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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516호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
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
경산분지의 중앙에 남북 방향으로 놓여 있는 압량 구릉의 말단부에 해당되는 경산시의 동북방 영남대학교 앞 구릉(해발 50~75m)에 봉토분들이 밀집해 있다. 이들 대형분들은 가장 서쪽의 임당동 고분군, 중앙의 조영동 고분군, 동쪽의 부적리 고분군으로 나누어진다. 이 가운데 임당동 고분군은 영남대학교 앞 구릉의 주능선에서 서남으로 뻗는 지맥의 능선이 경산들과 만나는 곳에 위치한 것으로 능선의 상부를 따라 조영된 7기의 대형 봉토분이 분포하고 있는데, 이들은 단일의 원형분으로 보이는 것들도 있으나 몇 기의 무덤을 가진 각 봉토들이 연결되어 하나의 커다란 동산과 같은 형태를 취하게 된 것도 있다.임당동 고분군 가운데 4기(2,5~7호분)의 봉토분이 영남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1982년 발굴조사되었다. 조사결과 2호분은 남분과 북분으로 구성된 표형분이고, 5~7호분은 6개의 봉분이 이어져 하나의 동산과 같이 거대한 봉분으로 보이게 된 다곽식이었다. 각 단일 묘곽에 씌어진 봉분의 크기는 지름이 17~20m, 높이 4~5m 정도였다.
묘제는 암광 목곽묘가 중심으로 이 곳의 기반암인 청석암반층을 파서 묘광을 만들고 거기에 목곽을 설치한 것이다. 이것들은 단곽식도 있었으나 장방형의 주곽과 방형의 부곽을 창자형으로 배치한 주부곽식이 대부분이었다. 또 지상에 할석과 천석으로 쌓아 올린 횡구식 석실묘도 1기 조사되었다. 매장주체부의 크기는 주곽이 길이 4m, 너비 2m, 깊이 2m, 부곽은 길이 4m, 너비 4m, 길이 1.5m 정도였고 주곽에는 장대석으로 뚜껑을 하였다. 여기에서는 금동관과 관식, 금제 귀고리, 은제 허리띠, 금동제 신발,금·은제 반지 등의 화려한 장신구와 금동제 고리자루 큰칼, 은장식 철투겁창, 금동제 화살통장식 등의 무구류, 금동제와 철제의 각종 마구류, 삼두마 굽다리 접시를 비롯한 각종 토기류 등 약 4,0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이한 것은 각 무덤에는 피장자의 인골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는데, 대형의 무덤들에는 주곽과 부곽에 각각 1~3인이 순장된 것이 밝혀졌다. 출토된 유물과 묘제로 보아 발굴된 것들은 4~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삼국사기」등에 전하는 압독국(압량소국) 지배자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출토 유물이 모두 신라문화권의 양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으나, 질적인 측면에서 경주의 대형분들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압독국은 신라의 지배를 받던 소국의 형태로 이 때까지 남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사된 고분들 가운데 일부를 복원하고, 영남대학교박물관에 전시실을 마련하여 그 무덤의 구조를 알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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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임당동과 조영동 고분군의 명품나무
경산시 대동(원,투룸은 모두 진사댁으로 통하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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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부적동 고분군(慶山 夫迪洞 古墳群)
경상북도 경산시 압량면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굴식돌방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내용
부적동고분군은 경산지역의 중심고분군인 임당(林堂)지역 고분군 가운데 동쪽 편에 위치한 고분군이다. 사적 제300호로 지정된 임당동고분군, 사적 제331호로 지정된 조영동고분군에 인접해 있다. 부적동고분군 유적이 있는 구릉지대에는 부적동고분군 이외에도 서쪽으로 직선 약 300m 거리인 구릉의 제일 높은 지대에 6기의 고분이 있고, 또한 서쪽으로 직선거리 약 500m 지점의 구릉 서쪽 경사면에 약 16기의 고분이 밀집해 있다.
부적동 고분들이 위치하고 있는 지형은 낙동강의 큰 지류 중의 하나인 금호강(琴湖江) 남쪽변에 동서로 길게 뻗은 구릉지대이다. 이 지역은 남쪽을 제외한 동·북·서쪽이 금호강 연안까지 넓은 평야가 전개되어 있고 구릉 남쪽에는 영남대학교가 있다.
이 고분군 주변에는 복숭아나무·포도나무 등 과수들이 많이 심어져 있고 민가들도 많이 들어서 있다. 부적동고분군에는 모두 8기의 봉토분이 남아 있었으나 3기는 택지개발로 훼손되거나 없어졌고 지금은 5기의 대형봉토분이 남아 있다. 부적리 331번지 일대의 과수원에 5기의 대형 봉분이 군집되어 있고, 남쪽 오솔길을 건너면 봉분이 깎인 1기의 고분이 있다.
이곳에서 남으로 약 100m 지점의 구릉경사면에도 고분으로 추정되는 봉분이 여러 기 있는데, 주택단지 조성 때에 많이 파괴되었다. 고분의 규모는 지름이 7∼24m, 높이가 1.5∼5m에 이르는 대형인데, 대부분 도굴된 것으로 보인다.
택지개발로 없어진 1기의 대형분이 영남대학교박물관에 의해서, 나머지 2기와 그 주변 일대가 1995∼1997년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 의해 발굴 및 조사되었다. 발굴된 고분들 중에서 봉토가 남아 있는 것들은 모두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었다. 내부구조는 판석으로 지상에 축조한 돌방무덤이고, 봉토 내에서 머리크기의 강돌이 대량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돌무지무덤 등의 구조일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택지개발지구에서 제외되어 발굴조사되지 않은 대형봉토분 5기는 그 형태나 크기 등이 임당동고분군과 조영동고분군의 대형분들과 유사한 점으로 미루어 4∼6세기 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곳에서 채집된 토기뚜껑은 끝이 뾰족한 보주형(寶珠形)의 손잡이가 있고 뚜껑 아래 끝부분까지는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색깔은 안팎 모두 밝은 회청색인데, 바깥 면에는 자연유의 반점이 많이 남아 있다.
경질토기로서 미세한 모래알갱이를 극소량 함유한 정선된 점토를 바탕흙으로 사용하였다. 이 뚜껑은 신라·가야의 고분에서 주로 출토되는 유물이다.
부적동고분군은 행정구역상으로 각각 압량면 조영동고분군과 임당동고분군 등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일대는 삼국이 정립되기 이전 압량국(押梁國: 押督國)이라는 소국이 존재했다는 기록 등으로 미뤄볼 때 일찍부터 정치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서 당시 이 지역 세력가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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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시 압량면 부적리
헨젤 그레텔 벽화가 있는 반대편 길이
부적리고분으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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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金庾信)장군 동상
마위지는 압량면 소재지에서 하양 쪽으로 나가는 산업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소류지는 수년 전까지만 해도 약 4700평 규모였으나 경산~하양간 산업도로가 확장되면서 적잖은 면적이 이에 편입되어 매우 축소되었다.
구전에는 이 소류지가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이 군주로 재임시 압량군사훈련장의 기마훈련을 위하여 인위적으로 막았던 못이라 한다.
이 소류지는 시대만큼이나 그 명칭이 바뀌어 왔었는데,
처음 축조 당시는 마위지(馬位池)라 하였던 것을 마이지(馬耳池)로 바뀌었다가,
현재는 ‘마위지(馬爲池)’로 그 한자 표기만 바꾸어 부르고 있다. 또한 쉽게 마못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위지 ⇒ 마이지 ⇒ 마위지
옛 선인들이 제1유적지인 기마훈련장에서 말을 타고 출정하는 남편을 위해 그 아내가 출정 전 새벽에 남편이 아끼는 애마(愛馬)를 이 소류지에 몰고 나와 말의 귀를 씻어주면서 전쟁터에서 적들의 동태를 기민하게 파악하여 남편이 살아
돌아오도록 기원하였던 곳이라는 설과
또 기마 훈련장에 훈련한 말을 목욕시키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못이라는 설 등이 구전되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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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장군(金庾信 將軍)의 탄생부터
#용화향도(龍華香徒)김유신
용화향도(龍華香徒)?
진평왕 때의 화랑이던 김유신(金庾信)이
이끄는 낭도집단의 이름이다
당시의 화랑집단은 화랑 1명에 승려낭도 1명,
그리고 화랑을 따르는 700∼800명 정도의
낭도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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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金庾信)의 결심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다
#마위지(馬爲池)축조
마위지(馬爲池)의 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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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병영유적(김유신장군 화랑훈련장)이동
경산병영유적(김유신장군 화랑훈련장)
경산병영유적(慶山兵營遺蹟)
경상북도 경산시 압량면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김유신 관련 사적지. 연무장. 사적.
사적 제218호. 지정면적 4만 1,174㎡. 김유신(金庾信)이 병사들을 모아 무술과 정신을 연마시키던 연무장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압량리·내리·선화리 두룩산유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유적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중앙부에 있는 압량면·진량면의 낮은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주위에는 경산시·고산동(대구광역시 수성구)·자인면·하양읍 등이 자리잡고 있다.
첫째, 압량리 두룩산유적은 압량리의 서북쪽 구릉지대에 높이 대를 쌓은 고대식 광장이 이에 해당한다. 이 광장의 동남쪽에는 고분의 봉토처럼 흙을 쌓아올려 대를 만든 토축고대(土築高臺)가 연결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대식 광장은 대략 원형으로 생겼으며 높이가 약 7m, 지름이 약 85m 되는데, 그 지표면은 평탄한 넓은 장소로서 광장을 형성하고 있다.
고분의 봉토처럼 생긴 토축고대는 높이가 약 10m,지름이 약 11m로 그 정상 부분은 약간 평평한 상태이다. 이 유적은 인위적으로 흙을 쌓아올려 지형에 알맞게 만든 것으로 광장은 병사들이 무술을 익히고 심신을 닦는 연무장으로, 토축고대는 장군이 병사들을 훈련시킬 때 지휘하던 곳으로 추정된다.
둘째, 내리 두룩산유적은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향한 구릉의 정상 부분에 있는데, 압량리유적에서 하천이 흐르는 저지대를 건너 약 1.5㎞ 떨어져 있다. 유적의 형태는 압량리의 것과 같은 식으로 유적 서북쪽에는 광장이 마련되어 있고, 이 광장의 동남쪽에는 토축고대가 연결되어 있다.
광장은 일부가 경작지로 되어 있고 나머지 일부에는 민간의 묘(墓)가 들어서 있으나, 본래 자연적인 지형에 인공을 조금 가하여 축조된 평탄한 모양으로 지름이 약 80m 되는 둥근 광장을 나타내고 있다. 토축고대도 인공적으로 쌓아올린 고분의 봉토형으로 높이는 약 15m이며 동남부의 일부가 파괴되어 있다. 이 유적도 앞의 경우와 같이 장군과 병사가 군사훈련 및 정신수양을 하던 곳으로 추정된다.
셋째, 선화리 두룩산유적은 내리유적에서 약 3㎞ 떨어진 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유적의 형태는 앞의 두 유적과 거의 같은 모양이며 역시 광장과 고대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적의 서남쪽에는 광장이 형성되어 있고, 고대는 광장의 남북중앙 일직선상에서 북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다. 광장은 자연적인 지형에 얼마간 인공을 가하여 축조된 것으로 높이가 약 10m, 지름이 약 80m 되는 원형의 평탄한 장소이다. 현재는 소나무가 많이 있으나 후에 심은 것이며 본래는 훈련장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추정된다.
고대는 광장에서 높이 약 2m, 지름 약 12m로 흙을 쌓아올린 토축고대인데 정상부에는 민간의 묘가 있다. 역시 이 유적도 광장은 병사들이 연무하던 곳이며, 고대는 장군이 병사들의 훈련을 지휘하던 장소로 추정된다.
두룩산이라는 말은 두리산〔圓山〕으로 두리두리한 산, 즉 둥근 산의 지형에서 온 말로 고어(古語) 두리산(豆里山=圓山)에서 유래하였다고 보며, 압량리·내리·선화리의 두룩산유적은 유적의 형태에서 기인한, 즉 인공적으로 광장과 고대를 흙으로 둥글게 쌓은 연무대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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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병영유적
사적 제218호 #압량유적
김유신장군 화랑훈련장
단디 보질 않음 분명 놓치고 지나간다
자전거를 타고도 놓쳤으니.ㅎ
#압량교(1999년)
압량교를 넘으면 #대경대학교 표지판
경산종묘산업특구지역
경산시 압량면 현흥리
너무 맛있게 잘 먹었다(곱배기 6,000원)
경산시 진량읍 입성
#대구대학교,영천 이정표도 보여
경산산업단지
직진하면 대구,영천
진량해병전우회 윗길로 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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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신상리 고분군 이동
경산 신상리 고분군
경산 신상리유적(慶山新上里遺蹟)고분
경상북도 경산시 진량읍 신상리 1050번지 일원
경상북도 경산시 진량읍에 있는 철기시대 이후 집터와 돌무지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복합유적.
영남대학교박물관에 의해 경부고속도로 동대구-경주구간 확장공사에 따른 구제발굴조사의 일환으로 실시되었으며, 시굴조사결과 삼국시대 중·대형 봉토분(封土墳)이 30기 이상 분포하고, 층위(層位)를 달리하여 목관묘(木棺墓) 및 목곽묘(木槨墓), 적석목곽묘(積石木槨墓)가 수백기 이상 존재하는 유적임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위원회의 개최결과 봉토분이 확인되는 휴게소 확장부지는 최대한 보존을 원칙으로 하고, 도로가 확장되는 구간은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조사는 2003년 4월 13일부터 같은 해 11월 30일까지 실시하였으며, 삼국시대 적석목곽묘와 생활유적 일부가 조사되었다.
시굴조사(試掘調査) 결과 삼국시대 봉토분과 적석목곽묘보다 선행하는 목관묘 및 목곽묘도 분포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 고분유적들이 계속적인 성장을 거듭하여 삼국시대에 이르러 당시 경산지역을 구성하는 중요 집단으로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유적은 행정구역상 경산시 진량읍에 위치하며, 낙동강 중류의 한 지류인 금호강 유역에 자리한다. 동쪽으로 경주·포항방면의 동해안지역과 서쪽으로 대구·달성방면의 낙동강 유역을 연결하는 중간지점에 있다. 경산지역 최대유적인 임당(林堂)유적이 남서쪽 7㎞ 정도에 위치하고 있다.
신상리유적은 1986년 실시한 지표조사(地表調査)를 통해 알려졌는데, 당시 이미 경부고속도로와 경산-하양간 국도에 의해 동-서, 남-북으로 잘렸으며, 경산IC와 이와 연계된 진·출입로 및 경산휴게소 건설로 많은 파괴를 입은 상태였다. 이후 2003년 경부고속도로 확장공사에 따른 발굴조사 결과, 삼국시대 고분과 조선시대 생활유적 일부가 조사되었다.
조사는 하행선측(부산방향) 확장구간을 가지구, 상행선측(서울방향) 확장구간을 나지구로 구분하였으며, 하행선의 경우는 지형훼손이 심해 발굴조사의 편의상 3개의 소지구(小地區)(가-Ⅰ·Ⅱ·Ⅲ)로 나누었다. 가Ⅰ지구에서는 삼국시대 목곽묘 2기, 가 Ⅱ지구에서는 적석목곽묘 37기, 목곽묘 3기, 석곽묘 4기, 석실묘(石室墓) 2기, 옹관묘(甕棺墓) 1기가 조사되었다. 가Ⅲ지구에서는 대형분 1기, 목곽묘 11기, 석곽묘 및 석실묘 각 1기가 조사되었다. 나지구에서는 적석목곽묘 12기, 목곽묘 5기, 석곽묘 2기, 옹관묘 1기가 조사되었다. 이 중 20호묘는 이혈(異穴)'明'자형 주·부곽식(主·副槨式) 적석목곽묘(積石木槨墓)로 가장 대형이다. 내부에서는 토기류와 철모(鐵矛), 유자이기, 재갈, 교구(鉸具), 집게, 환두대도(環頭大刀) 및 이식(耳飾), 다면옥(多面玉) 등이 출토되었다. 봉토분들은 현재 경산휴게소 상행선 부지내에 복원되어 있다. 생활유적은 가Ⅰ지구에서 삼국시대 주거지 2기, 구(溝) 9기, 수혈(竪穴) 12기, 고상식(高床式) 건물지 1기, 주혈(柱穴) 71기, 적심유구(積心遺構) 3기 등이다.
경주지역 중심묘제인 적석목곽묘가 다수 확인되었다. 신상리유적에서 적석목곽묘가 처음 출현하는 시기는 5세기 중엽으로 출현배경은 크게 2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는 경산 임당유적에서 확산되어 채용되었을 가능성인데, 임당유적의 경우는 4세기 중엽부터 5세기 전반까지 고총(高塚)의 내부시설로 적석목곽묘를 채용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고분군을 조영한 집단들이 경주지역의 장송의례(葬送儀禮)를 직접적으로 받아들인 결과로 정리할 수 있는데, 주부곽식의 배치가 경주 사라리나 안계리 등과 매우 유사하고, 이혈명자식의 경우 임당유적과 유사하나 세부적인 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고분군은 5-6세기에 걸쳐 축조되었으며, 고분의 규모나 출토유물의 질과 양으로 보았을 때, 경산지역 최대유적인 임당유적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 일대를 다스린 읍락의 지배자들 무덤이라 판단된다. 특히 다수가 조사된 적석목곽묘는 경주지역의 중심묘제인 점에서 경주지역의 장송의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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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신상리 고분공원
경주 신상리 고분공원
#압독국 을 아시나요?
압독국(押督國)
경상북도 경산시 압량(押梁) 지역에 있던 삼국시대 초기 소국.
압량국(押梁國)이라고도 하며, 경상북도 경산지역에 있었던 고대국가이다. 102년(파사이사금 23) 사로국(斯盧國:신라)에 투항하였다가, 146년(일성이사금 13) 10월에 다시 사로국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어 주민들이 모두 사로국 남쪽으로 강제 사민(徙民)되었다.
압독국은 사로국이 진한(辰韓)연맹체의 맹주로서 주변의 다른 나라들과 병존할 때에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었으나, 사로국이 주변의 소국들을 병합시키며 세력을 확대해 나가는 과정에서 독립된 정치세력을 유지하지 못한 채 소멸되었다. 경산 압량 지역은 백제의 침입으로부터 경주를 보호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신라 중고기(中古期)에 군사적 거점에 설치하는 주(州)가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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