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불(佛), 법(法), 승(僧)의 참된 의미
- 단하소불(丹霞燒佛) 이야기/ 조동례 「중나리」
“흔히들 불법승 삼보를 부처님과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불경과 출가한 스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삼보는 물론 부처님과 불경과 스님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니까 보물이고, 불경이니까 보물이고, 스님이니까 보물인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 불경, 스님은 외부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라 진리를 깨달아 열반을 성취했을 때 부처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깨달음의 길을 바르게 알려주고 있을 때 진리라고 불리고, 깨달음의 길을 충실히 실천하고 있을 때 승가라고 불립니다. 불, 법, 승은 어떤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깨달았을 때, 가르침이 진리일 때, 진리를 실천하고 있을 때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밖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凡所有相]은 모두가 허망한 것[皆是虛妄]이며, 이와 같이 밖에 보이는 모든 것을 허망한 것으로 보게 되면[若見諸相非相] 곧 여래를 보게 된다[卽見如來]’고 하신 것입니다. 만약 삼보를 우리의 외부에 존재하는 불상(佛像), 불경(佛經), 스님으로 보고 있다면 우리는 삼보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단하소불(丹霞燒佛)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단하천연(丹霞天然)이 혜림사란 절에 머문 적이 있는, 혹독하게 추웠던 어느날 밤 이야기다. 너무 추워 절 주변을 돌며 땔감을 찾았지만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땔감을 찾던 단하는 급기야 불전에 들어가 목불(木佛) 하나를 들고 나와 그것을 뽀개어 불을 땠다. 그 얘기를 듣고 절의 살림을 맡아보던 원주(院主)가 쫓아와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른다.
‘아니 불상을 태우면 어쩌자는 거요?’
단하의 대답은 그의 법명대로 천연스럽다.
‘아, 태워서 사리를 얻으려구요.’
‘아니 목불을 태워서 무슨 사리를 얻겠다는 겁니까?’
‘그래요? 그럼 저기 있는 불상 두 개도 마저 가져다 불을 땝시다.’
원주는 그 뒤에 눈썹과 수염이 모두 떨어졌다고 한다. 《선문염송》에 붙인 말(說話)대로 ‘대반야(大般若)를 비방했으므로 눈썹과 수염이 떨어진 것’일 게다(김영욱 편, 《정선 공안집》, 1)
이에 대해 이진경님은 다음처럼 생각을 답니다.
“절밥을 얻어먹고 있는 스님이 그 절의 목불, 아니 불상을 불태워 온기를 얻고자 하다니, 이 얼마나 기상천외한 발상이고 이 얼마나 대담한 행동인가! 부처를 태워 사리를 얻겠다니, 원주의 비난에 대한 응수는 또 얼마나 멋진가! 사리를 얻을 수 없다면 부처라고 할 것도 없는데, 다른 나무와 뭐가 다를 것인가! 그러니 남은 것도 마저 불을 때자는 말은 정말 비단에 꽃 자수를 더한 격이다.
유머에 주석을 다는 건, 유머 감각 없는 고지식한 사람이나 할 짓이지만, 그래도 불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자리니 굳이 말을 덧붙여보자면, 목불이란 아무리 부처의 형상을 하고 있어도 나무일 뿐이다. 추우면 불을 찾고 더우면 물을 찾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거야말로 무위의 불법이 가르치고자 한 것 아닌가. 다들 너무 추워서 죽을 지경인데, 불상 모시고 앉아 죽는 것보다야 목불이라도 태워서 온기를 얻는 게 더 불법에 충실한 일이다. 그래서일 게다. 불상을 태운 사람이 아니라 그걸 저지하려던 사람이 불법을 비방한 죄로 눈썹과 수염이 떨어진 것은.”(이진경 『설법하는 고양이』 150-151쪽)
부처님도 외부에 존재하는 상(相)이 아닙니다. 생사의 우물을 벗어나는 방법을 깨달아 그 방법을 실천하여 생사를 벗어난 삶을 살아가신 분이 부처님입니다.
다음 시는 스님에 대한 고정관념도 다시 생각해보게 합니다.
중나리
- 조동례
머리 깎고 앉아 있는 중만 중이더냐
이 땅에 새봄 오면
산도 새벽같이 깨어
안개 깔고 앉아 가부좌 튼 중이고
농부는 밭을 가는 중이다
저마다 파도치는 중인데
흔들리는 중이면 흔들리게 두어라
모든 새로 온 생각은
독 없는 새순 같아서
풀숲 중나리도 꽃 피는 중이다
“머리 깎고 앉아 있는 중만 중이” 아니고 깨달음의 길을 충실히 가면 중[僧]입니다. 아니, 연기적 조건에 맞게 마음을 운용하면서 깨달음을 실천하면 중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새봄 오면/ 산도 새벽같이 깨어/ 안개 깔고 앉아 가부좌 튼 중”이고, 문학적으로는 ‘무엇을 하는 동안(의존명사)’에 해당하는 ‘중’이라는 의미도 됩니다. 그래서 “농부는 밭을 가는” 중(僧)이고 ‘동안’입니다. 모두 연기적 조건에 충실한 상태로서 변화하고 있기에 고정된 의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흑백논리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게 연기하는 세계의 본래 모습입니다. 그래서 “저마다 파도치는 중인데/ 흔들리는 중이면 흔들리게 두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 흔들림이야말로 늘 새로운 생각과 행위를 낳고, “모든 새로 온 생각은/ 독 없는 새순”을 내놓기 때문입니다. 또 “독 없는 새순 같아서/ 풀숲 중나리도 꽃 피는 중”입니다. 이 ‘중’이 바로 연기의 진리로 참되게 실천하고 있는 중[僧]입니다.
이렇게 불, 법, 승은 어떤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 상(相)이 아닙니다. 연기법의 진리를 깨달아 생사의 우물을 벗어나면 그것이 깨달은 자로서의 붓다이고, 그 진리의 가르침일 때 성스러운 법(法)고, 진리를 실천하고 있을 때 그를 일러 승(僧)이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오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