본 경주부에만 보존되어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 되자 마멸되고 낙장이 생겨서, 알아 볼 수 있는 것이 한 줄에 겨우 너댓 자 밖에 없었다. 내가 선비로 이 세상에 태어나 여러 역사 서적들을 보아가며, 천하의 흥망성쇠와 기이한 역사의 흔적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자 하거늘, 하물며 이 나라에 살면서 이 나라의 사적을 몰라서야 되겠는가! 이러한 뜻으로 이 책을 다시 간행하기 위하여 완전한 판본을 널리 구하였으나, 수 년이 지나도록 얻을 수가 없었다. 이 책은 예전부터 세상에 많았던 것이 아니었기에 사람들이 쉽사리 얻어 볼 수 없었다. 따라서 만약 지금이라도 복각을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는 완전히 없어지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나라의 지난 사적을 후학들이 필경 알 수 없을 것이니 이는 대단히 개탄스러운 일이었다. 다행히 나의 선배인 성주목사 권공 주는 내가 이 책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완전한 책을 얻어 나에게 보내 주었다. 내가 이를 반가이 받아들고, 감사 안 상국 당과 도사 박 후 전에게 고하였더니 모두 이의 복각에 찬성하였다. 이렇게 되어 여러 고을에 판각 사업을 분담시키고, 판각이 완성되는대로 경주부에 보내 보관토록 하였다. 아아! 사물이란 오래되면 반드시 없어지고, 없어지면 반드시 생기는 것이니, 생겼다가 없어지고 없어졌다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이 당연한 이치를 알아서 어느 시기엔가 이러한 사업이 다시 진행되어 이 책이 영원히 전해지기를, 훗날의 지혜로운 학자에게 기대한다.
명 정덕 임신년 섣달에 부윤추성정난공신가선대부경주진병마 절제사전평군 이 계복이 삼가 발문을 쓰다.
생원 이 산보
교정생원 최 기동
중훈대부경주부판관경주진병마절제도위 이 유
봉직랑수경상도도사 박 전
추성정난공신가정대부경상도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 안 당
進三國史表.
○臣<富軾>言: 古之列國, 亦各置史官, 以記事. 故<孟子>曰: "<晉>之『乘』, <楚>之『 』, <魯>之『春秋』, 一也." 惟此海東三國, 歷年長久, 宜其事實著在方策. 乃命老臣, 之編集, 自顧缺爾, 不知所爲. 伏惟聖上陛下, 性<唐堯>之文思, 體<夏禹>之勤儉, 宵 餘閑, 博覽前古. 以爲今之學士大夫, 其於五經諸子之書, <秦><漢>歷代之史, 或有淹通而詳說之者, 至於吾邦之事, 却茫然不知其始末, 甚可嘆也. 況惟<新羅>氏·<高句麗>氏·<百濟>氏, 開基鼎峙, 能以禮通於<中國>. 故<范曄>『漢書』·<宋祁>『唐書』, 皆有列傳. 而詳內略外, 不以具載. 又其古記, 文字蕪 , 事迹闕亡. 是以君后之善惡, 臣子之忠邪, 邦業之安危, 人民之理亂, 皆不得發路以垂勸戒. 宜得三長之才, 克成一家之史, 貽之萬世, 炳若日星. 如臣者, 本非長才, 又無奧識. 至遲暮, 日益昏蒙, 讀書雖勤, 淹卷卽忘, 操筆無力, 臨紙難下. 臣之學術, 蹇淺如此, 而前言往事, 幽昧如彼, 是故疲精竭力, 僅得成編, 訖無可觀, 祗自愧耳. 伏望聖上陛下, 諒狂簡之裁, 赦妄作之罪. 雖不足藏之名山, 庶無使 之醬 . 區區妄意, 天日照臨.
삼국사기를 올리는 글
신 부식은 아뢰나이다. 옛날의 열국에서도 각각 사관을 두어 사적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맹자는 "진 나라의 [승], 초나라의 [도올], 노 나라의 [춘추]는 똑같은 역사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해동 삼국은 유구한 역사를 가졌으니, 그 사적들이 책으로 저술되어야 함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리하여 이 늙은 신하에게 편집의 명을 내리셨으나 저의 부족한 역량을 생각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성상 폐하의 품성은 요 임금의 경륜과 사상을 타고 나셨으며, 몸은 우 임금의 근검을 얻었으니, 아침 저녁의 여가에 옛날의 사적들을 널리 섭렵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의 학자와 관리들 가운데 오경 제자의 서적과 진·한의 역사에 대해서는 정통하여, 이를 자세하게 설명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작 우리 나라의 사적에 대해서는 그 전말을 알지 못하니 이는 심히 개탄할 일이라고 생각하시게 되었습니다. 황차 신라·고구려·백제는 개국 때부터 삼국으로 우뚝 솟았고, 중국과는 예의로 관계를 맺어올 수 있었습니다. 범 엽의 [한서]와 송 기의 [당서]에는 모두 열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는 중국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록이 있지만, 외국에 대해서는 소략하게 다루어 상세한 기록이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삼국의 고기는 문장이 거칠고 바르지 않을 뿐 아니라 사적들이 누락된 경우가 있습니다. 이리하여 임금과 왕후의 선악, 신하의 충성과 간사함, 국가 사업의 평안과 위기, 백성의 안녕과 혼란에 관한 사실들이 후세에 교훈으로 전하여질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재능와 학문과 견식을 겸비한 인재를 찾아 권위있는 역사서를 완성하여 자손만대에 전함으로써 우리의 역사가 해와 별 같이 빛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소신은 원래 훌륭한 인재도 아니며, 심오한 지식도 갖추지 못한 데다가, 나이들어서는 나날이 정신이 혼미하여 책을 열심히 읽어도 덮고나면 바로 잊어 버리며, 붓을 잡기에도 힘이 들어 종이를 대하면 글을 쓰기가 어렵습니다. 소신의 학문이 이와 같이 천박하고, 옛 말과 지난 일에 대해서 몽매하기가 또한 이와 같았기에, 소신은 정기와 힘을 모두 기울여서야 간신히 이 책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볼 만한 것이 없게 되었으니 스스로 부끄러울 뿐입니다. 바라옵건대 성상 폐하께서는, 좋은 성과를 이루지 못한 채 뜻만 높았던 점을 양해하여 주시고, 잘못 기록한 한 죄가 있다면 그것을 용서하여 주소서. 이 책이 비록 명산의 史庫에 보관될 가치는 없을지라도 버리는 종이로 사용되지 않게하여 주시옵고, 숨어 버리고 싶은 망령된 이 심정에 햇빛으로 밝게 임하여 주시옵소서!
출처:진갑곤의 한자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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