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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처음 사랑을 지키기 힘든 이유, 에베소에서 찾다!
본문 : 사도행전 19장 10절, 요한계시록 2장 4절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사도행전 19장 10절, 개역개정>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그것은 네가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다. <요한계시록 2장 4절, 새번역>
‘당신은 하나님을 변함없이 처음처럼 사랑하고 믿고 신뢰하고 있습니까?’ 언제 들어도 마음이 움찔하는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당당하게 ‘아멘! 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히려 처음보다 지금 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찬송가 315장 후렴처럼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라는 고백이 우리의 입에서 날이면 날마다 더 해지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하나님을 처음 만났던 그 날, 각자 정말 행복한 날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고, 내 맘에 모시게 되고, 나의 구주로 고백하며, 이제 믿음으로 살겠노라 결심했던 그 날을 모두가 잘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매일을 기도와 말씀, 예배로 채워갔던 삶은 정말 풍족하고 감사했고, 평안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얼마나 즐거웠던지 나보다 주변 사람들이 그 모습을 더 신기해했을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이 ‘처음 사랑’을 계속 간직하고, 더욱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도 참 많이 했었습니다. 찬양을 듣고, 성경 필사를 하며, 전도를 하고, 봉사를 하며, 무엇보다 이 사랑으로 주변의 모든 것을 사랑하며 지냈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나이가 들어가고, 거친 세상의 현실을 마주하게 되면서 이 ‘처음 사랑’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서서히 느끼게 됩니다. 저는 특별히 매해 고3 학생들에게 더욱 더 믿음을 잘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곤 하는데 그 이유는, 대학생이 되거나 사회인이 되면 금방 믿음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많은 뜨거운 믿음을 소유했던 청년들이 대학생이 되고는, 사회인이 되고는, 성인이 되고는 ‘처음 사랑’을 아주 쉽게 금방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으로 끝나면 다행인데, 결국 하나님에 대해서 잊어버리는 거기까지 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세상이 너무나도 좋아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보다 세상을 선택합니다. 이제 하나님과의 처음 사랑보다 내 연인과의 ‘첫사랑’이 더욱 중요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보다는 세상과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커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19장의 스토리가 바로 이 ‘처음 사랑’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처음 사랑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또 그 처음 사랑을 지키기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지 오늘 사도행전 19장 강해를 통해 함께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 지역에 동역자 아볼로가 머물러 있었기에 안심했던 바울은 다시 갈라디아 지방과 부르기아 지방 등 윗 지방을 거쳐 에베소 사람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에베소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몇몇의 신도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 신도들의 현 상황을 알기 위해 이렇게 질문을 던집니다.
"여러분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우리는 성령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사도행전 19장 2절, 새번역>
안타깝게도 믿음이 있었지만 성령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성령에 대해서 들어보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전하는 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에 대해서 알려주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한 가지 질문을 더 하게 됩니다.
바울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슨 침례를 받았습니까?" 그들이 "요한의 침례를 받았습니다" 하고 대답하니 바울이 말하였다. "요한은 백성들에게 자기 뒤에 오시는 이 곧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면서, 회개의 침례를 주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다. <사도행전 19장 3~5절, 새번역>
그들은 아직 요한의 침례 밖에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예수님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들은 바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요한의 침례를 받기를 했지만 그것조차도 형식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요한이 침례를 준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예언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침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베푸실 것이요 <마태복음 3장 11절, 개역개정>
그제서야 그 신도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그들에게 손을 얹으니, 성령이 그들에게 내려 오셨습니다. 그러자 마치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있었던 일처럼 그들이 방언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처음 사랑이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방언을 한 사람은 모두 열 두 사람쯤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12명의 신도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에베소에 머물면서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회당에 들어가서 3달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강론하고 권면하면서 담대히 말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날로 커지고, 더 확고하게 성장하는 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 권면을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몇몇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비난만 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오늘 함께 나누고자 하는 처음 사랑을 유지하지 못하는 첫 번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완고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몇몇 사람은, 마음이 완고하게 되어서 믿으려 하지 않고, 온 회중 앞에서 이 '도'를 비난하므로, 바울은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나가서, 날마다 두란노 학당에서 강론하였다. <사도행전 19장 9절, 새번역>
완고(頑固)라는 단어는 ‘융통성이 없이 올곧고 고집이 세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완전하고 튼튼하다’라는 뜻을 가진 완고(完固)와 헷갈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완고라는 단어는 쉽게 ‘굳은 마음’이라고 바꾸어 사용해도 좋습니다. 헬라어로 ‘완고’를 σκληρύνω(스클레뤼노)라고 하는데 ‘굳어지다. 말라서 딱딱해졌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완고라는 단어를 대표하는 인물이 있다면 바로 이집트의 왕이었던 ‘바로’입니다. 바로가 모세의 열 가지 재앙을 대항할 때와 같은 상태를 말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알고도 거부하는 성향으로 자신의 생각으로 굳어진 인간의 심성을 가리킵니다.
주님께서 모세를 시켜 말씀하신 대로, 바로는 고집을 부리며 이스라엘 자손을 내보내지 않았다. <출애굽기 9장 35절, 새번역>
그런데 놀랍게도 완고했던 바로왕에게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자주 쓰였던 단어가 바로 이 ‘완고’입니다.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히브리서 3장 8절, 개역개정>
그리고 더 놀랍게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도 이 단어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뒤 열한 제자가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마음이 완고하여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는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신 것을 분명히 본 사람들의 말도 믿지 않았던 것이다. <마가복음 16장 14절, 공동번역>
결국 성경에서 말하는 완고한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는 태도’를 설명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아니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지 않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소리를 듣고, 자신의 소리만을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완고해진 마음이 바로 죄의 유혹으로부터 시작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품고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여러분은 조심하십시오. '오늘'이라고 하는 그날그날, 서로 권면하여, 아무도 죄의 유혹에 빠져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우리가 처음 믿을 때에 가졌던 확신을 끝까지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을 함께 누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3장 12~14절, 새번역>
죄의 유혹에 빠지면 마음이 완고하게 변합니다. 뱀의 유혹에 넘어가면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무 뒤에 몸을 숨기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는 딱딱해지고, 마음은 점점 굳어 갑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듣고 싶지 않게 됩니다. 변명만 늘어놓게 됩니다. 이렇게 점점 완고해집니다. 그리고 결국엔 처음 믿을 때에 가졌던 확신마저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완고한 마음을 가진 이들에게 성경은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주님 안에서 간곡히 권고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이방 사람들이 허망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과 같이 살아가지 마십시오. 그들은 자기들 속에 있는 무지와 자기들의 마음의 완고함 때문에 지각이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7~18절, 새번역>
우리가 처음 사랑을 버리게 되는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완고한 마음’ 때문입니다. 죄의 유혹에 넘어가고,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허망한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과 똑같이 살아갈 때 우리의 마음은 점점 완고해 지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게 완고해진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세상의 소리에 귀를 닫고, 다시, 하나님께 주파수를 고정하는 것입니다.
내 백성이여, 내 율법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시편 78편 1절, 개역개정>
바울은 완고한 사람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나가서 두란노 학당에서 날마다 강론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이 완고한 사람들과 싸우지 않은 것은 정말 지혜로운 결정이었습니다. 완고한 그들과 싸우느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싶었던 이들마저 놓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바울은 선택과 집중을 통하여 계속 사역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하루하루 날이 쌓이고, 시간이 흘러 무려 2년이라는 시간동안을 그렇게 쉼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바울을 통하여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사도행전 19장 10절, 개역개정>
여기에 나오는 ‘아시아’는 오늘날의 소아시아의 서남부에 위치한 로마의 행정 구역인 아시아 주를 말합니다. 물론 제자들을 통하여 결국은 ‘아시아’에 복음이 퍼졌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만 여기에 등장하는 아시아를 우리가 흔히 아는 6대주 중 ‘아시아’로 생각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아시아 주에 살던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이제 모두 주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열매의 유무를 보면서 전했다면 금방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열매를 맺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진, 바울을 통해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말씀이 전해짐과 동시에 하나님은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바울의 몸에 지니고 있는 손수건이나 두르고 있는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떠나가게 되는 일들까지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습을 따라하고 싶었던 이들까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귀신 축출가로 행세하며 떠돌아다니는 몇몇 유대 사람조차도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힘입어서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다" 하고 말하면서, 악귀 들린 사람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이용하여 귀신을 내쫓으려고 시도하였다. 스게와라는 유대인 제사장의 일곱 아들도 이런 일을 하였는데, 귀신이 그들에게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지만,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요?"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서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달려들어, 그들을 짓눌러 이기니, 그들은 몸에 상처를 입고서,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였다. <사도행전 19장 12~16절, 새번역>
이 구절을 통하여 처음 사랑을 지키기 어려운 두 번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행세하는 태도, 척하는 태도’입니다.
바울과 같은 일을 행하고 싶다면, 바울이 만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먼저입니다. 하지만 바울 행세만 하고 싶었기에 하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의 이름을 이용하고 싶다면, 예수 그 이름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제 아무리 제사장의 아들들이라고 하더라도 예수의 이름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 그 이름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치 하나님을 만난 사람인 것처럼 ‘행세’하고, 예수 이름을 아는 ‘척’ 한다면 그 결과는 너무도 뻔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처럼 행세하고, 믿음이 있는 척 한다는 것은 스스로가 ‘믿음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믿음이 없다면 믿음이 없음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고 믿음을 구해야 합니다.
거친 세상에서 실패함으로 믿음을 잃어버린 것 같아 낙망할 수 있습니다. 처음 사랑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 그런 사막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는 순간,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 여전히 믿음이 충만한 것같이 ‘행세’하고 ‘척’ 한다면 처음 사랑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진짜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실이 없는 믿음은 결코 올바르게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아닌 ‘나’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만 신앙인이 됩니다. 주일에만 예배자가 됩니다. 종교를 묻는 질문지에 기록하는 순간에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거짓’된 모습을 버려야 합니다. 때로는 자존심 상하고 받아들이기 힘들더라도 스스로의 현재 모습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하고, 때로는 사람들 앞에서도 부끄럽지만 거짓 없이 서야 할 때도 생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믿음이 있는 행세와 척을 한다면 스스로 느낄 정죄와 죄책감은 더욱 더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반드시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두 알고 계십니다.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서서 은혜를 구할 때 하나님의 위로가 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거짓 없이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나를 일으켜 더 큰 나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니 ‘행세’나 ‘척’을 곁에 두고 계시면 안 됩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버리십시오. 도대체 어떤 내가 진짜 ‘나’인지 헷갈리기 전에,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게, 진실하고 정직한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 지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시길 소망합니다.
이렇게 진짜와 가짜의 차이를 알게 된 일이 퍼지자 에베소에 사는 모든 유대 사람과 그리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찬양하게 됩니다. 잊지 마십시오. 바울의 이름을 높인 것이 아닙니다. 바울 역시 끊임없이 자신을 향해 ‘겸손’을 요구했음이 분명합니다. 바울부터 자신의 능력으로 그렇게 된 것처럼 ‘행세’하거나, 자신이 그런 능력을 가진 ‘척’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처음 사랑을 잘 유지해가는 바울의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동을 통하여 주 예수의 이름이 찬양을 받을 수 있도록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신도가 된 많은 사람이 와서, 완고한 마음을 버리고, 행세와 척을 다 버리고, 자기들이 한 일을 자백하고 공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이 장면이 왜 이렇게 아름답게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회개의 현장은 언제나 눈물을 동반하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또 마술을 부리던 많은 사람이 그들의 책을 모아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살랐다. 책값을 계산하여 보니, 은돈 오만 닢에 맞먹었다. <사도행전 19장 19절, 새번역>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알게 되자, 마술을 부리던 많은 사람들은 더 이상 헛된 것을 의지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그 헛된 것들을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불사르게 됩니다. 그것도 은돈 오만이 되는 양의 책을 말입니다. 놀라운 결단입니다. 믿으면 이런 결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제까지 옳다고 생각한 것들일지라도 다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다 쓸모없는 것들임을 깨닫고 불태워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인 대표적 인물이 바로 ‘바울’ 아니겠습니까?
나는 난 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사람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빌립보서 3장 5~9절A, 새번역>
바로 이 부분에서 마지막으로 처음 사랑을 지키기 어려운 이유를 하나 더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분명히 버렸어야 하는데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이 곧 처음 사랑을 지키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바울이 여전히 자신의 출생과 가문과 학문에 얽매여 있었다면 아마도 사도행전이나 신약은 바울의 의해 쓰여 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바울이기 때문에 쉽게 버릴 수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바울 역시 정말 버리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을 위해 버린 것이 아니라 주님 때문이라면 과감하게 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위해서라면 버려야 할 것은 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 번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나는 아직도 무엇을 못 버리고 있는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서 분명히 버려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핵심적인 질문을 던진 후 고민해 보셔야 합니다. ‘왜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것일까?’
베드로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에게 속한 것들을 버리고서, 선생님을 따라 왔습니다." <누가복음 18장 28절, 새번역>
다 버렸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가장 중요한 것을 버리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깊게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왔다고 했지만 사실 하나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여전히 자기 자신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마음 중심에 자신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히시던 그 날, 바로 흩어져 자기의 원래 자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사실은 버린 것이 아니라 숨겨둔 것일 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입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 있는 중심입니다. 아직도 모든 주어를 ‘하나님’으로 바꿀 마음이 없는 나의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여전히 모든 목적이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꿈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나의 욕망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얻을 것만 얻고, 필요할 때만 찾고자 하는 나의 욕구를 버려야 합니다. 아직도 내 속에 하나님과 내가 공존하고 있다면, 하나님을 위해 나를 기꺼이 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인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말하는 ‘겸손’입니다.
야곱이 길고 길었던 모든 방황을 마무리 짓게 되는 장면이 창세기 35장에 등장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신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말씀하셨다. "어서 베델로 올라가, 거기에서 살아라. 네가 너의 형 에서 앞에서 피해 도망칠 때에, 너에게 나타난 그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서 바쳐라." 야곱은, 자기의 가족과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명령하였다. "너희가 가지고 있는 이방 신상들을 다 버려라. 몸을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어라. 이제 우리는 이곳을 떠나서, 베델로 올라간다. 거기에다 나는, 내가 고생할 때에 나의 간구를 들어 주시고, 내가 가는 길 어디에서나 나와 함께 다니면서 보살펴 주신, 그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서 바치고자 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귀에 걸고 있는 귀고리를 야곱에게 가져 왔다. 야곱은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밑에 묻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길을 떠났다. 하나님이 사방에 있는 모든 성읍 사람을 두려워 떨게 하셨으므로, 아무도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지 못하였다. <창세기 35장 1~5절, 새번역>
자신이 그동안 의지해 오던 모든 것을 드디어! 다 버리고! 베델로 올라가는 야곱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그렇게 야곱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결단을 보여준 야곱에게 다시금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셨던 그 복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이름이 야곱이었지만, 이제부터 너의 이름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다. 한 민족과 많은 갈래의 민족이 너에게서 나오고, 너의 자손에게서 왕들이 나올 것이다. <창세기 35장 10~11절, 새번역>
야곱은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이 전에 야곱은 이제 없습니다. 우리 역시 변해야 할 때입니다. 변하기 위해 버려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을 내가 스스로 제거해야 할 때입니다. 과감히 버려야 할 때입니다. 더 이상 망설이지 마십시오. 그것은 그리스도인인 당신에게 결코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버렸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당신의 처음 사랑을 지키기 위하여, 예배를 지키기 위하여, 당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버릴 건 확실히 버려야 할 때가 바로 오늘, 지금 이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여호수아 24장 14절, 개역개정>
이 말씀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에베소에서 믿음으로 결단한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버려야 할 것을 버림’의 결과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렇게 하여 주님의 말씀이 능력 있게 퍼져 나가고, 점점 힘을 떨쳤다. <사도행전 19장 20절, 새번역>
사도행전 19장 강해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등장했던 에베소는 사실 요한계시록의 기록 때문에 더 유명한 지역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능력 있게 퍼져 나가고, 점점 힘을 떨친 지역으로 소문난 에베소는 많은 신도들을 생겨나며 처음 사랑을 바탕으로 놀라운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그래서 꾸준히 성장할 것이라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했지만,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르게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지역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 중 가장 먼저 편지를 받게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하나님도 분명히 에베소 교회를 주목해 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뜨거웠던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를 바라셨습니다.
나는 네가 한 일과 네 수고와 인내를 알고 있다. 또 나는, 네가 악한 자들을 참고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것과,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밝혀 낸 것도, 알고 있다. 너는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견디어 냈으며, 낙심한 적이 없다. <요한계시록 2장 2~3절, 새번역>
분명히 하나님이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며 기뻐하는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책망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그것은 네가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 내서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을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 <요한계시록 2장 4~5절, 새번역>
처음 사랑을 버린 교회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서 회개 한 후 처음에 하던 일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에베소교회에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주십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생각할 시간을 주셨습니다.
지금 내 심령이 ‘완고한 마음’으로 굳어져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요즘 내 모습이 진짜 믿음이 아닌 믿는 ‘행세’나 믿는 ‘척’이 아닌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아직까지도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고 숨긴 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랑하고 축복하고 존경하는 예배자 여러분, 우리는 처음 사랑을 잘 지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처음 사랑을 버리지 않도록, 처음 사랑을 잘 지켜가도록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권면하십니다. 완고한 마음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때 가능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설 때에 가능합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하나님을 중심에 모실 때 가능합니다. 그럴 때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오히려 날마다 더욱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성장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사랑을 지키기 위해 ‘처음에 하던 일’을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생각해보니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 우리가 했던 일은, 지금 우리가 가장 어렵게 생각하는 일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에는 가장 쉬웠는데 말입니다. 쉽고, 즐겁고, 행복했던 일들이었는데 어느새 부터인가 어렵고, 힘들고, 괴로운 일들이 되어버렸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예배입니다. 삶의 예배에서, 주일 예배로 이어지던 예배자의 삶을 다시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입니다. 꿀보다 더 달고,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요, 매일의 양식이 되는 말씀을 다시 읽어야 합니다.
다시 기도입니다. 하나님과의 행복했던 소통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린 후 기다리고 계신 예수님을 향해 다시 문을 활짝 열고 대화해야 합니다.
다시 시작합시다. 2021년 7월 11일, 오늘 7월의 두 번째 주일이 우리 모두에게 특별한 ‘기념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처음 사랑을 회복한 날!’, ‘첫사랑 회복’ 기념일 말입니다. 그래서 다시 처음 주님을 만났던 그날처럼 기쁨과 감사와 평안으로 새롭게 시작되는 신앙의 여정이 되시길 간절히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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