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작은 보험, 그러나 가장 큰 혜택
윤수현
이제 5개월이 지났다.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고 믿고 싶지 않는 현실이기도 하다.
작년 11월의 마지막 날 저녁. 어느 때와 같은 저녁으로 식사를 준비하고 있던 어머니와 나는 전화 한통을 받게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
그 한통의 전화는 우리 가족의 삶을 순식간에 바꾸어 놓았다. 서둘러 병원으로 달려갔다. 영안실에서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그날의 일이 자꾸만 생각나서 글을 쓰기가 힘들다.
우리 가족은 세 명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 그래서인지 몰라도 가족은 더 각별했고 아버지는 가족을 챙기시는 분이었다. 뭐든지 셋이서 같이 하길 원하셨고, 아버지께서는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포기하신 분이었다. 그렇게 자상하기도 하고 나에게는 둘도 없는 존재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사인은 교통사고였다. 여느 때와 같은 퇴근길. 언제나 같은 길로 퇴근하시던 아버지께서 화물차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것이다. 사건 조사 때문에 가게 된 경찰서에서 나는 한 번 더 쓰러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대형 화물차와 아버지 사이의 교통사고로 사고의 책임이 아버지에게 있다는 것이다.
경찰 조사로는 남겨진 상황이나 상대방 운전자의 증언을 종합하여 볼 때 그런 결론이 나왔다는 것이다. 인정할 수 없었다. 평소에 운전을 난폭하게 하시던 분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초행길도 아니었다. 매일 퇴근하던 퇴근길인데 그곳에서 아버지가 사고를 내셨다니. 경찰에서는 상대방 운전자의 증언만 있고 이쪽 당사자인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증언이 없으니 불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는 눈물을 참고 참았지만 다시 돌아온 영안실 비상계단에서 나는 울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모든 상황이 나에게는 믿을 수 없었고 힘들기만 했다. 그리고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어가며 장례를 치렀다. 아버지의 죽음에 울다 지쳐 쓰러지신 어머니를 모시고 그렇게 장례를 치렀다. 장례를 치루고 며칠이 지났다. 아직도 저녁이 되면 아버지께서 퇴근해서 오실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고 방문을 열면 계실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오실 수 없었고 그곳에 계시지 않았다. 그리고 점점 현실이라는 문제가 둘만 남게 된 우리 가족에게 닥쳐오게 되었다.
교통사고 조사는 점점 불리한 쪽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가족에게 주어진 건 보상이 아닌 배상의 책임이었다. 오히려 상대방 화물차에 배상을 해야 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것도 억울한데 배상까지 해야 한다니 사건 조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더 이상 방법도 없었고 결과도 바뀌지 않았다. 닥쳐오는 현실이 그렇게 원망스럽고 힘겨울 따름이었다. 모든 상황은 더욱더 좋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퇴근길에 돌아오셨기 때문에 산재보험에 적용될까라는 말을 듣고 알아본 결과 그것 또한 아니었다. 아버지가 일하시는 곳 자체가 산재 사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었던 것이 사라졌다.
그리고 국민연금 또한 해당이 되지 못했다. 이렇게 또 하나가 사라졌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는 어느 곳에서도 보상 및 위로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께서 들었던 보험을 확인 하던 나는 한 번 더 어처구니없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께서 최근 넣고 계시던 ‘연금 보험’, ‘건강보험’ 등을 확인했더니 아버지의 경우는 “재해로 인한 사망으로 재해 특약이 가입되어있지 않아서 보상할 수 없습니다.” 라는 내용뿐이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아버지가 내고 있던 그 보험료들은 무엇을 위해 내고 있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회사라고 언급하지 않겠지만 외국계 보험회사들은 특히 심했다. 가장 많은 보험료를 내고 있던 보험들이 아무런 보상도 해주지 않는 것이었다. 납입했던 금액도 전부다 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보장성 부분에 대해서는 보험료 적립금이 없어서 라고 했다. 그저 어이없고 이해가 되지도 않았고 이해하기도 싫었다. 그래서 믿고 있던 것들이 어이없는 결과로 나타났다.
하지만 현실은 금세 다가왔다. 나는 현재 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사립대 대학원이기 때문에 연간 학비가 1,200만원을 훌쩍 넘는다. 1년 과정을 마쳤지만 아버지의 사고로 남은 1년을 마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와 살아가야 한다는 당장의 현실이 다가온 것이다. 이것저것 알아보던 나는 모든 것을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자동차보험, 산재보험, 국민연금 모두가 해당되지 않고, 게다가 아버지가 들었던 보험들 또한 보상받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충격에 힘들어 하고 계시던 중이어서 말씀드리기 어려웠지만 어머니도 알고 계셔야 하는 것이었다. 다 들으신 어머니는 한숨만 쉬셨다. 나 또한 어머니께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었다. 그리고 하던 공부를 중단해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어머니께서 그건 안 되는 일이라고 화를 내셨다. 내가 공부를 계속하는 것이 아버지의 유일한 희망이고 보람이셨는데 도중에 그만 두면 그간의 아버지의 노력은 무엇이 되냐고 하시는 것이었다.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어 보였다. 현실은 지금 닥쳐온 것이고 그 현실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머니께서 보험증서 두 개를 꺼내 오셨다. ‘우체국보험 증서’ 라고 써있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예전에 가입하셨던 것이었다. 그런데 매월 보험료도 얼마 되지도 않고 그렇기에 내가 예전에 그냥 해지하라고 했던 보험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확인 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매월 만 원이 조금 넘는 보험료의 ‘교통안전보험’이 그렇게 큰 보상을 해줄지 몰랐다. 보상액 5,000만원에 지금까지 납입한 보험료도 돌려주는 것이었다. 정말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의 생각지 않았던 금액이었다. 그전에 납입하는 보험료가 적다고 그냥 해지하라고만 했던 내 자신이 너무 바보 같이 느껴졌다.
가장 작은 보험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가장 큰 보장을 해준 것이었다. 그래서 그 보험료를 수령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바람대로 남은 1년의 학업을 계속 이어가기로 했다. 지금까지 한 1년을 포기하고 중간에 그만 두기에는 1년의 노력한 시간이 너무나 아까웠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변한 현실에 어찌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우체국 보험 덕분에 그 것을 포기 하지 않아도 되었다. 한 달에 몇 십만 원씩 내던 보험들이 하나도 필요 없었을 때 가장 보험료가 적던 우체국 보험이 가장 큰 보장을 해준 것이다.
아버지의 자리는 채울 수 없겠지만 우체국보험 덕분에 아버지의 바람이시던 내 학업은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나도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가장 작은 보험이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가장 큰 혜택이 된 것이다.
첫댓글 지난 5월 서울체신청에서 주최한 우체국보험 체험수기 모집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입니다. 60명의 수상자 중에서 우선 대상작을 여러분께 선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