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8장1-36절
찬송가 325장 예수가 함께 계시니
8장의 개요
에스라 7장에서 우리는 에스라의 등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율법에 능통한 학자였던 에스라가 앞장서서 포로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는 2차 포로귀환이 이루어집니다. 그때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이 오늘 8장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1-2절입니다. “아닥사스다 왕이 왕위에 있을 때에 나와 함께 바벨론으로 올라온 족장들과 그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비느하스 자손 중에서는 게르솜이요 이다말 자손 중에서는 다니엘이요 다윗 자손 중에서는 핫두스요”. 2차 귀환자의 명단을 소개하면서 두 제사장 가문 비느하스, 이다말 가문의 후손과 왕족인 다윗의 자손을 먼저 언급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3절에서부터 14절까지 에스라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숫자가 종족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연상시키듯 종족별 족장의 수가 모두 12명입니다. 이어지는 15-20절을 살펴보면, 그들이 바벨론을 떠나 아하와 강가에서 삼일동안 머무르며 인원을 확인해보니 그들의 무리가운데는 레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15절입니다. “내가 무리를 아하와로 흐르는 강 가에 모으고 거기서 삼 일 동안 장막에 머물며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핀즉 그 중에 레위 자손이 한 사람도 없는지라” 그래서 에스라는 레위사람을 수소문해 그들도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도록 모집하면서 결국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38명의 레위인을 추가로 모집하여 귀환하게 되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21-23절에서 이제 고향땅으로 떠나기 위해 기도하는 모습과 그 기도의 내용을 보여주고 있고 24-30절에는 왕으로 부터 받은 성전 예물과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받은 성전 예물을 안전하게 보호하여 가져가기 위해 임명된 사람들의 명단이 나오고, 31-36 절에서는 결국 이스라엘로 돌아간 에스라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는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왜 레위인 귀환자가 없었는가?
오늘 본문에서 한가지 질문이 제기됩니다. 왜 처음 에스라와 함께한 귀환자 명단에는 레위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었을까? 오늘 본문은 그 이유를 직접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들이 겪어왔던 역사적 상황속에서 그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고향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혀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때가 1차 B.C 605년, 2차가 B.C 597년입니다. 지금 에스라와 함께 고향을 돌아가는 시기가 B.C.458년이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지 약 140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쉽게 얘기해보자면 그들이 바벨론에서 산 지 140년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겠습니까? 비록 그들이 노예로 끌려왔다 하더라도 140년이라는 시간은 그들이 바베론 땅에 뿌리내리고 정착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언어적, 문화적으로 이미 충분히 그 땅 사람들과 동화되었고, 그 나라에 이제 자리잡고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산 지 140년이 지난 시점이라면 그들은 이미 바벨론의 문화, 언어, 관습에 익숙해졌고, 거기서 태어난 세대들에게는 문화적으로 언어적으로 전혀 불편함이 없이 살 수 있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약 5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1차 귀환한 지 80년이 지났습니다. 80년 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약 5만 명의 사람들의 귀향 이야기를 이미 이들은 수차례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80년이 지난 시점에 한 사람의 레위인도 2차 귀환자 명단에 들어있지 않다는 것은 1차에 돌아간 레위사람들(341명) 의 정착기가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고생이 뻔한 일에 누가 자진해서 나서겠습니까? 결국 그들이 돌아가야 할 명분도, 돌아가야 할 상황이나 여건도 모두 희망적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한 사람의 레위인들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라가 나섰습니다. 17-19절 입니다. “가시뱌 지방으로 보내어 그 곳 족장 잇도에게 나아가게 하고 잇도와 그의 형제 곧 가시뱌 지방에 사는 느디님 사람들에게 할 말을 일러 주고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섬길 자를 데리고 오라 하였더니 우리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고 그들이 이스라엘의 손자 레위의 아들 말리의 자손 중에서 한 명철한 사람을 데려오고 또 세레뱌와 그의 아들들과 형제 십팔 명과 하사뱌와 므라리 자손 중 여사야와 그의 형제와 그의 아들들 이십 명을 데려오고 ” 나중에 38명의 레위인들이 추가로 합류된 것에 대해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으로 인해 가능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일에 참여할 레위인 38명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 쉽지 않았던 일이었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간섭 속에서만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현실이었습니다. 고생이 예상되는 일에는, 제사장처럼 드러나는 일이 아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고하는 일에는 아무나 나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에스라의 금식기도
이어지는 21-23절입니다. “그 때에 내가 아하와 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
왜 에스라는 고향으로 떠나기에 앞서 금식하며 기도해야 했습니까? 에스라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한 말이 있었습니다. “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22절) 라고 말한 자기의 말대로 에스라는 왕의 도움을 구하기보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 것입니다. 쉬운 것은 왕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아닥사스다 왕앞에서 한 자신의 신앙과 믿음의 고백과는 동떨어지게 왕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믿음의 사람이 갖추어야할 바른 태도는 아니라고 여겨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답지 않은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자신의 믿음과 신앙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해야 하는 에스라는 이제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의지하여 나아가기로 결정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는 금식기도를 드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에스라의 금식기도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겠다는 믿음의 고백이며 믿음의 선언이면서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의 겸비함이었습니다. 혈루증앓던 여인이 예수를 붙잡은 것처럼, 오직 하나님을 붙잡는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고 결국 응답되었습니다. 4개월간의 긴 여행동안 그 많은 사람과 성전에 바쳐질 그 많은 예물이 하나도 손상되지 않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입니다(7:9)
예수: 자원하여 이 땅에 오신 분, 하나님앞에 절박히 기도하신 분
자신에게 익숙하고 편안해진 환경을 떠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더욱이 가려는 목적지에 도착한 사람들이 고생과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는 아무도 그곳을 향해 떠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고생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신 분이 있습니다. 자신이 누리던 모든 것을 결연히 포기하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세상으로 떠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곳에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 이미 오래전부터 들려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길을 떠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포기하고 그 권세와 위치를 떠나 세상 속으로 떠나오신 분,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이셨지만 자신의 권세와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워 세상 속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신을 세상속으로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셨던 기도는 에스라의 기도처럼 간절했고 절박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되는 기도였고,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매달리는 기도였습니다.
히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리고 그 기도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셨고 담대히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 희생의 길로 걸어가셨습니다. 그 예수님때문에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자원하는 자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고생의 길이고, 드러나지 않는 일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우리가 자원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어디에선가 알려져 있지 않던 38명의 레위인들을 찾아내실 수 있습니다마는 우리의 이름도 하나님의 역사에 기여한 사람들 명단에 들어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이라면 그 일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사람의 능력으로 갈 수 있는 길이라면 그 길은 하나님의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만, 하나님의 길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 속에서만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가 걷는 길이 비록 고생의 길이라 하더라도 자원하는 순종의 길을 걷고자 한다면 그는 에스라처럼 절박하게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자원하는 순종의 길을 기도하며 걸어 가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나서는 사람이 없는 고생길 일지라도 주님이 목적하고 계획하시는 일을 위해서 기꺼이 헌신하는 우리 인생 되게 하옵소서. 오늘 우리의 삶에서 주님만을 의지하고 주님의 돌보심과 보호하심만을 의뢰하는 기도의 사람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