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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창영] 계동-제생원, 관상감 관천대, 휘문중학교, 한규설-한학수 | 2001-07-02 오후 11:07:55 |
계동-제생원 운현궁을 돌아보고 현대사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현대사옥 입구에서 우리는 보기좋은 눈높이에 제생원터를 알리는 표지석을 만난다. 제생원이라는 기관은 일찍이 태조 때부터 만들어진 서민들을 위한 복지기관이다. 이곳에 약제를 마련해 두었다가 서민들에게 의료를 베풀어주는 일종의 시민병원 같은 것이다. 의료기관이면서 한편으로 여러가지 복지기관도 겸하고 있었는데 과부나 홀아비・고아・실업자나 행려병자들을 이곳으로 데려다가 수용치료해 주기도 하고 또 때로는 출장치료도 해주었다. 또한 미아가 생기면 반드시 제생원으로 데리고 가서 수용하도록 했다. 그래서 아이를 잃은 부모는 일단 이 제생원으로 가서 찾도록 했으며 아이를 찾은 부모는 그동안 먹인 값을 치르도록 했다. 이 제생원의 업무는 나중에 혜민국이라는 관서로 합병이 됐다. 혜민국은 혜민서라도 했는데 남부 태평방, 그러니까 지금의 을지로 입구 근처에 있었다. 그러나 대민 활동이 제대로 잘 이루어졌다고 보기 힘들다. 혜민서의 경우 약값이 공짜가 아니었고, 활인서의 경우에는 빈자나 전염병 환자를 수용하는 수용소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마저도 정치 상황이 불안정 했을 때에는 유명무실한 경우가 허다하였다. 조선중기 이후에는 관의료가 아닌 민간의료 부문이 활성화 되기 시작하였다. 의약을 갖출 수 있는 경제적 여력이 있고, 의학 지식을 소유한 유력한 양반 가문에서는 스스로 약을 갖추어 집안과 이웃의 건강문제를 해결하였다. 효를 실천하거나 자신의 집안의 건강을 돌보기 위해서 사대부가 의술을 공부하는 것은 유교의 규범 중 하나였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사람을 유의(儒醫)라 불렀다. 양반 가문 내의 약국은 단지 일가에만 혜택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노비나 이웃의 백성도 혜택의 대상이었다. 제생원으로인해 이지역의 명칭이 제생동-계생동이라 했다가 계생동이 기생동이라고 들린다고하여 계동으로 바뀌었다. 제생원 표지석 뒤편 그러니까 현대사옥 바로 앞에는 벽돌들로 쌓은 것으로 조그마한 첨성대를 연상케하는 관상감 관천대를 볼 수 있다. 관상감 관천대 이 관상감 관천대는 천문・지리・역산・측후・각루등의 일을 관장하던 서운관의 천측대로서 소간의대라하며 보통 첨성대라고도 불러왔다. 본래 이곳은 조선시대의 서운관이 있었던 자리로 태조는 고려제도를 본떠 서운관을 만들고, 그 후 세조 12년 명칭이 관상감으로 바뀌었으며 다시 고종 31년 관상소, 1907년 측후소로 바뀌었다. 사적 296호로 지정된 이 관천대는 신라 때의 첨성대, 고려시대 개성 만월대와 같이 조선시대에 천문을 관측하던 시설로 일명 일영대(日影臺)라고 하였는데 세종 16년(1434)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관천대는 이곳에서 약간 동쪽 언덕의 원서동 206번지(전 휘문중학교)에 500년간 위치하였다. 그런데 휘문중고등학교가 강남구 삼성동으로 이전하자 그 자리에 현대그룹 사옥을 건축하였다. 그러자 관천대의 이전이 불가피하였으므로 1983년에 이를 해체하여 도로변에 세우게 되었다. 이 당시 복원할 때 원래 위치했던 지반의 높이를 맞추기 위하여 평지보다 조금 높게 쌓았으므로 이를 보려면 계단을 이용하여야 한다. 관천대의 규모는 높이가 3.46미터, 높이가 2.4미터, 폭 2.5미터 정도되는데 이 대 꼭대기에는 높이 70센티미터, 넓이 70센티미터, 폭 70센티미터가 되는 정사면체의 작은 돌이 쌓여져 있고 둘레에는 돌난간이 만들어져 있다. 조선시대의 관상감은 오늘의 기상청과 유사한 관아로 해와 달과 별의 움직임과 일식・월식을 관찰하는 한편 지상의 벼락, 비와 눈, 서리, 이슬, 지진등을 관측하고 지리, 달력 제작 등을 담당하였다. 세종 때에는 서운관으로 하여금 측우기를 제작하게 하여 우량을 측정한 것으로 유명하다. 관상감 직원들은 엄격한 관측 규칙에 따라 낮에는 오전 오후로 나누고, 밤에는 매경마다 교대로 근무하였으며 비상한 현상에 대한 관측에는 전 직원이 참여하였다. 이러한 관측을 위하여 서울에는 몇개의 천문관측기인 간의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관상감에 대하여 성주덕이 쓴 ⌈서운관지⌋에는 ‘관상감 본감의 하나는 경복궁 영추문 안에 있고, 하나는 북부 광화방에 있었다. 중간에 전쟁(임진왜란)을 만나 다시 창덕궁 금호문 밖와 경희궁의 개양문 밖에 두었는데 모두 관천대가 있다. 속칭 첨성대라고 이른다’고 한 기록으로 보아 관상감 본감의 하나는 궁궐 내에 있고, 다른 하나는 원서동에 두었으며 궁궐내의 본감은 임진왜란 이후부터 국왕이 머무는 궁궐을 따라 창덕궁, 경희궁 등으로 옮겨 다녔던 것을 알 수 있다. 예조에 속한 이곳에서는 매년 11월 동지때 책력을 만들어 임금에게 올렸다. 또한 이곳에서는 천문학과 지구과학적인 모든 현상을 관측 기록하고 치력(治曆)과 시보(時報)관장하였다. 이곳에서 만든 책력은 황장력(黃粧曆)과 청장력・백장력・중력・월력・상력등이 있는데, 이는 태음태양력으로 종이의 품질과 모양새에 따라 구분했다. 이중에서 황장력이 가장 잘 만들어졌다. 홍석모의『동국세시기』에 의하면 하선동력(厦扇冬曆)이라 하는데, 여름의 부채는 관원인 아랫사람이 아전에게 선물하고 겨울 달력은 동짓날에 아전이 윗사람에게 바친다는 것을 말한다. 여름의 부채와 동짓달 한 해가 바뀔 무렵에 서로 나누는 달력은 생활상 필요에 의해 풍속으로 정착되었다. 현대사옥 둘레는 당시 휘문중학교 터로서 해방이후 최초의 정치집회가 개최된 곳이다. 휘문중학교 1906년 5월 하정 민영휘선생이 본교를 창립. 고종 교명 "휘문의숙"을 하사. 1910년 3월 휘문의숙 제1회 졸업식을 거행함(졸업생수는 32명) 1918년 1월 "사립휘문고등보통학교"(4년제)로 개칭함 1922년 4월 "사립휘문고등보통학교"(5년제)로 변경하여 희중당(원서동 소재본관3층 12교실)로 낙성함 1938년 5월 "휘문중학교"(5년제)로 개칭함 1946년 7월 "휘문중학교"(6년제)로 변경함 1978년 1월 강남구 대치동으로 이전 서울시 종로구 계동에는 해방 직후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이 많았다. 특히 여운형은 해방전에 조직된 건국동맹을 토대로 이곳에서 건국준비 활동을 전개하였다. 여운형은 1945년 8월 15일 아침 엔도오 정무총감, 니시히로 경무국장과의 회견을 마치고 돌아와 이곳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였다. 해방 이튿날 8월 16일 아침부터 건준이 활동을 개시한다는 전단이 서울 시내 요소요소에 나붙었다. 이날 아침 여운형은 서대문 형무소로 가서 사상범·경제범의 석방에 입회하였다. 그는 형무소 강당에 집결한 석방자들에 대하여 그동안 긴 세월의 노고를 위로하고 조선민족이 해방되었음을 알렸다. 같은 날 오후 1시 지금의 현대사옥 자리인 계동 휘문중학교에 해방 후 정치집회 제1호가 개최되었다. 건준 위원장 여운형은 운집한 수천의 군중 앞에서 총독부 정무총감 엔도와 협상내용을 알리는 한편 독립을 쟁취하고 건국에 나서자고 열변을 토했다. 한규설-한학수 현대사옥 왼편 상가건물 중에는 예전 한규설의 손자 한학수의 집이 식당으로 남아 있다. 한규설은 한말의 무신으로 본관은 청주, 자는 순우(舜佑), 호는 강석(江石). 아버지는 부사 승렬이다. 형은 총융사 규직이다. 무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875(고종 12) 진주병사가 되었다. 이어 전라좌수사・경상우병사・우포도대장・친군우영사・상리국총판・기기국총판 등을 거쳐 1887년 형조판서가 되었다. 그 뒤 한성부판윤・친군장위사・총어사 등을 역임했다. 1896년 범부대신 겸 고등재판소 재판장으로 있으면서 김안 등과 함께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고 있던 고종을 환궁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했다. 1898년 중추원 의장이 되었으며, 독립협회가 국왕에게 의원 설치를 건의하자 이에 호응해 새로운 중추원관제를 공포하였다. 그해 11월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이 체포되고 독립협회의 혁파가 논의되자 이들을 석방하고 민의를 존중하자고 주장했다. 같은 달 법부대신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정부의 반격으로 독립협회가 강제해산될 때 해임되었다. 1901년 궁내부특진관에 임명되었고, 1902년 다시 법부대신이 되었다. 1904년 12월에는 미국에서 한국의 독립 유지를 위한 노력을 당부하는 고종의 밀서를 이승만・윤병구에게 전달했다. 1905년 의정부참정대신이 되었으며 그해에 일본 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이완용 등을 앞세워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려 하자 일제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를 반대하다가 대궐 수옥헌에 감금되고 바로 면직당했다. 을사조약 체결 후 중추원고문 궁내부특진관을 지냈으며, 1907년 4월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 소장이 되었다. 1910년 일제가 국권을 침탈한 후 남작작위를 주었으나 거부했다. 1920년 6월 이상재 등과 함께 조선교육회를 창립하고, 이어 이를 민립대기성회로 발전시켜 교육을 통한 민족역량 배양으로 국권을 회복하려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패했다. 그의 손자 한학수의 집에 해방전후 건국을 위해 젊은이들이 자주 회합을 가졌다. 그 길을 따라 북쪽으로 2~30m가면 번듯한 2층 양옥집을 만날수 있다. 이 건물은 해방전후 건국준비위원회 건물로 사용되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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