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를 맞추어 밤차를 히트시키고 난후 저를 대하는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습니다. 방송가 에서도, 그렇게 저를 무시하던 쇼 PD들도 제가 방송국에 가면 반가워했지요. 참 사람 팔자 시간문제 더 군요.
그러나 저의 신혼 생활은 힘들게 계속 되였습니다. 큰 애는 태여 나고 집주인은 방을 빼달라고 재촉하고... 하여튼 사람은 생활에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누가 무어라 해도 금전적으로 고통을 받으면 살맛이 안납니다. 그러나 이게 마음대로 됩니까? 더구나 연예인 처지에...
저는 연속적으로 히트를 쳐야 했습니다. 이 길 만이 제가 살길이라 생각하구요. 그 당시 사회적으로 떠들썩한 사건이 있었는데 1987년 우이동에서 살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카바레 에서 만난 두 남녀가 불륜의 관계를 맺었다가 여자가 배신을 하니까 제비족인 남자가 살인을 한 사건 이였습니다. 그 당시 장미원 사건이라고 사회에 이슈가 되었던 사건이지요. 저는 이 내용을 음악으로 만들기로 하고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대중가요란 항상 그 시대의 이야기를 해야 생명력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죠. 제목은 제비족이 관계된 사건이라 “제비처럼” 으로 정하고 작곡을 시작 했습니다. 또 지난번처럼 백지 오선지를 펼쳐놓고 무작정 써야 되는 방식입니다. 제비가 봄에 오니까 첫 가사는 꽃 피는 봄이 오면 으로 시작 했습니다. 이렇게 몇날 며칠 을 썼습니다. 수정하고 또 쓰고 수정하고 또 쓰고... 대강 곡을 쓰다보면 빠르게 나오는 음악은 몇 분에도 씁니다. 그렇지 않으면 몇 달에도 해결이 안 됩니다. 저는 작곡을 주로 기타를 치면서 하는데 워낙 돈이 없다보니 다 낡은 기타 밖에는 없었지요. 기타가 휘여서 음도 잘 안 맞고 또 손가락이 그 휜 기타를 치니까 거의 굳은살 때문에 손이 발바닥 같았습니다.
죽으라고 기타를 쳤습니다.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했으므로 사력을 다하여 기타를 쳤습니다. 며칠 만에 이곡을 완성 시킨 다음에 회사를 가서 신곡을 써왔다고 하니까 이미 히트를 시킨 경력 때문에 아주 반가워하는 것이었죠. 동지섣달에 꽃 본 듯이요. 저의 매니저 박영걸 씨는 저에게 윤승희 라는 신인 가수를 소개 시켰습니다. 저는 어떤 가수에게도 많은 곡을 준적이 없습니다. 줘봐야 한곡 두곡 정도 이지요. 저는 다작 작가가 아니고 소수의 곡을 쓰는 스타일입니다. 어떠한 곡을 쓰다가도 내 맘에 안 들면 곧 찢어버리기가 일수였으니까요.
윤승희 라는 가수는 모델 출신으로 그 당시 나이가 많았습니다. 부산 아가씨였는데 집이 한남동 이였지요. 또 그 당시에도 연습실이 없어 그 집에서 연습을 시작 하였습니다. 기타를 들고 그 집으로 출근을 하였지요. 원래 작곡가와 가수는 서로 견제를 하는 그런 사이입니다. 왜냐 하면 가수의 입장에서 보면 작곡이 마음에 안 들면 부를 수가 없고 작곡가의 입장에서 보면 가수가 노래가 시원치 않으면 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사실 그런 사이에서 다른 감정이 개입 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보편적인 사고로 보면 그렇습니다. 저는 그 당시 꼴통 작곡가로 소문이 났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타협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운이 좋았는지 윤승희 에게 이 곡이 잘 맞았지요.
또 이곡도 데블스의 연주로 하기로 하고 연습에 들어갔습니다. 한번 히트를 친 콤비 었으므로 손발이 잘 맞았지요. 그때 밴드 마스터 김명길 씨가 기타를 좋은 것으로 바꿨다고 저에게 자랑을 하였지요. 깁슨 이라고 아주 비싼 기타였어요. 그러나 나는 전 기타를 치라고 했습니다. 전에 치던 기타가 싸더라도 이 노래에는 잘 맞기 때문 이었지요. 이 문제로 심각하게 대립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저의 말을 듣기로 하고 녹음에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비싼 악기라 해도 느낌이 중요하기 때문 이지요.
전번에 “밤차” 로 시간을 많이 끌었었기에 이번에도 녹음 기사가 많이 긴장하는 모습 이였지요. 전과 같이 녹음시간 무제한.... 내가 하고 싶은 데로 시작을 하였습니다. 데블스 에 장점이자 단점인 악보를 무시했으므로 또 이번에도 말로 하여 편곡을 하였지요. 싸구려 기타지만 마스터 김명길 씨 에게 잘 어울리는 기타로 녹음이 시작 되었습니다. 음악 이라는 것이 어떻게 하다보면 동그랗게 뭉치는 것을 느낄 때가 있는데 바로 이것이 좋은 음악을 만드는 순간이 됩니다. 바로 이 노래가 뭉쳐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모든 연주자들이 느낌을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음악이 뭉치면 그 노래는 히트를 칩니다. 녹음기사 정용원 씨가 벌떡 일어섰습니다. 얼굴이 벌건 채로 이렇게 말했지요. 이 노래는 히트다...
과연 그의 말대로 대 히트를 쳤습니다. 이 노래는 봄을 주제로 한 노래지만 이 음반은 가을 에 출반을 하였습니다. 그것도 가수 윤승희 씨가 음반이 나오자마자 결혼을 하는 바람에 가수가 없는 발표곡이 되었지요. 그러나 그때 워낙 획기적인 노래였으므로 각 방송국에 음반을 안 주어도 각자가 알아서 구입하여 틀 정도 였으니까요. 가을 에서부터 겨울까지 어디를 가나 이 노래만 나왔습니다. 목욕탕 에서도 길에서도 버스 안 에서도 식당 안 에서도 어디를 가나 “제비처럼” 이 나왔습니다.
저는 이제 명실상부한 히트 작곡가가 된 것입니다. 유승엽 이라는 이름을 일반인 들은 몰라도 관계자들은 저의 이름을 기억하기 시작 하였지요. 그래서 보너스를 조금 받아 신촌에 사글세방 에서 화곡동 전세방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비록 방 한 칸 이지만 저에게는 감지덕지였지요. 많은 사람들이 저를 찾기 시작 하였지요. 모두가 히트를 치기 위해서지요. 그러나 어떻게 히트곡이 계속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이 원리를 잘 알므로 제 행동을 오버하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해서 신인가수 키워 준답시고 나쁜 짓은 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작곡가 생활 양심 바르게 살았습니다. 비록 가난은 했지만... 어쩌면 이런 부분이 저에게는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 있었겠지요.
몇 달을 제 가 쓴 노래가 전국을 뒤덮어 나오니까 처음에는 실감이 안 났으나 그것도 한참 들으니까 당연 한 듯이 느껴졌습니다. 이 음반은 그 당시 칠팔십 만장이 나갔는데 그때는 플라스틱으로 만드는 음반 이였기 에 이정도의 수량을 음반으로 찍으려면 공장의 모든 프레스 기계를 밤새워 작동을 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지요.
그러나 이렇게 해서 연속적으로 히트를 친 매니저 박영걸 씨 는 저 와의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 하였습니다. 모든 인생살이 가 비슷하지만은 이 분도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해결하려했습니다. 더구나 매니저라는 사람들이 매일 모여 벌이는 화투판은 저에게는 아주 실망스러웠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화투나 그런 비슷한 것 도 모릅니다. 그런 시간이 있으면 창의 적인 것 을 생각하는 시간으로 보내고 싶기 때문이지요. 제 인생을 이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다. 라고 판단을 한 저는 그곳을 떠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첫댓글 그땐 노래만 불렀지 작곡하신 분이 선생님인 줄은..................인연이란............
즐겨 듣던 노래가 그렇게 탄생 한거군요...역사를 보는거 같습니다...
저도 스탠드바에서 밴드에 맞춰 즐겨 불렀던 노래입니다. 물론 밤차도 많이 불렀죠~ 옛날 생각나네요`
조금 글 이 늦었습니다. 10주년 행사 준비하다 보니까 그렇게 되였습니다. 허긴 뭐 바쁠것이 뭐 있겠습니까 천천히 인생의 여정을 풀어보지요.
어렸을적얼거리며 다니던 노랜데....^^ 제비처럼 배경내용은 비극이지만 노래는 넘 좋아요....
정말 노래는 많이 들었지만 제스타일이아니라서 관심을 안가져 누가작곡가고 누구노래인지 몰랐습니다.그러나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