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무권(執中無權) - 가운데를 취해도 저울이 없다, 중용의 의미가 없다.
[잡을 집(土/8) 가운데 중(丨/3) 없을 무(灬/8) 권세 권(木/18)]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中庸(중용)을 예찬하고 따르려 한다. 옛날 서양에서도 ‘지나침과 모자람은 악의 특색이고, 중용은 덕의 특색이다’(아리스토텔레스)라고 말한 것이 있다. 四書(사서)의 하나인 子思(자사)의 저작 ‘중용’의 심오한 가르침을 몰라도 모두들 그 미덕을 말하는 것은 행하기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아니하고 도리에 맞는 것이 中(중)이고, 떳떳하며 변함이 없어 도리에 맞는 것이 庸(용)이라 하니 맞추기가 어려울 듯하다. 그런데 중용을 취한다고 취했더라도(執中) 그것을 판단할 저울이 없다면(無權) 중용이 아니라 또 하나의 고집이 된다는 것이 이 성어다. 권세 權은 여기서 저울이란 뜻이다.
孔子(공자)의 손자인 자사에게 배운 孟子(맹자)는 王道(왕도)를 주창하며 유교를 굳건히 전한 사람인데 후세의 제자들이 행적을 엮어 만든 책 ‘맹자’에 이 말이 전한다. 盡心(진심) 상편에 이기적 쾌락설을 주장한 楊子(양자)와 무차별의 사랑 兼愛說(겸애설)을 주장한 墨子(묵자), 그리고 魯(노)나라의 현인 子莫(자막)을 비판하면서 말한다.
‘천하를 이롭게 하는데 도움 된다 해도 양자는 자신의 털 하나라도 뽑지 않았고, 묵자는 자신의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다 닳는다 해도 희생하고 행했다.
자막은 도에 가까운 양 극단의 중간을 잡았지만 저울추가 없었으니 한 가지를 고집하는 것과 같다(子莫執中 執中爲近之 執中無權 猶執一也/ 자막집중 집중위근지 집중무권 유집일야).’ 章句(장구)를 만들어 널리 읽히게 한 朱子(주자)는 이에 대해 양자는 仁(인)에 해롭고, 묵자는 義(의)에 해로우며 자막은 알맞은 時(시)에 해롭다고 해석한다. 그러니 중용을 취하는 데는 저울추와 같은 중심을 잡지 못하면 또 다른 고집이 된다는 것이다.
옳고 그름은 어느 한쪽에 머물러 있지 않다. 어떤 입장인지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지에 따라 옳게도 생각되고 그르게도 판단된다. 상대방 의견은 듣지도 않고 나의 고집만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