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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게시물은 외신번역 전문 블로그 '뉴스페퍼민트'(NewsPeppermint)가 2016년 7월 25~27일 사이에 3편으로 나눠 번역 소개한 것이다(원래 위치 링크☞ 1부, 2부, 3부). 원문은 앤드류 프로콥(Andrew Prokop)이 2016년 7월 20일 <복스>(Vox)기고한 글 "How Republicans went from the party of Lincoln to the party of Trump, in 13 maps"(공화당이 링컨에서 트럼트로 이동하기까지의 과정을 13장의 지도로 보기)이다. '크메르의 세계'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3편으로 나뉜 번역문을 한편으로 통합 편집하고, <복스>의 원본에 삽입된 지도들과 동영상 한편을 추가했다. [크세] |
미국 공화당 변천사: 링컨의 공화당이 트럼프의 공화당이 되기까지
글: Andrew Prokop, 번역: popping
* 옮긴이: 노예 해방을 이뤄낸 에이브러햄 링컨의 공화당은 지난주 도널드 트럼프를 대통령 후보로 임명한 그 공화당과 같은 정당입니다. 아무리 긴 세월이 흘렀다지만 어떻게 이런 극과 극의 모습이 나타나게 된 걸까요? 복스가 13가지 결정적인 장면을 통해 공화당의 변천사를 훑었습니다. 주제에 따라 1) 노예 반대 정당에서 친기업 정당으로의 변화, 2) 공화당의 보수화와 남부 유권자들의 보수화, 3) 미국의 인구구조 변화, 공화당에는 위기? 세 편으로 나누어 사흘 동안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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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은 노예제 확산을 막기 위한 운동에 그 태생의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 점을 고려하면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후보 지명은 대단히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한 세기 반 동안 물론 공화당은 시대의 요구와 흐름에 따라 변화를 거듭했습니다. 지금은 유색인종의 외면을 받는 공화당이지만, 한때는 당대 가장 진보적인 의제를 공화당이 독점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탄탄한 지지 기반을 북부 공업지대 갖추고 있던 것도 공화당입니다. 지금 공화당이 강세를 보이는 건 남부입니다.
1. 노예 해방을 위해 싸우던 정당이 친기업 정당으로 변모하기까지
1) 공화당이 탄생한 뿌리에는 “노예 노동력”에 대한 반대가 있다
건국 이후 50년간 (18세기 후반 ~ 19세기 초중반) 노예제는 미국의 수많은 정치적 의제 가운데 그저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특히 농업을 기반으로 한 미국 남부의 경제는 수백만 노예 노동 없이 운영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1850년 당시 양대 정당이었던 민주당과 휘그(Whig)당은 모두 (남부 주들의) 노예제를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서부로 개척이 계속되고 새로운 주가 잇달아 편입되면서, 새로 생겨난 주에서 노예제를 허용할지, 아니면 금지할지는 정치적으로 첨예한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이는 당장 상원과 대통령 선거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노예를 허용하는 주가 (금지하는 주보다) 더 많아지면, 노예를 허용하는 주가 상원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대통령을 뽑는 데 필요한 선거인단 과반수를 확보하기도 훨씬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극소수 급진적인 정치인을 제외한 북부 정치인 대부분은 남부의 노예제를 당장 폐지하자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두려워한 건 남부를 중심으로 노예제에 찬성하는 주들이 연방 정치에서 다수를 차지해 일종의 도당을 형성하고 미국 정치 전반을 쥐락펴락하며, 원하는 부문에 노예제를 도입해 자유주 출신 백인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위협받는 상황이었습니다.
(지도) 1854년 캔자스-네브라스카 협약 (출처: PBS). 청색 부분은 노예주들, 카키색 부분은 자유주들.
휘그당은 1854년 새로 미국에 가입하려는 캔자스 주와 네브라스카 주를 노예제를 허용하는 주로 할지 금지하는 주로 할지 문제를 두고 대립하다가 쪼개졌습니다.
권력 공백을 메우며 빠르게 새로 부상한 건 철저히 북부 자유주(free state)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정당이었습니다.
새로운 정당이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 건 아닙니다. 모든 인종이 평등하다고 한 것도 아닙니다. 이 정당의 주장은 기존의 노예제는 인정하되, 노예제를 더 많은 주로 확산하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이 주장은 하원 선거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순식간에 전국 규모 정당으로 성장한 이 신생 정당은 공화당으로 불렸습니다.
(크메르의 세계 추가 배경지식) '미국 혁명전쟁'(독립전쟁: 1775~1783) 이후 결성된 최초의 정당은 '연방당'(Federalist Party: 1789~1801 집권)이었다. 이후 '연방당'이 강력한 중앙정부와 느슨한 헌법체제를 주장하자, 각 주의 권리와 엄격한 헌법체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워싱턴 행정부의 초대 국무장관 토머스 제퍼슨을 중심으로 '제퍼슨 공화파'(Jeffersonian Republicans: 1801~1825년 집권)로 결집했다. '제퍼슨 공화파' 집권 후 '연방당'은 소멸했다. 1820년대에 제퍼슨 공화파는 '국가공화파'와 '민주공화파'로 양분됐고, '국가공화파'는 '휘그당'(활동 1834~1854/ 프리메이슨 반대론자들도 여기에 합류), 그리고 '민주공화파'는 1830년대부터 '민주당'(Democratic Party)이란 이름을 사용하면서 1837~1860년까지 연속으로 집권했다. 이후 '민주당'은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다. 이후 '휘그당'에서 분파한 '공화당'(Republican Party: 1854년 결성)이 결성되면서 '휘그당'은 사라졌고, '공화당'은 '민주당'이 '북부 민주당'과 '남부 민주당'으로 대립하는 와중에 1860년 선거에서 링컨을 대선후보로 내세워 집권에 성공했다. |
2) 남북전쟁과 노예 해방군이 된 공화당
공화당이 창당한 뒤 첫 6년, 노예제를 둘러싼 갈등이 점차 격렬해졌고, 노예제는 미국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로 자리 잡습니다. 노예제에 반대하는 자유 토지당 지지자(Free-Soilers)와 캔자스 주의 노예를 거느린 정착민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고, 대법원은 흑인은 미국 시민이 될 수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노예제 폐지론자 존 브라운(John Brown)은 노예주들을 향해 무장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공화당은 북부에서 점차 지지층을 결집해 갔습니다. 그리고 1860년 대선에서 전국적으로 지명도가 그다지 높지 않았던 에이브러햄 링컨을 대통령에 당선시키는 쾌거를 이룹니다. 당선될 때까지만 해도 링컨은 노예 해방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여러 차례 기존의 노예제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오로지 북부 공화당 정부가 주도한 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 자체가 탐탁지 않았던 남부 노예주 11곳은 1861년 미국 연방에서 탈퇴해 남부 연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을 결성합니다. 북부 주들은 남부 연합을 인정하지 않기로 했고, 남북전쟁이 일어납니다.
(지도) 연방에서 탈퇴한 남부 노예주들(녹색). 보다 연한 색깔의 주들은 타협을 주장한 주들. (Ward, Prothero, and Leathes, The Cambridge Modern History Atlas)
전쟁에 돌입한 상황에서도 북부 주들의 원래 목표는 노예 해방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남부 주들을 다시 미국으로 편입하는 게 목표였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진행되면서 남부군을 전략적으로 약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요소가 노예제라는 사실을 깨달은 링컨과 공화당은 점점 노예제 폐지를 내세우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1863년 링컨은 노예 해방을 선언합니다. 남부 연합에 속한 노예는 자유의 몸이 됩니다. (북부에 저항하지 않은 4개 주는 제외) 그리고 전쟁의 승패가 거의 기운 1865년 초 의회는 수정안 13조를 통과시켜 미국에서 노예제를 철폐합니다. 같은 해 수정안이 비준됐습니다. 노예제 확산을 막기 위해 탄생한 정당이 결국 미국의 노예제를 완전히 철폐한 겁니다.
3) 전쟁 이후 흑인들의 인권을 위해 싸운 급진적 공화당원들
남북 전쟁이 끝난 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흑인 인권을 위해 적극적으로 싸웠던 공화당 내 세력들은 특기할 만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노예제가 공식적으로 철폐되었는데도 여전히 노예제가 있던 남부 주들에서 흑인들을 노예처럼 다룬다는 보고가 끊이지 않고, 링컨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앤드루 존슨은 무능했습니다. 공화당 의원들 가운데서도 특히 흑인 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의원들이 늘어났고, 이들은 급진파(Radicals)라 불렸습니다.
급진파는 1866년 미국의 첫 인권법 작성을 주도했고, 북부 안에서도 여전히 논란이 되던 흑인 남성 투표권 쟁취를 위해 싸웠습니다. (여성 참정권 논의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현재 수정헌법에 명시된 “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은 미국 시민으로, 모든 시민은 동등하게 법의 보호를 받는다. 인종에 따라 투표권이 제한되지 아니한다.”(수정헌법 제14조 1절)는 조항은 공화당의 두 차례 개헌을 통해 삽입된 내용입니다. 공화당은 또 전쟁에 패한 남부 주들이 다시 미국 연방에 들어오려면 최소한 원칙적으로라도 이 조항을 시행하도록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현대 미국 사회에서는 상식이자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런 주장은 당시에는 대단히 급진적인 사상이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흑인이 선거에서 투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 자체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불행히도 급진파와 그 사상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지도) 미국의 각 주들이 <수정헌법 제14조>를 비준한 시기. '공화당'은 남부의 주들이 수정헌법 제14조 비준하는 것을 연방 재가입의 선결조건으로 요구했다.
4) 북부 부자들의 정당이 된 공화당
시간이 흐르면서 경제 문제가 공화당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해졌습니다. 북부는 남북 전쟁 이전부터 남부보다 산업화가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이 추세는 전쟁 이후 훨씬 더 강화되었습니다. 1860년 미국의 철도가 어디에 집중되어 있는지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지도) 1860년 미국의 철도. (출처: US History Scene)
남북 전쟁을 거치며 연방 정부의 정치적 중요성이 훨씬 커졌습니다. 정부가 집행하는 예산도 훨씬 커졌고, 부유해진 사람들과 공화당 정치인 사이의 관계도 중요해졌습니다. 역사학자 헤더 콕스 리처드슨은 공화당이 정책적으로 “아주 부유한 계층을 양성했다.”고 썼습니다.
점차 부유한 금융가, 기업가들이 공화당을 대표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그 안에서도 의견이 모이지 않는 사안이 많기는 했지만, 부유한 공화당 지도부 백인의 이해관계는 (적어도 남부에 있는 흑인들에게 중요한 사안을 제치고) 공화당의 존재 이유로 자리매김합니다.
5) 남부의 개혁을 포기한 공화당
급진파가 득세했던 잠깐 동안 공화당은 분명 과거 노예였던 흑인 인권 개선에 적잖은 공을 세웠지만, 이는 실제 행동에 옮겨지기보다는 대부분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마저도 얼마 가지 않아 반동의 흐름을 피하지 못합니다. 실제 남부 많은 주에서 백인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급진파가 만들어놓은 법률을 모조리 철폐하는 데 온 힘을 쏟아붓습니다.
이 시점에서 북부의 백인들 사이에서는 자신들이 남부의 노예였던 흑인들에게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퍼지고, 사업가들은 사업가대로 정치적인 문제보다 자신의 이권에 집중합니다. 연방 정부가 주 정부의 권한을 지나치게 침해하는 걸 우려한 지식인들도 남부 기득권 백인들의 반동적인 노력을 수수방관합니다. 결국 (북부 백인들 사이의) 여론마저 연방 정부가 남부 주에 점령군 행세를 하는 데 더 이상 호의적이지 않은 쪽으로 돌아섭니다.
1870년대 중반에 이르러 공화당은 결국 남부의 개혁을 포기합니다. 과거 노예제를 인정했던 남부 주들, 전쟁에서 패한 남부 주들, 다시 미국에 편입된 남부 주들은 인종 문제에 있어 어떤 식의 차별을 두든 간섭받지 않게 된 겁니다. 백인 보수주의자들이 다시 권력을 잡았고, 이들은 앞다투어 주 차원에서 흑인들의 시민권을 부정하는 주 헌법 개정에 착수합니다.
공화당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노예제를 인정하는 주의 확산을 막는 문제”는 이미 과거의 일이 됐습니다. 창당의 목표를 이룬 것이나 다름없는 공화당은 남부에서 부활한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에 크게 개의치 않았습니다. 이후 수십 년간 흑인 인권 문제는 미국 정치 무대에서 자취를 감춥니다.
2. 보수화된 공화당, 보수적인 남부에서 지지기반을 넓히다
6) 혁신주의와 뉴딜에 반대했던 공화당
오늘날 공화당이 정부의 규제를 비롯해 소위 큰 정부를 대단히 싫어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압니다. 하지만 20세기 초 독점 자본가와 부의 집중, 그로 인한 정치 부패를 척결하자는 혁신주의 운동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공화당 유력 인사들 가운데는 혁신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시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꼽을 수 있죠.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공화당은 윌슨 대통령이 내세운 거의 모든 개혁에 사사건건 반대하고 나섭니다. 정부의 권한이 지나치게 비대해질까 봐 두려워했던 것이죠. 1920년대 다시 집권한 공화당 정권은 명백히 친기업적인 정책을 폈습니다. 기업이 번영하면 국가도, 국민도 덩달아 잘살게 되리라는 믿음은 당시 공화당을 지탱하는 뼈대와도 같았습니다.
1920년대 전반적으로는 이런 친기업 정책이 잘 굴러가는 듯했지만, 1929년 경제가 곤두박질치고 대공황이 왔습니다. 공화당으로부터 권력을 되찾은 민주당과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연방 정부의 규모와 역할을 늘려 적극적으로 경제에 개입하고 직접 일자리를 창출하는 식으로 대공황을 극복해 나갑니다. 잘 알려진 뉴딜 정책이죠.
의회에 남은 공화당 의원들은 정부의 개입에 대체로 반대하긴 했지만, 정책을 바꾸기에는 숫자가 부족했습니다.
(사진) 프랭클린 루스벨트 집권기에 정부 지출이 얼마나 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도. (출처: 리빙 뉴딜 프로젝트, UC 버클리).
7) 남부의 민주당원들과 공통분모를 찾아낸 1960년대 공화당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은 민주당 내에서도 균열을 일으켰는데, 특히 남부 민주당원들은 정부의 역할이 커지는 것도, 뉴딜 정책과 함께 노동조합의 힘이 세지는 것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남부 민주당원들과 공화당 사이에는 더 큰 정부, 더 센 노조를 막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1947년, 향후 20여 년간 미국 정치 지형을 뒤바꾼 정치 연합이 탄생합니다. 공화당의 로버트 태프트(Robert A. Taft) 상원의원이 부유한 남부 민주당원들과 손을 잡은 겁니다. 이들의 공통분모는 역시 뉴딜에서 시작된 정부 개입과 노조에 대한 반대였는데, 남부 민주당원들은 높은 세금과 뉴딜 정책과 함께 도입된 인권 법안을 특히 싫어했습니다. 이들의 연합이 만들어낸 대표적인 법안이 태프트-하틀리 법안으로, 각 주 정부에 “일할 권리에 관한 법안(right-to-work laws)”을 따로 제정해 자동으로 노조에 가입되는 걸 막은 법안입니다. (옮긴이: 고용과 함께 자동으로 노조에 가입되는 클로즈드샵(closed shops)을 금지한 것이 주요 내용 가운데 하나로, 최근에도 공공 부문 노조를 약화시키려는 미국 공화당 주지사들이 태프트-하틀리 법안을 모태로 아직 남아 있는 “일할 권리에 관한 법안”을 인용했습니다)
이 법안은 갈수록 세를 불리던 노동조합의 쇠퇴를 불렀습니다. 민주당의 입김이 세게 작용한 남부와 중서부 내륙 주에서 노동조합 조직률이 낮아졌고, 이는 선거에서 공화당에 도움이 됐습니다.
(지도) 배리 히르스치(Barry Hirsch), 데이비드 맥퍼슨(David Macpherson), 웨인 브로만(Wayne Vroman), 1964년 주별 노조 조직률 추정치 (출처: 복스)
8) 흑인 유권자들, 공화당을 외면하기 시작하다
남북전쟁 이후 반세기 가까이 흑인 유권자들은 압도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뉴딜 정책의 쇠퇴와 함께 공화당에 대한 지지도 점차 옅어졌는데, 인종 문제가 다시 미국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195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이미 흑인 유권자 가운데 민주당원의 숫자가 공화당원보다 두 배나 많았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남부는 오랫동안 (보수적인 백인) 민주당의 텃밭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공화당이 흑인 인권의 대변자를 자처하며 흑인 유권자를 끌어안기에 더 유리했던 위치를 점하고 있던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어쨌든 피부색에 따라 학생을 차별하던 학교에 다니는 흑인 학생을 보호하고 인종차별 정책을 철폐하라는 대법원의 명령을 집행하기 위해 경찰도 아닌 군대를 파견한 것도 공화당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었습니다.
하지만 1964년 민권법에 서명한 대통령은 민주당의 린든 존슨이었습니다. 공화당 의원들도 의회에서 적잖은 수가 이 법안에 찬성하긴 했지만, 결정적으로 그해 존슨에 맞서 대선에 도전했던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 후보가 정부에 지나치게 많은 권한을 부여한다며 민권법에 반대해 공화당은 흑인 인권 개선을 막아서는 세력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집니다.
결국, 흑인 유권자 대다수가 공화당을 떠났고, 이때부터 흑인 유권자들 사이에서 민주당이 80% 이상을 득표하는 건 흔한 일이 됐습니다.
9) 남부에 지지기반을 굳힌 공화당, 하원을 장악한 공화당
민권법에 서명한 뒤 존슨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로써 장기적으로 남부를 공화당에 내주게 생겼군요.”
실제로 같은 해 스트롬 서몬드 상원의원은 당적을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바꾸면서 지역구 유권자들의 민심에 따른 결정이라고 이유를 밝혔습니다.
그러나 정당에 대한 지지가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습니다. 특히 남부 백인들이 열성적인 민주당원에서 열성적인 공화당원으로 바뀌는 과정은 대단히 점진적이었습니다.
인종이 중요한 변수였지만, 다른 요인도 작용했습니다. 먼저 백인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낙태 반대를 비롯한 “문화 전쟁” 이슈 아래 집결해 보수적인 사회 운동의 한 축을 맡았고, 자연히 보수적인 정당과 합이 맞습니다. 큰 정부에 대한 의혹과 노조에 대한 경계심이 남부 곳곳에 퍼지고 있었는데, 로널드 레이건 같은 정치인은 이런 정서를 효과적으로 공략하며 전통적인 가치를 지키겠다는 구호를 내세워 지지를 얻어냈습니다.
이후로도 한동안 민주당은 하원에서 다수당 지위를 유지하는 데 전통적인 남부 민주당원의 지지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1994년, 마침내 공화당이 1955년 이후 거의 40년 만에 처음으로 하원 다수당이 됩니다. 남부 선거구 곳곳에서 이변이 잇달아 일어난 것이 주효했습니다.
이후 현재까지 22년 가운데 공화당이 다수당이었던 기간은 18년으로 두 차례 선거를 제외하고 공화당은 한 번도 하원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하원은 갈수록 공화당 정치의 거점과도 같은 곳이 되었습니다. 특히 남부 백인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공화당은 전국 선거는 물론 지방 선거에서도 우위를 점합니다. 이로 인해 공화당의 정책은 다시 한 번 전통적인 백인 유권자들의 가치관에 맞게 보수적인 방향으로 굳어지는 효과를 낳았습니다.
3. 인구 구성의 변화에 고전하는 공화당
10) 급증한 히스패닉 인구
최근 들어 미국의 인구 구성에 나타난 가장 큰 변화로 단연 히스패닉 인구의 급증을 꼽을 수 있습니다. 합법적으로 미국에 온 이민자와 불법 이민자를 포함해 히스패닉 인구는 크게 늘어났습니다.
먼저 합법 이민자의 증가로 유권자 구성이 다양해졌습니다. 이는 선거에 나서는 정당에는 환심을 사야 할 유권자 집단이 늘어난 셈입니다. 지금까지 히스패닉 유권자들의 마음을 산 건 (공화당보다는) 민주당입니다. 캘리포니아나 뉴멕시코가 완전히 민주당으로 기운 블루 스테이트(blue state)가 된 것도, 경합주로 분류되던 플로리다나 콜로라도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 두 차례 선거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도 민주당에 표를 몰아준 히스패닉 유권자의 공이 큽니다.
동시에 불법 이민자 문제도 미국 정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의제가 되었습니다. 민주당과 경제 엘리트 계층, 그리고 공화당 지도부 가운데 일부는 이민법을 개정해 현재 1천만 명이 넘는 미국 내 불법 이민자에게 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방안을 지지합니다. 반면 많은 보수주의자들은 그러한 정책이 (불법 이민자를) “사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비판적입니다. 갈수록 불법 이민에 강경하게 대응하는 것은 우파에 자랑스러운 훈장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무빙 맵) 미국 내 히스패닉 인구의 변천도. 1980년 미국 인구 2억2600만명 중 히스패닉 인구는 1400여만명으로, 이들이 5만명 이상 집중 거주하는 행정구역은 전국 3100여개 카운티 중 47개에 불과했다. 하지만 2011년 미국 인구 3억1100만명 중 5200만명에 달하고 있다. (Pew Research Center Hispanic Trends Project)
11) 공화당 일반 유권자들, 당의 엘리트에 반기를 들다
오바마 정권 초기에 등장한 티파티 운동은 처음에는 여러 가지 양상이 혼재된 모습이었습니다. 먼저 재산 가압류 완화, 증세, 건강보험 개혁 등 오바마 대통령의 경제 정책에 대한 반대가 있었고, 이민자에 대한 반대가 정치적인 운동으로 번진 측면도 있었습니다. 테다 스카치폴과 바네사 윌리엄슨은 전국의 티파티 활동가들을 인터뷰한 뒤 “이민 문제가 이들의 핵심적인 우려 사항” 가운데 하나였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티파티는 동시에 공화당 지도부에 대한 거센 도전이기도 했습니다. 티파티의 지지를 받는 극우 성향의 정치 신인이 전국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공화당의 거물급 혹은 중견 정치인을 당내 경선에서 꺾는 파란이 이미 여러 차례 연출됐습니다. 때로는 경선에서 이긴 후보들이 정작 본선에서 패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경선에서 잇달아 돌풍을 일으키자 공화당 현역 의원들과 주류 정치인들은 예전보다 보수적인 유권자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문제에 훨씬 더 신경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게다가 적지않은 공화당 유권자가 매번 선거 때마다 공화당 지도부가 평당원과 전통적인 공화당 지지자들을 버리려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렇게 볼 만한 근거가 있기도 하지만, 때로는 근거 없이 공화당 지도부가 비난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보수 언론들이 이런 의혹을 증폭시키는 데 한몫 해 왔는데, 2015년 5월에 실시된 한 조사 결과를 보면 공화당 지지자들은 민주당 지지자들보다 지지하는 정당의 정치인이 자신들의 이해 관계를 잘 대변하지 못한다고 여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정치 엘리트와 당 지도부에 대한 불신이 트럼프처럼 당 지도부를 맹비난해 점수를 따는 정치인을 낳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테드 크루즈도 지도부를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는 점에서는 트럼프와 비슷했습니다.
(지도) 보수주의 정치운동인 '티파티 운동'(Tea Party Patriots: 티파티 애국자들)의 지부들 위치. (Institute for Research & Education on Human Rights)
12) 이민법 개혁을 지지했다가 지지자들로부터 역풍을 맞은 공화당
2012년 선거 이후 공화당 지도부는 미국의 인구 구성 변화가 공화당에는 심각한 정치적 위기를 불러오리라는 것을 감지하기 시작합니다. 미트 롬니가 대선에서 패한 결정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가 히스패닉 유권자들 사이에서 오바마 대통령에게 완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출구조사를 보면 히스패닉 유권자의 71%가 오바마를 지지했습니다.
히스패닉 유권자의 숫자는 매년 늘어나고 있습니다. 공화당 지도부는 이러다 당분간은 대선에서 아예 이기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유색인종의 비중이 빠르게 늘어나는 나라에서 백인을 대변하는 정당이라는 이미지는 (특히 전국 선거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공화당은 개혁에 착수합니다. 먼저 친이민 정책을 도입하고 이민자에 대한 발언 수위도 한결 부드럽게 바꿨습니다. 이민 개혁도 받아들이는 쪽으로 당론을 선회합니다. 2013년 상원에서 노련한 존 매케인이나 떠오르는 차세대 정치인 마르코 루비오는 민주당 의원들과 함께 불법 이민자에게 합법적으로 미국에 머물 수 있는 지위를 주자는 개혁 법안을 발의합니다.
새로운 이민법의 상원 표결 결과는 찬성 68 대 반대 32. 반대 32표는 모두 공화당 의원이었지만, 찬성표 가운데 14표도 공화당 의원이 던졌습니다. 하지만 이내 압도적으로 백인 일색인 공화당 유권자들 사이에서 당이 핵심 지지층을 배신했다는 역풍이 붑니다. 유권자들은 이민법 개혁이 법을 어기고 불법으로 미국에 들어온 외국인을 사면해주는 것이라며 공평하지 않다고 봤죠. 그 결과 공화당이 다수당인 하원에서 이 법안은 토론에 부쳐지지도 못하고 폐기됐습니다.
당 지도부와 엘리트 정치인에 대한 불신은 깊어만 갔습니다. 젭 부시나 마르코 루비오 등 이민법 개혁에 찬성했던 정치인은 끝내 이 불신을 극복하지 못하고 경선에서 고배를 마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불법 이민자에 대해 가장 적대적이고 혐오 발언을 꺼내기를 서슴치 않았던 트럼프의 후보 지명으로 이어졌습니다.
(지도) 2013년 <이민법안>에 대한 '공화당' 소속 상원의원들의 투표결과.
상원의원은 각 주당 2명씩이고 찬성-초록색, 반대-빨간색, 의견엇갈림-베이지색이다.
13) 트럼프를 선택한 공화당 유권자
트럼프의 성공은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입니다. 먼저 공화당 지도부가 단일화된 트럼프의 대항마를 내세우지 못했고, 언론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후보라며 트럼프를 끊임없이 다루고 또 다뤘습니다. 후보 개인의 재산과 연예인 버금가는 유명세도 한몫 했습니다. 지역적으로 나누어 보더라도 북동부와 남부에서 모두 트럼프는 고른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핵심은 공화당 유권자들의 당 지도부를 향한 분노와 불신, 빠르게 변하고 있는 인구 구성에 대한 근본적인 불안감을 대단히 효과적으로 공략한 데 있습니다. 트럼프는 전통적인 이념적 보수주의와 충분히 거리를 두면서 유권자들이 우선 순위로 여기는 이슈에 집중했습니다.
지금 공화당은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먼저 (트럼프의 대통령 후보 지명을 물릴 수야 없지만) 트럼프 현상을 잠시 정신이 나갔던 일탈로 규정하고, 백인의 분노에 발목 잡히는 정당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대가 주도권을 잡고 링컨의 공화당 때처럼 새로운 당 정체성을 확립하는 개혁의 길이 있습니다.
아니면 트럼프가 일탈이 아니라 더욱 보수적인 공화당, 인종간 갈등을 먹고 사는 더욱 백인 위주의 공화당으로 가는 첫걸음이 될지도 모릅니다. 갈림길에서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는 결국 공화당 유권자들에게 달렸습니다.
(지도) 2016 공화당 경선 결과 (출처: 복스)
붉은색과 분홍색(무경선)이 트럼프가 승리한 지역이다.
(동영상) <복스>(Vox)가 제작한 관련 동영상.
* 참고자료 링크 : "<위키피디아 영문판>의 '미국 공화당' 항목"
* 상위화면 : "[목록] '크메르의 세계' 편 : 음모론 연구사전 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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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실 많은 한국인들이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이 원래 한 뿌리에서 갈라져나왔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죠,,
아울러 미국 정치사가 매우 복잡한데요..
이 아티클은 공화당만의 변천사를 통해서도
미국 정치의 주요한 변화에 관해 상당히 쉽게 접근하게 해주기 때문에
회원님들께 소개해드립니다.
잘읽었습니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우리에게 그토록 민주주의의 모델이 된 미국의 역사를 접하면서 여러 관점으로 인간과 사회 그리고 정치를 이해하게 되는군요. 사실..인간에게는 원래부터 양심과 도덕이라는 것이 어떤 모습으로 정해져있는 것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좋은 민주주의 조차 다만 인종갈등을 먹이삼아 발전해왔다는 것을 보면서 인간도 역시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유전자로 이루어진 자연의 일부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더 유리한 쪽으로 가는 방향이 바로 양심이며 도덕이라는 결론도 나옵니다만 과정만큼은 옳고 그름, 도덕과 부도덕이 우선되는 법칙따위가 없다는 걸 새삼스레 발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