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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의 아들이자 경주김씨 입도조인 김검용의 7세손인 김만일(1550-1632)은 의귀리만이 아니라 제주의
경주김씨 가문을 증흥시켜 후손들의 추앙을 받고 있으며 많은 일화를 남겼다. 일찍 무과에 오른 김만일은
선조 15년(1582) 순천부에 있는 방답진 첨절제사가 되어 벼슬을 지내고 고향에 돌아온 뒤에는 목축 사업에
뜻을 두어 선대로부터 내려온 마축개량번식에 전념하는 등 생업에 힘썼다.
그 무렵 필마(匹馬)의 용역은 전마(戰馬)·체신(遞信) 뿐만 아니라 승마(乘馬) 등으로 국가적인 비중이컸으므로
그는 특히 육마(育馬)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게 됐다. 김만일의 이러한 노력은 날로 그 열매를 맺어 입도 후
침체 속에 빠져 있던 집안을 크게 일으키며 더욱 육마 사업이 번창하던 중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전란으로 말미암아 국력은 극도로 쇠약해 졌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 각지에서 굶어죽는 백성이 속출하는 등 국난의
여파는 엄청났다. 수축(獸畜)은 굶주린 백성에 포살(捕殺)되어 필마 등 운송수단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됐다.
이러한 참상을 딛고 조정에서는 전후복구와 민생구휼을 위해 마정(馬政)의 진흥을 도모하는데 전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사정과 마육에 성공한 김만일의 명성은 당시 사간원에서 올린 "전마충당이 막급한 바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제주에 가계만금의 당신 김만일이 있어 사마가 반식부지하여 기수 불지계산하므로 마필을
진상토록 하사이다."라는 계장에 잘 드러나 있다. 이에 조정에서는 마필 진상을 요청하게 됐고, 김만일이 조정의
요청을 받아들여 양마 5백필을 헌상한 것은 선조 33년(1600) 경자년의 일이었다. 조정에서는 그의 공적을 높이 사
초공으로 우대하여 그해에 선조가 직접 소견(召見)한 자리에서 가선대부(종2품) 오위도총부 도총관(정2품) 금위중질이라는 높은벼슬을 내렸다. 얼마 후 김만일은 자헌대부(정2품) 중추부지사(정2품)에 제수되고 광해군 13년(1621)에는 다시 자헌대부에 중작 되었으며 또 인조 6년(1628)에는 종1품 숭정대부를 제수하게 되어 제주출신으로 최대의 영예를 누리고 그 명성이 경향에 떨쳤다. 그가 83세로 천수를 마친 것은 인조 10년(1632) 10월이었다.
별세하기 전 김만일은 가문이 귀한 것을 뼈아프게 여겨 조정에 입도선조(김검용)의 유덕을 밝혀주도록 요청하여
훈련원군감을 추증하게 되었다. 별세후 그는 남원읍 의귀리 1773번지 '서위남 루'에 묻혔는데 조정에서는 의귀리
종묘에 봉사케 하였다.
그런데 김만일의 갑작스런 높은 관작 제수는 선조에서 광해군을 거쳐 인조조에 이르는 동안 경향의 토로들과
관리배들의 시기의 대상이 되어 시한부에서는 "김만일은 육마천승 가루만금의 해중구민에 불과한데 병부상등
위임막중한 총관직을 제수함은 부당하니 환수성명하고 김백미포로 상하심이 가하이다"하고 계하였으나 임금은
이를 무시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의 큰 아들 김대명은 수령을 제수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을 세워 보성군수(현지에 선정비가 있다 함)가
됐으며 둘째아들 김대성은 승당상이 되었다. 한편 효종 10년(1659)에 이르러 김만일의 큰 손자인 여와 아들 대길이
다시 양마 2백필을 나라에 바쳐 그 유덕을 이었다. 이때 목사 이증은 그 공로를 가리기 위하여 종문세습직으로
감목관직을 특설하여 주도록 조정에 품신하고 왕의 윤호를 얻어 상장감목관을 두게 되니 이것이 감목관의 시초가
되었고, 초대감목관에는 김대길이 임명되었다.
이후 이 관직은 경주김씨 종문에서 계승되어 오다가 숙종 28년(1703), 입도 11세손인 김진혁(金振赫)이 감목관
때에 그 직이 혁파되어 중단되었다. 그러나 숙종 43년(1717)에 이르러 13세손 김세태(金世兌)가 그 아우
세화(世華)를 서울로 보내어 수차 탄원하고 상소한 끝에 경종 원년(1721)에 다시 복구되어 감목관직은 20년 만에
환직되었다.
그후 고종 29년(1892)에 감목관으로 피선된 17세손 김경치(金暻治)가 재직시인 고종 32년(1895) 봄 종문(宗門)의
청원에 의하여 그 직제가 폐지되었다. 임기 5년인 감목관은 제주목사와 경주김씨 도종손(都宗孫) 및 시직관(視職官)
인의 공동 천거로 후게자를 선임한 후 조정에 품신하여 왕의 윤허를 얻게 되어 있었는데, 녹곡(綠穀)이 있었음이
분명하고 직급은 종삼품(從三品) 대우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와 같이 국난과 백성의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대대로 충효와 절의에 힘쓰니 조정에서도 이를 알고 그 공을 높이
여기어 1726년 영조임금으로 옷 1습(특사 표리 일습/요즘 말로 의관 의복 신발을 갖춘 관복 한 벌인 듯 )을 하사 받았다.
이에 사의(賜衣)를 받은 마을이라 하여 '의귀리(衣貴里)라는 마을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 전부터 역사 서적에서 의귀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그러나 의귀라는 뜻도 김만일 헌마공신이 임금에게 귀한 옷을 하사 받은 의미와 마을 이름이 통하는 바가 있어 좋다. 어떤이는 몽고인들이 대평원이라는 뜻으로 옷귀라고 불렀다고 하지만 몽고대사관에 확인한바 대평원이라는 뜻의 몽고어는 '으뜽/오르꿍'이라고 한는데 몽고인들이 살기 전부터 '옷귀‘라고 부르는 것을 몽고인들이 몽고식 발음으로 부른 것으로 본다.
마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경주김씨에서 행해지는 굿의 형식도 다른 가문과는 차이가 나는데, 이를테면 무당의
사설에 경주김씨 집안의 내력이 전부 설명되고, 다른 집안에서는 '큰대'를 한 개만 꽂는데 비해 경주김씨는 3죽을
세웠다고 한다.
의귀리가 이 지역의 중심지이며 마을의 세력이 컸음은 지금도 남원 2리를 '서옷귀(西衣貴)'라고 부르는 데서도 나타난다.
*의귀리의 위치
의귀리는 남원1리에서 북쪽으로 약 4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한남리(부등개), 북쪽으로는 수망리(물왓), 동쪽으로는 신흥2리(여우네)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중산간 마을이다.
넉시오름(해발146.2m/넋이오름,넋이봉,넋이악)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중심이되는 중앙동, 남쪽으로는 산하동, 동쪽으로는 월산동의 3개 산간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남원-수망을 잇는 도로를 중심으로 동쪽을 '동동네' 서쪽을 '서동네'로 나누기도 하며, 마을행사로 운동경기를 할때동-서로 나누어 경기를 하기도 한다.
마을 면적은 총894.9ha로 남원 총 면적의 4.9%에 해당하며, 과수원이 669ha, 임야가 147ha, 전이 8ha, 기타 70.9,ha 이다.
의귀리는 2개의 하천(의귀천,서중천)이 있는데 결구 '생이물"에서 만나 의귀천으로 합쳐져 태흥1리 앞 바다로 흘러들어가며 그 본류는 '의귀천'이라고 불린다. 수망리쪽에서 내려오는 의귀천은 중앙동과 월산동을 구분하는 하천으로 '개턴물'을 비롯하여 '선대기소' '박대기소' '창세미소' '돗물' '샛물' '신나물' 등의 못이 형성돼있는 한편 의귀교, 제2의귀교, 제3의귀교가 있다.
다른 하나의 하천은 서중천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다. 이하천은 마을 서쪽의 지명을 '섯내고림'이라고 부른다. 서중천의 본류인 한쪽은 남원2리로 흐르고 다른 한쪽이 의귀리를 통과하며 한남리에서 부터 산하동과 중앙동을 구분하며 흐르는 지류는 '섯내(西川)' 라고 부른다. 섯내에 제2의귀교가 있으며 '절물' '도릿물' '서신나물' '하니수' '엉물'등이 있다.
1609년 지금의 남원읍 지역이 정의현의 중면(中面)이 되자 그 사무소를 의귀리에 두게 되면서 부터 이 마을은
1925년 까지 줄곧 남원읍 지역의 소재지였다. 그러나 도제의 실시 이전에는 소재지로서의 기능은 그리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15년 도제의 실시로 이 지역이 제주도 서중면으로 개편되면서 의귀리가 동의리(東衣里)로
행정구역상의 명칭이 바뀌면서 면의 소재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1908년 제주경찰서를 설치, 경찰권을
장악했던 일제는 도제가 실시됨에 따라 전도 15개소의 경찰관 주재소를 두었는데 의귀리에도 주재소가 설치됐음은
이 마을이 남원읍 지역의 중심이었음을 잘 드러내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1917년 해안 마을을 중심으로 일주도로가 뚫리면서 도 전역이 일주도로를 위주로 교통체제가 개편됨에
따라 1925년 면사무소가 남원리로 이전되었으며, 마을 이름은 의귀리로 환원되었다. 일주도로의 개통과 더불어
의귀리 등을 통과하던 구관도(舊官道)는 그 기능이 점차 상실되고 신작로가 활기를 띠면서 면소재지도
신작로변으로 이동되었던 것이다.
서중면 당시 의귀리가 면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현재 중앙동의 버스정류소 네거리에서 제3의귀교(개턴물) 까지
('장판거리'라 부름)에 면사무소를 중심으로 5일장이 서기도 했다. 이 장에는 육지인도 보이곤 했다는데 술, 초신,
초석, 초기, 물외장사들이 5일에 한번씩 몰려들었다 한다. 면사무소가 1925년 남원리에 이주하게 되자 장이
소멸되었다.
해방 후 의귀리는 4.3사건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제주의 여러 마을 중에서도 특히 그 피해를 많이 입은 마을로
손꼽히고 있다. 4.3 사건 후 7개월 동안은 마을에 단 한사람도 살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의 의귀리는 4.3사건 후
재건된 마을의 형태로 그 이전의 모습은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4.3 사건 때 모든 건물이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마을이 재건된 이후 의귀리는 조, 보리 등을 비롯, 60∼70년대에는 고구마, 무말랭이, 유채 등의 특용작물도 많이
재배해 오다가 60년대 말부터 몇몇집에서 감귤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마을의 모든 농토가 과수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감귤재배가 잘 되어 소득을 증대시켰는데, 제주지역에서의 농가 소득수준이 가장 높은 남원읍
중에서도 부촌으로 손꼽히고 있다.
마을의 유적으로는 '향사터'등이 있으나 4.3사건 등의 영향으로 그 흔적이 거의 없다. 향사(鄕舍)는 원래 안댁
(경주김씨 종손집)이었는데 목재는 느티나무와 소나무였고 처마는 기와, 지붕은 초가로 된 5칸집이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는 주재소로 이용되었으며, 일본인 부장이 가족과 함께 기거했다고 한다. 1927년경 주재소가 남원리로
내려가게 되자 마을에서는 지붕을 기와로 올렸다. '신성사숙'이라는 공부방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4.3사건이
일어나자 이 마을에서 가장 먼저 소개되어, 지금은 전혀 그 흔적이 없다.
1948년 4 ·3사건의 상처는 제주도의 어느 곳에나 골 깊이 패어 있지만 이번에 우리가 찾은 의귀리는 그 깊이가
매우 깊었다.
의귀리는 한동안 면 소재지였기 때문에 이 지역문화, 산업의 중심지였다. 또한 마을 사람들이 일본 유학을 많이
다녀와 개화사상 및 평등의식과 민족의식을 갖추어 의식수준이 진보적이었다. 당시 유학생들을 포함한 상당수의
지식인들이 4 ·3사건 당시 좌익에 동조하였다고 한다. 해방 후 인민위원회의 활동이 있었는데 야간모임을 가지면서
조직적으로 활동했다.
마을 중심부에 있는 넉시오름 정상에 마을 사람들이 대나무 깃발을 만들어서 세우고 내림으로서 경찰과 토벌대
병력이 이동하는 방향을 표시하곤 했다.
1948년 5월 10일, 의귀초등학교에서는 군인 12명과 남원지서장이 직접 감시하는 가운데 5 ·10선거가 치뤄졌는데
마을 청년 7명이 투표를 거부하고 산으로 올라갔다. 이들은 후에 지서습격의 주범으로 몰린다.
토벌이 본격화되면서 지금의 의귀초등학교에는 당시 제2연대 1대대 2중대(중대장:설재련)가 주둔했다. 학교주변에 4개의 초소를 세우고 옥상에는 기관포를 설치했으며 주위에는 모래가마니로 바리케이트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들은 매일 '폭도를
소탕하러 간다'고 오후 6∼7시에 출발하였는데, 어느 날 토벌대는 거짓정보를 흘려 유격대를 유인했다. 군인들이 토벌을 위해 학교를 나간다고 거짓정보를 흘리자, 그 정보를 접한 무장대들은 학교를 습격했다. 이날 죽은 군인은 4명(일등상사:문석춘, 일등중사:이범팔, 이등중사:안성혁,임찬수)이 전사한 반면 무장대는 훨씬 더 큰 손실(51명사망)을 입었다. 그러나 무장대의 피해정도는 80여명 정도로 알려지고 있으나, 그 부상자와 사망자가 동료들에 의해 산으로 이송된 경우가 많아 정확한 피해 상황을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무장대가 후퇴한 후 군인들은 무장대에게 자신들의 토벌작전 정보를 제공해줬다는 혐의로 마을 사람들 20∼30여명을 총살하였다. 이들은 남원으로 이송할 예정인 주민들이었다.
시신은 한 곳에 가매장했었는데 수 개월이 지난 후에야 가족들이 찾아보게 되었다. 그러나 시신은 누구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되어 있었다. 몸에 신표가 있는 시신들은 가족들이 찾아갔으나 나머지 30여구의 시신들은 지금의
제3의귀료(개탄물)에서 동쪽으로 100미터 쯤 떨어진 곳에 합장을 했으며 그후 2002년 6월 부터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모으고 관계기관에 간청한 끝에 수망리 893번지 '신산모루'에 새 묘역 부지 5722㎡를 마련해 2003년 9월 20일 안장했다.
그 미분(현의합장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 여기에 의로운 영혼들이 고이 잠드시도다. 삼십팔년간에 걸친 일제통치의 질곡속에서 해방된 조국산천,
그러나 사상대립과 좌우충돌로 빚어지는 갖가지 비극들. 1948년 4월 3일 4 ·3사건은 본도 전역을 휩쓸었고, 이 처참한 와중에서도 일편단심 초상전래의 고장을 지키다 산화하신 아, 갸륵하신 그대 이름들이여!
의귀리, 오승규(吳承閨. 당 65세. 남) 12월 14일 졸(卒), 고창숙(高昌淑. 당 62세. 여) 12월 14일 졸(卒), 양기필
(梁沂弼. 당 52세. 남) 12월 12일 졸(卒), 김윤생(金允生. 당 50세. 남) 12월 12일 졸(卒), 고경평(高景平. 48세. 여)
12월 14일 졸(卒), 김일석(金一石. 상 14세. 남) 12월 14일 졸(卒), 양기홍(梁基鶴. 당 48세. 남) 12월 14일 졸(卒),
양을령(梁乙玲. 당 14세, 남) 12월 14일 졸(卒), 양기원(梁基元. 당 34세. 남) 12월 12일 졸(卒), 수망리 김애옥(金愛玉.
당 66세. 여) 12월 14일 졸(卒), 김만홍(金萬鳳. 당 37세. 남) 12월 14일 졸(卒), 강매전(姜梅田. 당 36세. 여) 12월 14일
졸(卒).
이제 후손들이 효성 모아 의비(義碑)를 세우고 유덕(遺德)을 기리며 명복을 비옵나니, 고이 잠드소서. 1983년 계해(癸亥) 춘(春), 문학박사 김인호(金仁顥) 글, 청석(靑石) 변영탁(邊榮卓) 서(書)』
의귀리의 4 ·3사건의 이야기는 문학작품에서도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현길언의 [깊은 적막의 끝(1989)]과
고시홍의 [유령들의 친목회(1989)]는 그 배경 자체가 의귀리이며, 한림화의 [한라산의 노을(1991)]에도
의귀리에서의 4 ·3 참상이 문학적으로 형상화 되었을 정도로 이 마을의 4 ·3 피해는 대단히 컸던 것이다.
인구와 가구수 및 마을 활동기구
의귀리 가구수는 439가구 1095명으로 남자 563명, 여자 532명이다.
의귀리는 노인회 1, 청년회 1, 부녀회 1, 생활개선회 1, 동호인회 5개가 있어 마을의 단합과 활발한 지역활동을 하고 있다.
의귀리는 단일행정단위로 감귤을 가장 많이 재배하고 있는 마을로 유명하다.
기독교
의귀리의 종교로는 기독교가 있는데 이 마을에 전파된 것은 40여년 되며 제주도의 다른
마을에 비해 신도수가 많은 편이다.
1) 명칭 : 대한예수교 장로회 의귀교회
2) 종파 : 예수교 장로회
3) 위치 : 남제주군 남원읍 의귀리 1482-14
4) 연혁 : 수망리로 출가했던 한 할머니가 이곳으로 찾아와 1951년 어린 아이들을 모아놓고,
성경구락부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교육의 혜택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때라서
120여명의 어린 아이들이 모여들었고, 성경공부와 글자공부를 병행하여 교육시켰다.
이후 1953년 개인 주택에서 의귀교회가 설립되었으며, 1968년에 현재 건물을 지어
옮겨왔다.
불교
불교를 믿는 가정도 많이 있다. 과거에는 의귀리에는 절이 없어서 사람들이 이웃 신흥리나
멀리 서귀포의 절에 다니지만 2013년 부처님 오신날 낙성식을 한 남선사가 있어 마을사람들이 절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남선사는 28평형 일반 목구조로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인법당의 형식으로 지어진 조그만 암자이다. 2013년 부처님 오신날에 낙성식을 했으며 2014년 11월 1일 개원했다. 종파는 대한불교조계종이며 소속교구는 24교구 선운사 말사다. 입구에는 큰 팽나무가 있어 아름다우며, 법당에는 초전법륜상의 본존불과 좌보처 문수보살상과 우보처 보현보살상을 모셨다. 후면에는 탱화대신 150분의 관세음보살상을 원불로 모셨으며, 벽면에는 옛 기와에 부처님의 일생에 관한 내용을 조각한 작품을 모셔 겔러리 같은 분위기가 나게 했다.
2016년 6평형 사모정의 춘다원을 지어 차를 마시며 신행상담화는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2021년 17평형 강당을 짓고, 연경문화예술원을 설립하여 제주 공연정보 최대 어플 ‘플레이 제주’에 복합문화시설로 등록하고 '영화평론가와 함께하는 마을영화'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매월 1회 무료영화를 상영한다.
2023년 마당에 지압보도를 만들고 탑돌이 덤벙석을 놓고 가운데 잔디를 심어 맨발로 걷는게 하는 등, 편안한 느낌이 들게 했다.
향적전 앞 마애불에 하이파이브 수인과 가슴에 와이파이죤을 넣었다. 누구나 부처님의 손에 자기의 손을 대고 와이파이죤에 이마를 대고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닷사(올바르게 수행하여 모든 번뇌 벗어나서 인간 천상 스승으로 하늘같이 존귀하신 부처님께 예배합니다)”라는 문구를 따라 예배 할 수 있도록 새겨 놓아 인연의 소중함을 느끼게 했다.
도량 한 가운데 5층 석탑을 세우고 이름을 “사라나탑”이라고 지었다. “사라나”란 빠알리어로 의지하다 귀의하다란 의미로 주로 삼보(부처님/가르침/승가)에 귀의(의지)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그 앞에 마구니를 항복 받는 모습(수하항마상)의 부처님을 모셨다.
남선사의 이름은 남방국가(미얀마/태국)에서 하는 수행을 남선(南禪/위빠사나,사마타)이라 하며, 남원의 남(南)과 전북 고창 선운사(禪雲寺)의 선(禪)을 붙여 남선사(南禪寺)라 이름짓고 법당의 현판은 부처님께서 거주하셨던 방의 이름을 따 향적전(깐다꾸띠)이라 했다.
1)명칭 : 대한불교 조계종 남선사
2)위치 : 의귀로177(의귀리1655)
3)연혁 : 2013년 부처님오신날 낙성, 2014년 11월 1일 개원
조왕제
조왕제는 단독으로 지내기보다는 문전제, 토신제와 더불어 지낸다. 제보자는 객토제(집을 지을 때 地神에게 정성
드리는 것), 토신제와 비교해 가며 자신이 지내는 조왕제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제보자 : 김복순 :(女,67세))
1) 시기 : 음력 정월에 자신의 사주는 물론 가족들의 사주를 고려하여 스님이나 심방이 택일한다.
2) 정성 : 보통 3일 정성을 한다. 객토제의 경우는 7일 정성으로 한다.
3) 금기 : 3일 정성 기간 동안 금줄을 쳐서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시키고 제를 지내는 주체도 목욕재계하여 외출을
삼간다. 음식으로는 궂은 것(모든 육류,어류)을 먹지 않으며 마을에 장사가 있거나 출산 등이 있으면 새로
택일을 하여 제를 지낸다. 동네에 출산이 있은 것은 눈으로 보지 않으면 되지만, 자신의 가정에 출산이 있을
경우는 한달 이상의 정성을 드려야 한다. 부부의 잠자리 역시 금기시 되는데, 그래서 젊은 부부들은 이 제를
지내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도 한다.
4) 제물 : 당일 제물을 준비하는 것을 금하므로 제물은 제를 지내기 전에 미리 준비하여 둔다.
① 보통 약간의 떡을 준비한다.
② 메 : 메는 네가지 종류(稻, 梁, 黍, 稷)를 준비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지금은 그 네가지를 전부 준비하기가
번거로우므로 쌀을 대신한다.
③ 채소 : 채소는 고사리, 미나리, 무, 콩나물 등을 준비하여 세 그릇 올린다.
④ 과류 : 과일은 전에는 오과(대추, 밤, 곶감, 댕유지, 은행)를 준비했는데 지금은 보편적으로 칠과(대추, 밤, 명태,
은행, 사과, 배, 귤)을 준비하여 제를 지낸다.
5) 형식(과정) : 문전에서 모든 제물을 자쳐놓고 문전체를 지내며 천지신주팔암 경을 읽는다. 그 다음으로는 조왕(부엌)
에 가서 솥 한가운데 밥주걱을 꽂고 나머지 모든 제물을 차려놓고 제를 지내고, 마지막으로 마루에서
메 3 그릇, 술 3잔 등의 형식을 갖추어 가족별로 신에게 축원하는 제를 지내고 난 후에는 모든 음식물을
조금씩 덜어서 코시의 형태로 집안의 정결한 곳에 갖다 버린다. 전에는 아궁이에 버렸다고 한다.
산신제
1) 시기 : 음력 정월에 가족들의 사주를 고려하여 심방이 택일한다.
2) 정성 : 일주일 내지 3일 정성을 한다. 이 기간 동안에 금줄을 치게 되는데 금줄에는 밀감나무 이파리를 끼워 넣는다.
정성은 목욕재계하고 부정한 음식(모든 고기 종류)을 먹지 않는다.
3) 금기 : 동네에 상이 났거나 출산이 있을 경우, 피를 보았을 때, 동물의 시체를 보았을 때, 가족 중에 누구라도 피를
흘렸을 때 새로 날로 본다.
4) 장소 : 산(깨끗한 장소로 심방이 지정하는 곳)
5) 시간 : 아침 일찍 남이 안볼 때 제를 지낸다.
6) 주관 : 심방
7) 음복 : 제가 끝나면 하는데 남은 음식은 버리고 온다. 제를 지냈던 그릇도 밭에 3일 정도 터진 방향에 놓아두었다가
가져온다.
8) 예조 : 말울음 소리가 들리면 길하다는 말이 있기는 하나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9) 제를 지내러 갈 때나 제를 지내고 돌아올 때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하며, 혹 길에서 사람과 마주쳤을 경우도
고개를 숙이고 지나간다.
옷귀 설촌과 호종단
중국 명나라의 복주땅 출신인 풍수지리사 호종단이 임금의 명을 받고 제주의 혈(穴)을 떠 출중한 인물의 탄생을 원천봉쇄하려고 제주섬에 들어와 맥을 더듬어 대혈 중의 하나인 반득전 정통에다 압침하고 나서 입도맥에도 여지없이 압침을 하고는 바닷가로 이어진 맥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그 때 수망리에 사는 경주 김씨 집안 노인 한 분이 선천을 여의고는 복중이라 상복차림으로 목이버섯을 따러 반득전 숲으로 들어가 이리저리 살피는데 굵은 철침이 땅에 깊숙히 꽂혀 있어 무심코 뽑아 버렸다. 분명히 대혈을 누르면서 내려오는데도 전혀 맥이 죽지 않아 이상하게 여긴 호종단은 거슬러 올라갔다. 역시 압침이 뽑혀있고 웬 상복차림의 노인만이 무심하게 목이버섯을 따고 있었다. 혹시 침을
뽑았느냐고 물었더니 아무리 말못하는 땅이기로서니 생땅에 침을 꽂아놓은게 좋아보이지 않아 뽑아 버렸노라고 노인은 대답했다. 호종단은 그의 인상을 살펴보니 천복을 타고 났던 것이다. 그는 노인에게 자신이 한일이며 노인이 무심코 뽑아 버린 압침이 하늘의 뜻임을 깨달았다면서 그곳을 제혈해줄 것이니 선친의 묘를 쓰라고 했다. 그러면 당대에 발목하여 자손번창하고 영화를 얻어 거부가 되리라고 하면서 노인이 천복을 타고 난 덕분이라고 한 후, 노인에게 발에 힘을 주어 지맥을 밟고 있으라고 했다. 노인이 호종단이 시킨대로 밟고 있으려니 발받이 드겁고 진동이 워낙 심하여 그만 발을 조금 움직이니 땅속에서 비둘기 한 쌍이 솟구쳐 하늘 위로 날아올라 한 마리는 서쪽으로 날아가고 한 마리는 남쪽으로 날아갔다. 이에 호종단이 말하기를, 어쩔수 없잖느냐 남쪽으로 날아간 비둘기가 앉은
자리에 집을 지어 살라, 이 묘터는 비둘기가 날아가 버린 했어도 아직도 혈맥이 뜨뜻하니 기가 살아있다면서 예정대로 선친의 묘를 쓰라고 했다. 그 후 노인의 아들이 조선조 선조 33년(서기 1600년)에 남쪽으로 날아간 비둘기가 앉은 수망리 남쪽, 바로 옷귀에 집을 짓고 이주하니 마을의 설촌의 시초가 되었는데 그가 바로 김만일의 아버지인'김 리홍'이다. 그 당시는 숲이 우거지고 가시덤불만이뒤덮인 황무지였는데 이주해 와 개간을 하자마자 농사가 잘되어 재산이 불어났다. 그의 아들이 바로 임진왜란 직후 국난을 구하고자 양마 500필을 헌납하여 헌마공신 김만일이다. 그의 아들 '대길' 할아버지는 200필을, 손자인' 려'할아버지는 208필과 소 20두씩을 헌납하였으며 그 후손들도 수십필씩 계속 양마를 헌납하였다. 또한 '대길'할아버지의 손자인 '우일'은 빈민에게 양곡 140석을 나누어 주고, 현손인 '남헌' 할아버지는1724년 기근이 들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비축미 1,340석을 풀어 사람을 구출하였다. 감목관벼슬을 지낸 김만일의 후손들은 국가에 큰 변이 있을 때마다 자신의 재산을 털어 나라에 충성하고 지역민을 돌보니 그의 저손들도 대대로 그렇게 하였다. 김만일 이후 무려 12대에 걸쳐 83명이 감목관직을 세습했는데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충성을 다하였다.
참고 문헌
*김남헌에게 특사표리일습
4품이상 관직의 사령장, 찰방-조선조 때 각 도의 역마에 관계되는 일을 맡아보던 외관문관, 종 6푼의 하위직 (벅사찰방 김남헌에게 유시하노라. 이제 전라도 삼사 김조택이 올린 징계에, 그대는 마정을 진정시는 데 힘썼고 봉급을 절감하여 그 돈으로 남 몰래 구호양곡을 비축한 것이 1,340여석이나 되다니 참으로 가상할 일이로다. 이에 특별히 "표리일습"을 내리노니 수령하기를 유고하노라. - 옹정 4년(1726) 8월 28일(영조2년, 조선조 후기)
*의귀명은 탐라순력도 표기에 尾衣貴川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의귀천이란 성판악에서 발원한 송목당천이 흘러내려 마지막에는 의귀천(옷깃내)이 된다는 것과 여기서도 '표리일습'하사한 1726년은 말할 것도 없고 1702년 전에 이미 의귀라고 표기하는 지명이 있음.
*이원조 '탐라지초본'제 4권 정의권치연혁 산천조 및 도로원 참부조에 의귀표기- 수망천은 지금의 남원읍 수망리의 옛 이름 '무라' 정의현청에서 서쪽으로 30리에 있다 하였고, 같은 거리상에 의귀가 있고 그 곳에 원참 곧 출장감원이 숙박하던 '여관'이 있어서 '의귀원/義貴院이라 표기한 것도 있음.
*김상헌의 남사록에 오이리/五耳里라 표기 - 1601년 제주에서 일어난 길운절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김상헌을 안무어사로 임명하여8월 1일에 파견하였다. 10일 서울을 떠나 21일 해남을 출발하여 애월 방호소로 상륙하였다. 이듬해 1월24일 조천관을 통해 제주를 떠날 때까지 제주도를 살펴보면서 임금의 뜻을 전하며 보고 느낀 것을 일기 형식으로 쓴 자료가 남사록이며,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 김성구의 남천록에 의귀 표기 - 김성구의 남천록은 1679년(숙종 5년) 6월에 허목의 대차사건에 연루되어 정의현감으로 좌천되고 난 후 3월 12일부터 1679년 1월까지 현감으로 있으면서 군사, 진상, 형승 등에 대한 것을 기록한 것으로 옷기를 의귀로 표기한 것으로 본다.
*김봉옥님의 번역필사본에서도 - 의귀원/衣貴院에서 점심을 먹고 달이 뜬 뒤에 정의현청으로 되돌아 왔다. 현에서 의귀까지는 30리이며, 의귀에서 서포까지는 40리가 된다는 것으로 보아 의귀리를 일컫는 단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1702년에 제작된 이형사의 한라장촉 탐라순력도에서도 옷기를 동의귀/東衣貴라고 표기하고 있다.
*1709년 이규성이 제작한 탐라지도병서에도 옷기를 동의귀/東衣貴라고 표기
*1750년 전국 군현 지도첩 해동지도 제7책 제주도에 옷기를 동의귀/東衣貴라 표기
*광무3년 5월 읍지와 같은 시기에 기록된 규장각 소장본 정의현지에도 옷기를 동의귀/東衣貴라고 표기하는 등 마을의 이름이 옷귀, 옥기, 의귀/義貴, 오이리/五耳里, 동의귀/東衣貴, 서위귀/西衣貴, 의귀/衣貴 라는 이름이 보인다.
포제
포제는 마을신에게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제사로 제관을 뽑아 3일간 합숙하며 제지내는 법을 교육하고 마지막 날에 제사를 실행하며 부녀회에서는 제관이 거주하는 제실에서 음식을 제관에게 제공는데 이런 모든 의식듥은 애향지심으로 행해졌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2-30년 전에 제의 지속성이 소멸되기 시작하고 새마을운동과 미신 타파 등의 국가시책에 흐름을 같이하여 지금은 행해지고 있지 않지만 다른 마을에서는 지금도 제관을 뽑아 제의식을 교육하고 마을
포제를 행하고 있다. 그런데 제가 없어지면서 포제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제고해 줄제보자를 찾는데 어려움이 있었으나 몇몇 어른들의 기억에 의지하여 그나마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다 (제보자 :김병천(男,81), 오봉남(男,76), 동수(男,57))
1. 명칭 : 포제(또는 마을제, 부락제)
2. 제신 : 포영지신
3. 제일 : 음력 정월 초순의 丁日과 亥日(해일) 중 하루를 택하여 子時에 제를 지낸다
4. 제장
① 명칭 : 포젯동산
② 위치 : 의귀리사무소에서 북쪽으로 약 700m 지점에 위치
포젯동산은 마을 주민들이 기원하던 성역이었으나 지금은 포제를 지내지 않음으로 해서 주위가 전부 밀감밭으로
변하였다. 따라서 포젯동산에서 포제를 지냈던 흔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5. 제의관리
① 회소집 : 음력 섣달 그믐에 鄕會(향회)를 열어 결정한다. 회소집은 주로 마을의 영댁으로 한다.
② 경비모금 : 마을에서 공동으로 모은다
6. 제관 : 제관은 모두 16제관이라고 했다. 다른 마을의 경우 보통 12제관으로 하고 있으나 위귀리에서는 제관이
16명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① 자격 : 그 마을에 거주하는 남성으로 60대를 전후한 사람이어야 한다.
② 선출 : 향회에서 성씨별 비율에 따라 골고루 선출한다. 의귀리는 오성(경주 김씨,광산김씨,오씨,양씨,고씨)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에 이들 유지가 모여 제관을 선출하고 해마다 돌아가면서 다른 사람을 뽑는다.
그러나 제관을 선출하는 향회는 3일간 열리기도 했는데, 향회가 이처럼 길어진 이유는 제관 선출에 따른 각
성씨별 이해관계 및 제반 결정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③ 제관의 종류
초헌관 : 첫째 헌관
아헌관 : 둘째 헌관
종헌관 : 셋째 헌관
집예 : 예를 주장하는 사람(사회자, 홀기를 읽음)
대축 :축문을 읽고 제를 집서함
알자 : 행제할 때 헌을관 인도하는 사람 贊者(찬자) (동찬, 서찬) : 執禮(집예)가 부르는 笏記에 보조 역할을 하는
사람 동찬이 「鞠躬拜(국궁배)」하면 절하고, 서찬이 「흥」하면 일어난다
典祀者(전사자) : 제물의 준비, 陳設(진설) 등 제물을 관리하는 사람 奉香(봉향), 奉盧(봉려), 奉爵(봉작),奠爵(전작),
司樽(사준) 등이 있다.
7. 입제 : 제일 3일전에 제관이 모이는 숙소에서 합숙한다. 이때 부락민들 거의 전부가 찾아가 본다.
여자인 경우는 식사 제공과 술 빚는 일 외에는 출입이 금지된다. 제관은 3일 동안 몸을 깨끗이 하고
부정(고기를 먹는다든가 피를 보는 것)이 생기지 않도록 한다. 그리고 동네에 초상이 났거나 부정한
일이 있으면 제를 연기한다.
8. 제물 : 제물은 모두 생으로 한다.
① 메는 도(도, 쌀) , 梁(기장), 조, 稷(직, 피) 4 그릇 올린다.
② 과류 : 오과를 쓴다. 과일을 올리는데도 그 순서가 정해져 있다. 대추는 씨가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임금이라하여 제일 위에 올리고, 밤은 3정승 6판서라 하여 그 다음에 올린다.
③ 犧牲(희생) : 돼지 1마리
④ 제주 : 생감(감주)을 사용한다.
9. 행제 : 의귀리의 포제는 유교식으로, 향교에서 제사 지내는 것과 비슷하며 집예가 부르는 홀기에 따라 행한다.
창세미소당
창세미소는 제3의귀교에서 남쪽으로 약 500m 쯤에 위치하고 있으며,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의귀리 사람들 뿐만 아니라 멀리 수망리 사람들의 생활용수로 쓰였다고 한다. 창세미소당은 창세미소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다.
1) 당명 : 창세미소 일뤠·여드렛당
2) 신명 : 토산 일뤠할망·여
3) 신위 : 일뤠할망·여드레할망(여·2)
4) 제일
① 일렛당 : 음력 6월과 11월, 7일·17일·27일
② 여드렛당 : 음력 6월과 11월, 8일·18일·28일
당을 찾아갈 때 초일뤠·초여드렛날 가면 앉아서 상을 받고 열일뤠·열여드렛날 가면 누워 기다리다가 상을 받고,
스무일뤠·스무여드렛날은 안 와도 좋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특별한 일이 없는 경우는 보통 초일뤠·초여드렛날
당에 간다.
5) 신위 : 신목
6) 제물
① 일렛날 : 허물이나 부스럼 낫게 해달라고 물후락할망에게 빈다. 메는 보시메 1개, 사발메 1개 물세계(물뢰세)
서너치 길이, 실 한가림, 지전 3∼4장
② 여드렛날 : 보시메 1, 사발메 1, 액막이로 닭이나 돈을 갖고 간다. 액막이는 대체로 집안의 액을 막는 것인데
사람 수에 따라 메 수가 달라진다. 시마치(천) 1마도 가져간다. 보시메는 아기메를 말하는 것으로
일렛날은 아기 영혼을 위하여, 여드렛날은 아기업게를 위하여 준비한다.
7) 성별 : 여(할망)
8) 기능 : 아기 넋들임, 피부병, 액막이
9) 당 건조 형태 : 신목형, 천변형, 폐쇄형, 제단형
10) 메인 심방계보 : 신백근 → 장씨할망 → 김병현(여, 77세)
11) 당의 특징 : 다른 당에 비해 인위적으로 돌담을 쌓아 테두리를 두르지 않고 주위에 빽빽히 들어선 나무들로
넓이를 짐작할 수 있다. 제단 역시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당의 내부에는 조그만 연못이
있는데, 이 연못에서 손을 씻으면 사마귀가 낫는다는 말이 전해진다.
12) 단골(신앙민) : 마을 주민 일부(약 10가구)
몰진밭당
몰진밭은 말들이 진을 쳤던 밭이란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의귀리 동쪽 하천(衣貴川)을 지난 곳에 위치해 있다.
전에는 이 지역이 목장이었음을 알 수 있으나 지금은 대부분이 과수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몰진밭당은 제3 의귀교에서
동쪽으로 약 1km지점에 위치해 있다.
1) 당명 : 진밭 일뤳·여드렛당
2) 신명 : 토산일뤠할망·여두레 할망
3) 신위 : 일뤠할망 + 여드레할망(여·2)
4) 제일 :
① 일뤳당 : 음력 6월과 11월,7일·17일·27일
② 여드렛당 : 음력 6월과 11월, 8일·18일·28일
5) 신예 : 신목 + 신혈
6) 제물 : 떡, 과일, 계란, 감주, 쌀, 지전, 소지종이, 물색헝겊 메는 두 그릇인데 일뤠할망에게 보시메 하나와 여드레
신당한집에 사발메 하나 올린다. 돼지고기는 올리지 않는다.
7) 기능
① 일뤠할망 : 피부, 괴담, 안질을 치료해 준다.
② 여드레할망 : 아기를 넋들여 주고 액을 막아 준다.
8) 당 건조형태 : 신형혈, 신목형, 울담형, 개방형, 제단형
9) 매인 심방 계보 : 홍성운(남) → 신씨(남) → 김씨(여) → 김금선(혹은 김용칠이라고도 함(여) → 무명(여)
10) 당의 특징 : 과수원 속에 위치해 있어 사람들은 과수원당이라고도 한다. 1989년 태풍에 의해 신목이 잘려 나갔다.
11) 단골(신앙민) : 교회에 다니거나 불교를 믿는 사람을 제외하면 약 30가구 정도 다닌다.
가마리 해녀올레 - 멀개 - 가는개 - 토산 바다산책로 - 토산새동네 - 망오름 - 거슨새미 - 영천사(노단새미) -
송천 삼석교 - 태흥 2리
해안도로 - 햇살좋은 쉼터 - 남원 해안길 - 남원포구
올레길 4코스 (총 길이 23km, 당케포구에서 남원포구까지)
바다를 따라 걷는 바다 올레길과 내륙의 중산간 올레길이 적당히 섞인 코스이다. 초입의 갯늪과 샤인빌 리조트 앞 바다
산책로가 시원하고, 망오름의 울창한 숲도 상쾌하다. 망오름을 돌아 다시 바닷가로 내려와 남원포구까지 걷는 길도 탁
트인 바다 풍경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코스가 너무 길어 지루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총 거리 23km로 빠른 걸음으로는 6~7시간, 천천히 걸으면 8~9시간이 걸린다.
걷기 Tip
이 코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간은 출발점인 당케포구에서 샤인빌 리조트 바다 산책로까지라 할 수 있다. 아기자기한 바다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코스이다. 약 8km 정도의 길로 천천히 걸어서 3시간이면 걸을 수 있다.
당케포구
당케포구는 3코스의 종착점이자 4코스의 출발점이다. 당케포구는 작고 아늑한 포구인데, 포구 가까운 곳에 해비치 리조트가 들어서 포구에 비교적 음식점이 많은 편이다. 당케포구에는 제주의 설문대할망의 전설이 전해온다. 설문대할망은 제주도를 만들었다는 신화 속의 주인공이다. 설문대할망이 어디선가 치마폭에 흙을 담아와 제주도를 만들고 다시 흙을 더 가져와
한라산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만큼 체구가 커서 한라산을 베고 누우면 다리는 제주시 앞바다의 섬에 닿았다고 한다.
당케포구는 원래 폭퐁우가 몰아칠 때마다 큰 피해를 입던 지역인데 설문대할망이 포구를 만들어 주었다는 곳이다. 그러나 지형적으로 바다를 향해 열려 있는 지형이어서 포구가 들어서기에 그리 좋은 자리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당케포구에는 이런 연유로 설문대할망을 모신 할망당, 즉 당집이 있다고 한다. 당케라는 이름도 당집에 있어, ‘당포’ 또는
‘당개’
갯늪
당케포구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걷기 시작하면 바로 해비치 리조트가 나온다. 이 해비치 리조트 앞바다부터 갯늪이 시작된다. 현무암 지대가 바다로 넓게 뻗어나가 밀물 때면 이 현무암 지대에 물이 들어와 바닷가에 슾지가 형성된 것을 제주에서 갯늪이라 부른다. 물이 차지 않은 현무암 지대에는 풀이 자라, 탁 트인 바다와 함께 이국적인 풍경을 빚어내는 아름다운 곳이다. 이 갯늪이 약 3km 가량 이어져 맑은 날이면 독특한 갯늪의 풍경을 즐기며 걸을 수 있다.
가마리 숲길과 샤인빌 리조트 바다 산책로
갯늪을 지나면 가마리라는 바닷가 마을이 나온다. 예전에는 활발한 포구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포구의 흔적만 남고, 펜션들이 줄줄이 들어서 있다. 이 마을 끝 바닷가에 해녀집이 있는데, 올레길이 이 해녀집을 지난다. 해녀집 안으로 들어가 뒷문으로
나가면 가마리에서 가는개로 이어지는 숲길이 나온다. 해녀집에는 여러가지 물질 도구를 볼 수 있다. 가마리에서 가는개로 이어지는 숲길은 바닷가를 따라가는 좁고 아늑한 숲길인데, 제주 올레에서 이 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숲길을 지나면 바닷가 바위길을 가게 된다. 바닷가에 너덜지대를 잘 다듬어 길을 냈는데 제주의 해병대가 이 길을 만들어 주었다고 해서 해병대길로 불리는 길이다. 이 해병대길을 지나면 샤인빌 리조트의 바다 산책로로 이어진다. 울창한 숲길이 잘 정비되어 있어, 바닷가
숲길을 편안하게 걷는 길이다. 길이 그리 길진 않지만 분위기가 아늑한 길이다.
망오름
샤인빌 리조트 바다 산책로를 지나 해안도로를 조금 더 따라가다가 제주순환도로를 건너 뒤 길은 중산간으로 이어진다. 이 길을 약 2km 정도 걸으면 망오름이다. 망오름은 그리 높진 않지만 오르는 길이 가파르다. 정상 부근까지 계속 돌계단을 올라야 한다. 그러나 망오름의 숲은 일품이다. 오르는 코스의 숲도 울창하고 깨끗하며 내려가는 코스의 숲도 산뜻하기 그지없다. 망오름 정상에는 봉수대의 흔적이 있다. 이 봉수대를 토산봉수라 부르는데 육지의 봉수대처럼 돌을 쌓아 봉수대를 만든 것이 아니어서 단순한 흙더미 같아 보인다.
거슨새미
망오름을 내려오면 길은 거슨새미로 향한다. 거슨새미는 작은 샘이다. 이 샘에서 솟아나온 물이 아래로 흐르지 않고 한라산을 향해 위로 거슬러 오른다고 해서 거슨새미란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물이 위로 흐르는 법은 절대 없으니, 크게 과장된 이름이다. 이 거슨새미에는 전설이 하나 전하고 있다. 옛날 중국 송나라에 소문이 돌기를, 제주도에서 날개 달린 장수와 천하를 다스릴 왕후가 날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그러자 송나라 황실은 술사인 호종단을 보내 제주의 산과 물의 맥을 모두 끊어버릴 것을 명했다. 호종단이 종달리에 상륙해 수맥을 끊으며 거슨새미 아래 토산리까지 당도하자, 영천수신(靈泉水神)이 아가씨로 변해 밭을 가는 농부에게 빨리 그릇에 새미물을 떠서 고부랑낭(구부러진 나무) 아래 숨기라고 하였다. 그래서 호종단이 거슨새미의 수맥을 끊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이 거슨새미의 물은 얼마전까지 인근 주민들의 식수로 쓰였을 정도로 수량이 풍부하고 물이 맑다고 한다.
거슨새미를 내려가면 영천사라는 절을 만난다. 이 절 이름인 영천이 바로 거슨새미를 숨긴 영천수신의 이름을 따온 것이라 하고, 영천사 안에 있는 노단새미라는 샘 역시 호종단이 찾지 못한 샘이라 한다.
남원포구
거슨새미를 지나면 길은 지루하게 이어진다. 중산간 길을 내려와 대흥리에서 해안으로 접어들어 또 해안을 따라 한참을 가야 남원포구에 닿게 된다. 해안길이 시원하게 탁 트였고, 도중에 갯늪과 등대 등을 볼 수 있지만 워낙 길이 길다 보니 지루함을 감출 수 없는 길이다. 남원포구는 남원읍에 접해 있는 포구인데, 공사중이어서 그런지 의외로 작은 편이다.
4코스에서 식사하기 좋은 집은 남쪽나라 횟집(064-787-5556)이다. 샤인 리조트를 지나 조금 더 가면 해안가에 있는 집으로, 출발지인 당케포구에서 약 9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4코스의 절반도 안되는 위치에 있어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그 뒤로는 식당이 없어 남원포구까지 가야 한다. 이 집 음식은 아주 맛깔스럽다고 할 순 없지만, 깔끔하고 푸짐해서 후회는 없는 집이다.
교통편
4코스의 출발점인 당케포구로 가려면 동회선 일주버스를 타고 표선사거리에서 내려 표선해수욕장을 지나 당케포구 걸어가야 한다. 약 20분 정도 걸린다.
4코스의 종착점인 남원포구에서는 포구에서 읍내가 가깝다. 읍내 쪽으로 가면 읍내에 버스 정류장이 있다.
짧게 샤인빌 리조트까지만 걷는다면 샤인빌 리조트를 지나 조금 더 가 남쪽나라 횟집을 지나면 큰길로 이어진다. 이 부근에
버스 정류장이 있다.
올레 5 코스 경로 (총 15km, 5~6시간)
남원포구 - 큰엉 경승지 산책로 - 신그물 - 동백나무 군락지 - 위미항 조배머들코지 - 넙빌레 - 공천포 검은모래사장 - 망장포구 - 예촌망 - 효돈천 - 쇠소깍
올레길 5코스 (총 길이 15km, 남원포구에서 쇠소깍까지)유명한 제주의 해안 명소인 남원큰엉과 쇠소깍을 품고 있는
코스로, 대부분의 길이 바닷길인 바다 올레 코스이다. 시원한 풍경의 남원큰엉 산책로가 일품이고 바다로 흘러드는 쇠소깍의
풍경도 이채롭다. 그리고 이외의 길도 시원한 바닷길과 아늑한 마을길을 지나는 코스로, 아름다운 바다 올레 코스이다.
총 길이 15km로 빠른 걸음으로는 5시간, 천천히 걸으면 7~8시간이 걸린다.
걷기 Tip
아름다운 구간을 따로 떼어내기 힘든 코스로, 전 구간을 다 걸으며 남원의 아름다운 바다를 즐기는 것이 좋다. 좋은 구간을 나눈다면 남원포구에서 위미까지 약 8km가 좋다.
남원포구
남원포구는 4코스의 종착점이자 5코스의 출발점이다. 남원포구는 남원읍에 접해 있는 포구인데, 공사중이어서 그런지 의외로 작은 편이다. 5코스는 남원포구에서 서귀포 방향으로 해안도로를 따라가면 된다. 이 해안도로를 따라가면 멋진 바다 산책로인 남원큰엉 길이 나온다.
남원큰엉
남원큰엉 산책로는 제주에서도 손꼽히는 멋진 바다 산책로다. 바닷가에 길게 뻗어 있는 거대한 현무암 바위가 멋진 절경을 이룬다. 산책로는 이 바위 위로 이어지는데 잘 정비가 되어 있어 편하게 걸을 수 있다. 거리는 약 1.5km. 산책로 주변은 숲이 우거져 있는데 군데군데 숲이 열린 곳으로 나가 큰엉의 해변 경관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큰엉 산책로가 거의 끝날 무렵에 큰엉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조망처가 있다. 이곳에서 보는 남원큰엉의 풍경이 5코스 최고의 풍경이다. ‘엉’이란 말은 ‘바닷가나 절벽 등에 뚫린 바위 그늘이나 굴’이란 뜻의 ‘엉덕’이란 말의 줄임말이라 한다. 남원큰엉 산책로에는 신영영화박물관이 있다.
남원 큰엉의 진입로 신영화박물관 밑에 위치한 큰엉서각겔러리에 전시되어있는 작품인데 10여명의 회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성회원들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회원들은 매년 전시회를 통해 지역사회에 봉사하며 문화활동을 하고 있다. 재료 대부분은 제주도에서 오래된 느티나무나 녹나무를 이용하여 만든 작품들이 많다. 안타까운 것은 작품의 제목은 있으나 서각작가는 없어서 누가 새긴 것인지 알수가 없지만 잠깐 쉬어가며 수준 높은 작품을 감상한다면 기분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큰엉서각회에게 무료로 임대해주어 겔러리로 사용하던 것을 2014년 남원읍에서 회수하여 다른 용도로 사용하니 지금은 좋은 작품을 감상할 수 없어 아쉽다.
전시실 앞 한국 지도가 뻥뚤린 올레길
제주식 남자(하르방) 화장실 표시
제주식 여자(해녀) 화장실 표시
겔러리 옆 금호 리조트
고망물
남원큰엉을 지나면 마을길을 지나고 다시 해안길을 걷게 된다. 이 부근의 해안이 아름답다. 흩뿌려놓은 듯 바닷가에 널려 있는 검은 현무암과 푸른 바다가 또렷하고 시원한 바다 풍경을 보여준다. 이 바닷길을 따라가면 위미의 작은 마을로 길이 이어진다. 한라산을 배경으로 야자수와 울창한 수목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마을이다. 이 마을을 지나 다시 해안길을 지나면 위미포구에 닿게 된다. 이 위미포구에는 고망물이라 불리는 샘이 있다. 위미포구로 흘러드는 천의 하류에 있는 샘으로, 오랫동안 주민들의 식수원으로 쓰였다고 한다. 물맛이 워낙 좋아 예전에는 이 고망물로 소주를 생산하던 공장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물이 말라 고망물 안내판만 남아 있다.
고망물을 지나면 다시 마을길을 지나 해안으로 나간다. 이 해안에 넙빌레가 있다.
넙빌레
넙빌레는 바닷가에 노천탕이 있는 곳이다. 바닷가 바위틈에서 맑고 시원한 샘이 솟아 이곳에 아예 담을 둘러 여탕과 남탕을 따로 만들어 번듯한 노천탕을 만들어 놓았다. 제주에는 이렇게 바닷가 용천수가 많아, 예로부터 주민들의 식수로 쓰였다. 탕에 들어가 보면 아직도 바위틈에서 물이 솟아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는 식수뿐 아니라 공중 목욕탕으로 쓰이고 있다. ‘빌레’
공천포
넙빌레를 지나 해안도로를 조금 따라가면 공천포가 나온다. 공천포는 검은 모래사장이 유명한 해안이다. 이 공천포 마을에 신례2리 사무소에서 운영하는 공천포 쉼터가 있다. 올레길 걷는 사람을 위한 쉼터로 소파와 식수, 인터넷 그리고 자동안마 소파까지 있어, 지친 발을 쉬어가기에 좋다.
망장포구
공천포를 지나면 망장포구가 나온다. 망장이란 이름은 고려말 원나라가 제주에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직접 통치하던 시절에 이 포구에서 말을 실어 나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걷다보면 아늑한 분위기의 옛 망장포구를 먼저 만나게 된다. 바닷가에 두터운 방파제를 쌓은 포구인데 규모가 작아 앙증맞아 보일 정도이다. 이 포구를 지나 조금 걸으면 새로 건설한 망장포구가 보인다.
쇠소깍
망장포구를 지나 숲길과 아스팔트길을 번갈아 지나면 5코스의 종착점인 쇠소깍 입구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바다를 향해 가면 쇠소깍이 있다. 쇠소깍은 내륙에서 흘러나가는 제법 긴 협곡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이다. 물길 양쪽으로 바위벽이 서 있고 그 바위벽에 울창한 숲이 조성되어 있어, 협곡과 숲 그리고 짙푸른 물이 멋진 조화를 이룬다. 이런 협곡이 바닷가 백사장 앞까지 이어지다가 칼로 자른 듯 뚝 끊어지면 바다와 만난다. 협곡의 물을 백사장이 가로막고 있어 물은 왼쪽으로 휘돌아 바다로 들어간다. 이 쇠소깍에서는 제주의 옛 배인 태우를 탈 수 있다. 약 30분 정도 태우를 타고 쇠소깍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며 제주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쇠는 소를 뜻하고 소는 웅덩이를 그리고 깍은 끝이라는 뜻이라 한다. 옛 지명은 소가 누워 있는 형태라 해서 ‘쇠둔’이라 불렀다는데 언제부터인지 ‘소 모양의 웅덩이가 있는 물끝’이라는 의미의 쇠소깍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망장포구를 지나 쇠소깍을 향해 도로와 숲길을 번갈아 걸으면 다리를 건너게 된다. 이 다리에서 본 쇠소깍 상류 풍경이다. 쇠소깍은 이 물길의 하구이다.
쇠소깍으로 가는 길은 이렇듯 잘 정비해 놓았다.
쇠소깍 풍경. 그리 크진 않지만 울창한 협곡으로 물이 흐른다. 이 물이 사진 속 모퉁이를 돌면 바로 바다로 이어진다. 물을 지나는 흰 줄은 태우를 끌 때 이용되는 줄이다.
바닷가에서 본 쇠소깍의 풍경. 바위 협곡이 바다 바로 앞까지 이어져 아주 독특한 풍경을 빚어낸다. 땟목 같은 나무배는 제주의 전통 땟목인 태우이다.
식사와 머물 곳
남원 포구 주변에 포구식당, 포구민박, 슈퍼가 있어 낚시나 해안을 거닐며 지내기에 매우 편리하고 특히 큰엉 주변 해안에 리조트와 펜션이 있어 하루쯤 머문다면 바닷가 빼어난 경치와 겔러리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어 좋다. 공천포에 있는 공천포식당(064-767-2425)이 물회를 잘하는 집으로 유명하다. 된장이 주로 들어가는 제주도식 물회를 내는 집으로 자리물회, 한치물회, 소라물회 등 다양한 물회를 내는 집이다.
교통편
5코스 출발점인 남원포구로 가려면 동회선 일주버스를 타고 남원읍사무소에서 내리면 된다. 조금만 걸어가면 남원포구가 있다.
종착점인 쇠소깍에서는 약 15분쯤 걸어서 큰길로 나가면 된다. 큰길로 나가 오른쪽 다리를 건너면 버스 정류장이 있다.
위미까지만 걷는다면 올레길에 있는 위미 킹마트 부근의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면 된다.
첫댓글 구경 잘했습니다.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