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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그들의 하나님됨을 부끄러워 하지 않으심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11:16 하)
히브리서 11:16은 2:11의 병행구절입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이 두 구절은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구절들을 살펴보는 것은 문제와 당혹스러운 일들로 가득한 어지러운 세상에서 어떻게 경건하게 살 수 있는지 함께 고찰하기 위해서입니다. 성경 메시지, 즉 복음은 사람들 마음대로 연구할 수도 있고 연구하지 않을 수도 있는 학문의 대상이 아닙니다. 기독교 메시지의 전적인 목적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치려는 데 있습니다. 특히 삶과 삶에 수반되는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가르침으로써 "넉넉히 이기"는 자가 되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롬 8:37).
우리는 현재의 어려운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비그리스도인과 완전히 다른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전적인 주장입니다. 그러니 이제 자문해 봅시다. 우리는 다른 위치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반응하고 있습니까? 히브리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심한 곤경에 처한 이들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그들은 박해와 시련을 당했고, 일부는 믿음까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 현재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우리 모두에게 긴요하게 필요한 메시지, 현 시대에 부합하는 메시지를 찾아볼 수 있는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세상 모든 것이 우리를 대적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승리하며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해 줍니다. 그중 한 가지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 2:11). 기독교 메시지는 일차적으로 이 관계에 대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우리에게 첫 번째로 필요한 일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위로도 주지 않습니다. 다만 경고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많은 위로를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형제 자매라 부르길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위로와 소망과 힘의 토대임을 우리는 알았습니다. 이토록 약하고 무가치하며 죄를 짓고 실패했는데도, 복되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내려와 우리의 본성을 입으셨습니다. 혈과 육을 지님으로 우리와 같이 되셨고, 우리와 나란히 서셨으며, 우리의 대표자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만족시킴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고, 우리의 인도자와 지도자로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이 모든 일을 하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이끄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음에도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이 이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멈추면 안됩니다. 그는 중보자이실 뿐, 최종 목적지가 아닙니다. 주님께만 기도하고 아버지께는 기도하지 않으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은 비성경적인 태도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를 통해 아버지께 나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형제라 부르길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진술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라 일컬음받길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11:16의 진술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진술을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실제로 세상에 살았던 우리 같은 사람들의 역사에 비추어 이 주제를 설명합니다. 그들의 역사는 우리가 다루는 문제가 단순히 이론적인 것이 아님을 각인시키고 상기시킵니다. 기독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저와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교회 밖 모든 곳에서 보이는 모습입니다. 교회 안에서 받아들인 진리의 궁극적 가치는 교회 밖에서 보이는 모습이 달라지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이처럼 삶의 한복판에 살았던 사람들, 온갖 어려움에 둘러싸여 근심하며 당혹해 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세상에 살면서도 승리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여기에서 이런 증거를 제시하는 것은, 이제껏 주장해 온 모든 진리가 실제로 효력이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너희는 이 모든 말이 진짜인지 궁금할 것이다. 듣기에는 놀랍고 읽기에도 굉장하지만 과연 실제로도 효력이 있겠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는 심지어 구약 시대에도 효력이 있었다고 대답합니다. 구약 시대 사람들은 우리와 다른 위치에 있었습니다. 우리처럼 약속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멀리서 내다보았고, 단지 그 힘만으로도 넉넉히 이기고 승리했습니다. 그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가 그들의 목록을 제시하며,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믿음의 영웅들이 어떤 어려움을 견디고 감당해야 했는지, 어떻게 그 모든 어려움을 딛고 승리했는지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던질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이런 승리를 거두었을까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어떻게 아벨이나 에녹이나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이나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다른 사람들처럼 이길 수 있을까요? 구약성경으로 돌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읽어 보십시오. 그들이 동화 속 인물이 아니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들 역시 저와 여러분이 사는 세상과 똑같은 세상에 살았습니다. 이 오래된 세상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오늘날도 아주 악하지만, 전에도 늘 악했습니다. 실제로 이들은 사람이 맞닥뜨릴 수 있는 가장 무서운 고통과 고난을 견뎌 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영광스럽게 살았고 영광스럽게 죽었습니다.
그 비결이 대체 무엇일까요? 모든 사람이 기꺼이 내놓는 대답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이들은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의할 점이 한가지 있습니다. 믿음이 이들의 유일한 비결이었다고 결론짓는다면 진실은 진실이되 반쪽짜리 진실, 사실상 덜 중요한 진실만 아는 것입니다. 이들과 이들의 놀라운 믿음 및 그 믿음에서 나온 용기에만 탄복한다면 모든 진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진실을 놓치는 것입니다.
제가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은 일종의 믿음을 스스로 불러일으키려는 자들, 큰 믿음의 사람이 되고자 진력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좋은 태도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아주 위험한 태도가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도구와 통로에 불과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일을 하시는 분과 접속시켜 주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믿음 자체를 목적으로 삼으면 절대 안 됩니다. 믿음의 중요성은 하나님을 믿게 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인도하며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하는 데 있습니다. 믿음 자체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 우리를 만나 주시는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이 구분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들의 중요한 특징은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들의 관계에 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이 이기는 자가 된 것은 바로 이 관계 때문이었습니다.
히브리서의 이 진술,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형제라 부르길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받길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중대한 진술입니다. 사람의 지위나 중대성이나 재산은 궁극적으로 중요치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느냐가 중요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이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야말로 나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가장 중대한 사실이요 나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이들은 그렇게 말할 수 있었고, 그것이 승리하는 삶의 비결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 비결을 적용할 수 있습니까? 이 사실만 확실히 알면 무슨 일이 생겨도 평안할 것이요 어떤 경우에도 패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말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른바 '하나님의 보편적 아버지 되심을 믿는 자들이 많은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언제든지 원할 때 하나님께 나아가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위험한 태도입니다. 성경 전체가 인류를 크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 구분을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창조하시고 생명을 주어 존재 하셨으며, 이런 의미에서는 모든 사람의 하나님이신 것이 맞습니다. 그는 만유 위에 계시며 자신의 섭리에 따라 인자를 베푸십니다. 마태복음 5장 산상설교에 그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5). 이처럼 모든 사람과 온 우주를 만드시고 다스리시며 다루신다는 점에서는 보편적인 하나님이신 것이 맞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 선하심의 수혜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보는 이 진술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여기에서 말하는 대상은 인류 전체가 아닌 특정한 일부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구분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구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이 특별한 축복과 약속이 적용되는 대상은 일부뿐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주님은 자신을 박해하며 함정에 빠뜨리려 하는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요 8:44).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했을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요 8:42). 이처럼 구분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본문을 보편적으로 적용하면 안 됩니다. 물론 사람들은 쉽게 그렇게 합니다. 곤경이 닥치면 하나님께 달려가 기도합니다. 수년간 기도하지 않았으면서도 이제 기도했으니 만사가 잘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에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이 말은 일부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동일한 진리를 아주 분명하게 설명한 사도 베드로의 말도 들어 보십시오.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벧전 2:10). 전에는 하나님과 무관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받길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말이 해당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백성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난 결과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9-10). 이처럼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라는 말은 모든 사람이 아닌 이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관계란 정확히 어떤 것일까요? 왜 이 관계가 귀중한 것일까요? 여기 나오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이같이 살다가 이같이 죽을 수 있었을까요? 세상에서 가장 큰 위로와 위안이 여기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14-18이 이 진리를 놀랍게 설명해 줍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이것은 우리가 살펴보는 진술의 병행이자 더 충분한 설명이기에, 이 가르침에 비추어 히브리서 본문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십니다. 만유 위에 계시며 만유를 심판하실 이로서 그 섭리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인자를 베푸시지만, 자기 백성에게는 그보다 훨씬 더 크고 부요하며 깊은 축복을 내리십니다. 그 축복은 오직 이 백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 축복이 무엇일까요? 여기 사용된 용어들은 전부 하나님이 이들과 언약의 관계를 맺으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이들과 자신을 한데 묶으십니다. 모든 사람과 한데 묶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불경건한 자들과는 한데 묶지 않으시며 언약의 관계를 맺지 않으십니다. 어떤 계약도 맺지 않으실 뿐 아니라 어떤 특별한 약속도 주지 않으십니다. 오직 이 특정한 백성에게만 약속을 주십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나는 너희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네 아들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이것이야말로 성경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인데 이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그들 가운데 들어가십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그들 안에서 살겠다"라고 확언하십니다. 그들에게 자기 이름을 주십니다. 전능자, 영존하시는 하나님, 땅 끝까지 지으신 분이 자기 자신과 그 크고 영광스러운 이름을 이 백성들과 한데 묶으십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3장에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과 그 속박에서 끌어내 가나안 땅으로 데려가는 중대한 일을 위해 모세를 부르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 모세에게 어떻게 말을 건네셨는지 주목해서 보기 바랍니다. 그가 최종적으로 밝히신 이름은 크신 여호와, "스스로 있는 자" 입니다(출 3:14). 모세가 "그들에게 갔을 때 '네가 말하는 하나님이 누구냐?'라고 물으면 어찌 합니까?"라고 묻자 "스스로 있는 자 여호와라고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먼저 밝히신 이름이 있습니다. 처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모세는 두려워하며 떨었습니다. 일개 목자로 별 볼일 없이 살아온 세월이 이미 40년이나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세에게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소개하셨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으로 소개하지 않고 아브라함과 묶어서 소개하셨습니다. 자신의 이름과 아브라함의 이름을 연결시키셨습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과 동역자가 되신 것이며 그의 삶을 공유하신 것입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 3:6).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받길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의 이름 옆에 자신의 이름을 두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같은 특정한 백성의 이름 옆에 자신의 이름을 두시는 것입니다. 그는 인격적인 언약 관계로 그들과 자신을 한데 묶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사람은 나의 벗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약 2:23).
에녹이라는 사람도 살펴보십시오. 성경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말합니다(창 5:22. 24). 말하자면 하나님이 그와 동행하는 모습을 보이길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동행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사람들과 동행할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에녹의 하나님이라 일컬음받길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를테면 하늘에서 내려와 그와 동행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라는 구절에 담긴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아니십니다. 개중에는 마귀의 자녀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길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이 사실을 먼저 하나님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연이어 우리의 관점에서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하시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고후 6:16). 어떻게 보면 요한복음 14장에 나오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놀라운 말씀과 아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이어서 하신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21, 23절).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라 일컬음받길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에 담긴 한 가지 의미가 이것입니다. 그는 우리 안에 들어오시며 우리삶 속에 들어오십니다.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십니다. 우리에게 자신의 이름을 두십니다.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으로 삼으십니다. 이것은 성경이 도처에서 가르치는 사실입니다.
이런 말씀들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을 보여줍니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그의 [특별한] 소유가 된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소유하고 계시지만, 자기 백성은 특별한 방식으로 소유하시며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전에 없던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 삶에 개입하십니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듯 우리 아버지로서 우리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십니다. 물론 아버지도 이웃의 자녀나 거리의 아이들에게 관심을 보일 수 있으며 많은 친절을 베풀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부모, 자식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 자식 관계는 아주 특별한 것으로서, 하나님은 우리와 이 관계를 맺으십니다. 항상 우리를 지켜보시고, 함께하시며, 돌보십니다. 더 이상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아주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며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 분입니다(딤전 6:16).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 때우리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에베소서 2:13에 나오는 바울의 말처럼 전에 멀리 있던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맺으십니다. 여기에는 다른 누구에게도 허락지 않는 관계와 친밀함을 자기 백성에게는 허락하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와 미래를 통틀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 중에 가장 보배로운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 주신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을 믿고 그에 대한 사실들을 믿는 것과는 다릅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면 그가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확신, 그가 나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길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절대적 확신이 생깁니다. 로마서 8:16은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라 일컬음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그 사실을 친히 우리에게 알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인물들은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영광스러운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이 여기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향한 사랑을 내비치십니다. 우리에게 관심이 있음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가 그의 자녀라는 것과 이 모든 약속이 우리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그가 주신 모든 약속과 맹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 베드로는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과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합니다(벧후 1:3, 4). 그는 자신의 특별한 백성에게만 이 약속을 주시며, 예비하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세상은 이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 중 하나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 이 얼마나 엄청난 약속입니까!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넘치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변 상황과 가혹한 삶과 지옥에서 풀려 나온 온갖 것들의 공격을 받아 쓰러질 때, 이 하나님, 모든 은혜의 하나님, 무한하신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넘치게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한 말도 들어 보십시오. 옥에 갇힌 죄수로서 네로의 기분에 따라 언제 사형에 처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말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 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사도는 친절하게 선물을 보내 준 빌립보 교인들에게 감사를 표하면서도 "내가 죄수로 갇혀 있지만 아무 부족함이 없다고 말할 수 있어 기쁘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너희도 미래를 생각하며 걱정할 필요가 없다"라고 덧붙입니다. 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까?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빌 4:19). "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여러분은 온 우주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독차지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여러분의 하나님이라 일컬음받길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실임을 알 때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며 무슨 일이 생길까 염려치 않게 됩니다. 혹시 지금 두려워하고 있다면 이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길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며 여러분과 자신을 한데 묶으셨다는 사실, 그가 약속하신 모든 복이 여러분에게 해당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이 여러분과 이런 관계를 맺으셨기에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다고 하셨습니다(마 10:30).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일 중에 하나님과 무관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과 하나님의 관계는 은혜의 관계요 부모자식 관계입니다. 그는 여러분의 머리털까지 다 세고 계십니다. 그의 이름이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그가 모르시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는 약속하십니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 이 약속은 그가 여러분의 하나님이라 일컬음받길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사야 46:3-4에는 또 다른 영광스러운 진술, 가장 영광스러운 진술 중 한 가지가 나옵니다. 아무 자격 없는 옛 백성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 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하나님은 백성과 자신을 한데 묶으셨고, 그들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사 43:2).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라는 은혜로운 말씀도 보십시오(고후 6:17). 모든 능력과 영광 가운데 계시며 보배로운 약속을 주시는 크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이 우리가 곤경에 빠져 허약하고 연약하며 초라하게 느낄 때마다 영접해 줄 채비를 항상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위로가 되는 말씀은 없습니다. 이 하나님이 바로 우리 아버지십니다. 온 우주를 보전하시는 분이 우리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줄 채비를 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 것이라 부르길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말이 우리 편에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그를 무한히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심을 안다는 것입니다. 항상 품에 안고 보살펴 주심을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 자체는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과 그가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압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신다는 사실과(시 127:2)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는 사실은 압니다(시 121:4).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항상 우리에 대한 의무를 지키시며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켜보십니다. 이 말 역시 언제 어디서든,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든 그에게 나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려움이 닥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이것입니까? 한 찬송에 나오는 표현대로 “모든 것이 우리를 대적하는 듯 절망으로 몰고 갈 때에도 한 문은 열려 있음을 알며 "한 귀는 우리 기도 듣고 계심을 압니까?" 본능적으로 이 고백이 나옵니까?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든 그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우리의 하나님이라 일컬음받길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주"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히브리서 13:6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라 일컬음받길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증거로 한성을 예비하셨습니다. 그 성이 무엇입니까? 장차 올 세상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큰 소망이 그 성에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예비된 곳,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에 있습니다(벧후 3:13).
우리가 그 성에 갈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이 위대한 서신 6장에서 절대적 증거를 제시해 줍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히 6:19-20).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한 성을 예비하고 계심을 알려 주는 사건이 무엇입니까? 부활입니다! 승천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그 성에 가신 분이 계십니다. 이 땅의 삶을 마치실 무렵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거처를 예비하고 계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성은 우리를 위해 마련된 곳입니다.
이 모든 약속이 해당되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앞서 한 말에 비추어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약속이 해당되는 유일한 대상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그 대상임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몇 가지 시금석이 여기 나옵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16절은 일종의 요약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영웅들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아브라함을 다루는 부분에 이르러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히 11:13). 이들은 모두 하나님께 전적으로 복종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치 않은 가인과 달리 아벨은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당대인들과 달리 노아는 그를 믿고 그의 말씀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습니다(히 11:8). 이들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 및 명령에 온전히 복종했습니다. 자신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었고, 그 메시지를 받아들였으며, 그 메시지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이것이 이 사람들의 특징이며 그리스도인의 요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믿는 자요, 복음이 죄의 삶을 정죄한다는 사실을 믿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위해 죽으셨음을 믿는 자요, 그리스도 안에 유일한 구원의 길이 있음을 믿는 자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을 뿐 아니라 그 믿음의 증거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이었습니까? 성경은 이들이 "더 나은 본향"을 추구했다고(히 11:16), “터가 있는 성을 바랐다고(히 11:10) 말합니다. 이들은 이 세상 삶의 실체를 보았습니다. "삶이 참 멋지지 않은가? 세상이 참 영광스럽지 않은가?"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은 죄와 수치와 저주로 가득 찬 악하고 나쁜 곳"이라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 세상을 등지고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듯이, 더 이상 세상을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살았지만 세상을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등지고 더 나은 본향을 추구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사용하는 용어에 주목하십시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히 11:13).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또한 세상의 실체를 본 사람들이요, 세상을 더 이상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며, 세상을 위해 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고대하는 곳은 하나님의 성입니다. 더 나은 땅입니다. 우리 눈은 장차 올 영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했습니다(히 11:13).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면서 동시에 세상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기에 하나님도 이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받길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그런 사람들이 되게 해주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