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 창전동 이랜드 본사 건물 지하 1층에 있는 50평짜리 강당에는 매달 하순 70~80명의 외부 손님들로 가득 찬다. 작년 3월부터 이곳에서는 ‘지식경영 공개 강좌’가 매달 열리고 있다. 이랜드 임직원들이 한 시간 동안 이론과 우수 사례를 강의한 다음 참석자들과 질의응답을 주고 받는 방식이다.
▲ 이랜드의 지식경영 공개 강좌 모습.
김교연 부장은 “보통 2시간짜리 강좌를 예정하지만 열띤 호응으로 3시간을 넘기기 일쑤”라며 “매달 초 열흘만 되면 예약이 끝날 정도로 인기”라고 말했다. 수강자 명단에는 삼성생명·SK텔레콤·현대중공업 같은 대기업과 외교통상부, KAIST경영대학원 등이 포함돼 있다. 참가 요청이 봇물을 이루자 이랜드측은 지난 4월부터 직장인 수강자 한 명당 5만원의 참가비를 받고 있다.
이랜드의 월례 강좌가 이처럼 선풍적 인기를 모으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기환 이랜드 상무는 “지식경영은 IMF 경제위기 직후 경영위기에 몰렸던 이랜드가 부활해 성공을 거두고 있는 비결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1980년 서울 신촌 이대앞 두 평짜리 가게에서 출발한 이랜드는 지난 1998~1999년 부도 위기에 몰려 28개이던 계열사를 8개로, 72개 사업부는 51개로, 3600여명이던 임직원을 1800여명으로 줄이는 몸살을 앓았다.
하지만 지식경영을 도입한 2000년 이후 최근 3년 동안 이랜드의 매년 순이익 증가율은 77%를 웃돈다. 내수 경기침체로 대다수 기업들이 몸집 줄이기에 주력하는 것과 달리 이랜드는 창사 이래 최대 호황을 만끽하고 있다.
올들어 고급 아동복 브랜드인 ‘엘덴’을 인수한 데 이어 지난 3월 말 ‘애슐리’ 브랜드로 정통 패밀리 레스토랑 사업에 진출했다. 또 올해 중으로 서울·경인 지역에 할인백화점 ‘2001아울렛’ 점포 4개를 추가로 열 계획이다. 최근에는 국제상사 주식 18만주 가량을 새로 사들여 국제상사 인수를 본격화하는 등 확장 경영을 가속화하고 있다.
1999년 234억원이던 이랜드의 순이익은 3년 만인 지난해 1297억원으로 급증했다. 총체적인 매출 부진에 허덕이고 있는 패션·의류업계에서는 단연 경이적인 ‘사건’인 셈이다.
이 같은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데 대해 이랜드 관계자들은 “지식경영을 통해 회사의 체질이 확 바뀐 덕분”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일례로 ‘2001아울렛’ 서울 중계점 정육매장의 김성호(31) 주임은 작년 초, 구웠을 때 가장 좋은 맛을 내는 삼겹살 두께를 찾기 위해 30번 정도 실험을 반복했다.
이상적인 ‘삽겹살 두께’ 찾아 30번 실험
그는 여태까지 팔던 것보다 3㎜ 두껍게 썰어 팔면 육즙과 향, 부드러움이 가장 좋다는 결론에 도달, 사내 인트라넷 지식몰(knowledge mall)에 ‘지식’으로 등록했다. 김 주임은 “삼겹살 두께를 바꿔 팔자 입소문이 퍼져 고객이 몰려와 1년 만에 월평균 1830만원이던 매장 판매액이 2990만원으로 60% 이상 늘었다”고 말했다. 이 지식은 ‘2001 아울렛’의 다른 정육 매장으로 전파돼 경영 호전의 일등공신이 됐다.
▲ 티니위니등 이랜드 매장들.
만년 적자에 시달려 퇴출 후보 1순위로 꼽혔던 여성 캐주얼 브랜드 ‘로엠’도 지식 경영 도입 1년 만에 영업이익만 60억원을 올린 ‘알짜 부서’로 탈바꿈했다.
‘2주일에 한 번 꼴이던 쇼윈도(장식대) 교체 주기를 매주 2번으로 늘리고, 고객 마일리지제도 도입, 매장 직원들에게 손익분기점 개념 교육, 100% 환불제도, 방문 고객에게 제품 구매를 유도하는 방법, 피크타임시 아르바이트생 고용 등….’
박상균 로엠사업부 브랜드장은 “매장에 일하는 직원들이 수십 번의 시행착오 끝에 이런 ‘지식’들을 발견했고, 전국 각 매장에서 이를 공유함으로써 시너지 효과가 폭발했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랜드에서는 단순 제안이나 아이디어가 아니라 회사의 실적이나 경영혁신에 도움되는 것들만 ‘지식’으로 채택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원이 지식을 내면 지식경영 최고 책임자(CKO)와 해당 전문가들이 지식 여부를 심사해 A~F까지 등급을 매기고 유효기간을 명시한다.
장광규 지식경영 담당 전무는 “6개월~1년마다 지식의 효용성을 현장 관점에서 재평가한다”며 “이런 검증된 노하우를 담은 지식이 지식몰에 현재 1만건이 떠있어 사원들이 언제 어디서나 활용한다”고 말했다.
2300여명의 이랜드 사원들에게 일반 이력서 대신 개인별 지식 이력서가 있다는 점도 독특하다. 이 이력서에는 자신이 발견해 채택된 지식과 지식몰 이용 실적까지 기록되고 점수화된다. 지식 이력서는 승진과 연봉 계약, 성과급 책정의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되고 있다.
운영 방식도 주먹구구식과 거리가 멀다. 회사측이 균형성과기록표(BSC·Balanced Scorecard)·사후 평가(AAR·After Action Review) 같은 첨단 경영기법을 총동원해 해당 지식의 사전 사후 성과를 측정·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기, 연간 단위로 실시되는 ‘지식 페스티벌’과 ‘이랜드 지식왕’에 뽑힌 사원은 상금과 상품, 해외 연수 같은 포상을 받는다.
이런 노력은 브렌타노·푸마·티니위니 등 32개 전 브랜드의 2년 연속 흑자 달성으로 결실을 맺고 있다. 2000년 100억원에 불과했던 스포츠 브랜드 푸마의 매출액이 2년 만인 지난해 970억원으로 10배 정도 급증한 원동력도 지식경영 덕분이라는 설명이다. 같은 기간 동안 푸마의 영업이익은 5억원에서 200억원으로 불었다.
장광규 전무는 “사원들이 가진 지식을 체계화하고 회사 전체가 함께 활용함으로써 핵심 역량이 강해지고 있다”며 “이제는 지식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기업의 명운(命運)이 달려 있다”고 말했다.
◈ 인터뷰 / 이응복 총괄부회장
“IMF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참지식의 부족’이 고난의 최대 원인이라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지식경영은 위기 상황에 처했던 이랜드를 구한 것은 물론 향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도약하는 발판이 될 것입니다.”
이랜드 그룹 이응복(51) 총괄부회장은 “지식경영의 목표는 전사원의 지식근로자(knowledge worker)화를 통해 새로운 수익원과 고객을 확보하며, 궁극적으로 사원과 회사가 함께 잘되는 윈-윈(win-win) 상황을 만들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창사 이래로 ‘300권 도서 권장제’ 등 책읽기 문화로 최고 경영자부터 말단 직원들까지 지식경영을 소화할 수 있는 기업문화가 깔려 있었고 그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된 게 큰 밑거름이 됐습니다.”
이 부회장은 “직원 개개인의 업무를 분석하고 필요 지식을 선정해 평가척도로 활용하는 등 철저하게 현장 중심으로 운용했다”며 “특히 지식활동을 점수화해 승진, 성과급, 연봉 책정 등에 반영해 시스템으로 구축한 게 빼놓을 수 없는 성공 요인”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업다각화와 관련해 “핵심 역량이 없는 사업에는 절대 진출하지 않을 것”이라며 “의(衣)·식(食)·주(住)·미(美)·휴(休) 등 5개 분야에서 새로운 비즈니스를 창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의류·패션 이외에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유통, 켄싱턴스타즈 호텔 같은 미래형 레저 사업에도 적극 진출한다는 방침이다.
이 부회장은 “오는 2007년까지 매출 5조3000억원, 영업이익 7500억원을 달성해 세계 톱100 브랜드에 진입하겠다”면서 “그러나 무엇보다 ‘21세기를 대표하는 지식경영회사’라는 평가를 받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