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전쟁이 실패로 끝난 후 압송되는 녹두장군 전봉준
한 시대의 불행한 아들로 태어나 고독과 공포에 결코 굴하지 않았던 사람 암울한 시대 한가운데 말뚝처럼 횃불처럼 우뚝 서서 한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한몸으로 껴안고 피투성이로 싸웠던 사람 뒤따라오는 세대를 위하여 승리없는 투쟁 어떤 불행 어떤 고통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 누구보다도 자기 시대를 가장 정열적으로 사랑하고
누구보다도 자기 시대를 가장 격정적으로 노래하고 싸우고 한 시대와 더불어 사라지는데 기꺼이 동의했던 사람
우리는 그의 이름을 키가 작다해서 녹두꽃이라 부르기도 하고 농민의 아버지라 부르기도 하고 동학농민혁명의 수령이라 해서 동도대장, 녹두장군 전봉준이라 부르기도 하니 보아다오, 이 사람을 거만하게 깎아 세운 그의 콧날이며 상투머리는 죽어도 풀지 못할 원한, 원한 압제의 하늘을 가리키고 있지 않은가 죽어서도 감을 수 없는 저 부라린 눈동자, 눈동자는 90년이 지난 오늘에도 불타는 도화선이 되어 아직도 어둠을 되쏘아보며 죽음에 항거를 하고 있지 않은가 탄환처럼 틀어박힌 캄캄한 이마의 벌판, 벌판 저 커다란 혹부리는 한 시대의 아픔을 말하고 있지 않는가 한 시대의 상처를 말하고 있지 않는가 한 시대의 절망을 말하고 있지 않는가
보아다오 보아다오 이 사람을 보아다오 이 민중의 지도자는 학정과 가렴주구에 시달린 만백성을 일으켜 세워 눈을 뜨게 하고 손과 손을 맞잡게 하여 싸움의 주먹이 되게 하고 싸움의 팔이 되게 하고 소리와 소리를 합하게 하여 대지의 힘찬 목소리가 되게 하였다 그들 만백성들은 이 위대한 혁명가의 가르침으로 미처 알지 못한 사람들과 형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새 세상을 겨냥한 동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외롭고 가난한 사람들이 아직까지 한번도 맛보지 못한 자유를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적과 동지를 분간하여 민중의 해방을 위하여 전투에 가담할 줄 알게 되었으니
보아다오, 그들은 강자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자유를 위하여 구걸 따위는 하지 않았다 보아다오, 그들은 부호의 담벼락을 서성거리며 밥을 위해 토지를 위해 걸식 따위는 하지 않았다 보아다오, 그들은 판관의 턱을 쳐다보며 정의를 위해 기도 따위는 하지 않았다 보아다오, 그들은 성단의 탁자 앞에 무릎을 꿇고 선을 구걸하지도 않았다 보아다오, 그들은 이빨 빠진 사자가 되어 허공에 허공에 허공에 대고 허망하게 으르렁거리지 않았다 보아다오, 그들은 만인을 위해 땅과 밥과 자유의 정복자로서 승리를 위해 노래하고 싸웠다 대나무로 창을 깎아 죽창이라 불렀고 무기라 불렀고 괭이와 죽창과 돌멩이로 단결하여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양반과 부호의 다리를 꺾어 밥과 땅과 자유를 쟁취했다
보아다오, 보아다오 새로 태어난 이 민중을 이 민중의 강인한 투지를 굶주림과 추위와 투쟁 속에서 더욱 튼튼하게 단결된 이 용감한 조직을 보아다오 고통과 고통과의 결합 인간의 성채 죽음으로써만이 끝장이 나는 이 끊임없는 싸움, 싸움을 보아다오 밥과 땅과 자유 정의의 신성한 깃발을 치켜들고 유혈의 투쟁에 가담했던 저 동학농민의 횃불을 보아다오 압제와 수탈의 가면을 쓴 양반과 부호들의 강탈에 항쟁했던 저 1894년 갑오년 농민혁명의 함성을 들어다오 그리고 다시 우리 모두 이 사람을 보아다오 오늘도 우리와 함께 살아 있고 영구히 살아남을 이 사람을 녹두 전봉준 장군을 보아다오
1894년 농민전쟁
“세상을 바꾸자” … 100년 전 민중들 봉기
1) 1894년 농민전쟁의 배경
이러한 조선 사회는 조선후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한편으로는 지배층의 토지 독점이 심화되면서 많은 농민들이 토지에서 이탈되어 지주의 토지를 차경하는 작인이 되거나, 농촌의 임노동자로 존재하거나 유리해야 했다. 그런 가운데 평민층의 일부는 상업적 농업, 수공업, 상업활동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이들은 토지를 사서 ‘서민지주’가 되거나 양반으로 신분 상승을 꾀하였다. 이에 따라 신분제도 급격하게 동요하게 되었다. 조선 사회를 지탱하던 양대 축인 지주제와 신분제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사회 변동은 국가의 부세제도에도 반영되어 삼정의 문란을 초래하였다. 삼정의 문란을 중심으로 농민들의 저항이 폭발되어 일어난 것이 1862년 농민항쟁이었다. 농민항쟁은 군현단위로 분산되어 일시적 투쟁에 머물렀다. 이러한 19세기 조선 사회의 변화와 저항은 객관적으로는 내재적 근대화의 과정이었다. 내재적 근대화의 중요한 과제는 지주제와 신분제를 폐지하고 근대국가를 수립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서 1876년 개항을 통하여 자본주의 세계 질서체제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1876년 개항 통상으로 지주층은 미곡 무역을 통하여 부를 확대시킬 수 있었다. 쌀을 일본에 팔면 국내 시장에서보다 쌀값을 비싸게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상인들은 조선에서 쌀을 비싸게 사가도 일본 쌀값보다는 싸므로 ‘입도선매’까지 벌이는 형편이었다. 이에 따라 지주들은 지주지를 확대하고 소작농을 통제하는 등 지주경영과 지대수취를 강화하였다. 일부 ‘서민지주’와 부농들도 이에 편승하여 수익을 높였다. 이에 따라 소빈농층이 빠르게 몰락하고 있었다. 고통을 당하는 하층 농민들의 처지는 더욱 어려워졌다. 한편 외국 상품이 들어오면서 국내의 토착산업이 흔들렸다. 특히 대규모 기계 공업으로 만든 질 좋은 옥양목의 수입으로 가장 앞서 발전하고 있던 국내 토포(광목)사업이 타격을 받게 되었다. 토포산업이 흔들리면서 원료인 면화를 재배하던 농민들과 그것을 팔던 소상인들이 타격을 받았다. 면화를 재배하던 부농들도 타격을 입기는 마찬가지였다. 개항이후 바뀐 상황에서 지배층들의 소비욕은 점점 늘어났고 배는 더욱 커졌다. 그에 따른 수탈은 더욱 심해졌다. 미곡무역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기도 하고, 면작 농업에서 타격을 받기도 하던 ‘서민지주’ 부농들도 수탈의 손길 피할 수 없었다. 모순이 존재하는 곳에는 모순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기 마련이었다. 봉건모순과 민족모순이 심화되면서 계급 계층간의 갈등과 대립 투쟁도 심화되었다. 특히 1890년대 들어 각지에서 농민항쟁이 폭발되고 있었다. 이러한 투쟁의 폭발 종합 형태가 19세기 후반 1894년의 농민전쟁이었다.
2) 농민전쟁의 전개과정 - 일지
1893.11 ‘배들’ 이평 농민들 고부군수 조병갑에게 보세 감면 진정 11.30 고부군수 조병갑 익산군수로 전임되고 고부군수에 이은용 발령됨. 12.24 고부군수 이은용이 안악군수로 이임되고 신재묵이 발령됨 12.25 고부군수 신재묵이 신병으로 사임하고 이규백이 발령됨 12.27 고부군수 이규백이 신병으로 사임하고 하긍일이 발령됨 12.28 고부군수 박희성을 발령함 12.29 고부군수 박희성이 내금장(內禁將)으로 전임되고 강인철이 발령됨.
1894.1.2 고부군수 강인철이 신병으로 사임함 1. 9 전라감사 김문현의 재임요청으로 조병갑이 고부군수로 다시 부임함 1.10 고부농민항쟁, 전봉준이 군중을 이끌고 고부관아를 습격함 2.15 고부군수 조병갑이 파면되고 박원명이 발령. 장흥부사 이용태를 고부군 안핵사로 임명. 전라감사 김문현을 ?越俸三等之典?에 처함 2.25 고부 농민들이 전봉준의 지휘아래 백산으로 진을 옮김 3. 1 농민군 수백명이 줄포의 전운소 세곡 창고를 파괴 3. 3 군수 박원명의 효유로 고부 농민군이 일단해산. 3.20 농민군이 무장에서 기병하고 포고문 선포 3.23 농민군이 고부성 점령 3.25 농민군 백산으로 진을 옮기고 전봉준을 대장, 손화중 김개남을 부대장. 강령과 격문을 발표 3.29 장위영전령관 홍계훈을 전라병사로 임명. 4. 2 전라병사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 4. 6 태인과 부안의 농민군이 고부 도교산(정읍군 덕천면 하학리)으로 집결함 양호초토사 홍계훈의 경군이 군산에 상륙함 4. 7 농민군, 황토재(전북 정읍군 덕천면 하학리)에서 전라감영군에 대승(양.5.11) 홍계훈의 경군이 전주 입성. 농민군 정읍으로 진출함. 4. 8 농민군 흥덕으로 진출함 충청도 회덕현에서 농민군이 현아를 습격 농민군 고창현으로 진출함 4. 9 농민군 무장현으로 진출함 4.12 농민군 영광으로 진출함 4.15 강화병 인천을 출발 전라도로 증파 4.16 농민군 함평으로 진출 4.18 홍계훈 경군 전주 출발 영광으로 향함, 태인 머뭄. 4.18 전라감사 김문현이 파직되고 외무협판 김학진이 제수됨. 4.20 의금부에서 조병갑을 공주관내에서 체포함. 4.21 경군 영광 도착, 이용태 경상도 금산군으로 유배 4.22 농민군 장성, 나주 방면으로 향함 4.23 농민군, 장성 황룡촌에서 경군과 접전, 농민군대승,강화병 법성포 상륙(양 5.27) 4.24 농민군 장산리에서 노령을 넘어 전주로 향함(양 5. 28일) 4.25 경군 영광에서 전주로 4.26 농민군 원평에서 선전관이주호,군관이효웅,배은환 등 관원5명 참수 4.27 농민군 전주 입성.(양 5.31) 판관 민영승이 조경묘위패와 경기전 태조 영정을 위봉산성으로 이안. 엄세영을 염찰사로 이원회를 양호순변사로 호남지방에 파견. 4.28 경군이 전주 완산에 포진함. 1차 접전이 있었음. 5. 3 전주 황학산(多佳山)에서 2차 접전이 있었음 5. 6 일본군 인천에 상륙
갑오농민전쟁에 나선 농민군 모습
5. 7 ‘전주화약’ 성립, 농민군 전주성 철수 시작. 일본군이 서울 입성 5.16 관군이 전주성에서 철군, 강화병 잔유안. 5.20 김학진이 6개항의 수습방안을 농민군에게 제시 6.7 전라감사 김학진이 농민군 가운데 1명의 집강을 뽑아 각 고을의 질서를 잡는 새로운 수습방안 제시
6.21 일본군 경복군 점령(양 7.23), 대원군 정계에 복귀 6.23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정권이 수립되고 민씨 정권이 무너짐 아산 풍도에서 일본군이 청군을 공격하다. 6.27 성환에서 청.일교전 7. 1 최경선이 나주로 진군하여 금안동에 진을 침 7. 5 최경선 나주성 공격 7. 7 전봉준은 김학진과의 회담결과에 따라 각읍 집강 앞으로 평민 침학을 금지하고 치안을 유지하라는 통문을 보냄 7월중순 경상도 영해 영덕 경주 연일 영천 고령 고성 등지에서 농민항쟁 8. 7 정부는 농민군을 무력 진압할 계획을 세우다 8.10 정부의 개혁조치 후퇴 8.12 천안에서 일본인 타살사건 발생 8.17 일본군이 평양전투에서 청군과 싸워 승리 8.25 김개남은 전라도의 농민군 약 7만명을 남원에 모아 대회를 열다. 전봉준 손화중 재봉기 만류 9. 1 순천 영호대도소 농민군 부대가 섬진강을 건너 하동을 공격 9. 4 강원도 영월 평창 정선 농민군 평창에서 집결하여 강릉부를 점령함 9. 6 경상감사가 경상도 농민항쟁 발생지역이 60여군데라고 보고 9. 9-16일에 걸쳐 전봉준 부대 재기병 준비 9.18 전봉준 영향아래 있는 지역의 농민군이 삼례역에 모임 동학교주 최시형, 각포에 동원령을 내림 9.19 관군과 일본군이 경기 충청지방으로 출동. 9.20 우선봉 이두황이 농민군 토벌을 시작 9.21 일본 대본영에서 농민군을 토벌할 계획을 본격적으로 세우다 9.24 농민군 수만명이 청주성을 공격하다. 충청도 각지의 농민군이 봉기. 9.25 안동부에서 농민군 3천여명 봉기 9.26 충청도 농민군 음성 현아 습격 9.27 경상도 문경 석문리 싸움 10. 1 농민군이 서산 관아를 점령함 농민군이 태안 군아를 점령 10. 6 농민군이 괴산읍에서 일본군과 관군을 격파함 해주에서 농민군 수만명 봉기, 강령현과 해주감영 점령 10. 7 홍주목사 이승우, 호연초토사로 임명 10.11 북접군 청산대회, 관군 선봉장 이규태군 서울 출발(양 11.8) 금산 싸움. 10.13 진주 고승당산 싸움, 일본군과 접전 농민군 180여명 전사 10.14 전봉준 부대가 강경을 출발. 김개남 부대도 남원을 출발하여 전주로 10.15 연기군아 습격, 일본군 후비보병 독립 제19연대 용산 출발 10.16 전봉준 부대는 논산에서 충청감사에게 항일의병에 참가하자는 편지를 보내다 10.20 섬진강 하류 섬거역에서 일본군과 접전 10.21 세성산 싸움(양 11.18), 농민군 이두황 부대에 패하다. 홍천 장야촌(장평리) 싸움, 금산 삽치 민치 싸움에서 관군을 격파(22.23일까지) 10.22 농민군 하동부 점령, 성주성 습격, 홍천 풍암리 자작고개 싸움 10.23 강원도 평창의 봉평 싸움에서 농민군 패함 공주 이인 싸움, 김개남 부대는 금산을 점령하다. 10.24-25 공주 효포 곰티 싸움 박봉양이 남원 입성 10.27 유봉만의 농민군이 남원 점령, 하동 광평동에서 농민군이 일본군에 패함, 덕산에서 농민군 승리 10.28 섬거역 2차 싸움, 곤양 금오산 싸움 일본군에 패하여 동학농민군 70여명 전사 홍주(홍성) 싸움, 농민군이 홍주성을 점령하였으나 일본군에 패함. 농민군이 해미현으로 진주함. 11. 4 황해감사 정현석을 파면. 조희일 임명 11. 5 청산 석성리 싸움 11. 6 해주영의 농민군이 자진 해산 11. 8 전봉준 부대 다시 공주로 진격 11. 9 공주 대회전(우금치, 효포, 곰티, 곰나루, 금학동) 11.11 전봉준 부대 노성으로 철수 11.12 전봉준이 노성에서 관군에게 민족의 자주를 호소 11.13 김개남 청주싸움에서 패함 황해도 송화,문화 평산부를 농민군이 점령 11.15 전봉준 부대 후퇴하면서 노성 싸움, 황화대 싸움을 벌이다. 11.16 논산 황화대(봉화산) 싸움(양 12.12) 11.23 전봉준 부대 전주에서 금구 원평으로 후퇴함. 11.24 일본군 대대장 남소사랑 전주 입성, 금구싸움 11.25 이두황군 전주 입성, 전봉준 부대 원평 싸움에서 후퇴 11.26 이규태 선봉장 전주 입성(양 12.22) 이규태를 좌선봉장, 이두황을 우선봉장으로 임명 11.27 태인 싸움, 전봉준군 해산 해주 싸움, 농민군 해주감영을 공격하였으나 패함. 손화중 광주 입성 11.28 이규태군 전주에서 일본군 삼미아일부대와 나주로 향함. 남원에서 유봉만이 곡성으로 후퇴하고 박봉양이 또 입성함 11.29 전봉준 입암산성 유숙 11.30 전봉준 백양사 유숙(양 12.26) 12. 1 손화중 최경선이 이끄는 농민군 광주에서 해산(양 12.27) 김개남 태인 종송리에서 잡히다. 12. 2 전봉준 순창 피노리 에서 피체 12. 3 일본군 대대장 남소사랑과 이두황 남원 입성 영광진사 김응선의 민군에 양경수 피체 12. 4 이방언이 이끄는 농민군이 장흥 벽사역 점령 12. 5 이방언이 장흥부 점령(양 12.31) 관군 장성에서 흥덕 고창으로 파병 일본군 장성에서 영광, 나주로 향발 12. 6 관군 순천 입성 12. 7 관군 광양 입성, 김인배 효수됨 이방언의 장흥 농민군 강진 점령 12. 9 농민군 병영 점령 12.11 손화중 피체(양 1895 1.6) 일본군 장흥, 강진 지구 총공격령 김개남 전주에서 참수 12.15 우선봉 약안 입성 농민군 장흥반격 석대들에서 제2차 싸움 12.18 해남싸움, 이규태 해남 입성 12.24 최시형 북접군 충주 외서촌에서 해산(양 1.19) 12.25 이방언 장흥에서 잡히다. 12.27 순무영 철파, 관군 일본군 서울로 환군 1985 1.1 김덕명 원평 안정사동에서 태인 수성군에게 피체 1.24 대둔산에 숨어있던 농민군 30여명이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으로 몰사 3.29 전봉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성두환 등 농민군 지도자들 사형되다.
100년전에 농민들은 무엇을 위해 싸웠나
1) 농민전쟁의 지향
1. 농민적 토지소유 지향을 포함하여 봉건적 경제의 불평등 제거 2. 봉건적 신분 차별로부터 해방 3. 중앙집권층 및 탐관오리의 축출 ---> 농민으로서 자립할 수 있는 안정적 토대 확보와 소상품생산자로 성장하는 것이었고, 이에 장애 되는 사회적 제약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지향에 따라 탐학관리의 축출에서 출발하여, 외국인의 상행위를 금지하는 것과, 부당한 신분 차별 철폐, 지주 토호들의 무단을 제거
○ 국가 정치 체제에 대한 구상
① 1893년 보은 집회에서 외국의 경우를 들어 ‘민회’를 거론 ② 1차 기병시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경군을 격파하고 원평에서 왕의 윤음을 가지고 온 이효응과 배은환, 선전관 이두호와 수행원 2명을 죽임 -- 농민항쟁과 차이 ③ 김개남이 남원부사를 죽임 ④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고 ‘건국’과 ‘국왕’을 칭함 ⑤ 집강소 통치 - 일부 지역에서 중앙의 통치권력을 차단하고 새로운 정치 사회 경제기반을 닦아감 ⑥ 2차 기병시 抗拒君命, 稱曰義兵 ⑦ 전봉준 신문기록에 나타난 구상
전봉준, 손화중과 함께 갑오농민전쟁을 이끈 김개남 장군 추모비
“일본병을 물러나게 하고 악간(惡奸)의 관리를 축출해서 임금 곁을 깨끗이 한 후에는 몇 사람 주석(柱石)의 선비를 내세워서 정치를 하게 하고 우리들은 곧장 농촌에 들어가 상직(常職)이 농업에 종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국사를 들어 한 사람의 세력가에게 맡기는 것은 크게 폐해가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몇 사람의 명사에게 협합(協合)해서 합의법에 의해서 정치를 담당하게 할 생각이었다.”(1895.3.6 ?동경조일신문?) ⑧ 김개남의 開南과 임실 상이암의 전설
* 합의법에 의한 정치, 군주제의 존속, 입헌군주제와 대의제, 관민상화의 원칙에 따른 민중의 정치 참여.
2) 실패에 대한 이해
ㅇ 농민들의 사회 경제적 조건에 규정받는 고립 분산성 - 조직된 전투부대 소수. 통일적 지도부를 구성하지 못하고 지역적 기반에 근거하는 비지역적 전투조직과 지도부의 명령. 통제에 따르는 느슨한 형태의 농민 연합군 <---> 정부군과 일본군은 잘 통제된 정규군. 우세한 화력과 전술 ㅇ 북접의 적극 참여 결여 ㅇ 개화파 정권의 친일화 -- 위로부터 근대화를 추진하던 개화파가 농민군 탄압. 민중의 아래로부터 근대화와 개화파의 위로부터 근대화가 통일을 이루지 못함. 농민군이 일제에 맞서 민족적 단결을 이룰 것을 호소하였으나 개화파의 지주적 개혁과 양반출신의 제한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외세에 굴복하여 농민군 진압. ㅇ일제의 무력침략과 제국주의 열강의 일제 지지
3) 농민전쟁의 의의
* 숱한 희생이 따른 1894년 농민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ㅇ 봉건세력과 일제에 대한 전면적 무장투쟁 경험 - 농민전쟁을 통하여 사회 모순과 적대 세력에 대한 명확한 인식 ㅇ 역사의 주체인 민중이 역사의 전면에 나선 경험 ㅇ 집강소를 통한 지방통치와 자치의 부분적 경험 ㅇ 투쟁을 통하여 개혁의 요구를 부분적으로 관철 - 갑오개혁 - 신분제 폐지 ㅇ 농민전쟁의 뒤를 이은 우리 민족의 반제 반봉건 투쟁, 사회 변혁운동의 정신적 지주 * 1894년 농민전쟁 - 3.1운동 - 자주적 통일민족국가수립운동 - 4.19 - 광주민중항쟁 - 6월항쟁 - 7.8.9 노동자투쟁 ....
1894년 농민전쟁의 현장
(1) 만석보터 - 만석보유지비
전라북도 정읍군 이평면 하송리. 지방문화재 기념물 33호. 고부군수 조병갑이 쌓아 고부농민항쟁의 계기가 된 만석보 터에 1973년 동학혁명기념사업회에서 세운 기념비이다.
1892년 5월에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오자마자 온갖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부잣집에는 공연히 시비를 걸어 부모에게 불효하고 동기간에 화목하지 못하다거나 간음을 했다며 죄를 뒤집어씌워 재산을 빼앗았다. 또 태인 현감을 지낸 자기 아버지의 송덕비를 세운다고 돈을 거두었고, 무고한 사람을 잡아들였다가 돈을 받고 풀어주었다. 조병갑의 탐학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것이 바로 남의 산에서 수백년 묵은 나무를 베어다 새 보를 쌓고 물세를 거두어들인 일이다. 원래 정읍천에 민보(구보 또는 예동보라고 불렸음)가 있는데도 조병갑은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하류에 새로운 보를 쌓고, 첫해에는 물세를 물리지 않겠다던 약속을 어기고 좋은 논에서는 한 마지기당 두 말, 나쁜 논에서는 한 말씩 물세를 걷었다. 이에 고부 농민들은 수십 명씩 관아로 가서 보세를 줄여달라고 진정했으나 오히려 난민 취급을 받고 잡혀 들어가거나 쫓겨났다. 이에 전봉준 등 19명은 1893년 11월 고부군 서부면 죽산리(지금 정읍군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송두호의 집에서 조병갑의 학정에 대한 대책을 모색하였다. 여기서 그들은 조병갑을 죽이고 전주감영을 함락시켜 서울로 가자는 혁명적 모의를 결의하고 사발통문을 만들었다. 그러던 차에 조병갑이 11월 30일 익산군수로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조병갑은 익산으로 가지 않고 뒷손을 써서 1월 9일 그대로 다시 고부 군수 자리에 발령을 받았다. 추이를 지켜보던 고부 농민들은 1894년 1월 10일 배들평 말목장터에 농기구와 죽창을 들고 모였다. 말목장터에 모였던 농민들은 20여리 떨어진 고부관아로 몰려가 1월 11일 새벽 관아를 점령하였다. 그 사이 조병갑은 이미 도망을 치고 없었다. 관아를 점령한 농민들은 일부는 뒷날을 위하여 백산으로 가서 성을 쌓고 일부는 만석보로 몰려가 탐학의 상징인 이 보를 부숴 버렸다. 보의 위치에 대해서, 당시 태인천이 고부군 관할이 아니었으므로 정읍천에만 걸쳐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유지비 옆에는 1987년 세운 ‘만석보유지정화기념비’라는 해괴한 이름의 비 아닌 비가 있다.
(2) 백산성터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지방기념물 31호. 고부농민항쟁과 1차농민전쟁 때 농민군의 주요 거점이다. 해발 47미터 쯤 되는 나지막한 동산이지만 주변이 한눈에 내려다 보여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이다. 부안, 김제, 고부, 태인으로 통하는 교통요지이기도 하였다. 고부항쟁 때 관아를 점령한 뒤 말목장터를 진으로 치고 있던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핵심 농민들은 1월 25일 이곳으로 진을 옮기고 주위 고을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위 군읍에서 기다리던 봉기는 일어나지 않고, 새로 부임한 군수 박원명이 농민들을 회유하여 부농을 비롯한 농민들이 빠져나가자 전봉준은 이곳을 떠나 손화중 접이 있는 무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3월 20일 무장에서 기포한 농민군은 고부관아를 점령하여 사흘을 머문 다음 3월 25일 경 이곳 백산으로 옮겨 진을 쳤다. 흰옷에 죽창을 든 농민군의 위용은 백산을 뒤덮어 “앉으면 죽산이요, 서면 백산”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또한 이곳에서 각지에서 모여든 농민군은 총대장에 전봉준을 추대하고, 총관령에 손화중과 김개남, 총참모에 김덕명과 오시영, 영솔장에 최경선, 비서에 송희옥과 정백현을 임명하여 부대를 편제하였다. 호남창의대장소 이름으로 격문과 4대 강령도 발표하였다.
동학군 4대 강령 (1894. 음 3월 25일)
①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해치지 말라 (不殺人 不殺物) ② 충효를 다하고 제세안민하라 )(忠孝雙全 濟世安民) ③ 일본 오랑캐를 축멸하고 성도를 깨끗이 하라 (逐滅倭夷 澄淸聖道) ④ 군대를 몰고 서울로 들어가 권귀를 진멸하라 (驅兵入京 盡滅權貴)
“격문(1894년 음 3월 27일) 우리가 의를 들어 이에 이르름은 그 본의가 결단코 다른 데에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속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다 두고자 함이다.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히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하고자 함이다. 양반과 부호의 앞에서 고통을 받는 소리(小吏) 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라,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해도 미치지 못하리라 호남 창의대장소 재백산“
(3) 갑오동학혁명 기념탑과 황토현 기념관
1894년 4월 7일 새벽 농민군이 감영군과 보부상 부대로 이루어진 토벌군을 맞아 도망가는 체 이곳으로 유인하여 기습작전으로 승리거둔 언덕에 세운 기념탑. 정읍군 덕천면 하학리와 이평면 도계리 사이에 있다. 해발 35.5미터. 황토언덕이라는 보통명사가 고유명사화한 곳이다. 북동쪽으로는 끝간데 없는 배들평야(이평)이 펼쳐져 있고, 남쪽으로는 해발 444미터의 두승산과 195미터의 천태산이 가로막고 있는 황토재 마루에 서있다. 비면 뒤에는 ‘새야새야 파랑새야’와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가보리’하는 민요가 새겨있다.
황토현 기념관은 1983년 전두환 정권 때 역사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황토재 일대에 대대적인 기념사업을 벌이면서 세웠다.
<참고>
1894년 농민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1) 하나의 사건에 대한 다양한 관점
사건에 붙이는 이름은 그 성격을 함축하여 나타내 주는 말이다. 1894년 농민들은 1월에 고부농민봉기, 3월 무장에서 시작하여 황토재 싸움과 황룡촌 싸움을 승리로 이끌고 4월 전주성을 점령한 뒤 5월 전주에서 협정을 맺고 집강소 체제에 들어갔다가 9월 부터 시작하여 11월 공주전투를 고비로 ‘패배’한 반봉건?반침략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1894년 반봉건 반침략 투쟁은 하나였는데 그 사건에 붙는 이름은 하나가 아니다. ‘동학란’을 비롯하여 ‘동학운동’,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봉기’, ‘동학혁명’, ‘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전쟁’, ‘갑오농민전쟁’, ‘1894년 농민전쟁’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 1894년에 일어난 농민봉기를 보는 관점과 성격 규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만석보 유지비
농민들이 봉기했을 때 지방의 관리나 정부의 핵심 지배층은 이를 ‘동학’이라고 하는 특정 사교(邪敎) 또는 사술(邪術)을 믿는 집단’의 ‘동도(東徒)’, ‘동비(東匪)’가 일으킨 ‘난’이라 불렀다. 그들은 각지에서 일어난 농민들의 봉기를 동학이라는 사술을 믿는 소수 동학도가 세상을 어지럽히는 행위라고 선전하여, 무력탄압을 정당화하고, 일반농민들을 농민군과 분리시킬 뿐 아니라 자신들의 행정의 책임을 숨기려는 의도에서 ‘동도’, ‘동비’,‘동학란’으로 몰았던 것이다. 농민군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당시 지식인들의 인식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농민전쟁의 원인 배경을 고찰하고 진행과정을 조사하여 기록해 놓은 ‘오하기문’(梧下記聞)과 이를 토대로 정리한 ‘매천야록’(梅泉野錄), 농민전쟁의 사후 수습책을 제시한 ‘갑오평비책’(甲午平匪策)을 써서 농민전쟁 연구의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매천 황현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에게 농민군은 ‘동비(東匪)’, ‘적(賊)’, ‘적당(賊黨)’이었으며 농민전쟁은 ‘비란(匪亂)’, ‘난(亂)’이었다. 그는 농민전쟁이 진압된 후 사후수습책으로 농민군 지도자들은 물론 동학전염자와 절도자들을 찾아내어 모두 처형할 것을 강조하고, 비류(匪類)중에 죽일만한 자를 모두 죽여도 만(萬)인에 지나지 않으니 결코 참혹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甲午平匪策’). 일제 식민지 어용학자들은 조선인의 민족성으로 ‘당파성’을 강조하면서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였다. 그들은 당파성의 한 예로 ‘동학당의 난’을 들었다. 동학이라는 ‘사교집단’의 파당적인 행위가 ‘동학당의 난’이며 그 주체는 사교도들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1894년 반봉건 투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놓고 시각이 크게 ‘동학혁명’과 ‘농민전쟁’으로 나뉘어 진다.
2) 동학혁명인가?
‘동학혁명’으로 보는 쪽에서는 사상과 조직 주체면에서 동학이 ‘혁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동학혁명의 지도부가 동학의 접주였고, 참여대중도 동학도였으며 종래 고립 분산적이었던 농민봉기가 동학의 포접조직을 통하여 통일적인 농민봉기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학자들의 이러한 견해는 일제 식민지 어용 사학자들이 부정일변도로 평가하였던 ‘동학’을 긍정적?적극적으로 평가하려는 측면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동학혁명’이라는 말이 일반인에게까지 익숙하게 된 것은 특정 종교 집단의 교세 확장의 논리나 1960?70년대 군사정권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선전의 힘이 컸다. 공주 우금치에 세워진 ‘동학혁명군위령탑’의 비문과 뒤에 새겨진 감사문이 그 관계를 한마디로 잘 보여주는 예이다. 비문에는 ‘5.16혁명 이래의 신생조국이 빛나는 동학혁명군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빛나는 10월유신의 한둘을 보내게 된 만큼 모두가 그 님들의 넋을 달래기 위하여’ 위령탑을 세우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탑 뒷면에는 천도교중앙총부가 이선근 박사를 위원장으로 동학혁명군위령탑 건립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박정희 각하께’ 품신하여 명예회장을 맡아 탑 이름을 써주고 금일봉까지 내려 준 것을 감사하는 포덕 114년 11월 11일자 감사문을 새겨 놓았다. ‘5.16혁명’과 ‘10월유신’이 ‘동학혁명’의 정신을 이어받았다고 미화하는 것이다. 정권에 의한 역사의 왜곡은 이에서 끝나지 않는다. 전두환 정권은 황토현 기념관이나 만석보유지비를 역사 정화 사업의 일환으로 세웠다면서 농민전쟁의 역사를 ‘정화’하였다. 특정교단이 자기선전의 일환으로, 또는 군사 독재정권이 자기를 정당화하려고 선전했던 ‘동학혁명’에서 ‘혁명’도 당시의 역사적 조건과 단계, 농민봉기의 전개과정에 맡는 말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혁명이란 새로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심화되는 가운데 새로운 생산력의 담당자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낡은 생산관계를 깨뜨려 한 사회구성에서 다른 사회구성으로 사회가 질적으로 변화 발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1894년 사건은 정치 경제면에서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으며 그 주체가 권력을 장악하여 사회구조를 바꾸지 못했다. 또한 ‘농민혁명’이란 말도 엄밀한 역사의 용어가 아니다. 혁명적 정세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당시는 부르주아혁명 단계인데 그러한 혁명이 ‘농민혁명’ 일 수 없으며 엄밀한 역사용어도 아니다. 국정 국사교과서에 실린 ‘동학농민운동’은 더욱 비역사적 규정이다. ‘운동’이란 말은 사회 역사의 산물인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지칭하는 말로는 적합하지 않다. ‘동학혁명’이나 ‘동학농민운동’ 따위의 주장은 동학을 중심으로 1894년의 농민봉기를 파악함으로써 당시의 모순 구조와 투쟁의 주체, 농민군의 지향, 반봉건.반침략 투쟁의 성격을 동학조직과 동학사상 속에 묻어 버린다. 그러면 우리는 1894년의 사건을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떠한 사회 모순( -->계급적?민족적 대립) 속에서 누가, 어떠한 시대와 역사의 과제를 해결하여, 어떠한 사회를 지향하였으며, 가장 치열하고 올바르게 실천=투쟁하였는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우리는 ‘1894년 농민전쟁’이라고 이사건의 성격을 규정한다.
3) 1894년 농민전쟁
1894년 농민전쟁 당시에도 농민군 지도자들은 농민전쟁의 주체를 ‘동학도’라고 파악하지 않았다. 전봉준은 원민(寃民)과 동학도가 합세하기는 하였으나 동학도는 적었고 원민이 많았다고 하였다. 농민군의 주요구성원인 이 원민이 누구인가. 제 1차 농민전쟁을 전개하면서 3월 27일 발표한 다음과 같은 격문에 보이는 ‘민중’이 바로 이들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의를 들어 이에 이르름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의 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다 두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코자 함이라. 양반과 부호의 앞에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방백과 수령의 밑에 굴욕을 받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라.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치 못하리라. 갑오 3월 27일 호남창의대장소 재백산 ”
양반과 부호가 아니며 탐학한 관리와 회포한 강적의 무리 앞에 고통을 당하던, 그래서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여 자신들의 생활상의 요구를 실현하고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려 투쟁에 나섰던 당시의 민중이 바로 1894년 농민전쟁의 주체였다. 1894년 농민봉기를 ‘농민전쟁’으로 보는 시각은 무엇보다 이 사건이 어지럽고 급박한 국내외 정세를 배경으로 봉건사회 해체기에 일어난 내전적 양상의 반봉건.반침략 농민전쟁이라는 것이다. 1894년 농민전쟁은 조선 봉건사회 해체기에 몇십만 명의 농민이 참가하여 지배계급에 대항하여 근 1년여에 걸쳐 내전적인 투쟁을 벌인 것이며, 아직 근대 부르주아혁명까지는 나아가질 못했고, 우리의 경우 2차 농민전쟁 때는 일제의 침략에 맞선 민족투쟁을 벌였다는 특성을 안고 있다. 또한 농민전쟁으로 보는 시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주체가 하층 농민을 중심으로 한 민중이었다는 점이다. 농민전쟁에 참여한 하층 동학신도들도 종교적 이해 때문에 참가한 것이 아니라 벼랑 끝에 몰린 자신들의 삶을 타개하려 참가했다는 점에서 일반농민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농민전쟁의 지도부는 사회변혁을 꿈꾸는 선진적 사상을 지닌 양심적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이 동학의 포접 조직을 이용하여 농민층을 조직, 동원하고 동학사상을 변혁의 이념으로 재해석한 점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1894년 농민전쟁에서 동학교문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거나 동학사상이 농민전쟁의 지도이념이었던 것은 아니다. 동학교단의 지도부는 농민전쟁을 지도할 만한 역량도 의지도 계급적 의식도 없었다. 오히려 농민전쟁의 측면에서 보면 부정적인 역할을 더 많이 하였다. 농민전쟁 이전 보은집회 때도 하층 농민들의 투쟁의 열기가 고조되고 정부의 압력이 강해지자 동학 교단의 지도자였던 최시형과 서병학은 이를 해산시키고 도주하였다. 그 뒤 서병학은 제2차 농민전쟁 때 농민군을 탄압하는 데 앞장서기도 하였다. 또한 최시형을 중심으로 하는 동학교단의 중심부는 제1차 농민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제2차 농민전쟁에도 늦게야 참여하여 적절한 시의를 놓치게 하였으며 투쟁에 철저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동학교단의 조직을 보전하고 확대하는 것에 주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농민군 지도자들이 1차 농민전쟁의 커다란 승리였던 황토재와 장성 월평 황룡촌 전투 뒤 “아비의 원수를 갚고자 할진대 마땅히 효할지요 인민의 곤궁을 구코져 할진대 마땅히 어질지라. 효도를 보이는 바에 인륜이 밝아지는 것이요 어짊을 베푸는 바에 민권이 회복되니라”라고 하여 그 뜻을 축소 왜곡하였다. 2차 농민전쟁 전에는 “ 무릇 우리 도는 남접 북접을 따질 것 없이 모두 용담(최제우)의 연원이나, 도를 지키고 스승을 높이는 자는 오직 북접이라, 지금 들으니 호남의 전봉준과 호서의 서인주(서장옥)가 문호를 별도로 세워서 남접이라 이름하고 창의함을 빙자하여 평민을 침해하고 도인을 해침에 끝이 업다 하니 이를 일찍 끊지 아니하면 선과 악이 구분되지 않을 지니 원컨대 우리 나라 각 포에 우리 북접을 신앙하는 자는 이 글이 도착하는 대로 ...사문난적을 일제히 토벌함이 옳을 것이다.”라 하여 남접의 농민군을 토벌하려 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비해 농민군은 스스로의 활동에 대한 의미 부여에서, 운동과정에서 표방하는 사상에서, 공격목표에서, 요구사항과 지향에서, 전개과정에서 나타나는 양상에서 교단측의 관점을 드러내거나 종교적 과제를 전혀 표방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극적인 동학교단에 대해서 공격하려고 까지 하였다. 따라서 동학교단이나 동학사상이 적극적으로 ‘동학혁명’을 주도하고 사상적 추진력으로 작용했다는 주장은 사실과도 맞지 않으며 관점에도 문제가 많다. 그러한 관점의 연장에 서면 자본주의 세계 체제 속에서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계급문제’와 ‘민족문제’, 그 해결의 중심 주체인 노동자계급, 그리고 민중의 위치와 역할을 통일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4) 1894년 농민전쟁의 올바른 인식을 위하여
① 동학중심의 이해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 사상사에서 동학의 역할과 의미는 정당하게 파악하고 자리를 매길 필요가 있다. 그리고 동학교단의 최고 지도자였던 최시형이 오래 동안 동학을 전파하고 핍박받는 기층 대중을 종교적으로 구원하려는 의지와 노력은 그것대로 평가받을 부분이 있다. 1894년 농민전쟁에서도 동학의 조직과 사상이 한 역할을 부분적으로는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동학의 조직과 사상이 농민전쟁을 주도했다고 보는 것은 사실과도 다르다. 오히려 농민전쟁을 놓고 보았을 때는 동학은 긍정적 역할보다는 부정적 역할이 컸다. 그런데도 사건을 함축하여 드러내주는 이름에 동학을 붙이는 것은 잘못이다. 3.1운동에서 33인이 모두 종교지도자였지만 그것을 종교운동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가까이 6월항쟁에도 종교조직이 참가하였지만 그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농민전쟁의 역사에서 배우고 계승하고자 하는 것은 동학사상 자체가 아니다. 동학을 이어받았다는 천도교가 ‘동학혁명’을 강조하면서 그 뒤 민중운동, 사회변혁운동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였으며, 외세의 규정을 강하게 받는 분단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중이 치열하게 민주화와 통일운동 벌일 때 무엇을 하였는지도 주의를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② 전봉준. 전라도 중심으로 보는 농민전쟁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한다. 1894년 농민전쟁의 농민군은 통일된 전투부대라기 보다 지역별로 독자적인 영향력을 갖는 농민군 지도자들이 이끄는 농민군 연합부대였다. 예를 들어 집강소 체제 이후는 전봉준의 영향하에 있는 농민군보다 김개남 농민군 부대의 세력이 더 컸다. 지역도 함경도를 뺀 전라도 뿐 아니라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전역에서 농민전쟁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농민군 부대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 성향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농번기에 농사를 지어야 하는 층이 주력인 농민군과 농사지을 곳조차 없는 유민들이 주로 참여하는 농민군 부대가 지역에 따라 달랐다. 농민군의 주요 구성이 어떠한가에 따라 투쟁 양상이나 집강소기 활동, 노선에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농민전쟁의 주요 흐름에 합류하지 않은 각지의 자연발생적 농민항쟁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이 또한 농민전쟁의 내용으로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지도층을 분석할 때도 각 농민군 부대에 참여한 농민대중의 구성과 그들의 이해와 요구 지도자의 이념과 노선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를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사회 변혁운동에서 지도자들의 조직력과 재능, 의식은 중요한 문제이다. 지도자에게는 대중을 조직하고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경제력이나 지식, 힘이나 통솔력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민중이 지도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지도되는 것은 아니다. 지도자는 민중의 이해와 요구의 산물이기도 하다. 투쟁의 지도자는 자기 뜻대로 민중을 이끌어 가는 존재가 아니라 민중의 요구를 올바로 파악하고 가장 잘 대표하는 사람이다. 아울러 사회 발전 방향과 당면 정세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민중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민중과 함께 앞장서서 실천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민중은 자신의 의지를 올바로 반영할 수 있는 지도자와 함께 사회 모순을 해결하려는 투쟁에 앞장섬으로써 요구를 실현하고 역사를 진전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 때 광범위한 참가층인 민중과 지도자는 투쟁의 전개과정에서 서로 영향을 미치며 변화해 가는 것이다. 투쟁을 통한 변화, 민중과 지도자 사이에 서로 미치는 영향력의 관계를 무시하고 농민전쟁을 지도자 중심으로만 파악하는 것 또한 ‘영웅주의’적 이해이다. 농민전쟁에서 구체적으로 본다면 전봉준과 김개남은 전주성 철수 이후 김학진의 제의, 집강소 체제의 운영, 대원군과의 협조, 해학 이기의 농민군 동참 요구, 8월 25일 김개남 부대의 독자적 남원대회 들에 대해 서로 인식이 달랐다. 이것을 단순히 두사람의 심성이나 ‘야심’의 차이 때문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이는 지도자들의 정세인식, 조직?투쟁 노선과 성향의 차이와 아울러 지역과 부대 구성원의 차이를 반영하는 면도 있었다. 이 점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③ 100여 년 전의 역사적 과제와 100년 후 오늘 우리의 역사적 과제는?
역사의 변화 발전은 한 사회에서 없애야 할 것을 없애고 있어야 할 것을 만드는 투쟁을 통한 파괴와 노동을 통한 창조의 과정이다. 곧 역사는 투쟁의 역사, 노동의 역사이다. 당시 봉건지배 대 농민 사이의 계급문제와, 외세 대 민중의 민족문제는 그 이후에도 역사의 발전 단계와 사회구성을 달리하면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 100년전 역사의 과제가 반봉건 반침략이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해결하여야할 시대의 과제는 무엇이며 과제해결의 기본 주체는 누구인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역사인식은 현실인식을 반영하며, 올바른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현실인식의 폭을 넓힐 수 있다. 모든 사회 의식은 사회적 존재를 반영하며 존재에 능동적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때문에 역사인식 현실인식은 자신의 존재적 삶을 반영하며 끊임없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결단과 실천을 요구한다.
역사기행의 모든 자료는 역사연구소에서 제공받았음을 밝힘니다. |
출처: 산과물 원문보기 글쓴이: 오늘은 어제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