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불교나라[태양정사 & 왕복사]-경남 산청군
 
 
 
카페 게시글
◆사찰 이야기 스크랩 구례 오산 사성암을 찾아서
자광스님 추천 0 조회 629 18.11.22 00:4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전라남도(全羅南道) 구례군(求禮郡) 산동면(山東面) 산수유마을과 방호정(方壺亭)에 들렀다가, 구례군 문척면(文尺面) 죽마리(竹麻里) 오산(鼇山, 531m)과 사성암(四聖庵,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3호)을 찾았다. 자라 형상의 오산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지리산과 마주보고 솟아 있으며, 그 정상부에 사성암이 자리잡고 있다. 오산과 사성암은 지리산(智異山) 노고단(老姑壇, 1,507m) 일대와 섬진강(蟾津江), 구례군 7개 읍면이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전망이 뛰어나 대한민국 명승(名勝)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구례읍 원방리 구례1교에서 바라본 오산과 사성암


구례읍 원방리 섬진강변에서 바라보면 사성암을 품에 안은 오산이 그림처럼 다가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오산에 대해 '산 마루에 바위 하나가 있고, 바위에 빈 틈이 있어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승려 도선(道詵)이 일찍이 이 산에 살면서 천하의 지리(地理)를 그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구례향교에서 발간한 봉성지(鳳城誌, 1800)에는' 그 바위의 형상이 빼어나 금강산과 같으며, 예부터 부르기를 소금강이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봉성은 구례의 옛 이름이다. 


구례읍 원방리 구례1교에서 오산을 바라보면 정상부가 바위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서쪽 벼랑 끝에 사성암이 매달려 있다. 오산에 오르려면 죽마리 죽연(竹淵)마을 주차장에서 시작해서 서쪽 능선을 타야 한다. 걸어서 올라가면 약 40분 남짓 걸린다. 죽연마을에서 사성암 바로 밑에까지 군내버스가 수시로 운행한다. 승용차를 이용할 수도 있다. 


죽마리는 1789년 조선 정조 때 작성된 '호구총수'에 전라도 구례현(求禮縣) 문척면 승연리(升淵里, 대쏘), 1872년에 제작된 '구례현지도'와 1912년에 작성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전라남도 구례군 문척면 죽연리(竹淵里)로 기록되어 있다. 1914년 일제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문척면과 간전면(艮田面)을 통합하여 간문면(艮文面)이 되었고, 문척면 마고리(麻姑里)와 죽연리(竹淵里)를 통합하여 죽마리(竹麻里)가 되었다. 1946년 8월 16일 간문면이 다시 문척면과 간전면으로 분리되면서 구레군 문척면 죽마리 죽연(竹淵)마을이 되었다. 


마을사람들은 죽연마을을 ‘벌멀, 범멀(번멀)’ 또는 '대쏘'라고 부르기도 한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죽연마을 큰 동네는 배의 형국이라 마을에 우물을 파지 않고 1992년까지 섬진강 물을 식수로 이용하였다 한다. 마을 앞에 있던 앞사공 바위는 매몰되었고, 뒷사공 바위도 강물에 유실되었다고 한다.


죽마리 문화유적으로는 전통가옥으로 1900년경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김덕순가옥이 있고, 비석거리 도로변에는 강한섭선덕불망비가 세워져 있다. 또, 죽연사(竹淵祠, 향토문화유산 2003-2호)에서는 매년 2월 중정일(中丁日)에 문산(文山) 고효시(高效柴, 1429∼1501)취아(醉啞) 고원후(高元厚 1609∼1684)사제당(思齊堂) 안처순(安處順, 1492~1534)송암(松庵) 정태서(鄭泰瑞, 1609∼1685)를 배향하고 있다.   


사성암 유리광전과 지장전


사성암 유리광전


죽연마을에서 40분 정도 능선을 타고 올라가면 사성암이 오산의 정상부 절벽에 매달리듯 자리잡고 있다. 사성암 주위에는 1경 신선대(神仙臺), 2경 관음대(觀音臺), 3경 좌선대(左禪臺), 4경 우선대(右禪臺), 5경 배석대(拜石臺), 6경 향로대(香爐臺), 7경 쉬열대 풍월대(風月臺), 8경 괘불대(掛佛臺), 9경 앙천대(仰天臺), 10경 낙조대(落照臺), 11경 영자대(影子臺), 12경 왕천대(王天臺)  오산 12대(臺)의 기암괴석이 저마다 비경을 자랑한다. 


사성암은 8세기 중엽 신라 경덕왕대 인도에서 건너온 화엄종(華嚴宗)의 시조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세웠을 당시에는 오산암(鰲山庵)이라 명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원효(元曉, 617∼686)와 의상(義湘, 625~702), 선각국사(先覺國師) 도선(道詵, 827∼898),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1178~1234) 등 4명의 고승이 수도한 암자라고 해서 사성암이라 불렸다고 한다.


'구례군화엄사기실(求禮郡華嚴寺記實)'에는 연기조사에 대해 '화엄사(華嚴寺)를 창건한 연기조사는 범승(梵僧)'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화엄의 가르침을 널리 펴겠다는 서원을 세운 연기조사는 인도에서 멀리 떨어진 신라 땅 경주로 건너와 황룡사에서 불경을 설했다. 어느 날 밤 꿈에 여인의 손을 잡고 따라온 동자가 '본디 스님은 제 앞에서 화엄의 가르침을 널리 펴겠다고 서원하고는 어찌하여 새 인연처를 찾지 않습니까?'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꿈에 문수보살을 만나 정신이 퍼뜩 든 연기조사는 황룡사를 떠나 새 인연처를 찾아 백제의 옛 땅 지리산으로 들어왔다. 지리산맥을 멀리서 바라보니 장엄한 지리산 연봉들의 형상이 바로 황룡사에서 꿈에 보았던 부인의 모습과 같음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연기조사는 지리산이 새 인연처임을 깨닫고 어머니를 모셔와 꿈에 본 부인의 형상을 닮은 산등성이에 작은 암자를 짓고 연기암(緣起庵)이라고 했다. 연기암은 화엄사에서 2.3km 정도 떨어진 노고단 가는 길목에 있다. 


기록에 따르면 연기조사는 지리산에서 친견한 문수보살을 원불로 삼아 754년(신라 경덕왕 13)부터 화엄사 해회당(海會堂)과 대적광전(大寂光殿)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했다. 화엄사 창건 당시에는 화엄도량의 총림(叢林)이 아닌 작은 규모의 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기조사는 또 754년 8월부터 화엄경 사경(寫經)을 시작해서 이듬해 2월에 완성했다. 연기조사는 화엄사 외에도 지리산의 연곡사(鷰谷寺), 대원사(大源寺) 등도 창건하여 화엄사상을 널리 폈다.


연기(緣起)라는 이름은 지리산과 인연을 맺었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제비를 타고 우리나라에 왔다고 해서 연기(燕起)라고 했다는 황당한 설도 있고, 연기(烟氣) 또는 연기(烟起)라고 쓴 기록도 보인다. 설화에 따르면 연기(緣起)가 맞다.  


1978년에 발견된 신라 경덕왕대의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에 의하면 자장(慈藏, 610~654)과 의상의 화엄사 중건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또, 사성암의 544년(백제 성왕 22) 또는 582년(백제 위덕왕 29) 창건설도 사실이 아니다. 원효와 의상이 사성암에서 수도했다는 설도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연기조사가 754년 화엄사를 창건한 다음에 사성암을 창건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원효와 의상은 그 전에 벌써 열반에 들었다.  


사찰의 영험성을 강조하기 위해 역사를 끌어올리거나 고승들의 창건설 또는 수도설을 지어내는 경우를 종종 본다. 예를 들면 전국의 사찰 중에는 원효와 의상이 창건했다거나 수도했다는 곳이 상당히 많다. 삼국이 쟁패를 다투는 시대에 원효와 의상이 신라도 아닌 적국 백제와 고구려의 도로망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험준한 산악지대의 그 많은 곳들을 다니면서 사찰을 짓고, 또 머무르를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보면 답은 절로 나온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조계산(曹溪山) 제6세 조사인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冲止, 1226~1292)의 시문집인 '원감록 (圓鑑錄)'에는 사성암이 있는 오산 정상에 참선하기 좋은 바위가 있는데, 이들 바위에서 도선, 진각 국사가 연좌수도(宴坐修道)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감록'의 기록으로 보아 사성암은 통일신라 후기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고승들의 참선을 위한 수도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사성암은 8∼13세기까지는 상당한 규모를 가진 수도 도량이었다고 한다.


1226년(고려 고종 13) 전라남도 장흥에서 태어난 충지는 17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9세 때 예부시(禮部試)에서 장원으로 뽑힐 정도로 천재였다.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29세 되던 해에 불문에 출가한 충지는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 홀로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41세 때 정진을 마치고 김해 감로사(甘露寺)에 주석하던 어느 날 한 선덕(禪德)이 찾아와 '무엇이 부처님입니까?' 하고 화두(話頭)를 던졌다. 선덕의 화두 한 마디에 대오각성한 충지는 무애가(無碍歌)를 불렀다. 


無碍(무애)-걸림이 없노라(충지)


春日花開桂苑中(춘일화개계원중) 봄날의 꽃은 계수나무 정원에 피었는데

香不動小林風(암향부동소림풍) 은은한 향기 소림풍에도 움직이질 않네

今朝果熟沾甘露(금조과숙첨감로) 오늘 아침 익은 과일은 감로에 젖었는데

無限人天一味同(무한인천일미동) 한없는 인간 천상계는 한 가지 맛이로세


충지는 감로사를 떠나 정혜사(定慧寺)에 주석했다. 45세 되던 봄 시냇물 흐르는 소리를 듣다가 문득 한 소식을 얻었다. 깨달음의 기쁨에 충지는 오도송(悟道頌) 청천가(聽泉歌)를 불렀다. 


청천(聽泉)-시냇물 소리를 듣다(충지)


 鷄足峯前古道場(계족봉전고도장) 계족산 봉우리 앞 옛 도량 있는데

今來山翠別生光(금래산취별생광) 이제 와 보니 푸른 산빛 유별나네

 廣長自有淸溪舌(광장자유청계설) 부처님 소리가 바로 시냇물 소린데

 何必喃喃更擧揚(하필남남갱거양) 뭣땜시 부처님 소리를 다시 세우랴


충지는 불법이 곧 우주 삼라만상 그 자체임을 깨달았다. 시냇물 소리도 불법이요, 댓잎에 스치는 바람소리도 불법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도 충지의 수행은 끝이 없었다. 그는 거미줄이 얼굴을 덮고, 무릎에 먼지가 쌓여 새발자국이 찍힐 정도였으며, 거미줄이 얼굴을 뒤덮고, 머리털은 헝클어져 허깨비처럼 변할 정도로 선정에 들곤 했다. 선정에 들었던 어느 날 충지는 시공을 초월한 더없는 깨달음을 얻고 오도송 천지일향가(天地一香歌)를 불렀다.    


천지일향(天地一香)-천지가 모두 하나로세(충지)


塵刹都盧在一庵(진찰도노재일암) 무수히 많은 정토가 모두 한 암자에 있나니

 不離方丈遍詢南(불리방장편순남) 방장을 떠나지 않고도 남방을 두루 순방했네

善財何用勤劬甚(선재하용근구심) 선재동자는 무엇 때문에 그 고생 자처하면서

 百十城中枉歷參(백십성중왕력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곳을 두루 순방했던가? 


67살이 될 때까지 용맹정진하면서 구도의 길을 걸어온 충지도 육신의 옷을 벗을 때가 되었다. 어느 날 충지는 이승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초연히 열반송(涅槃頌)을 불렀다.   


열반송(涅槃頌)-나는 가네(충지)


閱過行年六十七(열과행년육십칠) 더듬어 지나온 길 어언 예순일곱 해

到今朝萬事畢(급도금조만사필) 오늘 아침 드디어 모든 일 끝나도다

故鄕歸路坦然平(고향귀로탄연평)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평탄도 한데

 路頭分明曾未失(로두분명미증실) 갈 길이 뚜렷하여 길 잃을 일도 없네

 手中在有一枝空(수중재유일지공) 내 손에 든 건 오직 지팡이 하나지만

   且喜途中脚不倦(차희도중각불권) 도중에 다리 품 덜어줌을 기뻐하노라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충지는 옷을 갈아입은 뒤 생사의 바다를 건너 소풍을 떠나듯 육신의 옷을 벗었다. 때는 고려 충렬왕 19년(1293)이었다. 


사성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의 말사이다. 1630년(조선 인조 8)에 중건한 뒤 1939년 이용산(李龍山)이 중창했다. 사성암 당우로는 유리광전(琉璃光殿), 지장전(地藏殿), 산왕전(山王殿), 금강선원(金剛禪院), 종무소, 요사채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20호)이 있다.  


사성암 유리광전 법당


유리광전 마애여래입상


사성암 유리광전은 바위 절벽에서 튀어나온 듯 위태로운 모습이다. 유리광전은 약사유리광여래(藥師瑠璃光如來, bhai?ajyaguru) 또는 대의왕불(大醫王佛)을 주불로 모신 전각으로 약사전이라고도 한다. 유리광전 법당의 정면 암벽에는 마애여래입상이 새겨져 있다. 


구례 사성암마애여래입상(求禮四聖庵磨崖如來立像)은 높이 3.9m로 바위 표면 그린 외곽선을 따라 일정한 깊이와 너비로 오목새김을 했다. 광배(光背)는 이중의 선으로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모두 표현했다. 두광은 불꽃무늬(火紋)로 장식했고, 신광은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인데 당초문(唐草紋)으로 장식했다. 광배의 무늬는 경주 골굴암마애여래좌상(慶州骨窟庵磨涯如來坐像, 보물 제581호)의 양식과 매우 유사하다. 


머리는 소발(素髮)에 큼직한 육계(肉髻)가 솟아 있고, 상호(相好)는 장타원형으로 이목구비 등이 소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귀는 길게 늘어져 어깨까지 내려와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고,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왼손도 가슴 앞에서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아미타정인(阿彌陀定印)을 취하고 있다. 왼손에 들고 있는 약합은 약사여래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대의(大衣)는 양 어깨를 덮은 통견(通肩)으로 상복부에서부터 파상문(波狀文) 또는 U자형 옷자락이 무릎까지 내려와 있다. 왼쪽 어깨의 옷주름은 격자무늬로 되어 있어 다소 특이하다. 무릎 아래는 대의 끝단 밑으로 군의(裙衣) 자락이 표현되었다. 군의 끝단 밖으로 나온 발은 도식적으로 처리했다. 이 마애불은 하체에 비해 얼굴과 손이 강조된 것이 특징이다. 마애불이 지상에서 2m 정도 위에 있어 예불자의 시각을 고려하여 조각한 것으로 보인다. 사성암 마애여래입상은 전체적으로 간략한 음각기법과 옷주름에서 나타난 파상문 등의 양식으로 보아 나말여초인 9세기 말에서 10세기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성암의 마애여래입상은 원효가 손톱으로 그렸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원효는 경주의 저자거리를 떠돌며 춤과 노래로 중생들의 아픔을 달래주었던 신라의 고승이다. 7세기의 사람이 9세기 말에 이 마애여래입상을 새겼다는 것은 도저히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다. 원효 조각설은 마야여래입상의 신성성을 강조하기 위해 후대에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원효의 속성은 설씨(薛氏)다. 그는 경상북도 압량군(押梁郡) 불지촌(佛地村)에서 잉피공(仍皮公)의 손자, 내마(奈麻) 담날(談捺)의 아들로 태어났다. 불지촌은 발지촌(發智村) 또는 불등을촌(佛等乙村)이라고도 불렀다는데, 지금도 경산시 자인면에는 신문왕(神文王) 당시 원효가 지었다는 금당(金堂) 자리가 남아 있다. 그의 아들 설총(薛聰)의 출생지로 전하는 자리도 남아 있다. 


원효의 집은 원래 율곡(栗谷)의 서남쪽에 있었다고 전한다. 어머니가 원효를 임신하고 이 골짜기를 지나다가 갑자기 산기가 있어 집에 들어갈 사이도 없이 밤나무 밑에서 출산을 하였다. 밤나무를 사라수(裟羅樹), 밤이 이상하게 커서 이를 사라밤(裟羅栗)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15세경에 출가한 원효는 스승도 없이 홀로 경전을 섭렵하여 한국불교사에 길이 남는 고승이 되었다. 하지만 기록에는 원효가 고구려로부터 망명하여 완산주(完山州)에 와 있던 보덕(普德)을 스승으로 하였다는 설도 있다. 시대적으로 볼 때 그는 자장(慈藏)의 문하에서 공부했을 가능성이 많다.


원효는 34세 때 당시 풍조에 따라 8세 연하인 의상(義湘)과 함께 당나라 유학의 길을 떠나 요동까지 갔다가 도중에 고구려군에게 잡혀 돌아왔다. 10년 뒤 그는 다시 의상과 함께 배를 타고 당나라로 들어가려 하였다. 그러나, 여행 도중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구역질을 하다가 문득 '진리는 결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터득하고 오도송을 지어 불렀다. 


오도송(悟道頌) - 난 깨달았네(원효)


心生故種種法生(심생고종종법생) 마음이 일어나므로 온갖 것들이 생겨나고

心滅故龕墳不二(심멸고감분불이) 마음이 사라지니 감실과 무덤 다르지 않네

 

三界唯心萬法唯識(삼계유심만법유식) 

心外無法胡用別求(심외무법호용별구)

온 세상은 오직 마음에 달려있고 온갖 현상 오로지 생각에 달려있네

 마음 밖에 아무것도 없는데 어찌 다른 것을 구하려고 마음 쓰겠는가


원효는 해골의 물을 마시고 '화엄경(華嚴經)'의 핵심 사상인 '세상사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깨달았던 것이다. 해골물 한 모금에 대오각성한 원효는 곧 바로 의상과 헤어져서 신라로 돌아왔다. 


원효는 이후 걸림이 없는 무애인(無碍人)이 되어 철저한 자유인으로 살아갔다. 그는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一切無㝵人 一道出生死).'라면서 '무릇 중생의 마음은 원융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니, 태연하기가 허공과 같고 잠잠하기가 오히려 바다와 같으므로 평등하여 차별상(差別相)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그는 부처와 중생을 둘로 보지 않고 하나로 보았다. 원효는 무애인이었기에 어느 종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불성(佛性)의 다른 표현인 일승(一乘)과 화쟁사상(和諍思想)의 바탕이 된 일심(一心), 누구든지 여래가 될 수 있다는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 등 독자적인 불교 사상체계를 세울 수 있었다.


자유인 원효는 저자거리에서 광대 차림을 하고,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나니라.'는 화엄경의 이치를 담은 '무애가(無㝵歌)를 부르며 민중교화승으로서 중생들과 함께 뒹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공개구혼가를 고래고래 부르면서 골목길을 누비고 다녔던 낭만주의자였다. 


誰許沒柯斧(수허몰가부) 그 누가 내게 자루없는 도끼를 주려는가 

我斫支天柱(아작지천주)​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어 보련다 


어떤 여자든지 짝을 만나면 '아작(我斫)'을 내겠다는 공개구혼가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둘째딸 요석공주(瑤石公主)의 귀에 들어갔고, 결국 결혼에 골인한 두 사람 사이에 신라 3대 문장가이자 신라 10현 중 한 사람인 설총(薛聰)이 태어났다. 파계한 뒤 그는 소성거사(小性居士)라고 칭하고 속인 행세를 하였다. 결혼과 득남은 원효로 하여금 더욱 위대한 사상가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다.


무애인 원효에 대해서는 수많은 일화가 전해온다. 그는 때로 미친 사람과 같은 말과 행동을 하기도 했고, 여염집에서 유숙하면서 거사(居士)들과 어울려 술집이나 기생집에도 드나들었다. 금빛 칼과 쇠지팡이를 가지고 다니며 글을 새기기도 했고, '화엄경'에 대한 주소(註疏)를 지어 강의하기도 하였다. 또, 때로는 가야금을 들고 사당(祠堂)에 가서 음악을 즐기기도 하였으며, 명산대천을 찾아 좌선(坐禪)하는 등 걸림이 없었다. 행동에도 일정한 규범을 따르지 않았고, 사람들을 교화하는 방법도 다양했다. 어떤 때에는 받았던 밥상을 내동댕이치고 사람을 구하기도 하였고, 또 어떤 때에는 입 안에 물고 있던 물을 뱉어 불을 끄기도 하였다. 그의 교화법은 중국 서진(西晋)의 고승 배도(杯度)나 양나라 때의 승려 지공(誌公)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원효의 대표적인 저술에는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과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가 있다. '금강삼매경론'은 중국 남북조 때부터 당나라 때까지 유행하였던 여러 설과 교리를 두루 모아 엮은 경전인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에 대한 주석서이고 '대승기신로소'는 1∼2세기경 인도의 마명(馬鳴)이 저술했다고 전해지는 대승불교 교리를 찬술한 대표적인 논서인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대한 주석서이다. '대승기신론소'는 '대승기신론'의 주석서 중에서 최고의 주석서로 평가되는 명저로 중국에서는 '해동소(海東疏)'라고 불렸다.


원효를 이야기하자면 의상을 빼놓을 수 없다. 의상은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개조(開祖)이다. 644년(선덕여왕 13) 경주 황복사에 출가한 의상은 원효와 함께 중국으로 가다가 요동(遼東)에서 정탐자로 오인을 받아 고구려군에게 잡혀 몇 달간 억류되었다가 신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661년(문무왕 1년) 의상은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중국으로 들어갔다. 


의상은 화엄학을 공부하기 위해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에 주석하고 있던 중국 화엄종의 제2조(第二祖) 지엄(智儼)을 찾아갔다. 전날 밤, 해동(海東)의 큰 나무 한 그루에서 잎이 번창하더니 그 잎이 중국까지 뒤덮는 꿈을 꾼 지엄은 의상을 특별한 제자로 삼고 화엄경의 미묘한 뜻을 일일이 해석하며 가르쳤다고 한다. 의상은 남산율종(南山律宗)의 개조 도선율사(道宣律師)와도 교유하였다. 또 함께 동문수학한 현수(賢首)는 지엄이 죽은 뒤 중국 화엄종의 제3조가 된 인물이다. 8년 동안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의상은 현수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친밀한 관계를 이어갔다.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뒤 의상은 화엄사상을 전하기 위해 676년(문무왕 16) 왕명으로 영주의 부석사(浮石寺)를 지은 것을 비롯해서 중악 팔공산 미리사(美里寺), 남악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강주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웅주 가야현 보원사(普願寺), 계룡산 갑사(甲寺), 삭주 화산사(華山寺), 금정산 범어사(梵魚寺), 비슬산 옥천사(玉泉寺), 전주 모악산 국신사(國神寺) 등 화엄십찰(華嚴十刹)을 세우고 화엄사상을 전파했다. 화엄십찰 외에도 불영사(佛影寺)와 삼막사(三幕寺), 초암사(草庵寺), 낙산사(洛山寺) 홍련암(紅蓮庵) 등의 사찰도 그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홍련암 창건 설화가 전해 온다. 당나라에서 귀국한 직후 의상은 낙산사 관음굴(觀音窟)에 들어가 관음보살(觀音菩薩)에게 기도를 드렸다. 의상은 파랑새를 좇아 관음굴 앞으로 왔는데, 새가 석굴 속으로 들어가더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상하게 여긴 의상은 관음굴 앞 바다 가운데에 있는 바위 위에서 지성으로 7일간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바닷속에서 붉은 빛깔의 연꽃이 솟아오르고 그 속에서 관음보살이 나타났다. 의상은 그 자리에 암자를 짓고 홍련암이라고 했다.


홍련암 전설을 통해 의상은 보타락가산(寶陀洛迦山)에 상주하며 설법을 편다고 전해지는 화엄경의 관음보살이 신라의 동해에도 머물고 있다는 믿음을 백성들에게 주고자 했다. 이때 그는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이라는 짧은 글을 써서 자신의 관음신앙을 정리했다. 이후 전국의 사찰을 돌아다니며 화엄학을 강론했다. 

 

의상은 제자들의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여 문하에 3천 명의 제자를 두었다. 그는 부석사에서 40일간 법회를 열고 일승십지(一乘十地)에 대해 문답을 나눴고, 소백산 추동에서는 90일 동안 화엄경을 강의하기도 했다. 제자들 가운데 오진(悟眞)과 지통(智通), 표훈(表訓), 진정(眞定), 진장(眞藏), 도융(道融), 양원(良圓), 상원(相源), 능인(能仁), 의적(義寂) 등 의상십철(義湘十哲)은 의상의 아성(亞聖)으로 불릴 만큼 뛰어난 제자들이었으며, '송고승전'에 이름이 보이는 범체(梵體)나 도신(道身)도 훌륭한 제자들이었다. 


의상의 '백화도량발원문'과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記)', '소아미타의기(小阿彌陀義記)',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 '일승발원문(一乘發願文)' 등의 저술은 화엄경에 나타나는 법성(法性)의 바다를 천명한 것이며,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한없이 깊은 뜻을 밝힌 것이다.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는 제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연구되어 후에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으로 집대성되었다.

  

해동화엄의 초조(初祖)가 되었던 의상은 신라인들로부터 보개여래(寶盖如來)의 화신, 성인으로 추앙을 받았다. 그것은 그가 화엄대교(華嚴大敎)를 널리 전파하여 신라인들에게 대광명을 주었기 때문이다. 신라의 대문호 최치원(崔致遠)은 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에서 그를 가리켜 '전등(傳燈)의 묘업(妙業)'이라고 칭송하였다. 고려시대 일연이 쓴 삼국유사는 '의상전교(義湘傳敎)'라는 제목을 따로 만들어 '화엄을 캐어 와 고국에 심었으니, 종남산과 태백산이 같은 봄이네.'라고 극찬의 뜻을 담아서 기술하고 있다. 1101년 고려 숙종은 의상에게 해동화엄시조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를 추증하고 부석사에 그를 기리는 비를 세웠다.  


송나라 찬영(贊寧) 등이 편찬한 송고승전(宋高僧傳)에는 의상을 매우 청빈한 승려로 기술하고 있다. 문무왕은 제자들과 함께 화엄사상을 널리 전파한 것을 높게 평가해 의상에게 땅과 노비를 내린 일이 있다. 하지만 의상은 '우리의 법은 지위가 높고 낮음을 평등하게 보고, 신분이 귀하고 천함을 한가지로 합니다. 또한 열반경(涅槃經)에는 8가지 부정한 재물에 대해 말하고 있으니 어찌 제가 이를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거절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 일화는 송나라에까지 전해져 '송고승전'에 기록되었다.


또 이런 일화도 있다. 문무왕이 경주에 성곽을 쌓을 것을 명하자 의상이 이를 듣고 '왕의 정교(政敎)가 밝다면 비록 풀언덕 땅에 금을 그어 성이라 해도 백성이 감히 넘지 못하고 재앙을 씻어 복이 될 것이오나, 정교가 밝지 못하다면 비록 장성(長城)이 있더라도 재해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이 글을 본 문무왕은 성곽 축성을 중지했다고 한다.


 유리광전 난간에서 바라본 섬진강


유리광전 난간에서 남서쪽을 바라보면 섬진강 일대의 풍경이 일망무제로 다가온다. 전남 곡성에서 흘러온 섬진강이 곡류하는 지점에서 황전천이 합류한다. 건설 중인 인도교 건너편 구례읍 원방리에 견두지맥의 마지막 봉우리 병방산(150m)이 나즈막하게 앉아 있다. 병방산 뒤 섬진강 건너편으로 별봉산(614m)과 봉두산(753m)이 솟아 있다. 봉두산 뒤로 삼산(772m)과 희야산(763.8m)도 보인다. 봉두산에서 희야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전남 순천시와 곡성군의 경계가 된다. 섬진강-황전천 동쪽은 구례군 문척면, 섬진강과 황전천 사이는 전남 순천시 황전면이다. 섬진강 곡류의 북쪽은 구례읍이다.  


사성암의 지장전과 금강선원은 바위 절벽 위에 살짝 얹어 놓은 듯 나란히 앉아 있다. 지장전과 금강선원은 오르는 길은 가파른 돌계단길이다. 돌계단길 중간에는 수령 600살을 헤아리는 아름드리 귀목(櫷木)나무가 있다. 귀목나무는 느티나무(槐木, 槻木)를 말한다. 금강선원은 승려들 참선하는 공간이라 외부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지장전은 금강선원 안쪽에 있어 역시 들어갈 수 없다.    


금강선원 입구 바로 위에 소원바위가 있다. 시주함에 천원을 넣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안내판은 설명하고 있다. 종교의 본질은 구복신앙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그냥 지나친다. 다만 마음 속으로 '세계의 평화! 인류의 행복! 남북 통일!'을 기원한다. 


산신각


소원바위를 끼고 돌아가면 암벽 사이에 끼어 있는 산신각이 나온다. 산신각은 지은 지 아직 얼마 안 되는 듯 단청도 칠해져 있지 않았고, 당우명을 새긴 편액도 걸려 있지 않았다.   


도선굴


치성터


산신각 바로 옆에는 선각국사 도선이 수도를 했다는 도선굴이 있다. 앞뒤가 뚤린 통로 한가운데에 있는 도선굴은 한 사람 정도 앉아 있을 만한 넓이의 굴이다. 도선굴의 어둠을 말없이 사르는 촛불들은 그 누군가의 간절한 소원일 게다. 진각국사 혜심도 도선굴에서 수행을 했는지 모를 일이다. 


도선은 827년 전라남도 영암에서 태어나 15살에 월유산 화엄사(華嚴寺)로 출가하였다. 전국의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면서 수행을 하던 도선은 846년(신라 문성왕 8) 곡성군 죽곡면 원달리 동리산(桐裏山) 태안사(泰安寺)에서 혜철(惠徹)의 법문을 듣고 무설설(無說說) 무법법(無法法)의 오묘한 선법을 깨달았다. 850년 천도사(穿道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이후 도선은 운봉산(雲峯山), 태백산 등지로 옮겨다니면서 수행을 하다가 859년(헌안왕 3) 김천시 증산면 평촌리에 청암사(靑巖寺)를 창건하였다. 863년 도선은 전라남도 광양시 백계산 옥룡사(玉龍寺)에 자리를 잡고 제자들을 양성하다가 898년(효공왕 2) 입적했다. 효공왕은 그에게 요공선사(了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렸고, 제자들은 옥룡사에 징성혜등탑(澄聖慧燈塔)을 세웠다.  


도선이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참위설(讖緯說)을 결합한 도참설(圖讖說)의 대가로 유명해진 것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에 의해서다. 왕건은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은 일을 합리화하고, 고려 왕조의 개창이 하늘의 뜻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건국의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도선의 도참설을 이용한 측면이 있다. 


875년(헌강왕 1) 도선은 '지금부터 2년 뒤에 반드시 고귀한 사람이 태어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는데, 과연 그의 말대로 송악에서 왕건이 태어났다고 한다. 이 예언 때문에 태조 이후의 고려 왕들은 도선을 국사로 예우하며 극진히 존경하였다. 고려 숙종은 도선에게 대선사(大禪師)를 추증하고 왕사(王師)를 추가하였으며,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로 추봉(追封)하였다. 의종은 비를 세웠다.


도선의 저술로는 '도선비기(道詵秘記)',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등이 있다. 풍수지리설과 음양도참설(陰陽圖議說)을 기초로 하여 쓰여진 '도선비기'는 고려 이후의 정치, 사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원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도선의 사후 '도선비기'를 칭하는 예언서가 세상에 나돌아 민심을 현혹하는 일이 많았다. 훈요십조(訓要十條)에 지덕(地德)이 좋은 명당에 절을 세우라고 한 것을 보면 왕건도 도참설을 신봉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대학에도 풍수학과가 설치되어 있는 것도 도선의 영향이 아닌가 한다. 


혜심은 1178년 전라남도 화순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최식(崔寔), 자호는 무의자(無衣子)다. 1201년(고려 신종 4) 사마시에 합격한 뒤 태학에 들어가 출세가도를 달리던 혜심은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찍 죽은 아버지에 이어 1202년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사문의 길로 들어섰다. 


1203년 혜심은 조계산(曹溪山) 수선사(修禪社)를 찾아가 불교 정화를 추진하고 있던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의 문하에 들었다. 지리산 금대암(金臺庵)에서 3년 동안 수행을 한 혜심은 1205년 억보산(億寶山) 백운암(白雲菴)으로 스승을 찾아뵈었다. 지눌은 제자에게 '그동안 수행은 어떠했고, 불법은 무엇이며, 우주는 무엇인가?' 물었다. 스승이 던진 말 한 마디에 혜심은 문득 화엄선(華嚴禪)의 대각을 이루고 깨달음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 


불각화(佛覺華) - 부처님의 꽃(혜심) 

 

普光明殿是吾家(보광명전시오가) 부처님 보광명전은 그대로 나의 집이요

 三法一源初睡起(삼법일원초수기) 교행증 삼법의 한 근원에 첫잠이 깨도다

 百十由旬一念收(백십유순일념수) 아득히 먼 거리도 한 생각에 거둬들이니

世間時劫都爲爾(세간시겁도위이) 세간의 시간이야 모두 헛되고 헛되도다


혜심의 오도송을 들은 지눌은 '내가 이미 너를 얻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고 하면서 법을 인가하였다. 1208년(희종 4) 지눌이 수선사 주지를 맡기려 하자 혜심은 사양하고 지리산으로 숨었다. 1210년 지눌이 입적하자 혜심은 제2대 수선사주(修禪社主)를 맡아 간화선(看話禪)을 강조하였다. 1212년 강종(康宗)의 명으로 수선사가가 증축되자 그는 '심요(心要)'를 지어 올렸고, 문하시중 최우(崔瑀)는 그에게 두 아들을 출가시켰다.  


1213년 고종(高宗)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혜심에게 선사(禪師)에 이어 대선사를 제수하였다. 1220년(고종 7) 단속사(斷俗寺) 주지로 임명된 혜심은 4년 뒤인 1234년(고종 21) 6월 26일 월등사(月燈寺)에서 입적하였다. 그의 나이 56세, 법랍 32세였다. 그의 문인에는 몽여(夢如), 진훈(眞訓), 각운(覺雲), 마곡 등이 있다.


고려 고종은 혜심에게 진각국사 시호와 '원소지탑(圓炤之塔)' 부도명을 내렸다. 그의 부도는 송광사 광원암(廣遠庵) 북쪽에 있고, 이규보(李奎報)가 찬한 진각국사비(보물 제313호)는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월남사지에 있다. 현재 비문은 잔비(殘碑)만이 전해 오고 있다. '동국이상국집', '동문선', '조선금석총람' 등에 비문이 수록되어 있다.


혜심의 저술로는 '심요'를 비롯해서 '선문염송(禪門拈頌)' 30권, '조계진각국사어록(曹溪眞覺國師語錄)' 1권, '무의자시집(無衣子詩集)' 2권, '금강반야파라밀경찬(金剛般若波羅蜜經贊)', '구자무불성화간병론(狗子無佛性話揀病論)', '선문강요(禪門綱要)' 1권 등이 있다.  


오산 정상 표지석


팔각정


지리산맥과 견두지맥, 구례읍, 삼진강


구례읍


지리산 반야봉, 노고단, 왕시루봉, 형제봉


구례 토지면과 간전면


계족산, 둥주리봉, 백운산


오산 정상에서 필자


도선굴에서 오산 정상까지는 5~10분 정도면 충분히 올라갈 수 있다. 정상에 서면 백두대간 지리산맥과 견두지맥, 구례읍, 구례읍을 관통하여 토지면과 간전면 사이를 흐르는 섬진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동쪽으로는 호남정맥의 백운산도 보인다. 


오산 정상의 전망은 가히 국보급이라고 할 수 있다. 저 호남정맥과 백두대간을 타고 여기서 충주까지 걸어 가보고 싶다. 인생은 어차피 나그네길이다.  


2017. 3. 19.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