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성질을 가진 과일이라
참외를 잘 먹지 않는다.
노란 빛에 나름 잘빠진 자태로 손길을 붙들지만 몸은 녀석을 쉬이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여름이 되면 과일 중에서 나의 기억을 가장 힘겹도록 붙드는 녀석이기도 하다.
두 가지의 기억이 있다.
6.25 전쟁이 끝나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신방을 차린 곳은 신평 웃시암내라는 곳이었다. 슬치에서 이사를 한 곳으로, 관촌으로 오기 전 머물던 곳이다.
전쟁이 끝난 후라 배고픔은 일상이었고, 농업사회에서 일거리라고는 농삿일밖에는 없었다. 벼농사와 채소 재배가 위주였지만, 농토의 일부에 할머니가 심은 작물이 참외였다. 참외 수확 후 다른 작물을 심을 수 있기도 하지만 여름 열무나 배추보다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며느리들이 참외를 재배하고 관촌 5일장에 내다파는 과정을 감독했다. 일일이 갯수를 새었고, 팔고난 이후의 정산과 재고 관리도 꼼꼼하셨다.
관촌장에 참외를 이고 가서 파는 일은 큰어머니와 엄마의 몫이었다. 매번 농사짓고 장에 내다팔아도 할머니의 대우는 늘 서운했다. 흔하디 흔한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이자 온도였다. ㅎㅎ
관촌장에 참외를 내다 팔고 온 어느 하루는 큰어머니와 엄마가 짜고 팔다 남은 참외를 집근처 소나무 밑에 감추기로 했다. 정산 과정에서 돈을 빼돌렸는지 여부를 깐깐하게 따지는 시어머니에게 돈은 고스란히 갖다 드렸지만, 남은 참외조차 맘껏 먹지 못하게 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날 이런저런 이유를 둘러대며 할머니의 매서운 정산 과정을 무사히 넘기고 저녁에 몰래 나와 숨겨둔 참외를 가져다 맛나게 먹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할머니와 큰어머니와 엄마는 그 힘든 시대를 헤쳐가며 자식을 낳고 기르며 가정을 그리고 집안을 꾸리셨다.
누구나의 인간 삶 모두가 위대해 보이는 이유이다. 더구나 전쟁후 재건 과정에서 먹을것조차 없어 배급을 받던 시대의 인간의 삶은 불가사의와 기적에 가까워 보이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서울 생활을 하며 관촌집에 가는 경우가 해가 갈수록 뜸해졌다.
관촌집에는 엄마 홀로 계셨고, 행여 도둑이라도 들까봐 마루 앞에는 남자 신발 등 여러 개의 신발을 두고 사셨다.
어느 해였던가
삼거리에서 내려 터벅터벅 걷는 발걸음 끝에 닿은 관촌집.
가을이 무르익어 밤기운은 꽤 쌀쌀했다.
대문은 쉬이 열리지 않았다. 가을 농삿일에 지친 엄마는 초저녁에 곤한 잠이 드셨고 대문 두드리는 소리를 한참이나 듣지 못하셨다.
대문이 열리고,
지친 몸 일으켜 늦은 저녁상을 차리고 ᆢ
오랫만에 접하는
따뜻한 국물에
따스한 찬이 있는 식사 ᆢ
상을 치우며
반찬을 냉장고에 넣다가
나는 그냥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냉장고 한 편에 고이 남아있는 것은 노란 참외였다.
이 차가운 늦가을에 참외라니ᆢ
하지만 그 참외는 무우말랭이처럼 물기가 빠지며 쭈글쭈글 말라가고 있었다.
"너그들 오면 줄라고 넣어둔 건디 언제 저리 됐네 ᆢᆢᆢ"
그때의 그 풍경을
그때의 엄마의 말을
잊지 못한다.
내가 참외를 피하는 이유는 아마 몸이 아니라, 나의 무의식일 것이다.
예수는 제 생명을 먹이로 내어놓았고
엄마는 당신의 생을 평생 자식들 먹이로 내어놓았고 ᆢ
참 오랜만에 참외를 가차이서 보고 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