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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 아피싯 웻차치와 태국 총리 (중)
Abhisit Vejjajiva
1. 태국 총리가 되다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 국왕은 2008년 12월 17일 아피싯을 태국 총리로 임명했다. 아피싯은 세계경제위기 및 국내정치가 보수파인 옐로우셔츠(PAD: 왕실, 군부, 도시민) 세력과 대중세력인 레드셔츠(UDD: 농촌지역, 경찰) 세력으로 양분된 와중에서 총리 직에 올랐다.
아피싯의 내각에는 PAD 지도자였던 까싯 삐롬야(Kasit Piromya)가 외무부장관을 맡았고, 건설 재벌인 추워랏 찬위라꾼(Chaovarat Chanweerakul)이 내무부장관에, 그리고 투자은행가이자 아피싯의 동창생인 꼰 짜띠꽈닛(Korn Chatikavanij)이 재무부장관에 임명되었다.(주55) 특히 까싯을 외무부장관에 임명한 일은 광범위하게 비판을 받았다. 아피싯은 까싯의 임명에 대해 변론하면서, "까싯 씨는 오랜 경험을 가졌기 때문에 선택했다. 그는 여러 핵심 국가들에서 대사를 지냈고, 경제에 관해 해박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과거에 PAD의] 시위에 참가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만일 불법을 저질렀다면 기소를 당하게 될 것"이라 말했다.(주56)

(사진) 뽄티와 나까사이 상무부 부장관.
한편 아피싯은 마사지 성매매업소 재벌인 뽄티와 나까사이(Pornthiva Nakasai)를 상무부 부장관에 임명하기도 했다. 그는 이 임명에 어떤 거래가 오가지 않았나 하는 의혹을 부인했다.(주57)
아피싯이 총리로서 처음 한 일은 수백만 명의 휴대폰 사용자들에게 SMS 메세지를 보낸 것이었다. 그는 "당신의 총리" 이름으로 발신된 메세지를 통해, 국가의 위기를 해결하는 데 협조해줄 것을 당부했다.
흥미를 느낀 사용자들은 답신 메세지를 보낼 수도 있었는데, 그 비용은 3바트(약 100원)였다. 그는 SMS를 대량으로 발송하면서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국가통신위원회"(National Telecommunication Commission)는 본인동의 없이는 휴대폰 사업자가 고객 정보를 모을 수는 없다고 말했지만, 아피싯에 대해 별도의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주58)(주59)
"어섬션 대학"(Assumption University)이 2009년 5월에 실시한 "ABAC 여론조사"(Abac Poll)에 따르면, 아피싯은 국무위원 중 최고치인 70%의 지지율을 받았다. 아피싯 정부 전체적으로는 "만족한다"는 답변을 59%를 얻어냈고, 9.4%는 "매우 만족한다"고 답변했다. 이 조사에서는 응답자 10명 중 6.5명이 아피싯 정부를 인정하는 편이었다.(주60)
(주55) Asia One, "Finance minister from Thai elite faces raft of economic woes", 2008-12-21.
(주56) Far Eastern Economic Review, "New Thai Prime Minister Says People Must Wait for Democracy", 2008-1-24.
(주57) BBC, "Thai PM rules out cabinet deals", 2008-12-18.
(주58) Bangkok Post, "PM's text message an 'invasion of privacy'", 2008-12-19.
(주59) Percival, Jenny, "Thai opposition leader becomes PM", London: Guardian.co.uk, 2008-12-15.
(주60) The Nation, "Most satisfied with Abhisit govt, poll finds", 2009-5-29. |
2. 국내정책
2.1. 경제불황과 부양책
세계경제위기는 태국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2008년 12월과 대비하여 2009년 1월에는 실업자 수가 88만명으로 급증했다.(주61) 2009년 초에 태국 경제는 연중 3% 마이너스 성장할 것으로 예측되었고, 실질적인 일년 GDP는 2.3% 마이너스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됐다.(주62)(주63)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아피싯은 차입금과 적자예산을 증가시키고 일반예산을 삭감하는 대응책을 내놓았다.(주64) 그는 2009년 1월 1,170억 바트(약 3조원)에 달하는 경기부양책을 내놓았다. 5월에는 1조 4,000억 바트(약 40조원)에 달하는 부양책을 다시금 내놓으면서 8,000억 바트(220억 달러)의 차입을 필요로 했고, 이 돈의 대부분은 --- 주로 물류 --- 기반시설 투자에 사용됐다.(주65)
아피싯은 월소득이 15,000바트(약 500달러) 미만인 사람들에 대해 일시불로 2,000바트(75달러) 상당의 수표를 지급하는 일을 승인했다.(주66) 또한 50만명에 이르는 신규 졸업생 및 실업자들을 재교육시키는 사업인 "똔까 아칩"(Ton Kla A-cheep) 프로그램도 시행했다. 또한 헌법에 규정된대로, 정부의 무상교육도 15년으로 연장하여 모든 학생들이 매학기마다 2,000바트씩 절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60세 이상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매달 500바트(18달러)의 연금을 지급했다. 물가안정을 위해서는 쌀과 옥수수, 타피오카(카사바 전분) 재배 농민들에게 보조금을 지불했다. 정부는 또한 전국적으로 각 마을들에 대해 푸미폰 국왕이 주창했던 충족경제론에 기반한 사업들을 진행토록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경기부양책의 2번째 국면은 "강성한 태국"(타이 켐캥, Thai Khem Khaeng)이란 이름 하에 시행됐다. 이 사업은 국유지 점유 거주자들의 토지명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일로 시작되었다.(주67)(주68) 정부는 대부업자들의 사채로부터 국영 은행의 대출금으로 갈아탈 수 있도록 하여, 채무자들이 다시금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재정적 기반을 제공하고자 했다.
만일 세계경제위기가 더 악화되지만 않는다면, 태국 경제가 10%까지도 성장할 것으로 예측됐다. 외국인들의 매수세가 밀려들면서 태국 주식시장의 "SET 지수"가 2008년 5월 23일 이후 최고 수준까지 올라갔다.
(주61) MCOT, "Thailand's January unemployment soars to 880,000", 2009-3-17.
(주62) Business Week, "Thai economy grows in Q4 after year of contraction", 2010-2-22.
(주63) MCOT, "Thai economy to contract 4.5-5 per cent: Finance Minister", 2009-4-16.
(주64) New York Times, "Thai Leader Struggles at the Center of a Storm", 2009-5-5.
(주65) AFP, "Thailand to borrow $22.9 bln for stimulus: minister", 2009-5-5.
(주66) MCOT, "Bt2,000 cheque dispersals end at Bangkok City Hall", 2009-3-28.
(주67) Bangkok Post, "Community land title deeds in pipeline", 2010-7-5.
(주68) Bangkok Post, "Govt to introduce community land title deeds", 2010-7-5. |
2.2. 공공보건 정책
아피싯은 WTO의 지적재산권 규약을 따른다면서, 군사정권 시절 수라윳 쭐라논(Surayud Chulanont) 과도총리 정부가 실시했던 제약업에 대한 강제실시권(compulsory licensing) 정책을 그대로 이어갔다. 하지만 2009년 3월, 만일 미국이 태국의 통상지위를 하향조정한다면 강제실시권을 연장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주69)
아피싯은 반대의 목소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공보건 보호 지지를 지속했고, 국회에 계류 중이던 "의료사고 피해자 보호법안"(Medical Malpractice Victim Protection Bill)을 상정시켰다. 또한 국회에 법안을 최종적으로 제출하기 전에, 초안을 다듬을 국가 위원회도 설치했다. 그는 "국민 의료보호 네트워크"(Network for People's Medical Protection) 및 "의료종사자 연맹"(Federation of Medical Workers) 대표자들과 만난 직후, "법안의 논란 해소를 위해 모든 당사자들 간에 대화와 협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양측이 법안을 개선시키기 위한 국가 위원회 설치에 동의했다.(주70)
2.3. 정보통신 및 언론 분야
아피싯의 정보통신기술(ICT) 부문의 정책에는 정부가 군주제를 비판한다고 판단하는 인터넷 사이트들에 대한 검열을 포함하고 있다. 라넝락 수원차위(Ranongruk Suwunchwee, ระนองรักษ์ สุวรรณฉวี) 정보통신부 장관은 2009년에 국영 이동통신 회사들인 TOT 및 CAT 관계자들과 만나 정부의 정책을 설명했다. 라넝락 장관은 태국 내 웹사이트들의 접근차단 작업을 하는 정부 내 부서를 위해 4,500만 바트(약 13억원)의 예산을 사용키로 했다고 말했다. 2009년 9월경에는 1만 7,000건 이상의 "위법적" 웹사이트들이 차단됐다.(주71)
"국가 이동통신위원회"(National Telecommunications Commission: NTC)가 추진하던 3G 2.1 기가헤르츠 주파수 허가 사업은 국영기업인 "CAT 텔레컴"(CAT Telecom)과 TOT가 NTC의 면허발급권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가처분신청 소송에서 승소한 직후, 사업이 취소되었다. TOT와 CAT는 면허발급이 세수도 감소시킬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다.(주72) 이 사업의 입안자들은 원래 면허발급을 "2006년 쿠테타" 이전에 끝마치려 예정하고 있었다.(주73) 법원의 명령이 있은지 5일 후, 정부는 TOT가 3G 통신망을 확장할 수 있도록 199억 바트의 예산을 승인했다.(주74)
태국에서는 정부가 TV와 라디오를 포함한 대중매체들을 사용할 권리를 갖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 대중매체는 국민들에게 정부의 정책 및 입장을 홍보하는 수단으로서 그 중요성이 점점 더 부각되고 있다. 하지만 대중매체에서 객관적 정보와 편향된 정보를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미디어들은 국민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전달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의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한 수단으로도 활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가 대중매체를 이용하는 일이 정당한지 혹은 어느 선까지 활용할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주75)
(주71) Bangkok Post, "Last One in Again", 2010-1-6.
(주72) WSJ, "Thai Telecom Regulator Appeals 3G Injunction", 2010-9-17.
(주73) Businessweek, "Thai Court Upholds Injunction Halting 3G License Sale", 2010-9-23.
(주74) Reutors, "Thai govt agrees $650 mln 3G budget for state firm", 2010-9-28.
(주75) The Nation, "Why is the military educating us about democracy?", 2009-7-3. |
2.4. 국방정책
아피싯 정부는 국방예산으로 2011년에 1,700억 바트를 편성했고, 2010년에는 1,540억 바트를 편성했다. 2011년의 국방예산으로는 1,950억 바트가 예정되어 있는데, 이는 수라윳 총리 시절에 우선적으로 배정했던 "JAS 39 그리펜" 전투기 6대를 구매하는 비용도 포함한 것이다.(주76) 아누퐁 파오찐다(Anupong Paojinda) "왕립 태국육군"(RTA) 사령관은 "2006년 쿠테타" 이전에 GDP의 1% 선이던 군사비를 2%까지 증액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주77)(주78)
2009년도 군 정기 인사이동에서는 찌라뎃 모깟밋(Jiradet Mokasmit) 중장이 "육군 제1군구" 사령관에 임명된 바 있고, 위왈릿 촌삼릿(Weewalit Chornsamrit) 중장이 "육군 제2군구" 사령관에 임명되었다.(주79) 2010년도 군 정기 인사이동에서는 아누퐁 육군사령관의 후임으로 빠윳 짠오차(Prayuth Chan-ocha) 대장이 취임했다.
2.5. 태국 남부 반군
2009년 7월, 아피싯은 자신의 정부가 출범한 이후 태국 남부의 폭력사태가 줄어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이 이 지역의 경제개발에 힘을 기울인 덕분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빳따니(Pattani, 파타니) 도에 위치한 "송카왕자 대학"(Prince of Songkhla University, 송클라왕자 대학)의 싱크탱크인 "딥 사우스 와치"(Deep South Watch)는 그의 주장을 반박하고, 실제로는 2009년 초부터 폭력사태가 증가했음을 보여주었다.(주80)
2010년 2월, 아피싯 정부는 연말까지 반군의 폭력사태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까싯 삐롬야 외무부장관은 역내에 "낙관적 분위기"가 있다고 말했다.(주81)
국제 인권감시 기구인 "휴먼 라이츠 워치"(Human Rights Watch: HRW)는 태국 정부가 남부에서 보안군의 인권침해를 줄이는 데 실패했다고 비판했다. 태국 남부에서는 군대가 면책 특권을 갖고 작전에 임한다는 것이다. HRW는 해당 지역에서 인권침해로 인해 기소된 군인이 단 한명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HRW는 이러한 국가가 용인하는 인권침해로 인해 반군들이 보다 많은 신병들을 모집할 수 있으며,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주82)
2.6. 이주민 정책
아피싯 정부는 새로운 이주노동자 관렵법을 제정하여, 약 150만명에 달하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새로운 정책을 취했다. 이 법률에 따르면, 이주노동자들은 모국 정부로부터 신분증명서를 발급받아 제출하던가 아니면 체포되어 송환당하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정책은 최초 2010년 2월28일부터 시행할 예정이었지만, 수십만 명의 이주노동자들이 기한을 맞추지 못하자 마감일이 3월2일로 늦춰졌다.(역주)
미얀마와 캄보디아, 라오스 및 여타 국가들에서 온 태국 내 이주노동자들은 전체 노동시장의 5~10%를 잠식하고 있기는 하지만, 태국이 중국과의 임금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인권단체들은 과거 착취와 강간, 태국 정부의 임의 구속 등이 빈발함으로써, 노동자들이 자신을 드러내길 꺼려한다고 말한다. 일부 이주도동자들은 자신들의 활동정보가 공개됨으로써, 본국에 두고 온 가족들이 위협에 노출되어 본국 정부로부터 자신들의 수익이 착취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갖고 있다.(주83)
2.7. 왕실모독처벌법
아피싯 정부는 왕실의 정치개입에 관한 비판적 논평들을 억누르기 위해 특별한 조직을 출범시켰다. 이 기구는 국민들이 그러한 비판자들을 고발할 수 있도록 하는 신고용 웹사이트도 운영한다. 군주제를 비판한 혐의로 폐쇄된 웹사이트들은 4,800건 이상에 달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비판을 불러일으키면서 논란거리가 되었다.(주84)
아피싯의 "민주당"(Democrat Party)은 새롭게 개정된 <왕실모독 처벌법>(lese majeste law)을 통과시켰다. 이 법률은 인터넷 상에서 태국 군주제에 대해 "오만한 논조"를 보이거나 부정확한 정보를 공개할 경우, 징역 3~20년형과 20만~80만 바트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주85) "민주당"은 이와 더불어 29개의 웹사이트들을 군주제를 위협하는 위험한 컨텐츠를 가진 사이트들이라고 고발했다.(주86) 아피싯 정부는 국민들이 국왕을 위해하는 사이트들을 신고할 수 있도록 "국왕지킴이"(www.protecttheking.net) 사이트도 운영하고 있다.
2009년 3월, 온라인 신문인 <쁘라차타이>(Prachatai, ประชาไท: http://www.prachatai.com)가 군주제를 헐뜯었다는 이유로 정간을 당하기도 했다. 아피싯은 이 사건 이틀 후 사전에 엄선된 태국 인터넷 사용자 대표들을 만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란 말을 하면서, 새로운 인터넷 규범과 규준을 마련할 것이라 말했다.(주87) 하지만 "태국 추밀원"(Privy Council: 국왕 자문기구) 위원인 깜톤 신타와논(Kamthon Sindhavananda) 예비역 공군소장은 아피싯 정부의 자세가 너무 "수세적"으로 보이며 대응도 느리다면서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아피싯은 "군주제 보호를 위한 메카니즘을 개선시킬 것"을 다짐하고, "군주제 수호야말로 정권의 최우선 과제"임을 재확인했다.(주88)
2009년 2월, 아피싯은 정취적 성과를 위해 <왕실모독 처벌법>이 위반되는 사례들이 존재한다고 하면서, "이 법을 확고히 할 방법을 모색할 것"이라 말했다.(주89) 그리하여 2010년 1월에 <왕실모독 처벌법> 적용을 위한 자문위원회가 설치됐다.(주90)
아피싯 정권이 실시한 검열정책에는 군주제를 비판한 외국의 웹사이트를 폐쇄한다든가 외신 언론들을 차단하는 일도 포함됐다. 아피싯 정부가 이러한 검열의 명분으로 제시한 것은 "국가안보" 및 "군주의 수호"였다. 하지만 국제 인권단체들은 아피싯 정부가 인권을 침해하고 있으며, 정치적 동기에서 기인한 검열을 실시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빠차타이>의 편집인 찌라눗 쁘렘차이폰(Chiranuch Premchaiporn)을 구속한 일은 대표적 사례가 되었다. 그녀는 해당 웹사이트에 올라온 군주제에 대한 비판 글을 재빨리 삭제하지 않았다 하여, 새롭게 제정된 <컴퓨터 범죄법>(Computer Crimes Act)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그녀가 구속되었을 때, 아피싯은 연설을 통해 자신이 언론의 자유를 증진시키기 위해 일하고 있다고 연설하기도 했다. 찌라눗의 혐의는 최대 징역 50년형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후로도 찌라눗은 언론의 자유에 관한 회의인 "자유 속의 인터넷 2010"(Internet at Liberty 2010)에 참여하여 또다른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는 그녀를 "양심수"(prisoner of conscience)로 불렀고, 뉴욕에 본부를 둔 "언론인보호위원회"(Committee to Protect Journalists: CPJ)는 그녀의 구속을 비난했으며, "국경없는 기자회"(Reporters Without Borders)는 즉각적인 석방을 촉구했다.(주91)(주92)(주93) 이에 대해 아피싯은 자신이 단지 법률을 위반한 언론에 대해 사법적 조치를 취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주84) Telegraph, "Ten years jail for "insulting" Thai king", 2009-4-3.
(주85) The Nation, "Democrats propose law to crack down on lese majeste", 2008-11-19.
(주86) The Nation, "List of 29 controversial websites".
(주87) The Nation, "Better ways to save thai online freedom", 2009-4-6.
(주88) Bangkok Post, "PM pledges new drive to protect King", 2010-2-7.
(주89) FT, "Lunch with the FT: Abhisit Vejjajiva", 2009-2-15.
(주90) Prachatai, "Abhisit Sets up Advisory Committee on National Security Cases Involving the Monarchy", 2010-1-14.
(주91) Prachatai, "AI Demands the release of online news editor", 2010-9-25.
(주92) CPJ, "Police arrest Thai Web editor on anti-crown charge", 2010-9-24.
(주93) Reporters Without Borders, "Prachatai editor released on bail", 2010-9-24. |
2.8. 탁신 친나왓 전 총리 문제
아피싯 총리는 취임 이후 줄곧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전 총리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보였다. 그는 자신의 정부대변인인 빠니탄 와타나요꼰(Panithan Wattanayakorn)을 통해, 탁신이 체류 중인 해외에서 레드셔츠(UDD) 운동에 자금지원을 했다며 비난했다. UDD 지도부와 탁신은 이같은 주장을 부인하고 정부측의 증거제출을 요구했다. 하지만 수텝 트억수반(Suthep Thuagsuban) 안보담당 부총리는 아직까지도 정부측의 주장을 뒷받침할만 한 자금흐름에 관한 증거는 아무 것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주94)(주95) 이후 태국의 일간지 <마띠촌>(Matichon)은, "민주당"의 "익명을 요구한 정보원"이 레드셔츠에 자금지원을 한 수많은 익명의 탁신 지지자들이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마띠촌>은 가령 전직 전직 총리인 "S" 씨라든가, 부동산 재벌로서 역시 전직 총리인 "P" 씨, 음료사업을 하는 "P" 씨, 백화점을 소유한 "S" 씨, 변호사인 "W" 씨 등을 열거하는 방식이었다.(주96)
아피싯은 레드셔츠 운동에 대한 탁신의 대표성을 부인하고, 탁신과의 직접적인 교섭도 거부했다. 그는 또한 탁신이 부유하고 부정부패한 인물이라면서, 대부분 농민과 노동자들로 구성된 레드셔츠 지지자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이념적 측면에서나 모든 면에서 기묘한 일이라고 비꼬았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위선이 보다 덜 엘리트적인 정부가 이끄는 공정한 정치를 요구하는 레드셔츠들의 입장을 갉아먹는 것이라고도 말했다.(주97)
탁신 일가의 재산몰수와 관련된 "대법원" 판결이 나기 며칠 전, 아피싯은 만일 탁신이 뉘우친다면 용서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라 발언하기도 했다.(주98)
(주94) The Nation, "Govt continues to check red-shirt funds rumour", 2010-2-11.
(주95) Bangkok Post, "Chavalit 'gets no money from Thaksin'", 2010-2-10.
(주96) Matichon, "โฆษกปชป.ปูด3เส้นทางเงินไหลป่วนไทย แต่ไม่อายัดบัญชีอ้างต้องขยายผล "มาร์ค"งงลูกพรรคแฉตัวย่อ", 2010-2-12.
(주97) The Diplomat, "Thailand's Blood Red Protest", 2010-3-21.
(주98) The Nation, "Thaksin must show remorse before negotiations: PM", 2010-2-23. |
3. 외교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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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009년 12월 25일, 미국의 피츠버그를 방문한 아피싯 총리 부부. |
3.1. 일본 : 긴밀한 태-일관계
일본의 오카다 카츠야(Katsuya Okada, 岡田克也) 외상은 태국과 일본 사이의 강고한 유대를 재확인하면서, 일본은 여전히 태국 경제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양국 간에는 투자 및 통상에 관한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회담이 진행됐다.(주99)
(주99) Nation, [6], 2010-8-23. |
3.2. 캄보디아
3.2.1. 쁘레아위히어 사원 갈등
아피싯은 "옐로우셔츠 운동"(PAD) 지도자였던 까싯 삐롬야를 외무부장관으로 임명했다. 까싯은 외무부장관이 되기 전에 반 캄보디아 운동가였고, 캄보디아의 훈센(Hun Sen) 총리를 "조폭"(gangster)이라 불렀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까싯은 외무부장관이 된 후 훈센에게 서한을 보내 자신의 발언에 오해가 있다면서, 자신이 "조폭"이라 부른 것은 "용맹하고 야성미 있으며, 통도 큰 신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해명했다.
2009년 4월, 캄보디아와 태국 국경에 위치한 "쁘레아위히어 사원"(Preah Vihear temple)을 사이에 두고 비교적 큰 규모의 총격전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최소 2인의 태국 군인과 2명의 캄보디아 군인이 사망했다. 캄보디아 정부는 최소 4인의 태국군을 사살하고 10명 이상을 포로로잡았다고 발표했지만, 태국 측은 이를 부인하면서 자국 군대에서는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역주) 양측은 상대방이 먼저 발포를 해서 총격이 벌어졌다고 주장했다.(주100)(주101)
3.2.2. 대사 소환
2009년 11월 4일, 캄보디아는 탁신 친나왓 전 태국 총리를 자국 정부 및 훈센 총리 개인의 경제자문위원으로 위촉한다고 발표했다. 탁신은 당시 두바이(Dubai)에 망명 중이었고, 캄보디아의 자문위원으로 임명된 뒤에도 그곳에서 계속 거주를 하면서 캄보디아를 3차례 방문했다.
아피싯 총리는 이에 항의하여 다음날인 11월 5일에 캄보디아 주재 태국 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했다.(주102) 그는 캄보디아가 태국의 내정에 개입했다고 비난하면서, 양국간에 합의했던 협정들도 재검토할 것이라 말했다.(주102) 이러한 조치에 대해 캄보디아도 대응하여 동일하게 자국 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했다.(주103)(주104)
캄보디아의 속안(Sok An) 부총리 겸 관방장관은 탁신의 경제자문위원 임명은 캄보디아의 내정 문제라고 말했다.(주104) 또한 캄보디아 정부의 대변인 한사람은 "우리는 탁신 전 총리의 경제개발 경험을 배우길 바라며, 그의 경륜이 우리나라의 경제개발에 공헌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주105)
캄보디아와 태국이 상호간에 대사를 소환한 일은, 태국군이 쁘레아위히어 사원을 점령했던 1940-1941년 사이의 "프랑스-태국 전쟁"(Franco-Thai war) 이후 발생한 일 중 가장 심각한 외교적 사태였다.(주104)
양국 대사 소환 발생 직후에 실시된 한 여론조사를 보면, 태국과 캄보디아 사이의 긴장관계로 인해 아피싯의 지지도가 3배나 급상승했다.(주106) 하지만 그의 인기는 오래가지 못했고, 곧 급격하게 떨어졌다.(주107)
(주102) BBC News, "Thai envoy recalled from Cambodia", 2009-11-5.
(주103) eTaiwan News, "Recall of envoys escalates Thai-Cambodian tensions", 2009-11-5.
(주104) Xinhua, "Cambodia recalls ambassador to Thailand over Thaksin issue", 2009-11-5.
(주105) BBC, "Ex-Thai PM arrives in Cambodia", 2009-11-10.
(주106) The Nation, "PM's popularity soars 3 times for downgrading ties", 2010-11-6.
(주107) RYT9, "กรุงเทพโพลล์: ความเห็นประชาชนต่อสถานการณ์ทางการเมืองในปัจจุบัน", 2010-11-25. |
3.2.3. "스파이"(간첩) 공방
2009년 11월 11일, 시와락 초티퐁(Sivarak Chutipong)이라는 태국인이 "캄보디아 경찰"에 간첩 혐의로 체포됐다. 그의 혐의는 탁신 전 태국총리의 캄보디아 방문 일정과 관련하여, 비행스케줄을 프놈펜 주재 태국대사관의 깜롭 빨라왓위차이(Kamrob Palawatwichai) 1등 서기관에게 넘겨준 것이었다. 시와락은 캄보디아 공항들의 관제업무를 담당하는 태국계 기업인 "캄보디아 항공교통서비스"(Cambodia Air Traffic Service: CATS) 사에서 근무하는 엔지니어였다.(주108) 시와락은 자신이 간첩행위를 했다는 것을 부인했고, 태국 정부는 시와락이 무고한 사람이며 그의 구속은 태국-캄보디아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기 위한 탁신과 캄보디아 정부의 음모라고 주장했다.

(사진) 캄보디아의 훈센 총리가 사면장 수령 행사를 위해 자신의 관저로 찾아온 시와락 초티퐁의 손을 맞잡고 집안으로 안내하고 있다.
깜롭 빨라왓위차이 1등서기관은 프놈펜에서 추방됐다. 시와락은 자신의 간첩혐의가 무죄임을 주장하면서, 깜롭 1등서기관에게 진실을 증언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깜롭은 이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언론들 앞에서 이 문제에 관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대신 차와논 인타라꼬만야숫(Chavanond Intarakomalyasut) 태국 외교부 차관이 나서, 깜롭 1등서기관이나 시와락에게 잘못은 없지만 그렇다고 깜롭이 입장을 밝히는 일도 없을 것이라 말했다.(주109) 이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시와락의 모친이 태국 TV들의 관심을 받았고,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도와달라고 정부측에 호소했다.
시와락은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탁신 전 총리가 캄보디아 정부에 개인적으로 그의 사면을 부탁했고, 시와락은 이후 노로돔 시하모니(Norodom Sihamoni) 캄보디아 국왕의 사면령을 받아 석방된 후, 모친과 함께 귀국했다.
Suthep Thaugsuban) 안보담당 부총리는 나중에, 시와락이 자신의 수감에 대해 발언하면서 아피싯 정부를 흠집내는 발언을 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주110) 전직 정보국장 및 외부부장관을 역임한 바 있는 빠송 순시리(Prasong Soonsiri) 역시, "이 사건은 처음부터 예정된 시나리오대로 진행된 것"이라면서 수텝 부총리를 거들었다.(주111)
2009년 12월 18일, 레드셔츠 운동의 지도자 중 1명으로 야당인 "프어타이 당" 소속 짜뚜뽄 뽐빤(Jatuporn Prompan) 의원은 까싯 외무부장관이 아피싯 총리에게 보낸 메모를 입수해 공개했다. 이 메모에는 명백하게 탁신 암살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에 대해 차와논 인타라꼬만야숫 외무부 차관은, 그런 메모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짜뚜뽄 의원이 일부분만 발췌해 침소봉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주112)
(주108) Phon Penh Post, "http://www.phnompenhpost.com/index.php/2009111329536/Online-Edition/thai-national-arrested-for-espionage.html", 2009-11-13.
(주109) The Nation, "Irate Sivarak demands answers", 2009-12-15.
(주110) Bangkok Post, "Sivarak's mum threatens to sue Suthep", 2009-12-17.
(주111) The Nation, "Mother justifies seeking royal pardon for her son", 2009-12-10.
(주112) Phon Penh Post, "Thai MP accuses his govt of plotting to murder Thaksin", 2000-12-24. |
3.2.4. 관계정상화
2010년 8월, 탁신 전 총리가 캄보디아 정부의 경제자문위원 직을 사임했고, 이후 태국과 캄보디아 양국은 외교관계를 복원했다.(주113)(주114)
3.3. 베트남
2009년 7월 10일, 아피싯 태국 총리와 응우옌 떤중(Nguyễn Tấn Dũng) 베트남 총리는 회담을 갖고, 세계경제위기에 대한 대처방안을 논의했다. 아피싯은 하루 일정으로 하노이를 방문하여 응우옌 떤중 총리와 회담을 가졌다. 의장대의 사열을 받은 양국 총리는, 이후 1시간 반 동안 비공개 회담을 가졌다.(주115) 응우옌 떤중 베트남 총리는 5분 정도 걸린 사진촬영 시간에, "아피싯 총리의 베트남 방문이 양국간 우호관계를 심화시키고, 다양한 교류협력을 증진시킬 것"이라 말했다.
7월 9일, 베트남 외무부의 레 중(Le Dung) 대변인은 기자들에게 정례 브리핑을 하는 자리에서, 양국 총리들이 경제위기 극복방안을 논의하게 될 것이라 밝힌 바 있었다.(주116) 그는 메콩 강(Mekong River)과 관련된 쌀 교역과 관광, 물류 등이 의제로서 논의될 것이라 밝혔다.(주117)
태국은 세계적인 곡물 수출국인데, 베트남도 곡물수출에서 세계 제2위를 기록하고 있다. 태국과 베트남은 중요한 교역상대국이기도 하다. 2008년도의 경우 양국간 교역량은 65억 달러에 달했다. 태국은 또한 베트남에 대한 외국인투자 부문에서 9위를 기록하며, 총 60억 달러 정도를 투자했다. 지난 10년간 베트남은 연평균 7% 정도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2009년 상반기에는 3.9% 성장에 그쳤다.(주118)
3.4. 사우디 아라비아
2008년 8월, 태국 "특별수사국"(DSI)은 몇몇 사우디 아라비아 외교관들에 대한 살인 용의자 한사람을 찾아냈다고 발표했다. 이 "민감한" 사건은 태국의 일부 힘있는 인사들이 공적 조사를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20년 동안 끌어오면서, 태국-사우디 아라비아 사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 사건은 1990년 방콕 한복판에서 괴한이 3인의 사우디 아라비아 외교관들에게 총격을 가한 사건이다.
아랍인 한사람으로만 알려졌던 용의자의 본명이 "아부 알리"(Abu Ali: 알리의 아들이란 의미)일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하지만 그의 소재는 파악되지 않았다.(주119) 태국 DSI는 구속영장을 발부하고 "인터폴"(Interpol)에도 용의자 체포를 위한 도움을 요청했다. DSI는 또한 "푸른색 다이아몬드"가 최초의 위치에 존재했었는지에 대한 증거도 없다고 주장했다. 푸른색 다이아몬드는 원래 이 보석절도 사건의 핵심적 물건으로서, 범인의 범행동기로 추정되던 것이다.(주120)
2010년 8월, 아피싯 총리는 치앙마이(Chiang Mai) 도 경찰청장이던 솜킷 분타넘(Somkid Boonthanom, สมคิด บุญถนอม) 경찰 중장을 경찰청 차장으로 승진시켰다. 솜킷 중장은 과거 모함메드 알 루왈리(Mohammad al-Ruwaili)의 살인사건에 관련됐다는 비난을 받고 있었다. 모함메드 알 루왈리는 푸른 다이아몬드 절도사건을 수사하던 사우디 아라비아 요원이었다. 솜킷의 승진을 놓고 사우디 아라비아 대사관은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본 대사관은 이 사건에 고발당한 고위급 인사가 더욱 높은 자리로 승진한다는 것에 대해서, 관련 사법적 소송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깊히 우려하는 바이다..... 이러한 우려 하에서, 쌍무간 관계회복을 위해 오래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양국이 최근에 노력해오던 모든 시도가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주121) |

(사진) 아피싯 정권의 "실질적 총리"라고도 불리는 수텝 트억수반 안보담당 부총리.
수텝 트억수반 부총리는 이 문제를 해명하는 서한을 사우디 아라비아 정부에 보낼 것이라 밝혔다. 그후 까싯 삐롬야 외무부장관은 나빌 아쉬리(Nabil Ashri) 대리대사를 만난 후, 자신이 이 문제에 대해 모든 것을 설명하여 별도의 서한은 필요없을 것이라 발표했다. 이후 아피싯 총리는 외무부에서 문서화된 형태로 설명을 해서 보낼 예정이지만, 오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수고스러운 번역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라 말했다.(주122) 하지만 아피싯은 나빌 아쉬리 대리대사를 만났고, 기자회견을 통해 사우디 측이 잘못 알고 있다는 발언을 했다. 이에 대해 사우디 대사관측은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하여 아피싯의 화술을 비판했다.
나빌 대리대사는 아피싯 총리와의 면단결과에 대한 언론보도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피싯 총리에 따르면 나빌 대리대사가 "그릇된 정보를 전달받았다"(ill-informed)고 하는데, 아피싯 총리가 솜킷 분타넘 경찰 중장을 승진시킨 것을 보면, 아피싯 총리야말로 "이 문제에 대해 불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주123) |
결국 솜킷은 자진사퇴했다. 수텝 부총리는 그의 희생정신을 칭송하면서, "그의 자진사퇴가 태국과 사우디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기 쉽게 해줄 것"이라 말했다.(주124)
(주119) Bangkok Post, "Name dropping in the Saudi murder case", 2009-8-6.
(주120) Time, "Thailand's Blue Diamond Heist: Still a Sore Point", 2010-3-7.
(주121) Royal Embassy of Saudi Arabia - Bangkok, "OFFICIAL STATEMENT BY THE ROYAL EMBASSY OF THE KINGDOM OF SAUDI ARABIA BANGKOK – THAILAND", 2010-9-3.
(주122) Reuters, "The curse of the blue diamond", 2010-9-22.
(주123) Royal Embassy of Saudi Arabia - Bangkok, "Press Release 4", 2010-9-19.
(주124) Bangkok Post, "Somkid declines promotion to help Thai-Saudi ties", 2010-9-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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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거, 태국에서는 막강한 산유국의 외교관들도 총을 맞는 판이니..
우리 회원님들은 하여간 태국에 가시면
당분간 "크세" 회원이라고 말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 ^
하여간 사우디 대사관의 성명서가 참 멋지구만요..
그나저나 지난번에
태국에서 강간을 당한 후 살해당한 한국인 여성에 대한
사후 수사결과는 어찌되었는지 알 수가 없는데..
누가 혹 아시는 분은 안계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