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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준 목사/ 순교 믿음으로-박요한 목사(6)
박도삼 장로, 흑산도와 여러 교회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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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삼은 1876년에 남도 땅 끝 화산(해남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잘 나가는 부자였다. 돛단배에 물건을 싣고 나서면 여러 섬을 돌고 해안 지방을 거쳐 여러 날 후에는 돈을 싣고 돌아왔다. 엽전을 머슴들이 지게로 옮길 정도였다. 완도 진도, 신안 그리고 멀리 경남 사천까지 왕래하며 사업을 했던 그를 들어 전도자로 세우신 하나님의 섭리는 놀라웠다.
그가 세상 사업으로 찾아다니며 만났던 사람들에게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하였다. 모세가 양치기로 40년을 살았던 그 시내산에 애굽에서 나온 하나님의 양무리를 불러내서 그곳에 진 치게 하셨던 것처럼. 세상의 성공자였던 그가 목포선교부 맹현리(맥컬리 H. McCallie) 선교사를 만나서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은 후에 인생살이가 달라졌다. 고향을 떠난 그는 맹현리 선교사를 만나 대한성서공회 권서가 되어 쪽복음을 짊어지고 농산어촌과 섬마을을 찾아다녔다.
맹현리 선교사는 도서지역 선교에 열심이었다. 성능이 좋은 보트를 타고 파도를 헤치며 다도해 크고 작은 섬들을 찾아다녔다. 육지와는 거의 왕래가 없는 먼 섬이나 주민이 얼마 되지 않는 작은 섬까지 찾아다녔다. 박도삼이 그의 조사로 동행했다. 서남해에 점점이 박힌 크고 작은 섬마다 교회가 세워져나갔다.
박도삼은 전도사 신분으로 1915년에 흑산도에 들어가 살면서 1915년 4월 15일 예리교회 개척예배를 드렸다. 지금은 그 교회가 섬지방의 대표적인 교회로 성장했다. 여객선이 흑산도에 들어서면 언덕 위에 우뚝 세워진 현대식 예배당이 흑산도예리교회이다. 연혁에 ‘흑산 예리1구에 박도삼 전도사 래임하여 흑산예리교회를 개척하다.’ 라고 기록되었다. 박도삼 전도사가 그곳에 시무할 때 낳은 큰 아들 박요한이 목사가 되었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1973년 제58회)을 역임했다. 박 목사님은 아버지가 겪었던 일화를 증언했다.
“도서지역 특유의 무속신앙 때문에 무당들과 충돌을 빚고 때로는 주민들에게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풍랑이 일면 목포로 돌아오지 못하고 어느 섬에나 들어가서 전도했습니다. 흑산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해에는 태풍으로 당산나무가 넘어져 길을 막고 있는데도 신목(神木)이라며 누가 감히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주민들이 모여서 의논한 끝에 교회에 당산나무 치우는 일을 부탁했습니다. 아버지는 교인들과 함께 당산나무를 톱으로 자르고 도끼질을 해서 화목으로 썼습니다. 그래도 교인들에게 아무 재앙이 없는 것을 본 주민들은 하나님이 큰 신이라며 놀라워했습니다.”
1925년까지 10년을 시무하면서 대둔도 다물도 상태도 하태도 그리고 우리 나라 가장 서쪽 섬이라는 가거도(소흑산도) 까지 건너다니며 전도했다.
예리교회를 사임하고는 도초도로 옮겨 신교리교회(도초중앙교회)를 개척하고 섬 내에 수다교회와 지남교회를 세웠다. 성덕학원을 세워 청소년들을 가르치고 신문화를 열어주었다. 교역자도 다수 배출되었는데 그들의 뜻을 모아 ‘박도삼장로 선교기념비’를 세웠다.
김종길 목사님은 목회신학원 논문에서 박도삼 장로가 임자, 암태, 압해, 자은, 팔금, 자라, 기좌, 장산, 우이, 비금, 도초, 죽도, 진도, 조도, 거차도, 흑산도, 대둔도, 다물도, 영산도, 홍도, 상태도, 하태도, 만재도, 가거도, 그리고 멀리 완도와 청산도까지도 복음을 전했다고 하는데 확실하고 자세한 문서자료를 찾을 수 없어서 아쉽다.
박요한 목사님의 아들 박정식 목사님은(섬기는교회) ‘내가 소유한 복음이 내게 오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어떤 그리스도인의 헌신과 희생이 드려졌을까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가문의 오랜 내력이 들춰지면서 커다란 충격과 감동이 마음을 뒤흔들었다.’고 말한다.
남도 땅에 복음의 씨를 뿌린 박도삼 장로, 어려운 시대에 한국 교회의 십자가를 짊어졌던 박요한 목사, 그리고 이 시대 ‘섬김과 나눔의’ 교회를 일구어가는 박정식 목사로 이어지는 3대신앙의 가문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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