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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론 스크랩 4부. 구원의 서정, 순서(연합)? / 박혜근 교수
한아름 추천 0 조회 309 12.08.14 23:5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4부. 구원의 서정, 순서(연합)|다시읽고싶은글
keeper77 | 조회 138 |추천 0 |2006.07.20. 17:12 http://cafe.daum.net/keeper77/17Ia/6 

 

 

 

4. 구원의 서정 (구원의 순서)


   구원의 순서는 논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의 구원이 구약이나 신약에나 구원 받을 때는 일정한 구원으로 경험되는 요소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 받을 때 구원의 경험의 공통적 요소가 있는가? 구원의 서정, 구원의 순서를 말할 때 구원의 순서가 중요하냐? 물어야 한다. 예전에는 구원의 순서(소명 믿음 회심 칭의 중생 양자 성화 영화)중에서 어느 것이 앞에 오고 뒤에 오느냐 에 대한 논쟁이 많았는데 최근에는 별로 없는 것 같다 교리에 대한 관심이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찬양이 중요하다고 한다. 찬양이 중요하다고 해도 교리만큼 중요하지 않다. 참된 신앙에 대한 표현은 교리에서 왔다. 교리는 성경에서 왔기 때문에 교리가 잘못되면 신앙이 다 비뚤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복음주의의 위기는 바로 곧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고 동정녀 탄생 인정하고 육체의 부활을 믿고 영생을 소망하는 복음주의 위기는 교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에 있다.


  교리가 성경에서 왔다면 그 교리를 압축하고 가르치는 교리의 진의 여부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교리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신앙을 주관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곧 체험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당장 어떤 효과를 갖느냐에 관심을 갖는다. 바른 교리를 가르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오늘날 구원의 서정이 관심의 대상이 되지도 못한다. 구원을 받을때 가장 먼저 오는 사건이 무엇인가?


  - 화란의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는 구원의 서정을 다룰때 제일 먼저 오는 것을 칭의를 먼저 강조한다. 그 이유는 구원은 영원전에 작정이 있었음을 확신했다. 신학적 이유와 동기가 있었다. 영원전에 죄인을 칭의하신다는 것으로 본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것에 깊은 관심을 갖었다. 하나님의 칭의 행위는 시간과 공간안에서 실현되는 것은 사실인데 실현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그들이 먼저 의롭다고 칭의하시는 결단이 있었기 때문에 칭의가 먼저 온다고 주장했다. 영원전에 작정하였기 때문에 칭의이다 라고 주장했다.


  - 윌리암 훅스마는 중생이 소명보다 먼저온다고 주장했고 믿음과 회심이 칭의보다 먼저온다 주장하였다. 그는 아브라함 카이퍼를 비판했는데 구원의 실현과 구원의 적용을 혼동했던 결과라고 비판 했다. 훅스마에게의 구원은 믿음에 따른 결과라 보고 있다. 중생이 제일 먼저 온다 라고 했다.


   - 존 머레이는 시간적 순서보다 논리적인 순서가 먼저 있다 라고 보고 있다. 요한복음 3장을 보면, 논리적으로 믿음을 회개보다 선행하는 것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자연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없는 영적으로 죽은 상태임이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롬8장28절에서는 믿음이 칭의보다 선행한다고 했고, 갈2장16절 믿음이 선행한다고 했다. 믿어야 구원의 열매 따른다고 했다. 먼저 중생하지 않고 믿어라 라고 했던 것이다. 죤 머레이는 중생, 믿음과 회개, 칭의로 그 순서를 보았다. 그렇다면 부르심과 중생의 논리적인 선후 관계는? 그는 롬8장28절에서와 같이 부르심이 있고 중생, 그리고 믿음과 회개, 칭의, 양자삼으심, 성화, 견인, 영화로 그 구원의 순서를 보았다.


  - 마지막으로 화란의 신학자 G.C.벌까우어는 조직신학의 전체 권수를 쓰신 분인데, 구원의 순서를 정하는 것 자체가 성경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구원의 서정은 청교도 신학자중, 윌리암 퍼킨슨가 최초로 구원의 서정을 만들었다. 그는 교인들을 교육하기 위해서 골든체인(Gold Chain)을 만들었다. 원래적으로 칼빈에게는 구원의 서정을 논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후예들이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 청교도 신학자들이 구원의 서정을 심각하게 신학화했다. 구원의 서정을 논하는 것은 잘못이다. 벌까우어에 따르면 구원의 서정을 신학적으로 몰입하면 구원자체가 가지고 있는 풍요로움을 해친다 라고 말했다. 즉 구원 자체의 경험의 유기적인 단일성을 그릇되게 해석한다. 롬8장 28~30절 근거로 구원의 서정을 시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롬8장28~30절은 구원의 서정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최종적 완성인 그 확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 벌코프도 구원의 서정을 제한한다. 구원의 서정을 나누면 우리가 갖고 있는 구원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엡1장4절은 구원의 서정을 말하기 위한 구절이 아니다. 롬8장 전체의 뜻은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교인들에게 상술하는 과정에서 주어진 말씀이다. 사도는 무엇이라 말하는가? 신자들이 이르게 되는 구원의 궁극적인 결과에 대한 확신에 대한 근거는 사람의 성품이나 노력이나 현재적인 상태에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로마서 8장의 뜻이다.


  왜 내가 하나님이 작정하신 대로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인가는 확신에 대한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완전한 것이다. 롬8장의 주제는 구원의 서정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완성자이신 하나님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다. 구원의 첫번째 오해는 성경의 오해이고 두 번째 오해는 철학적 사고에 있다. 구원의 서정은 청교도 신학자들에 의해 주도 되었다. 당시에 청교도 청교도 신학자들 사이에 철학적 사고가 널리 퍼져 있었다. 청교도 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자적 사고인 원인과 결과라는 사고 양식이 어느 정도 이들 사이에 퍼져있었다. 그래서 그 원인과 결과를 살펴보면, 순환적으로 부르심, 중생, 믿음과 회개, 칭의, 양자삼으심, 성화, 견인, 영화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서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신적행위 곧 하나님의 은혜는 오로지 불러주신 사건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불러주시면 하나님이 관여하지 않으셔도 도미노 현상처럼 중생, 믿음과 회개, 칭의, 양자삼으심, 성화, 견인, 영화로 이루어진다 라는 것은 “구원론적인 이신론”이다. 이신론적인 구원관은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 법칙을 주어놓고 하나님이 영원전부터 불러주시고 각 단계마다 일일이 인격적으로 관여하지 않아도 구원은 자기 목적을 향해 전개되어 나간다고 믿는 것이 구원의 서정이 갖는 제일 큰 잘못이다. 성경은 이렇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부르심도 성령의 사역이다. 부르심이 어떤 사람에게는 유효하게 해당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복음을 전하면 복음을 듣는 자가 있는가 하면, 반면에 끝까지 듣지 않는 자가 있다. 부르심에도 복음의 말씀도 해당되는데, 사도행전의 사도 바울이 빌립보 지방의 자주장사 루디아를 만난 사건에 보듯이 성령이 마음을 열어 주의 말씀을 듣게 하시는 성령의 내적 사역의 역사하심이 있어야 하고 중생도 성령의 매 순간마다 관여해 주시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루디아로 하여금 성령이 마음을 열어 루디아 자신이 듣게 하시는 것이다. 부르심을 유효하게 하는 자가 있는데 즉 하나님의 부르심을 부르심 되게 하시는 분이 있는 것이다. 즉 성령이 있는 것인데, 그런데 부르심만 되고 나면 자동으로 중생하는 것이냐면 전혀 그렇지 않다. 중생 역시도 성령이 우리 속에 오셔서 그 말씀의 씨앗이 열매를 맺도록 사역하지 아니하면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한다. 그래서 사실은 구원의 서정을 가르치게 되면, 가장 큰 심각한 피해(잘못)는 우리의 각 구원의 경험의 매 순간마다, 우리의 구원의 매 순간이 성령의 수고로운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바로 이 인격적 간섭을 부정하게되는데 그것을 잊어버리게 되면, 그냥 기계적인 법칙을 의존하게 되는 것인데, 성령 사역에 대한 가장 큰 오해이다.


  하나님께서 영원전에 예정하신 것이 그것이 구원의 실현이 아니다. 예정하신 대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지 않는다면 예정하신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예정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인데, 구원하시고자 작정하시고 역사속에서 실현해야 하는 데, 그 객관적인 실현은 예수님의 사역과 십자가의 죽으심이다. 실제로 그 사역과 죽으심이 있다면,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해야 하는데, 실제 그 효과를 나타내도록 사역하시고 전개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매 사건마다 성령이 함께 하지 않으면 안된다. 구원의 경험이 연결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의 경험(부르심, 중생, 영화 등)들이 원인은 그 전에 있었던 구원 경험이 아니고 바로 성령의 하나님인데, 그 원인자가되는 것인데, 구원의 서정이 원과 결과를 잇는 철학적인 사고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다. 곧 바로 그 결과를 실현하시고 적용하시는 성령님이 매 사건마다 구원의 경험이 얼마나 많든지 구원의 경험의 원인은 바로 성령 하나님이시다. 구원의 경험(칭의,성화,영화, 부르심 등)의 원인은 성령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철학적인 사고는 인과적인 사고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모델은 구원의 경험이 일직선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한분에게 모든 것이 연결되어있다. 예수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을 통해서만 관계가 있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어떠한 사건도 없다. 우리의 구원의 예수그리스도가 절대로 필요하다. 이유는 우리의 모든 구원이 심지어 영화까지도 그리스도 안에서만 보장되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를 벗어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기독교의 종교는 인격적 관계를 전제로 한 종교이다. 이것 없으면 구원 못받는다. 구원은 언약의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언약적 관계 안에서만 보장이 된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의 아들, 자기의 백성, 나의 신부라고 부르는 특별한 관계에 들어가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인격적 관계에서만이다. 그러므로 자선 사업가는 구원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도 그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약적 관계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행위로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행위를 이용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자기와 특별한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특별한 언약적 관계를 맺는 사람만이 구원받는다.


(2강 마무리 기도)

  : 영원전에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작정하여 주시고 작정하신대로 구속의 사역을 완성하신 주님, 이 시간 우리가 머리를 숙어 주님의 이름을 찬송, 또 찬송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리스도안에 있음을 믿고 고백합니다. 주님만을 높이며 따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내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시고 내 몸으로 주님의 교회를 섬기게 하여 하옵소서. 교회의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로 오늘도 우리들 가운데 계시며, 그 영으로 우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쳐 주시는 줄 믿사오니, 말씀을 들을 때 마다 우리의 믿음이 합하게 하시고 우리의 말과 행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도록 우리를 붙잡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지난 3강 구원의 서정 마무리>


  구원의 서정을 지나치게 집착하면 첫 번째로 인간학 차원의 구원을 판정하는 경향이 생긴다. 다시말하면, 구원을 인간학적인 경향에 귀속시키는 문제를 유발한다. 왜냐하면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인데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선행되어야 하는데 구원의 서정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집착하다 보면 문제가 생기는 데 그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이나 사역을 강조하기 보다는 인간학적인 차원이 지나치게 강조되게 드러나게 된다. 말하자면 구원의 수요자와 성취자 곧 구원을 주시는 자와 성취자는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의 지위보다 인간의 심리학적이나 인간의 경험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예를들면, 믿음은 선택 받은 자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인데, 믿음은 원칙적으로 받았다가 잃어 버릴수가 없다. 이것은 인간의 경험 안에 있는 현상으로서의 믿음이 아니라, 사람이 여러 가지 증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 믿음이 참되고 진정한 믿음이라고 확인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 확인이 최종적인 것이 되지는 못한다. 인간학적인 경험의 차원을 떠나서 믿음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따라서 믿음은 한번 소유하였다가 잃어버린 후 다시 되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강조하건데 근본적으로 선택받은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인간의 노력을 요청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것이다. 믿음을 일으키는 가장 우선적 원인적 우선 순위는 중생 아니면 부르심이라 사람들은 말한다. 믿음은 중생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다 혹은 의심이 있어서 믿음이 있다 라고 말하면서 믿음을 주시는 하나님이 주권적인 행동을 강조하기 보다 인간의 경험하고 있는 구원의 경험을 강조하게 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그러므로 구원의 서정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말라는 것이다. 보통 구원의 서정은 중생, 부르심, 믿음(=회개)라 한다.


  성령이 우리속에 들어오면 첫번째 변화는 성령을 받는 것과 성령을 받는 그것에 가장 직접적인 것은 “생명얻는 회개”를 하게 된다. 고넬료 집에 가서 베드로가 설교할 때 “성령받았다”고 했다. 나중에 예루살렘 공회에 가서 사도들이 그 사건을 접하고 나서 그들이 생명을 얻는 회개를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셨다고 라고 했다. 이것은 성령이라 말하지 않고 생명얻는 회개라 했다. 사람이 회개하는 것과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불세례 그것은 동일한 것이다. 그러니까 방언하고 예언하고 사람을 고치는 신유의 은사 그것이 성령받음에 대한 일차적인 사도적 증거가 아니다. 사도들이 인정했던 성령받는 것에 첫 번째 증거는 영생을 얻는 회개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를 구주로 시인하고 그들의 삶을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이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로 간절히 원하는 심령의 변화, 그것이 바로 성령받은 변화이다. 마음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전에 없던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 없던 마음이 생기면서 과거의 나의 지난날 아프게 생각하고 회개하고 뉘우치고 돌아서야 겠다는 강한 마음이 생기고 말과 행실에 변화가 오고 교회를 가까이 하게 되고 이제는 설교를 듣는 귀가 열리는 것 이것들이 불세례다. 이것이 사도들이 말하던 성령이다. 성령은 오관을 통해서 성령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느끼거나 보거나 만지거나 듣는 것으로 성령을 확인할 수 없다. 성령이 우리 속에 계심의 임재의 확실한 증거는 회개이다 즉 확실한 회개이다. 그 마음의 진정한 회개인 것이다.


  성령받은 첫 번째 증거, 최종적인 증거, 사도들이 인정하는 증거는 회개이다. 성령을 받으면 종교적 변화가 오고 윤리적 변화가 반드시 온다. 모든 사람은 다 종교인이다. 하나님께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는 종교적인 내용의 변화가 온다. 돈과 세상과 육체를 섬기다가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과 그의 영광을 사모하는 참된 종교로 변화되는 것이다. 사망에 이르는 종교에서부터 참된 종교로 변화가 온다. 그 변화가 무엇이냐? 그 변화가 일으키는 고의 현상이 성령의 역사다. 그것으로만 성령의 임재를 볼 수 있다. 믿음의 우선 순위는 하나님이다. 중생도 부르심도 아니다. 중생과 부르심을 주시는 하나님인 것이다. 특히 물론 방언받은 것이 성령받은 증거도 아니다. 즉 구원의 본질적인 것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수단으로써 교회를 위한 일종의 은사로서 계시의 시대 가운데서 주신 것이다. 구원의 경험을 강조하시기 위한 수단이며, 그것은 필요에 따른 교회론적인 은사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중생케 하실 때, 우리를 마음을, 즉 정신(이성)을 새롭게 하시는 것인데, 그 이성은 회복된 이성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중생된 거듭난 이성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신 것이기 때문에 은사는 교회론적인 구속론적 측면에서 은사로 하나님께서 주신 수단인 것이다. 즉 필요에 의해서 주신것이다. 따라서 은사를 받는 자는 주시는 자의 마음에 있는 것이지, 받는 자에 있지 않는 것이다. 주시는 자의 작정하심에 있다. 내가 달라고 하여 주시는 것이 아니다. 방언을 가르칠 때, 방언을 받는다고 연습하는 행위는 어리석은 종교 행위이다. 우리가 구원을 누가 받는가? 하는 것을 물을 때, 구원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에게 베푸시는 것이기에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또한 구원은 구원을 원하는 자가 받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성령을 받으라고 말할 때, 우리가 능동적인 자세를 요구하기도 한다. 마치 우리가 강조해서 받아야 하는 될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반면에 성령은 하나님의 뜻대로 주시는 자가 받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둘 다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주권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면서 또한 성령을 사모하기를 주시는 것이다. 성령받기를 사모하는 자에게 주시는 것이다. 이 두가지 진리는 참으로 신비롭게도 조화로운 것이다. 이 두가지 진리는 아무 모순이 없이 말씀하고 계신다. 합리주의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은 이미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잘못된 것이다. 성경에서 성령을 사모하라는 말씀이 많이 있다. 원하는 자에게 성령받기를 사모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의 이 두가지를 조화롭게 설명하기를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많이 있다. 이것은 주시는 자의 작정하에 있기 때문에 아무런 모순이 없는 것이다. 예를들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라고 했을 때, 사람이 원한다고 회개가 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을 주시는 자가 회개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회개한다고 해서 회개가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이 두가지를 성경에서는 아무런 모순을 제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둘 사이가 동일하게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 둘 사이를 완벽하게 조화시킬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무도 없다. 절대 불가능하다. 이 둘 사이를 조화롭게 해결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 이것이 신학생들의 가장 많은 질문이고 조화롭게 시도해보려다가 결코 불가능함을 목격하곤 했다. 지성을 가진 인간에게는 결코 설명될 수 없는 것이고 참으로 신묘막측하심의 진리인 것이다. 한쪽만을 강조하게 되면, 알미안주의나 펠라기안주의로 빠지게 되고 또 다른 한편을 강조하게 되면, 즉 선택만을 강조하게 되면, 유명론, 관념론적 신앙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둘 다를 믿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이다.


  믿음을 일으키는 일차적인 원인은 중생과 부르심을 주시는 하나님이시지 중생과 부르심이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한국교회에서 성령론을 제일 먼저 변화시키고자 할 때 첫 번째 성령을 에너지, 곧 능력으로 생각한다. 성령의 첫 번째 변화는 능력의 변화가 아니라 사람 마음의 변화이다. 마음은 사람의 존재의 중심인데 마음은 제일 밑바닥에 종교가 있다.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다. 그가 어떠한 식으로 화려한 그물을 짓고 있든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사람을 볼 때 외모만 보고 붙잡을 때 그 눈에서 피눈물 난다. 그 마음 깊음 속에 주를 믿는 신앙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다. 구원의 서정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인간학 차원으로 구원을 한정하는 경향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원의 서정은 본질적으로 시간적으로 일방향성 만을 강조하는 잘못이 있다. 부르심, 중생, 믿음과 회개, 칭의, 성화, 영화 이다 라고 하는데, 항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시간적인 사고로만 나눈다. 성화는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한다. 영화는 죽어야만 경험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성화와 영화 전의 것은 과거의 것이고 성화와 영화는 경험하지 못한 죽어야만 경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잘못 된 것이다. 성경에 보면 “마음으로 변화”를 받아 이렇게 말할 때, 과거 완료, 현재 완료 되어있지 않고 부정사다. 말하자면 반복을 강조하고 현재 진행을 강조하는 것이다.“마음의 변화를 받아 새롭게 하여“는 완료가 아니다 계속 반복 되어야 한다. 사람이 칭의 되고 난 다음에 성화되어야 하는데 언제나 성화가 나중에 오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성화가 먼저 칭의를 나중에 언급하는 것도 있다. 이렇게 일방향으로만 순서가 진행되면 안된다. 성경을 보시면, 고전 6장 11절 보시면 우리는 흔히 칭의 다음에 성화가 온다고 하지만 성경은 그런 순서를 승인하지 않는다. 고전 6장 11절 ”씻음“과 ”“거룩함”이 의롭다 하심“보다 먼저 온다, 이 본문에서 칭의를 성화보다 나중에 언급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 칭의와 성화를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순서가 일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 성경의 저자들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냐면,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인데 저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관심사, 직업 등을 성경을 기록하는데 반영되도록 허락하셨다. 저자들의 특색이 반영되어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데 자신의 의도대로 기록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감독하셨다. 기록하는 말씀이 저자이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철저히 감독하셨다. 단어, 선택 문장의 시제 문장의 흐름 모든 것까지 하나님이 간섭하셨다. 성경은 영감되었다. 그러한 성경의 기록을 보면 지성과 거룩함과 의롭다 함은 우연이 아니다. 굉장히 중요한것이다. 이 순서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우연히 쓰신 것이 아니다. 이 시간적 순서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 무엇을 강조하는가? 이렇게 구원의 순서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 말하자면, 부르심 중생 믿음 회개 칭의 성화 영화 이러한 구원의 결론을 가능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리스도의 사역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본문을 통해 볼 수 있다. 그리고 강조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하심을 얻었다할 때, 이 세 가지를  구원을 얻었느니라 라고 표현하면 된다. 순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강조하는 것은 우리 믿음의 토대가 되는 예수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 중요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해 놓으신 것을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성령으로 말마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이것이다. 그러므로 강조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다. 고전 1장 30절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왔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의도하심대로 성취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뜻대로 된 것이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내 위에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내 위에 있다. 내가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최고의 기쁨이다. 하나님의 기쁨이 내 위에 있다. 안 믿는 사람은 그 머리위에 하나님의 진노의 먹구름처럼 가득하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낳고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결국 자살하면 안된다. 또한 우리의 삶은 고귀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온 인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게 되고 그 뜻을 찾을 수밖에 없다. 그가 우리를 보내주실 때 그가 작정하신 뜻이 있기 때문이다. 그 뜻이 나의 삶을 통해 꽃이 만개하듯이 그 뜻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그 뜻이 다 이루어지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집으로 데려가신다. 비록 내 삶이 권태롭고 그 현실이 비참하고 내 삶의 경험이 잔혹하다 할찌라도, 한가지 변치 않는 사실 한가지는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낳았다는 것이다. 여러분! 이 사실만이라도 마음에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감당치 못할 시험이 없다. 다 이길 수 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너희는 즉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너희는 성화한 사람이 아니다. 고린도 교회는 문제가 많았다. 여전히 예수를 믿지만 생활의 변화가 없었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악하게 살았지만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께 나왔고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 구속함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것의 기원 이러한 것이 가능하게 된 그리스도의 사역 그 사역을 가능하게 한 성령의 역사를 강조한 것이다. 내 구원의 경험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구원이 개념이 가능하게 된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 그 사랑으로 이 땅의 오셔서 자기 몸을 주시고 자기 몸을 쪼개어서 그 피로 우리 죄를 속하시고 구속의 경건을 만드신 그리스도의 은혜, 성령의 교통하심이 중요한 것이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이다. 강조하고 있는 것은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 이러한 구원의 개념을 가능하게 하신 성삼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성령의 교통을 강조한 것이다.


  칭의를 오늘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 칭의를 지나간 과거의 것으로 간주할 것이 아니다. 칭의는 성화와 밀접한 관계에서 이해해야 한다. 칭의는 과거의 한번 경험으로 지나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를 끊임없이,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까지 우리를 계속해서 의롭다고 의롭다고 말씀 하신다. 왜냐하면 우리가 여전히 변화 받지 못한 육체의 원리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그리스도가 오늘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자기의 몸이 쪼개지고 그 쪼개진 피로 우리 죄를 친히 간구하심으로 우리는 계속해서 의롭다 하심을 입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롭다 하심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사역이 끝난 것이 아니다. 천상에서 오늘도 자기의 피로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제사장으로 아버지 앞에 죄 속함을 간구하신다. 그래서 칭의는 완료된 사건이 아니다. 오늘도 우리의 신앙가운데서 반복되고 경험되는 사건이다. 날마다 새롭게 되어야 한다. 날마다 의롭게 되어야 한다. 내게 주어진 삶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구원의 서정은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은 은혜이다. 아무런 노력도 원치 아니하시고 은혜를 주신다. 믿음은 수단이다. 그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의 구원의 진리를 왜곡하는 경우가 있다. 구원의 서정을 기계적으로 강조하면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창조적 사역을 일련의 사건을 정렬하게 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믿음과 회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사람이 소원한다고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믿음을 갖는 자만이 회개한다. 중생, 칭의도 인간편의 어떠한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행위다. 중생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구원의 서정에서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믿음과 회개를 같은 곳(level)에 놓고 이해한다. 다시말하면, 어떤 부분은 하나님이 하셔야 하는 것으로 어떤 부분은 사람이 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구원을 위해 인간이 협동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즉 신인협동설이 아니다. 그러나, 중생한 사람이 반드시 믿음과 회개를 하는 것이 아니다. 중생한 사람이 곧 믿음과 회개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중생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의롭게 되었다고 반드시 성화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매순간 매순간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중생하게 되고 믿음으로 거듭난다. 왜 이렇게 말하게되는 이유는 고전 1장에서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 구원을 적용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성경이 말씀하고 계신다. 성경은 그런 순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안에서 성령의 사역 안에서 강조하시는 것이다. 디도서 3장 5절“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그의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중생이 있고 그의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새롭게 하심이 있다. 중생의 씻음이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 아니라, 중생과 씻음은 그리스도의 긍휼하심에 있다. 이 두 가지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음이다. 벧전 1장 23절에서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우리의 구원의 경험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사역의 도구는 말씀이다.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의 문이 여시고 열린 마음에 믿음을 주시고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고 이런 것들이 우리의 삶에 매순간 있는 것이다. 칭의를 있게 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은혜인 것이다. 구원을 순서의 관점에서 보지 않도록 해야 한다. 회개를 있게 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다. 구원을 순서에 관점에서 보지 말고 은혜와 믿음이란 관점에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믿음이라는 원리만을 강조하는 것이 성령사역이라는 바른 이해가 될 수 있다.


참고로 존 오웬의 “죄의 소멸”를 읽어보기 바란다.

 

이어서 5부 "그리스도와의 연합" 를  기대하세요!    Coming  S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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