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하모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묵리촌장
까리따스수녀회
"하모니카" 와 함께한 지난 세월들.........
돌이켜 보면 지난세월 들이 주마등 처럼 스쳐갑니다, 저는 어릴적 (국교2년 9세때) 외삼촌 (서명식 60년 작고) 께서 6,25 참전 상이군 으로 제대후 시골집에서 휴양 하실때 우연히 부르시던 하모니카 소리에 관심을 갖고 돌아가시기전 유일한 유품 (미군이건네고간 하모니카) 을 받게되어 자상하신 삼촌이 보고파 불러보았던 그 하모니카 가 지금껏 나의 분신처럼 될줄이야 ! 상상 할수가 없었습니다, 부친 (春光 장춘식 95세 ) 의 예능적 감각을 닮아서인지 , 저는 놀이감이 귀한 시절 하모니카 로 외로움을 달래고 중학 교에진학할때는 이미 혼자 습득한 반주까지 하면서 그렇게 유명했답니다, ㅎ~ㅎㅎ 당시 유행했던 최희준의 "하숙생' 황포돗대" 울어라 열풍아" 오수잔나' 클레멘타인" 등등,, 장르를 초월해 곧잘 불러 별명이 " 하모니카 짱 , 이였지요..,
초,중,고교를 고향인 보성 에서 마칠때까지 저의 책가방과 하숙집(순천고교) 책상에는 어김없이 옥수수 하모 가 함께 했고, 저녁때 어두컴컴 별이반짝이고 달빛이 기울때면 잠시 마당에 나가 외로움을 달래며 불곤 하던 그 하모니카 가 계속 이어져, 군대시절 에는 장기자랑 과 과대표 로 선발 전방 위문도 다니게 되었고 , 결국은 제대 와 동시 경찰에 몸을 담게 되서도 습관처럼 되버려 달동네 아이들을 가르키며 비행소년들 의 예방에 전력을 다했답니다, 저는 지난 76년 에 25새의 나이로 경찰관이 되어 첫부임지 인 경기도 파주경찰서 에서 부터 하모로 자연스레히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순찰돌다가 음주 운전자를 적발 하고 동행할때도 나를 알아본 주취자는 어김없이 " 어이 장순경? 한곡조 빼봐 ~ 울고넘는 박달재~ 거 있쟎아! ㅎㅎ~ 하여튼 재미있는 일이 끊이질 않았답니다, 78년 에 지금의 처 (전순자 59세) 와 결혼을 하게되어 두 아들 (민기,32세, 정기 31세) 을 낳고 첫승진(시험합격) 과 함께 서울 경찰청 성북경찰서 보문 파출소 차석 근무 를 시작으로 도시 영세민들이 살아가는 속칭 달동네란 곳을 알 게 됩니다, 기진것 없고 배운것없고 그래서 무시당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그들을 부득히 수갑을 체워 연행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똑같은 사람으로 태어나 어떤이는 부모잘 만나 잘살고, 어떤이는 가난함이 되물림되어 허우적 거리 는 세상속에서 갈등과 사명감 , 자신을 주체 할수 없는 고민에 빠져, 술을 먹게되고, 망가지려는 자신을 그래도 곧바로 잡아주는 도구가 바로 " 하모니카" 였습니다, 틈틈히 책을 가까히하고 못다한 향학열로 뒤늦게 방통대 法學 과 를 공부를 한덕에 동기생 들 보다는 비교적 빠른 승진을하게 된 저는 30대 나이에 파출소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82년도 부터 성북동 일대 이곳 저곳 근무 를 해오면서 온갖 치안관련 세상 만사를 겪은저는 힘들고 고통스러울때마다어김없이 안주머니 "하모니카" 를 꺼내 불었고, , 외롭게 죄짓고 교도소에 간 외아들을 기다리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 쓸쓸히 숨져간 연고 없는 노인의 장례를 치르면서도 그렇게 불렀답니다, 84년에는 가족과 상의끝에 고향 아버님의 말씀에 따라 달동네 파출소 를 지원하게 되었고 그리고 승진계획도 미룬체 오로지 가엾은 도시 빈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상록수 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성북구 정릉동 일대 도시빈민촌 3천세대를 담당하는 빈민가 파출소에 두아들과 가족은 전세집 을 얻어 그야말로 범죄 소굴로 정평이 나있는 정릉4동 달동네 파출소 근무를 시작하고, 이곳에서만 8년여세월 ~ 달동네에서 의 파수꾼 생활이 남들에게는 바보스럽고 ,군대말로 고문관 취급을 동료직원들로부터 당하면서도 그래도 버팀목이 되준것도 바로" 하모니카 였습니다~
대다수 주민들이 도시 노동자로 결손가정과 비행소년이 많기로 이름난 이곳에서 오로지 단한가지 방법은 열약한 환경 이지만 그래도 정에 굶주린 이곳분들에는 정성과 인내로 써 최선을 다해 봉사를 함으로써 경찰의 이미지부터 바꾸고 실질적으로 가족처럼 대하리라는 각오로 8년여 노력한끝에 기적같은 일이 벌어 졌답니다~ 법정영세민이 가장많고 결손가정, 병마와 시달리면서도 약한첩 먹지도 못한 이들은 정부에 대한 불신과 불만만 가득 하였지만 개별적인 만남 방문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열게되면서 주간에 파출소 근무를 마치고 어려운 가정을 찾야 산동네를 헤메면서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이 필요했기에 , 개척교회 목사님(최심영목사) 과 사찰 암자 스님을 설득 노인정 에서의 한문서예교실, 예절교실, 그리고 음악교실 (하모니카교육 등) 을 꾸준히 시행 하는 결과로 청소년 비행 이 가장 많기로 이름난 이곳이 88올림픽때는 범죄가 단 한건도 없는 마을로 뽑히게된 결과로 청와대 초청을 받아 (노태우, 영부인) 할아버지 방범대와 노인회장 과 함께 대통령 표창까지 받는 영예 를 얻기도 했답니다, 4년연속 범죄 없는 마을로 상부에서 인정을 받게되고 이어서 미국의 독지가 로부터 장남감 3000여점 이 비행기로 공수되어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갑자기 부모가 병사하여 오갈때없는 아이두명 을 스위스로 입양도 시키고 (사진상) 심장병 아이를 미국 심장재단 총제인 하지스여사(국가원수급)가 저의집 까지 방문하고 비행기에 함께 태워 데려가 수술시켜 살려보내고, 청와대 영부인 (이순자여사) 에게 한국 심장재단을 창립하게 하는등 돌이켜보면 기적같은 일이 많았습니다, , 파출소장으로써 최선을 다하자는 각오로 마을회관 의 한문 서예교실과 음악교실(하모니카교육) 을 계속 해오면서 관네 순찰과 함께 아이들이 모여 있는곳이라면 찾야가 교양하고 , 범죄예방 신고요령등 교통사고 미연 방지들 주민들에게 지속적이 이웃돕기를 시행하면서 차츰 차츰 직원들도 동참 하게 되어 주민과 한마음으로 치안을 유지해 왔습니다 초등학교와 중고교 (홍익중, 대일고) 를 소장이 직접 찾야가 교육하고 비행을 예방하는 데 집중한 결과로 최우수 파출소로 탈바꿈 했던 그때가 그립습니다, 저에게 하모니카 를 배웠던 초등학교 코흘리게 들이 얼마전 결혼들하여 아이를 낳아 물어 물어 용인까지 찾야온 그날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날이였답니다,
권총차고 찾야간 아이들은 스스럼 없이 파출소 아저씨를 반겨 주었고 함께 부른 "꽃밭에서" 의 하모소리는 더욱 어울러져 동심으로 함께 보넸던 지난 나의 달동네 시절이 어렴프시 망각아란 절벽으로 꺼져 가려합니다, 아이들을 찾야 비행을막고( 당시 뽄드 환각이 유행) 야간에 늦게 귀가하는 여학생을 1대 1동행 을 자청해주신 달동네 노인들, 지금은 세상에 안계시지만 당신들이 계서서 촌장은 행복했던 나날 였습니다,
파출소장의 교육이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긴 지팡이를 꼭쥐고 강당 앞좌석에 서 엄숙히 아이들을 지켜주신 당신 들은 지금은 어느하늘 어느곳에서 계시옵니까? 그립습니다, 서툴은 유행가 지만 막걸이 한사발 내놓는 저의 손목을 붙잡고 노래하시고 울먹거리시는 그때 그모습 들이 지금도 아른 거립니다,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고 어른이 커서 늙어가는 인생 행로 가 고닯은 고통일지라도 앞서 사시다 간 당신들이 계시 기에 지금의 우리는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총총한 눈망울과 아저씨가 들려주는 하모니카 소리에 신기해 하며 나를 쳐다보았던 그때 그아이들 이 그립습니다, 지금은 20대 후반, 혹은 30대 초반 어떤아이는 짝을만나, 또다른 아이를 낳았을 법도한데, 세월은 가고 또 흐르며 어느세 30대 젊은 이였던 나도 어느덧 환갑을 바라보는 반백이 되어, 물끄러미 찾야보는 술래가 되었습니다, 그때의 아이 들아 ! 전경 아저씨들의 잠자는 내무반이 궁금하다며 구경시켜 달라 보채던 너희들은 경찰서를 찾야 많은 궁금증과 묻고 싶은 것이 많았었지,, 덮고자는 모포를 보며 얇은 이불이 신기하다 하고, 이층으로된 침대가 신기해 놀이터 인양 흔들어 보면서 괴성(?) 을 지르며 법석 을 떨었던 그때 그 아이들이 그립구나~ 아빠는 초등학교 5학년때, 사고로 죽고,,엄마는 정신병으로 집을 나가 한때 비행으로 나갔던 김형일 (당시 18세, 70년생) 외롭게 두동생을 돌보는 소년가장 으로 나를 만났지 추운겨울 날 산꼭데기 5번 시내뻐스 운전기사 가 사는 무허가 판자집에 인정많은 기사님의 도움으로 너희를 함께 재워주고 도움을 주셨던 그 아름다운 운전기사님 도 그립구나~ 형일이가 외롭다며 검정고시 학원(신설동) 에 보내고 대신 두동생을 돌봐주신 큰 은혜를 잊지는 않았겠지? 그리고 같은 처지의 소녀가장 (당시 19세) 과 만남으로 결국어린 부부 가되어 하늘이 낳아준 너희의 아이 (아들) 는 지금쯤 커서 군대갈 나이가 되었겠네,...... 보고싶다 형일아 나를 큰아빠처럼 알고 덥석 무릎에 앉았던 그꼬마녀석, 작은 하모니카로 코로 불면서 재롱피운 그때가 그리워진다,,,, 달동네 초등학교라 부끄럽다고 밖에서 물으면 그냥 "정릉학교 라고만 했었던 너희 들에게 " 꿈을 심어 줄려고 함께한 태권도 관장님(성청체육관 이상언관장) 과 선도위원 들, 어렵사리 마련한 놀이기구(그네 시이소 탁구대) 를 싣고 멀리 강원도 명주군 심곡마을 분교를 (정동국교,심곡분교) 찾야 외로운 아이들과 결연맺고 즐겁게 바다 를 보며 소망을 빌고 , 빈병에 각자 꿈을 적고, 소망을심어, 분교 향나무 밑에 묻어 두었던 그시절 또한 그립단다,
그곳 (강릉) 분교 친구 들과 운동회때 함께한 아저씨는 너무 행복했고 인기 좋왔던 5학년 재영이 (79년생) 는 강릉 시청 공무원 이되었다 구나,, 지난6월달엔 하모니카 아저씨는 그곳을 찾야 아가씨들(모바스) 과 춘원(이 광수 선생님) 님을 만나 바로 그곳에서 하모니카 를 불러 보았단다,,,, 년말이 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싼타 소식에 너희는 기다렸었지,, 그땐 전경아저씨가 싼타가되고, 소장 아저씨는 너희를 집에 초대하여 징글벨 노래를 하모니카 에 맞춰 신나게 불렀던 그때 그립다, 산골마을 아이들에게 한아름씩 선물도 안겨주고 저녁에는 분교장님과 마을 학부형들과 모닥불피워 둘러 앉야 아저씨 하모니카 반주에 맞춰 박수치며 여름밤을 그렇게 하얗게 지세웠었지,, 그땐 유괴범이 극성을 부려 학원을 찾야 다니며 너희들을 만났고, 신고 요령과 연락방법에 대한 교육도 했었지..... 무덥던 여름날 아저씨 집 은행나무 아래서 하모니카 반 수료 기념으로 사진도 함께 찍었는데 혹 잊지는 않았는지... 같은 또래 아이였던 (초교 1, 2학년) 우리 아들 들도 지금은 잘커줘 장가를 갔단다,
아저씨 당직날 경찰서까지 찾야와 담임과 함께 구석 구석 구경했던 일 교통차량과 오토바이를 신기하게 만지고 무전기 소리에 놀라 법석 떨던 너희들의 해 맑은 얼굴들이 그립구나, 유치장 의 안타까운 사람들과 이름을 읽고 죄 짓지 않겠다는 다짐 하는 너희 들을 읽을수가 있었지....... 아이들아 아저씨와 함께 했던 지난 아이 시절 그때 그대로 멈추자 구나~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고달프다 하지 만 모든건 마음먹기에 달렸단다, 행복은 다름아닌 나로부터 이고 내가 스스로 웃을때, 살며시 미소 천사는 마음에 문을 열고 내게로 기울거든? 행복하렴, 그리고 당당하게 어른이 되렴, 너희들의 미소가 항상 함께 하기를 빈다, 안~ 녕 ~ 히 2009년 8월 13일 저녁 용인 쉼터에서 그때 그아저씨 <묵리촌장> |
첫댓글 빛바랜 지난세월 서울 달동네 공직 시절이 나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간 들이였습니다` 옛추억들이 힘들때 " 에네지"로 작용 하고, 남은 인생길, 의미있고 알찬 시간으로 체워 가면서 마즈막 인생노트를 마감 하렵니다~ 세상의 평화가 올때까지..
민중의 지팡이란 경찰의 대명사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사진들을 보니 촌장님의 현역 시절의 모습이 더욱 훌륭하게 보입니다. 끈을 놓지 않으시고 활동하시는 촌장님의 앞길에 더 큰 행복과 번영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