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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조금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
연영흠
경조금에 대해 국어사전에는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경조금(慶弔金) : 경사스러운 일을 축하하거나 궂은일을 위로하기 위해 상대에게 주는 돈.
즉, 경조금은 결혼식이나 돌잔치 등의 경사에 주는 축의금과 장례식이나 기일 등의 애사에 주는 부의금을 말한다. 이 돈은 아무 조건이 없이 상대에 대한 배려나 선의로 주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주고받는 마음으로 대하는 듯하다. 내가 남에게 베풀면 내게 어떤 일이 있을 때는 그만큼 들어오고, 반대일 경우에는 거의 없기도 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경조금이 얼마나 들어왔는가를 자신이 얼마나 생활을 잘했는지에 대한 평가로 보기도 한다.
직장 생활이 20여 년이 지날 때까지 나는 경조금과는 인연이 없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치른 나의 결혼식 때는 직장에서 축의금을 낸 사람은 상사인 교장과 교감을 비롯한 서너 분 정도였다. 너나없이 넉넉하지 않았던 그때는 경조사 때 동료들끼리 경조비를 주고받는 일이 거의 없던 분위기였던 탓이다.
교직에서 어느 정도 연륜이 쌓이자 나는 근무하는 학교에서 상조회장(친목회장)을 맡는 경우가 많았다. 90년대에 교직원이 100여 명에 가까운 큰 학교에 근무할 때는 거의 전국을 다니다시피 하였다. 동료들이 많다 보니 매월 애경사가 있었고, 상조회장으로서 대표로 참석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도 동료들끼리도 아주 가까운 사람 외에는 경조금을 보내지 않는 경우가 많았지만, 나는 갈 때마다 경조금을 냈다. 아깝다는 생각은 없었다. 동료로서의 정이고, 내게 무슨 일이 있으면 다른 동료들도 그렇게 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조금에 대해서 내게 충격은 준 사건이 있기에 적어보겠다.
1. 장인의 별세
20여 년 전에 인제군의 어느 학교에 근무할 때 장인이 별세하셨다. 장인은 7~8년 동안 혈압으로 고생하시다, 마지막 3년 정도는 식물인간 상태였다. 겨울 방학을 맞아서 처가에 왔던 나와 아내는 며칠 동안 머물렀지만 그저 얼굴만 뵈었을 뿐, 이렇다 하게 대화를 할 상황이 아니었다.
이제 내일이면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 날 저녁에 장인은 주무시는 듯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마침 장모님과 함께 방에 있다가 임종을 맞았으니, 뜻하지 않게 효도를 한 셈이다.
임종을 본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당시에는 갑작스러운 일이 당황스러웠다. 일단 직장에 연락을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때만 해도 핸드폰이나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전이다. 내게는 핸드폰도 없었고, 연락을 하려니 직장이나 친지들의 전화번호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알린다고 해도 수백 리 떨어진 경상도 끝자락까지 조문을 올 사람도 없을 듯했다.
동생과 A 모임과 B 모임의 총무, 가깝게 지낸 동료 C 선생님에게 전화를 시도했다. 그러면서 가깝게 지낸 A 모임과 B 모임에서는 몇 분은 오실 것이고, 절친인 C 선생님이 학교 상조회에 알리면 학교에서도 두어 분이 오실 것이라고 기대했다. 처가가 멀리 있으니, 그 정도만 조문을 와도 최소한의 낯은 설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A 모임 총무 선생님들은 몇 번을 통화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여행을 좋아하는 분들이니 해외로 간 듯하다. B 모임과 C 선생님과는 통화가 되었다. 사흘 동안 장례를 지내는 동안 나의 손님으로 조문을 온 이는 동생뿐이었다. 연락이 안 된 A 모임은 물론이고, B 모임과 C 선생님과 학교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래도 맏사위이고 학교라는 직장에 근무하던 나로서는 민망하기도 하고 참담한 마음도 들었다.
A 모임 선생님들은 장례가 끝난 뒤에야 소식을 들었다면서 전화나 메일로 조의를 나타냈지만, 경조금은 없었다. B 모임의 친구들은 모임 규약에 직계 가족의 경우에만 경조금을 지급하게 되어 있고, 너무 멀어서 못 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부조금이라면서 모임 이름으로 10만 원을 주었다. 가장 절친한 학교 동료였던 C 선생님은 더욱 황당했다. 그는 내 연락을 받은 뒤에 메일로 애도의 뜻만 전했을 뿐이다. 나는 C 선생님이 학교 상조회에 알린 뒤에 다른 사람은 못 와도 그만은 오리라고 기대했지만, 아직 젊은 그는 조문의 예절이나 중요성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2. 경조사에 대한 깨달음
장례 기간은 물론 이후에도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개학을 한 후 학교 상조회에 장인의 부고를 알리며 회원 경조사에 나오는 부조금을 공식 요청했다. 교감선생님과 상조회장님은 몹시 당황해하면서 그런 일이 있으면서 왜 연락을 안 했냐고 나를 나무랐다. 비로소 상황을 깨달은 C 선생님은 얼굴을 들지 못했고, 몇 번이고 미안하다면서 사과를 했다.
나는 A 모임 선생님들에게도 섭섭했지만, 연락을 받지 못한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이해했다. B 모임은 장례 후 두어 달이 지난 뒤에 있었는데, 나는 친구들에게는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모임 규약이 없다고 해서 개인적인 조문도 못하느냐, 바빠서 참석을 못 했으면 끝난 뒤에라도 전화 한 통 안했느냐, 이게 30년 우정이냐면서 모임을 해산하거나 나를 빼달라고 했다. 긴 세월의 만남에 대한 미련 때문에 모임에 계속 참석은 했지만, 그때의 앙금은 두고두고 남았다.
이 일은 내게는 큰 충격이었다. 내가 이렇게 사회생활을 못했나 싶어 자괴감도 들었고, 이전 학교에서 상조회장을 할 때는 동료들의 경조사가 있을 때마다 전국 곳곳을 가다시피 했는데, 내게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 섭섭했다. 앞으로 모든 경조사에 발길을 끊겠다고 다짐했고, 그로부터 3년 동안 직장이나 친구들의 경조사 참석은 물론이고 경조금도 보내지 않았다. 내게는 아무도 오지 않았고 받지도 못했는데, 나는 왜 남의 경조사를 챙기느냐는 생각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의 생각이 부족했음을 깨달았다. 지난 일들을 되새기면서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를 헤아려 보았다.
장인께서 하필이면 방학 중에 별세하셨고, A 모임에서 총무를 맡은 이들은 여행 중이라 연락이 안 되었다. 다른 분들은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 연락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개학을 한 뒤에 상황 파악을 한 회원들 역시 당혹스러웠겠지만 그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지나고 나서라도 부조금을 주었다면 마음이 좀 풀어졌을까? 그때는 지난 뒤에는 주는 것이 아니라는 미신 같은 것이 있었다.
B 모임은……, 그때는 중앙고속도로가 완전 개통되기 이전이었다. 교통이 좋지 않던 시절에 직장 생활을 하던 그들로서는 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조문을 하려면 고단함을 감수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쩌면 이틀 정도 연가를 맡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서로 핸드폰이 없었으니 연락 방법도 마땅치 않았고, 장례가 끝난 뒤에는 민망해서 연락을 못했을 것이다. 잘못이 있다면 그들의 우정을 과신한 나에게 있었다.
학교 상조회에는 어떤 식으로든지 내가 알렸어야 했다. 학교 전화번호를 외우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114 등을 통해서 얼마든지 알 수 있었다. 막연히 C 선생님이 알아서 처리해 주리라고 믿을 것이 아니라, 상조회에 알려달라는 의사를 명확하게 표현했어야 했다. 결국 누구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전달을 못한 나의 과실이 더 컸던 것이다.
3. 경조금에 대한 지인들의 사례들
장인 별세 이후 10여 년 뒤 어머님이 별세하셨고, 곧이어 아들의 결혼이 있었다. 그때는 대부분의 동료들이 경조금을 보냈고, 문상을 온 분들도 많았다. 퇴직을 하면서 어머님과 아들의 경조금 내역을 살펴보았다. 당연히 보내야 할 사람이 빠진 경우도 있고, 좀 더 많은 금액을 넣어야 할 사람도 있었다.
D 선생의 경우 그의 모친상과 자녀 결혼식 때 나는 5만 원을 부조했지만 3만 원만 하기도 했고, E 장학사의 경우 나는 그의 경조사에 경조금을 보냈지만 그는 답례를 하지 않았다. 문득 교단 시절 초기에 만난 F 선생도 생각났다. 나보다 몇 년 연장이었던 그와는 2년 정도 함께 근무했지만 그리 가깝게 지낸 사이도 아니다. 20여 년 동안 소식이 없었는데 어느 날 안부 전화를 하더니, 다음 주일에 자녀 결혼 초대장이 왔다. 그는 내가 결혼할 때도 함께 근무하면서도 축의금 보내지 않았다. 그런 분이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 자신의 자녀 결혼식을 알리는 행위가 그리 좋게 보이지 않았다. 살다 보니 비슷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1년에 한 번 있는 동문회에서는 얼굴도 비치지 않다가 갑자기 참석하더니 다음 해에 자녀 초대장을 내미는 친구도 있었다. 그 친구는 자녀 혼사가 끝난 이후에는 동문회에 나오지 않았다. 함께 근무하던 학교장 중에는 자녀의 결혼식 때 수십 명의 전 직원에게 초대장을 개별 발송하는 사람도 보았다. 본인은 그것이 함께 근무하는 사람의 예의라고 했지만, 부하 직원들에게 축의금을 강요하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교장선생이 각 학교의 교사들에게 보내는 청첩장의 봉투를 교무부장이 썼는데, 수백 장이더라는 말도 들었다. 잠시라도 함께 근무했던 사람에게는 모두 보낸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이런 사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생각하지도 않았던 이에게 경조금을 받았지만, 나는 아무런 답례를 못한 경우도 많았다. 특히 잊지 못할 분이 G 선생님이었다. 그와는 10여 년 전에 1년을 함께 근무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 다른 학교로 옮긴 뒤에도 나의 어머님이 별세하셨을 때와 아이의 결혼식 때 경조금을 보냈었다. 내가 퇴직하기 몇 해 전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나는 그때 경황이 없어서 끝내 아무것도 못하고 말았다. 이제 G 선생님에게는 답례를 할 길이 전혀 없으니, 언젠가 만나게 되는 날 어떻게 대해야 할지 두려운 마음이다.
또한 학창 시절 고향의 선교사로 계시던 H 회장님을 생각하면 죄스럽기만 하다. 선친의 평생 지우이자 신앙적인 동지로서 선친과 함께 고향에 성당을 설립했던 분이다. 그분은 나의 할아버지, 동생, 아버지, 할머니 등이 세상을 떠났을 때마다 와주셨다. 다른 곳에 계시다가도 기적처럼 찾아오셔서 가족 이상으로 모든 일을 돌봐주신 분이다. 그러나 H 회장님이 별세하셨을 때 나는 마음을 전하지 못했다. 돌아가실 무렵에는 선교사 생활에서 은퇴를 하신 뒤이므로 소식을 늦게 들은 탓도 있지만, 우리 가족에게 보여주신 성의에 대해 답례를 못한 것이다.
내가 3년 동안 모든 경조사를 외면하는 동안, 내게 서운함을 느꼈던 분들이 있었을지 모른다. 나는 연 선생을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무심할 수 있냐고……. 어쩌면 장인의 장례식 때 내가 느꼈던 마음보다 더 큰 섭섭함을 느끼셨을 수도 있을 것이다.
4. 경조금에 대한 깨달음
긴 세월을 교단에서 근무하는 동안에 많은 분들의 경조사가 있을 때 나는 마음을 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일을 당했을 때는 아무런 응답이 없던 것이 서운했다. 하지만 퇴직할 무렵에 어머니와 아이의 경조사에 받은 목록을 보니 그 상당수에 대해 나도 답례를 못했음을 새삼스럽게 확인했다. 아마도 앞으로도 내가 마음을 전할 기회는 많지 않을 것이다. 교단을 떠난 지 7년이 지났고, 그동안 전화번호도 바뀌고 집도 이사를 했다. 그분들이 내게 연락을 할 마음이 있다고 해도 어떻게 알릴 수 있겠는가?
내가 받은 경조금은 준 것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았다. 그래! 받을 만큼 받지 않았는가? 이제 받으려고 하지 말고 베풀면서 살자, 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베풀 기회가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좁디좁았던 나의 소견이 부끄러웠다.
2년 전에 장모가 별세했을 때는 가까운 친지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받는 것이 오히려 인생의 빚이고, 상대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앞으로도 집안에 어떤 행사가 있게 된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반면에 다른 이들의 애경사를 들었을 때는 내가 해야 할 도리는 다하려고 한다. 몇 번이고 되새긴 경조사에 대한 나의 원칙은 이렇다.
-혹시 조금이라도 부담을 느낄 수 있는 분에게는 절대로 알리지 말자.
-아주 가까웠던 사이라도 최근 2년 이내에 만남이 없었다면 알리지 말자.
-인연이 있는 이의 기별을 들었다면 가급적 마음을 전하자.
-인연이 있는 이가 따로 알림이 없더라도 내가 알게 되었다면 마음을 전하자.
-받은 것은 어떤 형식이로든지 보답하고, 준 것은 생각하지 말자.
5. 친구 아버님의 교훈
앞서 언급한 B 모임의 친구 중에 K가 있었다. B 모임은 초기에는 고교 동문 7명이서 시작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모두 빠지고, 나와 B만 남았다. 결국 모임을 더 지속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서 해체하기로 하고 기금을 나누기로 했다. 비록 두 명만 남았지만 30년 이상 이어온 모임이므로 각자 배당되는 금액이 몇 백만 원은 되었다. 내가 절반씩 나누자고 하니, K가 이의를 제기했다. 나의 어머니 장례식 때 모임에서 50만 원의 조위금을 지출했는데, 자기는 한 번도 받지 못했으니 내 몫에서 25만 원은 더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황당한 생각이 든 나도 항변했다. 우리가 싸우고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오래전에 이미 지출한 부의금을 반환하라는 것이 말이 되냐고 했다. 그렇다면 이미 모임에서 빠진 다른 친구들에게도 반납을 요구할 것이냐고 되물었다. K는 그 친구들은 이미 끝난 일이지만, 나와의 관계는 현재진행형이니 자신의 말이 원칙이라고 강변했고, 나는 그의 뜻대로 해주었다.
K는 모임이 해체된 뒤에도 장인과 장모가 별세할 때마다 내게 부고를 보냈다. 나의 장인이 별세했을 때는 규정에 없다면서 조문을 하지 않고, 모임을 해체할 때는 이미 주었던 어머니의 부의금을 반납하라고 했던 그의 처사를 생각하면 섭섭한 생각도 들었으나 그때마다 부의를 보냈다. 2년 전 나의 장모님이 별세했을 때, 나는 오직 그에게만 문자를 통해서 부고를 보냈다. 경조금을 받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던 것이다. K는 반응이 없었고,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벗이 아님을 확인한 것이 오히려 후련했다. 나는 그의 경조사 때마다 마음을 표시했는데, 그는 나의 일에 대해서 아무런 성의도 표시하지 않았다는 것을 저울질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친구 사이는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으니, 역설적으로 그는 고마운 존재라는 생각도 했다. 지인들의 경조사의 기별을 들을 때마다 K와 같이 처신하지 말자는 교훈을 되새겼으니 훌륭한 반면교사였던 셈이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작년 7월에 묘한 꿈을 꾸었다. 꿈속의 나는 고등학생 또는 대학생이었던 듯하다. 그 시절에 자주 그랬듯이 나는 K를 만나러 그의 집으로 갔다. 그의 아버님이 나오시더니 K가 집에 없다고 하셨다. 발길을 돌리려고 하니 들어와서 차를 한 잔 마시고 가라며 부르는 것이다. 방에 들어가니 K의 아버님은 컴퓨터 앞에 앉아 계셨다. 모니터에 뜬 어떤 사이트를 가리키면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니 잘 보라고 하셨다.
K의 아버님이 알려준 사이트가 어떤 곳인지, 그 뒤에 꿈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꿈의 내용은 전혀 현실성이 없다. 나의 학창 시절에는 손님이 왔다고 차를 내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그 시대에는 가정용 컴퓨터가 존재하지 않았다. K의 아버님은 아마 작고하실 때까지 컴퓨터를 아지 못하시고 떠나셨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컴퓨터를 켜 보았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카톡의 문자를 확인하니 공무원연금공단에서 보낸 문자가 있었다. 인스타그램으로 전통시장을 홍보하는 신중년 사회활동 봉사에 대한 안내문이었다. 인스타그램에 대한 개념 자체도 모르는 나는 평소라면 그 글을 무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꿈의 내용이 떠올라서 담당자와 통화를 해보았다. 담당자로부터 방법에 대한 설명을 듣고 참여하게 되었다. 참여자는 매월 수당이 지급되는데 작년과 올해 적지 않은 경비를 받았다.
직장에서 퇴직한 내게 있어서 뜻밖의 금액이다. 앞으로도 이 활동을 계속할 수 있다면 과외의 수입이 지속되는 것이다. 꿈에서 K의 아버님을 뵙지 못했다면 나는 이 활동에 참여할 생각을 못 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K의 아버님이 당신 아들에 대해 섭섭하게 느끼는 내게 위로의 뜻을 전하시는 것인가, 라고 생각했다. 그러기에는 너무도 큰 금액이다.
K의 아버님이 내게 전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이것을 계기로 내가 K에게 다가가서 다시 우정을 회복하고, K에게도 봉사활동의 방법을 알려줘서 혜택을 받게 하고 싶으셨던 것은 아닐까? 내가 그렇게 했다면 바람직한 결말이겠지만, 내 성격은 그렇게까지 대범하지는 못하다. 지금까지 쌓인 서운함은 너무 크고, K 역시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기도를 하듯 이런 마음을 전했다.
“K의 아버님! 학창 시절과 다름없이 베풀어주시는 고마운 마음을 늘 간직하겠습니다. 다만 저의 좁은 마음으로는 K에게 다가갈 수 없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라고,
지금은 K의 아버님을 만나고 계실 우리 아버님! 그러실 수만 있다면 K의 아버님에 제게 해주신 것처럼 K에게 가셔서 그에게 도움을 주시기 바라며,
부모님과 K의 부모님! 저와 K의 가족이 바르게 살도록 지켜봐 주시고, 모든 일이 순리대로 마무리되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K에 대한 아무런 감정이 없다. 나도 누군가에게 K와 같은 모습으로 비쳤을 수가 있고, K 역시 다른 누군가에게 ‘내가 느낀 K의 서운함’을 느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경조금에 대한 나의 다짐을 실천할 뿐, 지난 일을 생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본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