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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간별 순례의 장점
일반적으로 순례란 출발점에서 최종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수백 킬로미터를 매일 걷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세계적 순례길인 산티아고 가는 길(Camino de Santiago)을 걸으려면 비행기로 프랑스나 스페인까지 가서 매일 걸어서 800킬로미터의 거리를 끝까지 가야 한다. 이를 위해 흔히 5 내지 6주의 휴가를 낸다. 먼 나라에 있는 길이니 나누어 걷기도 어렵다. 비행기 타고 출입국 하는 번거로움과 많은 여비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백의종군로는 국내의 길이므로 나누어 걸을 수 있다. 생활에 바쁜 현대인들이 600km의 거리를 계속 걸으려면 이겨낼 체력이 있어야 하고 3 내지 4주의 휴가를 내야 한다. 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순례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적을 것이다.
전체 구간을 하루나 이틀에 갈 수 있는 소구간으로 나누어 걷는 것이 계속 이어 걷는 것 보다 오히려 더 좋은 방법이다. 군대는 훈련 목적으로 백 킬로미터를 며칠 동안 계속 걷는 훈련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민간인은 그럴 필요가 없다. 민간인은 순례를 통해 충무공의 육체적 고통을 조금이나마 체험하고 공의 정신적 고통을 공감해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매월 한두 번 걸으면 1년이면 백의종군로를 거의 순례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걷기를 하면 비용도 얼마 안 나가고 건강에도 좋다. 매년 반복해도 그 의미가 손상되지 않는다. 오히려 충무공의 생애를 반복해서 음미하고 마음 깊이 새길 수 있어 더 좋다. 다른 해의 다른 절기에 가게 되므로 지방의 세시 풍습을 체험할 수 있고 계절에 따라 변모하는 국토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도 있다.
2. 걷기 좋은 길 찾기
평택 온양 구간은 순례를 권하기 약간 어려운 구간이다. 옛길의 많은 부분이 국도로 변하여 번잡하고 시끄럽다. 특히 수도권의 백의종군로는 도시화가 많이 진행된 지역에 있다. 백의종군로를 순례한다고 해서 곧이곧대로 꼭 옛길을 찾아 걷겠다고 고집하지 않는 것이 좋다. 순례자는 안전하게 걸을 수 있어야 한다. 조용하고 주변 경관이 좋은 길을 걸어야 순례자의 마음을 풍요롭게 해 줄 수 있어서 좋다.
나는 2011년8월3일에 이 구간의 국도를 걸었었다. 그 때 ‘이 길은 옛길에 근사할지 모르나 순례자가 걸어야 할 길은 아니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 후 2013년2월14일에 평택 온양 구간의 걷기 좋은 길을 찾아 다시 나섰다. 문 회장이 동행해 주어 어느 구간보다도 즐겁고 쉽게 대체로를 찾을 수 있었다.
대체로 찾기의 첫 번째 과업은 스카이뷰 지도를 보는 것이다. 스카이뷰는 천연색의 지형과 건물 모양이 나오므로 대체로의 주변경관을 예상하기 좋다. 하천의 수량이나 모래톱 형태를 확인할 수도 있다. 인공위성이 촬영한 계절이 순례하는 절기와 다를 수 있음을 감안하면 된다. 다음은 발품을 팔아 실제로 답사하는 일이다. 여럿이 사전답사 한다면 다양한 대체로를 나누어 가볼 수 있으므로 빠르고 편하다. 대체로 찾기의 마지막단계는 땅이름 전문가와 현지인에게 묻는 것이다. 사전답사 시 고장 지리에 밝은 현지인을 만나면 행운이다. 실제로 평택 온양 구간에서 그런 현지인을 만났다. 우리가 팽성초교를 지나 석근리의 농로에 앉아 점심을 먹는데 40대 초로 보이는 아저씨가 나타났다. 그는 자전거를 멈추고 우리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나는 백의종군로 지도가 그려진 깃발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저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로를 걷는 사람입니다. 서울에서 순천까지 걷습니다.”
“서울에서 여기까지 걸어왔다고요?”
“한 번에 걸은 것은 아니고요. 나누어 구간별로 걷습니다. 오늘은 아침에 평택역에서 출발했어요.”
그는 그 동네 토박이 농군이다. 그는 최근에 새로이 부여한 고장의 거리명 주소에 불만이 있었다.
“요즘의 거리명은 우리가 부르던 실제 지명과 달라요. 그래서 고치자고 했는데...”
“어찌되었나요?”
“원래 우리가 부르던 이름을 붙이자 했더니 마을 사람들이 반대해서 그만...”
“왜 반대 했나요?”
“촌스럽데요.”
나는 여러 순례자들과 주말에 이 길을 다시 걷는다고 그에게 알려 주었다. 그는 주말에 자기도 함께 걷겠다면서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 주었다. 그는 우리를 기다리게 하고는 자전거를 집에 두고 코란도를 타고 다시 나타났다.
“제가 꼭 보여 드리고 싶은 곳이 있어요. 이 차에 타세요.”
“어디쯤인데요? 많이 지체하면 안 됩니다. 여기까지 도로 데려다 주실 거지요?”
“네. 20분이면 됩니다.”
현지인은 우리를 어떤 비석으로 인도했다. 그 비석의 비문을 우리가 해석하는지 보려는 것이다.
“이 비석을 어렸을 때부터 보았는데 우리는 ‘호랑이 비석’이라 불렀어요.”
“왜 그렇게 불렀나요?”
“비석 머리 부분의 무니가 호랑이 같다 해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비석은 길가 언덕에 있는데 가시덤불 속에 있어 접근이 어려웠다. 일견 비문이 없는듯하지만 잘 보면 몇 글자가 보인다. 그런데 마모되어 거의 식별이 불가능하다.
“이거 탁본 뜨거나 밤에 측방 조명으로 명암을 부각하여 사진을 찍어보면 식별에 도움이 될 것 같네요.”
현지인은 그다지 실망하지 않고 우리를 원위치 시키고 집으로 갔다. 그는 다시 자전거로 갈아타고 온양 음봉면까지 우리를 뒤따랐다.
3. 팽성읍 향교
동문게시판에 공지한 글을 보고 2월 17일의 순례에 나선 사람은 11명이다. 인송은 천안행 급행을 노량진에서 타지 못해 30분쯤 늦게 평택역에 도착했다. 그는 일반 열차가 서는 홈에서 급행을 기다렸던 것이다. 인간의 뇌는 착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람은 흔히 착각한다. 순례자들은 평택역에서 출발사진을 찍는 등 10분 가까이 지체했다. 제포가 잠시 금오랑의 대리를 맡아 앞장을 섰다. 그는 금오랑이 건네준 좀 더 상세한 지도를 보고 순례자를 인도했다. 금오랑은 인송을 기다려 택시로 본대를 뒤따랐다. 20분 걸어간 본대를 택시는 2분 만에 따라갔다. 인송은 선글라스를 택시에 두고 내렸으나 택시가 떠나기 전에 착각을 시정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곧 두리 마을에 들어갔다. 마을 표지석에는 ‘마리’ 마을이라고 쓰여 있다. 마리를 머리 두(頭)로 한자 표기한 것이 공식 지명으로 되었나보다.
평택 온양 구간에서 순례자가 만나는 옛 고을은 팽성이다. 나는 사전 답사 시 옛길을 모르고 곧은길을 걷다가 팽성 읍내를 지나쳤었다. 뭐 볼 것이 있겠냐는 마음도 있었다.
두리 마을을 지나자 사전 답사 시 만났던 현지인이 고속철도 밑에서 일행을 마중을 했다. 그는 석근리에서 승용차로 팽성까지 온 것이다. 순례자들은 현지인을 따라 팽성 읍내로 들어갔다.
“여기가 객사리라면 객사(客舍)가 있을 거 아닌가?”
“있었겠지. 전국에 객사리가 많아. 객지에서 죽는다는 객사(客死)와 음이 같아 지명을 고치자는 소송이 많았지. 그런데 여기는 그대로구나.”
검암의 설명은 순례자를 흡족하게 한다.
“저기로 가면 객사가 있어요.”
현지인이 거들었다. 옛 동헌 자리에 있는 읍사무소 마당에는 오래된 나무가 보호수 명패를 달고 서있었다. 현지인이 향교로 일행을 안내했다. 옆에 있는 아파트도 이름이 향교였다.
“검암 여기 대동여지도에 보면 팽성이라는 지명은 안 나오는데?”
나는 순례자에게 나누어 준 자료를 펼쳐보였다.
“여기가 안성천 남쪽인데 바로 옛날의 평택현 위치네. 객사와 향교가 가까이 있잖아. 일제 때 안성천 북방에 기차역이 생기면서 그 쪽으로 도시가 발달하여 지금의 평택시가 된 것이고.”
“향교가 뭐하는 곳인가?”
“성균관 하급 교육기관이지. 지방관청의 관할인데 현(縣)에는 30명의 학생, 종6품의 교수와 정9품의 훈도(訓導)를 둔다 해. 효는 어려워. 쉬우면 그토록 강조하며 가르치지도 않았겠지. 내리사랑이 자연(自然)이야, 자식 사랑은 가르치지 않아도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잖아.”
4. 효자마을
현지인은 순례자들을 석근리로 인도했다. 금오랑과 문 회장이 사전답사 때 간 길이 아니다. 마을 어귀에 석근1리 표지석이 멋지게 조각되어 있는 것을 보고 제포가 한마디 했다.
“이제는 시골도 돈이 많은가 보다.”
현지인은 순례자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는 것 같았다. 그냥 따라오라는 듯 앞장서 갔다. 순례자들은 멋진 소나무를 곁에 두고 있는 효자 정문(旌門)에 인도되었다. 나 여사는 장준, 장현근 효자의 공덕을 끝까지 읽었다.(12:40)
마을 남쪽에는 군계천이라는 개울이 동에서 서로 흐른다. 예전에는 흙다리가 놓여 있어 마을이름도 흙다리로 통했다한다. 현지인은 순례자들에게 개천을 따라 가도록 안내를 하고는 귀가했다. 금오랑은 사전답사한 길이 아니고 현지인의 안내도 확실치 않았다. 그가 무조건 군계천 다리를 건너자 순레자들도 따랐다. 그들이 34번 도로와 나란히 달리는 남쪽 농로를 서쪽으로 1킬로미터 쯤 갔을 때 현지인이 자전거를 타고 다시 나타났다.
“그쪽으로 가시면 먼 길입니다.”
순례자들은 100미터쯤 되돌아서 34번 도로 밑의 토끼굴을 지나 군계천으로 다시 나갔다. 소위 ‘알바’를 한 것이다. 현지인이 안내하는 대로 가니 군포고등학교에 이르렀다. 순례자들은 이미 허기져 있었다.(13:25) 그들은 현관 옆에 자리를 펴고 각자 지참한 음식을 내어 놓았다.
송 후배가 무겁게 메고 온 막걸리를 세 통을 풀었다. 장거리 순례에 막걸리같이 무거운 짐을 메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는데 그는 매번 자원해서 한다.
둔포고교를 출발한지 1시간 쯤 지난 둔포천 변에서 소지가 발의 통증을 호소했다. 금오랑이 파스를 발바닥 앞쪽에 붙여 주었다. 좁은 등산화를 신으면 발가락이 가운데로 쏠리면서 발바닥이 과도한 하중을 받아 물집이 잡히기 쉽다. 또는 평소에 굳은살이 박혀있는 곳은 장거리를 걸으면 반복되는 자극으로 굳은살과 속살이 엇갈려 밀리는 현상에 의해 물집이 생기는 듯하다.
순례자들은 외암민속마을 21km 도로표지가 있는 45번 국도를 건넜다. 이제부터는 봉재저수지까지 관대천 변을 걷는다.
5. 둔포천과 관대천
둔포 서편의 둔포천은 서북으로 흘러 안양천과 합류해 서해로 들어간다. 봉재저수지에서 발원한 관대천은 북으로 흘러 둔포 남쪽에서 둔포천과 합류한다. 둔포천변은 거의 직선이다. 중간에 한번 굽어지나 다시 곧게 나아간다. 굽는 지점에서 서남방향의 신항리에 윤보선전대총령생가가 있다.
3일전 사전 답사 시에 있었던 다리가 없어지고 시멘트로 새로 다리를 놓고 있어 진흙이 신발에 더덕더덕 달라붙었다.
“어디 좀 앉았다 갑시다.”
둔포고교를 출발한지 2시간이 되니 순례자들은 다리가 몹시 아파왔다. 때마침 벤치가 있는 공터에 이르렀다. 봉재지구공공하수도설치사업 안내판과 작은 시멘트 건물이 있었다. 그들은 충분히 쉬었다. 길을 걷다가 10분 쉬면 많이 쉬는 것이다. 그 시간이면 1km를 걸을 수 있지 않는가?
6. 봉재저수지와 요로원
까마득한 관대천 변에서 송환구 동문이 빠른 걸음으로 나아갔다. 태극기를 배낭에 꽂고 늠름하게 앞장서 갔다. 순례자 간의 간격이 멀어지고 있었다. 제포가 승산과 노작가를 가까이 걷게 하고 사진을 찍었다. 고개의 방향과 포즈까지 주문하면서... 그의 연출이 어떻게 사진으로 나올지 궁금했다. 순례자들은 45번 국도를 다시 만났다. 그들은 지하도를 통과해 봉재저수지에 이르렀다. 저수지는 아직도 얼어 있었다. 이제부터는 45번국도의 구불구불한 구도로와 곧게 뻗은 신도로가 겹치거나 분리되는 지역이다. 순례자에게는 매우 불편한 곳이다. 왜냐하면 곧게 뻗은 대로를 건너서 구도로로 가야하기 때문이다. 길가에 높이 충무로1177번길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45번국도 중 온양 가는 구간을 충무로라 이름 지었나 보다. 순례자들은 16시를 지나는 시각에 음봉면 경계표시에 이르렀다. 금요산악회 승산과 한산이 조원장과 함께 가장 먼저 목적지점에 도착했다. (16:10)
대동여지도의 평택과 온양 사이 둔포 아래를 보면 섬과 같은 원형 지경이 보인다. 내부에 천안지라 표시하여 아산 지경이지만 천안현 소관 지역임을 나타낸다. 그 아래 ‘요로원’이란 지명은 현대 지도에는 없다. 다만 국도 45와 70의 교차지점에 ‘요란 슈퍼’라는 가게가 있는 것을 보면 마을에서는 그 동네를 지금도 그렇게 부르는 듯하다. 자전거를 타거나 이끌고 동행한 현지인은 우리가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계속 함께 있어 주었다.
“다음에는 어디로 갑니까?”
“온양에서 광덕산 넘어 보산원 (광정)까지 갑니다.”
“언제인지 알려 주셔유, 저도 갈 참이니...”
현지인이 금오랑에게 연락을 부탁했다. 송 후배는 온양으로 가므로 일행과 반대방향의 버스를 기다렸다. 길 건너편에는 순례자들보다 먼저 와서 천안행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
“5분 후면 올 줄 알았는데 10분이 지나도 안 오네. 이거 참 낭패인데... 저 사람들도 기다리니 곧 오겠지.”
버스가 안 오자 금오랑이 안달이다.
“며칠 전 답사 시에도 4시 20분경에 탔거든...”
“여기 우리가 도착할 즈음에 평택 가는 버스 보았어. 이미 지나간 거야.”
검암이 금오랑의 안달을 말렸다.
그 사이에 제포가 전체 도착을 기념하는 사진을 찍었다.
“평택행이든 성환행이든 먼저 오는 버스 탑니다.”
버스가 안 오자 금오랑은 자꾸 조바심을 냈다.
“시골에서 버스 30분 기다리는 것은 예사야.”
검암이 또 진정시켰다. 그들은 평택행 버스를 타고 17시20분 경에 평택역에 내렸다. 순례자들은 지난번 오산에서 평택 가는 순례 시에 갔던 무봉리순대국집으로 갔다. 금오랑이 해군지1월호를 배낭에서 꺼내 보여 주었다.
“이것이 해군지입니다. 우리들의 순례기가 실렸습니다. 계속 연재하는 것이 바램입니다.”
“백의 종군로를 걸으며 국토의 구석구석을 돌아볼 수 있어서 참 유익한 여행이에요. 더욱이 개천, 강둑, 논길 옛 마을 길 등이 지금은 개발로 점점 사라지잖아요. 이런 순례 말고 돌아볼 기회가 또 있겠나요? 이름 없는 시골 저수지에 많은 철새들도 놀랍고요. 나라 사랑을 일깨우는 기회라고 생각해요.”
노 작가가 순례를 종합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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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일정:
10:15평택역>10:35출발 >11:00팽성읍 >11:30송화리, 석근리 >12:30둔포리. 둔포고등학교 중식(12:30-13:00), >14:00둔포초교, 둔포천, 송용리, 관대천 >15:00관대리 >15:30봉재리 >16:00봉재저수지, >16:30원남리, 요로원(국도 45, 70 교차점) >(버스로 이동) >평택역 (17:30-18:00 뒤풀이) 28,000보=20km
호랑이 비석의 머리부분
비석을 읽어 보려는 문회장과 현지인
평택역에서 온양 음봉면 원남리까지의 답사행로(노란 삼각표)
대동여지도의 평택이 지금의 팽성임. 현재의 평택은 일제 때 철도역 근처에 생긴 신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