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회사 18
(선교사들의 입국)
1882년 미국과 영국에 이어
1886년에 프랑스와의 조약을 체결하여
문호를 개방하고 1884년 알렌이
그 이듬해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스크랜톤이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한다.
1. 조선의 첫 선교사 알렌
알렌은 마이애미 의대를 졸업하고
중국선교를 하다가 미국 북 장로교의 선교사로
공식적으로는 미국 공관의사로 조선에 입국한다.
선교사로 입국한 것도 아니고
당시 조선은 공개적으로 선교사를 허용한 것이
아니어서 조용히 가정에서
가족들과 예배를 드리던 중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는데
이 때 민비(명성황후)의 친척이며 보수파인 민영익이
자객의 칼에 일곱군데나 맞아
혈관이 끊기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칼에 맞아 찢어진 상처와
끊긴 혈관은 한의들이 할 수가 없었던 차에
뮐렌도르프의 소개로 미국 공관(대사관)
의사인 알렌은 민영익을 명주실로 꿰매고
약을 발라 외상을 석달이나
성심껏 치료해 주었다.
이 일로 민영익 뿐 아니라 고종과도
원만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으며
그 결과 광혜원이라는 한국 최초의 근대병원을
설립하게 되고 언더우드(광혜원에서 화학을 가르침),
스크랜톤, 앨러스(의료 선교사) 모두 광혜원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나 알렌 선교사는
선교본부와의 관계를 끊고
서울 주재 미국 공사관의 서기관이 되어
다른 유럽 나라들처럼 제국주의의 일환으로 와서
조선의 잇권을 빼앗기 위해 열을 올리는
미국의 손과 발이 되어 일을 함으로 인해
믿지 않은 역사학자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하는데 안타까운 일이다.
2. 한국 선교의 개척자 언더우드
알렌이 1884년에 입국한 첫 개신교
선교사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면
그 이듬해에 입국한 언더우드는
감리교의 아펜젤러와 함께 개신교를 대표하는
선교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언더우드는 화학자이자 발명가인 아버지와
신앙심 깊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비록 아버지가 목회자는 아니었지만
일생을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다.
10살이 되었을때 언더우드는
형과 함께 카톨릭에서 운영하는
남자 기숙학교에 다니게 된다
어릴때부터 신앙이 남달랐던 형제는
늘 자기전에 기도했다.
다른 학생들의 놀림에도 굴하지 않도
기도하던 형제를 따라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학생들도 기도하는 습관이
기숙사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그 후 언더우드 가족은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신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이미 신학교 재학중에 인도 선교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아펜젤러를 만남으로
한국선교에 대한 열망으로 불탔고
'한국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라는 음성을 듣고
1885년 일본에서 이수정을 만나 한국어를 배우고
이수정이 번역한 성경 마가복음을 들고
아펜젤러와 함께 조선으로 들어온다.
명성황후 시의인 의료 선교사 릴라아스 호톤양과
결혼해 신혼여행도 전도여행으로 떠날 만큼
복음의 열정으로 살았다. 세상을 떠날때까지
선교사, 학자, 교육자, 성경번역자, 편집가,
여행가, 정치가로 평화의 사도로 일생을
하나님 앞에 헌신하며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