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 성인은 1182년 이탈리아 아씨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자유로운 삶을 살다가 1205년 산 다미아노 성당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209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구두로 회칙을 인준하면서 프란치스코가 창설한 '작은 형제회'가 시작되었습니다.
1224년 라베르나에서 양손, 양발, 옆구리에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오상을 받았고,
1226년 10월3일 밤 아씨시의 포르지운꼴라에서 이 세상에서의 삶을 끝내고 하느님 품에 안겼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신자들에게 보내신 편지1)
믿는 영혼이 성령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할 때 우리는 그분의 정배들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할 때 우리는 그분의 그분에게 형제들이 됩니다.
우리가 거룩한 사랑=<예수님>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가지고 우리의 몸과 마음에 그분을 모실 때
우리는 그분의 어머니=<마리아>들이 됩니다.
표양을 보여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야 할 거룩한 행실(영적인 어머니의 삶) 로써
우리는 그분을 낳게(예수 그리스도의 출산) 됩니다.
우리는 영적인 어머니의 삶을 우리는 성모님을 표상으로 닮아가야 할 것입니다.
구약에 아담과 하와는 동반자적 관계였고 하느님의 백성은 오직 이스라엘 백성만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아담(예수님)과 하와(마리아)는 모자간을 이루어진 관계이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구약성서에 핵심은 구약45권중에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이 율법서이자 구약에 주축입니다.
참고로 구약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것은 출애굽기입니다 . 이 성경은 솔로몬 왕정시대 이후 유대인이 바빌론에서 유배생활할 시기 즉 바벨탑이 하느님의 진노를 사 바벨탑이 무너지고 언어가 수십,수백개로 갈라지기 전 한개의 언어로 역사서를 저술한것이 구약입니다.
이 구약성서를 지금의 논문형식이나 보고서 형식을 탈피하여 스토리 형식을 갖추고 적절한 테마를 구성하여 딱딱함이 완화되었습니다.
창세기에 하느님이 사람 (만드심)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지으심)를 지으셨다.
성무일도 전에 바치는 후렴
<프란치스코 기도>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여
세상에 태어난 여인들 중에 당신 같으신 이 없나이다.
당신은, 지극히 높으시고 지존한 왕이신
천상 아버지의 딸이며 여종이시옵고
지극히 거룩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시며
성령의 정배이시옵나이다.
비오니, 성 미카엘 대천사와
하늘의 몬든 천사들과 모든 성인들과 함께
우리의 주님이시오 스승이시며
당신의 지극히 거룩하시고 사랑하시는 아드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소서.
영광이 ... 아멘
성모님은 가브리엘 대천사가 전해 준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이어지게 하시어 생명지체이신 분을 잉태하셨으며 낳으셨습니다.
또한 성령께서 내려 오신다는 표현은 성령께서 그 안으로 들어 가신다는 표현이다, 일례로 부활 때 주님의 승천 후 성령이 내려 오신다는 표현은 같은 맥락으로 성령이 사도들의 몸 안으로 들어 가신다란 표현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신앙은 神學과 信心이 함께 병행해야 됩니다. 그러나 이 두가지가 서로 정립이 되지 않을 때는 방향성을 상실할 우려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겉치레 신앙생활과 기도생활을 열심히 한다 하여 세상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단지 기도와 간구를 통해 내 안의 보물(참 신심)을 발견하고 끄집어내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성체조배
성체조배는 성체와 성혈을 축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여기에 나오는 기억이란 단어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기억"이란 단어를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여태껏 살아오며 일상에 에피소드 처럼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 있을 것이고
일련의 기억을 지니고 살다 현재의 삶속에 연관성이 결부되어 중첩적으로 기억이 생각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후자의 기억처럼 잔상속에 연상되어지고 기억되어지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성체조배에 우리는 임해야 할 것입니다.
즉 우리가 십자가를 보이는 대로 본 다면 무의미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내 앞에 모셔져 있는 십자가속에 예수님이 처형됐을 때의 십자가를 연상하고 그 고통을 느끼고 우리를 대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 성체조배입니다.
우리가 영성체를 모실 때 믿지 않는 이는 한낟 자그마한 빵이라 하며 의미를 부여하려하지 않으나, 믿는 이는 주님의 살과 피란 것을 느끼며 내 안에 주님이 들어오심을 받아 들입니다.
어두움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 없음이라, 하느님을 체험하지 않는 이는 이를 받아 들이기 어렵고
우리가 하느님을 바라보고 매달림은 빛의 비추임입니다.
이에 우리의 초점은 사랑의 초점에 맞추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은 우리가 십자가에 매달리기 위해 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닮아가는 신앙인!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이 대림시기에 우리는 내 안에 모시는 주님,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좀 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한 삶에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고 늘 상 초점을 주님과 맞추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수사님 강론을 제 자의적 해석으로 오기나 오류, 오판이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