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수 축소로 또한 수입이 감소하여 재정난에 허덕이던 리그는 오리지널 셀틱스(original Celtics)에서 선수 생활을 했고, 세인트 존스 대학의 코치였던 조 랩칙이 닉스(Knicks)의 코치로써 리그에서 입성하면서 반등의 기회를 얻었다.
BAA는 거칠고 험악한 리그였는데, 많은 선수들이 지방리그 시대의 베테랑 선수들이었다. 그들 중 하나가 필라델피아를 6게임만에 누르고 타이틀을 차지한 볼티모어를 이끈 30살의 버디 자네티였다.
전편에서도 언급했지만, 당시 리그는 굉장히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얼마 안 가 망한다해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닌 상황이었습니다. 의욕에 차 출범햇던 BAA였지만, 2번째 시즌만에 4개의 팀이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남은 7개팀으론 일정을 짜기도 힘든 상황이었죠.(마치 올시즌 우리나라 프로야구와 같은 상황)... 그래서 당시 마이너리그 팀인 불리츠를 끌어들이는데 왠걸 우승해버린 겁니다. 자세한 건 Finals에서 이야기하겠습니다.
1948 Finals: Baltimore 4, Philadelphia 2
- Baltimore Bursts Into Big Leagues
NBA Fin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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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timore 4, Philadelphia 2
Apr. 10: Sat., Baltimore 60 at Philadelphia 71 Apr. 13: Tue., Baltimore 66 at Philadelphia 63 Apr. 15: Thu., Philadelphia 70 at Baltimore 72 Apr. 17: Sat., Philadelphia 75 at Baltimore 78 Apr. 20: Tue., Baltimore 82 at Philadelphia 91 Apr. 21: Wed., Philadelphia 73 at Baltimore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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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48시즌의 볼티모어 불리츠(Baltimore Bullets)를 쉽게 표현하자면 '우승을 차지한 확장팀'일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사용된 '확장'이란 단어는 사람들을 오해시킬 소지가 있는 단어일 것이다. 사실은 '수축'이 당시 살아남기 위한 리그의 상황을 표현하는 더 정확한 단어일 것이다.
BAA의 첫 시즌 후 4개 팀이 해산했을 때, 남은 7개 클럽들은 필사적인 생존투쟁을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디비전을 '채우기' 위한 방안으로 마이너리그 팀이라 할 수 있는 볼티모어를 끌어들였다.
정확히하자면 BAA 가입 이전에 비록 불리츠는 마이너리그 팀이었지만, 그들은 '굉장한 마이너리그 팀'이었다는 것을 알 필요 있다. 그들은 1940년대에 ABL(American Basketball League - BAA와 NBL 이전 존재하던 프로리그)에서 4연속 우승을 차지했었다. 불리츠의 구단주 로버트 '제이크' 엠브리와 팀을 운영했던 지역 스포츠 방송인인 빌 다이어는 불리츠를 빅리그 팀으로 만들기 위해 열성을 보였다. 그들은 BAA의 첫 시즌부터 가입하길 원했지만, 새 리그는 이들을 받아들이길 주저했다. 이유는 불리츠의 홈구장인 낡은 콜로세움은 볼티모어의 가장 가난한 주민들이 사는 '북 먼로 街(North Monroe Street)'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팀 성공의 열쇠는 BAA의 경쟁리그였던 NBL의 포트웨인 피스톤스(Fort Wayne Pistons - 오늘날의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로부터 다이어가 영입한 플레이 코치 '버디' 자네티였는데, 그는 바비 맥델모트와 함게 포트웨인을 백투백 챔피언으로 이끌었었다. NBL 스타 자네티를 데려옴으로써 볼티모어의 로스터는 BAA의 주목을 끌었다. 당시 상황상 BAA는 가능한한 모든 스타들을 필요로 했기에...
1947년 BAA가 최종적으로 가입승인을 했을 때, 불리츠는 비록 사정이 완벽하진 못했지만 준비를 하고 기꺼이 가입했다. 그들의 가입은 (리그의) 어쩔 수 없는 조정을 가져왔다. 필라델피아, 보스턴, 프로비던스와 뉴욕은 동부디비전에서 플레이하게 됐고, 워싱턴과 볼티모어는 시카고와 세인트루이스가 있는 서부로 들어왔다. 그렇지만 (사실은 그렇지도 않지만) 빈약한 불리츠는 리그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만으로 불리츠는 만족했다.
오직 실력있는 농구팀만이 그런 열정을 끌어내는데, 불리츠는 매우 좋은 팀이었다. 시즌 개막 때의 로스터의 중심은 5'11"(180cm)의 가드 자네티와 6'6"(198cm)의 포워드 마이크 블룸(과거 ABL의 MVP 2회 수상자)이었다. 33살의 블룸에겐 선수생활이 얼마 남지 않아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치명적인 세트슛을 가지고 있었고 관중들이 그를 사랑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수비센스를 지니고 있었다.
강력한 빅맨의 시대 도래 이전 시대에 농구는 가드가 지배하는 경기였다. 그런 의미에서 시즌 개막 전에 NBL의 피스톤스로부터 또다른 베테랑 가드 조셉 프렌시스 '칙' 레이저를 계약하여 데려옴으로써, 불리츠가 화력을 보강한 것은 적절한 것이었다. 그는 투핸드 슛 시대의 슛거리가 긴 최고급 세트슛터 중 하나였었고, 시즌동안 불리츠의 공격에서 평균 11.5점을 상승시켰다.
볼티모어는 손쉽게 2경기만에 시카고 스택스를 스윕했고, 세인트루이스와의 격렬한 7차전시리즈에서 살아남은 전년 챔피언 필라델피아 워리어스를 파이널에서 만났다. 양팀을 비교하자면, 워리어스는 시카고로부터 센터 척 허버트를 영입함으로써 이전 시즌의 그들 보다 강해져 있었다. 비록 정규 시즌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그들의 라인업은 강력했다. "당신이 풀크스와 허버트와 댈마를 골밑에 두고, 그리고 스니츠키를 외곽에 두고 있다면 당신은 최고의 구단을 가진 거에요"라고 볼티모어의 폴 호프만은 말했다.
또한 디비전 타이틀을 차지하게 되었을 때, 워리어스는 그들의 약간 실망스런 성적에도 불구하고 홈코트 어드밴티지를 가지게 되었다.(볼티모어 28승 20패, 필리 27승 21패). "우리는 우리가 필라델피아에서 적어도 1경기를 이겨야 한단 걸 잘 알고 있었어요"라고 자네티는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차전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필라델피아는 수용 인원을 밑도는 7,201명의 관중 앞에서 71-60으로 이겼다.
모든 것이 불리츠에게 안 좋게 흘러갔다. 2차전에서 필라델피아는 하프타임까지 질주를 하며 41-20으로 리드했다. "그 당시엔, 아득히 뒤져있었고 게임은 실상 끝난거였어요"라고 자네티는 말했다. "(그 땐) 우리가 따라잡는 것을 도와줄 24초 룰이 없었죠. 그러나, 어떻게든 우린 해야했어요. 우린 우리의 경기를 했고, 슛을 성공시켰고, 결국 그들을 붙잡았죠. 난 우리가 잘 해서인지, 필리가 너무 못해서인지는 모르겠어요."
풀크스는 계속 슛을 던지고 .... 계속 실패함으로써 대사건을 도왔다. 그리고 불리츠는 정확한 슛을 위한 농구를 펼치면서 그들의 플레이를 이끌어갔다. 홈 관중들은 불리츠가 마지막에 리드를 잡게되었을 때, 충격에 정적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들은 3쿼터에서 48-40으로 격차를 줄였고, 마지막 4쿼터는 볼티모어의 것이었다. "우린 4초를 남기고 한 점을 앞서있었고, 난 실패한 자유투를 팁인해 넣었죠."라고 호프만은 회상한다.
66-63의 이 승리는 스포츠 역사상 위대한 감동적인 역전들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당시엔 아무도 프로농구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이 스토리는 뉴욕 타임스의 뒷면에 몇 줄의 단편 기사로 실렸다. 하지만, 그 역전승은 불리츠에게 그들이 찾던 계기를 가져다 주었다.
반면에, 워리어스는 기력을 다 소진해있었다. "우리를 죽여놓았던 것은 세인트루이스와의 7차전시리즈였어요."라고 스니츠키는 말했다. "우리는 기차로 다녀야 했었고, 그건 24시간의 여행이었죠. 만약 날씨가 좀 더 좋았다면, 우리는 비행기를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이고 체력을 좀 더 비축할 수 있었을 거예요."
볼티모어는 콜로세움에서의 2경기를 72-70, 78-75로 가져갔다. 필라델피아로 돌아가서 워리어스는 5차전을 91-82로 이기면서 시리즈를 쫓아갔지만, 그들은 6차전을 위해 다시 볼티모어로 가야만 했다. 그리고, 4월 21일 '마이너리그 팀'이 88-72로 이기면서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날 저녁에 별다른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팀원들이 항상 가던 근처의 간이음식점에서 축하시간을 가졌을 뿐. "거창한 축제는 아니었어요"라고 자네티는 말했다. "모두들 머리 위로 샴페인을 터뜨리는 사람도 없었어요. 그냥 거긴 우리들만이 있었죠."
2,000달러의 상금이 우승을 좀 더 특별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팀의 스폰서 중 한 명이었던 군터 맥주회사는 자네티에게 TV 세트를 주었다. 맥주회사는 기념품으로 팀원 각자에게 필기구 세트를 주었는데, 이런 차별대우는 이후 수십년동안 불리츠를 비난하게 만들었다.
챔피언십을 차지한 이후 오늘날의 슈퍼스타들이 받는 큰 보상이나 대형계약체결은 전혀 없었다. "그래도 나는 백만달러의 계약을 한 그 어느 누구와도 내 경험 모두를 바꾸진 않을 꺼에요"라고 자네티는 자랑스레 말했다. "우리는 좋은 팀이었고, 우리는 우리가 경기한 모든 리그에서 우승했어요."
우승의 주역 '버디' 자네티와 당시 불리츠 로고
피버's comment
Seasons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볼티모어 불리츠와 지금의 워싱턴 위저즈(과거 워싱턴 불리츠)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ABL은 BAA 이전부터 있었던 프로리그였습니다만, 당시엔 마이너리그화되어 있었습니다. BAA나 NBL 이전에는 각 지역별로 리그가 있었기에 그 시대를 지방리그 시대라 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지금의 농구와는 많이 달랐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선수생명도 짧아 30대 초반엔 대부분 선수생활을 접는게 일반적이었죠. 지금의 멋진 점퍼 대신 일명 아줌마슛, !%$$%^*&슛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투핸드슛이 대세였고, 이마저도 대부분 세트슛이었습니다. 그래서, 전편의 필라델피아의 조 풀크스를 가리켜 특별한 의미로 '점핑' 조 라고 부르는 것이죠. 그리고, 공격제한시간도 없었습니다. 그럼으로, 공격팀은 무한정 그들의 볼을 돌리며 (ㅡㅡ;;) 경기를 할 수도 있었단 거죠. 무한정 볼을 돌리다 오픈 찬스가 나면 슛. 이게 바로 당시 정석적인 공격 패턴입니다.
파이널기사가 뒷면 단신으로 나오는 것만 봐도 당시 대중적 인기가 취약했단 걸 알 수 있죠. 스니츠키의 말에도 나오지만 당시 여러 여건상 시즌중에 비행기를 이용하는 건 사치였고, 플레이오프나 파이널 정도 가야 이용하는 수준. 그것도 당시 비행기술로선 기상 조건이 조금만 나쁘면 비행기를 이용할 수 없는 시대였죠. 그래서, 패자의 저 변명도 완전히 변명이라고 볼 수는 없겠죠.
젤 웃긴 건... 상여금....
무슨 동네 마트 행사도 아니고, 애들 체육대회도 아니고... MVP라 할 수 있는(당시엔 MVP 제도가 없었습니다.) 자네티에게 TV세트(놀랍지요)를 주었고, 나머지에겐 필기구 세트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