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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학』이 주목하는 이 계절의 시인 / 대담 임애월 편집주간
한 점의 그림, 혹은 한 편의 단편소설 같은
김 준 기 시인
- 5월 하순, 볕 좋은 어느 날
수원시 영화동 소재 김준기 시인님이 운영하는 스튜디오 겸 사무실을 방문했다.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반갑게 웃어주시는 시인님의 옆에서 제라늄과 팬지꽃들이 함께 손을 내밀었다 -
임애월 : 김준기 시인님, 안녕하세요? 5월 하순인데 벌써 날씨가 덥네요.
김준기 : 세월이 하 수상한 탓도 있겠죠. 그래봤자 대여섯 달만 지나면 또 찬바람에 눈보라 칩니다. 썰렁한가요?
임애월 : 하하하... 네, 아주 시원합니다.
입구의 화분들도 그렇고 스튜디오가 환하고 예뻐서 기분이 한껏 밝아지는 것 같습니다.
김준기 ; 성격 때문일 겁니다. 아기자기한 게 좋습니다. 거창하고 지나치게 화려한 것은 거부감이 가지만 작고 자연스럽고 그저 한눈에 들어오는 인간다움, 뭐 그런 것들이 주는 편안함을 좋아합니다.
임애월 : 아, 그 인간다움이란 말씀이 훅 치고 들어옵니다.(웃음)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근황도 들려주세요.
김준기 : 근황이라는 말을 붙이기도 뭐할 정도로 새삼 큰 변화는 없습니다. 아침에 사진관 문 열고 어쩌다 손님 오면 사진 찍어주고 아니면 책 보고 음악 듣고 수업 있는 날은 나가서 수업하고, 누구라도 불러만 주면 득달같이 달려 나가서 한잔 얻어 마시고…….
임애월 : 네, 아주 평안해(?) 보이는 시간을 보내고 계시네요.
그런데 그전부터 궁금한 게 있어요. 전문적으로 사진을 시작하신 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김준기 : 취미로 사진을 찍기 시작한 건 40년이 넘었고요. 사진을 하는 친구들이 같이 전시회를 하자고 수도 없이 유혹(?)도 했지만 한 번도 참여를 한 일은 없고……, 잘 안 되는 일만 골라 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사진관이 사양산업이 된 지도 꽤 오래 전이야기인데 저는 그리고도 한참 지나서 사진관에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벌써 5년이 넘었네요.
임애월 : 그 말씀에는 공감합니다. 요즘은 스마트폰이 실생활의 많은 부분을 대신해 주고 있어서 저도 사진관에 갈일이 별로 없는 것 같거든요. 괜히 죄송해지는데요.(웃음)
이번에 수원시인협회 회장이 되셨어요. 수원의 순수 토박이라고 알고 있는데 향토사회의 문학단체장으로서 감회가 남다르시겠어요?
김준기 : 그릇에 맞지 않는 큰 자리를 맡았습니다. 수원시인협회에는 소속감을 지니고 있었지만 회장이라는 자리는 인연이 닿지 않는 자리거든요. 그냥 이 기회에 빚을 조금 갚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만사가 다 그렇기도 하겠지만 사실 저와 제 시를 키워주신 분들이 수원이고, 수원의 선배 시인들이었으니 그분들한테 진 빚을 조금은 갚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하는 생각입니다.
임애월 : 역시 참 겸손하시군요.
수원시인협회 회장으로서 지역문단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싶으신지 그 포부를 들어보고 싶네요.
김준기 : 포부랄 것도 없습니다. 제가 원래 어디 나서는 것을 잘 하지 못하고 부끄러움도 많이 타요. 회장은 앞에서 끌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자리만 깔아 드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원의 시인들이 그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만 깔고 저도 그들의 애독자 중 한 사람으로 즐기고 싶습니다.
한 가지 분명하게 말씀드리는 것은 절대로 수레만 키우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거지요. 수레의 크기보다 그 수레에 누가 타고 있느냐 그리고 그 수레가 어디로 향해서 가고 있느냐가 중요하겠죠. 그리고 그 수레도 제가 혼자 끌어나가는 것이라는 생각은 버리는 게 아니라 아예 언감생심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죠. 회장이 수레를 끈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자칫 잘못하면 독단이 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임애월 : 와, 포부가 없는 게 아니시네요. 낮은 자세로 회원들과 수원문단을 위해 봉사하시겠다는 그 말씀에 박수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수원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이 참 크신 것 같은데 수원 사랑 시 한 편 들어보고 싶네요.
주모 치맛자락이
아무리 곱다한들
각시님 눈매보다
고울 리가 있겠소
해송 곱디고운
살결 위에 먹줄을 튕기고
톱날을 대기 전에
다시 빌어 보오
큰 나라 세우시려
큰 재[城] 갈고 다듬으시는
나라님 큰 뜻이야
무지렁이 당신과 내가 어찌 알겠소
다만 빌고 비옵나니
쥐취꽃 가득한 산자락
우리 각시님 젖가슴에
나를 묻어 주소서
- 「축성일기(築城日記)」 전문
젊은 알렉산더는 인도를 정복했다. 그 혼자서 ?
- 어느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 B. Brecht-
수원시인협회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요즘 수원문단 일부가 너무 소란스럽고 어지러운 모양새를 보이고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요?
김준기 : 참으로 할 말은 많지요.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누워서 침 뱉는 꼴이 될 수도 있으니 답답하기도 하고……. 적어도, 문인들의 모임이라면, 그 어떤 정치적 집단이나 경제적 이익 집합체와는 그 성격을 달리 해야 하는데, 지나치게 조직의 논리가 개입되어서 빚어진 일이 아닌가도 싶기도 하고... 직전 회장을 제외한 나머지 여덟 분의 전직 회장이 협회를 탈퇴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빚어졌는데,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죠. 그래서 제가 앞에서 수레 이야기를 한 겁니다. 누가 새로 타느냐는 생각지 않고 너무 키우기만 했습니다. 아무튼 저도 일말의 책임도 없다는 말은 할 수 없는 처지이고.
임애월 : 그 정도로 사태가 심각하군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루속히 정상궤도에 다시 안착하길 바라봅니다.
시인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외모 상으로는 부잣집 도련님으로 귀염 받으며 호의호식한 부르주아지 냄새가 풍깁니다만.....(웃음)
김준기 : (크게 웃음) 부르주아와는 정말 거리가 멉니다. 가난했지요. 그것도 아주 지독하게. 그냥 쉬운 얘기로……. 초등학교 시절 개근상을 한 번도 못 받았습니다. 일 년에 무조건 세 번은 결석 처리가 됐으니. 봄, 가을 소풍과 가을운동회 때는 학교엘 가지 않았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신문배달에 주간지 가판도 해 봤고…….
그런데 그게 신기해요. 그런 이야기를 하면 다 믿지를 않아요. 그리고 수원의 시인 중에 초등학교 1년 후배인 시인이 있어요. 그 친구가 저도 기억 못하는 제 어릴 때의 모습을 기억해 내더리고요. 그러면서 그때 옷차림은 별로였지만 그렇게 귀티가 났다는 거예요. 그게 더 어려워요. 가난하면 가난한 티가 나야 되는데.
임애월 : 그 당시 서민들이라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가난한 시절이 아니었나요?
김준기 : 그랬죠. 국민 대다수가 절대빈곤에 시달리던 때였으니까. 그 중에서도 극빈으로 분류되는 계층이었으니까 문제였죠. 그 얘기는 길게 하고 싶지 않아요. 가난이 흉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랑도 아니니까요.
임애월 : 네, 그건 그렇지요. 알겠습니다.
수성중·고등학교를 다니셨다고 늘 자랑하시는데 어떤 학생이었을까요? 모범생이었을 것 같긴 합니다만...
김준기 : 모범생이었죠. 겉과 속이 많이 다른……. 겉보기에는 정말 모범생이었습니다. 중학교 시절에는 전교 총학생회장도 했고 중, 고등학교 6년 동안 한 학기도 안 빼놓고 반장을 했으니까요. 그래서 담임 선생님마다 조금 힘드시기도 했을 겁니다. 반장은 조금 유복한 집의 아이가 하는 게 아무래도 학급 운영에 조금이라도 편할 텐데.
임애월 : 그래도 그 시절이니까 반장을 하셨지... 극빈 가정이었다면 요즘 같으면 아예 후보에도 못 오르지 않을까요?(웃음)
문학과 인연을 맺게 된 맨 처음 사건(?)이나 이야기도 풀어놔 주세요.
김준기 : 어려서부터 혼자 있는 시간을 참 좋아했습니다. 지금, 흔히 말하는 혼술(?)을 즐기는 것도 어쩌면 그 버릇이 남아 있는 건지도 모르고. 중, 고등학교 시절 내내 혼자 자취를 했어요. 밤늦게까지 공부를 하거나 시내를 배회하다 집에 돌아오면 아무도 없었죠. 그러다 보니 그 무렵부터 혼자 끄적였다고나 해야 할까. 달리 대화할 사람이 없었으니 자신과의 대화에 익숙해졌고.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거나 거기서 얻은 생각을 정리해 보고. 그러니깐 무슨 문학이니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죠.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 시조시인이신 유선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선생님이 작문 숙제를 내 주시고 걷어 가시면 그 다음 날은 어김없이 제 글을 주시면서 읽어보라고 하셨어요. 그 무렵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심취해 있던 책이 릴케의 시집이었죠. 그래서 한 번은 유선 선생님을 찾아뵙고 여쭈었습니다. ‘저도 지금부터 열심히 쓰면 릴케 같은 대시인이 될 수 있을까요’ 하고요. 그때 선생님께서 꿈도 꾸지 말라고 솔직히(?) 대답을 해주셨어야 했는데... 될 수 있다고 하셨어요. 그러다가 어떻게 임병호 시인님을 만나게 되었지요. 아무래도 유선 선생님은 학교 선생님이셔서 어느 정도 제약은 있었어요. 임병호 시인님을 만나면서부터 시적 영혼의 자유분방함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인생이 꼬인(?)거죠.(웃음)
임애월 :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고등학교 때 선생님 몰래 학교 담장을 넘기도 했다고 들었어요.
김준기 : 넘기도 했다는 말은 어쩌다 그랬다는 뜻이고. 사실은 다반사였습니다.
그 때는 학생이 극장에만 가도 정학을 당하는 시절이었죠. 그런데 어쩌다가 한번 가는 친구들이 걸리는 것이지 나 같은 상습범은 걸리지를 않아요.(웃음) 뿐만 아니라 그 무렵 남문 근처에 있던 Y-House라는 찻집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이기도 한 백도기 소설가가 주인이던 곳이었는데 학교 선생님들이 보기에는 다방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곳이었어요. 그런데 거기를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내 집 드나들 듯 버젓이 드나들었어요. 앞서서 내가 학교 안에서만 모범생이었다고 말한 이유가 있는 거죠. 그 무렵에 들었던 고전음악의 소양이 지금 내 시의 음악성을 유지해 주는 자양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해요.
임애월 : 한 마디로 문제아였다고도 할 수가 있겠네요. 하하
<무풍지대>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셨는데... 그 탄생 배경과 그 멤버들은 누구누구였나요?
김준기 : 1977년이었는데 거의 매일 수원의 젊은 시인들이 자리를 같이 했어요. 어렵고 어두웠던 시절이었죠. 남문 근처 목로주점이나 국민집 막걸리 한 잔에 서로의 고뇌와 시대의 울분을 토로하다가 기왕이면 동인지 하나 묶어보자는 누군가의 말에 그냥 의기투합한 겁니다. 처음에 모였던 동인은 김우영, 김준기, 송미화, 신명균, 장기주, 정연웅, 최영선이었습니다. 다음해에는 그 해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김정희와 조성휘, 최병기가 가세했고 그 이듬해에 박아영 그리고 엄기배까지 동인으로 들어왔죠.
임애월 : ‘무풍지대’라는 이름에 원가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요...?
김준기 : ‘무풍지대’라는 이름은 그 시대의 시대적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혹독한 유신시대였습니다. 서너 명만 모여도 일단은 감시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바람은 곧 시련이죠. 물론 그 시련을 당당히 이겨가야겠지만 그 바람에 개의치 않는 정신이 더 중요했죠.
임애월 : 그러다가 갑자기 군 입대를 하게 된 동기가 있으셨다고요?
김준기 : 그게 지금도 의문이지요. 나는 운동권도 아니었어요. 웬만한 운동권 친구들도 그렇게까지 끌려가다시피 가지는 않았어요. 한마디로 혼돈의 시기였죠. 10.26 직후였으니. 어느 날 갑자기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휴학 처리가 되었어요. 학적이 없어진 거죠. 사흘 후에 신체검사 통지서가 날아 왔고, 경기도 병무청이 아닌 국군수동통합병원에서 형식뿐인 신체검사를 받았습니다. 아예 키도 안 재고 그냥 징집관이 물어서 답하면 그걸 받아 적는 식이었어요.
임애월 : 하하하... 그게 사실이라면 신체검사를 한 게 아니네요?
김준기 : 어수선한 시대였잖아요.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바로 영장을 나눠주더라고요. 들여다보니 입대가 열흘 남짓 남은……. 덕분에 12.12를 비롯하여 5.18 그리고 그 후의 현대사의 격동기를 군에서 보냈죠. 막연한 짐작이지만 그렇게 군대를 끌려가다시피 가게 된 뒤에는 어떤 힘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어요. 거기가 가장 얌전하게 있을 수 있는 곳이다 싶었는지. 그 어떤 힘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피하고 싶고요.
임애월 : 아하, 어떤 분이 뒤에서 ‘무풍지대’로 미리 피신을 시키셨나 봅니다.
대전에서도 몇 년 보내셨다고... 대전 문인들을 통해 들었는데 그 이야기도 해주세요.
김준기 : 일종의 반항이었고 도피였죠. 나의 우상이었던……,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내가 믿었던 가장 큰 신념에 대한 혼돈, 그 신념이 무엇이었는지는 말하고 싶지 않고,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자괴감 등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어요. 많이 방황을 했어요. 폭음도 했고. 그러다가 글 말고도 나를 완전히 잊는 무엇을 찾았고, 어쩌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죠. 사실 그림이라고는 학교 미술 시간에 그려 본 게 다였어요. 그런데 미대 응시를 해보니 덜컥 붙더라고요. 나중에 교수님을 통해서 들은 얘기지만 합격생도 아니고 응시생 중에서 실기시험 성적은 내가 꼴찌였대요. 그런데 학과 시험 성적을 합산해서 합격과 불합격을 가른 덕분에 붙은 거죠.
임애월 : 그림에 대한 재능은 별로 없으셨나 보네요.(웃음)
김준기 : 미대를 다니는 동안에도 같은 과 친구들보다 국문과 친구들과 더 자주 어울렸어요. 친구의 형이기도 한 장기주 시인이나 홍일표 시인과 늘 붙어 다녔고 당시 대전에 살던 최봉섭 시인의 신세도 많이 졌죠. 그 무렵 박용래 시인과 임강빈 시인도 만나게 되었고요.
임애월 : 그렇게 일찍부터 동인 활동도 하고 문학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셨는데 등단은 왜 늦게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김준기 : 문학적 재능이 모자랐던 게죠 뭐. 이십대 때는 그 어느 곳에도 안착을 못 했어요. 그 누구의 추천을 받거나 신춘문예 같은 등단의 길은 생각지도 않고 그냥 쓰기만 했죠. 게다가 한 동안 의도적으로 글 쓰는 사람들의 모임은 피하기까지도 했고 등단이 뭐 대수냐 하는 되지못한 오만도 있었고요.
임애월 : 젊은이로서의 시대에 대한 일종의 항변 같은 거였나 봅니다.
김준기 : 무엇보다 우선은 일상의 생활이 아주 불안했어요. 어디 한군데 몸을 의탁할 만한 곳이 어려웠던 때도 있었고요. 오죽하면 가난하기는 피차일반인데, 그 무렵 김우영 시인이 신혼이었어요. 그 가난한 시인을 찾아가 빈가의 밥과 반찬을 축내고, 최영선 시인의 집에서 얻어먹고 자고 한 것은 그 수를 다 헤아릴 수도 없어요. 최영선 시인의 어머니께서 저를 잘 챙겨주셨거든요. 참 많이 고마우신 분입니다.
그러다 보니 써 놓은 원고를 일정한 곳에 보관할 수도 없었고 그러다가 욱하면 시가 밥 먹여주느냐는 식의 젊은 객기로 그 동안 간직해 놓았던 원고를 다 태워버리기도 수도 없이 했고. 그 이야기 다 하자면 끝도 없어요.
임애월 : 좀 죄송하지만 제게는 소설처럼 재미있게 들리는데요. 하하...
1997년에 첫시집 『반나절의 꿈』을 상재하시고 17년이 지난 2014년에 두 번째 시집 『간재미 보살』을 출간하셨는데... 지금도 과작하는 시인이긴 하지만 그 시간적 간격이 너무 길어요. 그 사이에 그림이나, 사진 등 혹시 옆길로 빠지셨던 건 아니세요?
김준기 : 그림도 그렸고 사진도 찍었죠. 지금도 그리고 있고 찍고 있기도 하고. 그렇다고 그것들이 주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내 정체성은 시죠.
과작인 이유는 아마 성격 탓일 겁니다. 혹은 시에 대한 나만의 신념 때문이기도 하고요. 믿을지 모르지만 사십여 년 전에 초고를 잡아 놓고 아직도 탈고를 못한 시도 몇 편 있습니다. 아직도 모자라는 게 너무 많아요. 더 공부도 해야 하고, 더 깨달아야 하고. 어느 정도 됐다 싶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해요.
임애월 : 창작을 하는 과정에도 겸손한 마인드를 장착하시는군요.
불혹에 첫시집 『반나절의 꿈』을 상재하셨는데 어찌 보면 그때가 삶의 반나절을 지나가는 길목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물론 작품 속의 화자와 시인이 항상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작품에선 시인 자신이 화자인 것 같네요.
김준기 : 당연하죠. 1인칭 화자가 허구적 1인칭이 아니라 그냥 내 얘기입니다. 이십대를 그렇게 방황으로 보내고 삼십대에는 어떻게든 처자식한테는 가난의 설움을 주지 않겠다고 발버둥을 치면서도 시의 끈을 놓지 않았는데 사십 줄에 들어서서 보니 내 꼴이 그야말로 죽도 밥도 아닌 깨진 바가지더라고요. 그 무렵 많이 모자라던 내 모습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었습니다.
꿈같던
내 삶의 반나절이
깨어진 쪽박 같아서
물때 오른 무명실
한 올 한 올
꿰맨 사이로
내 젊은 날의 아픔도
반쯤은 흘리고
그리움도 흘려
보내고
다시금 무명실 한 땀
대바늘로 얽는
어설픈 삶의 한나절
깨어진 쪽박 속
꿈꾸는 낮달.
-「반나절의 꿈」 전문
임애월 : ‘내 삶의 반나절이/깨어진 쪽박 같’다는 표현은 지나온 반나절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다는 의미로 읽히네요. ‘내 젊은 날의 아픔도/반쯤 흘리고’ 나면 한편으로는 가벼워질 것이고 ‘깨어진 쪽박 속/꿈꾸는 낮달’이나 ‘무명실’이 은유하는 이미지처럼 시간이 주는 통증을 속으로 삭이며, 무욕의 자세를 고집하는 삶의 방향성이 보이네요.
이헌석 평론가는 그것을 ‘김준기 시인이 추구하는 道는 바로 문학의 道, 시창작의 道인데, 스스로 갈등하고 번민하다가 깨달음을 통해 삼매경에 이르는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했는데 그러고 보면 작품마다 어떤 해탈의 경지를 품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김준기 : 깨진 쪽박 같은 인생. 그래도 그걸 어떻게든 수습해 보겠다고 무명실로 꿰매어 겨우겨우 바가지 형태는 갖췄지만 그것마저도 세월이 지나다 보니 그 무명실에도 물때가 오르고 끊어져 다시 엮을 수밖에 없는 못난 인생, 그래도 나머지 반나절을 꿈꾸는 낮달처럼 살아가는……. 그냥 시 그대로라고 보면 됩니다.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상한 건 그 바가지예요. 분명 반쯤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다 흘렸다고 생각할 때도 있는데 전혀 가벼워지지 않죠. 이상하게 그 아픔이나 그리움을 아무리 흘려내 보내도 줄지를 않아요. 그래서 계속해서 시를 쓰는지도 모르고
임애월 : 그건 삶에 대한 애착도 그만큼 크고 소중해서 그러는 게 아닐까요?
이헌석 평론가는 첫시집 「반나절의 꿈」 총평을 ‘김준기 시인의 작품들은 구성이 탄탄하고 표현이 유려하다. 이는 짧은 기간에 급조한 시가 아니라 오랜 습작과정을 거쳐 숙성될 대로 숙성된 땀의 결과이며, 동시에 시인의 천부적 재질이 융합되어 새로운 생명력을 도출’해 내고 있다고 크게 호평을 하셨어요.
김준기 : 그 분이 과대평가하신 거예요. 천부적 재질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급조한 시가 아닌 점은 어느 정도 인정받고 싶기도 해요. 그 시집이 나온 게 1997년인데 내가 무풍지대 동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게 1977년이지요. 그 사이에 이십 년의 세월이 있었습니다. 이헌석 선생님뿐만 아니라 제 첫시집을 받아 든 최영선 시인이 한 이야기가 지금도 기억이 나요. ‘이렇게 첫시집에 다 쏟아 붓고 나중에 무엇을 쓸 것이냐’는 거였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나는 내 첫시집이 마음에 들지가 않았고 너무 일찍 냈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시의 길이 끝없는 습작의 길인지도 모르지만 아직도 많이 부족합니다.
임애월 : 시작 20년 만에 첫시집을 상재하셨으니 얼마나 시가 농익었는지도 읽어보면 지금도 다 느낄 수 있답니다.
새가 갇혀있던
하늘
하늘은
감옥이었어
마침내 감옥이
하늘이기 위해
새는 껍질을 쪼았어
제 몸을 쪼았어
- 「새」 전문
임애월 : 「새」라는 시를 읽으면서 저는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을 떠올렸어요. 어른으로 성장해 나가는 삶의 과정에서 싱클레어가 항상 마주치게 되는 두 개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 빛과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갈등하다가 마침내 껍질을 깨고 향하는 어떤 세계(아브락사스)가 이헌석 평론가가 말하는 시인님의 문학적 ‘道’와 일맥상통하는 것 같기도 하거든요.
김준기 : 4연 8행으로 된 짧은 시죠. 그런데 만약 이 시의 주제를 산문으로 쓰라고 하면 몇 천 장의 글로 써도 다 채우지 못할 겁니다. 날지 못하는 새에게 하늘은 하늘이 아니라 감옥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새에게 있는 것이지 하늘에게 있는 게 아니죠. 아직도 하늘은 하늘이고 감옥은 감옥이라는 이분법적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새가 문제죠. 그리고 그 이분법적 관념의 껍질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스스로의 몸 즉 육체가 인식하는 정신이 그 껍질이죠.
시인은 아파야만 하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시인을 둘러싼 세계가 시인을 아주 평안하게 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 대부분의 시인은 스스로를 자해를 합니다. 일종의 각성을 위한 고행이라고나 할까요. 나는 지금 내 몸을 쪼는 일에 게으른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되네요.
임애월 : 그걸 이헌석 님은 ‘김준기 시인은 시를 통해 ‘道’에 이르고자 한다‘고 말씀하신 거죠. 스스로 끝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는 일은 어쩌면 시시포스의 바위처럼 운명적으로 타고 나신 것 같네요.
시인님의 작품들을 읽다보면 뭐라 그럴까요... 잔잔한 슬픔 같은 게 배경화면으로 연하게 깔려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요. 작품마다 뭔지는 모르지만 깊게 끈적이지 않는 첫사랑 실연의 슬픔, 혹은 연록색 수채화 같은 슬픔이라고 할까요. 그런 연한 감정에 함께 젖어들게 되거든요. 숨겨두려고 하지만 살짝 얼비치는 절제된 슬픔 같은 거요. 그게 도대체 뭘까요?
김준기 : 제 아호가 다애예요. 음감도 그렇고 한자의 훈까지도 왠지 계집애 같아서 그렇긴 하지만……. 차 다(茶)에 아지랑이 애(靄)인데, 따뜻한 찻잔에서 오르는 김을 말하죠. 많이 아팠죠. 슬펐고 그리웠죠. 그것들이 그대로 다 시가 될 수 없음은 당연한 것일 테고, 나는 그것들을 나만의 찻잔에 담아요. 그리고 그 차가 다 우려지기를 기다리죠. 그렇다고 그게 다 내 詩가 아니에요. 그 다음 그 찻잔에 두 손을 살며시 얹고 손에 차의 아지랑이로 손바닥이 촉촉해질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때 나의 손을 그것도 아주 수줍게 펴 보여주는 게 나의 시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과작이라면 아마 내 찻잔 속의 그것들이 미처 우러나지 않은 까닭이지 내 탓은 아니죠.
덕유산 쇠북소리
청동빛 울음
지은 죄가 눈을 뜨는
독경소리에
산도 몸이 저려
부르르 떠는데
이제 막 열반에 드는
나뭇잎 하나
이 땅 누구의 업(業)을
거두어 가는가
하늘 끝 새털구름이
파르르 떨려,
떨려.
-「덕유산에서」 전문
임애월 : 그래요, 시인님의 과작이 찻잔 때문이라고 해 두지요.(웃음)
시인님의 작품에서는 생략기법이라고 할까요? 그런 게 자주 보입니다. 이 시 「덕유산에서」에서도 그렇고, 「秘意」도 그렇고... 마지막 부분을 과감하게 생략해 버리거든요. 물론 그런 기법은 독자들로 하여금 상상력을 집중시키는 효과가 크지요. 작품을 쓰실 때 그런 걸 미리 염두에 두고 쓰시는지요?
김준기 : 아마 읽는 분들이 그렇게 느끼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전혀 그런 의도가 없어요. 항상 끝까지 다 얘기한 거죠. 다만 그런 것은 있는 것 같습니다. 가령 권선징악이 분명하고 주인공의 운명이 명료하게 결정되는 것으로 끝나는 고전소설의 결말이 통쾌할지는 몰라도 재미는 없잖아요. 그렇다고 그런 효과를 미리 노리고 쓴 것은 아니고 솔직히 고백하면 거기까지가 내 한계인 경우가 많아요. 어차피 시가 끝없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고, 그 답을 찾다가 미처 다 찾지 못한 질문에서 시를 끝내서 읽는 분들이 그렇게 느끼시는 것 같아요.
임애월 : 네, 창작하기 전에 의도하시는 건 아니군요. 그런 생략기법에 대해 김광기 시인은 ‘김준기 시인의 시는 언뜻 보기에 美的 거리가 짧은 듯 보이지만 보면 볼수록 그 미적 거리가 그렇게 가깝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의 작품에 내재되어 있는 현학적인 의미 때문인 듯도 하고 쉽게 의미를 나열하지 않는 아이러니한 詩的 생략법 때문인 듯도 하다’고 하면서 ‘시인이 제시하는 대상 혹은 진술에 담겨있는 일반적인 내용쯤은 알아야 그의 詩를 즐길 수가 있고 아이러니한 의미를 은근슬쩍 눙치는 생략법의 어조 정도는 감지해야 그의 시를 음미할 수가 있다’ 고 했거든요.
김준기 : 김광기 시인이 좋게 얘기해주느라고 그런 것일 거예요. 물론 ‘현학적이다’의 기준도 문제이겠지만 내 시가 현학적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우선 사전을 찾아봐야 하는 어휘는 가급적 쓰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사람됨이 아직도 공부가 모자라도 한참 모자랍니다. 현학적이고 싶어도 그러지를 못해요.
은근슬쩍 눙치는 점은 조금은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게 시가 아닐까요. 어떤 시들은 보면 참 재미가 없어요. 메타포의 기교가 현란하다 못해 어지러워요. 제가 미대 다닐 때 권영우라는 서양화가가 교수님 중 한 분이셨습니다. 박용래 시인과도 아주 가까이 지내셨던 분이죠. 그 분이 학생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가끔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 또 미대 응시 하냐’고. 자기 세계를 찾으려 하지 않고 마치 입시용 그림을 그리듯 줄기차게 예쁘장하고 그럴듯하게만 그리는 학생들에 대한 꾸지람이었죠. 말하자면 그런 시인들도 은근히 많은 것 같아요. 요즘은 신춘문예 당선 시들은 유형이 있더라고요. 등단을 하고서도 그런 시만 줄기차게 써대는, 뭐랄까. 분명 잘 썼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 시를 읽어 보면 이 사람과 저 사람의 작품에서 별로 차이를 못 느끼겠어요. 그 느낌이 똑같아요.
임애월 : 요즘의 시들은 개성이 없다는 말씀이시네요...
그래도 ‘메타포’는 시를 창작하는데 있어서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역할을 하잖아요? 즉 시를 시답게, 시의 맛을 맛있게 해주는 역할이요.
김준기 : 물론 메타포도 시를 쓰는 데 아주 중요한 요소지요. 메타포가 있으므로 시어가 지니는 의미가 더욱 풍부해지고. 시를 시답게 하는 데 빠져서는 안 되는 요소임에는 분명합니다. 문제는 무엇을 지향하느냐는 겁니다. 가령 아무리 예쁜 옷이라고 하더라도 그 옷은 누군가 사람이 입기 위한 것이어야 하지요. 마네킹에 입혀 놓은 옷은 그냥 전시용일 뿐입니다. 사람은 나름대로 다 정체성이 있습니다. 쌍둥이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차이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마네킹은 다 같아요. 그런 마네킹의 정체성이 무엇일까요. 시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아무리 시적 기교가 뛰어나더라도 그 시를 통해서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느냐를 무시해서는 안 되죠. 그래도 그것은 그나마 나은 편에 속하는 것이고 심한 경우는 어떤 시들은 일부러 행을 붙여 봐요. 행을 붙인 것하고 이은 것의 차이가 없어요. 그저 줄만 바꾸면 시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예요. 시는 그게 아니지요. 문자를 도구로 하는 예술 중에서 가장 여백의 미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시잖아요.
임애월 : 제가 들은 바로는, 어느 유명 시인이 강의하는 창작 강의실에서는 아예 연을 구분하지 말고 쓰라고 가르친다고 들은 적이 있어요.
김준기 : 물론 그럴 수도 있어요. 단연으로 되어 있는, 그리고 아예 행과 연의 구별이 없는 산문시 중에도 훌륭한 시가 참으로 많아요. 역으로 그 시들은 행과 연을 나누면 오히려 그 시가 지닌 내재적 운율과 여백의 미가 사라집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 시들은 행과 연을 나눌 수 없는 필연적인 내재적 당위성이 있기에 그렇게 쓴 시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행과 연을 어떻게 나누어야 하느냐 하는 고민의 흔적조차 하지 않은 글들을 말하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수필의 한 단락인데 무조건 행과 연만 나누어서 시라고 우기면 곤란하잖아요. 좀 심하게 말하자면 줄만 바꾸어 써놓고 그것을 ‘시’라고 하면 곤란하지 않느냐는 얘깁니다.
임애월 : 하긴 자유시라는 미명하에 시가 너무 느슨하게 산만해진 것도 사실이지요.
그리고 시인님의 작품을 독자들이 제대로 이해하고 향유하려면 기본적인 시 읽기 배경지식이 있어야 할 것도 같습니다. 시가 난해해서가 아니라 작품 속에 담긴 의미가 깊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신월인천강지곡」이나 「지귀의 노래」, 「다시 부르는 白首狂夫歌」 등 연작으로 쓰시는 작품들도 역사·문학적 배경을 알아야 그 진가를 음미해 볼 수 있지 않겠어요?
김준기 : 시인도 독자에게 지켜야 하는 예의가 있지만 독자도 시인에게 지켜야 하는 예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월인천강지곡은 조금은 예외인 면도 있지만, 지귀설화나 백수광부의 설화 정도는 고등학교 때 다 배운 내용이고, 혹 기억이 안 나더라도 그 이야기가 궁금하면 스스로 찾아봐야 하는 것이 시를 읽는 독자가 갖춰야 하는 예의라고 봐야죠. 처음부터 끝까지 다 설명을 해 주는 글을 읽으려면 시를 읽지 말고 설화집과 그 해설집을 읽어야겠죠.
임애월 : 시인님의 시를 읽으려면 공부도 좀 해야한다는 말씀 같네요.(웃음)
김준기 : 그렇게 들렸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웃음) 그런데 사실은 제가 공부를 제일 안 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문학박사라는 분이 내게 그러더라고요. 요즘도 사랑이니 그리움이니 하는 진부한 주제로 시를 쓰느냐고요. 글쎄요. 내가 진부한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인연과 사랑 그리고 이별의 아픔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학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을 관류해 온 주제의식이죠. 그냥 그 옛날을 살아가던 사람의 그 아픔이 오늘날의 나에게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왔는가에 대한 의문이었고 그 탐구였을 뿐이에요. 그러다 보니 고전 설화나 고전 시가의 수용과 재조형이 이루어진 것이고, 평소에 그쪽에 관심조차 없었던 분들한테는 조금 어렵다고 느껴질 수도 있었겠죠.
철 그른 늦봄
도솔산엘 갔더니
선운사 춘백은 하마 다 지고
상사화 필 날은 아직 멀어서
하릴없이 서성이며
눈 비비던 참에
천마봉 상봉에서 마이재까지
낭창낭창 빨랫줄을 거는 꾀꼬리 울음
저기 지금 우는 새가
무슨 새냐 물었더니
아, 꾀꼬리도 모른다요
보살님 핀잔도 참으로 곱데
설마 몰라서 물었겠소
보살님 눈매가 하도 고와
그저 물어보는 말이지
인적 끊긴 산집 마당
보살님은 떨어진 꽃잎만
애꿎게 비로 쓸고
- 「만춘문답(晩春問答)」 전문
임애월 : 시인님의 「만춘문답(晩春問答)」이라는 작품이 좋아서 가져와 봤어요.
‘천마봉 상봉에서 마이재까지/낭창낭창 빨랫줄을 거는 꾀꼬리 울음’...
와우 정말 멋집니다. 그 늦은 봄날 꾀꼬리 울음소리가 시공을 넘어 지금 여기까지도 들려오는 듯합니다. 시각과 청각을 한꺼번에 아우르는 이미지가 한 점 그림 같기도 하고, 혹은 한편의 단편소설 같기도 합니다. 또 마지막 행 다음 생략된 장면은 어떻게 되나... 혼자서 상상하게 되고요.(웃음)
김준기 : 굳이 그러려고 의도한 것은 아닌데 가끔 시가 서사적 전개에 기대어 실타래를 풀어나가듯 써지는 경우도 있어요. 이 시도 그런 시 중의 하나인데 우리네 삶에서 인연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질문이지요. 내가 선운사에 간 것도 하필이면 그때 꾀꼬리가 운 것도 우연이 아니죠. 다 정해진 인연일지도 모른다는, 그때 만난 절집의 보살님도 인연으로 만난 것이고 그 보살님은 보살님대로의 인연이 있어 절에 계신 것일 테고 마치 그 인연의 소중함을 쓸어 담기라도 하듯 쓰레질을 하시는 모습에서 왜 떨어진 꽃잎이 그냥 꽃잎이 아니었나를 생각해보고...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배운 유주현의 ‘탈고 안 될 전설’이라는 수필 생각나실 거예요. 전쟁에서 한 팔을 잃은 외팔이 청년과 젊디젊은 여승의 만남과 헤어짐. 어쩌면 그 보살님과 나는 전생에 그런 말 못할 아픔이 있었던 사이일 수도 있고, 그런 인연으로 사랑하고 헤어져야 했던 아픔은 독자들도 대부분 지니고 있을 테고, 시의 끝 이야기는 오롯이 그 독자들이 채워야 하는 몫이죠.
임애월: 이헌석 평론가는 ‘불교적 깨달음과 도교적 역설·비약이 시의 품격을 높이고 있다. 이는 단행의 시에 삶의 총체적 의미를 담고자 하는 남다른 의식을 보여주는 형상화이다. 김준기 시인이 추구하는 문학적 뿌리는 일상에 묻혀있지만, 그 꽃과 열매는 아름다운 자성(自省)의 향기를 지니고 있다’고 했는데요. 시인님의 작품 저변을 흐르는 불교적 색채는 어디서 오는 건가요? 종교를 갖고 계신 것 같지는 않은데 어떤 갈증 같은 그 무엇이 궁금해서 말입니다.
김준기 : 이헌석 평론가의 평뿐이 아니고, 그런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한번은 어느 문학 세미나에서 나보다 한참 연배이신 어느 평론가께서 물으시더라고요. 김 시인 혹시 佛子냐고. 아니라고 했더니 이 분이 대뜸 한 말씀 하셨어요. ‘그럼 전생에는 중이었어’.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죠. 절을 수없이 찾았지만 한 번도 대웅전에 들어가 예불을 올려 본 일이 없으니 불자가 아닌 건 분명한데, 내 책상에는 항상 염주가 있고 마음이 어지러울 때는 나도 모르게 그걸 잡으니.
이 세상 업(業)과 살(煞)이
무엇인지 나는 몰라
밤마다 꿈길에
두드리는 산문(山門)
열려라 반야(般若)의 강물
열려라 극락전(極樂殿)
꿈길에서 돌아오는
아침
다시금
첩-첩-산-중
무명(無明)의 바다
-「산 5」 전문
임애월 : 제 생각도 그래요. 시인님께서는 전생에 중이었을 것 같아요.(웃음)
김준기 : 조지훈의 시 ‘승무’에 보면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라는 구절이 있죠. 그런 것 아닐까요. 꼭 법당에 들어 절을 올리는 것만이 예불이고 면벽좌선을 하고 화두를 꺼내어 드는 것만이 참선은 아닐 겁니다. 승무를 추는 여승에게는 그 춤사위의 손이 합장이듯이 공양보살님에게는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일이 예불일 테고 장작을 패는 불목하니에게는 그 도끼질이 예불일 수 있는 거죠. 나는 내가 시 속에서 걸러내려는 인연의 의미가 내 참선의 화두이고.
금강경
한 줄을 읽다가
금강이 없어지고
유마경
한 장을 넘기다가
유마를 잃었네
달마야 달마야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라
땅을 짚다가
달마가 잃어버린 신발
신발 한 짝
하얗게 하얗게 낮달로 뜨고
- 「신월인천강지곡新月印千江之曲2」 전문
임애월 : 시인님의 작품을 읽을 때는 뭔가 특별한 맛이 나거든요. 숨바꼭질 하듯이 숨겨놓은 그 뭔가를 찾아내야 하는, 즉 독자로서 같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 말입니다.
김준기 : 읽는 분들이 그렇게 느낀다면 그런 것이겠죠. 하지만 무엇을 의도적으로 숨긴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숨긴 것하고 보여주지 않는 것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겠죠. 차마 보여주지 못하는 것도 있고요. 읽는 분들도 그랬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김준기가 시에서 차마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그저 그의 아픔이고 눈물이려니 하고 보시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임애월 : 네... 같은 ‘아’ 라는 소리도 사람마다 다르게 들을 수 있으니까요.
한편의 시를 쓸 때 산사의 수도승이 道를 닦듯이 면벽정좌 가부좌를 틀고 쓰시는 건 아닌가요? 항상 절제된 정갈함이 돋보이거든요.
김준기 : 에이. 아닙니다. 가급적이면 정제된 언어, 토씨 하나 어미의 변형 하나에도 경우에 따라서는 몇 달을 고르고 고르려 하다 보니 그런 느낌을 주기도 하나 본데 실제로 시상을 얻을 때는 그렇지가 않아요. 그리고 어떤 때는 정말 순식간에 일필휘지로 써내려가는 경우도 없지 않고, 또 심지어는 꿈속에서 쓴 시가 깨어나서 토씨 하나 사라지지 않고 행과 연까지 그대로 되살아나서 쓰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데 그게 전부 공통점이 있습니다. 제 정신에서 쓴 게 아니라는 거죠. 거의 죽음에 가깝게 만취해서 쓴 경우도 많고요. 누가 묻더라고요. 왜 그렇게 혼자서 마시는 술을 즐기느냐고요. 즐기는 게 아닙니다. 그냥 죽는 거예요. 일상의 내가 죽지 않으면 안 써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이 사진을 한 장 찍으면 얼마가 남고 이 학생을 가르치면 얼마를 버는데 하는 일상의 금전을 헤아리던 영혼으로는 안 써지는 것 아닌가요. 그런 일상의 나를 죽여야죠.
임애월 :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처럼 자신의 ‘에고’를 죽여야 비로소 참다운 ‘나’를 만날 수 있다는 말씀으로 듣겠습니다. 그런데 ‘나’를 모두 죽여버리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면 작품에 ‘나’다움, 즉 개성이 남아있을까요?(웃음)
김준기 : 그 반대죠. ‘에고’를 찾는 거죠. 그리스 신화에 보면 시의 신인 뮤즈를 태우고 다니는 말 페가수스의 양면성에 대한 메타포를 발견할 수 있죠. 페가수스는 날개가 달린 말입니다. 하늘을 날 수 있죠. 그러나 그 말도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양식은 지상에서 얻습니다. 마찬가지죠. 저도 일용할 양식은 저의 잡다한 일상사에서 얻습니다. 그런데 그거에 매달리다 보면 내가 안 보여요. 나한테는 페가수스가 없으니 대신 술을 통하여 그런 일상과 끊어버리는 거죠. 그러고 보면 아직도 나는 멀었습니다. 감옥과 하늘을 여전히 이분법적으로 받아들이니까요. 살아있는 것이나 죽은 것이나 다 같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데. 아직도 내 몸을 스스로 쪼는 일이 부족해서겠죠. 아무튼 저는 혼자 앉아 마시는 술집의 벽이 수도승이 가부좌를 튼 암자의 벽인 셈이라면 말은 됩니다.
임애월 : 어이쿠나, 제가 드린 우문에 멋진 한 방을 날리시네요.(웃음)
아직도 현직(?)에서 강의를 하고 계신데 그래서 그런가요. 언제나 나이보다 젊어 보이십니다. 그 비결 좀 알려주세요.
김준기 : 사실 입시학원 쪽에서 저는 거의 조상신에 해당하는 나이입니다. 대학 강단의 특강도 아니고 입시 학원에서 환갑 진갑 다 지난 강사가 수업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죠. 그런데 다행인 것은 학생들이 제 나이를 잘 인식하지 않는다는 거죠. 비결은 즐기는 겁니다. 강의실에 들어가서 분필을 잡는 순간 밖에서 있던 온갖 근심걱정이 다 사라집니다. 아이들 사이에 내 별명이 욕쟁이 샘인데, 허. 무슨 순대국집 욕쟁이 주인 할매도 아니고. 사실 수업 중에 욕을 자주 해요. 요즘 같은 세상에 만약 제도권 교육에서 그렇게 욕을 하면 당장 난리가 날 거예요. 신기한 것은 제가 진짜 욕을 한 경우에도 아이들은 욕으로 받아들이지 않나 봐요. 어떤 면에서 인간관계는 지극히 단순해요. 아이들은 내가 자기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안다기보다 느끼는 것 같아요. 그러면 돼요.
임애월 :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혹시 천직인 거 아니세요?(웃음)
김준기 : 제 정서지수가 어쩌면 딱 그 아이들의 나이에 머물고 있는 일면이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좋게 미화해서 표현하자면 그런 거고 솔직히 말하자면 이 나이가 되어서도 철딱서니 덜 든 측면도 있고. 뭐 그런 거죠. 아무튼 수업시간에는 수업에 미친다는 게 비결이라면 비결입니다.
임애월 : 시집을 묶으신 지 6년이 넘었는데요...
잘 숙성된 3시집은 언제쯤 만나볼 수 있을까요?
김준기 : 아직 아무런 계획도 없습니다. 시집을 내봤자 팔리지 않을 것은 뻔하고 가난한 시인이 제 돈 들여서 시집 내기는 경제적 형편이 여의치 않고 그렇다고 무슨 창작지원금을 받아 내려면 못 낼 것도 없지만 그것도 한번 해보니 지원서를 작성하고 결산서를 내고 하는 일련의 작업들이 왠지 스스로가 근천스럽게만 여겨지고.
그리고 선배 시인들 보니깐 과작의 시인이 갑자기 시집 자주 내는 게 아니더라고요. 평생 시집 한두 권밖에 안 내신 시인이 갑자기 만년에 자주 시집을 내시면 꼭 얼마 있지 않아 유명을 달리 하시더라고요. 저는 오래 살고 싶습니다.(웃음)
임애월 : 그래도 작품이 어느 정도 쌓이면 밉든 곱든 묶어버리고 싶지 않나요?
김준기 : 사실은 다 핑계이고 제일 중요한 것은 정말이지 써놓은 게 없습니다. 쓴 게 있어야 3시집을 내든지 하죠. 그래도 혹시 모르긴 합니다. 그 누군가가 술 한 잔 사주면서 내라고 하면 잠시 제 정신이 아니어서 정말 3시집 낼지도. 그때 또 서로 흉금을 털어놓는 술자리 한 판 벌이겠습니다.
임애월 : 하하하.... 오늘 저녁 소주 한 잔 하러 가시지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취조 당해 주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김준기 :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고맙죠. 경상도 말 중에 보리문둥이는 보리문둥이끼리 만나면 반갑다는 말이 있답니다. 뜻이 통하고 말이 통하는 사람 사이가 좋은 거죠. 아무튼 요 근처에 막창 잘 하는 집이 있으니 한잔 하러 갑시다.
임애월 : 긴 시간 곁에서 사진도 찍어주시고 함께해 주신 최영선 시인님도 고맙습니다.
- 겸손과 절제와 여백을 사랑하는 시인 김준기
아직도 털어놓지 않은 수면 아래의 더 많은 이야기들은 다음으로 미룬다
그게 김준기 시인다운 생략기법이니까...
이제 정말 여름이다 -
■□ 시인의 자선시 5편
개심사 가는 길에
김 준 기
상왕산 개심사 가는 길에
세심동 돌탑을 지나도 마음은 열리질 않고
하필 쉬를 하고 싶어
느릅나무 울울한 골짜기에
엉거주춤 내뿜는다.
아뿔싸 산중턱 저만치
고만고만한 계집에서 구부정한 할미까지
온통 낮술 한잔 걸치고 붉게 물들어
어쩜 조렇게 나를 노려보고 있을까.
그래 볼 테면 보아라.
진세에 찌든 사내 하나
가슴에 동이동이 눈물 담아
여기 산길 한자락 적시노니
쪽빛 하늘 하얀 반달
내 마음의 문을
살짝 열어보곤
곱게 눈 흘기고 지나간다.
선덕이 낮달을 노래하다
- 志鬼의 노래, 그 열 번째
봄날 아침
눈 뱌비던 버들개비의 꿈
푸르디푸른 꿈으로 엮은 동아줄
인제는 닳고 닳아
가을 저녁놀 비낀 억새풀빛
우리 인연의 빛깔도 그렇게 바랬구나
차마 끊길세라
한 올 명주올 인연의 가닥을
가야금에 얹어 너를 보내나니
잘 가라 착하고 못난 사람아
쪽빛 하늘 물수제비를 뜨는 현(絃)의 울음
돛도 없이 서쪽으로 가는 하얀 배에 너의 긴 잠을 싣고
曲江의 노래
- 그 여섯 번째 -
칠석 지난 입추 문턱
누워있는 골방마저
낯이 선 여름 한 나절
쓰르라미 쓰르르 쓰르르
쓰레질을 하는 마당 한 귀퉁이
웬 도라지 꽃
맹인 잔치
황성 길 노중에 버려진
심봉사 가슴이
맞추어 저 빛깔이었을레라
그렇게 앞뒤가 훤한 이야기에도
베고 누운 목침가로 스멀스멀
새삼 눈물 나는 적요의 흐름
겨울, 덕유산에서
거창 지나 안의 가는 길에
눈이 내린다.
눈 덮인 산길을
쿨룩쿨룩 얕은 기침을 내뱉으며 지나가는 시골버스
하필이면 하얀 상여에 누워
하필이면 하얀 산길을
하필이면 쿨룩쿨룩 해소기침 소리만 남기며 겨울
산으로 든 누이
눈 내리는 산은 차라리 바다다.
오늘 또 다시 산길을 헤매는 하얀 고무신
내리는 눈발이
하얀 고무신 위에 달아준 슬픈 지느러미
쇠북마저 동안거에 들어
울지 않는데
산마루를 힘겹게 넘어가는
하필이면 까마귀 소리
그림자 산행
하필
함박눈이 그친 그 자리에서 길은 끊겼다. 그림자를 찾아 떠난 길에서 그림자는 그림자의 길을 잃고 하릴없어 오르는 눈 덮인 산이다. 자진모리 앙칼진 바람에 한 겨울 노송은 산철쭉 그늘 아래 지난 봄 한나절을 꽃그늘로 쉬었다가 개개비로 떠난 노스님의 쿨럭쿨럭 기침소리로 운다. 겨울은 당연히 춥고 또 외로운 것. 미끼처럼 눈송이를 매단 우듬지는 홀로 산에 든 사내의 어떤 눈물을 낚으려 작심하고 저리 흔들리는 걸까. 산 아래 마을로 내려간 까마귀 한 마리 청회색 하늘에 남긴 서릿발 발자국만 선연하다.
하필
■□ 김준기 시인 약력
1958년 수원에서 태어나 자라고 지금까지 살고 있음
1977년 『無風地帶』 동인으로 작품 활동 시작
1994년 『오늘의 문학』 신인상, 한국시학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회원
경기시인협회 이사, 계간 『한국시학』 편집위원
수원시인협회 회장, 『詩發』, 『푼수』 동인
시집 『반나절의 꿈』, 『간재미 보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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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었습니다...줄줄이 참 재미나는 길이었습니다...
술 절약하십시요...김준기 선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