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素白堂 가족의 대만 여행기 (2017-1.11-1.14 )
1. 소백당 가족
아침에 날씨가 꽤 쌀쌀하였다. 차가 높아서 지하로 못 간다고 춥긴 하지만 1층 입구로 나오란다. 15인승 스타렉스?가 와있었다. 오전 7시 집에서 출발하여 김해 공항으로 갔다. 1시간20분가량 걸린 것 같았다. 공항에서 여행사 직원을 만나 표를 받고 짐을 부친 후 2층에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고 11시 20분 대만행 비행기에 올랐다. 기내식이 오늘 점심이었다. 공항에 내리니 현지 가이드가 마중 나와 있었다. 소백당 가족이라 쓴 피켓을 들고 있었다. 누가 소백당 가족이라 말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저희들 이름을 말하기보다 부모의 이름을 말하기보다 호를 이야기 하는 것이 좀 쉬웠던 모양이다. 소백당호는 2010년 퇴임 당시 플랜카드에 처음 썼었다. 공주대학교 신용호 교수가 호부르기 캠페인과 함께 호를 지어주는 활동을 하고 있음을 신문에서 보고 나도 호를 지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글자는 힐소·본디소, 흰백, 집당이다. 꾸밈없이, 가식 없이 자연의 흐름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아호였다. 가까이 지내는 몇 사람 외는 잘 부르지 않았고 가족들은 아호를 부르지 아니했기에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 텐데 피켓과 태국의 관광버스에 ‘소백당가족’이라는 글자를 보니 기분이 조금 상기되는 느낌이었다. 집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고 외손자 서연이는 왜 아빠와 서연이 수현이가 사진 속에 왜 없느냐고 묻던 일이 떠오른다. 지운이가 결혼하기 전에 찍은 가족사진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에서 가족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새기게 되었고 집사람 칠순이 되는 해를 맞아 가는 여행의 의미가 더 커지는 것 같았다.
2. 중화민국의 지주 중정기념당中正紀念堂
공항에서 타이페이시 까지는 약 40분 거리란다. 정식 국가 명칭은 ‘중화민국’ 기후는 아열대 기후로 이즈음 기온이 10도 이하로 내려가 올 들어 동사한 사람이 200명을 넘는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아열대 지방은 비가 잦다고 모두 우비를 준비해 왔는데 어제까지 일주 내내 비가 내렸으니 우리 여행일정 중에는 비가 없을 거라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국토 면적은 우리 충청도와 전라도를 합한 크기며 인구는 약2천3백만 명이니 밀도가 높은 편이었다. 중국과의 국교정상화로 전통적 수교 국가들도 절교를 시작했고 우리나라도 이에 속하니 대만은 외로운 나라다. 우리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중정기념관. 초대 총통이었던 장제스를 기념해 1980년에 건설한 기념관이다. ‘중정’은 장제스 총통의 이름이란다. 타이완의 국부로 존경을 받은 장제스의 영향력을 없애려 민진당의 주도로 2007년 3월 2일, 국립대만민주기념관 (國立臺灣民主紀念館)으로 명칭을 변경했지만 다시 예전대로 환원하기도 했단다.
동선을 줄이기 위해서 우리는 옆문 大忠門대충문으로 들어가서 大孝門대효문으로 나왔다. 1층 집무실에 있는 사무실과 동상, 가족사진 등 유품이 전시되어 있어 그의 일생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 역사에 밝지 않는 우리로선 제대로 이해하긴 힘들었다. 전시물 중에서 잊혀지지 않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백범 김구선생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고 다른 하나는 우리 정부가 장제스 총통에게 수여한 일등건국공로훈장이었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와는 국교가 돈독했으나 중국과의 수교로 절교한 나라에 속하게 됐다.
사진속의 장제스 부인은 송미령이며 네 번째 부인이고 세 부인은 이곳대만으로 넘어오지 않았단다. 1975년 장총통 사망 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되었고 세계 화교들 까지 모금에 참여하여 1980년 4월5일 정식 개관하였으면 입장료는 무료란다. 전시실을 나와 동상 참배를 하고 두 명의 근위병 교대식을 구경하고 나왔다. 自由廣場의 아치형 정문이 보였다. 다섯 개의 지붕과 문이 연이어 있는 정문은 명나라식 건축양식이란다. 양쪽으로 고전적 건물인 국립극장과 콘서트홀이 세워져 있고 뜰은 잔디와 예쁜 꽃밭으로 조성되어있었다. 자유광장에서 89개의 계단을 올라오면 장제스 동상이 있다. 89계단은 장제스가 서거한 나이 숫자란다. 평생에 고향 중국을 그리워하며 꼭 가기를 희망했지만 이곳 대만에서 돌아가시고 대만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3. 성인취의成仁取義의 충렬사忠烈祠
정문의 현판 충렬사 양쪽에는 오른쪽에 成仁, 왼쪽엔 取義라는 글이 씌어있었고 뒷면에는 萬古流芳이라는 글씨가 씌어있었다. 의를 취하여 인을 이루니 그 아름다운 향기는 만고에 전해지리라고 서투른 해석을 해보았다. 사당 안에는 ‘국민혁명열사지령위國民革命烈士之靈位’라고 쓴 큰 위패가 정 중앙에 자리하고 그 양쪽으로 앞줄 아래쪽에 감란복국열사戡亂復國烈士, 항일열사抗日烈士, 호법護法열사, 토원討袁열사, 개국開國열사, 동정東征열사 등 크게 구분을 하고 각각 해당하는 분들의 위패를 구분하여 설치한 것이 특이하게 느껴졌다. 여기 위패를 모신 분들이 각기 어떤 일을 하시다가 돌아가셨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뜰 한쪽의 활짝 핀 패랭이꽃들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 건 겨울의 대한민국에서 왔기 때문일까? 우리는 조국을 위해 몸 바친 이들을 제대로 예우해주고 있는가? 자문자답해 보지만 제대로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앞선다. 이곳을 찾은 대만인들은 조국을 위해 목숨 걸었던 열사들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그려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4. 독특한 내진 설계의 <101빌딩>
저녁식사의 식당은 4시30분부터 문을 연다면서 4시 조금 지나서 식당에 닿았다. 상호가 몽골리안비비큐다. 샤브샤브 식당이었다. 잠시 기다렸다가 자리를 잡고 각종 채소가 푸짐한 저녁식사를 즐겼다. 기내식으로 때워 부족했던 뱃속을 가득 채운 셈이었다. 식당 벽에 걸린 戶納東西南北財(집에는 동서남북에서 재물이 들어오고)와 門迎春夏秋冬福(봄,여름,가을,겨울 문에서 복을 맞이한다)이라는 액자가 인상적이었다.
여섯시 가까이 돼서 찾은 곳이 <101>타워다. ‘타이베이 국제 금융 빌딩台北國際金融大樓’이라는 정식 명칭보다는 ‘타이베이 101 빌딩’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는 이곳은 항상 많은 관광객이 몰리는 타이베이의 랜드마크란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던 이 건물의 높이는 508m에 이르며 지상 101층, 지하 5층으로 이루어져 있단다. 세계 최고의 속도를 자랑하는 엘리베이터는 기네스 기록에 올라있단다. 5층에서 89층까지 오르는데 37초정도 걸렸다. 전망대에서 빌딩의 진동을 제어해 주는 660톤의 무게를 가진 거대한 추(Wind Damper)를 볼 수 있었다, 2014년 봉황태풍 때 이 추가 10cm나 좌우로 흔들렸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라 해서 내진설계를 하지 않으면 큰 건물은 허가가 나지 않는 것으로 안다. 와인드댐퍼는 그 크기나 모양이 새로운 감동으로 전해왔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뻗어있는 타이베이의 야경은 시 지리를 잘 모르는 우리로서야 큰 감동은 없었지만 대단한 그림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 빌딩은 8층씩 총 8개의 마디로 구분되어 있는데 이는 타이완 사람들이 숫자 ‘8’을 길한 숫자로 여기기 때문이란다. 식당가, 명품관, 금융가 등이 자리 잡고 있고 해마다 열리는 새해맞이 불꽃 축제는 이 빌딩의 하이라이트로, 평생 잊을 수 없는 멋진 순간이라고 자랑했다.
4. 중국 특유의 절 용산사龍山寺
五大門 중 서문西門에 인접한 용산사는 불교, 도교, 유교, 토속신 등이 어울려져 있는 절이요 상업용 절로 느껴지기도 하였다. 원래 청대에 지어진 절인데 중간에 소실되어서 1957년에 다시 재건했단다. 각종 장식의 화려함은 정말 놀라웠다. 네모난 뜰을 중심으로 건물이 둘러싸고 있는 구조가 3번 반복되는 3진 사합원의 궁전식 건물로, 전통 사원 건축, 돌기둥의 용 조각, 역사적 인물들 모습 조각. 벽면의 생생한 그림이 그려져 있고, 못을 하나도 쓰지 않았고, 지붕에는 용, 봉황, 기린 등 상서로운 상징물이 조각되어 있으며 지붕도 채색 기와로 그 화려함을 다 말할 수 없다. 건물은 前殿, 大殿, 後殿으로 나뉘어져 있다.
문 위에 택후민풍澤厚民豊, 오른쪽엔 자운보조慈雲普照, 왼쪽엔 호국우민護國佑民 등 백성을 걱정하는 문구 현판이 이채롭다. 그리고 사당마다 모셔둔 신이 다른가 보다. 관음전(관음보살)이 주가 되고, 천공전(옥황상제-천계를 다스리는 신이자 도교 최고의 신)도 있고, 萬古精忠 현판이 걸린 곳은 관우장군을 모셨고, 月老神君-월하노인-짝 찾아주는 신, 天上聖母, 임신부터 육아를 맡고 있는 註生娘娘, 바다와 땅을 지배하는 水仙尊王 城隍爺爺, 공부의 신-昌帝君, 神醫 華佗 등등 많은 신을 모시고 있어 각각에 해당하는 곳에서 간절한 소망을 담아 빌면 소원을 들어준다고 한다. 또한 점을 쳐 볼 수 있는 곳도 있었는데 어떤 분은 몇 번이고 무슨 조각을 던지고 있었다. 杯珓佔인 것 같았다. 시주하는 물품들을 파는 곳에는 없는 다양한 시주 물품들이 테이블 곳곳에 놓여 있었다. 쉽게 호주머니에서 꺼낸 물품을 올려 시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절해도 된단다. 그래서 가지고 있던 사탕 등을 올려놓고 절을 해 보았다.
5. 야시장夜市場
용산사(龍山寺) 대각선 맞은편에 야시장이 있었다. 이름을 이야기 해줬는데도 예사로 들었다. 화시제야시장. 어쨌든 길을 건너 대만에서 첫 야시장을 둘러보았다. 손님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날씨가 썰렁한 탓인지 복작거리는 모습은 아니었다. 노천 시장이었다. 그렇게 크지 않은 자그마한 시장으로 보였다. 대부분이 먹거리를 바로 그 자리에서 조리해서 파는 것이었다. 주위 사람들의 눈치 볼 것 없고 예절 따질 일 없이 자연스럽게 즐길 수 있는 곳이 야시장 아닌가 싶다. 우리 일행도 팥 혹은 고구마시럽이 가득한 바로 구운 빵을 같이 먹었는데 많이 달지 않았고 먹을 만 했었다. 곳곳에 야시장이 서고 있다. 대개 관광객들이 붐비는 곳에 큰 야시장이 있고 영세 상인들이나 최근에 창업한 젊은이들 특히 마차상인들이다. 각지의 특산품이나 음식물을 만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남으로써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장소로 야시장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모양이다.
오늘 일정은 강행군이었다. 한 시간의 시차지만 평소 일찍 자는 나에게는 너무 늦은 잠자리였다. 우리가 찾은 곳은 모나크 플라자 호텔(尊爵大飯店)이다. 5성급이지만 좀 한적한 곳이었다. 앤틱풍에 깔끔한 느낌은 있었다. 3박을 계속 이 호텔에서 잤다. 값을 깎는 제일 흔한 방법이다. 보온은 안됐지만 온수는 잘 나왔다.
6. 화련 가는 완행열차(1월12일-2일차)
여행 2일차다. 어제 일정이 빡빡해서 늦게 잠자리 들고 아침 7시 출발이라 해서 서둘렀더니 7시 20분 출발이라 한다. 그 20분이 그렇게 여유로울 수가 없다. 왜 그럴까? 그 짧은 시간이지만 꼭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란 생각을 해보았다. 7시20분이 넘어서 호텔을 나와 40여분 거리에 있다는 기차역을 향했다. 역은 꽤 컸다. 사람이 크게 붐비진 않았지만 여행객이 많았다. 우리는 9시에 화련행 열차를 탔다. 제일 느린 완행은 아니고 준급행정도 속도의 기차란다. 29년 전에 내가 화련 갈 때는 비행기를 타고 갔는데 지금은 기찻길이 좋아서 비행기로 가진 않는단다. 그러나 3시간 거리는 너무 멀게 느껴졌다. 참고 잘 기다릴 줄 모른 것이 요즘 사람들이다 나도 그 중 한사람이니 3시간은 정말 지루하고 힘겹다. 다행히 20여분을 지나니 시내 지역을 빠져 나온 것 같다. 곳곳에 우리나라의 억새풀 같아 보이는 꽃들이 하얗게 피어 가을 같은 기분을 갖게 했다. 논처럼 보이는 곳에는 물이 잡혀 있어 곧 모내기 준비를 마친 듯 했다. 대만은 2기작 할 정도라니 모심을 준비인지는 잘 모르겠다. 밭에는 갓 심은 것으로 보이는 어린 채소도 보인다. 그리고 무엇인지 심겨 있다. 평온하고 한적하지만 먹고 사는 데는 크게 어려움이 없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곳곳에는 처음 보는 신기한 식물들도 보이고 낯익은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었던 식물들도 보였다. 역 가까이서 사르비아 꽃 채송화 꽃도 보았으니 우리의 여름인가 했고, 유채꽃 같은 무꽃도 보았으니 봄인가도 싶었지만 분명 아니었다. 서늘한 가을 날씨였다.
지루함을 벗어나려 역 이름을 몇 곳 적어보았다. 松山, 八堵, 瑞芳, 頭城, 壯圍, 礁溪, 宜蘭, 羅東, 蘇渙新, 南澳, 新城 등등이다. 한자말 속에는 그 이름에 어울리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산행할 때 간혹 그 지명을 한자로 알아보기도 했었다. 인터넷을 검색하던 춘이 말이 성욱이가 대아고등학교로 발표가 나서 같이 축하한다는 말이 오갔다. 성욱이 말이 친한 친구는 명신이어서 안 됐다고 했다. 제도가 무엇인지 집 가까이면 부모나 아이 모두 좋아할 텐데 등교 시간이 한 시간은 걸려야 한다니 좀은 그렇다. 지금은 입학생 수가 줄어 어느 한쪽이 많으면 한 학급 늘려주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13시가 돼서야 화련 역에 닿았다. 생각보다 큰 마을이었다. 화련이 관광지로서 인구가 많이 불어났고 대리석이 가까이에 많다보니 일거리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오다가 본 바닷가 큰 건물들 중에 시멘트 공장이 많은 것도 이곳에 석회석이 많기 때문이란다. 석회석으로 물은 좋지 않고 바다도 석회석으로 많이 오염돼 있다는 것이다.
7. 바다 이름이 칠성담七星潭
기차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칠성담을 가면서 버스 기사가 차를 세우고 길가 가게의 여자가 무얼 건네고 차가 다시 출발했다. 가이드 말이 빈랑이라는 각성제를 기사가 사서는 거의 하루 종일 씹는다는 것. 불법이 아니고 기사들이 이미 중독이 돼 있다는 것이다. 빈랑은 야자수의 한 종류인데 맛이 있는 것도 아니고 씹음으로서 잠을 쫓는다는 것이다.
칠성담의 담은 연못이라는 의미다. 못이라면 잔잔해야할 텐데 이곳은 이름은 연못이지만 산이 좌우로 약간 둘러있는 화련을 대표하는 해변공원이다. 북두칠성이 가장 잘 보이는 바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다. 또 멀리서 해변을 바라보면 별 모양으로 보인다고도 하고. 푸른 바다와 짙푸른 몽돌해변으로 대만 현지인들도 즐겨 찾는 그런 해변이란다. 예전에 찾았던 기억으로 돌을 하나 주워 보았다. 돌멩이에는 원 무늬와 구름 같은 줄이 셋 있는 높이 10cm 내외의 크기였다. 바로 세워 둥근 무늬는 天을 의미하는 중국식 생각으로 희망과 그 희망이 성취되길 약속하는 의미로 승욱이에게 주고 싶었고 김해공항에서 넘겨줬다.
바람이 심하고 파도가 거세게 몰아쳐서 물 가까이는 위험할 정도였다. 오랜 시간 기차여행으로 지친 몸과 기분을 확 풀어주는 그런 기분전환용 역할로 칠성담은 괜찮은 해변공원이었다.
칠성담을 나와 ‘屋之石’이라는 대리석 공장을 견학했다. 대리석 공장이 아니라 옥으로 만든 제품을 전시판매하는 관광객 대상 판매장이었다. 나에게는 관심을 끌지 못했다. 먼저 나와서 입구의 12支神像에 쓰인 글씨를 구경했다. 차례로 金鼠開元, 牛轉乾坤, 福虎生風, 玉兎呈祥, 祥龍獻瑞, 靈蛇獻財, 馬到成功, 三羊開泰, 封候加冠, 金鷄報吉, 忠義傳家, 諸事如意다. 해당 12지의 祥氣를 나타내는 글귀였다. 올해는 개띠해이니 忠義傳家가 해당되는 셈이다.
태로각 입구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호텔식 뷔페다. 몸이 안 좋으니 맛나 보이는 것도 없고 맛있는 것도 없었다. 허기지지 않을 만큼 배를 채웠다.
8. 신비의 태로각太魯閣 협곡
태로각 협곡은 그야말로 좁은 길이었다. 대만은 북에서 남으로 커다란 산맥이 이어져 있어 동서로 통행이 거의 불가능하여 중국 본토와의 전투를 대비해 퇴각로를 만들어야 했던 대만정부가 군인과 죄수를 투입해 4년에 걸쳐 이 길을 완공시켰다고 한다. 깊고 절벽에 가까운 이 협곡에 길을 낸다는 것은 정말 힘들었겠다 싶다.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그 시대에 인력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암석을 깎아 만든 반 터널길이 많았다. 차 한 대가 지나갈 만큼 좁은 길에 차도 사람도 다닌다. 보는 것만으로 겁이 날 정도다. 다른 여행사는 관광객에게 헬멧을 나눠 주건만 우리 여행사측에서 조심하라는 말만 건넨다. 선진국이라면 안전이 염려되어 다른 조치를 취하거나 통행제한을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폭포를 보았다. 산 중간에 높이 걸려있는 폭포가 신기했고, 물이 흐르지 않는 골짜기에 폭포를 볼 수 있는 것이 특이했다.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곧 폭포인 셈이다. 燕子口는 바위벽에 보이는 일종의 구멍을 말한다. 제비가 그 구멍 속에 살았는지 여부는 모르지만 제비집처럼 느껴져서 붙인 이름이란다. 우리 일행은 流芳橋 건너편에 있는 전망대까지만 갔다. 물의 흐름이 매우 급하다. 거기다가 석회석이 깎여 물에 섞이니 물은 늘 석회석 물이어서 먹기는커녕 발조차 담글 수 없는 물이었다. 전망대 부근에서 올려보니 높이 100여m 훨씬 넘어 보이는 깎아지른 듯 절벽 사이에 우리가 서 있었다. 20억년 지구의 세월을 느낄 수 있다는 웅장하면서도 비현실적인 광경에 압도당하는 곳이라는 그랜드캐니언처럼 광활하지는 않지만 대자연의 신비 앞에 자신의 몸을 움츠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협곡 길(東西橫貫公路)은 장개석이 당시 건설부부장이었던 아들 장경국으로 하여금 만들게 한 군사도로란다. 1956년 시작해서 1960년까지 완공하기 까지 16km를 만드는데 212명이 사망한 난공사였다고 한다. 이 때 돌아가신 분들의 영혼을 모신 사당이 長春祠다. 차를 세우고 다리를 건너니 彌陀巖이라 새긴 사당 입구는 폐쇄되어 들어갈 수가 없었고 太魯長春이라는 글을 돌에 새겨 박아두었으며 관음상?이 모셔져있는 앞에 돌아가신 분들의 이름이 새겨진 비가 있었다. 장춘사는 저승에서 늘 봄처럼 지내라고 비는 사당이란다. 장춘사 아래 몇 가닥의 폭포 물줄기가 보인다. 협곡에서 볼 수 없는 맑은 물이다. 장춘사 뒤의 집은 휴게소라는데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위치에 있었다. 1975년 이후 민간에 개방되면서 태로각이 관광지로 개발되게 되었단다. 인디언 바위, 킹콩바위, 잉어바위, 부처손, 九曲幡龍 등의 이름표를 달아 소개한다. 산사태로 일부 폐쇄하고 새 길을 만드는 등 관광지 개발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다.
29년 전에 왔을 때는 원주민들의 민속공연을 보고 같이 사진을 찍으며 모델료를 주기도 한 기억이 있는데 이번에는 그런 일정은 없었다.
5시경 한국관이라는 곳에서 불고기로 저녁식사를 했다. 꽤 맛이 있다는 생각은 익숙한 맛이라 그런 것 같았다. 식당이 신성역과 화련 역 중간쯤이라며 일행은 화련역으로 가서 7시04분발 열차를 탔다. 올적에는 3시간이나 걸렸지만 타이폐이역으로 가는 기차는 급행이서 30분 정도 적게 걸렸다. 내일은 여유 있게 8시 30분에 호텔을 출발한다고 했다.
9. 옛 전통시장 지우펀(九份)(1.13-3일차)
지우펀 닿기 전에 넓은 주차장에 관광버스를 세워두고 셔틀버스를 타고 돌고 돌아가는 비탈길을 올라 마을 입구에서 하차하였다.
지우펀(九份)은 타이완 북부 신베이 시에 있는 마을. 과거에 아홉 집밖에 없던 외진 산골 마을에 항상 아홉 집 것을 함께 구입해 아홉으로 나눴다고 해서 '九份'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청나라 시대에는 금광으로 유명했고, 인구가 많아지게 되었으며, 일본 지배시 금 채굴지였기도 하단다. 지금도 곳곳에 일제 강점기 건물이 남아있으며 지형의 특성상 모든 길이 구불구불 이어진 계단으로 되어 있고, 그 계단을 따라 작고 오래된 집들이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비탈진 골목길에는 돌을 박은 길이 많고 골목 양쪽에 시장이 형성되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고 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대표작인 <센과 치이로의 행방불명>, 대만의 <비정성시>, 2008년 sbs 드라마(PD와 작가, 연기자, 매니저 등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삶과 사랑 이야기를 다룬) ‘온 에어’ 촬영지로 이름나면서 이름이 오르내렸고, 특히 최근엔 사드 역풍으로 대만에 들이닥친 한국인 관광객들로 한국 상대 관광업소마다 몸살을 앓고 있을 정도가 되었다는 것. 둥근 홍등이 늘어선 골목길 야경이나 천등을 날리려면 이곳에서 숙박을 해야 한단다.
평일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복작거렸고 특히 한국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구불구불한 골목길 먹거리뿐만 아니라 기념품점, 찻집, 식당 등 다양한 모습의 시장거리가 비탈길을 그대로 이용하여 즐비하게 늘어섰으니 정겹고 독특해 보였다. 우리 일행도 유명하다는 밀가루 반죽에 아이스크림을 싼 “땅콩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어 보았다. 관광객을 불러 모을 만 했다. 사람들이 사진을 찍으려 줄을 선 곳은 이런 저런 이야기가 있는 곳이었고, 음식을 사기 위해서 줄을 선 곳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음식이 있는 곳이었다. 내가 유심히 본 가게는 한 평도 남짓해 보이는 좁은 가게에서 8명의 사람들이 쉬지 않고 일하는 모습이었다. 이 좁은 가게에서 저 많은 사람들의 일자리가 있음이었다. 내가 지나간 그 시간에는 정말 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었다. 특히 통영의 벽화마을 동피랑, 부산의 감천 문화마을을 떠올려 보았다. 그렇지만 국제적 관광지가 되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었다. 시간이 여유가 있다면 적어도 반나절은 즐길만할 것 같았다.
10. 기암 괴석의 야류(野柳)해상공원
지우펀에서 머지 않는 곳에 해수의 침식작용에 생성된 각종 기묘한 형태의 암석들이 자리한 해상공원이 있었다. 북 해안 쪽으로 뻗은 좁고 긴 모습을 한 해갑(海岬)이다. 이곳의 기암괴석들은 세계 지질학적으로도 중요한 가치가 있는 생태계 자원이라 하니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큰 의의가 있다고 한다. 버섯바위, 촛대바위, 벌집바위, 생강바위, 지구석, 두부암 선녀화, 미녀바위, 계란바위, 아이스크림석 등의 이름을 붙여 놓았다. 그중에서 단연 사람들이 몰려 사진 찍기 줄을 선 곳은 여왕의 머리다. 그리고 게종류와 조개류의 화석들이 선명하게 박혀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넓은 곳은 아니지만 지구의 신비스런 한 모습이었다.
11. 야외온천 金湧泉
타이완 대표적인 온천의 하나인 金山의 금용천은 북쪽해안가에 위치하며,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음이온이 포함된 해저심층온천수를 사용한단다. 청나라 통치시대 대지진으로 발견되었으며, 여러 가지 온천수로 이뤄져있으며, 노천온천, 실내온천(남녀구분), 수영장등의 시설과 각종 편의시설 등이 구비되어있다고 한다.
바닷가라 오늘따라 바람이 너무 세차 노천 온천이 달갑지 않았지만 수영복까지 준비해준 딸들의 성의를 봐서라도 망설일 수가 없었다. 입구에 들어서니 바구니를 하나 준다. 이 바구니에 벗은 옷을 담아 옷장에 넣고 환화 800원 상당을 투입하고 키를 뽑으면 보관이 되고, 한번 잠긴 옷장은 열면 다시 20 신대만화를 투입하지 않으면 잠글 수가 없다 한다. 실내온천 가는 길은 노천온천을 거쳐 한참 가야하고 노천온천은 문만 열면 곧 바로다. 김이 많이 올라오는 쪽을 향해 걸어가서 몸을 담그니 추위를 느끼지 않을 만큼 따뜻하다. 날씨만 괜찮다면 재미있을 것 같지만 냉탕에서 수영은 아닌 것 같았다. 몸을 씻고 나오니 오후 내내 피부가 미끌미끌하다. 이름값을 하는 것 같았다. 예전의 산골짜기에서 간이 화장실 같은 목욕탕에서 온천수에 몸을 씻으며 퀴퀴한 유황냄새를 맡던 온천과는 너무 달랐다.
12. 가게 같잖은 가게, 화과자점
아이들이 원해서 찾아간 가게였다. 4-6평 쯤 되어 보이는 가게에 진열장은 과자실물이 아니라 포장 박스뿐인 것 같았다. 커다란 탁자가 3개 보였다. 각 탁자 앞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한 팀이 들어오면 점원이 12종류의 맛 과자를 맛볼 수 있게 준비하고 주문서를 나눠준 후, 번호와 맛, 만든 재료 등 하나하나 설명을 한다. 한 가지 설명을 마치면 맛보기를 내 놓는다. 끝나면 다음 차례로 넘어간다. 설명이 끝나면 손님은 주문서를 작성하고 점원은 다른 곳으로 옮겨 설명(판촉)을 계속한다. 가만히 보니 과자를 큰 박스로 포장해서 들고 가는 손님이 보였다. 가게도 손님도 대단하게 보였다. 우리 가족들도 적게 사는 게 아니었다. 나이든 사람들로서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진열된 물건이 없는 가게 같지 않은 가게가 이렇게 번창하는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다. 그만큼 맛이 있단 말이겠지. 이곳 지출 영수증을 가이드에게 주면 가이드는 이를 기부하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단다. 일정 비율로 기부가 되는 것인지 다음에 가이드에게 보상을 해주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13. 정식 일정의 하나인 잡화점 방문
꽤 넓고 큰 잡화점이었다. 보석, 시계, 건강 용품 등 다양한 잡화가 정말 많이 진열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여행사가 관광객을 이끌고 한 두 번은 찾아가야하는 쇼핑코스다. 판촉자가 열심히 설명하건만 우리는 시큰둥했다. 사실 별 관심 있는 물건들도 없었고 생각보다 값이 비쌌다. 산호가 바다오염으로 줄어들어 값이 크게 올랐단다. 29년전 이곳 대만에서 샀던 산호목걸이가 생각나서 이야기 했더니 집사람은 기억이 없단다. 당시 나는 거금 15만원인가 주고 산 것 같았다. 맵시가 약간 촌스러워 보이긴 했지만 큰맘 먹고 샀던 것인데 아직도 집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지운이가 뭘 하나 사고 싶어서 흥정을 했으나 맘대로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구입여부는 잘 모르겠다.
잡화점 벽에 걸린 액자에는 다음 글이 씌어져 있었다.
家徒四壁 位不行氣 집에는 사방 벽밖에 없다. 자리에서 기운 얻어 움직이지 못하는구나.
珠光寶氣 邪氣不侵 보배로운 구슬 빛은 삿된 기운의 침입을 막아준다.
一命二運三風水 첫째 하늘의 명이요, 둘째 운이요, 셋째 풍수다
風水置物强化爾 풍수를 강화하는 물건을 비치하지 않을 수 있는가?
물건(벽에 걸거나 몸에 지니는)을 사고 싶게 유도하는 문구인 것 같았다.
14. 발 맛사지
오늘의 마지막 일정이다. 두 개의 맛사지 숍이 나란히 있었다. 가게 앞에 나붙은 광고로 보니 유명인들이 다녀갔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네 살짜리도 맛사지가 가능하다고 하여 다 같이 들어갔다. 가이드는 팁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나이든 맛사지사가 많으며 잘 한다고 했지만 시원한 느낌도 잘 한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피로가 많이 가셨는지 호텔에 와서도 강행군한 피로가 덜한 느낌이었다. 저녁은 샤브샤브였다. 고기는 비게가 너무 많아 좀 꺼리면서 먹었고 다른 것은 먹을 만 했다. 난 호박과 토란 채소와 게맛살 등을 좀 많이 먹은 것 같다. 가이드가 ‘여행이야기’ 사장이 전해주라 하더라며 대형 케익을 하나 건네주었다.
호텔로 돌아와 한 방에 모두 모여서 칠순이 되는 해의 집사람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같이 케익과 술을 조금 마셨다. 이구동성으로 케익이 맛있다고 했다. 케익이 너무 커서 남은 것은 내일 점심 때 먹기로 했다.
15. 세계 4대 박물관의 하나 국립국립고궁박물관 (1.14-4일째)
대만의 고궁박물관은 중국 국민당이 공산당에게 패하여 타이완으로 이동할 때에 대륙에서 가져온 문화재가 대부분인데 도망가는 배를 격파할 수 있었지만 문화재 때문에 공격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값진 문화재들이 많아,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함께 세계 4대 박물관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한다. 워낙 유물이 많기 때문에 3개월에 1번씩 전시하는 소장품을 전부 교체하고 있어서, 모든 소장품을 일별하려면 12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입구에서 무선수신 가능한 이어폰을 받고 가이드는 무선마이크로 같이 다니면서 설명해주었다. 기억에 남는 것은 대형 삼발이 솥, 32겹으로 조각됐다는 상아투화운룡문투구, 옥배추(翠玉白菜), 동파육을 닮았다는 삼겹살 모양의 肉型石 등이다. 왕실에서 수집한 것이 많아서인지 정말 귀중한 전시품들이 많은 것 같았다. 중국만의 문화유산이라기보다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잘 보존해야할 전시품이었다. 3층까지의 전시관에는 갑골문, 옥기, 도자기, 도기를 비롯하여 예기, 악기, 병기, 조각, 가구, 문구, 화폐 ,복식 등등 정말 다양한 전시품들이 있었다. 국민당 정부가 중국 정부 소장품의 약 4분의 1을 가져와서 고궁박물관에 전시품을 전시하면서 장제스 총통이 유물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단다.
"대만의 2천만 국민이 모두 일을 하지 않더라도 화련의 대리석 만으로 3년을 먹고살고, 고산 지대의 차(茶) 만으로 2년을 먹고살며, 고궁 박물관의 입장료 수입만으로 1년은 먹고 살 수 있을 것” 이라고....
작지만 큰 나라 대만의 숨은 底力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라 말한다.
전시품은 감상은 가이드의 능력, 안내에 따라 제대로 볼 수도 있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으니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여행 내내 계속 컨디션이 안 좋아 걱정을 하게 했던 서연이와 수현이가 오늘은 다리 아프다고 짜증내지 않고 잘 움직여 주어서 고궁박물관 관람은 제대로 한 것 같았다. 사실 더 좋은 전시물과 안내가 있다 해도 한참을 쉬어서 다시 보지 않으면 어려울 것 같았다.
관람을 마치고 1층 기념품점에서 지운이가 붓 두 자루를 사줘 기꺼이 가져오긴 했는데 품질은 잘 모르겠고 우리나라의 붓 값에 비하면 비싼 것 같았다. 그래도 기념품 아닌가.
12시가 훨씬 지나서야 박물관을 나와 공황 근처 식당으로 갔다. 현지식이라 하는데 여행 중 식사로 두 번째로 맘에 들지 않는 식사였다. 어제 저녁에 먹다 남은 케익이 있어 좀은 위로가 되었다고나 할까.
16. 여행 마무리 이야기
이번 여행은 딸과 사위들이 아내 유영희의 칠순 되는 해를 맞아 축하기념여행으로 추진되었다. 여름에는 형제내외의 여행이 있다하여 앞당긴 셈이다. 방학이기에 시간 내기가 좀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태원이도, 선해도 참여하지 못했고 래성이 내외도 참여하지 못해 아쉬웠다.
여행지를 결정할 때도 일본과 대만이 거론됐고 최종 대만으로 결정이 났다. 나는 해외여행이 흔치 않던 1989년 도교육청에서 벽지근무 교원들을 대상으로 보내준 해외연수 일환으로 대만과 싱가폴을 다녀온 적이 있었기에 처음에는 다시 가볼 만큼 큰 나라가 아닌데 하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할 만큼의 세월이니 확인하는 좋은 기회가 되겠다는 기대를 걸고 갔었다.
예전의 페인트가 벗겨진 건물과 퀴퀴한 냄새 그리고 별로 깨끗하지 않은 시가지의 얼굴과는 달리 속은 잘사는 나라라고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지금은 옛이야기처럼 보였다. 다만 시내에 예건물들이 보이긴 했지만 너무 많이 달라보였다. 세계 제1의 컴퓨터 부품 수출국, 외화 다량 보유국. 통신 선진국이 된지도 오래고, 엄청난 자본과 기술력을 가지고
북으로 활로를 찾고 있는 나라로 변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실감이 났다.
주요 관광지에서 중정 기념관, 고궁 박물관, 야류해상공원 등의 큰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고, 용산사, 야시장, 지우펀, 야외온천 등은 새로운 경험을 안겨준 여행지이기도 했다. 젊은이에게는 여행이고 나이든 사람들에게는 관광이라는 말이 와 닿는다. 예전에 한국학교를 방문하여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는지 궁금해 하고 탐색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냥 그야말로 관광에 지나지 않는 여행인 것 같았다. 그러나 오랜만에 나간 해외여행은 새로운 일상생활의 활력소가 되는 건 틀림없었다.
저희들도 바쁘고 넉넉하지 못한 여건인데도 많은 돈을 들여 부모를 즐겁게 해주려 애쓰고 배려해준데 대하여 고맙고 또 고마웠다.
글재주가 없는 내가 이 글을 정리한 것은 이다음에 후손들이 한번쯤은 읽었으면 하는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