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하버드 졸, 엄마는 소르본느 졸, 오빠는 S대, 난 뭘까? 예전 대학가 화장실 낙서로 유명했던 가슴 서늘한(?) 글귀다.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라는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광고 카피처럼 우리는 엘리트만이 살아남는 무한경쟁사회를 살고 있다. 올 한해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궜던 월드켭경기와 아시안게임 등을 돌아보더라도 승리에 대한 기대가 도를 지나친 느낌이다.
물론 우리나라 선수가 이기면 좋다. 어차피 스포츠는 승부를 가르는 시합이니까 정정당당하게 이기면 좋다.
그러나 문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2등 선수들이 너무도 많다는 데 있다. 오직 승리해야만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을 수 있었다. 언론의 무관심 속에 이들이 흘린 땀의 대가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걸까.
시선을 돌려 수능시험에 대한 반응과 대통령 후보들이 펼치는 정치상황을 보자. 이 곳에서도 엘리트주의는 사그라지지 않는다.
수로 매겨지는 청소년들의 인생, 그에 따른 전사회적인 부작용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난이도 조절에 실패했다는 지적은 매년 있어왔고 그로 인해 꿈 많은 청소년이 목숨을 던지기까지 했다. 오직 한 곳만을 향해 가는 기성세대들의 몸짓을 청소년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정치상황을 보면 더욱 기가 막힌다. 국민의 손으로 뽑은 정치인들은 권력이동에 따라 이리 움직이고 저리 눈치보느라 여념이 없다. 애초부터 정치에 대한 원칙이라는 것이 있었는지 묻는 건 철부지 같은 생각이다. 권력의 정점을 향해 달리는 이합집산, 이것 역시 엘리트의식의 발로다. 자신만이 살아남으면 된다는 오직 한 생각뿐이다.
조그마한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필자는 각종 정부정책 자금이나 벤처캐피탈 자금 유치에 필요한 회사소개서와 대표자 이력 등을 작성하다 보면 때론 뭘 이렇게까지 해야 되느냐는 강한 거부감이 든다. 대표자의 최종학교와 학과 기재는 기본이고 구성원의 학력, 경력 등은 빠지지 않는다. 심지어 재산현황까지 자세하게 기재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이 원하는 바대로 하려면 일류대의 괜찮은 학과를 나오고 재산도 넉넉해야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괜한 기우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의 능력은 수능시험을 치르고 대학 간판을 얻는 순간부터 굳어지는 경향이 있으니 말이다.
스포츠세계에서는 엘리트 위주의 선수 육성으로 학벌에 따른 불공정한 경쟁에 대해 볼멘 목소리가 빈번하고, 정치권에서는 자신의 이익 계산에 따라 불공정한 게임을 치를 수도 있음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대학입학시험은 장기적인 노력과 재능에 대한 평가보다는 단기간에 수치로 나타나는 점수에 비중을 두면서 학벌을 조장하고 있다.
도덕성과 원칙, 정정당당함 등의 의미는 엘리트의식에 묻혀 퇴색해지고 있다. 이러한 불공정한 경쟁에 대해 제도적으로 보완장치를 마련하지 않는다면 사회 곳곳에서 엘리트 위주의 줄서기는 지속될 것이다. 패기와 열정만 있으면 누구나 도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준 벤처기업의 활성화, 재능개발 위주의 교육정책, 국민을 무서워하며 원칙을 생명으로 여기는 정치, 지연과 학연을 뛰어넘는 실력 위주의 정당한 경쟁 등의 보장이 절실하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지언정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땀 흘리며 노력하고 있는 수많은 2등들에게 관심을 주는 건 삶의 큰 원칙을 다지는 일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