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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화교들 : 중국계 태국인
Thai Chinese
Thai Chinese คนไทยเชื้อสายจีน 泰國華人
총 인구 |
705만 3,240 명 (주1) |
주요 거주지역 |
태국 (타이) |
사용 언어 |
태국어(Thai),
북경어(Mandarin, 官話),
조주어(潮州話, Teochiu 혹은 Teochew)
- 방콕 조주어[Bangkok Teochew] 포함,
객가어(客家話, Hakka)
해남어(海南話, Hainanese)
복건어(福建話, 閩語, Hokkien),
광동어(廣州話, 白話, Cantonese) |
종 교 |
주로 불교도가 많음. 대승불교와 상좌부불교를 함께 신봉하거나 둘 중 하나를 신봉하는 경우가 많음. 또한 중국의 민간신앙과 도교, 유교를 겸하기도 함. 여타 소수 종교들도 존재함. |
관련 민족들 |
태국민족(타이족), 해외 중국인(화교)
캄보디아의 화교들. | |
"태국 화교"(Thai Chinese)는 태국에 거주하는 "화교"(overseas Chinese)를 말한다. 공식적 통계자료는 1987년의 태국 화교 인구를 600만명으로 보았고,(주2) 혹은 태국 인구의 14%를 중국계 혈통으로 보기도 한다.(주3) 특히 과거에는 태국민족(타이족)과의 통혼이 광범위하게 발생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태국계 조상들과 더불어 중국계 조상들을 가졌다고 주장하고 있고, 혼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주4) 태국의 화교계 후손들은 주로 해안지대에 많이 거주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방콕에 집중되어 있다.(주5) 태국 화교들은 태국 사회의 각계 각층을 대변하면서 비지니스와 정치에서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태국 화교들의 절반을 약간 웃도는 인구는 그 조상들이 중국 광동성 북동부의 조주(Chaozhou, 潮州, 차오쩌우) 지역에서 온 경우이다. 이러한 이유로 태국 화교 공동체에서는 민남어(閩南語, 민난어)와 조주어가 널리 사용되는 것이다. 그밖의 화교들의 출신지로 객가(客家, Hakka)와 해남(하이난) 출신들이 있다.(주6)
태국 화교들은 대부분 태국어에 익숙하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중국어로도 소통이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태국 화교들은 태국어를 업무용 언어로 사용하며, 중국어는 가정이나 친척들과 대화시에만 사용하는 편이다. |
그러나 태국사회에 완전 동화된 화교계 후손들의 경우엔, 일상언어 대부분을 태국어만 사용하며, 중국어에는 그다지 익숙하지 못하다.(주7) 방콕의 비지니스 사회의 경우, 화교계 상공인들 사이에서는 조주어가 토착적으로 변용된 형태로 상업용 언어로 사용되기도 한다.(주8)
태국의 화교들이 태국어에 능숙한 것은, 태국 정부가 모든 학교로 하여금 태국어 교육을 의무화시킨 데서 기인한다. 그러나 중국어를 매개로 한 학교의 졸업생들은 여타 학교 출신자들보다 중국어를 보다 잘 구사하는 편이다. 최근에는 태국 화교 사회에서 북경어(Mandarin)를 사용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주9)
(주1) The Ranking of Ethnic Chinese Population, Overseas Compatriot Affairs Commission, R.O.C.
(주2) Frank-Jürgen Richter, Business Networks in Asia: Promises, Doubts, and Perspectives. Quorum Books. p.193.
(주3) CIA - The World Factbook-Thailand.
(주4) Chris Dixon. The Thai Economy: Uneven Development and internationalisation. Routledge. p.26.
(주5) Paul J. Christopher. 50 Plus One Greatest Cities in the World You Should Visit. Encouragement Press, LLC. p.25.
(주6) Chris Baker, Pasuk Phongpaichit. A History of Thailand. Cambridge University Press. p.93.
(주7) Chee Kiong Tong, Kwok B. Chan. Alternate Identities: The Chinese of Contemporary Thailand. BRILL. pp.21–23.
(주8) Durk Gorter. Linguistic Landscape: A New Approach to Multilingualism. Multilingual Matters. p.43.
(주9) Antonio L. Rappa. Language Policy and Modernity in Southeast Asia. Springer. p.116. |
1. 종 교
중국에서 태국으로 들어온 이민 1세대들은 대승불교(Mahayana Buddhism)와 도교(Taoism)의 신봉자들이었다. 이후 많은 태국의 화교들이 상좌부불교(Theravada Buddhism)도 신봉했는데, 이러한 경향은 특히 동화된 화교들 사이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태국의 화교들은 상좌부불교와 함께 중국의 민속종교적 관습들도 함께 지키는 경우가 많다.(주10) 따라서 가장 주요한 명절인 중국 신년(구정)과 추석, 청명(淸明: 한식과 같은 날 혹은 하루 전날)과 같은 명절들에는, 방콕과 푸켓(Phuket), 그리고 화교들이 많이 거주하는 여타 지역들에서 주요한 축제가 펼쳐진다.(주11)
(사진) 방콕에 위치한 중국식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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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켓 지역의 화교들은 9-10월 사이에 "테사깐 낀쩨"(เทศกาลกินเจ) 축제를 열고, 9일간 채식주의를 실천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기간 중에는 육식을 삼가하고 중국식 고행을 하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으며, 대백공(Tua Pek Kong, 大伯公, Da Bo Gong)(아래의 해설 참조)에 대한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이러한 특별한 전통은 19세기에 태국 문화가 말레이반도로 유입되면서 푸켓(Phuket) 지역 화교 공동체에서 발전된 것이다.(주12)
한편 태국 북부에는 이슬람교를 믿는 소수의 화교들도 존재한다. 이들은 "찐호"(Chin Haw 혹은 Chin Ho)로 불리는 화교공동체이다. 화교계 무슬림들의 대부분은 중국 운남성에서 이주해온 후이족(Hui people, 회족, 回族) 선조들의 후예들이다. 현재 치앙마이(Chiang Mai)에는 화교들의 모스크가 7곳이 있고,(주13) 그 중 1곳인 "반하우 모스크"(Baan Haw Mosque, 王和清真寺, มัสยิดเฮดายาตูลอิสลามบ้านฮ่อ)는 태국 북부지방에서 가장 유명한 모스크이기도 하다.
* [해설] 대백공(뚜어 뻭 꽁)은 누구 ?
"뚜어 뻭 꽁"(Tua Pek Kong, 大伯公, Da Bo Gong)은 말레이시아의 화교들이 신봉하는 주요한 신격 중 하나이다.
뚜어 뻿 꽁은 영국의 프란시스 라이트(Francis Light)가 1786년 피낭(Penang, 페낭)에 영국 식민지를 설치하기 전인 1746년에 피낭으로 이주해왔다고 한다. 객가계 화교였던 그의 본명은 쯔앙 리(Zhang Li, 张理)였는데, 타고 있던 배가 난파를 당하면서 피낭 섬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이곳에는 당시 50명의 주민들만 살았다고 한다.
쯔앙 리가 사망하자 지역 주민들은 그를 숭배하기 시작했고, 그곳에 뚜어 뻭 꽁 사당을 세웠다. 오늘날 말레이시아 화교들은 전국적으로 뚜어 뻭 꽁을 신봉하고 있다. 뚜어 뻭 공이 종종 도교의 신격인 "뚜 디 공"(Tu Di Gong, 토지공, 土地公)과 혼동되기도 하는데, 이는 외형상 유사성이 있기 때문이다. |
(주10) Martin E. Marty, R. Scott Appleby, John H. Garvey, Timur Kuran. Fundamentalisms and the State: Remaking Polities, Economies, and Militanc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p.390.
(주11) Chee Kiong Tong, Kwok B. Chan. Alternate Identities: The Chinese of Contemporary Thailand. pp.30–34.
(주12) Jean Elizabeth DeBernardi. The Way That Lives in the Heart: Chinese Popular Religion and Spirits Mediums in Penang, Malaysia. [Stanford University Press]. pp.25–30.
(주13) The Ranking of Ethnic Chinese Population, Overseas Compatriot Affairs Commission, R.O.C. |
2. 역 사
중국인들이 태국으로 이주해온 역사는 여러 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부분 복건성과 광동성에서 온 중국 상인들이 아유타야(Ayutthaya) 항구에 도래한 것은 최소로 잡아도 13세기 경부터이다. 아유타야 왕국 시대의 연대기에 따르면, 에까터사롯(Ekathotsarot, เอกาทศรถ: 재위 1605-1610) 국왕이 "치부에만 너무 몰두하여 이방인들과 외국에 지나치게 경도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당시의 외국은 포르투갈, 스페인, 필리핀, 중국, 일본이었다.
아유타야 왕국은 16세기 이래 거의 끊임없이 버어마의 위협에 시달렸다. 청나라의 건륭제(Qianlong Emperor, 乾隆帝)는 버어마의 군사적 위협을 자각하고, 1766-1769년 사이에 4차례나 버어마 원정군을 파병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아유타야는 1767년 버어마에 의해 멸망했다. 이후 중국은 시암 내의 군사력에 관심을 가졌다. 바로 화교계 후손이었던 딱신(Taksin) 장군은 이러한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여, 군대를 조직하고 버어마를 공격했다. 딱신 왕은 중국 이민자들 및 중국과의 교역을 적극 장려했다. 특히 조주(차오쩌우) 지역의 이민자들이 대거 정착을 했다.(주14) 태국 내 화교 인구는 1825년에 23만명 수준에서 1910년 경에는 79만 2,000명 수준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1932년 무렵이 되면, 화교계 인구는 태국 인구 전체의 12.2% 정도를 차지하게 된다.(주15)
하지만 초기의 중국인 이민자들은 대부분 남성이었고, 이들은 태국인 여성들과 결혼했다. 이러한 부모를 둔 아이들에 대한 적절한 표현으로 "중국계 태국인"(Sino-Thai)이란 말이 사용됐고,(주16) 혹은 태국어로 "룩찐"(Luk-jin, ลูกจีน: 중국인의 아이)이라고도 불렸다.(주17)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와 중국인 여성 이민자들이 증가하면서, 이러한 통혼은 과거보다 줄어들었다.
청나라의 부정부패와 중국 내 급격한 인구증가가 발생하고, 과중한 세금까지 부과되자, 많은 중국인 남성들이 일자리를 찾아 태국으로 들어왔다. 성공적인 사람들은 돈을 벌어 중국 내의 가족들에게 송금을 하기도 했다. 많은 중국인들은 "세금 경작"(tax farming) 시스템을 이용해 번영을 누렸는데, 이는 개인으로 하여금 세율보다 낮은 가격에 조세미를 수집한 후 팔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1800년대 말엽, 태국이 서구 열강들로부터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정신이 없게 되자, 중국 운남성 지역으로부터 마적들이 일어나 태국 영태로 들어오는 "허 전쟁"(Haw wars, ปราบกบฏฮ่อ: 1865-1890)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태국 민족주의가 모든 부문에서 고조되어 반-중국(반-화교) 분위기를 물들였다.
당시의 화교 공동체는 오랜 기간 태국 내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왕실 무역 독점권에 관한 대리인도 맡고 있었다. 하지만 유럽의 경제적 영향력이 증대되면서, 화교들이 아편을 이용한 관세 및 세금 수집으로 이동했는데, 이 2가지 모두 사회적으로 경멸받는 직업이었다. 게다가 1905년 이래로 거의 10년간 지속된 경제불황에 대해서도, 화교 제분업자들과 쌀 상인들이 욕을 먹고 있었다. 관료들에 대한 뇌물공여, 중국 비밀 결사체들(마적)과의 전쟁들, 세금수집 과정에서 폭력적 수단의 동원 등으로 인해, 당시 이민의 증가와 함께 급속도로 팽창하던 화교들에 대한 적개심이 더욱 더 자라나고 있었다.
1910년 무렵이 되면 화교들은 태국 인구 전체의 거의 10% 가까이에 육박했다. 게다가 새로 들어온 이민자들은 가족 단위로 들어오거나 기존의 태국 사회에 동화되기도 거부했다. 또한 쑨원(孫文, 손문)이 주창한 중화 민족주의 사상 역시 고조되어, 태국 민족주의와 나란히 대치했다. 화교들은 심지어 그 자녀들을 별도의 학교로 입학시켰다.
(사진) 방콕의 아침 거리에서 한 화교 노점상이 장사를 준비하고 있다. 태국에 들어온 화교들은 소규모 장사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 확대사진 바로가기
결국 라마 6세 국왕은 법령을 통해 태국식 성씨를 따르도록 규정했는데, 이는 주로 화교 공동체의 사회적 동화를 촉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 법령에 따르면 태국의 화교들은 새롭게 태국식 성씨로 개명하던가 아니면 외국인으로 대우받아야 했다. 결국 대부분의 화교들은 태국인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1930-1950년대 사이에는 버어마에 살던 많은 화교들이 태국 서부지방인 라차부리(Ratchaburi) 도 및 깐짜나부리(Kanchanaburi, 칸차나부리) 도로 이주해서 정착했다. 원래 그 지역에는 이미 19세기에 버어마에서 이주해온 소수의 화교계 인구가 정착해서 살던 지역이었다.
화교계 가문들은 그들이 거주하는 주택이나 운영하는 업소 앞에 작은 사당(신전)을 세워놓아 그것으로 식별이 가능하다. 이 사당들은 대부분 지면에 곧바로 세워놓고 붉은색 칠이 되어 있다. 또한 금박장식과 작은 붉은색 등(燈)이 달려있기도 하다.
태국의 화교들은 1930년대와 1950년대 빽 피분송캄(Plaek Pibulsonggram) 총리의 군사독재 정권시절, --- 비록 빽 피분송캄 자신이 화교계 혈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 차별로 인해 고통받기도 했다.(주18) 당시 쌀, 담배, 석유와 같은 생필품들은 국영 기업체들이 독점했고, 화교계 사업자들은 새로운 납세제도 및 통제 하에 종속되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교들은 여전히 태국 국민이 되도록 장려를 받았다. 그리고 1970년 무렵이 되면, 태국 내에서 출생한 화교들의 90% 정도가 태국 국적을 취득했다. 1970년대에 중국과 외교관계가 수립됐을 때,(주19) 태국 내에서 출생하지 않은 중국인 영주자들 역시 태국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도록 했다. 이후 외국인 지위의 영주 화교들은 20만명 미만으로 줄어들었다.
(주14) Bertil Lintner. Blood Brothers: The Criminal Underworld of Asia. Macmillan Publishers. p.234.
(주15) Martin Stuart-Fox. A Short History of China and Southeast Asia: Tribute, Trade and Influence. Allen & Unwin. p.126.
(주16) Smith Nieminen Win. Historical Dictionary of Thailand. Praeger Publishers. p.231.
(주17) Rosalind C. Morris. In the Place of Origins: Modernity and Its Mediums in Northern Thailand. Duke University Press. p.334.
(주18) Michael Leifer. Dictionary of the Modern Politics of South-East Asia. Routledge. p.204.
(주19) "Bilateral Relations", Ministry of Foreign Affairs,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2003-10-23. 2010-6-12 접속. "On July 1 1975, China and Thailand established Diplomatic relations." |
3. 방언그룹
태국 화교들의 대다수는 중국 남부의 여러 방언그룹들에 속한다. 태국 화교 중 56%는 조주어 사용 공동체에 속하고, 16%는 객가어 사용 공동체, 11% 정도는 해남어 사용 공동체이다. 또한 광동어와 복건어 사용 공동체도 각각 7% 정도이고, 3% 정도가 여타 다양한 중국 방언 사용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주20)
조주어 사용 화교들은 대부분 방콕의 짜오파야 강(Chao Phraya River, 차오프라야 강) 주변에 몰려서 살고 있다. 이들 중 많은 수가 정부에서 일하고 있고, 나머지는 상업에 종사한다. 딱신 왕 시대에는 일부 영향력 있는 조주어 사용 화교 상인들이 특권을 부여받기도 했다. 이러한 화교 상인들을 태국어로 "찐 루웡"(Jin-luang)이라 부르는데, "왕실 화교"(Royal Chinese)란 의미이다.
복건어 사용 화교들은 송카(Songkhla, 송클라)와 푸켓 지역에서 최대의 화교 방언그룹을 이루고 있지만, 인구수로 보아 많이 거주 하는 지역은 치앙마이(Chiang Mai), 푸켓, 서부지방 중심부 지역들이다.
객가어 사용 화교들은 태국 내에서 특히 민영은행들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 사례가 "까시꼰 은행"(Kasikorn Bank, 泰华农民银行, 태국농민은행)이다.
태국 화교들 중 많은 수는 중국인 이민자와 태국인 사이의 통혼을 통한 후손들이다. 화교들 중 태국 문화를 수용하고 동화된 경우에는 태국인 조상들을 둔 경우가 상당히 많은 편이다.
하지만 순수하게 중국 혈통을 가졌거나, 아니면 조상들 중 중국계의 비율이 압도적인 부분을 차지하는 화교들도 존재한다. 중국계 혈통을 지배적으로 유지한 화교들은, 주로 20세기 초엽부터 20세기 중엽 사이에 중국 남부의 광동성[조주어, 광동어, 해남어, 객가어], 복건성[복건어, 객가어]에서 발생한 기근과 내전을 피해, 태국 및 난양(Nanyang, 南洋: 중국에서 '동남아시아'를 일컫던 말)의 여타 국가들로 이주했던 사람들이, 다시금 태국으로 재이주하면서 들어온 선조들을 두고 있다.
태국 남부지방에서 특히 푸켓 도에 거주하는 화교들 중에, 태국 문화에 동화된 공동체를 "뻬라나깐"(Peranakan 혹은 Baba-Nyonya, 峇峇娘惹)이라 부른다. 이들은 15-16세기에 누산따라(Nusantara) 지역, 즉 인도네시아 군도 지역으로 이주해온 화교들의 후손들로서, 이웃 국가들인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에 거주하는 "뻬라나깐" 화교들과 동일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주21)(주22)(주23) 또한 말레이계 주민이 많은 태국 남부지방의 화교들은 태국어보다도 말레이어에 더 익숙하며, 때때로 그 지방의 말레이인들과 통혼하기도 한다.(주24)
한편 치앙라이(Chiang Rai) 도 인근의 마을들에는, 주로 운남성 출신 조상을 둔 화교들도 상당수가 살고 있다. 이들의 선조는 1940년대 중국 공산당 군대에 맞서 싸우던 국민당 군대의 군인들이었다. 이들이 태국 북부지방으로 도망쳐와 지역 주민들 사이에 정착했던 것이다.(주25)(주26)(주27)
북부지방에는 또한 "허"(Haw) 혹은 "후이"(Hui, 回)라 불리는 무슬림 화교들도 살고 있다. 이들은 운남성의 무슬림들이 분리독립 정권을 세웠던 "빤타이 반란"(Panthay Rebellion, 杜文秀起義: 1856–1873) 이후, 태국 북부로 도망쳐온 사람들로서 1890년대에 최종적으로 치앙마이(Chiangmai)에 정착하면서 독특한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주28)
가장 주요한 방언 그룹
조주어 Teochew
객가어 Hakka
해남어 Hainanese
광동어 Cantonese
복건어 Hokkien |
4. 성씨와 성명
태국의 화교들은 자신의 이름에 원래의 중국 성씨나 그 번역어를 사용하여 알 수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령 원로 정치인 반한 실빠-아차(Banharn Silpa-Archa, บรรหาร ศิลปอาชา) 전 총리의 경우, "아차"(อาชา: 태국어로 '말'이란 의미)가 바로 중국 성씨인 "마"(馬)를 번역한 것이다. 또한 보수파 언론인인 손티 림텅꾼(Sondhi Limthongkul, สนธิ ลิ้มทองกุล) 씨의 경우, "림"(ลิ้ม)이 바로 중국 성씨 "린"(Lin, 林)의 음사이다.
여러 태국 화교들은 상당히 긴 성씨를 채용하기도 하는데,(주29) 이는 과거에 국왕이 고위 공직자들에게 하사하던 품계명을 흉내낸 것이다. 타이족(태국인)은 원래 보다 짧은 성씨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현재는 그들 역시 보다 긴 이름을 갖는 쪽으로 변하고 있다.
태국의 화교들은 태국 사회에 동화됨으로써 박해를 피하기 위해 태국식 성씨를 채용했다. 이들은 작명을 할 때, 길상한 의미의 태국어와 원래의 중국 성씨를 결합시키는 경우가 많다.
외부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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