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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8. 07. 23
■ 益齋先生의 墓所와 竹林堂
●고려 개경(高麗 開京)
왕건(王建)은 918년에 태봉(泰封)왕인 궁예(弓裔)를 추방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여 건국하여 태조(太祖)가 되니 34대 공양왕(恭讓王) 까지 475년간 개성은 정치, 경제, 문화중심지로 존속하였다,
고구려 때 부소갑(扶蘇岬), 신라 때 송악(松嶽)인 이곳을 개주(開州), 개경(開京), 개성부라 불리다가 조선에 멸국 되어 태조(太祖)가 한양(漢陽)으로 천도하여 유후사, 유수, 부윤, 군수를 두다 송도면(松都面)에서 개성부로 환원되고, 근대 개성시로 개풍군, 장풍군, 판문군을 포함하여 직할시가 되었고, 현재는 공업지구로 1시 3군으로 되어 있다.
마식령산맥(馬息嶺山脈)의 끝으로 천마산(天摩山), 송악산(松嶽山), 용수산(龍岫山), 진봉산(進鳳山)의 분지를 이루고, 한강(漢江)과 예성강(禮成江), 임진강(臨津江)의 지루인 사천(砂川)이 시내를 흐른다.
문화유적과 관광지로 남대문,연복사 종,만월대,첨성대,선죽교,숭양서원,고려성균관,현능(顯陵:高麗太祖능),공민왕능(恭愍王陵),제능(齊陵),후능(厚陵:조선定宗과 定安王后金氏),두문동,채하동,박연폭포등이 있다.
●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
선생의 휘는 제현(齊賢),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 역옹(櫟翁), 초명은 지공(之公), 문하시중으로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작되고,시호(諡號)는 문충(文忠)으로 16세인 검교정승 동암공 진(東菴公 瑱)의 아들이다.
15세에 등과하여 덕망으로 충간제민(忠諫濟民)한 재상이며 대 정치인 이고,시문에 능통한 대학자로 필봉진무(筆鋒鎭撫)한 대 외교관으로 공민왕 묘정과 원사당에 배향하여 숭모하고 있으며 영정(影幀)은 국보 제110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저서로 익재난고, 역옹패설 등이 있다.
공은 형제로 이암 가락군을 백씨로, 각해대사(覺海大師) 체원(體元)을 중씨로 호군(護軍) 지정(之正)을 아우로 두고, 슬하에 3형제를 두었으며, 중흥조로 추앙되고 있다.
1) 묘소(墓所)
◇황해북도 장풍군 십탄리 영역에 있던 폐리로. 경기도 장단군 소남면 지금리 원촌(京畿道 長湍郡 小南面 知琴里 院村)의 지역으로서, 비파(琵琶: 중국의 전통 악기로 현악기의 하나) 처럼 생긴 마을이라 하여, 지금리(知琴里)라 하였다. 1946년에 황해도 장풍군 소남면 지금리로 되었다가, 1952년 군, 면리 대폐합에 따라, 장풍군 십탄리(十灘里, 10여개의 여울이 있어서 십탄리라 한다)에 편입 되면서, 폐지되었다.
세보에서 우봉도리촌(牛峰桃李村)이라 밝혔으니 장단군 소남면 지금리인데, 현재 장풍군 십탄리로 경순왕릉(敬順王陵)이 있는 고랑포리 북쪽이며 임진강의 지천인 사미천(沙尾川)이 흐르는 곳이다.
동암공의 묘갈문에서 묘소는 실전하였다가 경술(1910년)에 도적이 굴총하여 문량 조간(文良趙簡=悅軒,찬성사)이 찬한 지석이 발견되어 종필(鍾弼), 종진(鍾震), 종우(鍾翊), 종억(鍾億), 종선(鍾璇), 상경(相慶), 상익(相益)과 함께하여 휘와 호, 선대와 배위를 알게 되어 세보에 등재 하였으나 외조의 휘와 초배 성씨는 망가져 알 수가 없었고 묘소를 개수하니 1910년 3월 22일 이라고 밝히고 있다.
묘산도는 도천서원(道天書院=경북 경산 소재)에서 발간한 별지로 왼쪽 능선에 익재공과 상부 미상 2기, 중앙에 동암공과 밀직공의 묘소이고, 우측이 인천공 부자의 묘소로 그 가계는 익재공파로 운와공, 달존(達尊), 군수공 덕림(德林), 도안무사공 신(伸) 낙안공 계번(繼蕃), 감사공 윤인(尹仁), 창평공 공린(公麟), 생원공 타(鼉), 좌승지공 발(渤), 증 이조판서공 경윤(憬胤), 오촌공 대건(大健), 벽오공 시발(時發), 춘전공 경휘(慶徽), 처사공 인식(寅烒), 처사공의 장자인 인천부사 성곤(成坤) 이다.
인천부사 성곤의 묘지는 영의정을 지낸 오천 이종성(梧川 李宗城)이 찬하였는데 아들 석지(錫祉)와 상하분이고, 그 옆이 도산(道山)서원이고 교리공은 알 수가 없다.
인식 처사공도 익재공의 외록 건좌이며 비갈이 있다 하였고, 차자 현감공 원곤(元坤)도 익재공 남록자좌라 하였고 아들 석종(錫宗)도 신좌에 있다 하였으며, 석지 처사공의 아들 백원(百源)도 익재공 안산 자 좌라 하였고, 송암공과 아들 부정공과 상서공도 우봉촌이라 하였으며, 기타 선조들도 이곳으로 기록됨이 많고 덕봉집 묘산도에서 6기의 미상 묘소가 표시되어 있고, 재사 아래엔 진천종인들의 세를 이은 묘소 10여기가 있다, 라는 재사기하록진천종인계장자십여분(齋舍其下麓鎭川宗人繼葬者十餘墳()것으로 보아 당시 세장지인 듯 하다.
묘소가 이북이라 참배나 시향하지 못함으로 1986년 익재공파 대종회에서 용인 외사(용인시 백암면 근삼리 내수곡 산51-1, 2번지) 에 설단 하여 숭모하고 있다.
종성의 호는 오천(梧川),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영의정으로 장조(莊祖)의 묘정에 배향되고 오천집이 있으며 백사 항복(白沙 恒福)의 6세로 충정공 아곡 태좌(鵝谷 台佐)의 아들이며, 송암은 세기의 호이고 시호는 문희(文僖)로 검교정승이며, 슬하에 국당, 부정, 상서, 사인을 두었다.
2) 遺墟碑(短碣)
덕봉집에 선조 익재선생 묘산도를 알게(識-식) 한다는 것으로 황해도 우봉 도리촌은 지금의 금천 지고미리(知古味理)이다. 라고 기록한 후, 천리외말손한무배심지로(千里外昩孫限無拜審之路) 세정미진택이 제릉령(歲丁未鎭宅以齊陵 되어 10월 13일乃於十月十三日) 시극전성묘전유비각(始克展省墓前有碑刻) 고려문하시중계림부원군익재선생이제현지묘(高麗門下侍中鷄林府院君益齋先生李齊賢之墓)라 하였으니 즉, 후손 진택이 정미(1787년)에 제릉령(齊陵令)으로 와서 10월 13일 종친들과 더불어 성묘하고 묘갈을 세우고, 1798년에 지주사(知奏使)를 따라와서 유허비를 남기고 아픈 가슴을 이기지 못하여 시를 읊고 머무르며 묘역을 개수하고 성배한 감격으로 돌아오면서 시를 읊었다는 것으로,益齋先祖遺墟碑在滿月洞世稱文忠洞(익재선조유허비재만월동세칭문충동) 無片石記功者殆四百有餘年(무편석기공자태사백유여년) 以是慨恨歲戊午不肖孫適知州事謀立短碣(이시개한세무오불초손적지주사모립단갈)不勝感愴遂吟一絶(불승감창수음일절) 以寓羹墻之慕云爾省拜(이우갱장지모운이성배)先祖益齋先生墓有感回路又吟一絶(선조익재선생묘유감회로우음일절).
▲중국의 전통악기 비파(琵琶)입니다.
▲죽림당 유허비(필자) 2008. 01. 24(목)
3) 묘갈(碑碣)과 신도비(神道碑)
익재공 묘소 앞에 비석을 세웠다는 묘전유비각(墓前有碑刻)과 청룡쪽(동쪽을 말함)에 밀직의 묘소와 비갈이 있다는 청룡유갈내선생삼자밀직사상호군휘창로지묘(靑龍有碣乃先生三子密直使上護軍諱彰路之墓)와 외백호(外白虎=바깥 서쪽)엔 재사가 있고 묘를 지키는 사람이 있다는 외백호내유재사묘직한찬징(外白虎內有齋舍墓直韓贊徵)이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에 실존하였음이 입증되고 있다,
송암공 추모비명에서 밀직의 묘위에 큰 무덤 둘이 있으며 하나는 송암공의 묘소임이 자명하여 덕봉공이 수갈 한지 70년이 지난 1868년에 후손 유원(裕元)이 굴험 하였으나 확인 못하였다 하였는데, 42년 후인 1910년에 우연히 동암공 묘소를 확인,개수 하였고 1921년에 후손 종형(鍾瀅)이 짓고, 정인표(鄭寅杓/호는 學山, 비서승) 선생이 쓴 묘갈을 세웠고, 익재공의 신도비는 한산군 목은 이색(牧隱 李穡)선생이 찬한 묘지명을 1924년에 후손 종필(鍾弼)이 찬하고 비문은 후손 종형(鍾瀅)이 써 세웠다 하였는데, 묘산도에선 중앙능선엔 2기뿐이나 귤산집과 덕봉집엔 3기로 되어 동일한 입장을 보이며, 덕봉공도 익재공과 밀직공 사이 능선을 굴험하였다는 것으로 국내측동변지록유이진분역오가선영고굴험이무표지석(局內側東邊支麓有二陳墳亦吾家先塋故掘驗以無表誌石)으로 1726년(부친)과 1719년(아들)에 졸한 인천지사 부자의 묘역인 듯 하나 당시에도 오천공이 찬한 지석이 보이지 않았으며, 귤산공의 굴험에도 아무런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가 후일 발견되었으니 행운이라 아니할 수가 없겠으나 자세한 내용은 통일이 되고 나서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하겠다.
묘지(墓誌)는 돌(石)이나 도판(陶板)에 글을 새겨서 무덤 옆에 파묻는 것으로 광지(壙誌)라고도 하며, 묘갈(墓碣)은 무덤 앞에 세우는 머리 부분이 둥그스름한 작은 돌비로 5품관 이하에서 주로 세웠으며, 묘지(墓碑)는 상석 우측에 세우는 비로 농대(籠臺) 또는 반석(盤石) 위에 비신(碑身)을, 그 위에 가첨석(加檐石)을 얹었으며, 신도비(神道碑)는 왕이나 고관의 무덤 앞이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을 기리는 비석으로 종2품 이상만 허용하였으며, 묘비와 더불어 특별한 경우에는 귀부(龜趺) 위에 비신을 얹고 이수(螭首)를 얹는 것도 있으며, 모두 묻힌 사람의 성명, 사적, 직계존비속의 성명 등과 명문(銘文)을 새긴다.
유원은 호가 귤산(橘山), 시호는 문충(文忠), 영의정으로 가오고략, 임하필기, 금석록 등이 있고 백사공 항복(恒福)의 10세손으로 동천공 계조( 啓朝)의 아들로, 37世 비서승(秘書承) 종형(鍾瀅)은 28世 벽오공 시발(時發)의 9대 사손(嗣孫)이며 규철(圭哲)의 아들로 진천 초평출신이다.
종필의 호는 기당(紀堂)으로, 공조참의, 궁내부특진관을 역임하였고, 생원공 타(鼉)의 후손으로 군수공 집성(集星)의 증손이며 도정 규창(圭昌)의 아들이다.
一. 죽림당(竹林堂)
익재공의 생가 터로 북한 보존유적 제1541호로 빨강색으로 리제현 유허지라 표시한 표석이 있다.
1) 遺墟碑銘
전면에
高麗侍中益齋李先生遺址.
고려시중익재이선생유지
뒷면에
先生諱齊賢字中思仕高麗歷事五朝
선생휘제현자중사사고려역사오조
官至門下侍中鷄林府院君諡文忠公
관지문하시중계림부원군시문충공
嗚呼先生德業文章煊炳一世而八年攝國
오호선생덕업문장훤병일세이팔년섭국
上下賴安昭載國乘播人耳目宜其百世之下人之不能忘也
상하뢰안소재국승파인이목의기백세지하인지불능망야
遺址在松京子男山東世所稱竹林堂舊基是也
유지재송경자남산동세소칭죽림당구기시야
迄今四百餘年村人野老猶爲指點況在後昆安得無桑梓之感乎
흘금사백여년촌인야노유위지점황재후곤안득무상재지감호
不肖適尹玆士謹竪石以標之府南水鐵洞又有遺址見於地誌
불초적윤자사근수석이표지부남수철동우유유지견어지지
而今無以的知其處玆庸附識于此云
이금무이적지기처자용부직우차운
崇禎紀元後三戊午六月日行經歷鎭宅謹記
숭정기원후삼무오육월일행경력진택근기
後學生員淸州韓宗樂謹書
후학생원청주한종락근서
숭정기원 후 세 번째 무오라 하였으니 숭정은 명나라 毅宗(예종)의 연호로 조선에선 仁祖(인조) 7년으로 1629년이며 첫 번째 무오년은 1678년이 되니 세 번째는 1798년이 된다.
▲익재선생 산소도.
▲익재선생 유거터인 죽림당 위치도.
▲덕봉집 자료.
1797년 개성 경력으로 부임하여 다음해 6월 15일 생가인 이곳에 죽림당이란 유지비를 세웠다.
개성부는 종2품의 유수가 책임자이고 경력은 종4품으로 실제 사무를 관장하였으며,한종락선생은 서화로 송도인물전에 오른 명필이다.
2) 德峰 鎭宅
휘는 진택, 자는 養重(양중), 덕봉은 호로 익재공의 15세손으로 之帶(지대) 판윤공, 夢星(몽성) 판관공의 7세손으로 聲翁 雲培(성옹 운배)를 부친으로 1738년 경주 외동 방어에서 출생하여 南厓李晉遠(남애이진원) 문하에서 수학하여 1780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 제릉령, 예조정랑, 사헌부장령, 개성경력 등을 역임하였고 훗날 덕봉정사를 건립하여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묘갈은 대사간 琴坡李鼎秉(금파이정병)이 찬하고 南鴻陽(남홍양)이 섰으며, 1899년 승정원 승지로 증직되고 증직묘지명을 李裕元(이유원)과 판윤 李裕寅(이유인)이 짓고, 증직 묘갈문은 李裕承(이유승)이 찬술하였고 정사는 경북지정문화재 제 313호이며 불국역에서 불국사로 올라가다 우측에 묘소와 이웃하여 있다.
사헌부는 백관을 감찰하여 기강과 풍속을 바르게 하고 범법행위를 단속하던 관청이고 장령은 종4품의 벼슬이고, 승정원은 왕의 비서업무를 맡아보는 관청이며 승지는 정3품 당상관의 벼슬이다.
◇이유승의 호는 東梧(동오), 이조판서와 좌찬성에 이르렀고 오천공의 5세손으로 이판 계선(啓善)의 아들이며 자(子=아들)에 성재 시영
(省齋時榮)을 두니 초대부통령이다.
덕봉선생은 종친을 위한 돈목사업으로 1791년 3월 7일 구충당(求忠堂) 행장을 찬술하고 그의 실적을 시로 칭송하였고, 1797년 2월 23일 판윤공 묘소를 개수하였고, 1803년 6월에 구강서원(龜岡書院)에 서책을 기증하고 효경을 운곡사(雲谷祠)로 보내고, 8월 20일엔 구강서원 원장과 향례헌관으로 활동하였고, 1804년 11월에 시조께서 탄강한 표암에 경일(敬一)이 찬술하고 집두(集斗)가 쓴 유허비를 세우는데 일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구충당은 의립(義立)의 호로 철광의 재 발견과 제련법을 자득하여 북벌정책에 기여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로 교감공(校勘公) 존사(存斯)의 후손으로 관란(觀瀾) 승증(承曾)의 6세손이며 동지중추부사인 영부(榮富)의 아들이다,
판윤공의 휘(諱)는 지대(之帶)로 호는 죽은(竹隱)이며 검교한성판윤으로 익재공의 현손으로 병조판서 선(瑄)의 아들로 판윤공파 파조이다, 구강서원은 경주 양월에 소재하고 1686년 창건하여 익재 이제현(李齊賢) 선생 영정을 봉안하고 있는데 영정은 경상북도 문화재 제90호, 건물은 제188호, 문집판각은 제2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운곡사(雲谷祠)는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운동동 65-2번지[목련로214번길 37-3]에 소재하며 국당공과 설정 흘(雪汀 忔)을 배향한 곳인지 확실치 않다, 경일은 호가 청헌(聽軒)으로, 좌의정과 봉조하로 오은군에 봉작 되었고, 시호는 효정(孝定)이며 백사공의 7세손이다.
공(公)은 영의정 오풍군 종악(宗岳)의 계자로 저서로 청헌집이 있고, 집두는 호가 파서(琶西)이며 예조판서로 좌의정 경억의 6세손이며, 증 좌찬성 진원(進源)의 아들이다.
덕봉선생이 1791년 정조(正祖)를 비롯하여 영의정 李福源(이복원-文靖), 좌의정 蔡濟恭(채제공-樊巖,文肅)이조판서 洪良浩(홍양호-耳溪,文憲)과 인왕산 세심대에 올라 暄(따뜻할 훤)과 園(동산 원)과 尊(높을 존)과 樽(술통 준)을 운자로 하여 賞花(상화)의 시를 짓는데
정조대왕이,
暇日芳草節(가일방초절) 心臺洗俗喧(심대세속훤)
따사로운 햇볕에 방초는 피어나고 속된 마음 씻으려 세심대에 왔네.
兩山眞一戶(양산진일호) 千樹亦同園(천수역동원)
남산과 북악은 원래가 한산이듯 우거진 숲 역시 정원과 하나였네.
艶艶天光視(염염천광시) 登登地勢尊(등등지세존)
맑게 갠 하늘은 아름답게 비치고 높이 솟은 지세가 존귀 하구나.
坐間多白髮(좌간다백발) 來歲又今樽(래세우금준)
여기 사람들 백발이 성성하나 내년에도 여기서 이 술잔 마주하세.
◎ 사헌부 장령 덕봉공이,
星駕當春發(성가당춘발) 雲韶鎭日喧(운소진일훤)
성가는 봄에 이르렀고 하늘의 봄은 평화로이 지끌이니
八方開化域(팔방개화역) 千樹擁名園(천수옹명원)
온 세상은 봄으로 화하였고 명원에는 수목이 우거 졌네.
地接南山逈(지법남산형) 天臨北極尊(천림북극존)
남산은 먼 땅 끝에 붙어있고 북악의 봉우리는 하늘만큼 높은데
掬來臺下水(국래대하수) 添得洗心樽(첨득세심준)
세심대 아래 맑은 물 길러다가 술잔에 가득 채워 이 마음 씻으리라
이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