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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근대문화역사길(20210313)
선학곰탕-장옥거리-백범친필시비-진해우체국-제황산공원 진해탑-
시월유신기념탑-군항마을역사관-원해루-수양회관-마크사 거리-
군항마을 테마공원-이순신 장군 동상-진해역-여좌천 로망스 다리-
하늘마루 다리-임지교-진해문화센터-진해드림로드 입구
역사의 돛단배에 몸을 싣고 흘러, 흘러서
(1부에서 이어짐)
일제강점기 때 요항부(要港部) 병원장 관사로 쓰였으나 지금은 대중음식점으로 바뀐 선학곰탕집은 오후 2시에 문을 닫는다고 한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속천항에서 바람을 일으키며 힘껏 내달려 2시 못 미쳐 선학곰탕집에 도착했더니 임시휴업 중이다. 기운이 쭉 빠졌다. 문이 잠겨 있어서 집 안에 들어가서 내부를 구경할 수도 없다. 중요한 두 목표 중 하나에 실패했다. 이제 어쩐담? 허탈한 기분을 날리며, 선학곰탕집 앞쪽 큰 거리, 長屋의 거리로 나갔다. 일본식 가옥 나가야(長屋)가 일제강점 시기의 건물 모습을 간직한 채 2층으로 줄지어 서 있어서 장옥(長屋, 나가야)의 거리로 명명되는 곳이다.
진해 근대문화역사길 첫 두 곳을 보고서 나오니 건너편에 가로수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하얗게 반짝인다. 길을 건너 하얗게 빛나는 벚꽃 아래에 섰다. 벚꽃의 명소 진해 벚꽃 아래서 잠시 숨을 돌렸다. 1945년 조국이 광복된 후 식민지 잔재 청산 명분으로 일본인들이 진해시가지에 심은 벚나무들은 순식간에 베어졌다. 그러다가 1960년대 중후반 벚나무의 원산지가 제주도 왕벚나무로 알려지면서 다시 진해시가지에 벚나무들이 심어졌다고 한다. 벚나무의 고향이 일본일까? 일본이 벚나무를 국화로 삼았다고 하여 한국인이 벚꽃을 좋아하면 친일파가 되는가?
'바다를 제압한다.'는 진해(鎭海)는 일본이 러ㆍ일 전쟁(1904~1905년)에서 승리한 후 한반도를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 삼기 위해 만든 도시다. '국내 최초의 계획도시' 타이틀을 가졌지만, 그 목적이 '군사 전진기지 구축'에 있었기에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가 서려 있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1910년부터 진해항을 군항기지로 건설하면서, 진해 시가지도 건설되었다. 중원광장을 중심으로 하여 남원광장과 북원광장, 이 광장들을 연결하여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도록 건설한 계획형 도시가 진해 시가지라고 한다. 진해 탐방은 이 세 곳의 광장을 차례로 돌아보면 중심 되는 곳은 대체로 둘러보게 되고, 진해 시가지의 지리적 감각도 생겨나 그 윤곽이 잡히는 것 같았다. 먼저 남원광장의 백범 김구선생의 친필시비를 찾아갔다.
경남 창원시 진해구 태평동에 위치하고 있는 남원광장은 북쪽으로는 중원광장으로 이어지고 남으로 해군사관학교 통해문으로 이어진다. 이곳 남원광장에는 경남 창원시 근대건조물 2호 백범 김구선생 친필시비가 세워져 있다. 백범의 친필시는 이순신 장군의 오언율시 '진중음(陣中吟)'의 5구와 6구인 경련(頸聯)(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이 새겨져 있다. 친필시비를 중심으로 양쪽에 '獨立萬歲' 표제 아래 김구 선생의 연보를, '鵬程萬里(붕정만리)' 표제 아래 김구 선생의 어록에서 발췌한 짧은 문장을 새겨 놓아 백범 선생을 추모하고 있다.
허기가 진다. 방앗간잔치국수 집에서 김밥 한 줄을 먹고, 목표 두 곳 중의 나머지 한 곳인 제황산공원으로 향한다. 중원광장에서 진해 우체국을 거쳐 제황산공원 입구로 갔다. 제황산공원 표석을 지나 1년 계단을 오르며 제황산과 진해탑에 대한 여러 해설을 보면서 드디어 365번째 계단을 딛고 제황산공원 정상에 올랐다. 진해탑 안내도와 故 현시학 해군 소장의 흉상을 보고서 진해탑 입구로 들어섰다. 8층 전망대,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가슴이 울렁거린다. 진해탑 8층 전망대에서 진해시가지를 내려 보아야 진해시가지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잠시지만 벅차게 사방팔방을 돌아보며 내가 알고 있는 지리적 위치를 확인했다. 가슴에 막혔던 무엇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첫 목표는 실패했지만 나머지 하나는 성공했다.
목표에 성공하여 마음이 자꾸 흥분한다. 시간이 넉넉할 것 같았는데 뭔가 자꾸 버걱거리며 순조롭지 않다. 중원광장 진해우체국 옆 ‘창원 아이세상 장난감도서관’ 입구 정원에 있는 시월유신기념탑을 보면서 마음이 착잡하다. 중원광장 건너편으로 건너가 군항마을역사관 전시를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해치우고, 그 앞의 진해 마크사를 보고서 우왕좌왕 갈피를 못 잡는다. 군항마을 테마공원 맞은편 원해루와 수양회관으로 건너갔다.
1949년 건립된 영해루(榮海樓)는 현재 원해루(元海樓)로 개명되어 지금도 중국음식점으로 운영되고 있다. 영해루(榮海樓)는 6ㆍ25전쟁 당시 중공군 포로 출신인 장철현씨가 개업한 중국음식점으로 수많은 명사들과 이승만 전 대통령까지 방문한 식당이었으며, <장군의 아들>을 촬영한 장소로도 유명하다고 설명안내판에 적혀 있다. 길 건너 맞은편에 전형적인 중국풍 건물인 붉은 지붕 건물 육각집이 보인다. 1938년 건립된 붉은 지붕의 3층짜리 건물은 '뾰족집'으로도 불린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고관대작과 상류층 인사들이 드나들던 고급 요정으로 추정한다는데, 현재는 곱창전골과 불고기전골을 요리하는 한식당이다.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서 살펴보기만 했다.
마크사 거리, 군항마을 테마공원으로 되돌아와서는 부리나케 북원광장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을 찾아간다. 세종대로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만 보아오다가 우리나라 최초의 이순신 장군 동상을 진해에서 만났다. 진해의 이순신 장군 동상은 대한민국 충무공 동상 중 전국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동상이라고 한다.
6ㆍ25전쟁 당시 국난 극복을 위해 국민들이 십시일반 모은 기금으로 제작되었으며, 1952년 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 36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다. '진해군항제'도 충무공 동상을 세우고 추모제를 지내면서 시작된 축제라고 한다. 창원시 근대건조물 제1호이다.
오랜 역사가 묻어나는 충무공 동상 좌우로 충무공의 어록과 詩, 5대 충무공 정신, 임진왜란 당시의 충무공 3대 해전과 진해의 3대 해전인 합포ㆍ안골포ㆍ웅포 해전 등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일본이 계획하여 건설한 근대 군항 도시라고 하지만, 진해는 이미 그 이전부터 군항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진해의 충무공 동상에 대한 논란이 있다. 동상 제작자가 친일파 윤효중이라는 사실과 이 자리에 백범 김구 선생의 친필 시비가 있었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싫어하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북원광장의 김구 친필 시비 자리에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친필시비는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 윗부분이 깨어지게 된 것을 4ㆍ19혁명 이후 남원광장에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또 최근 거대한 이순신 장군 타워 건립 계획도 애국정신과 우상화, 자연훼손 등의 문제로 논란이 되고 있다. 진해만이 내려다보이는 대발령쉼터(옛 미군통신부대)에 2021년 완공을 목표로 하는 높이 100m의 거대한 '이순신 장군 타워' 건립은 애국정신을 함양하고 지역 발전을 위한 관광 산업이므로 별 문제가 없는 것일까?
마음이 급해진다. 이제 진해역을 거쳐 여좌천을 따라올라 장복산 조각공원으로 가야 한다. 아담한 진해역사와 가시나무, 진해역 담장에서 장복산과 하늘마루, 덕주봉을 살피며 송백 걸어서 국토일주 종주대원이 모두 도착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한다. 진해역 지붕창 옆 지붕에 수많은 비둘기들이 모여서 따스한 오후의 봄볕을 즐기고 있다.
진해역에서 로망스 다리 가는 길 지하보도를 걸어올라 아직 벚꽃이 피지 않은 여좌천 덱 길을 따라갔다. 여좌천 이름은 원래 한내라고 불리었다가 광복 뒤에는 大川이라 바뀌게 되고, 2002년 MBC 드라마 '로망스' 방영 이후 여좌천으로 통칭된다고 한다. 여좌천변 덱 길에 산책 나온 가족과 연인들이 많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움이 크리라. 여좌천 덱 길 세 번째 다리, 그 유명한 로망스다리에 도착했다. 화려한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꽃눈이 흩날리는 봄날의 여좌천 로망스다리의 풍경을 상상한다. 연인들이 사랑의 꽃을 활짝 피워내 하늘을 훨훨 날아가고 있는 풍경도 환각된다.
여좌천 덱 길 12번째, 마지막 다리 임지교를 지나서 쏜살같이 달렸다. 진해대로와 만나서 진해문화센터로 건너가 진해대로를 따라, 다시 장복로사거리에서 장복산길을 따라 숨이 가쁘게 걸었다. 진해드림로드 서쪽 출입구, 남파랑길 8코스의 종착지요 9코스의 시작점에 도착하니 오후 4시 39분, 17.2km를 걸었다. 8코스 종주대원들은 이미 모두 도착하여 서울로 출발할 시각만을 애태우고 있었다. 컵라면에 막걸리 두 컵을 마시고 승차, 버스는 서울을 향하여 출발한다. 4시 51분이다. 진해에서 5시간 15분 정도의 시간이 꿈결처럼 흘렀다. 그 행적, 견문, 풍경, 만난 사람들의 인상과 대화, 아직도 마음에서 흐르고 있다.(2부 마침)
요항부 병원장 관사(진해 해군통제부 병원장 사택)
건립연도 : 1938년
일제 강점기 당시 진해 요항부(해군 통제부) 병원장이 살던 관사였으나, 지금은 대중음식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ㄱ 자형의 평면에 주 현관이 돌출형으로 설치되어 있으며, 내부에서 손님을 접대하는 응접 공간은 서양식으로, 가족들의 주거 공간은 전통적인 일식으로 되어 있는 목조주택이다. 2005년 9월 14일 등록문화재 제193호로 지정되었다.(설명안내판)
장옥(長屋, 나가야) 거리
건립연도 : 일제강점기
러일전쟁 직후 진해를 군사도시로 건설할 때 일본식 건물인 장옥(長屋, 나가야)을 만들었는데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 1910년대 진해 도시 계획시 도로변 건축물은 2층 이상이 되어야 허가를 해주었다. 장옥은 현재의 다가구 주택형태로 당시 1층은 상점, 2층은 주택으로 이용되었다.(설명안내판)
뒤에 보이는 문은 구3정문을 새롭게 준공한 통해문(統海門), 2019년 2월 26 준공식
해군 교육사령부 예하의 기술행정학교, 정보통신학교, 실습전대, 해군사관학교, 8전투훈련단 등
해군의 주요 교육훈련부대들을 들어가기 위한 관문. 진해 군항제 기간 동안 개방됨.
"이 시비는 광복 이듬해인 1946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 선생이 진해를 방문하여 해안 경비대 장병들을 격려하고 조국 해방을 기뻐하면서 남긴 친필시를 화강암에 새겨 만든 비석이다. 비문은 이충무공 전서에 실려 있는 이순신 장군의 憂國漢詩 '진중음(陣中吟)' 중 일부 구절로 임금의 피난 소식을 접한 후 나라의 앞날에 대한 근심과 장부의 충혼을 느낄 수 있는 글귀이다.
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서해어룡동맹산초목지)
바다를 두고 맹세하니 물고기와 용이 감동하고 산을 두고 맹세하니 초목이 알아주는구나.
건립 초기에는 북원광장에 세워져 있었으나 4ㆍ19의거 이후 이 충무공의 전승지인 옥포만이 바라다 보이는 이곳 남원광장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비석 측면에는 아래와 같이 음각되어 있다.
大韓民國 二十九年 八月十五日 金九 謹題(대한민국 이십구년 8월 15일 김구 근재)"
'大韓民國 二十九年 八月十五日 金九 謹題'라는 기록을 통해
김구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대한민국 건국의 해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해탑이 있는 제황산공원을 등지고 중원광장 동쪽 모퉁이에 서있는 하얀 건물은 진해우체국으로, 손예진·조승우·조인성 주연의 영화 ‘클래식’ 촬영지로 고교시절 아름다운 연애를 상상하는 청춘들에게는 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진해우체국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우체국이다. 1981년 사적 제291호로 지정되었으며, 진해 원도심에서 가장 높은 등급의 문화재다. 1912년 목조건물로 지어진 진해우체국 현관 쪽에는 러시아풍의 원형 아치가 잘 보존되어 있으며 2000년까지도 이 건물에서 우체국 업무를 봤다. 전형적인 일제강점기 서양건축물로 미학적으로도 잘 지었고 외형이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어 진해 근대건축물을 상징하는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설명안내판과 인터넷 자료)
"진해탑이 있는 봉우리를 일본인이 투구 같은 형상이라 해 `카부토야마(兜山두산)'라고 불렀던 것을 `임금이 날 터'라는 명당설에 따라 `제황산'이라고 고쳤는데 이것은 제왕(帝王)의 착오이며 이 산의 고유명은 아름다운 우리말인 부엉산"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한다.
1929년 5월27일 일본은 러일전쟁 과정에서 당시 천하무적으로 불리던 러시아 발틱함대를 대파한 뒤 이를 기념한다며 이 산의 정상을 완전히 깎아낸 뒤 대형 탑을 세웠다. 이 기념탑은 당시 일본군 기함인 미카사의 선교(船橋)와 마스트(mast)를 본 떠 만든 34.85m 높이로 세워졌고 정면에는 일본연합함대를 지휘했던 도고 헤이하치로가 친필로 쓴 `일본해해전기념탑(日本海海戰記念塔)' 현판이 있었다. 일본은 기념탑 아래쪽에 사원구역을 정해 3개의 사찰을 두기도 했다.
'일본해해전기념(日本海海戰記念)' 러일전쟁 승전탑은 해방 이후 한참이 지나서 철거됐고, 1967년 해군군함을 상징하는 높이 28m 9층 규모 진해탑이 새롭게 건립됐다. 하지만 기초 부분은 그대로 두어 지금도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9층 진해탑의 8층 전망대로 올라가 사방을 조망한다.
붉은점 표시 왼쪽 아래 진해문화센터, 그 위 삼밀사, 산줄기 왼쪽부터 장복산, 하늘마루, 덕주봉
도착지 진해드림로드 서쪽 입구는 진해문화센터 왼쪽으로 올라가 있다.
중간 아래 진해역, 그 왼쪽 위 평지봉, 중앙 아래 진해문화센터, 그 왼쪽 위 진해드림로드 서쪽 입구 어름인 듯
맨 뒤 왼쪽 장복산, 오른쪽은 하늘마루
중원광장을 중심으로 앞쪽에 진해우체국, 왼쪽에 뾰족집 수양회관, 뒤에 진해군항마을역사관, 오른쪽에 흑백다방
진해 공설운동장이 뒤 왼쪽에 보인다. 흑백다방 길을 따라가면 북원광장 이순신 장군 동상을 만난다.
빌딩숲 중앙에 남원광장이 있을 것이고, 그 앞쪽에 통해문이 있을텐데 빌딩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해군교육사령부 예하 교육훈련부대 시설물이 바다 쪽으로 보이고 왼쪽 산 뒤쪽에 해군사관학교가 있는 듯.
맨 뒤 산줄기 붉은점 왼쪽부터 수리봉, 천자봉, 대발령, 진해해양공원의 솔라타워, 그 왼쪽 움푹 파인 행암고개
바다 중앙에 대죽도, 그 왼쪽에 진해항제2부두
맨앞 왼쪽부터 속천항, 진해수협, 고절산
앞 산봉은 제황산, 뒤 왼쪽부터 불모산, 웅산, 시루봉, 수리봉, 천자봉, 대발령
진해탑을 내려와 중원광장 앞 로댕 조각상이 있는 진해문화원 옆 아이세상장난감박물관 앞
시월유신(十月維新) 기념탑으로 간다.
진해우체국 옆 창원 아이세상 장난감도서관 입구 정원에 있는 시월유신기념탑은 철거되어야 할 대상이다. 시월유신은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정권이 장기 집권과 지배체제 강화를 위해 단행한 초헌법적인 비상조치를 말한다. 진해 시월유신기념탑은 1973년 3월에 만든 것으로, 전국적으로 비슷한 탑이 많았는데, 현재 다 철거되고 유일하게 진해에 남아있다고 한다.
1972년 10월 17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계엄령과 긴급조치를 선언했다. 일본 '메이지 유신'을 본 뜬 '10월 유신(十月維新)'을 강제한 것이다.
이후 '국회 해산'에 '헌법 정지'라는 비상조치의 강압적 분위기 속에 국민투표가 시행되었고, 1972년 12월 27일 '제3공화국 헌법'으로 대체되었다. 이를 '유신헌법'이라고 한다. '유신헌법'은 '종신제 대통령'에 입법과 사법, 행정을 한 사람이 틀어 쥔 무소불위의 독재자로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 집권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이런 '시월유신'을 기린 조형물이 아직도 경남 창원 진해에 있다. 진해 장난감도서관 뜰에 있는 '진해 10월유신 기념탑'은 전국에서도 유일하다시피 한 기념물이다. 이 탑에는 당시 '진해시장 박용범'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높이 3.5m에 너비 2m 규모로 학생과 남성 회사원, 여성 3명과 해군 1명이 유신헌법을 들고 있는 모양이다. 이 탑은 1973년 3월 옛 진해 육군대학 앞 삼거리에 세워져 있었다. 옛 진해시가 시민 성금을 모아 세웠고, 처음에는 9m 높이였다. 그런데 시민들 사이에서 9m 높이가 교통체증을 야기시킨다는 지적이 나왔다. 진해시는 1976년 8월 1일 탑 높이를 3m로 축소하고, 장소도 진해시립도서관 정원으로 이전했다. 진해시립도서관은 2008년 창원 진해 여좌동으로 옮겼고, 이곳은 '창원시 아이세상 장난감도서관'과 진해문화원'으로 바뀌었다.(인터넷 자료)
지금의 진해 도심은 원래 '중평한들'이라 불리던 넓고 기름진 들판이었다. 일제는 이곳에 모여 살던 11개 마을 390가구 2000여 명의 조선인들을 경화동 쪽으로 강제로 쫓아내고 당시 1200살 정도 되었던 당산나무 팽나무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여덟 갈래로 길을 내어 방사형 시가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거대한 해군기지가 된 도시의 이름을 웅천(熊川)에서 제압할 진(鎭), 바다 해(海), 진해(鎭海)로 바꿨다. 팽나무가 죽자, 1950년에는 느티나무를 심기도 했고, 1970년대에는 분수대와 시계탑을 세웠다. 지금 같은 잔디광장이 된 것은 2007년부터라고 한다.(설명안내판과 인터넷 자료)
중원광장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길모퉁이를 돌면 마크사 거리와 군항마을 테마공원으로 이어지는데 직전에 군항마을 역사관이 나온다. 1912년 지어진 6, 7개의 지붕을 공유하고 있는 장옥(長屋, 나가야) 형태의 적산 가옥을 그대로 활용해 만든 ‘진해 군항마을 역사관’은 우리나라 근대사를 대변하는 350여 점의 기록물을 보존·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일반 상점에서 광복 이후 노인정으로 사용되었는데, 2012년 11월 8일 역사관으로 개관했다고 한다. 문이 열려 있어 1층과 2층 전시실을 달리는 말에서 산을 보듯이 살피고 후다닥 나왔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 때 사진관 겸 시계점으로 쓰이다가 광복 후 중국음식점으로 개업했다. 6ㆍ25전쟁 당시 유엔군 포로였던 중공군 출신 장철현씨가 인수해 1956년 '榮海樓'로 문을 열었지만 상표 등록을 하지 않은 탓에 현재는 ‘원래 우리 가게가 영해루’라는 뜻의 '元海樓'라는 상호로 바뀌었다고 한다. 1949년 이승만 전 대통령과 장제스(蔣介石) 중화민국 총통이 아시아·태평양국 동맹 결성 예비회담을 마치고 식사했던 곳으로 유명하며, 임권택 감독의 영화 ‘장군의 아들’ 촬영지이기도 하다.
이후 원해루는 1980년대 초 서울 선린동에서 '태화관'이란 중국집을 운영하던 중국 화교인 진금재씨가 인수한 뒤에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인터넷 자료)
1938년 건립된, 6각 누각이 있는 중국풍의 3층 건물로 뾰족집이라 불렸다. 본래는 중원로터리를 중심으로 대칭되어 남북으로 각각 1채씩 총 3채가 건축되었다고 한다. 현재 식당으로 운영 중이며 독특한 외관과 근대 상업시설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으나 외관은 일부 변형되었다. 3층으로 올라가는 내부 계단과 창을 통해 바라보는 전망이 아름답다.(설명안내판과 인터넷 자료)
마크사 거리 옆 여좌천을 복개한 곳에 군항마을 테마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도만이들에서 일본육전대를 쫓아내다'라는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공원에는 진해 근대역사 테마거리의 중심 건축물 사진들과 진해와 관련한 옛 사진과 설명글이 달린 패널들이 전시되어 있다.
'마크사 거리'는 해군 병사들의 군복에 계급장과 명찰, 각종 마크를 붙여주는 '○○ 마크사'란 간판을 단 가게들과 군복을 수리하는 수선집이 즐비하여 '마크사 거리'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살펴보니 많지는 않지만 '○○ 마크사' 간판을 단 가게들이 보인다. 가장 오래 명맥을 잇고 있는 마크사는 진해 마크사로 3대째 이어오고 있다고 한 주민이 귀띔해 준다.
군항마을은 2014년 전국 7번째로 국가기록원으로부터 기록사랑마을로 지정됐다. 2012년 11월 8일 군항마을 역사관을 개관하고, 군항마을 역사길을 조성하는 등 진해는 근대역사 테마거리로 새롭게 태어났다.
중원광장 건너 서남쪽에 흑백다방이 있다. 건물 자체는 1912년에 지은 것으로 함경도 출신으로 진해에 정착한 유택렬 화백이 1955년 카르멘다방을 인수해 흑백이라고 이름 지은 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창원시 근대건조물 제4호인 ‘흑백다방’은 문화 예술의 성지였다. 1960~70년대 진해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이자 이중섭, 유치환, 김춘수, 서정주 등 걸출한 예술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고 한다. 현재도 공연과 전시를 겸하는 지역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는데 들어가 볼 수가 없어 바깥에서 겉모습만 살펴보았다.(설명안내판과 인터넷 자료)
중원광장 앞 흑백다방에서 북원광장으로 간다.
건립연도 1952년
1952년 4월 13일 이순신 장군의 공로와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진해시 도천동 북원 로터리에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세웠다. 이 동상은 6ㆍ25의 참화 속에서 해군과 시민의 성금을 모아 해군공창에서 높이 4.82m, 무게 3톤의 동상을 주조하였다. 제막식은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인사가 참여했다. 윤효중 작가가 제작한 동상에는 충무공 이순신상(忠武公李舜臣像)이라고 새겨져 있으며 대한민국 최초로 세워진 충무공 동상이다.(설명안내판)
여좌천 입구를 거쳐 진해역을 찾아간다.
진해驛은 일본 해군 기지와 진해항의 연결을 통해 만주를 비롯한 대륙으로 군용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1921년 착공해 1926년 완공하여 11월 11일 진해선 개통과 함께 영업을 시작하였다. 광복 후에는 1961년 해병대 전용선이, 1966년 진해화학 전용선 등이 각각 개통되면서 진해 발전의 주축을 담당했다. 역사(驛舍)는 2005년 등록문화재 제192호로 지정된 이후에도 영업을 지속했지만, 이용객이 적어지면서 2012년 11월 새마을호 운행이 중단된 뒤, 2015년 2월 1일부터 정기 여객 취급이 중단되었다.
驛舍는 바닷가 驛舍답게 개방적이고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다. 특히 유럽의 전통건축에서 다락방을 낼 때 자주 사용하는 지붕창이 있어 전원의 목가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작고 아담한 驛舍이지만 일제강점기 때부터 군사적 목적을 띠고 만들어진 곳으로 넓은 역 광장과 대합실에 이어진 노천 출입구 등에서 이런 특징을 엿볼 수 있다.(설명안내판과 인터넷 자료)
뒤쪽으로 삼밀사 그 뒤 왼쪽부터 장복산, 하늘마루, 덕주봉
가시나무는 쌍떡잎식물 참나무목 참나무과의 상록활엽교목. 한국, 일본, 중국에 자생하며 한국은 진도와 제주도에 자생한다. 잎은 긴 타원형으로 두껍고 반질반질하며 상반부 또는 가장자리에 잔톱니가 있다. 열매인 도토리는 10월에 익으며 식용한다.
참나무 중에서 상록성은 가시나무, 개가시나무, 종가시나무, 참가시나무, 붉가시나무가 있으며 추위에 약해 남부지방에서만 볼 수가 있다. 한편 낙엽성 참나무로는 갈참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상수리나무가 있다. 이름이 비슷비슷해 헷갈리기 쉽지만, 잎의 모양과 열매인 도토리의 생김새를 유심히 살펴보면 구분이 가능하다.
가시나무는 재질이 단단하고 강하여 건축재, 세공재, 공구의 자루, 배를 만드는 재료, 악기 등 그 용도가 다양하다. 또한 가시나무는 내조성이 강하여 바닷가의 방풍림으로 심거나 해안지방의 정원수로도 이용한다.
가시나무는 ‘가시’라는 이름 때문에 가시가 많은 나무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가시와 상관이 없으며 ‘가서목(歌舒木)’이란 이름에서 ‘가서나무’로 그 이후에 ’가시나무’로 변화된 것이라고 한다. 또 '도토리' 제주방언이 '가시'이므로 가시나무는 '가시(도토리)'들이 많이 열리는 나무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고도 한다.(인터넷 자료)
진해의 벚꽃명소로 잘 알려진 여좌천은 MBC 드라마 '로망스'에서 두 주연배우(관우와 채원)가 진해 군항제를 구경 와서 처음 만났던 다리가 있는 곳으로, 방송이 되자마자 일명 '로망스다리'로 불리며 관광명소로서 급부상하게 되었다. 4월이면 도심 전체가 벚꽃 물결로 일렁이는 진해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벚꽃터널이 형성되는 곳이다. 진해를 찾는 관광객들의 벚꽃나들이 코스로도 유명하다.(대한민국 구석구석)
여좌천 11번째 덱 다리 하늘마루다리를 건너 도로를 따라 올라가 여좌천의 마지막 12번째 덱(deck) 다리 임지교에서
오른쪽으로 길을 따라오르다 진해대로와 만나 진해문화센터 쪽으로 길을 건너 왼쪽으로 꺾어 오른다.
길을 건너 진해대로 오른편 인도를 따라 오르다가 장복로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장복산공원과 마진터널 방향의 장복산길을 따라오른다.
남파랑길 8코스 종착지이자 9코스 시작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