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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경전연구회 임제록 강좌 제4강 -4(2009.08.03)
13-10 사종(四種)의 무상경(無相境) 問(문), 如何是四種無相境(여하시사종무상경)고 師云(사운), 儞一念心疑(이일념심의)가 被地來礙(피지래애)하며 儞一念心愛(이일념심애)가 被水來溺(피수래익)하며 儞一念心瞋(이일념심진)이 被火來燒(피화내소)하며 儞一念心喜(이일념심희)가 被風來飄(피풍래표)하나니 若能如是辨得(약능여시변득)하면 不被境轉(불피경전)하고 處處用境(처처용경)이라 東涌西沒(동용서몰)하며 南涌北沒(남용북몰)하고 中涌邊沒(중용변몰)하며 邊涌中沒(변용중몰)하야 履水如地(이수여지)하며 履地如水(이지여수)하니라 緣何如此(연하여차)오 爲達四大如夢如幻故(위달사대여몽여환고)니라 사종(四種) 무상경(無相境)이라, 어떤 이가 묻기를 어떤 것이 四種無相境(사종무상경)입니까. 師云(사운), 儞一念心疑(이일념심의)가 그대들이 한 생각 의심하는 것이, ‘지수화풍’할 때 地來礙(지래애), 地大가 걸리는 것을 입는 것이고, 지대의 걸림을 입는 것이고. 儞一念心愛(이일념심애)가 그대의 한 생각 애착하는 것이 水來溺(수래익), 水大에 빠짐을 수대, 물에 빠짐을 입는 것이고, 그대들 한 생각 瞋心(진심)내는 것이 火來燒(화래소), 불이 와서 태움을 입는 것이며. 대개 경전에서 ‘불’ 하면 瞋怒의, 말하자면 瞋心의 불,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수, ‘물’ 하면 애착, 애착의 물, 이렇게 말하고요. 儞一念心喜(이일념심희)가 그대들의 한 마음 기쁨에 들떠있는 것이 被風來飄(피풍래표) 그건 이제 들뜨는 거니까 기쁘면 들뜨잖아요 사람이 좋고 기분 좋고 하면 들뜨잖아요, 바람에 나부끼는 것을 입는 것이니. 若能如是辨得(약능여시변득)하면 만약 이와 같이 가려낼 거 같으면은 不被境轉(불피경전)하고 경계의 굴림을 입지 아니하고 경계 따라서 쫓아가는 것은 그게 경계의 굴림을 입는 거요 그런 게. 그런데 이제 그렇지 아니하고 處處用境(처처용경), 곳곳에서 경계를 써. 내가 경계에 끌리는 게 아니라 내가 경계를 끌고 가. 그래서 뭐 필요없는 것은 버리고 필요있는 것은 또 끌고 오기도 하고 그러면서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경계에 자유자재하는 거죠. 그래서 東涌西沒(동용서몰)이여, 동쪽에서 솟아서 서쪽으로 빠지고 남쪽에서 솟아서 북쪽으로 빠지고(南涌北沒) 중간에서 솟아서 저 가에 빠지고(中涌邊沒) 가에서 솟아서 중간에 빠져서(邊涌中沒), 履水如地(이수여지)하고 물 밟기를 땅과 같이 하고 땅을 밟기를 물과 같이 한다(履地如水). 땅 속으로도 쑥쑥 들어가고 물 위에도 걸어다닌다. 이와 같이 경계에 끌리지 아니하며 끄달리지 않고 사는 삶을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걸 뭐 신통이라고 이해하면 안돼요. 履水如地(이수여지) 履地如水(이지여수) 이건 신통이 아니고 어디에도 끌리지 않고 끄달리지 않으면 자유로운 거죠 뭐. 우리가 그 무엇에도 끄달리지 않으면 자유로운 것입니다. 끄달리지 않을 만한 그런 능력이 되려면은 청법무의도인에 대한 소상한 이해와 확신이 있어야 돼요. 그거 보다 더 큰 보물은 없다. 이것이 나다. 청법무의도인,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는 바로 이 순간, 보고 듣고 하는 이 사실, 여기에 대한 확신, 아주 너무나도 분명한 그 확신이 있으면은 그러면 어디에도 끌리지 않습니다. 아 뭐 내가 뭐 외형으로야 거지가 된들 무슨 상관이냐. 그래서 이제 窮釋子口稱貧(궁석자구칭빈)이나 實是身貧道不貧(실시신빈도불빈)이라, 궁한 아주 가난하게 사는 이 승려가 사실은 가난하다고 말하지마는 實是身貧道不貧(실시신빈도불빈)이라, 사실 몸이 가난한 것이지 육신의 삶이 가난한 것이지 도가 가난한 것은 아니다. 貧則身常被褸褐(빈즉신상피루갈)이요 道則心藏常無價珍(도즉심장무가진)이라, 가난한 입장에서 보면은 누더기 옷을 입고 어디에 의지할 데도 없이 이 절 저 절 떠돌아 다니지마는 도즉심장 무가진이라, 도의 입장에서 보면은 내 마음 속에서 무가진보,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그 보물을 내 가슴에 품고 있다. 참 증도가 근사한 글이에요. 영가 증도가에 그런 구절이 있죠. 저는 옛날에 증도가를 좋아해 가지고 도량석 할 때도 그 글 가지고 외우고 늘 그랬었어요. 우리 선종 어록에 조금 관심이 있으면은 이제 신심명하고 증도가는 익히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옛날 어록들, 큰 스님들 법문 한 거, 이런 거 보면은 뭐 걸핏하면 신심명 인용하고 증도가 인용하고, 신심명과 증도가가 나온 이후로는 그것을 인용하지 아니하는 선지식은 아무도 없어요. 여기도 보면은 신심명이 몇 번 인용이 됐죠, 임제스님도. 緣何如此(연하여차)오, 어째서 이와 같으냐. 爲達四大如夢如幻故(위달사대여몽여환고)니라, 이 사대 육신이라고 하는 것은 꿈과 같고 幻과 같은 줄을 통달해서 알기 때문이다 그랬습니다. 참 실지로 우리가 이렇게 되면은 이것이 나의 인격이 탁 돼 버리면은 정말 걸림없이 시원하게 살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 스님들은 이런 것을 자꾸 이제 접해가지고 사량으로라도, 아! 이 사대육신은 꿈과 같은 것이고 환과 같은 거야. 그리고 그 한 물건 그거야말로 진짜 나야. 그거 있는 이상 뭐 내가 무엇이 부러우며 무엇이 꿀리겠는가. 하나도 꿀릴 것도 없고 나는 당당하게 내 인생 산다 하는 그런 그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거죠 자꾸 이런 걸 접함으로 해서. 13-11 그대가 살아있는 문수다 道流(도류)야 儞祇今聽法者(이지금청법자)가 不是儞四大(불시이사대)로대 能用儞四大(능용이사대)하나니 若能如是見得(약능여시견득)하면 便乃去住自由(변내거주자유)니라 若山僧見處(약산승견처)하면 勿嫌底法(물혐저법)이라 儞若愛聖(이약애성)하면 聖者聖之名(성자성지명)이니라 有一般學人(유일반학인)이 向五臺山裏求文殊(향오대산리구문수)하나니 早錯了也(조착요야)라 五臺山無文殊(오대산무문수)니라 儞欲識文殊麽(이욕식문수마) 祇儞目前用處(지이목전용처)가 始終不異(시종불이)하며 處處不疑(처처불의)가 此箇是活文殊(차개시활문수)니라 儞一念心無差別光(이일념심무차별광)이 處處總是眞普賢(처처총시진보현)이요 儞一念心自能解縛(이일념심자능해박)하야 隨處解脫(수처해탈)이요 此是觀音三昧法(차시관음삼매법)이니라 互爲主伴(호위주반)하야 出則一時出(출즉일시출)하나니 一卽三三卽一(일즉삼삼즉일)이라 如是解得(여시해득)하면 始好看敎(시호간교)니라 그 다음에 그대가 살아있는 문수다, 이 대목이 임제록의 절정이다, 정상이다, 내가 그렇게 메모를 해 놨는데. 道流(도류)야 儞祇今聽法者(이지금청법자)가, 그대들이 다만 지금 법문을 듣고 있는 그 사람이, 不是儞四大(불시이사대)로대 그대의 사대육신이 아니야. 그런데 能用儞四大(능용이사대)해, 그대들의 사대를 능히 사용한다. 그렇죠. 어쨌든 그놈은 사대는 아니지만은 사대육신을 또 활용을 해. 그게 둘이 만나가지고 조화를 이루니까 그게 사람이야. 그것만 떠돌아 다니면은 뭐라? 귀신이라 그러는 거죠. 그게 빠져 나가 버리면은 뭐라? 송장이지 그건. 그래 그게 조화를 제대로 이루었을 때 참 가장 가치있는 존재인 거죠. 그래서 能用儞四大야. 그대들의 사대를 능히 사용하나니, 若能如是見得(약능여시견득)하면 만약에 능히 이와 같이 본다면은 보아 얻으면은 便是去住自由(변시거주자유)니라 곧 가고 오는 데 자유롭다. 어딜 가든지 저 저승을 가도 역시 마찬가지여. 저승에 가고 이승에 머물고 하는데 자유롭다. 若山僧見處(약산승견처)하면 만약 산승 견처에다가 의지한다면은 勿嫌底法(물혐저법)이라, 그 무엇도 배격해 내고 반대하고 싫어하고 할 일이 없다. 儞若愛聖(이약애성)하면, 그대들이 만약에 성인을 사랑할 것 같으면 聖者(성자)는 聖之名(성지명)이니라, 성인이라고 하는 것은 성인이라고 하는 이름일 뿐이야. 有一般學人(유일반학인)이 어떤 일반 학인이, 어떤 한 종류의 학인이 있어서 向五臺山裏求文殊(향오대산리구문수)하나니,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계신다는 소리을 듣고 오대산을 향해서 문수보살을 구해서 일보일배 일보일배 하면서 몇 년에 걸려서 그렇게 간다. 무착 문희 선사가 그랬죠. 早錯了也(조착요야)라, 벌써 그건 어긋난 것이다. 五臺山無文殊(오대산무문수)니라, 오대산에는 문수보살 없다. 관음도량에 관세음보살 없다. 법당엔 부처가 없다 말여. 지장도량 보현도량 다 그렇다. 儞欲識文殊麽(이욕식문수마) 그대가 진짜 문수보살을 알고 싶은가. 祇儞目前用處(지이목전용처), 다만 그대들 지금 눈앞에서 작용하고 있는 그것, 始終不異(시종불이)여, 바로 작용하고 있는 그것이, 始終, 아침부터 저녁까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번도 변함이 없는 그놈, 바로 그것이 주인공이야. 시종불이하며 處處不疑(처처불의)라, 어느 곳에 가든지 그 놈에 대해서는 의심할 바가 없어. 이거는 꽃인지 조화인지 이게 의심이 가지마는 그 사실, 꽃인가 아니면 이게 조화인가 라고 의심하는 그 당사자는 의심할 바가 없어, 그놈은. 저거 진짜 임제록이라고 하고 이야기를 하는가 아니면 무슨 뭐 어디서 외도 경전을 갖다 놓고 이야기를 하는가, 그건 의심할 수가 있어요. 하지마는 의심하는 그놈은 의심할 바가 없는 거여. 處處不疑라, 하~ 내가 여기다 여기가 임제록의 절정이다 해 놨어. 허허허. 처처불의라, 此箇是活文殊(차개시활문수)니라, 이것이야말로 진짜 살아있는 문수 보살이다. 보살 중에는 문수가 왕이잖아요. 지혜제일 문수니까. 이것이 진짜 살아있는 문수여. 이것이 진짜 살아있는 관음이고 이것이 진짜 살아있는 지장이고. 우리 프로는 최소한도 이거 알고 있어야 돼요. 저기 아마추어들은 근기 따라서 대기설법할 때는 관음기도 하시오, 지장기도 하시요 뭐라고 그렇게 방편을 쓰지마는 여러분들 우리는 진짜 프로야. 프로는 이 근본 밑바탕을 환히 알고 있어야 된다고. 알고 나서 그 다음에 방편도 쓰고 뭣도 쓰고, 하~ 저 바위에 기도하세요 저 바위 영험있는 바위입니다 쌀도 나오고… 쌀 나오는 바위 뭐 하고 하대. 이상하게 바위가 옆으로 누울 수도 있고 그렇지 그 모양이 잘 안 나오니까 거기다 그림을 이렇게 그려가지고 뭐 관세음보살이 누워있는 바위다 뭐 이런 것도 나오고 뭐 그래 가지고 그 관세음보살이라고 하는 거여 또. 대기 설법할 때는 중생 근기 맞춰서 방편을 쓸 때는 그렇게 쓰는 거야. 그렇지마는 우리 프로들의 본색은 이러한 사실을 환히 꿰뚫고 있어야 된다 이겁니다. 프로는 아마추어하고 달라야 되는 거죠. 始終不異하고 處處不疑, 의심할 바 없는 그것이 此箇是活文殊라. 야 진짜 문수보살이 있는가 없는가, 의심은 좋다 이거야. 하지마는 의심하는 당사자 그것은 의심할 바 없는 거여. 그게 處處不疑입니다, 그게. 그놈에 대한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에요. 그것이 그놈이야말로 진짜 활문수다 살아 있는 문수다, 어 참 대단하잖아요. 儞一念心無差別光(이일념심무차별광)은, 그대들의 한생각 마음에 차별이 없는 빛은 處處總是眞普賢(처처총시진보현)이요, 곳곳에 모두다 이것이 참다운 보현보살이고. 그대들 한생각 마음에 저절로 능히 속박을 벗어난 것, 속박을 벗어난 그것이야말로 벗어나서 處處解脫(처처해탈)은, 어디에 있든지 간에 이것은 해탈돼 있어. 아까도 이야기했지마는 감옥을 짓고 감옥 안에 또 감옥 짓고 감옥 안에 또 감옥 짓고 이래서 천 겹 만 겹으로 지어가지고 그 안에다가 그저 쇠고랑 채우고 목에 칼 씌우고 무슨 수갑 채우고 발목에 채우고 뭐 채우고… 아무리 그렇게 묶어 놔도 그놈은 해탈이야. 그놈은 묶이지가 않아, 그놈은. 도대체가 묶이는 존재가 아니라구요. 수처해탈이잖아요. 어디에도 그건 묶을 수도 없는 거고. 隨處解脫이요 此是觀音三昧法(차시관음삼매법)이니라 이것이 관세음보살이지. 이보다 더 영험있는 관세음보살이 어디 있어요. 저기 뭐 티벳트에 포탈라 궁전에 무슨 관세음보살이 계신다고? 아무리 가서 관세음보살 불러 봐봐. 부르는 그놈 밖에 더 영험있는 관세음보살이 또 있는가. 거기까지 찾아가는 그놈 외에 달리 또 다른 어떤 영험있는 관세음이 있는가.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고 부르는 그것이 진짜 살아있는 관세음이여. 그래서 우리는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불러서 잠자고 있는 내 속에 나의 관세음을 두드려 깨우는 일이야. 하도 잠이 곤하게 들으니까 그렇게 관세음보살… 말로 하는게 부족해서 목탁을 냅다 치면서 관세음보살 불러도 이게 잠에서 안 깨는 거야. 도대체 잠에서 깰 줄을 몰라. 얼마나 잠이 깊이 들었는지. 죽진 않았어요 그게. 죽진 않았는데 워낙 잠에 곤하게 잠 들어가지고 그게 잠에서 안 깨는 거야. 참, 하, 정말 임제 이후에 임제 없고 임제 이전에 임제 없다. 임제 이후에 이런 이야기한 사람 아무도 없어. 겁이 나서 못하지 이거. 그래 내가, 나는 책임 없습니다 임제스님 말씀이지, 허허허, 간혹 이렇게 표현하는데 정말 저는 책임 없어요 임제스님 말씀이에요. 하지마는 나는 또 너무 공감하고 좋아서 이렇게 또 역설을 합니다. 此是觀音三昧法이니라. 互爲主伴(호위주반)하야, 서로서로 주인이 되고 벗이 돼. 예를 들어서 실천행으로 나오면 보현보살이야, 지혜로서 아주 좋은 판단과 분별력을 가지면 문수보살이요, 고통받는 중생들이 눈에 밟혀서 도와주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보살행으로 나오면 그거는 관세음보살이요. 호위주반이야, 서로서로 주인이 되고 벗이 되어서 出則一時出(출즉일시출)이여, 나간 즉 밖으로 나가면은 일시에 나가, 내가 말하면 여기에 관세음보살 보현보살 문수보살이 다 나와서 지금 말하는 거여. 여러분들 다 나와서 말 듣고 있고. 그 세 보살이 다 여러분들 나와서 말 듣고 있는 거여. 一卽三三卽一(일즉삼삼즉일)이라, 하나가 셋이고 셋이 곧 하나다. 문수 보현 관음이 바로 나 한 마음이고 내 한 마음이 문수도 되었다가 보현도 되었다가 관음도 되었다가.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어디서 이런 참, 이치를 우리가 듣겠습니까. 如是解得(여시해득)하면 이와 같이 이해를 할 거 같으면은 始好看敎(시호간교)니라, 비로소 경을 잘 본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다. 시호간교, 경을 잘 보는 사람이다. 이렇게 봐야 看經者慧眼通透(간경자혜안통투)지. 안 그러고 그거 뭐 글자만 쫓아가면 이건 간경자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닌 거지. 참 대단하죠. 그래서 이러한 이치를 아는 우리 먼저 가신 조사 스님들은 비문 비문마다 전부 임제스님의 몇 대손이다, 나는 부처님 몇 대손은 자랑스럽지가 않고 임제스님의 몇대 손이라고 하는 것이 자랑스럽다. 그래서 나는 부처님의 몇 대손이라고 적지를 않고 임제스님의 몇 대손이라고 나는 비석에 적노라, 그렇게 해 놨잖아요 비문에. 우리나라 왠만한 비문에 전부 임제스님 몇 대손 임제스님 몇 대손 해 놨습니다. 그걸 내가 증거를 열 일곱 가지인가 들이댔는데 종이가 부족해서 그것만 적었지 훨씬 더 많죠. 비문 뭐 또 문집 이런 데 보면. 이러한 이치가. 하, 정말 아뭏든 뭐 문수 보현이 누군진 모르겠지마는 어쨌든 참 통쾌하잖아, 통쾌해. 오대산엔 무문수다. 오대산엔 문수보살 없다. 저 포탈라 궁전에는 관세음보살 없다 말여.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부르면서 일보일배 걸어가는 그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진짜 관세음보살이다. 그래서 차마고도 보니까 그러대. 저기 어디 청해서에서 걸어가는가 어쨌든 멀리서 그렇게 몇 달 그 얼음밭을 그리고 눈밭을 그 험한 산을 둘인가 셋인가, 셋이지 셋이는 절하고 한 사람은 먹고 자고 할 그 수레에다 그거 싣고 끌고 가고 네 사람이 한 조가 돼 가지고 그렇게 가는 거, 우리 그거 불교 TV에서 본래 KBS에서 찍었는데 우리 불교 TV에도 그것을 방영을 했죠, 몇 번 했는데. 그리고 나서 나는 참 거기서 느낀 게 커요. 그 세 사람이 그렇게 포탈라 궁까지 다 가 가지고 거기 가서 또 십만 배인가 하는 거야, 거기 가서도. 그러니까 제자리에서 그 평평한 땅에서 십만 배 하는 거야 이건 누워서 떡먹기야. 그 가파른 길, 자갈길, 바위길 그리고 얼음과 눈이 쌓여있는 그 길을 그냥 일보일배하면서 갔으니까 평평한 땅에서 그거 뭐 세멘이 됐든 뭐가 됐든간에 거기서 십만 배 하는 거는 이건 아무 것도 아니야. 마지막 거기 가서 십만 배를 딱 하고는 마지막에 이제 모두 어디로 가느냐. 한 사람은 중이 되고 한 사람은 고향에 돌아가고 한 사람은 동충하초 캐러간다. 동충하초 캐러. 왜 동충하초 캐러 가냐. 집이 가난하니까 여기까지 왔으니까 동충하초를 캐 가지고 그래도 돈을 좀 벌어서 가서 먹고 살려고 그래 동충하초 캐러 간다. 거기에 법문 다 된 거야 법문 다. 뭐야. 사람의 삶이다. 사람이 사는 일이다. 부처라고 이름을 붙히든 보살이라고 이름을 붙히든 뭐라고 이름을 붙히든 기도라고 이름을 붙히든 용맹정진이라고 이름을 붙히든 일보일배라고 이름을 붙히든 그건 다 사람이 사는 모습일 뿐이다. 사람이 사는 거. 동충하초 캐러 간다니까. 그 십만 배 다 하고, 몇 달 걸려서 그 어려운 일보일배를 하고 그 포탈라 궁까지 가서 또 십만 배를 그렇게 하고 나서. 그 사람은 성불이에요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불이여, 성불의 경지라. 평생 소원 거의 다 이룬 거에요. 티벳 사람들은 그것이 평생 제일 큰 소원이니까. 성불하고 싶어하는 사람 성불하듯이 그것이 제일 큰 소원인데 큰 소원 다 이루었다 이거여. 이루고 나서 뭐하느냐. 동충하초 캐러 간다. 다시 출가해서 스님이 된 사람은 남아있고. 참 그런 데서 내가 느낌이 아주 많았고 이러한 임제스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더욱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14-1. 文字에 속지 말라 師示衆云(사시중운), 如今學道人(여금학도인)은 且要自信(차요자신)이요 莫向外覓(막향외멱)하라. 總上他閑塵境(총상타한진경)하야 都不辯邪正(도불변사정)하나니 祇如有祖有佛(지여유조유불)은 皆是敎迹中事(개시교적중사)니라. 有人拈起一句子語(유인염기일구자어)하야 或隱顯中出(혹은현중출)이면 便卽疑生(변즉의생)하야 照天照地(조천조지)하야 傍家尋問(방가심문)하야 也太忙然(야태망연)이로다. 大丈夫兒(대장부아)여, 莫祇麽論主論賊(막지마론주마적)하며 論是論非(논시논비)하며 論色論財(논색논재)하야 論說閑話過日(논설한화과일)하라. 山僧此間(산승차간)에는 不論僧俗(불논승속)이요 但有來者(단유래자)하면 盡識得伊(진식득이)니 任伊向甚處出來(임이향삼처출래)나 但有聲名文句(단유성명문구)하야 皆是夢幻(개시몽환)이니라. 14-1. 문자에 속지마라 그랬습니다. 師示衆云(사시중운), 요건 이제 13이 다 끝났고 14, 요건 새롭게 시중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시중운, 如今學道人(여금학도인)은 지금 도를 공부하는 사람은, 且要自信(차요자신)이요, 다만 요컨대 스스로를 믿을 것이요, 莫向外覓(막향외멱)하라, 밖을 향해서 절대 찾지 마라. 總上他閑塵境(총상타한진경)하야, 모두들 보니까 저 부질없는 경계에 올라가 가지고 그것에 의지해서, 上 字는 그런 뜻입니다 거기 올라가서 거기 의지해서, 都不辯邪正(도불변사정)하나니, 그 경계가 삿된 것인지 바른 것인지를 가리지 못하나니 祇如有祖有佛(지여유조유불)은 다만 저 조사가 있다 부처가 있다 라고 하는 말은 조사니 부처니 하는 말은 皆是敎迹中事(개시교적중사)여, 누가 경에다가 끄적거려 놓은 문자일 뿐이야. 부처다 조사다 하는 것도. 사람이라고, 부득이 해서 사람이라고 표현하지마는 사람이라는 말도 그래. 그러나 최후의 한 마디 말은 사람이야. 그러니까 부처다 조사다 하면 괜히 사람을 가지고 부처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조사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중생이라고도 표현하고 범부라고도 표현하는 거지. 敎迹 가운데. 교리 가운데, 경전 가운데, 경전이나 어록 가운데 일이다. 有人拈起一句子語(유인염기일구자어)하야, 어떤 사람이 한 구절의 말을 이렇게 잡아내 가지고서 或隱顯中出(혹은현중출)하면은, 알송달송하게, 은현중출이라고 하는 것은 알듯말듯하고 알송달송하게 또는 그럴 듯하게 그렇게 표현할 거 같으면은 便卽生疑 (변즉생의)하여, 곧 의심을 낸다 이거야. 그래서 부처님, 또 무슨 도인, 이렇게 하면은 그런 경지가 어떤 경지인고, 이런 게 부처의 경지인가 저런 게 부처의 경지인가, 그래 곧 의심을 내 가지고 照天照地(조천조지)라, 이 생각도 해보고 저 생각도 해보고 이 책도 뒤져보고 저 책도 뒤져보는 거야. 傍家尋問(방가심문)이라, 옆집으로, 자기 아닌 어떤 경전이나 어록이나 사람이나 거기에 쫓아 다니면서 찾고 묻고 한다 이거지. 也太忙然(야태망연)이로다, 또한 크게 망연하다, 아득하다 이말이여. 찾아봐야 없으니까. 경전에 아무리 찾아봐요. 또 누구한테 잘 안다는 사람한테 물어봤자 그건 그 사람의 말소리일 뿐이지. 그건 부처도 아니고 조사도 아니야, 말소리일 뿐이야. 경전이나 어록에서 찾으면은 그건 검은 것은 먹이요 흰 것은 종이일 뿐이야. 이 정도 되면은 이제 깨친 사람들이 여럿이 좀 나와야 되는데. 大丈夫兒(대장부아)여, 대장부아여, 莫祇麽論主論賊(막지마논주논적)하며, 다만 그렇게 주인을 논하거나 도적을 논하지 말며 論是論非(논시논비), 옳고 그른 것도 논하지 말며 論色論財(논색논재), 색도 논하고 재물도 논하지 아니해서 論說閑話過日(논설한화과일)하라, 쓸데없는 것 이야기 하느라고 한가하게 세월 보내지 말라. 山僧此間(산승차간)에는, 산승, 내가 여기에, 자기 회상이니까, 나의 이 회상에는 不論僧俗(불론승속)이여, 승과 속도 논하지 아니하고 但有來者(단유래자), 다만 공부하러 오는 사람이 있을 것 같으면 盡識得伊(진식득)이라, 다 그 사람의 밑천을 알아 본다. 任伊向甚處出來(임이향삼처출래)나, 예를 들어서 그가 어느 곳을 향해서 왔든지 간에 거기에 다 맡겨둔다 이거야. 佛과 조사등을 어떤 경에서 인용하든지 간에 甚處出來(삼처출래)가 그말입니다. 어떤 곳에서 어떤 아주 그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이론을 제시하더라도 뭐라고 그것은? 但有聲名文句(단유성명문구)야, 다만 그것은 소리가 있고, 그걸 말로 하면 소리가 되고 그건 이름이고 문구야, 문구가 있을 뿐이라. 皆是夢幻(개시몽환)이니라. 다 꿈이다, 꿈이고 환이다. 참 이와 같은 이치를 옛날 조사 스님들이나 뭐 부처님이나 다 꿰뚫어 알고는 있죠. 알고는 있지마는 이와 같이 겁없이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그냥 사정없이 이렇게 표현하는 사람은 자고로 임제스님 뿐입니다. 그것이 아주 참 대단하다면 아주 대단한 점이고 많은 도에 관심있고 불법에 관심있고 한 사람들의 속을 시원하게 아주, 정말 속을 시원하게 해주는 그런 표현이라고 할 수가 있죠. 표현이 과격하지 아니하면 그렇게 같은 이치라도 속이 시원하지가 않죠. 이게 임제스님과 같이 이렇게 과격하게 그냥 사정없이 표현해 버리니까 어느 누구 눈치볼 것 없고 무슨 뭐 부처님 눈치 조사 눈치 아예 부처고 조사고 없는데 뭐. 눈치볼 게 어디 있겠어요. 그러니까 표현이 아주 과격하고 거칠죠. 우리가 표현하자니 과격하다 거칠다 그렇게 말하지 뭐 본인에게 무슨 과격하고 거칠은 게 있겠습니까. 그대로 그냥 본심대로 표현했을 뿐이죠. 이런 점들도 우리가 임제록에서 우리가 충분히 읽어야 할 그런 어떤, 비록 형식적인 그런 표현이지마는 충분히 임제록에서 맛봐야 됩니다. 그래서 다른 어록하고 비교하면서도. 아 참 같은 뜻인데 이렇게 표현했구나 하는 것을 느끼면은 그것도 새로운 또 한 소득이고 또 맛이 됩니다. 오늘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첫댓글 祇儞目前用處(지이목전용처)가 始終不異(시불이)하며 處處不疑(처처불의)가 此箇是活文殊(차개시활문수)니라. ㅡ바로 이 순간 눈 앞에서 작용하는 그 당체가 시간,공간적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짜 살아있는 문수보살이다.禪慧珠보살님, 고맙습니다. _()()()_
_()()()_ 당신은부처님, 당신은부처님, 당신은부처님, 고맙습니다.
동충하초 캐러 간다. ... _()_
目前用處...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_()()()_
삼배 올립니다
은산철벽이고,백척간두 진일보해야 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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祇儞目前用處가 始終不異하며 處處不疑가 此箇是活文殊니라..다만 그대들 지금 눈앞에서 작용하고 있는 그것(주인공)이 시종불이하며 어느 곳에 가든지 의심할 바가 없는 이것이야 말로 진짜 살아있는 문수보살이다..禪慧珠 님!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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互爲主伴하야..._()()()_
감사합니다,
履水如地 履地如水 땅 속으로도 쑥쑥 들어가고 물 위에도 걸어다닌다. 이와 같이 경계에 끌리지 아니하며 끄달리지 않고 사는 삶을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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祇如有祖有佛은 다만 저 조사가 있다 부처가 있다 라고 하는 말은 조사니 부처니 하는 말은 皆是敎迹中事여, 누가 경에다가 끄적거려 놓은 문자일 뿐이야. 부처다 조사다 하는 것도. 사람이라고, 부득이 해서 사람이라고 표현하지마는 사람이라는 말도 그래. 그러나 최후의 한 마디 말은 사람이야. 그러니까 부처다 조사다 하면 괜히 사람을 가지고 부처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조사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중생이라고도 표현하고 범부라고도 표현하는 거지. 敎迹 가운데. 교리 가운데, 경전 가운데, 경전이나 어록 가운데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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貧則身常被褸褐 道則心藏常無價珍 ...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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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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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고맙습니다
시원합니다~ ... _()_
선혜주님 고맙습니다_()__()__()_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辯이 辨으로 고쳐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신은 부처님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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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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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南無無位眞人 南無無位眞人 南無無位眞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