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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동(道禾洞)
● 쑥골
● 수봉산(壽鳳山)
도화동은 1914년 일제(日帝) 도마동(道馬洞)과 회동(禾洞)이라는 두 동네의 첫 글자를 합해 만든 이름이다.
구한말 이곳은 인천부 다소면에 속해 있었는데, 1842년에 나온 「인천부읍지(仁川府邑誌)」부더 ‘도마교(道馬橋)’와 ‘화동(禾洞)’이라는 이름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 두 이름이 합쳐져 1914년에 도화리(道禾里)가 됐다가 광복 뒤에 그대로 도화동이 된 것이다.
이들 도마교와 화동은 행정기관이 한자(漢字)를 써서 만든 이름이다.
당시 동네사람들은 이 이름이 아니라 ‘토마다리’와 ‘쑥골’ 또는 ‘베말’이라고 우리말 이름을 썼을 것이다. 그런데 한자로 문서를 쓴 사람들이 이런 우리말 이름을 한자로 바꿔 ‘도마교’와 ‘화동’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다.
이중 도마다리는 오늘날 수봉산으로 올라가는 도로의 입구 일대 지역을 말한다.
이에 대해 흔히 이곳에 “말〈馬〉이 지나다니는〈道〉 다리가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고 설명을 한다. 하지만 이는 아무런 근거가 없고, 너무 막연한 얘기다.
이와 달리 지금의 인천대학교 도화캠펴스 일대가 옛날에 말을 방목하고 훈련시키던 곳이어서 ‘導馬(도마)’라는 이름이 생겼다가 다시 ‘道馬’로 바뀐 것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 역시 전혀 고증(考證)되지 않는 얘기이다.
조선시대에 인천에서는 용유도나 삼목도 등 앞바다 섬 에서 정책적으로 국가에 필요한 말을 키웠다. 또 ‘마장(馬場)’ 이라 불렸던 부평의 산곡·효성·청천동 일대에서도 말을 키운 사실이 자료로 남아 확인된다. 하지만 도화동 일대가 말을 키운 곳이라고 알려주는 자료는 아직 발견된 바 없다.
도마다리의 ‘도마’는 이런 근거 없는 이야기보다 순 우리말 ‘듬’ 또는 ‘두무’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하는 국어학적 접근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우리 땅 이름에서 ‘듬/두무’는 분지(盆地)처럼 ‘주변이 산 등으로 빙 둘러싸여 있는 곳’ 또는 ‘우묵하고 깊숙한 곳’, ‘땅 모양이 둥근 곳’ 등을 이르는 단어다. 그리고 차츰 뜻이 더 넓 어져 ‘산 속 깊숙한 데 있어서 외딴 곳’을 말하기도 했고, 때로는 산 자체를 나타낼 때도 쓰였다.
중세국어에서 밥을 짓거나 물 등을 끓이는 둥글고 큰 솥을 ‘두멍’이라 했는데, ‘듭/두무’는 이런 솥의 안쪽처럼 우묵하고 깊숙한 곳이나 둥글게 생긴 땅을 말하는 것이다. 학자들은 ‘둠/두무’가 ‘두멍’보다 먼저 나온 말로 보며, 현대어 ‘둥글다’도 ‘둠글다’에서 나온 말로 본다.
그런데 ‘둠/두무’는 지역에 따라 ‘도마, 투마, 두모, 두미, 두밀, 둔, 담, 덤, 대마, 대미, 다모, 담방, 더미, 떼미, 동막…’ 등의 다양한 변형을 갖고 있다. 그런 만큼 언뜻 보아서는 그 원래의 뜻을 알아채기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땅 이름은 우리말의 일부이고, 말이란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 때문에 같은 말로 출발한 땅이름이라 해도 오랜 역사 속에서 지역에 따라 이처럼 다양한 변형을 갖게 되는 것이다.
땅 이름이 아닌 일반 단어에서도 이 말의 자취가 화석(化石)처럼 남아 지금까지 쓰이고 있는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깊은 곳을 뜻하는 두메산골의 ‘두메 (듬+뫼)’, 새들이 둥그 게 보금자리를 트는 ‘둥지(〈듭지)’ 등이 그것이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보면 전국 곳곳에서 ‘豆毛山(두모산), 豆無山(두무산), 豆音山(두음산), 豆尾山(두미산), 豆尾岑(두미잠), 都馬洞(도마동)’ 등의 지명을 많이 찾을 수 있다. 이 모두가 ‘듭/두무’의 뜻을 가진 우리말 땅 이름의 여러 변형(變形)에 대해 발음이 비슷한 한자를 적당히 갖다 붙여 나타낸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듐/두무’의 변형 가운데 하나로 ‘도마’도 있는 것인데, 우리나라 여러 곳에 이런 땅 이름이 있다. 대전광역시 서구에 있는 ‘도마몽(道馬洞)’, 충청북도 음성군에 있는 ‘도마치(倒馬峙)’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곳 도화동 ‘도마다리’의 도마도 이에 해당한다.
‘도마’하면 ‘도마뱀’이 연상되기도 하는데, 실제로 ‘도마뱀’이라는 말의 ‘도마’가 바로 산(山)을 말하는 ‘둠/투무’의 변형 중 하나이다. 따라서 도마뱀이란 원래 ‘산에 사는 뱀’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도마다리’는 결국 ‘산으로 건너가는 다리’ 도는 ‘산 주변에 있는 다리’ 정도로 해석이 된다. 동네 앞에 수봉산이 있으니 그쪽으로 건너가는 다리나 산 주변에 있던 다리를 이렇게 부른 것이다.
예전에 이 동네에서 오래 산 사람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도화동부터 주안동 일대가 거의 모두 논이었고, 큰 냇가도 있어서 실제로 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그 다리를 동네사람들은 ‘도마다리’ 라고 불렀다.이를테면 그 다리 근처에 남양 홍씨(洪氏) 집안사람들이 살아 그들을 ‘도마다리 홍씨’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쑥골
이 동네의 또 하나 오래된 이름인 ‘쑥골’은 치금도 이 일대 고가도로나 어린이도서관, 아파트 단지 등의 이름에 남아 쓰이고 있다.
‘쑥골’이라는 이름은 ‘쑥고개’와 함께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땅 이름으로, 그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는 글자 그대로 ‘쑥이 많은 곳’이라는 해석이다.
둘째는 ‘숯을 굽던 곳’이라는 뜻인톄, ‘숯’의 발음이 ‘숙’을 거쳐 ‘쑥’이 됐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이곳 쑥골 일대의 역사에서 주변에 쑥이 많아 유명 했다거나, 숯을 굽던 곳이 어디에 있었다는 자료나 증언이 없다. 따라서 이 두 해석은 일단 사실과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인다.
셋째는 ‘물이 많은 골짜기’라는 뜻의 ‘수(水)골’이 ‘숫골〉쑥골’로 발음이 바뀌었다는 해석이 다.
이는 1950년대에 지금의 제물포역과 인천대학교 제물포캠 퍼스 사이에 비교적 큰 개울이 있어 아이들에게 좋은 놀이터가 돼주었다거나, 이곳서 멀지 않은 송림동과 가좌동(개건너) 사이 갯골에 ‘번작이(번저기) 나루’라는 나루터가 있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삼고 있다. 그만큼 이곳에도 물이 많아서 ‘수골’이라 불렸다는 것이다.
넷째는 ‘숲이 우거진 곳’이라는 해석이다.
우리 중세국어에서는 숲을 ‘숲’, ‘숩’ 또는 ‘좋’ 라 했다. 여기서 나온 ‘숲골/숩골’ 또는 ‘승골’의 발음이 바뀌어 ‘쑥골’이 됐다는 얘기다.
고(故) 신태범 박사도 그의 책 「인천 한 세기」에서 “쑥골과 도마다리 일대에는 소나무와 잡목이 우거지고, 중국인 채소밭이 펼쳐져 있어 찹새, 콩새, 산새들이 많아서 툭하면 공기총을 들고 새 사냥을 다녔다”고 회고한 바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설명들이 아무리 그릴듯하다고 해도 사실 이곳 쑥골과는 관계가 없는 얘기다. 이곳 쑥골은 논과 벼가 많아서 생긴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 동네가 ‘쑥골’과는 볕개로 ‘베말(벼마을)’이라 불렸던 점과, 한자로 이름이 바뀔 때 ‘禾(벼 화)’자를 써 ‘禾洞(화동)’이 된 것을 그 근거로 한다.
우리 중세국어에 벼를 대표로 해서 모든 곡식을 가리키는 ‘쉬’라는 단어가 있었다.
이는 조선 중종 임금 때 최세진이 3360 글자의 한자(漢字)마다 그 뜻과 우리말 발음을 적어 어린이들이 배울 수 있게 만든 한자 학습서 「훈몽자회(訓蒙字會)」에 ‘禾 쉬 화 穀之總名(곡지총명 :모든 곡식을 통틀어 일컫는 이름이다)’이라고 설명해 놓은 것으로도 알 수가 있다. 이처럼 ‘쉬’가 여려 종류의 곡식을 뜻한다는 것은 ‘미숫가루’라는 단어를 통해서도 알 수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미숫가루는 쌀이나 보리 등의 곡식을 쪄서 가루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원래 이름은 ‘미쉬 + 가루’ 였는데 ‘미수 + 가루’로 발음이 바뀌었다. ‘미쉬’에서 ‘미(米)’는 쌀이고, ‘쉬’는 쌀을 포함해 무엇이든 다른 종류의 곡식을 말한다.
앞서 밝혔듯이 이곳 도화동 일대는 예전에 논과 벼가 많아서 ‘베말(〈벼말〈벼마을)’이라고 불렸는데, 이를 ‘쉬골’이라고도 했던 것이다. ‘쉬’는 벼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곡식을 말하고, ‘골’은 ‘마을’을 뜻한다. 그런데 이 ‘쉬골’이 시간이 지나면서 ‘쉬골〉수골〉숫골〉쑥골’로 발음이 바꿔어 ‘쑥골’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결국 도화동의 유래가 된 ‘도마다리’는 ‘산으로 건너가는 다리’ 또는 ‘산 주변의 다리’ 이고, ‘화동’은 ‘논과 벼가 많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한편 이곳 도화동에는 지금의 인천대학교 도화캠펴스 일대에 이 학교의 전신(前身)인 ‘선인학원’이 생길 때까지 중국인들의 공동묘지가 있었다.
이는 원래 중구 자유공원 아래 중국인들이 모여 살던 청국조계(淸國租界) 안에 있던 그들의 공동묘지 ‘의장지(義莊地)’가 1910년대에 옮겨온 것이었다. 인천항 개항 뒤 제물포로 들어오는 청나라 사람들의 숫자가 계속 늘면서 좀 더 넓은 묘지가 필요했기 때문에 새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중국인 묘지가 조성된 뒤 이 주변에서는 많은 중국인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
하지만 1960년대 들어 인친시가 새롭게 도시계획을 세우면서 이곳 공동묘지는 다시 지금의 남동구 만수동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 뒤 묘지가 옮겨 가고 남은 자리의 상당 부분에는 선인학원 산하 학교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 과정 에서 선인학원의 전신(前身)인 「인천성광학원(仁川聖光學園)」과 중국인들 사이에 땅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이 크게 일어났고, 이는 한국과 중국 사이의 심각한 외교 문제로까지 번지기도 했다.
이런 사연 때문에 1970년대까지도 “선인학원 산하 학교들이 들어서 있는 땅을 파보면 사람들의 뼈가 나온다” 거나 “화장실에서 귀신이 나타났다”
거나 하는, 음침한 괴담(區談)이 심심찮게 돌곤 했다.
‘선인학원’은 이 학교 재단의 설립자인 백선엽·백인엽 형제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수봉산
수봉산(壽鳳山)은 숭의―도화―주안―용현동에 걸쳐 있는데, 원래 한자 이름은 ‘水峯山I(수봉산)’이었다고 한다. 1986년 「한글학회」에서 발간한 「지명총람」얘도 ‘水峯山’이라 적혀 있는데, 언제 어떤 이유로 ‘水峯’이 ‘壽鳳’이 됐는지는 알 수가 없다.
이 산은 흔히 ‘만월산(滿月山)’이라 불리고 있는 ‘주안산(朱安山)’의 한 줄기이다.
인천의 북쪽에 있는 계양산(桂陽山)과는 형과 아우 사이인 산이며, 황해바다에서 함께 떠내 려 왔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지금은 산 주위 멀리까지 모두 육지가 돼버렸지만 옛날에는 이 산 앞에서부터 지금의 제물포역 주변이 모두 미나리가 자라는 논과 연못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물이 많은 동네이다 보니 이런 전설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일 때문인지, 멀리서 보면 물 위로 산봉우리가 솟아 마치 우뚝 솟은 섬과 같았기 때문에 ‘물의 봉우리’라는 뜻을 가진 ‘水峯’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으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또 옛사람들은 수봉산의 정기(精氣)가 좋아 사내아이를 많이 태어나게 하는 힘을 가졌다고도 믿었다고 한다.
이 같은 ‘물’과 ‘정기’의 전설이 산을 신령스럽게 포장하다 보니, 누군가 그 이름에 전설의 새인 봉황(鳳凰)의 ‘鳳(봉)’자를 넣고, 여기에 ‘水(물 수)’보다 그럴듯한 ‘壽(목숨 수)’자를 붙여 ‘壽鳳山’으로 바꾸었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국어학 차원에서는 이와는 전혀 다르게 ‘수봉산’이 ‘높은 곳’이나 ‘산(山)’을 뜻하는 순 우리말 ‘수리’에서 나온 이름으로 해석한다. (→‘수리’에 대해서는 중구 ‘싸리재’ 편 참고)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처음에는 ‘수리’ 또는 ‘수리봉’으로 불리던 것이 언제부텨인가 ‘리’자가 떨어져 나가면서 ‘수봉’이 된 뒤 그대로 굳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수리봉’이 ‘수봉’이 되자 ‘산(山)’이라는 느낌이 많이 없어져 나중에 다시 ‘산’이 붙은 것이다.
바꿔 말하면 ‘수봉’은 그저 ‘높은 곳’이라는 뜻의 보통명사 ‘수리’에서 나온 말이고, 여기에 ‘봉’과 비슷한 뜻인 한자 ‘山(산)’이 덧붙은 형태가 된다.
아마도 이것이 수봉산의 이름 유래에 대한 가장 정확한 해석일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보면 ‘수봉’에 쓰인 한자 ‘壽’와 ‘鳳’은 모두가 소리만 빌려주었을 뿐 뜻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