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조 안방걸(安邦傑) 대장군. 광주군. 안유(安綏) 명종조 문과 시어사. 영남안찰사. 안정(安禎) 고종조 문과. 이부총랑. 안지(安祉) 고종조 문과. 군기시판사. 안수(安壽) 충열왕조 문과. 도평의사사. .안창(安昌) 위위주부. 안해(安海) 충선왕조 문과. 밀직제학. 안충(安冲) 충숙왕조 문과. 호군. 안사충(安社忠) 이부총랑. 안기(安器) 공민왕조 문과. 판전농시사. 안의(安義) 충정왕조 군기시판사. 안국주(安國柱) 중랑장 겸 합문지후. 안성(安省) 우왕조 문과 밀직제학. 안정(安鼎) 중랑장.
▲조선조 안성(安省) (? ~1421)은 큰 벼슬보다는 그 청렴함이 후세에 전한다. 우왕 6년 문과에 급제하여, 보문각 직제학(寶文閣 直提學), 상주판관(尙州判官) 등을 지냈으며, 판관(判官) 재직중 다 허물어진 상주성(尙州城)을 중수(重修)하였다. 조선조에서는 봉상시 소경(奉常寺 少卿)이 되었으며, 개국 후 최초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태종 11년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로 재직중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바 있다. 후에 개성류후사 류후(開城留侯司 留侯)를 거쳐 태종 18년 평양감사(平壤監司)를 역임했으며, “임기를 다하고 떠나올 때에 공의 짐짝을 눈 여겨 보았 드니 평소에 탐독하던 서적 몇 권과 누더기 이불 몇 채가 나귀등에 매달려 가는 것을 보고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전북 장수(全北 長水)의 용암서원(龍岩書院)과 남원(南原)의 호암서원(湖岩書院)에 제향 되었으며 시호는 사간(思簡)이다. 1414년 태종이 내린 어필왕지(御筆王旨)를 전북 장수군(全北 長水郡)의 어필각(御筆閣)에 소장하고 있다.
안극사(安克思) (1419~1479)는. 1443년에 음직으로 충순위(忠順衛)에 등용되고 다음해에 진사시(進士試)가 폐지되었음으로 한성갑자시(漢城甲子試)에 등과하여 의검부 도사(義禁府 都事)가 되었다. 1455년에 홍산현감(鴻山縣監)으로 선정하였으며, 1465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여 공주목사(公州牧使)가 되었고, 1468년에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어 진향사(進香使)로 연경(燕京)을 다녀와서 여주목사(驪州牧使)로 부임하였고, 1471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하였다. 1477년에 덕원부사(德原府使)로 외직에서 선정하다가 임지에서 순직하였다. 좌익원종2등공신(左翼原從2等功臣)이다. 안팽명(安彭命) (1447~1492)은 벼슬이 사간(司諫)에 이르렀으며 1469년(세조14년)에 사마시(司馬試), 1471년(성종2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 형조정랑(刑曹正郞)ㆍ장령(掌令)등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1492년 예빈시 부정(禮賓寺 副正)으로 왕명에 따라 평해(平海)를 다녀오다가 강릉(江陵)에서 병사하였다. 청백리에 록선(淸白吏에 錄選)되었다.. 안경우(安景祐) ( ? ~1548)는 호:호산(湖山)으로 벼슬은 성주판관(星州判官)을 지냈다. 1519년(중종14년)에 성주판과(星州判官) 재직 중에 조광조(趙光祖)의 일파로 지목되어 화를 입었다. 중종 “을묘사화록(乙卯士禍錄)”에 등재되었다. 안완경(安完慶) ( ? ~1456)은 1423년(세종5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사재직장(司宰直長)ㆍ병조좌랑(兵曹佐郞)ㆍ종부시윤(宗簿寺尹)등을 거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사은부사(謝恩副使)ㆍ주문사(奏聞使)로 두차례 명나라에 다녀왔고, 단종1년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었으나,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일파로 몰려 양산(梁山)에 유배, 사사(賜死)되었다. 1791년(정조15년)에 왕명으로 직첩이 회복되고 장릉(莊陵)에 배향 되었다. 안엄경(安淹慶) (1392~ ? )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충주목사, 호조참판(忠州牧使, 戶曹參判)을 역임하였다. 태종 17년 감찰어사(監察御使)로 재임시 전과(全過)ㆍ원욱(元郁)ㆍ류사식(柳士植) 등 19제현과 총마계(驄馬契)를 조직하여 동심사국에 힘썼다. 1453년(단종 1년) 계유정란(癸酉靖難)에 그의 사위 홍달손(洪達孫)이 협찬한 것을 알고 엄히 밀책(密責)하고, 자신도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안억수(安億壽) (1427~ ? )는 1441년(세종32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예안현감(禮安縣監)을 지냈는데 숙부인 대사언 안완경(大司憲 安完慶)이 순절하자 현감직을 버리고 밀양(密陽)으로 은거(隱居)하였다. 청염록(淸廉錄)에, 예안현감(禮安縣監)으로 재임시 그 지방에 거목장(椐木杖)이 명물이 이었는데, 모인(某人)이 거목장(椐木杖)을 선물함에 애용하다가 사임할 적에 “이 물건도 이 땅의 물건이니 내 어찌 가져가리요” 하면서 주위의 간곡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버리고 왔다 한다. 안구(安覯) (1458~1522)는 호(號);태만(苔巒).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의 문인으로 1494년(성종25년)에 별시 병과에 급제하여 사간(司諫)을 역임하였다. 일찍이 남원(南原)에 부임하여 선정을 배풀어 백성들이 비(碑)를 새우고 그를 칭송했다고 한다. 청백리(淸白吏)에 기록되어 있다. 안증(安嶒) (1494~1553)은 호(號);완귀(玩龜), 1548년(명종3년)에 별시 병과로 급제하여 시강원(侍講院) 사설(司說)을 역임.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예측하고 전원에 물러가 정자(亭子)를 짓고 학문에 전념했을 때 남명 조식(南冥 曺植)이 이곳 정자(亭子)에 찾아와 공의 위상(偉像)과 학덕(學德)을 찬양하여 불급운문 만장기“(不及雲門 萬丈奇)”라 시를 남겼다. 이 시에 따라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도 욕거남여 나이득“(欲擧藍輿 那易得)” 이라는 시를 지어 남겼다. 또한 주신재ㆍ신독재(周愼齋ㆍ愼篤齋)와 돈독한 도의지교(道義之交)가 있었다. 호연사(虎淵祠)에 배향되었다. 안여경(安餘慶) (1538~1592)은 호(號);옥천(玉川). 도의(道義)와 문장이 뛰어났다. 관산서원(冠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안신(安迅) (1569~1648)은 호(號);오휴자(五休子). 한강 정구(寒岡 鄭逑)의 문인으로 역학(易學)과 예학(禮學)에 능통하였다. 임난군공(壬亂軍功)으로 군기시 부정(軍器寺 副正)벼슬이 내렸다. 가례부췌(家禮附贅 三冊)등 많은 저술(著述)을 남겼다. 안진(安軫) (1560~1635)은 자(字):경숙(敬叔) 평소에 학문에 치중하여 덕망이 높았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초유사 김성일(招諭使 金誠一)을 도와 종군하였으며 1594년(선조27년)에 무과에 급제, 훈련원 봉사ㆍ주부(訓練院 奉事ㆍ主簿)를 역임하고 부호군(副護軍)에 올랐다. 선무원종공신 3등(宣武原從功臣 三等)에 녹훈되었다. 안윤손(安潤孫) (1450~1484)은 1471년(성종7년)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검토관(檢討官)으로 경연(經筵)에 참가했으며 부교리ㆍ지평ㆍ장령(副敎理ㆍ持平ㆍ掌令) 등을 지냈다‘ 연산군 6년에 전라우도수군절도사(全羅右道水軍節度使)를 역임했고 이후 강원감사ㆍ오위도총부 부총관ㆍ대사간ㆍ형조참의(江原監司ㆍ五衛都摠府 副摠管ㆍ大司諫ㆍ刑曹參議) 등을 거치면서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을 남겼다. 중종조에 대사헌ㆍ한성부좌윤ㆍ형조참판(大司憲ㆍ漢城府左尹ㆍ刑曹參判) 등을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안윤덕(安潤德) (1457~1535)의 자(字);선경(善卿), 시호(諡號):익헌(翼憲). 1483년(성종14년)에 식년시문과(式年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1497년(연산3년)에 문과 중시한 이래 정언ㆍ지평ㆍ사간ㆍ직제학(正言ㆍ持平ㆍ司諫ㆍ直提學) 등을 역임하고, 후에 경상ㆍ경기 도관찰사(慶尙ㆍ京畿道觀察使)를 지냈다.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김제(金堤)로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후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다. 1510년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나자 경상도 도순찰사(慶尙道 都巡察使)로서 부원수(副元帥)가 되어 난을 평정하였다. 다시 한성부 판윤(漢城府 判尹)ㆍ호조판서(戶曹判書)ㆍ의정부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등용되었으며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재직중 단군ㆍ기자(檀君ㆍ箕子)의 사당을 수축하기도 하였다. 안여경(安汝敬) (1523~1585) 군시호(君諡號):광계군(廣溪君), 여주목사(驪州牧使)와 광주진관 병마동첨절제사(廣州鎭管 兵馬同僉節制使)를 지냈다. 뒤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좌참찬 겸 지의금부사(議政府左參贊 兼 知義禁府事)를 지냈다. 순충적덕보조공신 광계군(純忠積德補祚功臣 廣溪君)에 추증되었다. 안용(安容) (1522~1586)은 자(字);사묵(士黙), 호(號); 송파(松坡). 1558년(명종13년)에 식년시 병과로 급제하여 영남어사(嶺南御使)와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 同副承旨)ㆍ황해감사(黃海監司)ㆍ호조참판(戶曹參判)ㆍ안동부사(安東府使)를 두루 역임하고, 1585년(선조18년)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안사웅(安士雄) (? ~ ?)은 1546년(명종1년)에 증광시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ㆍ지평(正言ㆍ持平)을 거쳐 좌승지ㆍ병조참의(左承旨ㆍ兵曹參議)에 이르렀으나 청백리 안성(淸白吏 安省), 안윤손(安潤孫)의 정신을 이어받아 청렴하였음으로 선조가 특별히 낙산(駱山) 아래에 집을 내렸다 전한다. 그 집이 세칭 삼청동 안가(安家)이다. 안대진(安大進) (? ~ ?)은 1586년(선조19년)에 증시 문과(文科)에 올랐으며, 같은 해에 알성시 병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한림학사(藝文館 翰林學士)가 되었는데 이산보(李山甫)의 문인으로 문장에 뛰어나 이산보 이정립(李山甫 李廷立)과 함께 삼대문장(三大文章)으로 일컬어졌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해운도감(海運都監)의 현직(顯職)에 있으면서 큰공을 새웠고 왕의 서천(西遷)때에 호종(扈從)하였으며, 이몽학(李夢鶴)의 난 때에는 홍주목사 홍가신(洪州牧使 洪可臣)과 함께 이를 평정하는 공을 새웠다. 그리하여 선무(宣武)ㆍ호성(扈聖)ㆍ청난(淸難) 등의 원종1등공신(原從一等功臣)에 녹훈되고 많은 사패지를 받기도 했다. 안민학(安敏學) (1542~1601)은 자(字);이습(而習), 호(號);풍애(楓厓), 시호(諡號): 문정(文靖), 글씨가 뛰어났던 안담(安曇;1535~1585)의 아들로, 역시 문재로 이름을 남겼다.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하였고 필법과 문장에도 뛰어나 사림들의 존경을 받았다. 광주회보“(廣州會報)”8에 보면, 안민학(安敏學)은 사암 박순(思菴 朴淳)에 배우고 이이(李珥)의 추천으로 희능참봉(禧陵參奉)에 임명되었다. 이후 감찰(監察)을 거쳐 대흥ㆍ아산ㆍ현풍(大興ㆍ牙山ㆍ玄風)등의 현감(縣監)을 역임하였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는 소집사(召集使)가 되어 군량수송을 맡았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애도문이 남아있다. 안황(安滉) (1523~1585) 자(字);경호(景浩). 군시호(君諡號):광양군(廣陽君),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후 사도시정(司導寺正)이 되었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는 돈녕부 도정(敦寧府 都正)에 올라 임금을 호종(扈從)하였다. 호성공신2등(扈聖功臣二等)에 록훈(錄勳)되었다. 안응원(安應元) (1565~1604)은 자(字);선백(善伯), 군시호(君諡號):광원군(廣原君), 1606년(선조34년)에 안악군수(安岳郡守)로 재임시, 식년시 갑과(式年試 甲科)에 급제하고 훈련원 정언(訓練院 正言)을 역임하였다. 임난후 호성원종공신3등(扈聖原從功臣三等)에 녹선(錄選)되었으며, 문재(文才)가 뛰어났으나 41세로 졸 하였다. 안응형(安應亨) (1578~1655) 자(字);숙가(叔嘉), 호(號);정재(靜齋), 1611년(선조39년)에 식년시 병과(式年試 丙科)에 급제하고,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 사헌부 지평, 장령(司憲府 持平, 掌令)과 홍문관 교리, 수찬(弘文館 校理, 修撰)을 역임하였고 남양(南陽)과 제주군수(濟州郡守)로 재임시, 선정으로 공덕비(功德碑)가 새워졌으며, 안동부사(安東府使)와 평안(平安),경기(京畿)등 7도의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다, 한성부 좌윤(漢城府 左尹), 예조 형조 참판(禮曹,刑曹 參判)과 개성류수(開城留守)를 거처 1640년(인조18년)에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 연경에 다녀왔으며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재임하고 1653년(효종4년)에 대사헌(大司憲)과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제수 받았으나 년노하여 재임하지 못하였고 임난후 호성원종공신3등(扈聖原從功臣三等)에 록훈되었다.. 78세로 졸하니 효종이 치제문(致祭文)을 내렸다. 안헌징(安獻徵) (1600~ ? )은 1621년(광해군13년)에 증광시 을과(增廣試 乙科)에 급제하고, 1626년(인조4년)에 중시(重試)하여, 검열ㆍ이조좌랑(檢閱ㆍ吏曹佐郞)을 지냈고, 다시 예조정랑ㆍ장령ㆍ부승지(禮曹正郞ㆍ掌令ㆍ副承旨) 등을 거쳐 벼슬이 관찰사(觀察使)에 이르렀다. 문장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안시현(安時賢) (1601~1649)은 자(字);군망(君望), 1626년(인조4년)에 정시 을과(庭試 乙科)에 급제하여 필선(弼善)에 이르렀으며 병자호란후 호종원종공신(扈從原從功臣)에 록훈(錄勳)되었으며, 당시 문장가 였던 오준(吳俊) 황상(黃床)등과 함께 팔학사(八學士)라 칭할 만큼 문재(文才)가 뛰어 났으나 49세로 일찍 졸하였다. 안후열(安後說) (1632~1724)은 1652년(효종3년)에 증광시 을과(增廣試 乙科)에 급제, 호당(湖堂)에 들었고 사경기사관ㆍ지평ㆍ수찬ㆍ암행어사(司經記事官ㆍ持平ㆍ修撰ㆍ暗行御史)를 지냈다. 현종조에는 교리ㆍ수찬ㆍ장령ㆍ헌납ㆍ집의ㆍ승지ㆍ동부승지ㆍ좌승지ㆍ도승지(敎理ㆍ修撰ㆍ掌令ㆍ獻納ㆍ執義ㆍ承旨ㆍ同副承旨ㆍ左承旨ㆍ都承旨) 등을 역임했다. 안서우(安瑞羽) (1664~1735) 호;양기재(兩棄齋). 일찍이 문명을 세상에 떨친 인물이다. 1691년(숙종17년)에 생원이 되고, 이어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앞서 성묘종사(聖廟從祀)의 의론에 참여했으므로 승문원(承文院)에 뽑히지 못하고 태인군수ㆍ울산부사(泰仁郡守ㆍ蔚山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호(號);순암(順菴). 시호(諡號):문숙(文肅), 군시호(君諡號):광성군(廣城君) 광주안문(廣州安門)이 배출한 영ㆍ정조(英ㆍ正祖) 시대의 실학자(實學者)이다. 그는 이익(李瀷)의 문인으로서 봉사ㆍ직장ㆍ별제ㆍ감찰(奉事ㆍ直長ㆍ別提ㆍ監察)등을 지낸 후 세자익찬(世子翊贊)ㆍ세손사부(世孫師傅)로 있으면서 세손을 가르쳤다. 이어 회인현감(懷仁縣監)ㆍ돈녕부 주부ㆍ첨지중추부사(敦寧府 主簿ㆍ僉知中樞府事)를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으며, 학문에 있어서는 이황(李滉)을 사숙하였고, 이익(李瀷)의 뒤를 이어 이용후생(利用厚生)을 강조하는 실학연구(實學硏究)에 전심하였다. 특히 역사학에 깊은 관심을 보여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저술 하였다. 많은 저서(著書)와 편서(編書)가 있다. 좌참찬(左參贊)에 추증되었다, 안응로(安應魯) (?~?)는 검열ㆍ헌납(檢閱ㆍ獻納)을 거쳐 이조정랑ㆍ지평(吏曹正郞ㆍ持平) 등을 지냈다. 안세징(安世徵) (1639~1702)은 1675년(숙종1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우승지ㆍ형조정랑ㆍ공조참의(右承旨ㆍ刑曹正郞ㆍ工曹參議)를 거쳐 보사원종공신1등(保社原從功臣 一等)에 록훈(錄勳)되었다 안상즙(安商楫) (1696~1774)은 용안ㆍ연산ㆍ창녕현감(龍安ㆍ連山ㆍ昌寧縣監)을 지내고, 삭녕ㆍ해주군수(朔寧ㆍ海州郡守)를 거처 부평도호부사(富平都護府使)를 역임하여 선치(善治)하였음으로, 영조가 속대주첩(續代柱帖)을 만들어 공의 십고십상(十考十上)을 등재하라 하고 대녹피(大鹿皮)를 하사(下賜)하였다. 사후(死後)에 서유대가 청백리(淸白吏)에 천거하였다. 안정최(安廷最) (1725~1794)는 영조ㆍ정조조에 절충장군(折衝將軍)을 거쳐 도총관(都摠管)을 역임했으며, 1794년(정조18년)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안종화(安鍾和) (1806~1924)는 자(字);사응(士)應, 호(號);수재(漱齋)로 궁내부낭관ㆍ법부참서ㆍ세자시강원 시독ㆍ중추원 의관(宮內府郞官ㆍ法部參書ㆍ世子侍講院 侍讀ㆍ中樞院 議官)등을 역임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민영환(閔泳煥) 등과 함께 조약의 폐기를 주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낙향하였다. 역사에도 관심이 깊어 광범한 문헌을 인용하여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를 편찬하였다. 안종수(安宗洙) (1849~1896)는 자(字);경전(敬專), 호(號);기정(起亭), 1882(고종19년)에 진사가 되고, 1895년에 주부(主簿)가 되었으며, 1906년에 황해도 시찰관(黃海道 視察官)을 거쳐 나주군수(羅州郡守)가 되었다. 남달리 학문에 조예가 깊어 내무대신(內務大臣) 박정양과 함께 국외(國外)를 두루 다녀와서 농정신편“(農政新編)”을 저술하였다. 가선대부 규장각 부제학(嘉善大夫 奎章閣 副提學)에 추증(追贈)되었다. 안몽득(安夢得) (1372~1452)은 문행이 높아 경덕재생(經德齋生)으로 선발되었으며, 조선 태종조(朝鮮 太宗朝)에 생원으로 권농판사(勸農判事)에 등용되었다, 13세 때의 헌수시(獻壽詩)가 유명하다. 함안봉산재(咸安蓬山齋)의 안영사(按嶺祠)와 양산 소계서원(梁山 蘇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안용지(安勇智) (?~?)는 성종 경자(庚子)에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청하현감, 순천도호부사(淸河縣監, 順天都護府使)하다. 정치청평(政治淸平)하니 백성이 칭송(稱頌)하여 청하만경 읍공심청“(淸河萬頃 挹公心淸)”이라 노래하였다. 안우(安宇) (1498~1550)는 호(號);계산(戒山), 1524년(중종19년)에 문과별시(文科別試)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홍문관 수찬ㆍ춘추관 편수관(弘文館修撰,ㆍ 春秋館 編修官)을 역임하였다. 을사사화(乙巳士禍)때 권신(權臣)의 유혹을 거절하여 환향(還鄕)하였다. 신재 주세붕(愼齋 周世鵬)이 소(疏)를 올려 권했으나 출사하지 아니하였다. 양산 소계서원(梁山 蘇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안주(安宙) (1500~1569)는 호(號);치암(恥庵), 1533년(중종28년)에 식년을과(式年乙科)에 장원(壯元)하여. 호조정랑(戶曹正郞)을 비롯하여 청도군수(淸道郡守), 밀양부사(密陽府使), 홍문관 부교리(弘文館 副校理), 제용감정(濟用監正)을 지냈다. 을사사화(乙巳士禍)때 권신(權臣)의 횡행(橫行)을 피해 관직을 버리고 환향(還鄕)하였다. 양산 소계서원(梁山 蘇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안택(安宅) (?~1560)은 자(字);태거(太居), 호(號);광능자(廣陵子). 1540년(중종35년)에 성균관 생원(成均館 生員)하고. 벼슬은 도사(都事)하다. 함안팔현(咸安八賢)의 한사람으로 함안 여양서원(咸安 廬陽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안신명(安信命) (1575~1636)은 자(字);군실(君實), 호(號);매죽헌(梅竹軒). 임진왜랄(壬辰倭亂)때 의병(義兵)을 일으켜 공을 새워 훈련원 판관(訓練院 判官),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에 증질(增秩)되고, 선무원종공신3등(宣武原從功臣三等)의 록훈(錄勳)을 받았다. ※숙질(叔侄), 재종간(再從間)의 5名이 모두 록훈(錄勳)을 받으니 세칭 안씨일문의 5충(世稱 安氏一門의 五忠)이라 하였다. 양산 소계서원ㆍ보령 호국사ㆍ울산 충의사(梁山 蘇溪書院, 保寧 護國祠, 蔚山 忠義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안절(安節) (1420~149?)은 자(字);정수(靖叟). 호(號);묵용당(黙容堂), 1447년(세종29년)에 사마(司馬)하고 1456년(세조1년)에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을 지냈으며, 1472년(성종3년)에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홍문관 직제학 지제교(弘文館 直提學 知製敎)와, 대사성 대사간 대사헌(大司成 大司諫 大司憲)을 거처, 이조참판 겸 동지성균관사(吏曹參判 兼 同知成均館事)에 오르고, 세자시강원 부빈객(世子侍講院 副賓客)을 역임하였다. 안숙인(安淑仁) (1467~1510)은 호(號);방수재(守防齋), 성종때 진사가 되어 홍문관 응교(弘文館 應敎)로써 삼포왜란 평정(三浦倭亂 平定)에 출사(出仕)하여 순절(殉節)하였다.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안필성(安弼聖) (1521~1585) 자(字):성지(成之) 호(號):졸한자(拙閒子). 명종때 진사(進士)로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친 안숙인(安淑仁)이 순절하자 표연히 벼슬을 버리고 서산 송덕(瑞山 德松)에 아정(鵝亭)을 짓고 자적하다가 졸하니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안경철(安景喆) (1818~1898)은 자(字);성돈(性敦), 호(號);학암(鶴巖). 1880년(고종17년)에 진사가되고, 의금부 도사(義禁府 都事)와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오르고, 돈녕부 도정(敦寧府 都正)에 승질(陞秩)되었다. 안학로(安學魯) (1824~1895)는 호(號);지와(芝窩), 고종 7년에 지독한 흉년(凶年)으로 온 국민이 아사지경(餓死之境) 일 때 자진하여 교통요충지에 가마솥을 걸고 탕죽(湯粥)으로 왕래하는 굶주린자를 수년간 진휼(진휼)하였으며 1885년(고종22년)에 진사로서 선감역(繕監役)과 절충장군(折衝將軍)을 거쳐 통정대부 돈녕부 도정(通政大夫 敦寧府 都正)을 지냈다. 안택중(安宅重) (1858~1929) 초명(初名):우중(瑀重), 자(字):중거(仲擧), 호(號):지정(之亭), 광무7년(1903)에 법관양성소 교관(法官養成所 敎官)으로 등용되어 사범학교 교장(師範學校 校長)을 역임하고, 1907년에 수학원 교관 겸 동궁사부(修學院 敎官 兼 東宮師傅)로 승진(陞進)되었다. 그 후 동궁(東宮)이 일본에 억류(抑留)되고 국정이 위미(萎靡)함을 보자 사직(辭職)을 고했다. 고종황제(高宗皇帝)가 어구마일필(御廐馬一匹)을 하사(下賜)하고, 손수 소귀정 삼자(疏歸亭 三字)를 써서 주었으니 곧 이소(二疏)가 같다는 뜻이다. 동궁(東宮)이 영친왕(英親王)으로 강칭(强稱)된 후 귀국(歸國)하면 선생(先生)을 비원(秘苑)으로 불러 1~2일식 동숙하면서 통한(痛恨)의 눈물을 지웠다 한다.
광주안씨(廣州安氏))는 누대로 여러 자손들이 요직에 등용되어 광주안씨(廣州安氏) 문중을 빛냈으며, 그중 에서도 청렴한 관리로서 이름을 남긴 선조들이 후세의 존경을 받는 인상이다. 안성(安省)ㆍ안윤손(安潤孫)ㆍ안팽명(安彭命) 안완경(安完慶) 안구(安覯)등이 그러한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근래에 와서 이루어진 광주안씨 문중(廣州安氏 門中)의 사업은 1982년에 시조 안방걸(始祖 安邦傑) 이하 12대에 대해 봉위설단(奉位設壇)하여 매년 양력 4월 1일에 시향(時享)하게 된 일이다. 그리고 1984년 10월, 조선조에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근거, 왕자맥(王字脈)의 명당자리 라 하여 강제로 이장(移葬)되었던 18세 판전농시사 안기(判典農寺事 安器)의 묘소를 원자리로 복원한 일을 꼽을 수 있다.
▲文科(문과) 안완경(安完慶)(중시:대사헌). 안철손(安哲孫)(호참) 안팽명(安彭命)(대사간ㆍ청백리) 안윤손(安潤孫)(대사헌) 안구(安覯)(사간ㆍ청백리). 안윤덕(安潤德)(참찬ㆍ翼憲). 안여경(安汝敬)(목사ㆍ廣溪君). 안의(安義)(정언). 안증(安嶒)(사설). 안극효(安克孝)(장령). 안응원(安應元)(정언). 안종록(安宗祿)(동의금). 안응형(安應亨)(참판). 안응로(安應魯)(이조,정랑), 안헌규(安獻規)(병조정랑), 안후열(安後說)(승지). 안후창(安後昌)(병조,정랑). 안후태(安後泰)(승지). 안세징(安世徵)(형의). 안서우(安瑞羽)(부사). 안후정(安后靜)(학정) 안후석(安后奭)(병조좌랑). 안정보(安廷輔)(병조정랑). 안팽로(安彭老)(판관). 안한준(安漢俊)(부사). 안황(安滉)(의금부사:廣陽君). 안시성(安時聖)(첨정). 안시현(安時賢)(필선), 안극(安極)(호조참판) 정복(安鼎福)(중추부사:順庵) 안철중(安喆重)(현령). 안경로(安景魯)(진사). 안효근(安孝根)(현감). 안종수(安宗洙)(참봉). 안한언(安漢彦)(부사). 안한영(安漢英)(홍박). 안사언(安士彦)(참의). 안우(安宇)(수찬). 안주(安宙)(교리). 안택(安宅)(도사). 안사웅(安士雄)(병의). 안용(安容)(감사). 안묵지(安黙智)(형정). 안대진(安大進)(원정). 안욱(安旭)(첨정). 안정대(安鼎大)(좌윤). 안제원(安濟元)(승지). 안극제(安克悌)(승지). 안경설(安景說)(감찰). 안경철(安景澈)(승지). 안효술(安孝述)(승지). 안희원(安禧遠)(승지). 안긍원(安兢遠)(승지). 안종화(安鍾和)(사간). 안기윤(安基輪)(지평). 안용지(安勇智)(부사). 안응균(安應鈞)(부사). 안학로(安學魯)(도정). 안처선(安處善)(관찰사). 안엄경(安淹慶)(감찰어사). 안여경(安余慶)(관찰사). 안윤조(安胤祖)(부정). 안인달(安仁達)(승지). 안경조(安景祖)(참판). 안효철(安孝轍)(부정).
▲蔭仕(음사) 안성(安省)(호;천곡(泉谷). 찬성(贊成). 청백리(淸白吏), 시호:사간(思簡). 안몽득(安夢得)(권농판사). 안강(安崗)(진찰방). 안현(安峴)(좌랑) 안제(安齊)(현감). 안종생(安從生)(감찰). 안경시(安慶禔)(지의금). 안경선(安慶船)(부호군). 안명(安命)(호판). 안숙선(安叔善)(사서). 안보문(安普文)(인의). 안절(安節)(정랑). 안계옥(安啓沃)(부사). 안리(安理)(부사). 안충(安忠)(증승지). 안세립(安世立)(도사). 안사백(安師伯)(증호참). 안숙량(安叔良)(시직). 안순(安峋)(사맹). 안길(安吉)(사직). 안우(安雨)(참봉). 안우시(安遇時)(판사). 안처선(安處善)(청백리:동국문헌록). 안억수(安億壽)(현감). 안헌(安憲)(시직). 안극서(安克緖)(정랑). 안효충(安孝忠)(嘉善). 안효구(安孝九)(감찰). 안덕원(安德遠)(참봉). 안효흥(安孝興)(오위장). 안신행(安信行)(별검). 안건행(安健行)(동지). 안철중(安喆重)(익찬). 안석우(安錫瑀)(감역). 안녕수(安寧洙)(통정). 안응춘(安應春)(충순위). 안호(安琥)(내금위). 안귀명(安龜命)(첨지). 안담명(安聃命)(동지). 안만춘(安萬春)(부사직). 안후현(安后賢)(가선). 안경식(安敬植)(참의). 안병수(安秉洙(도정). 안익수(安翊洙)(통정). 안규수(安奎洙)(능참봉). 안상수(安尙洙)(통정). 안치수(安致洙)(첨지). 안진훈(安震勳)(도정). 안정훈(安鼎勳)(가선). 안석훈(安錫勳)(가선). 안사노(安師魯)(가선). 안기중(安騏重)(도정). 안교현(安敎鉉)(도정). 안희강(安熙綱)(의관). 안익원(安翼遠)(의관). 안희선(安熙善)(통정). 안여충(安汝忠)(병마우후). 안여효(安汝孝)(만호). 안홍립(安弘立)(교위). 안응정(安應井)(사과). 안한영(安漢楹)(사과). 안문중(安文重)(가선). 안효천(安孝千)(통정). 안효정(安孝貞)(통정). 안효응(安孝膺)(도사). 안붕원(安鵬遠)(의관). 안대원(安大遠)(사과). 안익원(安益遠)(도사) 안병원(安炳遠(의관). 안종호(安鍾祜)(통정). 안응조(安應祖)(사직). 안택중(安宅中)(진사).안윤신(安潤身)(진사). 안효필(安孝弼)(진사). 안수관(安守寬)(진사). 안규화(安奎華)(진사). 안민중(安珉重)(진사). 안수중(安琇重)(진사). 안효구(安孝構)(진사). 안효가(安孝可)(진사). 안홍원(安弘遠)(진사). 안명언(安命彦)(통덕랑). 안여거(安汝居)(생원). 안택중(安宅重)(진사)
▲功臣(공신) 안윤덕(安潤德)(중종조ㆍ삼포왜란평정). 안숙인(安淑仁)(중종조ㆍ삼포왜란평정). 안여경(安汝敬)(명종조ㆍ 순충적덕보조공신). 안황(安滉)(선조조ㆍ호성2등공신). 안응원(安應元)(선조조ㆍ호성원종3등공신) 안응형(安應亨)(선조조ㆍ 호성원종3등공신). 안응인(安應仁)(서조조ㆍ호성원종3등공신). 안시성(安時聖)(선조조ㆍ扈聖原從3等功臣) 안대진(安大進)(선조조ㆍ선무 호성 청난 원종1등공신). 안이명(安以命)(선조조ㆍ선무원종1등공신). 안근(安瑾)(선조조ㆍ선무원종3등공신). 안수(安琇)(선조ㆍ선무원종3등공신). 안시명(安諟命)(선조조ㆍ선무원종3등공신). 안진(安軫)(선조조ㆍ선무원종3등공신). 안신명(安信命)(선조조ㆍ선무원종3등공신). 안덕남(安德男)(선조조ㆍ선무원종3등공신). 안응조(安應祖)(중종조ㆍ정사원종공신). 안극사(安克思)(세조조ㆍ좌익원종2등공신).
▲封君(봉군) 안여경(安汝敬)(광계군:廣溪君). 안황(安滉)(광양군:廣陽君). 안응원(安應元)(광원군:廣原君). 안극(安極)(광평군:廣平君). 안정복(安鼎福)(광성군廣城君).
▲諡號(시호) 안성(安省)(사간:思簡). 안윤덕(安潤德)(익헌:翼憲). 안민학(安敏學)(문정:文靖).
▲文衡(문형) 안헌(安獻)(광해조).
▲湖當(호당) 안완경(安完慶)(세종조). 안윤손(安潤孫)(성종조). 안한영(安漢英)(중종조). 안종록(安宗祿)(선조조). 안민학(安敏學)(성종조). 안후열(安後說)(효종조). 안명하(安命夏)(철종조).
▲淸白吏(청백리) 안성(安省)(태종조ㆍ참찬). 안팽명(安彭命)(성종조ㆍ사성), 안구(安覯)(연산조). 안황(安滉)(명종조). 안민학(安敏學)(선조조). 안중관(安重觀)(선조조). 안후열(安後說)(효종조). 안처선(安處善)(태종조:동국문헌록).
▲節義(절의) 안성(安省)(고려말:두문제현), 안엄경安淹慶(세종조:세종조명신록),
▲學行(학행) 안정(安侹)(1574~1636) 호(號),도곡(道谷), 한강정구(寒岡鄭逑)선생문인, 사친과 우국에 충효하며. 학문에 진전함을 득하여 조정에서 조봉대부 동몽교관으로 포양하고 사림들은 태양서원(泰陽書院)을 창건하여 봉향하다. 안종희(安鍾禧)(1896~1985) 호(號),근파(槿坡), 정통 퇴계학파의 마지막 거유로서 성리학에 정통하였으며 문장덕행이 세상에서 유종으로 추앙받았으며, 사림들이회동(會同)하여 선생(先生)으로 추존하다. 재궁 근파재(槿坡齋)와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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