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서 고종은 1873년 경복궁 깊숙한 곳에 건청궁과 옥호루를 짓기 시작하였고 이는 고종이 아버지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치를 하고픈 고종의 생각이었다.
22살로 장성한 고종은 더 이상 아버지가 정치일선에 나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불편하였다. 친정을 선포하고는 싶었지만 순순히 물러날 아버지가 아니기에 선뜻 나설수가 없었을 것이다. 만약 나선다면 고종은 불효를 행하는 것이기에 그리 못하는 것을 파악한 명성황후는 자신이 대신 나서서 허물을 쓰는 것이 났다고 판단, 흥선대원군을 권좌에서 오른지 10년만에 물러나게 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고종은 1873년 11월 5일 친정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1874년 음력 2월 8일 명성황후는 왕비가 된지 8년만에 원자 척을 낳게 되고 훗날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이시다. 1875년 원자 척이 왕세자로 책봉되고 나서야 점차 안정이 되어갔다. 하지만 1876년서부터 본격적으로 세계각국 열강들이 조선에 들어오게 되면서 급기야는 일본이 운요호 사건을 빌미삼아 위협적으로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체결함으로서 이와 동시에 서양 여러 나라와 통상을 시작하게 되고,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서양의 신문명을 수입하는 반면에 세계열강의 침략을 받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한참 나라가 잠잠해지다가 안기영이 흥선대원군의 서자 이재선을 왕으로 추대하여 국왕을 폐위하고 명성황후를 운현궁에 맡기고 개화파 일당을 제거하려 한 이른바 안기영역모사건으로 안기영과 이재선을 비롯한 사건에 연루된 자들이 모두 사사된다.
1882년 음력 2월 민태호의 여식이 왕세자빈으로 간택이 되면서 왕실이 안정되어 가고 있을때쯤 1881년 일본의 후원으로 신식군대 별기군이 창설되면서 이따른 불이익과 13개월간 밀린 군료, 여기에 흥선대원군의 수구파, 고종과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개화파의 두 중심으로 나뉘게 되면서 대립하게 되고 민씨정권이 추진한 문호개방정책에 따라 일본을 비롯한 구미제국과의 통상관계가 수립되고 이러한 것을 계기로 개화파와 수구파간에 반목이 더욱 더 심해지면서 나라가 위태로워지자 선혜청당상 민겸호와 경기도 관찰사 김보현에게 깊은 원한을 가지게 되면서 급기야는 1882년 6월 5일 임오군란을 일으켜 먼저 흥인군과 민창식을 죽인 다음 창덕궁 돈화문에 육박한 후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해 대궐로 난입했다.
결국 민겸호와 김보현을 찾아내 살해한 뒤 나머지 개화파들도 찾아내어 닥치는대로 죽이고 있었다. 이미 이들은 통제가 안되는 상황이었고 위기를 느낀 명성황후는 무예별감 홍재희(홍계훈)의 도움으로 상궁 옷으로 갈아입고 윤태준 집에 피신한 뒤 6월 10일 충주 장호원으로 피신갔다. 그런뒤 흥선대원군이 대궐에 입궐하면서 모든 품사는 고종이 대원군에게 맡기도록 지시하고 대궐에는 다시 운현궁 신복들로 가득찼고 대원군은 그동안 고종과 명성황후가 해놓은 개화파와 정책들을 모조리 갈아치웠다. 그럼과 동시에 고종은 연금된채 밖에 한 발자국도 못나가는 상황이 되버렸고, 대원군은 마지막 남은 며느리의 목숨만은 살려주기 위해 통제하기 힘든 김춘영을 비롯한 구식군대를 해산하기 위한 일환으로 명성황후의 국상을 선포하였다. 그들은 믿을 수 없었지만 대원군이 이미 선포한지라 그들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대궐 안팎으로 명성황후가 살아있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떠돌았고, 대원군은 왕비의 시신을 찾는다는 명목하에 대궐 밖에 사람을 풀어 민씨척족들을 모두 제거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런 때에 개화파들은 청나라로 가있던 김윤식과 손을 잡고 청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면서 명성황후는 51일만에 대궐로 환궁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되면서 대원군은 51일만에 다시 정권을 내놓고 마건충이 대동한 청에 의해 본국으로 압송된다.
이로 인해 일본은 자신의 피해 보상을 요구하면서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였고,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게 되며 조선의 내정간섭에 빌미를 제공하게 되며, 후에 갑신정변의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 1884년 10월 17일 개화파인 김옥균, 박영효를 필두로 일본과 손을 잡고 청을 몰아내기 위해 정변을 일으키지만 3일만에 수포로 돌아간다. 1885년 납치된지 3년만에 대원군은 다시 조선으로 환국한다.
1886년 명성황후는 내,외명부 대신부인들에게 세금을 거둬들이면서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 이화학당, 배화학당 등 잇따라 교육 및 보건 사업에도 힘쓰며 이화학당때는 이름을 하사하기도 했다. 또한 이때부터 미국의 언더우드 부인을 만나게 되는데 자신의 주치의로 임명하면서 세계각국의 문화와 문물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들으며 이 것을 어떻게 조선에 적용시킬것인가 까지 고심하기에 이른다. 1894년 1월 10일에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고, 6월 23일에는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6월 25일에는 갑오개혁이 일어나 개화당이 집권하게 되면서 종래의 문물제도를 근대적 국가형태로 고친 사건이다. 그런데 그 이전 일인 6월 21일!
새벽 4시 20분경 경복궁 건춘문에서 총성이 울리면서 고종과 명성황후를 손에 넣으려는 일본이 무력으로 남의 나라의 궁궐을 침입하기에 이르렀고 고종과 명성황후는 피신도 못한채 함화당에 있었다. 그들은 고종과 명성황후를 지켜준다는 명목하에 대궐을 점령하면서 다른 한편 운현궁에서도 총성이 울렸는데 오카모토가 대원군에게 정권을 잡을 기회를 줄 터이니 손을 잡자고 했으나 완고한 보수정치가인 대원군이 손을 잡을리 없었다. 대원군은 스기무라에게 조선의 땅을 차지하지 않겠다는 명분으로 서약하고 말았지만 이들은 이미 조선왕궁을 가진데 이어서 이틀 뒤 청국과 피할 수 없는 일전을 겨루게 된다. 이른바 청일전쟁!
1895년 4월 17일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랴오둥반도를 차지하기게 이른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공사하고 있는데 랴오둥반도를 차지한 일본이 거슬리게 된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명성황후는 러시아와 손을 잡고 일본에 압력을 넣어 프랑스, 독일과 손을 잡고 일본에 압력을 넣어 급기야 11월 8일 랴오둥반도를 청국에 다시 돌려주게 되면서 일본 국내 여론은 큰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기회를 잡은 고종과 명성황후는 친일파로 구성된 내각을 단숨에 친러세력을 구성된 인사들로 단행하고 일본이 바꿔놓았던 제도들을 단번에 갈아치운다.
명성황후를 필두로 한 조선의 기민한 대응에 일본은 당황해한다. 위기에 몰려 조선에서 나가게 생긴 일본은 명성황후를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1895년 음력 8월 19일 고종과 명성황후는 조선군 훈련대를 해산명령을 내린다. 시해계획을 22일로 예정했던 일본은 조선군 훈련대가 19일 해산되자 시해계획을 20일로 앞당긴다.
1895년 새벽 2시경 먼저 일본은 공덕리 아소정으로 가 오카모토가 대원군을 설득하지만 대원군이 반항하며 가지 않겠다고 하자 납치하기에 이르고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경복궁이었다. 미우라 고로를 필두로 시바 시로, 아다치 겐조, 기구치 겐조 등 일본군수비대와 담당경찰관 친일 조선인, 그리고 훈련대의 우범선, 이두황, 이진호 등 3대대장과 전 군부협판 이주회를 포섭한다. 결국 그들은 경복궁 광화문에 새벽 5시 경에 도착!
홍계훈과 안경수가 나섰지만 15여분만에 일본군에 의해 살해되고, 이들은 경복궁 전체 조감도에서 둘로 나뉜 뒤 고종의 거처인 건청궁을 포섭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고종과 왕세자 척을 협박하며 급기야 왕세자 척은 일본이 휘두른 칼에 등을 맞고 쓰러져 의식을 잃었고 고종 역시 일본인의 폭력으로 인해 잠시 쓰러졌다. 고종은 쓰러지기 직전 오카모토, 스즈키, 와타나베가 왕비를 잡으로 옥호루로 갔다.“라고 말한 뒤 의식을 잃었다. 이들은 심지어 왕세자빈 민씨에게도 폭행을 가한다. 이들은 왕비의 침소인 옥호루를 점령하면서 밖으로 나가는 문을 일본군 보초 2명씩 일치감치 통제했고 왕비를 찾기 위해 살기등등하게 대궐을 자기 집 안마당처럼 휘젖고 다녔다. 옥호루 안에 진입한 일본인들은 10여명의 상궁들을 뜰 아래로 머리채를 잡은채 내던졌고 궁내부대신 이경직이 두 팔로 가로막자 칼로 베어버려 죽여버렸다. 이 기회를 틈타 명성황후는 뜰 아래로 황급히 도망쳤다. 이 광경을 본 한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쫓아가 바닥에 넘어뜨린 뒤 발로 세 번 짓밝고 칼로 여러번 난자해 살해한 뒤 급기야는 여러명이 한 나라의 왕비를 겁탈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명성황후의 시체를 뒤 쪽 후원으로 데려가 석유를 뿌려 불에 태운 뒤 일부 뼈를 향원정에 뿌렸다. 이 끔직한 사건은 러시아 기사 세레진 사바틴에 의해 소생히 밝혀져 본국으로 넘어갔고 국제적으로 큰 사건이 되면서 일본 정부가 개입했다는 것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사태의 여론이 심각해지자 일본 정부는 이들을 히로시마에 있는 법원에 데려가 재판했지만 이유 불충분으로 풀려나게 된다.
이러한 위기 등으로 을미의병, 단발령 등 사건이 터지게 되고,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왕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며 1년간 머무르게 된다.
고종은 1897년에 2월 덕수궁으로 환궁하며 10월 12일 대한제국을 탄생시키며 11월 22일(양력)중전 민씨에게 “명성(明成)”이라는 시호와 함께 황후의 지위를 내리게 하고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지게 되면서 한 나라의 왕비로서의 존엄과 위엄을 갖추게 된다.
1851년에 태어나 어머니를 모시고 살다가 흥선대원군 정치계략에 의해 왕비에 자리에 올라 나라를 구하려 했지만 일본에 의해 비참히 살다간 명성황후!
일본인들에 의해 그녀를 죽이기 위한 정당성 된 글들이 쇄도해 몇 년전 까지만 해도 우리는 그녀를 악녀로 취급하고 알아 왔고 명성황후 보다는 민비로 더 알려져 왔던게 사실이다.
이젠 그녀를 한 나라의 진정한 왕비로 인정해야 하지 않을 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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