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 법보단경(六祖法寶壇經)[18]
三. 육조단경(六祖壇經) 본문[12]
1. 행유품 제일(行由品 第一) [12]
-혜능스님의 수행한 내력-
※<오법전의 제일(悟法傳衣 第一)>-법을 깨닫고 가사를 전해 받음-
[원문]
능왈(能曰) 아역요송차(我亦要誦此)하야 결래생연(結來生緣)하야 동생불지(同生佛地)니 상인(上人①)이여 아차답대팔개여월(我此踏碓八箇餘月)이로대 미증행도당전(未曾行到堂前)이니 망상인(望上人)은 인지게전(引至偈前)하야 예배(禮拜)케하소서
동자(童子)가 인지게전(引至偈前)하야 작례(作禮)케하거늘 능왈(能曰) 능불식자(能不識字)하니 청상인위독(請上人爲讀)하소서
시유강주별가(時有江州別駕②)하니 성장명일용(姓張名日用)이라 변고성독(便高聲讀)이어늘 능문이(能聞已)하고 인자언(因自言)호대 역유일게(亦有一偈)하니 망별가위서(望別駕爲書)하소서 별가언(別駕言) 갈료(獦獠)야 여역작게(汝亦作偈)하니 기사희유(其事希有)로다
능계별가언(能啓別駕言) 욕학무상보리(欲學無上菩提)인댄 부득경어초학(不得輕於初學)이니 하하인(下下人③)도 유상상지(有上上智)요 상상인(上上人④)도 유몰의지(有沒意智)니 약경인(若輕人)이면 즉유무량무변죄(卽有無量無邊罪)니다 별가언(別駕言) 여단송게(汝但誦偈)하라 오위여서(吾爲汝書)호리라 여약득법(汝若得法)인댄 선수도오(先須度吾)니라 물망차언(勿忘此言)하라
능게왈(能偈曰)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요 명경역비대(明鏡亦非臺)라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어니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리오
서차게이(書此偈已)하니 도중총경(徒衆總驚)하야 무불차아(無不嗟訝)하야 각상위언(各相爲言)호대 기재(奇哉)라 부득이모취인(不得以貌取人)이로다 하득다시사타육신보살(何得多時使他肉身菩薩⑤)이어뇨
조(祖)가 견중인경괴(見衆人驚怪)하시고 공인손해(恐人損害)하사 수장혜찰료게언(遂將鞋擦了偈言)하사대 역미견성(亦未見性)이로다하시니 중인의식(衆人疑息)하니라
①상인(上人) : 지혜와 덕이 높은 스님. 상대를 높여 부르는 호칭.
②별가(別駕) : 당대(唐代) 4품관의 벼슬.
③하하인(下下人) : 신분이 아주 낮거나 수행한 지 얼마 안 되는 사람.
④상상인(上上人) :신분이 높거나 수행한 지 오래된 사람.
⑤육신보살(肉身菩薩) : 육신 그대로 보살지에 오른 사람. 덕이 높은 고승을 존칭한 말.
[번역]
내가[能] 말하였다[曰]. “나도[我] 또한[亦] 이것을[此] 외워[誦] 오는[來] 생의[生] 인연을[緣] 맺어[結] 함께[同] 부처님 땅에[佛地] 나기를[生] 바랍니다[要].㉠ 스님이시여[上人] 내가[我] 여기서[此] 방아를[碓] 밟은 지[踏] 팔 개월 넘었지만[八箇餘月] 아직[曾] 큰스님 방[堂] 앞에[前] 가 보지를[行到] 못했습니다[未].㉡ 스님이[上人] 게송[偈] 앞에[前] 데리고[引] 가서[至] 절을 올리게[禮拜] 해 주십시오[望].”
동자승이[童子] 게송[偈] 앞에[前] 데리고[引] 가서[至] 절을 올리게 하였다[禮拜]. 내가[能] 말했다[曰]. “제가[能] 글자를[字] 알지[識] 못하니[不], 스님이[上人] 읽어 주시기[爲讀] 바랍니다[請].”
그때[時] 성이[姓] 장이고[張] 이름은[名] 일용인[日用] 강주지방의[江州] 별가로[別駕] 있었는데[有]㉢, 곧[便] 높은 소리로[高聲] 읽었다[讀]. 내가[能] 듣기를[聞] 마치고는[已] 이어서[因] 스스로[自] 말하였다[言]. “또[亦] 한[一] 게송이[偈] 있으니[有], 별가께서[別駕] 써 주시기[爲書] 바랍니다[望].” 별가가[別駕] 말하였다[言]. “이 시골뜨기야[獦獠], 네가[汝] 또한[亦] 게송을[偈] 지었다니[作] 그[其] 일이[事] 희한하구나[希有].”㉣
내가[能] 별가를[別駕] 일깨워[啓] 말하였다[言]. “위없는[無上] 깨달음을[菩提] 배우고자[學] 한다면[欲] 처음 마음 낸 사람이라고[於初學] 가벼이 여겨서는[輕] 안 됩니다[不得]. 아주 낮은 사람에게도[下下人] 드높은 지혜가[上上智] 있을 수 있고[有], 아주 높은 사람에게도[上上人] 마음에[意] 지혜가[智] 없을 수[沒] 있습니다[有]. 만약[若] 사람을[人] 업신여기면[輕] 곧[卽] 한량없고[無量] 가없는[無邊] 허물이[罪] 있습니다[有].”㉤ 별가가[別駕] 말하였다[言]. “너는[汝] 다만[但] 게송이나[偈] 외워라[誦]. 내가[吾] 너를[汝] 위해[爲] 써 주겠다[書]. 네가[汝] 만약[若] 법을[法] 얻으면[得] 먼저[先] 반드시[須] 나를[吾] 제도해다오[度]. 이[此] 말을[言] 잊지[忘] 말라[勿].㉥”
내가[能] 게송을[偈] 말했다[曰].
“깨달음은[菩提] 본래[本] 나무가[樹] 없고[無]
밝은[明] 거울도[鏡] 또한[亦] 대가[臺] 아니네[非].
본래[本來] 한[一] 물건도[物] 없는 것인데[無]
어느[何] 곳에[處] 티끌과[塵] 먼지가[埃] 끼랴[惹].”㉦
이[此] 게송[偈] 쓰길[書] 마치니[已] 사람들이[徒衆] 모두[總] 놀라고[驚] 감탄하거나[嗟] 의아해하지[訝] 않음이[不] 없어서[無] 각기[各] 서로[相] 말하였다[爲言]. “기이하다[奇哉]. 모양으로써[以貌] 사람을[人] 판단해서는[取] 안되는구나[不得]. 어찌[何] 오랫동안[多時] 저[他] 육신보살을[肉身菩薩] 일만 시킬 수[使] 있었을까[得]?”㉧
조사께서[祖] 뭇 사람들이[衆人] 놀라고[驚] 의심함을[怪] 보시고[見] 사람들이[人] 해칠까[損害] 염려하시어[恐]㉨ 마침내[遂] 신을[鞋] 가지고[將] 게송을[偈] 문질러버리시고는[擦了] “또한[亦] 성품을[性] 보지[見] 못하였다[未]”㉩고 말씀하시니[言] 뭇 사람들이[衆人] 의심을[疑] 쉬었다[息].
[송강]
이곳은 방앗간에서 동자승의 도움으로 신수스님의 게송이 있는 오조스님의 거처까지 가서, 게송을 확인하고 노행자가 자신의 게송을 써 붙인 뒤 오조스님의 반응까지 확인한 내용이다.
여기도 역시 창작적인 부분이 너무 많다.
㉠부분은 게송이 있는 벽까지 안내를 받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얘기를 했다는 뜻이다. 바로 앞에서 동자가 외우는 신수스님의 게송이 아직 깨닫지 못한 것임을 알았다고 한 것과 배치된다. 이보다 더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부분으로, 이미 처음 왔을 때 오조스님을 친견했는데도 8개월이 지나도록 오조스님의 거처를 모른다고 했다. 오조스님을 친견하여 대화를 할 수 있는 곳은 오조스님의 거처이다. 8개월 방아를 찧었다고 해도 방앗간에만 있었다는 것은 억지이다. 우선 공양이나 생리작용을 해결하는 것은 방앗간에서 하지 않는다. 이 두가지만해도 모든 대중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장소에서 하게 되어 있다. 특히 공양간은 모든 대중이 모이기 가장 쉬운 중심부에 가깝고, 해우소(화장실)는 도량의 외곽지에 만들어 두었다. 따라서 며칠만 지나면 도량의 구조는 자연스럽게 파악할 수 있다.
㉢부분은 참 어설프다. 8개월 동안 머물렀던 도량의 구조는 전혀 모른다고 했으면서 처음 만난 사람의 출신 지역(강주) 및 벼슬(별가)과 성명(장일용)까지 밝혔다. 지금 설명하고 있는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했지만 논리적으로 전혀 맞지 않은 설명을 했다. ㉣에서 노행자를 깔보는 표현 또한 벼슬하는 신자로서는 신중하지 못한 태도이다. 이는 다음 ㉤부분의 노행자 법문을 넣기 위해 만든 장치이다. 이 부분의 내용은 훗날 혜능스님께서 법문하실 때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게송을 부탁하는 행자가 할 내용도 아니었고 또 그런 시점도 아니었다. 만약 ㉣에서처럼 별가가 노행자를 무시했다면, ㉤의 노행자 법문을 듣고 별가는 화를 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별가는 ㉥에서처럼 행자에게 자기의 제도를 부탁하는 말을 하고 있다. 『돈황본』을 보면 ㉢~㉥부분의 내용이 오직 ‘글을 아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게송을 벽에 썼다’고 되어 있다. 이때의 편집자가 후대 『덕이본』의 편집자보다는 논리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의 내용은 너무나 유명한 게송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본래 한 물건도 없다(본래무일물)’는 부분은 육조단경에서 가장 뛰어난 구절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하지만 이 게송도 『돈황본』에서는 다른 두 게송으로 되어있다. 그 게송을 살펴보자.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 명경역무대(明鏡亦無臺)
불성상청정(佛性常淸淨) 하처유진애(何處有塵埃)
깨달음은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대가 없네.
부처 성품은 항상 청정하니, 어느 곳에 티끌 먼지 있으랴.
심시보리수(心是菩提樹) 신위명경대(身爲明鏡臺)
명경본청정(明鏡本淸淨) 하처염진애(何處染塵埃)
마음은 깨달음의 나무요, 몸은 밝은 거울의 대가 되네.
밝은 거울은 본래 청정하니. 어느 곳이 티끌 먼지에 물들랴.
이 두 게송을 보면 신수스님의 게송과 작자가 같다는 느낌이 든다. 첫 번째 게송의 제3구인 ‘불성상청정’에는 ‘본래무일물’의 통쾌함이 없다. 두 번째 게송은 전체적인 흐름이 어색한데, 특히 ‘명경(明鏡)’ 부분에서 연결이 엉성하다.
『돈황본』과 『덕이본』의 이 게송 부분만을 비교하면 『덕이본』이 훨씬 선적(禪的)으로 철저하다. 그러나 오법전의(悟法傳衣) 전체를 보면 『덕이본』의 편집자들이 불필요한 욕심을 많이 부렸고, 논리적으로도 빈약하다. 『돈황본』이 하택 신해선사나 그 후학들에 의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 반면에, 『덕이본』은 남악 회양선사의 제자들에 의해 편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부분에서 ‘육신보살’ 등의 표현도 편집자의 창작이다. 이 정도를 말할 수 있는 안목이라면 모두 각자의 게송을 지었어야 했다. ㉨부분은 오조스님의 속마음에 해당되는데, 누가 그 마음을 들여다보았을까? ㉩부분은 앞의 신수스님 게송이 견성하지 못했음을 전제로 하는 표현이다. 조사스님의 말씀이 오락가락하게 만든 것은 편집자들의 큰 실수이다.
위에서 지적한 여러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게송 부분은 눈부시다. 특히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은 『육조단경』의 대표적인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여전히 ‘티끌 먼지(塵埃)’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 황매현 오조사의 천왕문에 금으로 새겨 놓은 혜능스님의 게송]
첫댓글 참으로 논리의 헤치심이 정신 바짝 들게 하십니다. 대충이 없으신 혜안을 뵈며 어떠한 마음자세로 공부에 임해야할지
힘이 주어집니다. 또한 편집자들의 열리지못한 혜안이 수 많은 사람들을 산채로 절벽에 몰아넣는 격인 듯도 합니다.
자신에게 벽이 있으면 티끌과 먼지가 낄것이며 마음이 허공이면 무엇이 끼고 말고 하겠는지.생각되어집니다. 감사합니다.
권위에 눌리지 않고 차분히 보면 누구나 볼 수 있는 허구이지요. ^^
''본래무일물 ''
오직 이 말씀을 참구합니다.
아무리 스승과 가르침을 기리기 위함이라 해도, 집착은 티끌 분분히 세상을
어지럽힐 뿐이군요. 세간 살림살이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쯧 쯧.
스승님께서 낱낱이 짚어주시지 않으셔도 환히 보고 길 찾아갈 수 있을 때까지,
살피고 살펴가겠습니다. 지심정례 합니다.
맑은 지혜를 쓸 수 있게 되면 그냥 보인답니다. ^^
육조스님의 통쾌한 한 말씀에`~
쌓인 티끌 먼지 말끔이 쓸고 털어내어 주시는 스님의 명쾌한 해석!
명확한 핵심을 바로 볼 수 있도록 짚어 주시는 가르침 감사드립니다._()()()_
뼈를 얻은 사람은 나머지 것에 연연하지 않는 답니다. ^^
본래무일물 한 구절이 빛을 발해서 다른 모든 것들을 덮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실제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을 망설이고 무엇에 끌려갈까요.
시원한 경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를 바랄뿐입니다.
본래무일물에사 통하면 육조단경을 덮어도 좋지요. ^^
本來無一物의 핵심을 흐리게 하는~
언제나 결코 쉽지 않은
너저분한 졸가리를 명쾌하게 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_()()()_
좋은 욕심이라고 할지라도 본질을 흐리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
본래 한 물건도 없기에, 티끌 먼지라 할 것도 없음을... 게송에서 여전히 티끌, 먼지를 두고 있음을 아쉽다고 지적하심을 보고 진정한 살불살조란 무엇인지 조금은 짐작해보게 됩니다. 그 무엇에도 속지 않는 자신의 안목을 갖는다는 것은 참 멋진 일임을 알겠습니다.
무조건 불신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무조건 따라만 가는 것도 대단히 위험한 일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