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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록 강좌.
무비스님 - 불교는 쉽다. 5강 - 2 (2009. 06. 03)
屙屎送尿(아시송요). 똥마려우면 똥 싸고 오줌 마려우면 오줌 싼다 이겁니다. 著衣喫飯(착의긱반)이야.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잠 옷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어야지요. 그리고 세수하고 아침식사 해야겠지요.
著衣喫飯. 일상생활이에요. 여러분, 아침에 일어나서 다 그렇게 했습니다. 화장실에 갔다 왔을 것이고, 세수했을 것이고, 또 출입복 갈아입었을 것이고, 요즘 더우니까 이 기후에 맞는 옷을 입었을 것이고, 또 적당히 견딜 만치 식사도 하셨을 것이고, 그리고 뭐라고요? 困來卽臥(곤래즉와).
이제 돌아가셔서 피곤하잖아요? 피곤하면 곧 누워 잔다. 아, 불교가 이렇게 쉬운 겁니다. 불교가 이렇게 쉬운 거라고요. 명품 불교는 이런 겁니다. 명품 불교는... 괜히 엉터리 가짜불교. 엉터리 불교 하니까 사람 그렇게 고생시키지요.
잠도 안자고 하~ 그 많은 퍼붓는 잠 견뎌가면서 그냥 목에다 칼을 대기도 하고, 목에다 줄을 감아가지고 뒤에다 못을 쳐가지고 딱 걸어놔요.
그것은 저도 해봤어요. 그래가지고 졸다가 구부리면 목이 콱 걸려가지고 숨을 못 쉬니까 잠을 깨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 뭣꼬” “이 뭣꼬” 하고 또... 그것이 뭐하는 짓입니까? 아이 잠 오면 한숨 늘어지게 잘 것이지... 용맹전진 제일 오래 것이 한 철을 해봤어요 한 철을...
해인사 그 위에 퇴설당 위에, 그 때는 祖師殿(조사전)이었어요. 나중에는 방장 스님이 그 방을 쓰기도 했지만, 거기서 열 몇 명이 한 철을 우리가 한 번 해보자. 안 태어난 폭 잡고, 선방에는 그런 말 잘 써요. 세상에 안 태어난 폭 잡고 한 번 이 몸 던지고, 이 몸 그냥 던지고 한 번 해보자. 그래 자신 있는 사람 나오라 해가지고, 그때 총림에서 한 열 명이 나왔었어요. 그래서 그때 한 번...
보통 일주일 용맹전진은 의례적으로 여름결제, 겨울 결제 때 의례적으로 하는 것이고, 한 철간. 90일 동안 용맹정진도 해봤습니다. 정말 그것은 피나는 싸움이지요. 세상에 안 태어난 폭 잡고 하는 것이니까...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인간은 완전히 포기하는 겁니다. 완전히 포기하고 그렇게 한 번...
하다가 죽으면 영광이고요. 안 죽으면 그저 조금 불행이고요. 그런 기분으로 합니다. 그런데 이 임제록을 제가 몰라서 그렇게 한 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그런 과정이 있어서 제가 임제록을 이렇게 자신 있게 설명을 하는지 그건 알 수가 없습니다만, 참~ 좋잖아요. 똥마려우면 가서 똥 싸고 오줌 마려우면 오줌 싸고, 옷 입고 밥 먹고 피곤하면 누워 자고...
愚人笑我(우인소아)나 智乃知焉(지내지언)이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비웃을 거야. 그렇게 사는 나의 삶을 비웃겠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안다 말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알아본다.
당연히 사람은 그것이 사람의 삶입니다. 平常無事(평상무사)입니다.
平常心이 是道(평상심시도)라고 하는 말. 平常無事(평상무사)라고 하는 말. 이 平常에 대해서 사람들이 참 區區(구구)해요. 참 구구합니다.
평상생활이란 뜻이거든요. 중생의 우리들의 평상생활은 사람마다 다 달라요. 다른 대로 다 평상생활입니다. 욕심 부리는 사람은 욕심 부리고, 탐욕이 많은 사람은 탐욕 부리고, 화 잘 내는 사람은 화내고, 잘 웃는 사람은 잘 웃고, 비감에 젖어 있는 사람은 잘 울고, 그것은 그 사람의 평상생활입니다.
그럼 그대로 법이고 그대로 도고 그대로 진리의 삶이다 하는 뜻입니다. 평상을 달리 생각하지 마세요. ‘아~ 이건 무심의 경지다.’이렇게 설명하는 사람들 많아요. 보통 사람들이 어디 무심이 쉽습니까? 그것은 평상이 아니지요. 그것은 아주 특별한 삶이지 평상의 삶이 아닙니다.
평상의 삶은 아주 평범하고 모든 사람이 그대로 살아가는 그 삶의 모습을 평상이라고 그럽니다. 그것이 평상심입니다. 平常心이 是道라고요.
평상의 마음대로... 아, 욕심나면 욕심 부리는 겁니다. 욕할 일이 있으면 욕 하는 것. 이것이 平常道理입니다. 우리 살림살이가 거기까지인데 더 이상 뭘 어쩌잔 말입니까? 공자ㆍ맹자같이 나오는 욕도 꾹 참고, 그렇게 점잖은 척 하고, 아주 어진 척 하고 그렇게 해봐야 그거 며칠 가겠어요? 그것은 조작이지 평상이 아닙니다. 조작하고 평상하고는 다릅니다. 평상은 그냥 생긴 대로, 자기 성질대로 그냥 그렇게 사는 거예요. 보십시오. 그렇게 해놨잖아요. 그래서
古人云(고인운), 고인이 말하기를,
向外作工夫(향외작공부)는 總是癡頑漢(총시치완한)이라. 밖을 향해서 공부를 짓는 것은, 밖을 향해서, 나 이외에,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 기존의 것. 기존의 무궁무진한 이 보물. 정말 저 남산보다도 천배 만 배 더 큰 그런 다이아몬드 덩어리. 어찌 그것하고 바꾸겠습니까? 우리가 바꿀 수 없지요.
뭐 천배 만 배 더 큰 것은 상상이 안 되니까 남산을 이야기해 봅시다.
남산은 눈에 들어오니까요. 남산만한 다이아몬드 덩어리가 있다고 칩시다. 그것하고 여러분 자신하고 바꿀 수 있겠어요? 못 바꿔요. 그거 보십시오.
못 바꾸잖아요. 나는 그만치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버리고 向外作工夫. 밖을 향해서 그것을 도외시 한 채, 밖을 향해서 공부를 짓느냐고요?
그것은 總是癡頑漢(총시치완한)이라. 아주 어리석고 어리석은 사람이다.
頑자는 아주 어리석어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아주 완악할 완자인데 어리석고 어리석어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놈이다. 癡頑漢. 도저히 이건 가르쳐도 되지도 않고, 쥐어박아도 되지도 않고 하는 그런 놈을 癡頑漢이라고 그래요. 아~, 저 남산만한 다이아몬드 하고도 바꿀 수 없는 나.
내가 남산만한 다이아몬드 하고도 바꿀 수 없는 나일 때는, 나의 존재가 ‘내가 제대로 이해를 못해서 그렇지, 정말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우리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儞且隨處作主(이차수처작주)하면 立處皆眞(입처개진)하야,
그대는 또한,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오직 나일뿐인 그것이 진정한 가치고, 진정한 행복이지요. 隨處作主. 어디에서,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나는 오직 나일뿐이에요. 사실은 이미 나입니다. “주인이 되라.” 라고 하는 것보다도 “이미 주인이다.” 立處皆眞. 서 있는 그곳이 다 진리의 삶이고, 진실한 행복이다. 그래서 그 쯤 되면 境來回換不得(경래회환부득)하야
어떤 경계가 온다 하더라도 그 경계와 나를 바꾸지 못해요.
回換不得. 바꾸지 못해요. 바꿀 수가 없지요. 回換不得입니다.
내 가치를 알고 있는데 어떻게 다른 경계하고 바꿉니까? 못 바꾸지요.
아무리 능력이 있고 돈 많고 잘 나고 건강 하고 젊고 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늙어빠지고 아무 쓸모없는 나하고 못 바꾸는 겁니다. 곧 죽을 병투성이, 늙어빠진 아무 쓸모없는 나하고 아주 젊고 건강하고 못 바꾸는 겁니다. 바꾸면 이미 나는 그 사람이 돼버렸으니까 그것은 늙고 병든, 내일 모레 죽을 나보다 못한 것이지요. 그것은 내가 아니니까요. 그래 隨處作主 立處皆眞(수처작주 입처개진).
저는 평소에 소원이 있는데요. 아파트 벽 있잖아요. 큰 벽에 이왕 페인트칠을 하는 김에 이 글을 좀 써서 붙였으면 좋겠어요. 隨處作主 立處皆眞. 그럼 인생문제 거기서 해결이거든요. 거의 해결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제대로 꿰뚫어 알면요. 隨處作主 立處皆眞. 아파트 짓는 건축업자를 제가 제대로 못 만나서 그런가? 그것이 쓸 수가 없는 것인가? 그림은 그리고, 간혹 몇 호, 무슨 아파트광고, 회사광고 같은 것은 그리더니만, 거기에 좋은 말, 뭐 불교 말 아니라도 좋습니다. 하다못해 공자 말이라도 좀 써서 붙이면 그 넓은 아파트. 국민 교육용으로 참 좋겠는데 그것을 그렇게 활용하는 것을 아직 못 봤습니다. 이 가운데 혹 아파트 짓는 사람이 계시면 그것 한번 시도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것 국민 교육용으로 금방 유행할 겁니다.
명심보감에 좋은 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명심보감에서부터 슬슬 좋은 말을 쓰기시작 하다가 나중에는 隨處作主 立處皆眞. 이런 것들도 딱 쓰고, 無位眞人(무위진인)이라고 딱 쓰고요.
그 때는 無자 화두도 막 나올 것이고, 是甚麽(시삼마)도 나올 것이고, 이 뭣꼬? 도 나올 것이고 막 나올 튀어 나올 것입니다.
그러면 포교니 무슨 전법이니 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쉽게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虛(허)한 욕심인지 어쩐지 하여튼 그런 욕심을 가져봅니다.
境來回換不得(경래회환부득). 경계가 오더라도 바꾸는 일이 되지 아니해서, 그래서 縱有從來習氣五無間業(종유종래습기오무간업)하야도, 나는 나이기 때문에 비록 縱有從來, 그 동안 익힌 온갖 習氣와 좋지 못한 버르장머리. 이것을 習氣라고 하거든요. 그리고 五無間業, 다섯 가지로서 무간 지옥에 들어 갈만한 그런 죄업. 그것을 아버지를 죽였다든지, 어머니를 죽였다든지, 성인을 죽였다든지, 부처님 몸에 피를 냈다든지, 아니면 아주 훌륭한 和合僧團(화합승단). 단체를 깨뜨렸다든지 하는 그런 등의 죄업은 무간 지옥에 떨어진다 해서, 五無間業.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비록 그런 죄업이 있다손 치더라도 自爲解脫大海(자위해탈대해)니라. 저절로 그런 죄업, 설사 부모를 죽이고, 부처님 몸에 피를 냈다손 치더라도 그대로가 解脫大海다. 隨處作主하면 그렇다 이겁니다.
철저히 자기중심에 있을 때, 내가 주변으로 팔리지 아니하고, 주변에 끄달리지 아니하고, 나를 놓치지 아니하고, 철저히 자기중심에 있을 때 저절로 그런 것은 解脫大海가 된다. 해탈의 큰 바다가 된다. 그런 사람이 무슨 五無間業을 짓기나 하겠습니까? 설사 習氣. 못된 버르장머리가 있다 하더라도 봄이 오면 저절로 눈 녹듯이 사르르 다 녹습니다. 그것은 문제 삼을 것이 없어요. 업장 같은 것. 업장 소멸 같은 것. 전혀 문제 삼을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따로 업장 소멸하는 것을 이야기하지를 않습니다.
隨緣消舊業(수련소구업)이라, 이런 말은 있어요. 인연 따라서 저절로 옛 업이 녹아진다. 그러면 봄이 오면 음지에 있는 얼음덩어리도 자연스럽게 녹듯이, 그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금방 녹거든요. 어느새 다 녹아버려요.
그와 같이 우리들에게 설사 과거 습기가 있고, 또 무간 지옥에 들어 갈 다섯 가지 죄업이 설사 있다손 치더라도 저절로 녹아져 버린다.
그것은 언급할 필요가 없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今時學者(금시학자)는, 요즈음 불교공부를 한다고 하는 사람은,
總不識法(총불식법)하고 모두들 이러한 도리를 알지를 못하고, 여기서 법이라고 하는 것은 위에서 설명한 隨處作主 立處皆眞(수처작주 입처개진)의 이라는 이러한 이치를 알지를 못하고 마치 어떻게 사는가 하면,
猶如觸鼻羊(유여촉비양)이 逢著物安在口裏(봉착물안재구리)라.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니, 염소는 시력이 약해서 그저 어떤 나무나 풀이나 이런 걸 입에다 딱 갖다 대요. 주둥이를 문질러가지고 어떤 사물을 인식해요. 그럼 무조건 입에 갖다 들여 넣는 겁니다. 逢著物安在口裏라. 사물을 만나기만 하면 무조건 먹고 보는 겁니다. 觸鼻羊이라는 것이 그 말입니다. 시력이 약하기 때문에 무조건 입을 들이대 보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뭐가 좋단다.” 하면 그냥 무조건 그것을 취하는 것이지요.“부적이 좋단다.” 하면 무적도 그냥 돈 주고 사기도 하고, 어디 가서 이상하게 생긴 바위에 가서 “기도하면 좋단다.” 하면 또 그냥 거기 가서 기도하기 바쁘고요. 그것이 참, 이 표현 보십시오. 얼마나 아주 비장한 표현입니까?
觸鼻羊(촉비양)이 逢著物하면 安在口裏(봉착물안재구리)라. 양이 사물을 만나기만 하면 무조건 입으로 끌어넣는 것과 같이 그래서 奴郞을 不辨(노랑불변)이야, 종과 주인을 가려내지 못하고, 賓主를 不分(빈주불분)이라.
손과 주인을 나누지 못함이라. 如是之流(여시지류)는 邪心으로 入道(사심입도)라. 이와 같은 類(류)들은, 이와 같은 사람들은 삿된 마음으로 도에 들어왔어, 뭔가 큰 수득을 얻으려고, 아니면 도인이 돼가지고 큰 소리 한 번 쳐보려고 하는 그런 영웅 심리로써 불교를 공부한다든지, 참선을 해본다든지, 뭐 크게 공양이나 받을까 하고, 존경이나 받을까 하고 참선을 해본다든지, 그런 아주 소영웅 심리로써 공부하는 사람 적지 않아요.
선방에 가서 살아보면, 지대방에는 별별 이야기가 다 난무하니까 쉬는 시간에, 지대방이라고 하는 쉬는 시간이 있어요. 거기에 있으면 이런 저런 이야기하다보면 자기의 밑천이 다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서 자기 속심이 드러나는데, 가만히 귀담아 들어보면 정말 그 소영웅 심리에서 참선을 한다든지,
공부를 한다든지, 무슨 불교수행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도 있어요. 제가 그 거사님한테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여러해 전입니다.
아주 여러해 전이어서 지금 그 거사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모르겠는데, 조계사 부근에 오면, 불교 서적이 어떤 것이 나왔나 싶어서 서점에 잘 들어가는데 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있는데, 어떤 거사님들이 거기에 앉아가지고 자기는 좌선을 몇 시간을 했다고, 몇 시간을 했다고 하면서, 2000시간을 했다고 자랑을 하는 거사님이 있더라고요. “아~ 나는, 좌선을 2000시간을 했노라.”고 2000시간 앉아있었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그것을 아주 크게 자랑을 하더라고요.
그런 풍조가 거사님만 있는 것이 아니고, 스님들도 그것을 법으로 제도화 해놨다니까요. ‘몇 년 좌선을 하면 무슨 자격이 주어진다.’주지 자격이 주어지고, 총무원장 자격이 주어지고, 무슨 원로자격이 주어지고, 조실 자격이 주어지고 그렇게 연한으로 해놨다니까요. 화두야 들든 안 들든 간에 무조건 하여튼 선방에서 몇 년을 살았느냐 하는 그것을 가지고...
그것은 그 거사님 생각하고 똑 같은 겁니다. 이 말세가 되니까 선불교가 그렇게까지 타락을 해버렸어요. 선방에서 몇 년을 살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한 시간을 살아도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얼마를 살았느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邪心으로 入道(사심입도)야, 삿된 마음, 아주 요상한 마음으로 도에 들어온 것이지요. 불도에 들어와서, 鬧處卽入(요처즉입)이라. 고요한 곳에 곧 들어감이니, 이것은 뭔가 하니 鬧處에 卽入이라. 시끄러운 곳에, 말하자면 자기 자신이 아닌, 隨處作主(수처작주)가 아닌 다른 어떤 주변으로 또는 경계로 불교 외적인 것들에 그만 놀아나는 것이지요. 鬧處에 卽入이라.
어떤 현상들을 머리에 한 번 그려 보십시오. 邪心으로 入道(사심입도)해서 시끄러운 불교 외적인 것에 거기에 빠져가지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
총무원 건물에서 너무 적나라하게 이야기하면 또 곤란하니까 하하하하하하 이쯤해도 다 눈치 채겠지요?
不得名爲眞出家人(부득명위진출가인)하여, 이것은 참다운 출가라고 이름 할 수가 없다. 正是眞俗家人(정시진속가인)이다. 그러면 출가인 이냐? 속가인 이냐? 라고 하는 것은, 불교 외적인 것이라고 하면 ‘경을 보고’이것이 불교적인 것이라는 뜻이 아니고, 정말 자기 자신이 아닌, 주변ㆍ또는 경계. 그것이 불교 외적인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경을 보는 것도 불교 외적인 것입니다. 임제 스님의 안목에서 볼 때는 경을 보고 참선을 하고 기도를 하고, 이것 다 불교외적인 것입니다. 隨處作主하는 것. 그냥 자기 자신으로서 당당하게 있는 것. 이것만이 진실입니다. 이것이 정말 자기중심에 있는 것이고, 나로서 또는 隨處作主하는 그런 삶이 여기서 眞出家人이라고 하는 그런 뜻이지요. 그러니까 그 외의 것은 전부 眞俗家人이다. 이런 말입니다.
3 - 2 참다운 出家人(출가인)
夫出家者(부출가자)는
須辨得平常眞正見解(수변득평상진정견해)하야
辨佛辨魔(변불변마)하며 辨眞辨僞(변진변위)하며
辨凡辨聖(변범변성)이니, 若如是辨得(약여시변득)하면
名眞出家(명진출가)니라. 若魔佛不辨(약마불불변)하면
正是出一家入一家(정시출일가입일가)니
喚作造業衆生(환작조업중생)이요
未得名爲眞出家人(미득명위진출가인)이니라.
祇如今(지여금)에 有一箇佛魔(유일개불마)하야
同體不分(동체불분)흠이 如水乳合(여수유합)이라.
鵝王喫乳(아왕긱유)요 如明眼道流(여명안도류)는
魔佛俱打(마불구타)하나니 儞若愛聖憎凡(이약애성증범)하면
生死海裏浮沈(생사해리부침)이니라.
夫出家者(부출가자)는 대저 출가라고 하는 것은,
須辨得平常眞正見解(수변득평상진정견해)하야, 평상의 진정 견해를 辨得.
가려내서, 眞正見解. 참되고 바른 견해를 가려내서, 辨佛辨魔(변불변마)하며 부처도 가려내고 마군이도 가려내며 辨眞辨僞(변진변위). 참된 것과 거짓된 것도 가려내며, 辨凡辨聖(변범변성)이니, 범부와 성인도 가려내야 하느니,
若如是辨得(약여시변득)하면, 만약 이와 같은 것을 다 가려낸다면,
名眞出家(명진출가)다. 참으로 출가한 사람이다, 라고 이름 할 수 있다.
若魔佛不辨(약마불불변)하면, 만약에 마군이나 부처를 가려내지 못하면,
正是出一家入一家(정시출일가입일가)다. 한 집에서, 저~기집에서, 속가의 집에서, 태어난 집에서는 나오기는 나왔어요. 그래가지고 또 하나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더 시끄러운 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 출가했다고 하는 사람이 더 세속적으로 산다 이 말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기로 하면 사실은 요즘 설명할 것 많습니다. 그렇지만 참습니다. 하하하하하하 아, 출가해가지고 그래도 계속 세속적으로 살면, 계속 세속적으로 살면 그 무슨 출가한 사람입니까? 이것이 그것을 말하는 겁니다.
出一家入一家(출일가입일가)입니다. 한 집에서 나와 가지고 또 다른 시끄러운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해당시켜가면서 이야기하려면 이야기 거리가 참 상당히 많네요. 그것은 뭐라고요? 喚作造業衆生(환작조업중생). 그랬어요. 업 짓는 중생일 뿐이다. 아~참, 다 깨놓고 이야기 못하는 것이 영~ 유감입니다. 그래도 웃으시는 것 보니까 다 심증이 가시는 모양이네요.
未得名爲眞出家人(미득명위진출가인)이니라. 未得名爲. 아직은 그들을 참다운 출가인 이라고 이름 할 수가 없다.
祇如今(지여금)에 다만 지금 이 순간, 有一箇佛魔(유일개불마)가, 하나의 부처인 마군이가 同體不分(동체불분). 하나의 몸뚱이야, 부처인 마군이니까요.
그래서 하나의 같은 몸으로써 나눠지지 못하는 것이 마치 如水乳合(여수유합)이라. 물에 우유를 타 놓으면, 그것이 우유가 희석이 되어서 그렇지, 우유가 나눠지지가 아니합니다.
한 번 물을 타 버리면 그래서 “저것은 성 밖의 우유가 아니다.” 하는 그런 말이 경전이나 어록에 있어요. 성 밖의 우유. 목장은 전부 성 밖에 있잖아요. 그러면 성 밖에 있는 우유가 진짜 우유입니다. 그러면 성 안으로 들어왔다 하면 이것은 틀림없이 물 탄 겁니다. 그 다음부터는 가짜입니다.
그러니까 도매상에서 좀 타고, 중간 도매상에서 또 타고, 소매상에서 또 좀 타고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이것은 왜 그러냐? 우유의 속성은 물하고 섞어버리면 도대체 분별이 안 돼요. ‘좀 싱겁다.’ 하는 정도만 느끼지 도대체가 가려낼 수가 없는 겁니다. 부처와 마군 이는 그렇게 한 덩어리가 되어서, 그런데 鵝王은 喫乳(아왕긱유)요 그랬습니다. 鵝王. 거위, 거위는 진짜 우유만 먹는다. 그렇듯이 如明眼道流(여명안도류)는, 눈 밝은 道流는 魔佛俱打(마불구타)니라. 마군이다 부처다 하는 것을 함께 다 부정한다. 다 후려친다.
儞若愛聖憎凡(이약애성증범). 그러니까 마군이와 부처라고 하는 그런 사실을 나눠놓고, 또 거기에 우리가 “마군이” “부처” 하면 너무 고급용어가 되놔서 다 글자만 나오면 빠져버리고, 집착을 합니다. 벌써 그렇게 되어요.
그런데 그것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佛魔(불마)라고 했잖아요. ‘부처라고 하는 마군이’ 거기에는 으레 같이 따라 다니기 때문에
同體不分(동체불분)이라고 그렇게 했습니다. 마치 물을 우유에다 타듯이... 그런데 明眼道流(명안도류)는 부처니 마군이니 하는 것을 다 부정해 버린다 말입니다. 그대가 만약에 愛ㆍ聖ㆍ憎ㆍ凡. 성인을 사랑하고 범부를 미워할 것 같으면, 生死海裏浮沈(생사해리부침)이니라. 생사의 바다 속에서 浮沈하고 만다.
愛憎(애증). 보통 사람들은 사실은 전부 憎愛ㆍ愛憎. 여기에 그냥 허덕거리고 말지요. 거기에서 그냥 떴다 가라앉았다. 그래서 生死海裏에 浮沈한다.
이렇게 표현하는데, 신심명에도 보면 至道無難(지도무난), 지극한 도. 진정한 도. 진정한 삶의 길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다. 唯嫌揀擇(유혐간택). 오직 가려내고 선택하는 것을 꺼려할 뿐이다. 但莫憎愛(단막증애)하면 洞然明白(통연명백)한다. 그랬어요. 여기 憎愛라고 했지요?
凡부의 경지는 憎, 싫어하고, 聖인의 경지는 愛, 사랑 한다 그랬는데 그런 증애심. 사랑하고 미워하는 그 마음만 없을 것 같으면 툭 트여서 환하게 밝으리라. “洞然明白하리라. 툭~ 트여서 환하게 밝으리라.” 라고 그렇게 했습니다.
사실은 우리 눈에 안 무엇이 들어오는 것은 편견 때문입니다.
편견ㆍ집착심. 뭔가 나하고 가까운 인연을 찾아서 연결시키는 것이지요.
어떤 상황도 그 상황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의 견해가 각각 다른 것은 왜 그런가? 전부 자기 나름대로 연결을 시킵니다. 연결을 시켜가지고서 정말 자기가 애착할만한 입장으로 있는가? 그것이 판단이 서면 애착하게 되고, 그래서 그냥 야단법석을 떨고, 또 애착할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판단이 딱 서면,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천하 사람이 다 좋다고 하고 옳다고 하더라도 아니라고, 아니라고 고개 절래, 절래 흔드는 겁니다. 이것은 고정 되어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삶은 모두가 그렇기 때문에 그래서 但莫憎愛(단막증애)하면 洞然明白(통연명백)하다. 증애심. 나한테 인연이 좀 더 가깝다고, 나한테 인연이 좀 멀다고, 그 사람은 어디 사람이니까, 그 사람은 우리 동문이니까, 우리 고향이니까, 아니야 성씨가 비슷하니까, 뭐 이런 식으로 자꾸 연결 시켜가지고 어쨌든 미워하고 싶고, 어쨌든 사랑하고 싶고, 그 두 가지 마음. 그것인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우리가 그 마음 놓아 버릴 것 같으면 모든 것이 환하게 들어옵니다. 정말 진실로 어떤 객관적인 그런 안목이 거기에 도출 되게 되어있어요. 그러기 전에는 객관적인 안목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전부 자기 나름대로 그 어떤 인연의 끄나풀을 연결 시켜가지고, 어디에 치우쳐도 치우쳐서 이야기하지요.
치우쳐서 보게 되어있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참 성인의 말씀들이, 정말 깨달은 분들의 말씀들이 당장에 그렇게 되지는 않아도, 그런 말을 읊조리고 음미하고 한 번 이야기 해보고, 또 사유해보고 하는 그 순간만이라도 참, 시원하고 좋아요. 但莫憎愛(단막증애)하면 洞然明白(통연명백)이라.
증애심만 없을 것 같으면 툭~ 트여서 시원할 것이다. 어렵지요.
어렵기는 어렵지만은 그래도 그 말이라도 일단은 위안이 되고, 시원하잖아요. 말이라도 일단은 시원한 겁니다. 또 그런 경지를 사는 사람들이 있고요.
충분히 그런 경지를 사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억지로라도 증애심. 치우치는 마음. 이것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하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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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주변에 끄달리지 아니하고, 철저히 자기중심에 있을 때 저절로 解脫大海가 된다. 고맙습니다. _()()()_
但莫憎愛 洞然明白(단막증애 통연명백)이라. ㅡ 진정한 삶은 결코 어려운게 아니라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증애심)만 없으면 툭 트여서 환하게 밝으리라. 대원성보살님 덕분에 체계적으로 공부의 내실을 다져 갈 수 있기에 넘 좋습니다. 고맙습니다._()()()_
憎愛심을 놓아 버리면 툭~트여 명백하리라..._()()()_
隨緣消舊業 _()()()_
平常心이 是道.. 평상심이 그대로 法이고 그대로 道고 그대로 진리의 삶이다.. 그냥 자기 자신으로서 당당하게 있는 이것만이 진실..대원성 님! 수고하셨습니다..공부 잘 하고 갑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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但莫憎愛 洞然明白 이라. 감사합니다..._()()()_
至道無難 唯嫌揀擇....대원성님, 고맙습니다_()()()_
평상심이 도라.증애간택을 털면 통연명백하고 도와 같이 하리라.범성불마를 변료하되 평상무사로 애증치않는다.
但莫憎愛 洞然明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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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성님,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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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성님 고맙습니다,,,_()()()_
대원성님 고맙습니다._()()()_
삼배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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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자기 자신으로서 있는 것! 이것 만이 진실입니다
但莫憎愛 洞然明白
但莫憎愛.. 洞然明白..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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隨處作主 立處皆眞 ... _()_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오직 나일뿐인 그것이 진정한 가치고, 진정한 행복이지요...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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但莫憎愛 洞然明白 ... _()_
고맙습니다_()_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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但莫憎愛.. 洞然明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