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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이 다가왔다. 경미는 어서 빨리 봄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봄이 온다고 해서 애틋한 사랑을 나누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도 없지만 그래도 이곳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구례에서 봄이면 피어나는 하얀 매화꽃이며 샛노란 산수유 꽃을 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이다.
일요일 오후. 경미는 혼자서 섬진강가로 향했다. 겨우내 얼어있던 논둑은 따스하게 내려쬐는 햇살을 받아 질퍽거리고 있다. 신발이 더러워 질까봐 나락그루터기를 밟으며 강변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근처 도랑에서는 논배미 끝자락에서 햇빛에 녹아내린 물줄기가 배추밭에 송아지 소변 떨어지듯 흘러내리는 소리가 불규칙하게 들려오고 있다.
드디어 강가에 다다랐다. 한 여름이면 떼거리로 무리지어 흘러갈 강물도 한 겨울엔 마음마저 얼어붙은 듯 밑바닥을 바스락거리며 흘러가고 있다. 그래도 가뭄으로 얼룩진 바위틈새에선 어느 새 버들강아지가 수줍은 모양으로 살며시 세상구경을 하고 있고, 추위 잊은 작은 물고기들이 모래톱 근처에서 맴을 돌고 있다.
경미는 이곳에 온 이후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았다. 가까운 고향 쪽인 하동엘 가고 싶었지만 혹시나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까 두려워 아예 구례에서만 지내고 있었다.
그래도 봄이 되면 개나리며 진달래가 필 텐데 가까운 곳에라도 봄바람을 쏘이고 싶지만 아직은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다.
이발소일은 이젠 제법 익숙해졌고, 오는 손님들도 한 두 번씩 얼굴을 읽혀가고 있어 별로 어려울 것이 없었지만 일가친척 없는 외지에서 혼자 생활한다는 것이 무척 힘이 들었다. 그러한 경미주변에는 경미와 교제를 원하는 두 명의 사내가 있었다. 한명은 읍내에서 방앗간을 하는 이십대 후반의 총각이고, 나머지 한명은 읍내에서 가까운 곳에서 과수원을 하는 삼십대 초반의 남자였다. 이들은 경미의 환심을 사기위해 노력하지만 경미는 그들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2월 마지막 토요일 오후. 오늘따라 손님이 별로 없다. 이제 학생들의 개학이 시작되었고, 사람들도 봄맞이 준비를 위하여 바쁘게 움직이는 계절이다. 주인아저씨는 손님이 없자 근처 친구의 가게에 다녀온다면서 나가고 경미는 수건들을 삶으며 이발소 안을 구석구석 청소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오십대의 중년남자가 이발소로 들어섰다.
“아가씨! 이발 할 수 있어요?”
“아! 예에...선생니 임〜“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지난 번 주인아저씨의 친구들이 자신을 놀릴 때 도와주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경미는 낯선 곳에서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라 생각하니 순간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이발사 분은 어딜 갔나보네.”
“아니에요. 곧 오실 겁니다.“
“그래요. 별로 바쁘지 않으니 신경 안 써도 되요.”
“전번엔 정말 감사했습니다. 인사도 못 드리고...“
“아 그걸 뭐...그런데 아가씬 이 지방 사람이 아닌가보네.”
“예! 저어...부산에서...“
‘그렇구나! 객지생활이네.“
그 사람도 이 고장 사람은 아님이 분명해 보였다. 경미는 왠지 이 사람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께서는 댁이...?“
‘음..나? 나도 사실은 이곳이 아니고.“
‘그러세요. 그럼 이곳엔 어떻게?“
“지금은 하동에 있어요. 몇 년 전부터.”
“하동에요? 이발소는 왜 여기에..?“
“응 친구가 구례에 있거든 그래서 여기올 때 가끔씩 여길 들리지.”
“그랬었군요. 하동 어디에 계세요?’
“화개면에.”
‘화개요?“
두 사람의 대화가 한창 무르익을 즈음 주인아저씨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니 손님 오셨는데 연락도 안 허고.”
“예! 시간이 있으시다 해서요.“
“그래? 그래도 오래 안 기다리시게 허지.”
“알았어요.“
경미는 손님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졌다. 자신의 고향인 하동 화개에서 살고 있단다. 물론 잠시 동안 거주하는 것이니까 그 곳이 고향은 아닐 테지만 어째든 그곳은 자신의 고향이 아닌가?
이발을 마치자 경미는 손님의 면도를 시작했다. 나이는 들었지만 어딘가 품위 있어 보이는 얼굴이다. 정성스레 면도를 하고 가볍게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다른 손님들과는 별도로 무언가 자신이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해 주고만 싶었다.
남자는 이발을 마치고 밖으로 나갔다. 경미는 멍하니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그의 뒤를 좆아 나갔다.
“저! 선생님!”
경미가 부르는 소리에 놀란 남자가 뒤를 돌아본다.
“아니 왜. 무슨 일이라도?...“
“저어...사실은....”
“아니 무슨 일인데?”
“저도 화개에서.”
“아가씨가 화개는 왜?“
“저도 고향이 화개입니다. 그래서 갑자기 고향생각이 나서요.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고...”
“그래요? 그럼 어쩐다. 지금은 내가 좀 바쁘고...그렇지 다음 주 일요일에 내가 다시 구례에 오니까 혹시 아가씨가 시간이 될까?”
“다음 주 일요일에요? 전 좋아요.“
“몇 시 쯤 어디서 볼까?”
“선생님께서 정해 주세요.“
“그럼... 일요일 11시쯤에 버스터미널에서 만나지?”
“예! 기다리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래요. 열심히 하고.‘
경미는 남자가 저 멀리 골목으로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가슴이 마냥 설렜다. 마치 고향의 오빠나 삼촌을 만난 기분이었다. 그가 누구인지 어떻게 사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자신을 위해주고 마음이 통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저 고맙고 반갑게 느껴질 것 같았다.
비록 다시는 뒤돌아보고 싶지 않은 고향이지만 그래도 자신이 제대로 아는 곳이라곤 어릴 적 추억이 깃든 고향뿐이 아닌가? 자신이 떠난 고향의 슬픈 이야기이든, 기쁜 이야기이든 그 무엇이든지 이야기를 듣고 싶어진 것이었다.
그녀는 다음 주일이 기다려졌다. 그러면서 더욱 열심히 일을 하기로 했다. 피곤하여도 입에선 콧노래가 흘러 나왔다. 아저씨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느냐며 의아해 한다. 그러면서도 주인아저씨는 그녀가 열심히 일을 하는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고 그녀를 잘 대해 주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일요일이 다가왔다. 경미는 마치 오랜 친구라도 만나는 것처럼 아침부터 공연히 가슴이 설렌다.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목욕탕을 다녀왔다. 자신이 생각해 봐도 저절로 웃음이 났다. 대체 나이든 아저씨를 만나는 데 왜 이리도 기분이 좋아지는 건지.
아직은 약속한 시간이 남았다. 그래도 집에 그냥 있기에는 마음이 답답하여 일찌감치 읍내로 걸어 나왔다. 날씨가 풀려서인지 읍내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고, 옷차림도 얇아져 걸음걸이도 빠르다.
거리를 지나다 미장원 앞을 기웃거리며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았다. 얼굴 모습은 아직도 싱그러운 이십대의 모습이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많은 세월을 살아 온 것 같이 무겁게 느껴진다.
열한시가 가까워져서 시외버스터미널 안으로 들어갔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직은 그 아저씨가 도착하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먼저 와서 기다리는 것이 예의에 맞는 일이다.
잠시 후 터미널 출입구 쪽에서 그 남자가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경미는 달려가 인사를 하였다.
“선생님! 어서 오세요.“
“오! 일찍 왔네. 가만 있자 어디로 간다.”
“선생님 편한 대로 하세요.“
“그래요. 자 우선 저 건너편 다방으로 가볼까.”
“예! 그러시지요.”
다방 안은 조금은 컴컴했다. 시골 다방이라 그런지 담배냄새와 더불어 다소 매캐한 냄새가 나고 어수선해 보였다.
“저기로 앉지.”
“예!“
“차는 뭘 로 시킬까?’
“선생님은 뭐 드시겠어요?“
“나? 나는 율무차로 할까.”
“그러세요.“
얼굴엔 짙은 화장으로 번들거리고 머리를 틀어 올려 뒤로 묽은 짧은 원피스차림의 레지가 다가왔다.
“주문하시겠어요?“
“율무 하나하고 커피한잔 주세요.”
“예! 기다리세요.“
레지가 주문을 받고서는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카운터 쪽으로 사라진다. 다방 안엔 흘러간 옛날 음악이 나직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나 잠깐 전화 좀 하고 올게요.”
남자가 카운터에 맞은편에 걸려있는 공중전화를 하기위해 다가갔다. 연희는 물끄러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다보며 생각에 잠긴다.
〈어디에서 온 사람일까?...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아무래도 보통 사람들과는 달라 보인다. 어째든 경미로서는 반갑고 고마운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었지만...
전화를 마치고 자리에 돌아오자 레지가 율무와 커피를 찻잔에 들고 와서 탁자위에 올려놓는다.
“맛있게 드세요.“
레지의 말소리가 낭랑하게 홀 안에 울려 퍼진다.
“고향이 화개라고?”
“예!“
“화개 어디?”
“의신 위에 있는 삼정입니다.“
“삼정?”
“예! 그렇습니다.“
“내가 의신에 있는데.”
“선생님께서 의신에 계세요?“
“그래요. 한 삼년 되었지. 그런데 부모님은?”
“.....“
“왜? 말하기 곤란해요.”
경미는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자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고 말문이 막혀왔다.
“아! 아닙니다. 두 분 다 돌아가셨어요.“
“그럼 아가씨 혼자 사네.”
“예!“
“나는 고향이 충청도 금산인데. 서울에서 사업을 하다 몸이 아파서 회사 정리하고 이리로 왔지.“
“그러셨어요.”
“벌써 열한시 반이네.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우리 어디 가서 점심이나 먹고 이야기를 계속 할까?”
‘예! 선생님! 그리고 말씀 낮추어 주세요. 제가 불편해요.“
“그럴까. 그래도 되면.”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군청 방면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구례에 사는 경미보단 남자가 오히려 지리를 더 잘 알았다. 군청 맞은편에 매운탕집이 보인다. 남자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경미에게 물었다.
“우리 얼큰한 매운탕이나 먹을까? 뭐 다른 거 먹고 싶은 것은 없어요?“
“전 아무거나 좋습니다.”
“그러지 말고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이야기해요.“
“아닙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좋아 그럼 저 집으로 가지.“
매운탕 집은 옛날 집을 개조하여 방이 몇 개로 나누어져 있다. 아무래도 관공서 주변이다 보니 손님들이 따로 앉아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만든 것으로 보여 진다.
경미는 음식을 주문하고 남자와 마주보고 자리에 앉았다. 수저통에서 수저를 차려놓고 물을 따라 남자에게 주었다.
“올해 몇 살 인가? 참! 그보다 이름도 모르고 있었네. 내가 그래도 남자니까 먼저 밝힐까. 나는 이정상이라고 하지. 나이는 오십 여섯이고.”
“예! 저 이름은 김경미라고 해요. 올해 스물일곱 살입니다.“
“스물일곱 참 좋을 때군. 그럼 형제간도 없고?”
“예!“
“저런! 젊은 나이에...그러나 낙심하지 말아요. 세상엔 나 같이 병든 사람도 있으니까.”
“선생님은 많이 편찮으세요?“
“그래요. 몹쓸 병이라네. 숨길 것도 없지! 암이야 암.”
“ 그 그러세요? 제가 괜히...용기 잃지 마세요. 선생님!”
‘’그래 고마워.“
“가족들과 같이 계세요?”
“우리가족들?...허허..마누라는 몇 년 전에 먼저 갔고, 아들이 한 놈 있는 데 결혼해서 서울에서 살고 있지.”
“그럼 식사를 손수 해서 드세요?“
“그냥 그럭저럭 끼니를 때우고 있어.”
“반찬 같은 것은요?“
“읍내 시장에서나 이렇게 나올 때 조금씩 사가지.”
“그러시군요.“
순간 경미는 사내의 얼굴을 바라다보면서 안타깝다는 마음이 들었다.
점심을 먹고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화엄사 입구에서 내렸다. 날씨가 화창하여 절 입구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화엄사까지는 걸어서 가까운 거리였다. 길가엔 울창한 숲과 개울물이 흘러 마음을 더욱 상쾌하게 해 주고 있었다. 엄숙한 마음으로 사찰 경내 이곳저곳을 한 바퀴 둘러보고 뒷산으로 올라가는 입구의 바위에 걸터앉았다.
“여기에 와 보았나?”
“아니요. 처음이에요.“
“고향에선 어릴 때 객지로 나갔었나?”
“예! 열여섯 살 때 쯤요. 다음에 자세히 말씀 드릴게요.“
“부담스러우면 말 안 해도 돼.”
“그런 건 아닌 데 전 아주 나쁜 사람이었어요.“
“세상에 나쁜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나. 환경이 어려우면 그렇지. 아가씨는 심성이 착하게 생겼어.”
“그렇지도 못해요.“
“더 이야기 하지말지. 심경이 복잡하면.”
“그럴게요. 선생님 이야기 좀 해주세요.“
“나? 별로 재미도 없는데...그럼 간단하게 이야기 해 줄까. 내 고향은 충남 금산군 군북면이야. 혹시 빗점골에 예전에 사람 많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나?“
“예! 어릴 적에 많이 들었어요. 우리 마을 바로 뒷산이거든요. 그 골짜기에서 사람들이 많이 돌아가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분들 중에 고향이 우리 군북면 사람들도 있었거든. “
“아! 그러세요.”
“나도 군북면에서 태어났었는데. 대학은 서울에서 다니고 그리고 사업을 했었는데 처음엔 사업이 잘 되더라고.”
“무슨 사업을 하셨어요?“
“응! 유통업이라는 건데 이것저것 중간 도매업 같은 거지. 그래서 돈도 제법 벌고 아들 녀석도 공부를 잘해서 일류대학을 나왔지. 그런데 그 녀석은 부모가 정해주는 결혼을 하지 않고 연애를 해서 여자를 데려왔는데 이건 아예 남자의 부모 알기를 우습게 아는 거야.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았는지. 그러던 중 아이가 생기는 바람에 결혼식을 안 올려 줄 수 없고 해서 결혼을 시키기는 했는데 따로 나가 살면서 하는 짓이란 부모한테 돈 뜯어가는 일이지. 그래서 많이 싸웠어. 특히 죽은 우리 집사람하고 며느리 사이가 나빠서 만나면 싸웠지.”
“정말 어려우셨을 것 같아요.“
“어려웠지. 부모 자식 사이에 싸움질 하고 있었으니...그러다가 4년 전에 결국은 병으로 먼저가고 말았어...”
“사모님께서 고생이 많으셨네요.“
“화병으로 가다시피 했지.”
“그래서 이리로 내려오신 거여요?“
“응! 마누라 가고 나니 일도 손에 안 잡히고 사람이 멍해지더라고 그러던 중 몸이 점점 안 좋아져 병원에 가니 간암이래.”
“어째 그런 일이...“
“수술도 안 되고 해서 결국 회사를 처분하고 삼년 전에 이곳으로 왔지. 오다보니 삼정 아랫동네이네?”
“예! 그렇군요. 괜히 저 땜에 마음 아프신 이야기를 꺼내신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아니! 괜찮아. 어차피 지나온 이야긴데 뭘.“
사내는 무거운 표정을 하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한 동안 먼 곳을 쳐다보았다.
“제 이야기는 다음에 꼭 해드릴게요.”
“안 해도 된다니까.“
“선생님 이야기만 듣고 미안해서요.’
“그래! 그러면 다음에 천천히 하고. 다음에 우리 집에 안 가볼래?”
“당분간은 고향에 못 갈 것 같아요.“
“아 참! 그렇겠구나. 그럼 저 아래 계곡에나 가볼까?”
“예! 좋아요.“
경미는 사내와 같이 마당을 가로질러 사찰아래의 계곡으로 내려왔다. 계절은 이제 초봄으로 접어들어 겨우내 얼었던 계곡물이 봄볕에 놀라 튀어 오르다 버들강아지에 걸려 하얀 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경미는 양지쪽 바위에 앉아 물에다 손을 담구고 있다.
“선생님! 의신에도 아직 물은 깨끗하지요?”
“그럼 여기보다 다 나을지 모르지.“
“선생님 집은 사신 거여요?”
“아 조그맣게 지었지. 별장처럼,“
“멋있겠네요.”
“그냥 살기 편하게 내가 꾸몄지.”
“보고 싶어요. 지금은 볼 수 없지만.“
“다음에 마음 내키면 와서 봐.”
“그럴게요.“
“나이도 있는 데 결혼도 해야 하지 않나?”
“하고 싶지 않아요.“
“그래도 때가 되면 해야지.”
“그냥 이렇게 살고 싶어요.”
“고향에 가까운 친척도 없나?“
“있긴 있을 거여요. 그렇지만 서로가 잘 모를 거여요.”
“내가 또 괜한 걸 묻네.“
“아니에요. 선생님은 많은 걸 이야기 해 주셨는데요. 물이 아직은 차갑네요.”
“아직은 절기가 있으니.“
“의신까지는 어떻게 가세요?”
“화개 면소재지까지는 하동을 가는 버스가 있고, 거기서는 택시를 타고 다녀. 자주 나오는 편이 아니니까.”
“그래도 불편하시겠어요?“
“가끔 나오니까 재미있어. 사람구경도 많이 하고. 이젠 말동무가 생겨서 더 자주 나오겠네.”
“제가 말동무가 되긴 되는 거여요.“
“그럼! 이젠 자주 보았으면 좋겠네. 같이 밥도 먹고.”
“고맙습니다. 저도 선생님을 뵈면 왠지 기분이 좋아져요.“
“다행이네. 나이 든 나를 그렇게 좋게 봐주니.”
“선생님은 나이가 드셔도 시골사람들과 다르셔요.“
“그래? 이거 은근히 기분이 좋아지네.”
계곡은 산새소리, 물소리와 화엄사로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말소리로 어우러져 정겨움을 더해 주고 있었다. 머지않아 온 산에 진달래가 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산사와 계곡을 찾을 것이다. 경미는 이 세상에 홀로 던져진 삶에서 이젠 가까운 곳에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말동무가 생긴 것이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좀 더 시간이 흘러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지면 자신이 살아 온 과거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 주고 싶어졌다. 그 것이 비록 매우 부끄러운 이야기들이지만...
아직은 그렇게 길지 않은 낮 시간인지라 산그늘이 조금씩 계곡을 덮기 시작했다. 계곡을 걸어 내려와 주차장 입구에서 택시를 기다렸다. 삼십 여분을 기다려서야 손님을 싣고 와서 내린 빈 택시를 탈 수가 있었다.
구례읍으로 들어와서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사내는 중간에 경미 더러 오는 중간에 내려 집에 먼저 가라고 하였지만, 시간도 많고 또 버스 타는 것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터미널까지 같이 가기로 하였던 것이다.
“다방에 가서 커피라도 한잔 할까?“
“아니에요. 선생님 차 타셔야죠.”
“그럼 그러지. 그리고 앞으로 뭐라고 부를까? 경미라고 불러도 될까?“
“그냥 경미야! 하고 부르세요. 그게 편해요.”
“그럼 나보고도 선생님이라고 하지 말고 아저씨라 불러. 알았지?“
“예! 그럴게요.”
“나 버스타고 갈 테니 이젠 들어가.“
“괜찮아요. 선생님 아니 아저씨 가시는 것 보고 갈래요.”
“다음에 만나면 먹고 싶은 거, 구경하고 싶은 곳이 있으면 다 말해. 내가 여유가 좀 있거든.”
“고맙습니다. 저기 버스 들어오네요.“
“이제 차 탈 테니 집에 가.”
“알았어요. 아저씨! 그럼 다음에 뵐게요.“
“그래 잘 들어 가.”
경미는 아저씨가 버스에 오른 것을 보고서야 발걸음을 돌려 집을 향하여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어가고 있으려니 누군가 뒤를 따라오는 사람이 있었다. 뒤를 돌아다보니 다름 아닌 방앗간 집 사내였다.
“아저씨! 왜 절 따라오세요?“
“미스 김! 우리 이야기 좀 허십시다.“
“저는 아저씨랑 애기 할게 전혀 없는데요.”
“그러지 말고 우리 알고 지냅시다. 나가 당장 어떻게 허자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나도 알고 보면 괜찮은 놈입니다.”
“아저씨가 어떻다는 게 아니라 제가 조용히 지내고 싶어서 그래요.“
“아니 미스 김도 객지에 혼자 와서 심심할 때 친구삼아 지내면 좋을 것 같은 디.”
“아저씨! 남녀 관계라는 게 조금만 남의 눈에 이상하게 보여도 소문나잖아요. 그리고 저는 혼자 지내는 게 좋아요.”
“미스 김! 꼭 그렇게만 생각할 게 아니 여. 사람이 사람과 대화를 허다 보면 좋은 점도 발견 허기 될 기고.”
“저 아저씨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고 남들하고 어울리기 싫어서 그래요. 이해해 주세요.”
“내가 미스 김한테 피해 안 준다니 께.“
“그런 거 아니에요.”
“어째든 어디 가서 차라도 한잔...“
“저 바쁜 일이 있거든요. 죄송해요.”
“그러믄 다음기회에 꼭...“
“.....”
경미는 겨우 사내를 떨쳐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점심을 맛있게 먹은 탓인지 배가 별로 고프지 않아 저녁밥을 하지 않고 있는데 주인집에서 고구마를 삶았다고 그릇에다 서너 개 담아서 준다. 경미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상위에다 놓았다.
자리에 누웠다. 라듸오에서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나온다. 경미는 아저씨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쯤 어디를 가고 계실까? 화개 시장까지는 벌써 도착하였을 것이고 택시를 타셨을까?
경미는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어 보이는 아저씨의 말하는 모습과 자신을 향하여 환하게 웃는 모습이 머릿속에 한동안 머무르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