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봉황 문장(紋章)의 기원과 정치학
창덕궁 인정전 <봉황도>에서 청와대 봉황 문장까지
창덕궁 인정전의 <일월오봉도>가 <봉황도>로 바뀌다
최근 몇 년 사이 국립중앙박물관과 일본의 궁내청에 소장되어 있던 유리건판 사진들이 공개되었다. 대부분 20세기 초반에 촬영된 이 유리건판 사진 가운데에는 일제에 의해 변형되기 이전 서울의 풍경을 담은 사진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조선시대에 건축된 5대 궁인 경복궁, 창덕궁, 경운궁, 경희궁, 창경궁의 옛 사진은 구한말 고궁의 모습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역사학계와 건축학계의 다각적인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전통시대의 시각문화를 공부해 온 필자에게는 각 궁궐의 정전(正殿: 왕이 나와서 조회(朝會)를 하던 궁전) 내부를 촬영한 사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는데, 그 까닭은 박물관의 소장품으로 봐온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가 원래 있어야 할 궁궐에 설치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그림 1, 2)
그림 1 경복궁 근정전.유리건판 사진, 촬영 연대 미상, 25.5×30.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그림 2 덕수궁 중화전.유리건판 사진, 1940년, 16.5×12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일월오봉’이란 하늘과 땅, 다섯 개의 산봉우리로 상징되는 ‘삼라만상’과 해와 달로 표상되는 ‘음양오행’의 원리를 시각화한 것이다. 이는 조선의 왕이 ‘통치했던 대상’과 ‘치세의 이데올로기’를 시각적으로 응축했다고 볼 수 있다. 〈일월오봉도〉의 전통은 적어도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현재 남아 있는 유물만 해도 30점 이상이 확인된다. 크기도 다양해서 길이가 1미터 내외의 것부터 5미터에 육박하는 것까지 있고, 형식도 병풍, 가리개, 장지문 등 다양하다. 이는 〈일월오봉도〉가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실제로 〈일월오봉도〉는 국왕이 정무를 보는 궁궐의 정전뿐 아니라 국왕이 참석하는 행사장에 임시로 설치된 어좌(御座: 임금이 앉는 자리)에도 배설(排設)되었다. 국왕이 죽고 나면 그 시신을 모시던 빈전(殯殿)과 혼전(魂殿)에도 사용되었고, 제사에 배향(配享)된 영정 초상 뒤에도 놓였다. 이는 〈일월오봉도〉가 살아 있는 왕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국왕의 사후에도 왕의 존재를 표상하기 위한 곳이라면 어디든 사용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따라서 국왕이 참석한 행사를 시각화한 궁중기록화에도 응당 〈일월오봉도〉가 보이는데, 조선시대 기록화에서는 국왕을 직접 그리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빈 어좌 뒤에 〈일월오봉도〉를 그림으로써 국왕의 존재를 대신했다. ‘일월오봉’은 그 자체로 국왕의 존재를 지시하는 동시에 국왕만이 전유(專有: 독차지함)할 수 있는 도상인 것이다.
그림 3 창덕궁 인정전.유리건판 사진, 일본 궁내청 소장.
그런데 일본 궁내청에 소장된 [인정전 사진첩(仁政殿寫眞帖)] 가운데에는 창덕궁 인정전에 〈일월오봉도〉가 아닌 한 쌍의 봉황이 그려진 패널이 설치된 사진이 있어 주목된다.(그림 3) 이 사진은 일본 메이지-다이쇼 연간에 자주 사용된 핸드 컬러링(hand coloring) 기법을 사용하여 흑백 사진 위에 붉은색, 노란색, 푸른색의 물감을 덧입힌 것이다. 조선시대의 시각 문법에 익숙한 필자에게 ‘흑백 사진 위에 가해진 원색’과 ‘일월오봉’을 대체한 ‘한 쌍의 봉황’ 도상은 너무나 낯설게 여겨지는 조합이었다.
봉황도가 그려진 시기
그림 4 창덕궁 인정전 〈봉황도〉.종이에 채색, 328×399.3cm,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진 이 거대한 봉황 그림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그림 4) 길이 328, 폭 399.3센티미터의 거대한 금종이 위에 한 쌍의 봉(鳳)과 황(凰)을 그린 이 그림은 대체 어떤 연유에서 제작된 것일까?
전통적인 〈일월오봉도〉가 오방색의 광물성 안료를 사용하여 화면을 빽빽이 채색한 것에 반해 이 〈봉황도〉는 중심을 이룬 봉황에만 채색을 가하고 나머지는 금색 바탕으로 처리한 것을 볼 수 있다. 배경에 채색을 하지 않은 것도 궁중회화의 전통으로는 보기 드문 예인데, 봉황의 묘사 또한 조선후기의 왕실 미술이 도달한 정교한 도안과 섬려한 채색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수준을 보여준다. 거친 붓놀림이 그대로 노출된 표면은 이 〈봉황도〉가 급하게 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이 〈봉황도〉는 어떤 연유에서 제작되었고, 언제 어떻게 창덕궁 인정전에 설치된 것일까? 1857년에 이루어진 인정전의 보수 공사를 기록한 [인정전 중수 도감 의궤(仁政殿重修都監儀軌)]를 보면 당시 인정전에는 〈일월오봉도〉가 닫집 형태의 당가(唐家: 궁궐 안의 옥좌 위에 만들어 다는 집 모형)에 부착되어 어좌의 후면에 설치된 것이 확인된다.(그림 5) 다시 말해 적어도 1857년에는 인정전에 〈봉황도〉가 아닌 〈일월오봉도〉가 설치되었다는 것이다.
그림 5 [인정전 중수 도감 의궤(仁政殿重修都監儀軌)]의 인정전 당가 도설.1857년, 45×32.6cm,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그림 6 1925년 11월 12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인정전의 사진. |
1925년 11월 12일 자 〈동아일보〉에는 ‘보고 싶은 사진-제11회 발표: 인정전의 옥좌’라는 제목의 기사와 함께 인정전의 사진이 실려 있다.(그림 6)
인정전 옥좌는 비원에만 있습니다. 비원은 본래 상감께서 옥보(玉步: 임금의 걸음)를 옮기신다는 어원이라 보통 사람은 용이하게 배관하기 드문 곳인데 그 안에 있는 옥좌라 극히 보기 어렵습니다. 옥좌의 구조는 가장 삼엄 화려하게 되어 있으며 옥좌의 천정 같은 것은 황금색이 찬란하여 극히 삼엄합니다. 옛날에는 이 옥좌에 상감께서 앉으셔서 만조백관의 조회를 보셨습니다.
이 기사와 함께 실린 인정전의 사진은 1925년 이전에 이미 인정전 당가에 〈일월오봉도〉 대신 〈봉황도〉가 부착된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기사 내용은 당시 이왕가의 마지막 왕으로서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던 순종(純宗, 1874∼1926, 재위: 1907~1910)이 꽤 오랫동안 인정전에서 정무(政務)를 보지 못했음을 알려준다. 인정전이 국왕이 정무를 보는 정전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 이상, 조선 국왕의 상징이었던 〈일월오봉도〉가 인정전에서 없어진 것 또한 당연한 조치였을 것이다. 다만 1940년경에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경복궁 근정전(그림 1)과 덕수궁 중화전(그림 2) 유리건판 사진을 창덕궁 인정전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 경복궁과 덕수궁에는 〈일월오봉도〉가 그대로 배설되어 있어 주목된다. 그렇다면 창덕궁만 유독 〈일월오봉도〉가 아닌 〈봉황도〉로 바뀐 까닭은 무엇일까?
조선의 국왕은 한 궁궐에서만 일생을 보내지 않았다. 궁궐은 목조 건물의 특성상 발화가 잦기 때문에 화재 시 국왕의 이사가 불가피했고, 국왕의 개인적인 선호나 정치적인 알력 관계에 의해서도 궁궐을 오갈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고종(高宗, 1852∼1919, 재위: 1863~1907)은 보다 특별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고종은 열두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조대비의 수렴첨정을 거쳐 흥선대원군의 섭정 시기를 겪었다. 흥선대원군은 왕권 강화의 조치로서 경복궁의 재건 사업을 추진했고, 따라서 고종은 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 주로 경복궁에 머무르게 되었다. 1873년 고종이 친정(親政)을 주도하게 되면서는 주로 창덕궁에 거처했고, 아관파천 이후 1897년에 환궁할 때에는 창덕궁이 아닌 경운궁을 황궁으로 삼아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이후 광무제(光武帝)로서 황위를 유지한 10년간은 경운궁을 떠난 적이 없었고, 황제국의 위상에 걸맞게 양경(兩京) 체제를 도입한다는 명목으로 평양에 풍경궁(豐慶宮) 건축을 추진하기도 했다. 1907년 순종(純宗, 1874∼1926, 재위: 1907∼1910)에게 황위를 양위해야 했을 때에도 고종은 경운궁에 남고 순종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이후 경운궁의 명칭은 태왕(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의미에서 덕수궁으로 개칭되었고, 고종은 ‘덕수궁 이태왕’으로 불리다 1919년 서거했다. 요컨대 고종은 일생을 두고 권력 주체의 변화에 따라 크게 경복궁 → 창덕궁 → 경운궁 →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겨 다닌 것이다.
경운궁을 떠난 순종은 한일병합을 거치면서 융희제(隆熙帝)에서 이왕(李王)으로 격하되었고, 1907년부터 1926년 서거할 때까지 창덕궁에 기거했다. 사실상 1907년 이후 한일 간의 주요 의정서는 주로 창덕궁에서 체결되었다.
〈일월오봉도〉가 유독 창덕궁에서만 제거된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한 일본 궁내청 소장 [인정전 사진첩]에는 1917년에 화재로 소실된 희정당과 대조전의 사진이 포함되어 있다. 이를 통해 사진첩 전체를 1917년 이전에 촬영된 것으로 전제한다면, 〈봉황도〉는 1907년에서 1917년 사이 어느 시점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최근 발표된 양정석의 연구는 〈봉황도〉의 제작 시점을 보다 구체적으로 추정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연구는 1908년에 일본인 건축가들에 의해서 창덕궁 인정전이 대대적으로 개축된 일련의 역사를 조명했다. 특히 창덕궁의 건축 도면과 당대 문헌들을 분석함으로써, 1908년 인정전 개축이 일본인들에 의해 메이지 황궁을 본뜬 형태로 진행된 것임을 밝혔다. 이에 근거해볼 때, 봉황도가 제작, 설치된 시점도 인정전의 전반적 개축이 이루어진 1908년 전후일 가능성이 가장 높을 것이다. 식민지 조선이 ‘관광지’로 상품화되면서 조선의 명승지를 촬영한 사진이 엽서로 제작되었다. 특히 1930년대에 대량 생산된 엽서 가운데에는 ‘경성의 고궁’ 시리즈가 있다. 이 중에는 창덕궁 인정전도 포함되어 있는데(그림 7) 내부 인테리어의 변형이 이전(그림 3)보다 심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17년의 화재로 인해 인정전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3단의 계단을 완전히 없애고 당가의 처마 형태도 바꾼 것이다. 이는 식민 지배라는 일련의 정치 환경의 변화가 궁중의 건축미술에도 적잖은 변화를 가져다준 사실을 새삼 확인시킨다.
그림 7 창덕궁 인정전.‘경성의 고궁’ 시리즈, 사진엽서, 8.8×13.7cm, 부산박물관 소장.
조선 왕실에서 봉황이 지닌 의미와 위상
그렇다면 창덕궁 인정전의 ‘일월오봉’은 왜 ‘봉황’으로 바뀐 것일까? 봉황의 도상은 조선 왕실에서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일까? ‘봉황’에서 ‘봉(鳳)’이란 수컷을 의미하며 ‘황(凰)’은 암컷을 지칭한다. 봉황은 온갖 서조(瑞鳥: 상서로운 새)와 영수(靈獸: 상서로운 짐승)의 특징을 부위별로 결합시킨 상상의 새이다. 사실상 봉황은 동아시아 역사에 있어 유구한 전통을 가진 도상 가운데 하나로, 원형적인 상징을 지닌다. 중국, 일본, 한국에서 모두 성군(聖君)과 현인(賢人)을 의미했고, 주로 용(龍)과 함께 군왕의 상징으로 형상화되었다. 조선 왕실에서 봉황도가 어떤 의미로 수용되었는지를 살피기 위해서는 국왕 직속의 화원화가 선발 시험에 출제된 봉황도 관련 기록을 확인해야 한다. 1783년부터 1881년까지 총 800여 회에 걸쳐 출제된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 녹취재(祿取才) 시험에서 봉황 관련 주제는 총 14회 출제되었다. 그중 대다수가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에 바탕을 두었고,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시(詩)와 굴원(屈原)의 사(辭)가 화제(畵題)로 출제되었다. 이들은 대체로 성군이 출현한 것에 응하여 봉황이 나타났다거나, 봉황을 충신의 상징으로 묘사한 고사(故事)를 담은 그림이었다. 중국의 고대 문학에서 기원한 봉황 관련 전거(典據)가 조선 왕실에서도 큰 변형 없이 수용된 것이다.
그러나 다른 서조와 영수 가운데 봉황이 독보적인 지위를 점했는지, 혹은 유일한 통치자의 상징이었는지의 문제는 재고의 여지가 크다. 물론 조선 왕실에서 제작된 많은 공예 의장품에 봉황 문양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봉황이 단독으로 선택되었다기보다는 용, 기린, 주작, 공작과 같은 다른 금수 도안과 함께 선택되었다. 국왕의 행렬에 사용되는 기물에도 봉황은 빠짐없이 등장했지만 봉황이 가장 중요한 존재로 선두에 위치한 것은 아니다. 봉황은 대형 교룡기(交龍旗: 임금이 행차할 때 행렬의 앞에 세우던 기)의 다음 차례에 보다 작은 크기로 위치하면서, 청룡, 백호, 현무, 주작으로 구성된 사수기(四獸旗)와 백호기(白虎旗), 주작기(朱雀旗), 백학기(白鶴旗), 현학기(玄鶴旗) 등과 대등한 지위인 ‘벽봉기(碧鳳旗)’로 제작되었다. 엄밀히 말해 ‘용’보다 ‘서열’이 낮은 봉황은 단독으로 국왕을 상징한 것도 아니며, ‘벽봉기’는 ‘봉황’이 아닌 ‘봉’의 도안으로 제작된 것이었다. 이는 조선의 궁중 기록화에서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제작한 막부의 어용(御用) 그림에서도 확인된다. 일본을 방문한 조선 통신사의 행렬은 조선과 일본 양측에서 각각 그린 경우가 많은데, 양측 모두 조선 국왕이 파견한 사절단의 선두에 교룡기를 그려 넣은 것이 확인된다. 이는 조선 왕실에서 봉황이 단독으로 군왕을 상징할 만큼 시각적 우위를 가지지 않았고, 일본도 이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따라서 창덕궁 인정전에 봉황의 도상이 자리 잡게 된 까닭은 조선 왕실 내부의 전통이 아닌 일제에 의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봉황도> 제작의 시초
그렇다면 창덕궁 인정전에 보이는 〈봉황도〉는 누구에 의해 제작된 것일까? 조선시대 회화 가운데 금빛을 전면에 내세운 작례는 거의 없다. 양난(兩難) 이후 일정 기간 미술품 제작에 금의 사용을 제한한 역사도 있었다. 그 뒤로 금을 일부 사용한다 해도 배경 전체를 금으로 처리한 경우는 없었다. 다만 대한제국 시기에 제작된 궁중 병풍 가운데 금박을 배경에 부착한 작례가 남아 있을 뿐이다. 이는 ‘조선 왕실의 미술’이 아닌 ‘대한제국 황실의 미술’로서 재료나 규모를 격상시키고자 일본의 금병풍의 전통을 본뜬 시도로 풀이된다. ‘금지봉황(金紙鳳凰)’이 조선 왕실의 전통이 아니라면, 일본 출신 화가에 의해 제작되었을 가능성은 없을까? 조선전기부터 일본 미술품이 왕실에 유입된 사례는 적지 않았다. 일본이 조선 왕실에 공식적으로 보낸 병풍 및 서화만 해도 200여 건 이상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예물로 바쳐진 서화는 대부분 막부 소속의 어용 화사들에 의해 제작된 회화 병풍이 많았다. 그러나 1890~1910년 사이에 메이지 정부에서 대한제국 황실로 보낸 미술품의 성격은 이전과는 달랐다. 1850년대에 서구에 문호를 개방한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을 기점으로 엄청난 양의 미술품을 서구에 수출했는데, 이들 대부분은 교토 니시진(西陣)에서 제작한 자수, 직조, 염직 제품이었다. 이것의 도안을 그린 작가들은 카노 화파와 마루야마-시조 화파를 계승한 일본화 화가들로, 그들이 제작한 것은 전통적인 감상용 서화는 아니었지만 회화성이 강하게 반영된 실내장식용 병풍과 축이었다. 실제로 일본 황실에서 대한제국 황실로 보낸 미술품 관련 기록을 보면 자수 병풍의 숫자가 가장 많았고, 걸괘용 직물과 은기, 칠기 등의 공예품도 있었다.
그림 8 키시 치쿠도, 봉황 도안.종이에 채색, 218×122cm.
1860년대 이래로 메이지 정부는 총 40여 차례의 국내외 만국박람회 참가를 통해 일본 미술을 유럽 각국과 미국에 알려나갔다. 미술 공예의 수출 규모는 1868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일본의 전체 수출량의 50퍼센트에 육박했다. 1888년 한 해에 교토에서 제작된 자수 병풍의 숫자가 10만점을 넘었다니, 그 규모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교토의 많은 예술가가 일본의 경제 성장을 견인한 동시에 국가 이미지를 상승시킨 데 따른 공을 인정받아 황실의 비호를 받는 제실기예원(帝室技芸員)으로 임명되었다. 이들 중에는 카와시마 진베이(川島甚兵衛, 1853~1910) 2세도 있었다. 그는 일찍이 조선에서 생사(生絲)와 같은 원재료를 구입하여 일본에서 완제품으로 만들어 다시 조선을 비롯한 해외 시장에 판매했다. 1881년에는 순종의 가례에 사용될 공예품을 납품함으로써 조선 왕실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진베이를 비롯한 유력한 교토의 직물 미술 제작자들은 이마오 케이넨(今尾景年, 1845~1924), 키시 치쿠도(竹堂岸, 1826~1897), 다케우치 세이호(竹内栖鳳, 1864~1942)와 같은 걸출한 일본화 화가들을 도안 작가로 고용함으로써 자신들의 제작품이 단순한 ‘공예’가 아닌 수준 높은 ‘미술’임을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은 주로 치밀한 사생(寫生: 실물이나 경치를 있는 그대로 그림)을 바탕으로 이상화된 일본의 명승과 자연을 그렸고, 봉황, 공작, 용과 같은 동물 도안을 서구에 유행시켰다. 일본 특유의 서정적 감수성과 치밀한 묘사력은 서구의 대중을 매료시켰고, 메이지 황실은 이들의 작품을 1891년에 러시아 니콜라이 황태자, 1897년에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1902년에 영국의 에드워드 7세, 1904년에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선물했다. 메이지 황실의 미술품을 이용한 외교 전략은 세계에 ‘일본미(日本美)’를 알리는 계기이자 ‘일본’이라는 국가의 저력을 알리는 기회가 되었다. 서구 열강에게 보낸 일본의 미술품이 대한제국 황실에도 보내진 것은 일본의 저력과 위상을 과시하고자 한 외교적 전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900년대에 일본 황실 미술품이 조선에 다량 유입된 사실만으로 창덕궁의 〈봉황도〉가 일본 화가에 의해 제작되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봉황도〉는 메이지 시기 일본화가 달성한, 섬세한 표현력과 치밀한 묘사력의 경지에 미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또한 사용된 안료도 일본화 감각으로 보기 어렵고, 심지어 궁궐의 단청에 쓰일 법한 수준이다. 다만 앞서 언급한 제실기예원 가운데 하나인 키시 치쿠도의 봉황 도안(그림 8)이 작은 단서가 될지도 모르겠다. 염직이나 자수 같은 직물 미술로 만들기 위한 초본으로 제작된 이 작품은 광물성 안료를 사용하여 그린 것이다. 배경을 생략한 채 한 쌍의 봉황을 배치한 구성, 종이에 광물성 채색 안료를 사용한 점, 봉과 황을 구분하기 위해 꼬리와 볏 부분을 꼼꼼하게 묘사한 점은 창덕궁 〈봉황도〉와 상당한 유사성을 보인다. 정확하게 작가를 추정하는 것이 쉽지 않은 만큼, 국내에 유입된 일본의 봉황 도안을 바탕으로 조선의 화가에 의해 〈봉황도〉가 제작된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청와대 봉황 문장의 제정과 역사
2008년 2월 25일, 제17대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했다. 취임식 준비 과정에서 준비위원회 측은 대통령의 상징으로 사용해오던 청와대의 봉황 문장 대신 태평소와 북을 결합한 태평고(太平鼓) 문장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봉황이 ‘왕조시대의 잔재 같은 고압적이고 권위적인 인상을 준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취임식 보름 전인 2월 10일에 서울 숭례문에 화재가 발생했다. 조선 개국 직후인 1398년에 완공된 이래로 서울의 상징이자 국보 1호였던 숭례문이 전소하자 민심이 들끓었다. 사람들은 국가의 상징적인 문화재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에 분노했고, 인터넷상에는 청와대에서 봉황 문장을 없애려 했기 때문에 남방(南方)을 상징하는 남주작의 화신인 봉황이 남대문에 저주를 내렸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불교계 일각에서는 태평고 도안이 성경에 출처를 둔 ‘기드온의 나팔’을 연상시킨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이에 대해 취임식 준비위원회 측은 새로운 도안이 성경과 무관함을 해명했고, 각 신문 지상에는 봉황 문장을 폐지하려는 시도가 유구한 전통을 훼손하는 처사라며 반대 의견이 투고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태평고 도안은 취임식에서 단 한 차례 사용되었고, 그 후로는 원래의 봉황 문장이 사용되었다.
그림 9 대통령을 상징하는 봉황 문장(왼쪽)과 제17대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태평고 문장(오른쪽).
대통령을 상징하는 봉황 문장은 ‘대통령의 지위와 권위를 상징하는 표장’과 관련한 조례에 의해 1967년 1월 31일에 제정되었다. 어떤 근거로 누구에 의해 이 문장이 디자인되었는지는 추적하기 어렵다. 1960년대에는 지금처럼 체계화된 대통령 기록관도 없었고, 청와대에 디자인 전문가 집단도 꾸려지기 전이었다. 윤보선(尹潽善, 1897~1990, 재임: 1960~1962) 대통령의 며느리가 남긴 회고담에 따르면, 청와대에서 사용한 무궁화와 태극 문양이 들어간 식기도 윤보선 대통령이 직접 디자인해서 서울 시내의 그릇 가게에 주문한 것이라고 한다. 대중의 예상과는 달리 봉황이 국가 원수의 상징이 된 과정은 역사적 검증이나 체계적인 협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닐 가능성도 높은 것이다. 그러나 대중의 통념이 ‘봉황’을 ‘오래된 전통’으로 보고 싶어 한다면, 그것이 발휘하는 힘 앞에서 ‘봉황 문장’이 ‘만들어진 전통’에 불과하다고 지적하는 일은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림 10 1956년 이승만 대통령 세 번째 취임식.사진, 국가기록원 소장.
일본의 식민 통치가 끝난 이후 국정(國政)은 어디에서 이루어졌을까? 1945년 9월 미 군정이 총독부를 접수한 이후에도 창덕궁 인정전은 중요한 정치 거점으로 사용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이승만 대통령이 경무대로 옮겨간 이후에도 창덕궁 인정전은 상당 기간 국정과 외교의 장으로서 기능했다. 그러나 창덕궁에 걸린 봉황의 의미를 시비하기에는 당장 해결해야 할 현안이 산재해 있던 시대였다. 1956년에 촬영된 이승만 대통령의 세 번째 취임식 사진에는 봉황 한 쌍(그림 10)이 등장한다. 이 사진에는 현재 사용되는 봉황 문장보다 덜 도식화된 형태의 봉황이 보인다. 1967년에 제정되었다는 ‘대통령의 지위와 권위를 상징하는 표장’인 봉황은 새롭게 ‘창조’된 것이 아니었던 셈이다. ‘국가의 상징’, ‘통치자의 문장’을 제정하기 위해서는 역사와 전통에 의거한 권위가 필요하다. 1967년에 제정된 ‘봉황 문장’은 이전의 시각 전통을 고려해서 탄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1956년 이승만 대통령이 사용한 봉황 문장 또한 그전의 전통을 준거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다.
일제강점기에 창덕궁의 ‘일월오봉’이 ‘봉황’으로 바뀌었다. 1956년 이승만 대통령은 봉황을 자신의 취임식 엠블럼으로 사용했다. 1967년에 조례로 명문화된 봉황 문장은 40년 후에 새로운 도안으로 바뀔 뻔했지만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하나의 시각 체계가 다른 새로운 것으로 전환되기까지 다양한 정치적 역학 관계가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역사적 전통’이자 ‘원형적 상징’이라 믿었던 것은 사실상 새롭게 ‘만들어진 전통’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역사’, ‘전통’, ‘원형’, ‘상징’이 가진 권위를 의심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의 시각 상징이 가진 정치적 함의를 보다 객관적으로 새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자들이 태학사와 손을 잡고<한국학, 그림을 그리다>를 연재한다. 그림에 숨은 비밀과 사연을 프리즘으로 삼아 한국학의 출렁이는 바다로 여행을 떠나려는 것이다. 문학, 미술, 음악, 철학, 역사, 문화가 망라되는 항해에 깊고 진한 교감이 깃든 풍성한 바다가 펼쳐지길 해신(海神)에게 기도한다. 연재는 매주 1회 돛을 달고 항구를 떠난다.
출처:(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김수진)
2024-07-11 작성자 청해명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