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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의 회상
작성자 : 정 용 화
(1978년 6월 29일 전남대학교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 주도 혐의, 긴급조치 9호위반, 징역2년6월과 자격정지 2년6월을 선고받고, 1년쯤 복역 뒤 징역형 집행정지로 1979 년 7월17일 석방됨, 그 후 1980년 5·18때에도 게엄령 위반과 소요죄 등으로 복역했 고, 윤한봉 선배의 밀항을 주도했으며, 80년대 중후반과 90년대 초반까지 5.18의 진 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및 명예회복 운동을 이끌었음)
이 글은 70년대에 대하여 특별히 할 말은 없지만, 작성자 정용화 개인의 1970년대 활동을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들을 알리고자 한다. 실제 자료들이 전무한 상태에서 30여년이 지난 일들을 기억에 의존해서 서술한 내용인 만큼 시간과 장소 및 이름 등에 대한 정확성에 있어서는 좀 더 관련자들의 진술이 보강되어져야 함은 물론이고, 기억의 편린들을 모아 개인사 및 민주화 운동에 관련된 내용들이 복원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간절하다.
1970년 3월 광주일고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정용화(통합48회)는 이미 그해 2월 고교 1년 선배인 오국영(일고 통합47회:나중에 학생회장에 피선됨), 이훈우(47회:졸업 뒤 전남대학교 상대에 재학하다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수감 됨, 현재 한겨레신문사와 관련된 회사에 재직) 등에 의해 광주일고 교내 독서모임인 ‘향토반’에 가입하여 활동하게 된다. 그 모임에서 제일먼저 독서발표를 위해 읽은 책이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많은 토론을 거치면서 역사에 대한 눈을 뜨게 되고, 대학에 가서 ‘역사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마음을 키우게 된다. 그다음 앙드레지드의 “전원교향악”, 헤르만헤세의 “싣달타”, E.H.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 등을 읽어가면서, 철학과 종교, 역사와 민족, 그리고 교육에 대한 열정을 불태워 나가기 시작했다.
1970년 5월, 당시 장준하 선생이 발행인인 “사상계”에 김지하 시인의 “오적”이라는 풍자담시가 실리면서 세상이 크게 술렁이고 있다는 것을 선배들을 통해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정용화는 모임의 선배인 고유문(36회), 고현석(36회:곡성군수), 강삼석(39회:전 전남대학병원장), 김민영(39회:법안법사), 조영호(39회:전 한겨레신문), 박경호(40회:유풍양행), 문평기(41회), 김희택(44회:민주평통 사무처장), 김영신(44회:사업), 박영규(44회:광주지방국세청), 이양현(44회:송촌건설), 정상용(44회:전 국회의원), 주석중(44회:전남대 교수), 고아석(45회), 김도연(45회), 김태수(45회:세무사무소), 김태승(46회:아주대 교수), 최 철(46회:사업), 권오걸(47회:사업), 송종현(47회:사업), 양태열(47회:사업), 오광호(47회:충북대 교수), 이길동(47회:고인) 등 써클의 많은 선배들에 의해 세칭 ‘의식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그 중 기억에 남는 선배는 김민영(39회) 선배와 김태승(46회)선배의 역사와 철학 등에 관한 이야기가 지금도 귀에 생생하며, 주석중(44회)선배가 1971년 여름(?)인가에 가르쳐준 노래, 존바이에즈의 “승리는 우리에게(We Shall Overcome!)”라는 곡과 가사는 그 여름 이래 지금까지도 웅얼웅얼 중얼중얼 읊조리며 살아오고 있다.
광주일고 ‘향토반’은 1960년 4·19이후 거세게 불어 닥친 농촌연구 활동(내가 붙인 명칭으로 ‘신 상록수운동’)에 부응코자 통합38회 백이호, 양정화, 이재형 선배 등을 주축으로 36회 선배들을 불러들이고, 학업성적도 우수하면서도 학생회 활동에 열심인 학생들을 끌어들여 광주일고 교내 써클로 태동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모임은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에 며칠간씩을 농촌연구 및 봉사활동으로 할애하여 세상에 대한 자신들의 인식체계를 확립해 나갔으며, 방학 이외의 학기 중에는 매주 토요일 오후, 학교에서 독서발표와 토론으로 사회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혀 나갔다. 당시 ‘향토반’은 ‘영어회화반’, ‘문예반’ 등과 같이 1주일에 한번 있는 공식적인 특별활동 부서로 인정되어 있었다.
고교시절 내가 직접 지어 웅얼거렸던 시(시조?) 한 수.
<향 토 (鄕 土)>
꽃 동네 구름 동네 많기도 허다마는
그 중의 으뜸(第一)은야 너와 나 사는 이 땅,
아! 이 땅, 아니 지키면 남음(存在)이 살았을까!
1971년 4월 17일 토요일 오후, 이날도 ‘향토반’은 독서발표를 위해 수업이 끝난 뒤 6~7명이 모여 모임을 갖고 있었는데, 당시 광주일고 학생과장인 김국원(국어;문법) 선생을 비롯한 학생과의 교사 5~6명이 모임장소를 급습해 양태열, 오광호, 권오걸, 정용화 등을 교무실로 끌고 가 안 죽을 만큼 두들겨 팼다. 교사들은 시계를 풀고, “야, 빨갱이같은 놈들아! 너희들 배후가 누구야!”라고 소리치며 다짜고짜 주먹질과 발길질로 학생들을 두들겨 팼으며, 갖은 욕설로 학생들을 윽박질렀다. 어안이 벙벙한 학생들은 별 대꾸도 못하고 흠씬 두들겨 맞은 뒤에야 눈자위 등이 퉁퉁 부은 상태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두들겨 맞은 이유는 간단했다. “앞으로 불온한 독서모임을 해체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1주일에 한번 있는 특별활동 시간에서도 ‘향토반’은 제외시킨다는 것이었다. 여하튼 청천벽력이었다. 두들겨 맞은 것은 사제지간에 그럴 수 있다손 치더라도, “......빨갱이......”운운과 “......불온한......”은 어찌된 영문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향토반’ 출신의 선배들이 대학 진학 이후에도 학생운동 등에 관여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후일에야 알 수는 있었지만, 그래도 당시 고교 2학년인 정용화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사건이후 나는 조금은 멍청해질 수밖에 없었고, “도대체 이놈의 세상이 어찌된 판이냐?”는 생각에 머리를 쥐어짜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향토반’은 공식 특별활동 시간에서 제외되었고, 모임 이름을 선배들이 애칭으로 불러온 “광랑(光郞)”으로 바꾸기로 하고, 스스로를 ‘광랑도(光郞徒)’라 불렀다.
사건이 난지 일주일만인 1971년 4월 24일 토요일, 제7대 대통령후보인 김대중씨의 유세가 있어 참석했다. 광주 공설운동장(지금의 무등경기장)이었던가? 장소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나의 일기 메모에는 “우리 학생들은 현실에 대한 인식으로써만 만족해야 하는 것인가? 비판을 가하거나 수정안을 내놓을 수 없는 학생의 입장이라는 것이 안타깝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조용히 현실을 통찰할 뿐이다.”라고 적혀있다. 그해 7월 1일(목요일), 삼선개헌과 부정선거의 후유증으로 얼룩진 정국 속에서 박정희씨가 제7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광랑’은 1971년 여름방학에도 예전과 다름없이 3일간에 걸쳐 연탄장사, 수박장사, 고물장사 등으로 경비를 모아 3박4일 동안 ‘농촌연구 및 봉사활동’을 다녀왔으며, 학교 밖에서 선배들과 함께 독서발표 및 토론활동을 계속했다. 1971년 9월 15일 수요일 방과후, ‘광랑’ 회원들은 광주 충장로 관음사로 모여 김민영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나의 일기메모에는 김민영 선배의 이야기 내용이 간략하게 “......국사학자가 배부른 세상이 와야 한다. 특히 실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외부의 것을 감쌀 수 있는 내부의 것을 확립하자......”고 쓰여 있다. 요즈음 ‘독도문제’를 보면서 그 당시 왜 김민영 선배가 “......국사학자들이 배불러야......”라고 운운했는지 알 듯도 하다.
1971년 11월 14일 일요일 오전 01시 25분, 광주MBC 라디오방송에 느닷없는 내용이 흘러 나온다. “...... 젊음의 폭발이 있으리라. 가슴에 못을 박으며......, 어느 소년이 김국원 선생과 함께 듣고파......” 무슨 노래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누군가 김국원 학생과장에게 ‘칼을 갈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나는 그 방송을 들으면서 괜한 흥분에 들떴다. 당시
나의 일기 메모에는 다음과 같은 시 같지도 않은 시가 적혀 있다.
<상 실 2>
순간적이었다.
소음이 끊어졌다.
소리를 잃어버린 것이다.
눈을 감는다.
삶에 저항하여
고요를 쟁취하는 것이다.
캄캄하다.
마음이 찢어진다.
님의 얼굴이 찢어진다.
고요하다.
발악은 또다시 고요를 부순다.
온누리가 흐트러지고
폭소가 깨어진다.
아마도 학생과장 김국원 선생에게 구타를 당할 때 멍한 순간을, 그리고 귀에 이상이 생겨 청력이 현저하게 떨어진 것을 감지하면서 감정이 복받쳐서 썼던 메모가 아닌가 생각된다.
1972년 6월 21일 수요일 오후, 점심시간부터 7째 시간까지 학생회장인 이기상(48회)과 신중하게 학생과장 김국원에 대한 축출문제를 논의한 정용화는 당시 3학년으로서 학생회 총무부장을 맡고 있었는데, 그날 밤 1차 주동자 13명을 소집해 ‘민주적 교육풍토 조성과 폭력교사 축출을 위한 성토대회’를 준비하게 된다. 당시 성토대회 주동자는 이기상(당시 학생회장), 송용일(부회장:고인), 정용화(당시 총무부장, 성토대회 주모), 김기정, 김요왕, 김영채(현 교사), 김용구, 박성환, 신쌍식, 장병우(현 판사), 정태석(현 광주은행장), 조장현(현 언론인), 최동남(현 아시아나항공) 등이다.
정용화의 일기 메모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6월 22일 목요일 “점점 구체화되다. 머리 좀 쓰다. 김요왕, 조장현, 이기상과 나, 넷이서 기상 이 집에서 자다.”
6월 23일 금요일 “산수동 박성환의 집에 모이다. 진전이 있었다. ‘입시교육의 비대화와 전 인교육의 결핍’ 등의 내용으로 선언문과 격문 작성하다.”
6월 24일 토요일 “마지막 마무리. 월요일 날 ‘방공훈련’한다고 해서 실망이 크다. 비가 오기를 바라다.”
6월 25일 일요일 “1차주동자 13명과 후속주동자 15명 등 28명이 화정동 피정센타에 모여 서 명하다. 선언문(격문), 결의문 프린트 완성, 어깨가 뻐근하면서도 기쁘다. 녹 음기 2대 빌리고, 권대웅과 함께 학교 담을 넘어, 앰프시설 등을 밤늦게 아 무도 몰래 강당에 설치하다.”
6월 26일 월요일 “드디어 오늘이다. 전자계산기처럼 움직이는 주동자와 학생들. 그 함성! 그 무엇보다도 뿌듯했던 그 함성! 가슴이 막힌다.”
당시 광주일고 3학년 학생 6백여명은 6월 26일 월요일 오전 8시께부터 오후 6시께까지 강당을 점거한 채 ‘민주적 교육풍토 조성과 폭력교사 축출을 위한 성토대회’를 가졌다. 그 결과 당시 김해중 교장선생님과 김국원 학생과장이 전출되고, 주동자 13명이 모두 무기정학을 받았다. 정용화는 무기정학을 받은 뒤 당시 연대장을 맡고 있던 김영채와 지리산에 올랐다. 압록에서 1박을 하고 노고단의 숙영지에서 두 번째 밤을 새고 난 뒤 동이 터오는 새벽, 발아래 까린 운해를 바라보면서 모골이 송연하리만치 ‘자연에 대한 외경’을 몸서리치며 느꼈던 기억은 지금도 새롭다.
그로부터 약 4개월 뒤 정용화의 일기메모에는 아무 논평없이 10월 유신을 적어 놓았다. “......1972년 10월 17일 화요일 오후7시, 비상게엄 선포(2개월 시한부 게엄령). 1) 의회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 중지, 현행 헌법 일부 중지. 2) 중지된 헌법은 비상국무회의가 수행. 3) 비상국무회의는 10월 27일까지 헌법개정안을 공고하고 1개월 이내에 국민투표. 4) 연말이내 헌정질서 정상화. = 대통령 박정희 = <포고문 제1호> (1) 정치활동 목적의 옥내외 집회금지. (2) 언론, 출판 사전검열. (3) 각 대학 휴교. (4) 직장이탈 금지(유언비어 금지). (5) 영장없이 구속 등등. - 육군대장 노재현 - ......”
으스스하고 살벌한 판이 되었다. 유신체제을 구축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선배들과 만나 독서모임을 가졌으며, 시국에 관한 토론들을 경청했다. 그러나 머리도 뒤숭숭하고 공부도 엉망이 되었다. 1972년 하반기를 거의 고뇌 속에 허둥지둥 보내고,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나는 1973년을 재수하면서도 전남대학교 휴학생이라며 전남대학교를 들락거리면서 선배들과 어울렸고, 그 당시에 이미 ‘광랑’ 이외의 많은 선배들과 만나게 되었다. 조홍규(36회; 전 국회의원), 이홍범(40회;사업), 윤한봉(41회), 김병철(42회), 송정민(42회:현 전남대 교수), 김상윤(42회;사업), 윤보현(45회:현 교사), 최연석(47회:현 목사) 등 많은 선배들은 물론, 민청학련을 준비하던 윤강옥(동신고, 당시 전남대 사학과 재학중)선배와 연결되어 1974년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기억에 남는 선배로는 살벌하고 암울한 시대상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자고 ‘Simon & Garfunkel’의 “험한 세상 다리 되어(Bridge Over Troubled Water)”를 목청 높여 함께 부르면서 가르쳐 준 윤보현과 최연석 선배가 특히 뇌리에 남는다.
1973년 12월께와 1974년 1월, 2월, 3월은 그룹별로 거의 매일 만나면서 1974년 봄을 준비했는데, 나는 주로 광주 풍향동에 있는 윤강옥 선배의 집이나, 그 근처의 주막에서 윤강옥 선배와 만나, 서울과 광주의 돌아가는 준비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1974년 3월 전남대학교 사학과에 들어간 정용화는 거의 매일 선배들과의 접촉으로 민청학련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3월말인가 4월초에 윤강옥 선배에게 비통한 소식을 접하게 된다. “야, 용화야. 사전에 발각이 되어 모두들 잡혀가고 있다. 너도 얼른 튀어라!” 나는 바로 휴학계를 내고 주위 눈치를 살피며 집과 학교를 오가는 신세가 되었다. 민청학련 전남대학교 집회의 D데이가 4월 3일이었던가? 정용화는 학생들을 동원하려고 금호각(당시 전남대 문리대 교양과정부)에서 대기했으나, 끝내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이미 몇몇의 선배들이 연행된 상태였고, 당일 스쿨버스에서 유인물을 뿌리다 거의 연행된 터여서 계획했던 교내의 대규모 집회는 불발로 막을 내렸다.
친척집을 전전하며 숨어 지내던 나는 근질거리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1974년 6월, 육군에 입대했다. 입대한 뒤로도 뒤통수가 계속 근질거려 안절부절 못하고 군대생활을 했었다. 논산훈련소를 거쳐 배치된 부대는 ‘운명의 장난’처럼 1980년 5월 광주시민들에게 지독하게 굴었던 서울 거여동의 ‘3공수특전여단’이었다. 1975년 2월15일 민청학련 관련 선배들이 석방되고서야 뒤통수가 덜 근질거렸다. 휴가를 나와 광주에서 윤강옥 선배를 상면하고, “진술과정에서 너는 완전히 뺐다”는 윤선배의 말을 들으면서 매우 송구스러워 했었다. 1975년 8월쯤 정용화는 청와대로 파견근무를 나갔으며, 청와대 경비 및 대통령 노출경호를 담당하는 대통령경호실 66지역대 요원이 되었다. 청와대로 파견되면서 신원조회를 엄격히 하였는데, 당시 육사를 나와 현역군인이었던 형이 있었다는 것이 무난하게 통과시켜준 요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여하튼 청와대 근무를 하면서 외출과 외박을 비교적 많이 나올 수 있어 서울지역의 여러 선배들은 물론, 특히 민청학련으로 감옥에서 고초를 겪고 나온 광주일고 선배인 선경식(42회), 김희택, 나병식(44회), 문국주(47회), 이우회(47회), 최연석, 최권행(47회) 등의 선배들과 많이 어울리며 지냈다.
1976년 봄인가, 여름인가? ‘광랑’의 이양현, 정상용 선배 등이 청와대로 면회를 왔다. ‘독재자 ooo를 제거하자’는 제의를 했다. 골치가 매우 아파왔다. 휴가를 내어 광주에 내려가 김남주(42회), 김정길(44회), 이양현, 정상용 등의 선배들과 ‘계획의 비현실성과 실현 가능성의 희박함’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일단 그 계획은 보류됐다.
1977년 4월, 34개월만에 만기제대한 정용화는 곧바로 복학하지 않고, 김상윤(42회) 선배를 주축으로 하는 여러 스터디그룹과 어울리면서 이 강(광주고졸, 민청관련), 나상기(사레지오고졸, 민청관련), 박형선(45회, 민청관련), 이기승(46회, 민청관련), 유선규(47회, 민청관련), 조봉훈(순천고졸, 전남대 농대), 박현옥(전남여고졸, 전남대 영문과), 이세천(사레지오고졸), 노준현(50회, 전남대 공대: 고인), 문승훈(50회), 박몽구(50회), 신일섭(광주고졸, 전남대 사학과), 김선출(51회), 안길정(광주고졸, 전남대 영문과), 김윤기(51회) 등 선후배 제현들을 두루 만나게 되었고, 김남주(42회) 선배가 일어판으로 강독하는 “파리꼬뮨”팀에서 공부하다 급기야 당시 중앙정보부 전남지부에 끌려가 3일정도 심한 공갈과 협박에 시달리다 나왔다. 김남주 선배는 그 길로 도피해 1979년 가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으로 구속 수감될 때까지 숨어 지냈다.
1978년 3월에야 전남대학교를 복학한 정용화는 양강섭(광주고졸, 전남대 영문과)과 박관현(광주고졸, 전남대 법대, 1980년 전남대총학생회장: 고인)) 등과 어울리면서 ‘대학생들의 사회참여’에 대한 논란을 심하게 벌였고, 후배들과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모리스돕의 ‘자본주의의 어제와 오늘(영문판)’ 등의 텍스트를 읽어가면서 자연스럽게 후배들과의 공감대를 형성해 나갔다.
1978년 6월 27일 전남대학교 교수들을 주축으로 한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이 터지자, 대학 안팎에서 공부해 오던 선후배 제현들이 모두 총동원되어 노준현(50회, 전남대 공대), 정용화를 주축으로 6월 29일 전남대학교 중앙도서관 점거농성 및 광주시내 가두시위를 벌이는 등 7월 3일까지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거의 대부분의 주동학생들이 현장에서 연행되어 구속 수감되었으나, 나는 김좌윤(48회, 고인)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가며, 여수의 김영신 선배, 부산의 송근석씨(공수부대에서 만난 상급자), 서울의 김현준(48회, 현 교사), 김삼수(광주고졸, 현 대학교수) 등 친구들의 도움으로 도피생활에 들어갔으나, 약 1개월 15일 만인 8월 15일 서울 비원 뒤 원서동의 김정기(48회), 김규성(48회)의 자취방에서 체포되어 구속 수감된 후, 각각 2년6개월의 징역형과 자격정지를 받고 복역하게 되었다.
1979년 7월 17일, 1년여 만에 집행면제로 석방된 나는 자연스럽게 윤한봉, 김상윤, 김희택 선배 등과 함께 청년사회운동에 뛰어들게 되었고, 부마항쟁과 10.26 이후 ‘전남민주청년협의회’ 회장과 현대문화연구소장을 겸임하면서, 암울하고도 씁쓸한 1980년 ‘민주화의 봄’을 맞이하게 된다.
전남민주청년협의회는 민청학련 출신 선배들이 1975년 2월 15일 석방이후 ‘광주구속자협의회’를 결성해 활동해오다 긴급조치 9호위반 학생들이 양산되자, 1978년(?)께 전남민주청년협의회로 확대 개편한 것이며, 같은 시기에 서울에서는 조성우, 양관수 선배 등의 주도하에 ‘민주청년협의회’가 활동하고 있었다. 현대문화연구소는 1979년(?) 초반 전남민주청년협의회의 근거지로서 광주시 동구 장동 소재 연합빌딩 2층에 사무실을 두고, 서울과 광주의 정보교환과 여러 부문운동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문화운동의 태동과 지원을 위해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선배들은 농민운동에 이 강(광주고졸, 전남대 법대), 박형선(45회, 전남대 농대) 선배 등, 노동운동에 이양현 선배 등, 기독교청년운동에 나상기(사레지오졸, 민청학련출신), 최 철(46회, 전남대 농대) 선배 등, 학생운동 지도에 김상윤(42회, 녹두서점), 김정길 선배 등이 맡아 활동하고, 전체적인 연결을 위한 청년사회운동부문에 윤한봉 선배와 정용화, 임영희 등이 배치되어 활동하는 시스템을 구축했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어찌 그렇게 천방지축 뛰어다녔는지, 나 자신 스스로도 신통할 지경이다. 그게 정열이었는지, 열정이었는지, 또는 분노였는지, 도대체 모를 일이다. 그러나 단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상당히 ‘순진’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다. 그러면서도 ‘가슴과 마음’을 지니고, ‘인간주의(휴머니즘)’에 기초했었다는 것은 말하고 싶다. 결코 낭만적 휴머니스트만은 아니었노라고....... 그렇게 70년대를 보내고, 또 1980년대를 정신없이 보냈다.
시대상에 대한 좀 더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서술들은 전문적인 사람들에 의해 정리될 것이라 믿고, 그냥 개인적 경험들을 들춰내 보았다. 이제 굳이 할 말도 별로 없는 시점이라 생각했는데, 이런 기회가 주어져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여러 가지 계획하고 있는 일들이 잘 되기를 빌 뿐이다. - 2005년 4월 19일 정 용 화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