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星州)에서 살아온 고령박씨성주파 박정희 대통령 가문
박정희 대통령(1917~!979)은 성주(星州) 옆의 선산 구미에서 출생했다. 그러나 그 부친 박성빈(朴成彬)은 이곳 세종대왕 태실이 있는 성주군 월항면에서 오랫동안 대를 이어 살아왔다. 박정희 대통령의 가문은 역사적으로 성주(星州)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대통령 후보 경선 선거 켐페인에서 가장 먼저 성주(星州)에서 시작한 역사적 배경이기도 하다.
*박정희 대통령의 부친 박성빈. 성주군 선남면 사읍에서 대대로 살아온 집안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박혁거세 29세손인 경명왕(景明王) 차남인 고양대군(高陽大君) 박언성(朴彦成)을 중시조로 한 고령박씨 성주파의 후손이다. 흔히 많이 알려져 있는 조선시대 숙종 때의 암행어사 박문수의 직계 후손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영정과 그 부모 박성빈과 백남의의 영정이 김천 직지사에 모셔져 있는 것은 성주를 중심으로 고령 칠곡 선산 금릉군이 역사적으로 하나의 가야권을 이룬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하겠다.
직지사 명부전에 봉안되어 있는 박성빈과 백남의 부모 영정 아래에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영정과 그 위패가 모셔져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어릴 적 부모를 따라 직지사를 자주 방문했다.
박성빈(朴成彬 1871-1938)은 4대 독자였던 박영규의 세 아들 중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북 성주군 월항면 철산에서 태어나 가업인 농사를 짓고 살았던 박성빈은 도회지로 진출하기 위하여 전답을 팔아 서울로 오가기도 했다.
박성빈이 구한말 20대 때 무과에 급제했는지 여부에 대하여서는 불확실하다. 또한 성주에서 동학농민 접주로 활약했다거나, 그반대로 동학군을 진압한 댓가로 영변군수(또는 영월군수)를 했다는 기록들도 모두 박정희 대통령 재임시절에 주변사람들의 기록 또는 그 시기에 개정된 기록에서 보이기 때문에 그 정확한 진상은 알 수는 없다. 다만 박대통령 재임시인 1976년 2월17일의 청와대 공보비서관실의 박대통령 가계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박대통령의 선친 성빈공은 무과에 급제하여 고종 때에 평안도 영변 군수에 제수되어 통훈대부란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이조가 말기에 접어들면서 매관매직의 폐풍이 생기고 관기가 문란해져 성빈공은 전임자가 자리를 내어주지 않아 중앙정부의 부임명령만 기다리다가 끝내 고향인 경상도 성주에 머물고 말았다. 고향에 있으면서 중앙정계에 대한 울분으로 세상사에 실망하고 있던 성빈공은 1892년12월 동학당이 당시의 학정에 못이겨 혁명을 일으키자 지방 지도자로서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관군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1893년 당시 정부는 국민들 사이에 팽배해 있던 불평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서 대사령을 내렸다. 이때 성빈공도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 후 성빈공은 우울한 마음을 풀 길이 없어 책과 술을 벗삼아 세월을 보냈다. 이때부터 부군을 모시고 자녀를 기르는 고된 책임이 백남의 여사에게 돌아갔다."
군사혁명을 일으켰던 박정희 대통령 주위 인물들에게 그 부친 박성빈의 동학난 가담 또는 진압이라는 두 상반된 사안은 예민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조선왕조 개창자들의 소급 역사를 다룬 <용비어천가>의 '해동육룡'처럼 다소의 가감이 있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주군 월항면 철산에서 박성빈은 부친 박용규를 따라 외삼촌이 있는 칠곡군 약목면으로 이사를 하게 된 것은 분명하다.
박성빈이 성주 월항면 철산에서 '칠곡군 약목면'으로 이사를 한 것을 사실상은 성주에서 성주로 이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재의 칠곡군 약목면과 기산면은 낙동강 서쪽의 성주군쪽에 붙어 있어 본래는 성주군이었다.
성주는 역사적으로 대구보다 오래된 가야의 도읍지로서 신라 이후에도 칠곡, 현풍, 고령, 금릉 등의 여러 면들이 성주에 포함되어 있다가 1906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성주에서 떨어져 나갔다. 성주군의 인곡,덕곡,노석,다산면이 고령군으로, 노곡면이 현풍군으로 증산면이 금릉군 지례면으로 편입되었다. 그런 뒤에 1914년 3월 1일 부령 제 111호로 부,군,면이 통폐합됨에 따라 성주군 신곡면이 금릉군으로 또 분리되어 나갔다. 그때 다만 금릉군 증산면 고방리('고배이'로 현지 발음)가 성주군 금수면으로 편입되어 12면이 되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1934년 2월 1일 지사면과 청파면을 통합하여 수륜면으로 하고, 용두면,성암면을 통합하여 용암면으로 개칭하여 10개면이 되었다.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 9409호로 성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그런 뒤에 1983년 2월 15일 대통령령 제 11027호에 의거 선남면 노석리가 칠곡군 약목면으로 편입되고 고령군 덕곡면 성동이 성주군 수륜면에 편입되었다. 불과 25년 전만 해도 칠곡군 약목면의 일부가 성주군 선남면이었던 것이다. 이때 성주군 자체 내에서도 용암면 유서리가 선남면으로 개편되었으며, 6년 뒤인 1989년 용암면 명포리 장학리가 선남면으로, 월항면 어산리가 초전면으로 편입되었다. 1994년 4월 13일 성주군 조례 제 1432호로 금수면 봉두1,2리가 봉두리로 되었고 지금 현재 1개읍 9개면으로 되어있다.
1840년 성주군 월항면 철산 동네에서 박이찬의 외아들로 태어난 박영규가 고령박씨 성주파로 오랜 세대를 살아온 성주군 월항면 철산에서 박성빈을 낳았다. 성주 철산에서 청년 시절까지 살았던 박성빈이 아버지 박영규를 모시고 칠곡군 약목으로 이사한 배경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박정희의 할아버지이자 박성빈의 아버지 박영규는 1914년 74세로 죽을 때까지 약목에서 살았으며, 그의 묘도 현재 약목면 관남동에 있다. 위의 행정 개편을 보면 박성빈의 부친 박영규가 죽을 때까지 약목면은 성주군 산하의 영향권에 있었던 것이다.
칠곡군 약목면으로 이사하여 한 살 아래인 백남의와 혼인하여 낳은 5남 2녀 중에 다섯째 아들이자 아들 딸 전체의 막내인 박정희를 낳기 1년 전에 선산 구미 상모동으로 이사를 했다. 상모동에서 박성빈이 박정희를 낳은 1917년의 나이는 46세 때였다. 그러니까 박성빈이 네 아들을 낳고 마지막 다섯 째 아들을 낳기 직전인 45살 때까지 결혼 생활은 성주군 영역인 약목에서 살았다.
박성빈이 장남을 낳았을 때의 나이가 24세이니 그가 약목으로 이사한 나이는 20대 초반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학난의 가담 또는 진압의 기록이 1892년 그의 나이 22세로 나오고 그 여파로 약목으로 이사한 것처럼 기록된 것으로 보면 박성빈이 성주 철산에서 약목으로 이사한 것은 1893년 전후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의 약목은 행정적으로 성주권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약목에서 박성빈이 4남 2녀를 데리고 처가인 선산군(善山郡) 구미 상모동으로 옮겨 소작농으로 살기 시작한 이듬해에 박정희 대통령이 그곳에서 태어났다. 성주에서 젊은 날에 살다가 칠곡과 선산으로 이어진 박정희의 아버지 박성빈은 아브라함 링컨으로 말하면 성주(캔터키), 칠곡(인디애나), 선산(일리노이)가 되는 셈이다. 이러한 면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태어나기 직전까지 그 부친 박성빈은 '성주사람'으로서 그 원적인 성주가 그 조상들이 삶을 이어온 터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박근혜 전 대표 또한 그 본관이 '고령박씨 성주파'이다. 성산가야 대가야 권에서 '성주파'가 붙을만큼 성주는 오랜 역사와 그 권위가 있었기 때문에 '고령박씨 성주파'라는 파가 이어져 온 것이다.
조선왕조가 들어서고 태조 이성계는 그의 아들 태종 이방원이 태어나자 그 태를 안치한 태봉 지역으로 성주(星州)를 선정했다. 이 사실은 조선왕조의 역사와 함께 성주가 만세대계를 희원한 명당 지역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다. 한양에 도읍을 하고 있지만, 그 정신적인 왕조의 뿌리를 성주에 두고자 했다는 것을 태조 이성계가 그의 아들의 태봉을 성주에 둔 의미일 것이다. 세종 때에는 훈민정음 반포 한 해 전 그의 모든 아들들 18명의 태를 성주에 봉했다. 이것은 세종대왕의 국토 코스몰로지까지 성주(星州)가 조선왕조의 정기를 뿌리내리는 성지(聖地)로 삼고자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가 아는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의 태봉이 성주에 있었기 때문에 그가 자라 태종으로 등극했으며 그 태종의 아들 세종대왕이 성주의 기운으로 태어났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결국 조선왕조 오백년 왕실의 혈통은 성주 태실의 기운으로 뻗어갔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선산 구미에서 태어났으나 그 부친 박성빈은 성주군 선남면 사람으로서 오랜 역사 동안 성주에서 살아 내려온 고령박씨 가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